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22:25:00

천국/기독교

천국/그리스도교에서 넘어옴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이 문서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국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신교의 낙원에 대한 내용은 낙원/기독교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 개요2. 사후의 장소 또는 상태
2.1. 가톨릭의 입장
2.1.1. 가톨릭의 사후 상태2.1.2. 가톨릭의 종말론
2.2. 정교회의 입장
2.2.1. 정교회의 사후 상태2.2.2. 정교회의 종말론
2.3. 개신교의 입장
3. 이상적 세계 질서
3.1. 현재적 하느님의 나라와 미래적 하느님의 나라3.2. 가톨릭 정교회의 입장3.3. 개신교의 입장3.4. 종파별 신학적 견해
3.4.1. 장로회의 입장3.4.2. 감리회의 입장3.4.3. 성공회의 입장3.4.4. 루터회의 입장
4. 같이 보기

1. 개요

파일:20211207-10121766.jpg
“보라, 이제 새 하늘과 새 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아기도 없고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으리라. 백 살에 죽는 자를 젊었다 하고 백 살에 못 미친 자를 저주받았다 하리라. 그들은 을 지어 그 안에서 살고 포도밭을 가꾸어 그 열매를 먹으리라. 그들이 지어 남이 그 안에서 사는 일이 없고 그들이 가꾸어 남이 그것을 먹는 일이 없으리라. 정녕 내 백성의 수명은 나무의 수명과 같고 내게 선택받은 이들은 저희 손이 이룬 바를 즐기리라. 그들은 헛되이 수고하지 않으며 자식을 낳아 끔찍한 일을 겪지 않으리니 그들은 주님에게 복 받은 종족이며 그들의 자손들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르기도 전에 내가 대답하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가 들어 주리라. 늑대와 새끼 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처럼 여물을 먹으며 을 먹이로 삼으리라. 나의 거룩한 어디에서도 그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사야서 65장 17절~25절.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마태오 복음서 5장 8절.
"천국은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1]
마태오 복음서 13장 44절~46절.
그 뒤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나는 옥좌로부터 울려 나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그 은 지극히 귀한 보석과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과 같았습니다. 그 천사는 또 수정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을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로부터 나와 그 도성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맺고 그 나뭇잎은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이 됩니다. 이제 그 도성에는 저주받을 일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가 그 도성 안에 있고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 도성에는 이 없어서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 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요한묵시록 21장 1절 ~22장 5절 중.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국은 다음 2가지 뜻이 있다.

1.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다음 죽은 사람의 영혼이 종말에 있을 부활을 기다리며 행복과 안식을 누리는 곳
2. 현세적 개념에서,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되어 평화가 구현된 이상적 세계 질서

가톨릭 정교회에선 하느님의 나라=하늘나라=천국이며 1번, 2번 모두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용어를 조금 다르게 구분한다.

2. 사후의 장소 또는 상태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세상의 종말이 되면 예수가 재림해서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고, 재림한 예수가 이 세상의 모든 과 악을 심판한다고 믿는다. 이는 인간이 사망한 뒤 하느님의 나라에 남아서 영생을 누릴 의인들은 신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고, 하느님의 나라 밖으로 쫓겨나 영원히 고통을 받을 악인들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완전한 불행을 누리다 재림과 심판 날에 육신이 부활하여 개개인이, 아직 죽지 않은 세상의 사람들과 함께 심판받은 후의 상태가 완전히 고정된다는 것.

가톨릭의 경우에는 이렇게 죽은 의인( 대죄를 짓지 않았거나 용서받은 가톨릭 신자)들의 영혼이 부활을 기다리며 완전한 행복을 누리는 곳을 '천국', 악인들의 영혼이 부활을 기다리며 완전한 불행을 누리는 곳을 ' 지옥', 그리고 의인이긴 하지만( 대죄를 용서받았지만), (소죄를 포함하는) 죄에 대한 보속(잠벌)이 남아있는 사람들의 영혼이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면서 또 한편으로는 하느님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불완전한 행복' 을 누리는 상태를 ' 연옥' 이라고 부른다.[2] 엄밀히 말해, 가톨릭에서 말하는 천국과, 개신교에서 말하는 천국은 조금 다른 개념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경우에는 모든 신학과 교리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는 원칙에 따라 일단 '연옥'을 부인한다. 그리고 가톨릭의 사후 세계적인 '천국'에 해당되는 곳과 '지옥'에 해당되는 곳도 인정하긴 하지만 다른 용어를 사용해서 지칭한다.

2.1. 가톨릭의 입장

가톨릭은 '천국' 이라는 단어를 우선 '사후의 상태' 개념으로 이해한다. 이는 사도 시대로부터의 전승, 곧 성전에 따른 것이다. 성전이란 글로 기록되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전승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가톨릭에서는 성전을 인정하기 때문에 '천국'이라는 단어를 사후 세계, 더 정확히 말하면 사후의 상태를 지칭하는 용어로도 사용하는 것이다.

여담으로 가톨릭에는 '천국에 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교황이 되는 것'이라는 오래된 농담이 있다. 교황의 신성함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교황이란 직책은 대단히 책임이 막중하고 그 업무의 양도 많아서 일찍 죽기 쉽고, 따라서 누구보다 빨리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 실제로 근대 이후의 교황들은 대부분 과로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과 노환으로 사망했다. 다만 그와는 별개로 교황들이 단명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최근 3세기간의 교황 대부분은 70~80대에 사망했는데, 심지어 18세기에 교황은 7명이었음에도 이들 중 80 넘은 교황이 넷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18세기다.

2.1.1. 가톨릭의 사후 상태

가톨릭에서의 사후 세계를 지칭하는 '천국'은 공간적 개념+사후의 상태이다. 이것이 어떠한 상태인지에 대해서는 가톨릭 교리서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1023 하느님의 은총 사랑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들과 완전히 정화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 그들은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1요한 3,2) “얼굴과 얼굴을 마주”(1코린 13,12) 보기 때문에 영원히 하느님을 닮게 될 것이다. 사도들에게서 이어받은 권위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린다. 곧, 하느님의 보편적인 안배에 따라 모든 성인의 영혼과……다른 모든 죽은 신자들, 그리스도의 거룩한 세례를 받고 죽은 사람들로서 그들이 죽을 때 더 이상 정화할 것이 없었거나……나아가 정화해야 할 것이 과거에 있었거나 정화할 것을 지닌 채 죽었어도 죽은 후에 온전히 정화된 영혼들은……그들의 육체 안에서 부활하기 전에, 그리고 최후의 심판 전에, 그리고 우리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부터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하늘 나라, 하늘 낙원에서 거룩한 천사들의 모임에 받아들여졌으며, 받아들여지고 있고, 받아들여질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이후로 이 영혼들은 어떠한 피조물도 거치지 않고 지복 직관으로, 얼굴을 맞대고 신적 본질을 보았고, 보고 있다.

1024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하는 이 완전한 삶, 곧 성삼위와 동정 마리아와 천사들과 모든 복되신 분들과 함께 하는 생명과 사랑의 이 친교를 '천국'이라고 부른다. 천국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며, 가장 간절한 열망의 실현이고, 가장 행복한 결정적 상태이다.

1025 천국에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다. 뽑힌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살지만 그들이 그곳에서 자신들의 참된 신원과 자신들 본래의 이름을 간직하며, 간직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발견한다고 할 수 있다.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생명이 있고 하늘 나라가 있다.

102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천국을 '열어' 주셨다. 천국의 복된 사람들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결과를 완전히 차지하는 데 있으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믿고 당신의 뜻을 끝까지 충실하게 지켜 온 사람들을 하늘의 당신 영광에 참여시키신다. 천국은 그리스도와 온전히 한 몸이 된 모든 사람의 복된 공동체이다.

1027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복된 친교의 이 신비는 모든 이해와 표현을 초월한다. 성경은 이를 생명, 빛, 평화, 혼인 잔치, 하늘 나라의 포도주, 아버지의 집, 천상 예루살렘, 낙원 등 비유적인 표상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해 준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린 2,9).

1028 하느님께서는 초월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인간이 직접 볼 수 있도록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시거나 인간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실 때에만 그 참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천상 영광 안의 하느님을 뵙는 것을 교회는 '지복 직관'(至福直觀)이라고 부른다. 하느님을 뵙고, 당신의 하느님 주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과 영원한 빛의 기쁨에 참여하는 영예를 누리며……하늘 나라에서 의인들과 하느님의 벗들과 함께 불멸의 기쁨을 얻어 누리는 것이 어찌 영광과 행복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1029 지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하늘의 영광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피조물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기쁘게 계속 수행한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고 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이다”(묵시 22,5).

한편, 가톨릭에서는 '낙원'이라는 개념을 '천국'과 거의 같은 개념으로 간주한다. 개신교에서는 '낙원'과 '천국'을 엄연히 다른 개념으로 간주하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위에 인용된 가톨릭교리서에서 '천국'을 '하늘 낙원'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또한, 가톨릭대사전에서는 '낙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천국과 동의어. 폐쇄된 공원 혹은 유원지를 암시하는 고대 페르시아어 'pairidaeza'에서 유래되었으며, 히브리어 구약성서에서는 위의 의미로 3번이나 사용되었다(느헤 2:8, 코헬 2:5, 아가 4:13). 70인역 구약성서는 에덴 동산을 가리키는 말로 이 말을 사용하였다. 후기 유대 문학에서 낙원은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랍비문학에서 많이 보인다), 정신적인 것이든 축복받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더 쓰이게 되었으며, 신약성서에서도 정신적인 의미로 3번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에서 '낙원'은 루카 복음서 23:43에서 처음 나오는데,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회심한 우도(右盜)[3]에게 낙원에 대한 약속을 한다. 또한 요한묵시록 2:7에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라는 언급이 나오며, 바오로는 코린토2서 12:4에서 낙원으로 붙들려 올라간 그리스도 교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중세문학, 특히 후기에서 이에 대한 많은 고찰이 엿보인다. 근대에 있어서 낙원은 흔히 미래의 축복 상태를 암시한다.
<가톨릭 대사전>- 낙원

즉, 가톨릭에서는 낙원=사후세계=천국의 등식이 성립한다. 앞서 말했듯 이는 사도전승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사도전승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가톨릭과 개신교의 '천국' 개념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낙원'은 장소의 개념이고, '천국'은 상태의 개념이다. '천국'이라는 단어가 위의 교리서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죽어서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있기에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생명과 끝 없는 초자연적인 행복의 상태'를 가리킨다면, 그러한 상태로 존재하는 장소가 '낙원'인 것이다. 하느님이 있는 '장소'가 낙원이라면, 하느님과 함께 있는 '상태'가 천국이라는 것이므로, 거의 같은 개념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2.1.2. 가톨릭의 종말론

그러나 가톨릭에서도 마찬가지로 3. 항목의 '이상적 세계 질서'로써의 '하느님의 나라'를 믿고 있으며, 단지 그것을 '천국'이라는 말보다는 '하느님의 나라', '새 하늘 새 땅'으로 더 자주 표현할 뿐이다.

가톨릭 교리서에는 첫째로 '미래적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이를 보면 가톨릭은 이상세계로서의 하느님의 나라 또한 믿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38 최후의 심판에 앞서 “의로운 이들이나 불의한 자들이나”(사도 24,15) 죽은 모든 이가 부활할 것이다.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8-29).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31-33.46).

1039 진리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각 사람이 하느님과 맺은 관계의 진상이 결정적으로 밝혀질 것이다. 최후의 심판 때에 각 사람이 지상 생활 동안 선을 행하였거나 이를 소홀히 한 일의 궁극적 결과까지도 드러날 것이다. 악인들이 행하는 모든 악이 낱낱이 기록되는데,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잠잠히 아니 오시니"(시편 50(49),3)……그분께서는 왼쪽에 있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위해 내 보잘것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세상에 있게 했다. 그들의 머리인 나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지상에서 내 지체들은 고생하며 굶주리고 있었다. 만일 너희들이 내 지체들에게 베풀었더라면 너희가 준 것이 머리에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보잘것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세상에 둔 것은, 너희들의 선행을 나의 보물 창고로 가져올 심부름꾼으로 그들을 세운 것이었다. 그런데 너희는 그들 손에 아무것도 맡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앞에서 아무것도 찾을 것이 없다."

1040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아버지만이 그 시간 날짜를 알고 계시며, 그분만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결정하신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 전체에 대한 당신의 결정적인 말씀을 선포하실 것이다. 우리는 창조 업적의 궁극적 의미와 구원 경륜 전체를 이해하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을 그 궁극적 목적으로 이끄시는 당신 섭리의 놀라운 길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최후의 심판은 사람들이 저지른 모든 불의에 대하여 하느님의 정의 승리한다는 사실을 드러낼 것이며, 당신의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1041 최후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은, “은혜로운 때에, 구원의 날에”(2코린 6,2) 회개하라고 하느님께서 아직도 사람들에게 하시는 호소이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거룩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촉구하며, “당신의 성도들 가운데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이들 가운데에서 칭송을 받으실”(2테살 1,10) 주님의 재림에 대한 “복된 희망”(티토 2,13)을 알리는 것이다.

1042 종말에는 하느님 나라가 완전하게 도래할 것이다. 최후의 심판 후에 육체와 영혼이 영광스럽게 된 의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이며 우주 자체도 새롭게 될 것이다. 온 교회는 "비로소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인간과 밀접히 결합되어 인간을 통하여 그 목적에 이르는 온 세상도 인류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될 것이다."

1043 인류와 세상을 변화시킬 이 신비로운 새로움을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이라고 부른다. 이는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에페 1,10) 하느님 계획의 결정적 실현이 될 것이다.

1044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새롭게 된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사람들 가운데 거처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4).

1045 인간에게 이 완성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 원하신 인류 일치의 궁극적 실현이 될 것이며, 순례 중인 교회는 바로 이 일치의 "성사"이다. 그리스도와 결합된 사람들은 구원된 사람들의 공동체,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묵시 21,2),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묵시 21,9)가 될 것이다. 이 공동체는, 지상의 인류 공동체를 파괴하거나 상처를 입히는 죄와 더러움과 이기주의로 생겨나는 상처를 더 이상 입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선택된 사람들에게 당신을 무궁히 드러내 주실 지복 직관은 행복과 평화와 상호 친교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될 것이다.

1046 우주와 관련하여 계시는 물질세계와 인간 사이의 깊은 공동 운명을 이야기한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19-23).

1047 그러므로 가시적인 우주도 역시 변화되고, "세상 자체도 그 최초의 상태로 복원되어 아무 장애 없이 의인들에게 봉사하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들이 누릴 영광에 참여하게 되어 있다.

1048 "우리는 땅과 인류가 완성되는 때를 모르며, 우주 변혁의 방법도 알지 못한다. 죄로 이지러진 이 세상의 모습은 반드시 사라진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정의가 깃드는 새로운 집과 새로운 땅을 마련하시리라는 가르침을 우리는 받고 있다. 그 행복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평화의 모든 열망을 채우고 또 넘칠 것이다."

1049 "그러나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가 이 땅을 가꾸려는 관심을 약화시켜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러한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 땅에는 이미 새로운 세기의 어떤 밑그림을 제시하여 줄 수 있는 저 새로운 인류 가족의 몸이 자라고 있다. 따라서 현세 진보는 그리스도 왕국의 발전과 신중하게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 진보가 인간 사회의 더 나은 개선에 이바지할 수 있는 그만큼, 하느님 나라에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다."

1050 "인간의 존엄과 형제적 친교와 자유의 가치들, 곧 우리 본성과 노력의 훌륭한 열매인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주님의 성령 안에서 주님의 명령에 따라 지상에 널리 전파한 다음, 그리스도께서 성부께 보편되고 영원한 나라, '진리와 생명의 나라,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를 돌려 드릴 것이다.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통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1코린 15,28) 것이다. 우리의 실체적이고 참된 생명은 성부께서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모든 이에게 샘물처럼 부어 주시는 하늘의 선물입니다. 그분의 자비로써 우리 인간들에게 참으로 영원한 생명의 선물이 약속되었습니다.

한편 '현재적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은 교리서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567 하늘 나라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상에서 개시되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활동과 현존 안에서 사람들에게 빛나기 시작한다." 교회는 이 나라의 싹이며 시작이다. 그 열쇠는 베드로에게 맡겨졌다.

또한, 가톨릭 전례사전에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나라'라는 용어는 하느님이 왕으로 인식되고 모든 것이 그분께 굴복하는 상태를 뜻한다. 하느님 나라는 하늘나라와 같은 말이다. 하느님 나라는 요한 세례자가 선포하였고(가해 대림 시기 제2주일 - 복음) 예수께서 시작하셨으며(사순 시기 제2주간 수요일 - 복음) 교회 안에서 계속되고(연중 시기 제14주간 수요일 - 복음과 가해 연중 시기 제21주일 - 복음) 재림 때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결정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다해 대림 시기 제1주일 - 복음).

하느님 나라의 구성원들은 하느님의 자녀이며 이 세상에서도 미래 세계에서 완전히 성취될 영원한 생명을 맛본다(나해 사순 시기 제4주일 - 복음).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명백히 언급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나라, 진리와 생명의 나라, 성성과 은총의 나라,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를 다스리신다(감사송). 지상에서 나라는 불완전하지만 천상에서는 완전하다.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에 따라 살면 그분 나라의 기쁨에로 나아갈 것이다( 영성체 후 기도).

또한 가톨릭 용어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하느님 나라란 하늘 나라, 즉 천국을 말한다. 이는 예수께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신 데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여기의 하늘 나라란 하느님이 사람의 심성과 세상 만사의 주님으로 군림하시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기에 세상 만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며, 세상 만사가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날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다. 하느님의 백성이란 원래는 이스라엘 민족을 일컬었으나, 지금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를 말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세례로써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법도를 지키고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 신분을 누리면, 이는 하느님의 백성인 것이다"(마르 14,24; 사도 3,25; 로마 1,7).
<가톨릭 용어사전>- 하느님 나라와 백성
성서에서의 천국은 물질적인 천체, 하느님의 거처, 천국에 사는 자의 상태를 나타낸다. 교리적으로는 완전한 초자연적 행복이 있는 곳, 혹은 그 상태를 말한다. 천국의 행복은 지복 직관과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어 있다. 세상의 종말과 육신의 부활이 있을 때까지는 그리스도와 성모님 이외에는 영혼만 들어갈 수 있다. 천국은 영원하기에 결국 천국이란 최후의 심판 뒤에는 부활한 영혼과 육신이 들어가는 영원한 행복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마태 25,46). 그런데 우리가 흔히 쓰는 천당(天堂)이란 천국의 옛말이다.
<가톨릭 용어사전>- 천국

즉 가톨릭에서는 '하느님의 나라=하늘나라=천국'이다. 아래에서 얘기하는 '현재적 하느님의 나라'와 '미래적 하느님의 나라' 개념이 본래부터 가톨릭에선 사후세계를 포함하여 직관적이고 포괄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

다른 교파와의 차이점을 찾자면 가톨릭에서는 '그 열쇠는 베드로에게 맡겨졌다'는 언급을 통해 교황의 권한을 인정하지만 정교회나 개신교에선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톨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세운 지구상에 유일무이한 참교회인 가톨릭 교회를 지상에서의 '하느님의 나라' 그 시작의 국가-공동체로 여기고, 그것을 천주교회 바깥까지 선포하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할 의무가 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완전하며(현재적 하느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완전하게 이루어질(미래적 하느님의 나라)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진리와 생명과 은총과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로 이해하고 있다.

2.2. 정교회의 입장

가톨릭과 대동소이하다. 차이점은 천국에도 여러 층위가 있으며 (요한 14:2) 그곳의 가장 낮은 단계가 낙원이라고 여기는 것. 낙원은 아담 하와가 쫓겨난 이후 땅과 분리되었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연 뒤 (루가 23:43) 회개한 도둑이 가장 먼저 들어갔다고 한다.

2.2.1. 정교회의 사후 상태

정교회 교리문답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의 행적에 따라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신앙의 신조 제 11조
8. 모두가 부활할 때까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어떤 상태에 있게 되는가?
공심판의 시기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 상태에 있게 된다. 의로운 영혼들은 빛에 있게 되어 영원한 선한 것들을 미리 맛보며 쉬게 되고 불의한 영혼들은 그와는 반대인 상태에 놓이게 되어 영원한 고통을 미리 맛보게 되고 하느님과 멀리 떨어진 상태에 놓이게 된다.

9. 왜 죽은 자들의 영혼들에게 죽은 즉시 완전한 행복과 벌을 주지 않는 것인가?
왜냐하면 완전한 심판은 육신의 부활이 있고 난 후에 각 사람들의 행적에 따라 최후의 심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로는 디모테오 2서 4, 8절과 고린토 2서 5, 10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는 날에는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나서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못한 일은 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0. 죽은 이들의 영혼들이 죽음을 당한 후 중간 상태에서 선함과 고통을 맛보게 된다는데 성서 어디에서 그러한 것을 찾아볼 수가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와 라자로가 죽은 후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행복을 느끼고 있고 부자는 뜨거운 불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루가의 복음서 16, 19-31)

정교회와 가톨릭의 차이점은, 가톨릭에서는 의로운 영혼들이 '완전한 행복'(지복직관)에 도달한다고 믿지만 정교회에서는 '미리 맛보며'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여러 층위인 천국에서 최종장소가 아닌 중간 상태에 있으며, 아직 완전한 행복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2.2.2. 정교회의 종말론

우선 정교회는 교리문답에서 다음과 같은 신학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둘째 청원 :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1.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것인가?
사도 바울로가 말하듯이 교회에서 존재하는 은총의 나라인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인 것입니다."(로마 14:17)

2. 그러면 그 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는가?
은밀히 내부에 와 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가 17:20-21)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고 말하면서 모든 세상에 교회가 퍼지기를 기원하고 공번되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3.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는 청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아 볼 수가 있는가?
이 청원에서 우리는 그의 영광스러운 나라에 그리스도인들을 데려가기 위하여 세상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생각할 수가 있다. 이렇게 말로 청원하면서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하기 위한 바람을 표현하는 것이며(필립비 1:23) 그의 영광스러운 나라를 맞이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또한 이 청원은 악마가 아닌 주님의 나라에 동참하고자 하는 우리의 바람을 표현한 것이다.

위와 같이, 정교회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용어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정의한다. 이는 '현재적 하느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정교회에서도 종말론적 개념, 즉 '미래적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신학적 개념을 인정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신앙의 신조 제 11조

6. 세상에 종말이 올 것인가?
물론이다. 이 세상에는 종말이 올 것이고 영원한 세상으로 변화될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로마서 8, 21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2서 3, 13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어 있습니다."

7. 세상은 어떻게 변화되는가?
로서 변화된다. 베드로 2서 3, 7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실 하늘과 땅은 지금도 하느님의 같은 말씀에 의해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하느님을 배반하는 자들이 멸망당할 심판의 날까지만 보존되었다가 불에 타 버리고 말 것입니다."

또한 한국 정교회 교리소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f) 그리스도의 교회
성령의 구원하고 신화시키는 은총이 작용하는 곳은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교회는 동시에 성삼위와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을 가리키는 형상이다. 교회의 완전한 모습을 위해 이런 측면들이 모두 다 필요하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세운 구원의 위대한 성사이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이고,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이다. 교회의 일치성은 분열과 이단에 의해 영향받지 않는다. 교회의 거룩성은 죄에 의해 침해되지 않는다. 교회의 보편성과 진리는 편파성과 오류에 의해 손상되지 않는다. 사도들 위에 세워진 교회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결코 실패함이 없이 '진리의 기둥'으로서 사도적 사명과 직무를 계속해 나간다.
정교의 종말론

교회와 신비의 성사적 삶을 통해 역사하는 하느님의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계획이 완성되도록 이끈다. 세상에서 역사하는 악에 대한 마지막 전투는 주님의 재림 바로 이전에 일어날 것이다. 그동안은 세상에 있는 악과 어둠의 세력에 대한 투쟁이 지속되며, 교회에는 약간의 승리가 있고 성도들에게는 약간의 좌절이 있게 된다. 이것이 정상적인 교회의 삶이며,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이면서 그러나 아직 완전히 그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정교의 종말론에 관해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단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곧, '부분적'이거나 '실현된' 종말론인 '부분적 심판'이 그 첫 단계이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곧 이 세상의 끝날에 이루어질 '마지막 심판'이 그 둘째 단계이다.

a) 부분적 심판 – 우리들 죽음의 시간
우리가 지금도 겪고 있는, 첫 사람의 죄로 말미암은 육체적 죽음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특별히 그리스도와 그 분 안에 있는 영생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일종의 재앙으로서 부정적으로.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창조주를 만나도록 이끌어 주는 성숙과정의 끝으로서 긍정적으로. 그리스도는 '마지막 적'인 죽음의 힘을 분쇄하셨다.(고린토 1서 18:26)
그 이름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은 영적 또는 영원한(종말론적) 죽음이 동반되지 않는 한 이런 육체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분적인 심판은 우리의 육체적 죽음 이후에 즉시 이루어지며, 이로 인해 우리는 (의인들에게 주어지는) 부분적 축복이나 (의롭지 못한 이들에 임하는) 부분적 고통의 중간 상태에 놓이게 된다.
'연옥'에 대한 서방교회의 믿음을 거부하는 한편, 정교회는 중간 상태 또는 단계에서 어떤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투쟁하고 승리한 교회는 여전히 하나이며, 이는 우리의 기도와 거룩한(또는 죄많은) 삶으로써 여전히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까닭이다. 또한 물론 자선을 행하는 사람이 누군가의 구원을 (물질로써) '산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죽은 이를 대신해서 행하는 자선이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b) 보편적 심판 – 그리스도의 재림
초대교회는 '주님의 날' 곧,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고대하며 살았다. 나중에 교회는 그 시간이 오로지 하느님에게만 알려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몇몇 징조들이 알려졌다.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될 것이다.(마태오 24:14; 루가 18:8; 요한 10:16)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것이다.(로마 11:25-26; 호세아 3:5 참조)엘리야 또는 에녹마저 되돌아올 것이다.(마르코 9:11)많은 거짓 예언자들을 거느리고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다.(요한 1서 2:10; 데살로니카 2서 2:3; 마태오 24:5)물리적 현상들, 대격변, 전쟁과 고통스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마태오 24:6; 마르코 13:26; 루가 21:25) 그리고,세상이 불로 파괴될 것이다.(엑피로시스 ekpyrosis ; 베드로 2서 3:7)
이 모든 징조들은 때가 되면 나타날 것이며, 이런 일이 있지 않고는 마지막 때가 오지 않을 것이다.
죽은 이들의 부활은 주님의 재림 때에 일어날 기적이다. 신앙의 신조에 따르면, (우리는) '죽은 이들의 부활을 기다린다' 이 부활은 새로운 창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육체적인 몸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처럼 영화된 존재로서 회복될 것이다.
마지막 심판은 모든 이들의 부활에 뒤따라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생명의 부활로 살아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심판과 단죄의 부활로 일어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행위, 곧 사랑의 행위나 사악한 행위의 토대 위에서 심판자가 되실 것이다.
세상의 끝날은 선과 악 사이의 영원한 분리로 마쳐질 것이고, 하늘나라의 지복,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한 삶이 주어지는 이들과 반대로 영원한 지옥의 불에 처해져 하느님과 그 분 안에 있는 참된 삶을 거역하고 악마와 그 졸도들이 만들어낸 거짓된 삶을 살아온 것에 대한 끝없는 양심의 회한에 사로잡힐 이들 사이의 분리로 마감될 것이다.

위의 '가톨릭의 종말론' 항목을 읽어보았으면 알겠지만, 연옥을 부정하거나 교황수위권을 비롯해 '어느 곳이, 어디까지가 그리스도가 직접 세운 진짜 교회인가?' 하는 세세한 차이 이외에 종말론 자체는 가톨릭과 완전히 동일하다. 결국 그리스도교의 세 종파 모두 '하느님의 나라'의 개념적 정의를 예수로부터 시작되고 진행중이며 예수의 재림과 종말로써 완성될, 현재성과 미래성을 함께 지닌 나라로 이해한다는 것. 개신교는 그 용례의 범위를 내세를 제외한 현세로만 국한시켰을 뿐이다.

2.3. 개신교의 입장

개신교의 경우, 자세한 내용은 낙원/기독교 항목 참조.

3. 이상적 세계 질서

성경에서 말하는 또다른 천국의 개념. 동의어는 아래 서술했듯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속성 중 하나가 완벽한 질서이고, 그 질서를 벗어날 때 죄와 무질서가 생겨나므로, 천국은 하느님의 완벽한 질서로 다스려지는 곳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의 공생활부터 하느님의 다스림이 시작되어, 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 예수의 재림, 전 인류의 부활, 최후의 심판을 통해 전 우주에 걸쳐 그것이 실현되고, 공평하고 정의로운 새 세상이 열린다고 믿는다. 이렇게 하느님의 다스림이 실현되는 이상적 세계질서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 그리스어로 '바실레이아 투 쎄우' 이다.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며 살게 되는데, 성경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천국은 모든 사람들이 항상 하느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이 세상에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사랑하며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곳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땅의 것들은 천국에 있는 것들에 비하면 소꿉놀이 수준도 되지 않고, 그런 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성경의 견해이다.[4]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하느님의 나라를 이상적 세계질서로 내세운다.

이렇게 하느님의 다스림이 완벽하게 실현되어, 하느님의 공평과 정의가 구현된 이상적 세계가 바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의 나라다.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마르코 복음서 루카 복음서에서 사용되었다. 그런데 같은 공관복음서라도 마태오 복음서는 예외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모두 '하늘 나라' 또는 '천국', 원문에는 '바실레이아 투 우라논'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유대 전통에서 하느님을 '하늘'로 지칭했기 때문이다. 즉 어원적 의미를 놓고 보면 '천국'과 '하느님의 나라'는 완전한 동의어.

3.1. 현재적 하느님의 나라와 미래적 하느님의 나라

신약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발언들을 보도록 하자. 우선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다.

위에서 예수의 발언을 보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또한 그밖에 다른 표현을 사용하는 구절들로써는

등이 있다.

종합해 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에는 사후세계 외에도 '지금 여기 이 땅에서 구현되는 중인 하느님의 통치'로서의 개념, 다시 말해 '현재적 하느님의 나라'가 있는 동시에, 또한 '미래에 완성될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의 통치가 전 우주에 걸쳐 구현되어 성취될 이상적 세계질서'로서의 개념, 즉 '미래적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분명히 존재하고 현재 이 세상에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며, 예수의 재림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오는', 이 세상에 '구현되는'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기에 타 종교처럼 죽은 다음에 들어가는 사후세계의 개념만으로는 전부 설명되지 않는다 할 수 있다.

3.2. 가톨릭 정교회의 입장

가톨릭 정교회는 상술한 천국=하늘나라=하느님의 나라라는 관념을 보편교회 시절부터 유지했다. 위에서 설명된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지상 세계'와 2. 항목의 '사후상태'를 한꺼번에 묶어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개신교와의 중요한 차이점은, 그 '이상적인 세계 질서'가 적용되기 시작하는 하나의 실제적인 '세계'가 인간의 마음속에만 있는 어떤 순수하게 관념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생전에 십자가에 못박히기 직전까지 손수 모으고 부활 이후 12사도를 통해 직접 이끌도록 지시한, 쇄신된 참 이스라엘이 2000년 간 이어져 온 하나뿐인 그리스도의 몸(에페 1,23)이자 그리스도 자신, 자체(사도 9,4-5, 1코린 1,13 등)인, 세상 속에서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져 온 교회라고 여기는 것.

똑같은 하늘나라라 해도 죽은 영혼들이 가는 내세가 이미 완전한 행복이 존재하는 곳이기에, 아직 현재진행형인 현세와는 차이가 있어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현세 또한, 당장이라도 그리스도가 재림하고 (마르 14,35-37) 종말과 부활과 심판을 통해 오래 전 죽었던 의인들과 함께하는 완전한 하느님의 나라가 되는 건 이미 확정된 사실이기 때문. 선한 영혼들이 죽은 뒤에야 갈 수 있는 완전하거나 그에 못지않게 행복한 천국을, 예수의 말씀이나 행적 존재에 대한 친교를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노력하며 교회라는 가시적인 공동체가 의로움의 씨앗을 뿌려가는 지상 세계에서의 최종적인 지향점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아래는 신약성서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의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의 인용이다. 굵은 글씨는 원문 내의 강조.
역사상 예수가 과연 교회를 세웠더냐는 물음이 비평 신학에서 세차게 일어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물론 점차 뚜렷이 인식되고 있거니와, 이것은 문제 제기 자체에 잘못이 있습니다. 예수는 애당초 교회를 세울 수도 없었으니, 오래 전부터 교회가, 사실인즉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했습니다.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며 이스라엘을 모아 하느님 백성을 삼고자 했습니다. ...
...마태오는 유대인들을 가리켜 "나라의 아들들" 이라고 일컬을 수 있었다.(마태 8,12; 13,38). 마태오에게는 그러니까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들이 하느님 나라와 확고하게 관련되어 있다. 마태오는 나아가 하느님 나라가 이스라엘에게서 앗기어 어떤 다른 백성에게 주어진다는 표현까지도 쓸 수 있었다.(마태 21,43). 이 표현에서 눈에 띄는 것은 하느님 다스림이 먼저 이스라엘과, 그리고 다음에 한 다른 백성(단수!)과 명백히 연결지어져 있다는 점이다. 하느님 통치는 그러니까 분명히 언제나 하나인 백성, 하나인 하느님 백성을 전제한다. 하나인 하느님 백성 안에서 하느님 다스림이 펼쳐질 수 있고 빛날 수 있다. 하느님 나라란 개인으로서 세상에 산재하여 하느님을 믿는 인간들의 영혼 안에 내재하는 보편적 실재라고밖에는 생각할 줄 모르는 그런 신학적 개인주의의 안경을 쓰고서 신약성서의 본문들을 읽어서는 안된다.

구약성서 신학의 결정적 전통 노선으로서 일단 기본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은, 하느님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백성에서 유일한 한 백성을 찾아내어 이 하나인 백성을 구원의 징표로 삼고자 하신다는 데 있다. 이로써 여느 백성들이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여느 백성들은 실상 하느님 백성이 백성들 한복판의 징표로서 빛을 발할 때(특히 이사 2,1-4 참조) 하느님 백성에게서 배우게 된다. 아니, 이스라엘로 몰려들어 이스라엘 안에서 이스라엘의 매개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 모든 것은 그러나 이스라엘이 참으로 구원의 징표로서 인식될 수 있을 때라야, 하느님의 구원에 의하여 이 백성이 뚜렷이 실감나게, 과연 눈에 띄게 달라졌을 때라야 이루어질 수 있다.

예수는 모여야 할 하느님 백성을 순전히 영적인, 순전히 종교적인 공동체 ― "마음들의 결사"societas in cordibus ― 로 생각지 않았다. 그런 주장들이 은근히든 터놓고든 거듭 새삼 나타나고는 하지만, 이런 것을 예수의 의도라고 하는 것은 어느 모로나 옳지 않다. 예수가 자기를 따르라고 외친 것은 무슨 보이지 않는 추종이 아니다. 예수가 죄인들과 더불어 먹은 것은 보이지 않은 음식이 아니요, 예수가 병자들을 낫게 해 주신 것은 보이지 않는 치유가 아니다. 더구나 십자가에서 피를 흘린 예수의 죽음이 어찌 보이지 않는 사건이랴.

예수의 집결운동은 매우 구체적이며 가시적이다. 예수가 이 운동에다가 무슨 윤곽이 확정된, 제도적 특징을 갖춘 형태를 부여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보이지 않는 공동체"와 아무 상관도 없다. 오히려 이 사실 역시 예수의 관심사는 과연 이스라엘이라는 사실과 분명히 직결되어 있을 따름이다. 이스라엘이야말로 하느님 앞의 공동체로서 (병들고 찢긴 공동체일지언정)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다짐해 두자: 하느님은 세상의 수많은 백성 가운데서 유일한 한 백성을 찾아내어, 바로 이 백성을 구원의 가시적 징표로 삼고자 하신다. 성서의 신학에 따르면 그러니까 하느님은 원칙적으로 온 세상을 포괄해야 할 당신 세말 통치를 아주 작은 데서부터 시작하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펼쳐 나가신다: 한 가족에게서(성서적으로 말하자면: 아브라함에게서), 한 씨족에게서, 한 부족에게서, 한 작은 민족에게서, 오로지 이 하느님의 교육방식에 힘입어서만, 하느님 다스림은 세상에 대하여 강제가 아닌 자유에의 부름을 의미한다. 그것은 먼저 부름받은 사람들의 본보기에 따르라는 한 부름, 아니 그야말로 한 홀림이다.
...공관 복음서의 전승을 훑어봄으로써 뚜렷이 밝혀졌다고 하겠거니와, 예수의 관심은 두드러지게 공동체를 겨냥한다. 물론 예수는 개인을 향하여 말하며 예수 곁에서 개인은 자유로이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자기 결단을 거듭 새삼 숙고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의 관심은 수많은 개인의 총계가 아니라 이스라엘에 있다.

하느님 백성은 이미 지나간 천 년이 넘는 역사가 있었고 보면, 그것은 수립 또는 창설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집결되고 재건될 수 있을 따름이었다. 바로 이것이 예수가 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신약성서학이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의 의도를 밝히려는 데서 하느님 백성의 모임이라는 개념이 점점 더 천착되면서 그 세말론적 성격이 첨예하게 부각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중요한 관심사인즉 어떤 임의의 집결운동과 각성운동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세말 모임이다. 예수 설교의 중심 내용인즉 바야흐로 예수 자신의 등장과 더불어 때가 성취되고 있다는 바로 그것이다. 세말을 위한 옛 약속이 현실이 되고 있다. 하느님 나라가 돌입하고 있다. 이 세말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제시된 구원을 붙들어야 하고 회개해야 하며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모여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다수가 이 부름을 회피하자 예수는 전보다 더 집중적으로 제자들에게 힘을 쏟는다. 그러나 예수에게 제자단이란 이스라엘의 거룩한 남은 자들이나 이스라엘 내부의 무슨 특수 공동체가 아니며, 더구나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존재는 더욱 아니다. 제자단은 오히려 바야흐로 아직은 전체적으로 모일 수 없는 온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존재이자, 동시에 언젠가는 충만한 숫자로 모여 이루어져야 할 세말 이스라엘을 예표하는 존재다. 다시 말해서 실상 예수는 열두 제자를 설정함으로써 처음부터 예언자적 표징으로 제기했던 온 이스라엘에 대한 요구를 이스라엘의 권내에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이처럼 이스라엘에 완전히 집중하는 예수의 관심은 최후의 만찬 때 절정에 이르는데, 그렇다고 해서 구원의 보편주의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이방인들의 순례라는 표상이 입증하듯이, 예수는 이스라엘의 구실을 이사야 전통의 보편적 지평에서 바라본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민을 위한 구원의 보편적 징표로서 간선되었다. 그 마지막 모습의 하느님 나라란 따라서 예수가 볼 때에는 단연 현재의 이스라엘을 넘어서는 보편적 현상이다. 그러나 바로 그래서 하느님 통치가 일거에 전세계적으로 관철된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 다스림은 구름에서 돌출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매개로 전달된다. 한 구체적 백성인 이스라엘에게서 빛을 발하고 그래서 그 본질이 세상 가운데서 계시되는 그런 형태로 실현된다. 하느님 나라는 그러니까 무슨 정처없이 떠다니는 것이 아니고, 한 구체적 백성인 하느님 백성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들에 의하여 ― 그것도 사회적 연계관계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사회적 차원을 표출할 수 있는 인간들에 의하여 ―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대체 어떻게 하느님 다스림이 지상에 도래할 수가 있으랴.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의 통치권에 의하여 장악되는 바로 그만큼 ― 그 실존의 모든 차원에서 ― 달라지리라. 그렇다고 해서 신정국가가 이루어진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러나 예수가 제자단으로 모은 사람들처럼 형제 · 자매들의 가정이 되리라.

예수의 제자단 안에서 또 그것을 넘어서 세말 이스라엘의 출발로 나타나는 것은 단순히 이상 사회, "마음들의 결사"societas in cordibus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예수의 뜻에 따라 여느 사회에서와는 다른 사회관계들이 다스린다: 보복이 다시는 없으며, 지배구조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이미 그것은 매우 현실적인 사회적 실재에 관한 일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예수의 윤리는 엄밀히 바로 이런 의미에서 쇄신된 세말 하느님 백성을 겨냥한다. 그것은 고립된 개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개인이라는 처지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적 차원이 표출되고 생활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의 윤리는 또 그렇다고 세상 전체를 상대로 하는 것도 아니다. 세상 전체에 새로운 사회질서와 생활질서를 요구하자면 폭력으로 강제할 수밖에 없겠고,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다스림의 가장 깊은 본질에 역행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은 길은 하나뿐, 하느님이 세상 가운데의 어느 한 곳에서 새로운 일을 이루기 시작하시는 것이다: 자기 백성 안에서 ― 그리고 이 백성이 완고한 태도에 머물러 있을 때는 더 작은 무리 안에서, 곧 예수가 둘레에 모으는 제자들의 새 가정 안에서.
이미 본 대로, 예수 자신은 이 점에서 예언자들의 동기가 현저히 복합된 사상에 따라 만민 선교는 우정 안중에 두지 않는다. 이스라엘을 모으는 일에만 전념하는 것이다. 또 역시 이미 본 대로, 이 전념이 보편주의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만민순례라는 구약성서의 범주 안에서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가 이스라엘 안으로 돌입하는 그 순간, 민족들이 스스로 하느님 통치의 황홀한 영광에 참여하러 오게 된다는 것을 당연한 일로 전제한다. 예수의 과업은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내다보며 이스라엘을 결집시키고 이 결집을 통하여 세상의 일정한 장소에서 이 나라가 빛을 발하게 하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예수가 이스라엘에 전력을 집중한 것은 필경 보편주의가 모자라서도 아니요, 지평이 한정되어서도 아니요, 세상을 등져서도 아니며, 오히려 반대로 하느님의 다스림 그 자체가 모든 민족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에누리없이 전제했기 때문이다. 뭉크가 옳게 말했듯이, "예수가 이스라엘에게로 온 까닭인즉 예수의 사명이 온 세상에 해당하는 바로 그때문이다".

...그리스도교적 세계 개혁에도 위에서 "선교"라는 주제에 대하여 말한 바가 그대로 적중하기는 매양 마찬가지다. 하느님 백성 안에 그 뒷받침이 없다면 그것은 신약성서에 부합하지 못한다. 하느님 백성 자신이 달라질 때라야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 자기네 자신의 집단 안에서 자유의 광채가 발산하는 바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남들을 해방하겠다고 할 수는 없다. 자기자신은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사회를 진실로 이룩하는 그런 공동체 안에 살지 못하고 있는 주제에 남들에게 사회적 회개를 설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에페소서가 여기서 말하자는 것은 이것이다. 속박하는 세력들이 지배하는 사회인 이 이교도 세계 한가운데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자유의 공간이 열려 있다. 그리스도는 사회의 모든 권세들 위에서 다스리신다. 그러나 당신 몸인 교회 없이 다스릴 수는 없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원칙적으로 열려 있는 자유와 화해가 사회적으로 삶에 구현되어야 하는 공간이 교회다.

여기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거니와 에페소서의 필자에게는 이제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활동이란 현재의 과업으로서의 구실이 전혀 없어졌다. 현재의 교회는 선교의 결과이지, 이미 선교의 수행자가 아니다. 반면에 교회의 내적 성장이야말로 단연 중요한 의미를 띤다.

...하느님 백성은 선교활동을 벌이지 않아도 자신이 발산하는 매력에 의하여 사회 안으로 성장해 들어간다. 그렇다면 요컨대 교회는 세상 안에 하느님의 구원이 현존함을 말해주는 유효 · 유력한 징표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또 오로지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바로 그 까닭에, 교회가 세상으로 변해서는 안되며, 교회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교회가 본디 모습을 잃고 그 빛이 꺼지며 그 소금이 싱거워진다면, 그런 교회가 여느 사회를 개혁할 수는 없다. 그런 때는 선교활동도 소용없으며 아무리 활발하게 대외적으로 사회참여 활동을 벌여 봐야 헛일이다.
... 오리게네스가 초세기의 여러 다른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백성"이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종교적 또는 영적 의미만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도 있다. ...거듭 새로운 낱말들을 쓰면서 당시 신학자들은 교회의 사회적 차원을 개념화하려고 애를 쓴다: 교회는 한 백성, 한 족속, 한 도시라고. ...널리 고대 교회의 모든 신학자가...교회란 사회적으로 파악되는 것이요 여느 사회와 대조적으로 기능한다는 생각은 한 당연지사였다.
이러한 교회론 앞에서는 물론 다시 한번 물음이 제기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고약하게도 성과를 강요하고 무자비하게도 실적을 강압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교회를 존재하는 일체의 사회 중에서도 가장 역겨운 성격의 종교적 능률사회로 둔갑시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어떻게 그런 교회론으로 활기없는 사람들과 연약한 사람들, 죄지은 사람들과 실패한 사람들을, 공동체 내의 주변 존재들을 도외시할 수 있을까?

절대로 엄숙히 받아들여져야 할 이 반론들이 말해주고 있듯이, 대조사회인 교회란 단순히 인류역사상 나타난 다른 도덕재무장 운동들보다 더 크게 윤리적 노력을 경주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 추종은 현재나 과거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영웅적으로 살았으면 하고 비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넘치도록 풍부하게 은혜를 입는 데서 비롯한다. 예수의 온 실존이 말해주는 것인즉 바야흐로 기적이 역사 안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돌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기적은 인간의 능력으로 도래된 것이 아니다. 마음대로 처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공로와는 상관 없이 공짜로 주어진 것이다. 예수 추종이란 하느님 나라의 기적을 알아차리고 인간 공동체의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선물에 매혹되어 근본적으로 철저히 예수의 길을 걷는 것을 뜻한다.

...고대 교회는 그 메시아적 실존, 그 대조사회 실존이 하느님께서 역사歷史 안에 역사役事하시는 기적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교회가 온전히 교회로 되는 거기서 모든 것이 은총임을 알고 있었다.

...교회를 하느님의 은총의 창조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결실이라고 보지 않는다면 대조사회인 교회란 근본적으로 오해되고 만다. 따라서, 이교도 사회에 대한 교회의 대조성은 "권력성과 도덕주의"에서가 아니라 돌발하는 하느님 나라의 기적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죄지은 사람들과 실패한 사람들도 교회 안에 설 자리가 있으니, 은총이란 인간의 무능력 안에서 완성하러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따라서, 새 창조의 기적이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곳은, 교회 안의 ― 인간적으로 보면 ― 속수무책이며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이 새 창조가 사랑과 화해로서 자라나는 바로 거기다.


다음은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저서 <나자렛 예수>의 인용이다. [6]
…하느님 나라를 해석하는 셋째 차원은 교회론적 해석이다. 하느님 나라와 교회는, 방식은 여러 가지로 다를 수 있지만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엇비슷한 존재로 혼동되기도 한다.

내가 알기로 이 마지막 해석 방향은 무엇보다도 근대 가톨릭 신학에서 갈수록 정설로 통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인간의 내면을 지향하는 해석과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이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다. 19세기는 물론이고 20세기 초 신학에서도 교회는 지상에 있는 하느님 나라라는 말을 자주 했다. 교회가 역사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개신교 계통의 신학에서는 계몽주의 사상이 성경 해석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다주게 되었고 특히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해석은 곧바로 여러 방향으로 갈라졌다.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돌프 폰 하르나크다. 그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당시 유다교와 비교하면서 그 메시지 안에 두 가지 혁명적 내용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유다교에서는 모든 것을 일정한 집단,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라는 선택받은 민족에 집중시켜 해석하는 반면 예수의 메시지는 엄격한 의미로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이다. …하르나크가 둘째로 드는 유다교와 예수 사이의 대립은 근본적인 것이다. 유다교에서는 종교의식에 관한 것(사제직)이 지배적이었으나 예수는 반대로 이 종교의식을 하찮은 것으로 여겼으며, 그의 메시지는 도덕성을 지향했다고 한다. …이렇게 종교의식과 도덕, 집단과 개인을 대립시키는 흐름은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며… 하르나크는 예수와 유다교를 대립시키면서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삼대 종단인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러시아 정교와 게르만 계통의 개신교를 결부시켰고 이 가운데 개신교가 예수의 메시지를 가장 순수하게 원상 복귀시켰다고 했다.

물론 개신교 안에는 이런 하르나크의 견해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때 시대를 휩쓸던 자유주의 신학은 제1차 세계대전과 그 뒤에 이어진 사상계의 근본적 변화로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이 변화는 훨씬 이전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지 여느 나라를 선포하신 것이 아니다. 마태오는 '하늘나라'라는 말을 썼다. 그러나 '하늘'이라는 말은 '하느님'이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말이다. 유다교에서는 십계명의 둘째 계명을 염두에 두고 하느님 신비 앞에 경외를 표하는 뜻으로 '하느님'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하늘나라'라는 말은 일방적으로 저세상(천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저세상에도 계시고 이 세상에도 계시다. 그분은 우리 세상을 무한히 초월하시는 분이며 세상에 온전히 내재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

좀 더 간단히 말하면 예수는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에 대해 선포하신다. 그 하느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이며 세상과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지금 벌써 행동하시는 하느님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계시다, 그리고 하느님은 정말로 하느님이시라고 말씀하신다. 달리 말하면 그분은 세상의 고삐를 손에 쥐고 계시다.

이런 의미에서 볼때 예수의 메시지는 매우 간결하다. 철저하게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설교다. 예수의 메시지의 새로운 점, 특유한 점은 다음 사실에도 있다.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지금 행동하신다.' 바로 지금이 하느님의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뛰어넘어 역사 안에서 주재자로, 살아 계신 하느님으로 당신을 보여주시는 시간이다. 그렇게 볼 때 '하느님 나라'라는 번역은 미흡하다. '하느님의 지배자이심, 하느님의 주권'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우리는 이제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의 통치, 세상과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다스림은 지금 이 순간을 뛰어넘고 역사 전체를 뛰어넘어 그 너머까지 뻗친다. 그 내적 동력動力은 역사 자체를 뛰어넘어 그 너머로 이끈다. 그것은 또한 엄연하게 현재에 있는 것이다. 전례에, 성전에, 회당에 지금 현존하고 있으며 다가올 세상을 앞당기고 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삶을 꾸리게 하는 힘으로 지금 여기에 있다. 이 힘은, 하느님이 메어주는 멍에를 지고, 그렇게 함으로써 장차 올 세상의 한몫을 앞당겨 받는 믿는 이의 기도와 삶을 통해 발휘된다. 바로 여기서 예수는 '참된 이스라엘 사람'(요한1,47 참조)이시고 동시에 유다교를 초월하시는 분임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유다교는 하느님이 주신 약속으로 이스라엘을 내면적으로 떠받쳐 준 동력으로서의 유다교를 의미한다. 초월했다고 해서 우리가 거기서 찾아낸 내용 중에서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이미 살펴보았듯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에는 이 나라가 역사 안에서는 초라한 모습을 띤다는 말씀이 반드시 들어가 있다. 이 나라는 마치 겨자씨, 곧 모든 씨앗 중에서도 가장 작은 씨앗과 같다. 그것은 또 마치 누룩과 같아서 반죽 전체의 양에 비해 얼마 안 되지만 반죽이 부풀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나라는 여러 차례 세상이라는 밭에 뿌려진 씨가 이런저런 역경을 거친다는 이야기와 비교되기도 한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쪼아 먹기도 하고, 가시밭에 떨어져 억눌리기도 하고, 잘 여물어서 많은 열매를 맺기도 한다. 다른 비유로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잘 자라고 있는데 어느 원수가 와서 그 사이에 가라지를 뿌려놓고 가는 바람에 이 둘이 함께 자라게 되었다. 그러니 좋은 씨와 가라지를 따로 갈라놓는 일은 농사철이 끝나는 수확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마태 13,24-30)

예수는 신비스러운 '하느님 주권'을 밭에 숨겨놓은 보화에 비유하면서 이 나라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신다.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땅에 묻는다. 그리고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 다음 그 보물을 차지하고 나서 마냥 좋아한다. 이와 비슷한 비유가 또 하나 있다. 값진 진주의 비유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처분하여 빼어나게 좋은 진주를 손에 넣는다.(13,44-46 참조)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강탈하려고 한다."(11,12) 해석하기 매우 어려운 말씀이지만 '하느님 주권(하느님 나라)'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전체 가운데 한 면만을 진짜 '예수의 것'으로 인정하고 마음대로 골라잡은 말씀 하나를 근거로 하여 다른 모든 말씀을 억지로 끌어다 짜맞춘다면 방법론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주권'이라고 부르시는 실재는 매우 복잡해서 전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분의 메시지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그 메시지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신비한 암호 같은 예수의 메시지가 얼마나 해독하기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복음서 본문 하나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루카복음서 17장 20-21절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아무 구경꾼에게나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이 본문에 대한 해석들은 여러 갈래로 엇갈린다. 이렇게 엇갈리는 것은 '하느님 나라' 자체를 이해할 때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앞선 결정과 세계관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적idealistica 해석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 나라는 밖에 세워놓은 구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가 이미 오리게네스에게서 들은 말을 생각나게 하는 해석이기도 한다. 일리는 있지만 우선 언어 면에서 이 해석은 충분하다고 볼 수 없다. 다음으로 임박한 종말론을 따르는 해석이 있다. 그 설명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는 천천히 오는 것이 아니고 갑자기 오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한다. 갑자기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지금까지 전해진 본문의 형식에 비추어 볼 때 근거가 없는 해석이다.

그래서 지금은, 그리스도가 이 말씀으로 당신 자신을 가리킨 것이라는 견해로 점점 기울어지는 추세다. 곧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계시며 당신이 바로 하느님 나라라고 해석한다. 우리가 그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요한 1,30-31) 어감은 다소 다르지만 예수의 또 다른 말씀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앞에서 말한 본문도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예수의 현존은 그분이 있는 그 자리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물리적 현존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벌이는 예수의 활동을 통해 그 자리에 현존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는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것이고 '가까이 온' 것이다.

…앞으로 여러 가지로 우리의 성찰 대상이 될 씨앗이라는 기본적인 상징과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초대의 말씀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수 자신이 보물이고 그분과의 친교가 바로 값진 진주다. 비로소 윤리와 은혜 사이의 긴장, 엄격한 개인 존중의 인격주의 사상과 새로운 가족을 이루라는 요청도 해명된다. 우리는 예수의 산상설교에서 메시아의 토라, 곧 율법을 성찰할 때, 율법에서의 자유와 은총의 선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보다 큰' 의로움, 곧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보다 의로워야 한다는 '여분의 의로움'(마태 5,20 참조) 등 여러 갈래의 줄기들이 어떻게 서로 뒤엉켜 한 골을 이루는지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곳에서는 아무것도 좋을 수 없고 인간도 타락하고 세상도 타락한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이 말씀으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행동하고 태도를 취할 때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지 정해졌다.

우리가 경건하다고 해서, 또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어떤 모양으로든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그 무슨 환상적인 세상이 우리에게 약속되는 것은 아니다. 사유재산만 없으면 모든 것이 저절로 잘될 것이라는 계급 없는 이상 사회의 꿈처럼, 모든 기능이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미리부터 주어진 적은 없다. 예수님은 그렇게 안이한 처방을 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그분은 모든 것에 앞서 결정해야 할 우선순위를 확정해 주신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통치권'이라는 뜻이고 그것은 바로 그분의 뜻을 기준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하느님의 뜻은 정의를 구현한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는 그분의 전권을 인정해 드리고, 그럼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인정해야 할 권리의 기준을 그 안에서 발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 자체로 하느님 나라이심을 보았다. 그분이 계신 곳에 바로 '하느님 나라'가 있다. …라인홀트 슈나이더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나라에서의 삶은 그분을 따르는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삶으로 이어지고 계속된다. 그리스도의 생명력에서 더 이상 양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 안에서는 이 나라도 끝장난다. 이 나라가 시작되는 곳은 마음이 이 생명력에 닿아 변화되는 곳이다. …뽑아낼 수 없는 나무뿌리는 각 사람의 마음을 모조리 뚫고 들어가려고 애쓴다. 그 나라는 하나다. 그 나라는 주님을 통해서만 존속한다. 주님은 그 나라의 생명과 힘과 그 중심이다."(그의 책, 31쪽 이하)

3.3. 개신교의 입장

개신교는 용어 사용이 좀 다른데, 우선 개신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가톨릭에서는 '천국'과 '낙원'을 동의어로 간주하여, 둘 다 죽은 뒤에 영혼이 겪는 사후 상태로 생각한다. 또한, '음부'를 '저승'이라고 부르며, 예수 그리스도 이전 죽은 의인과 악인들이 머무르다가 예수의 부활과 함께 그의 인도로 의인들이 천국을 향해 빠져나간 곳으로 본다.[8] 이 외에 개신교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연옥 개념이 있다. 이러한 것이 가톨릭과 개신교 용어의 차이점이다.

그러나 많은 개신교인들조차도 개신교가 사용하는 이러한 '하느님의 나라'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개신교의 낙원과 천국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9] 이는 개신교가 전파되고 보급되면서 개신교에서 말하는 낙원 개념이 다른 종교에 존재하는 천국 개념과 유사하기 때문에 생긴 오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일단 전문 개신교 신학자들은 천국에 대해 사람이 죽었을 때 구원을 받은 사람이 들어가는 장소가 아니라, 사후세계를 배제한 채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세계 질서로서의 하느님의 나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어쨌든, 개신교에서 말하는 천국은 '이 세상의 종말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서 구현될, 지상 낙원과 같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만 개신교에서도 낙원이라는 곳이 종말에 이루어질 하느님의 나라와 본질과 속성 면에서는 같다는 것, 그리고 낙원과 하느님의 나라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점에서 낙원을 '천국'으로 지칭하는 것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라고 본다. 개신교 교리에 따르면 낙원에 간 사람들은 부활한 다음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 확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낙원에 들어가는 것이 종말론적 이상 세계로서의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사실상 본질 면에선 똑같다. 그리고 낙원의 본질 역시 하느님의 나라의 본질과 같다. 낙원은 하느님의 통치가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에 대해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통치가 '전 우주와 물질 세계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곳이다. 둘 다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긴 마찬가지.

여기에 대해 나들목교회 대표목사 김형국의 저서 <청년아 때가 찼다>의 내용을 인용하여 개신교의 용어 정의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의 주요 사상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이 사랑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예수님의 주요 사상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윤리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보다 더 큰 개념입니다. 마가가 예수님의 복음을 설명하는 첫 번째 말씀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였고, 마태 역시 비슷하게 "이 때부터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고 기록했습니다. 마태가 사용한 '천국'이라는 표현은 마가가 사용한 '하나님 나라'와 동일한 뜻입니다. (중략) 마태복음 유대인들을 위해 쓴 복음서입니다. 유대인들은 감히 '하나님'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 대신 완곡하게 '하늘에 있는 나라'(Kingdom of Heaven)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중략)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원래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살려 썼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와 '천국'은 독자에 따라 표현을 달리했을 뿐 동일한 단어입니다. (중략) 예수님이 오셔서 선포하신 것이 공통적으로 하나님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략) 하나님 나라는 복음서 전체에 흐르는 주제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나라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중략)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중심 사상입니다.[10]

합동신학대학원의 이승구 교수는 2013년 8월 10일에 있었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구약 선지자들에게 있어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먼 미래의 일이었다. 당시 유대인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는지가 그들의 관심사였다. 하나님 나라는 오는 것이었다. 장차 올 나라,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말한다. 그런데 마태복음 12:28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메시야 사역을 언급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말한다. /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과 현재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유대인에게는 '세상' 개념이 없다. 세상을 시간 개념으로 즉, '세대'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 세대가 끝나면 또 다른 세대가 온다고 생각했다. 유대인에게는 오는 세대가 하나님 나라다. 이 세상(세대)과 오는 세상(세대), 이것을 '두 세대 이론'이라고 한다. 이 틀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지고 오신다. 유대인들은 이 세상이 끝나면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고 한 반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겹쳐 있다.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때 이 겹침이 시작되었고, 즉 오는 세상이 이미 왔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있지 않고 이미 왔던 오는 세상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표적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보여 준다. 이 표적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와 동시에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11]

김형국 목사도 <청년아 때가 찼다> 라는 책에서 이와 유사한 이론을 전개한 바 있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지금 곧 임하였다'는 뜻과 '이제 곧 임할 것이다'라는 두 개념이 공존합니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독특성이 있습니다. (중략) 하나님 나라는, 현재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전하게 임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운 듯하지만, 이 개념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already, not yet"(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말이 바로 이 개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지만, 아직은 완전히 임한 것이 아닙니다. (중략) 하나님의 다스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도 있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있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 시대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가 완전하게 임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중략)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하나님 나라는 완전하게 임할 것입니다. (중략) 이것을 '종말론적 이중구조'라고 합니다. [12]

3.4. 종파별 신학적 견해

3.4.1. 장로회의 입장

장로회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통해, 다음과 같이 종말에 성취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13]
  1.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는데, 그분은 성부께로서 모든 심판하는 권세를 받으셨다. 그 날에는 배도한 천사들이 심판 받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와 자기의 생각, 말, 행동을 직고하고,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을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이 날을 정하신 목적은 택하심을 입은 자들의 영원한 구원에서 그분의 자비로우신 영광을 나타내시고, 악하고 불순종하는 버려두신 자들의 영벌에서 그분의 공의로우신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그 때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고, 주 앞에서 나오는 충만한 즐거움과 유쾌함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불순종한 악인은 영원한 고통에 던지우고, 주의 얼굴과 그분의 능력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3. 그리스도는 우리가 심판날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기를 바라시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의 범죄를 막으시고, 고난에 처한 경건한 자들을 더 크게 위로하시기 위함이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그 날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으실 것인데, 그것은 그들이 주께서 오실 그 때를 모름으로 인해서 모든 세상적 안일함을 떨쳐 버려 항상 주의하고, "주 예수여 오소서, 속히 오소서, 아멘"이라고 말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게 하시기 위함이다.[14]

장로회 신학자인 이승구 교수는 위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왕으로서의 통치가 있는 곳이다. 마태복음 4:17에서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라는 관념을 깨는 말이다. (중략)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이 나라 안에 있게 된다. 바울은 골로새서 1:13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지금 여기서 이미 하나님 나라에 있다. 중생하면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이다. 지금 믿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속에서 의미가 잘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사람답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은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를 잘 알아서 정치, 경제, 문화 등 사는 모든 영역에서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중략) 구약 시대는 하나님 나라가 아직 오지 않은 시기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하나님 나라가 왔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임했지만,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 나라는 비로소 극치에 이르게 된다.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즉 영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 때 눈에 보이게 온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다. / 결론적으로 구원을 세 상황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이 땅에 이미 천국이 임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천국을 사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둘째,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우리 몸은 썩고 영혼은 예수님이 계신 하늘에 있게 된다. 그리고 셋째,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비로소 우리의 몸은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15]

장로회 신학자 가운데, 이러한 '하느님의 나라 신학'을 하나의 신학 체계로 깔끔하게 정리해 신학 이론화한 사람이 바로 숭실대학교 교목실장 김회권 교수이다. 김회권 역시 김영재 교수, 이승구 교수와 마찬가지로 천국에 대한 흔한 오해를 저서 <하나님 나라 복음>에서 강력하게 지적하는 한편, '신의 나라 신학' 체계를 정리하여 신학 이론으로 집대성한 바 있다. 김회권이 집대성한 신의 나라 신학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하나님이 이 땅과 세상을 직접 다스리신다는 복음입니다. (중략) 하나님 나라 신학이란 하나님 통치의 목적과 의도의 빛 아래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신학입니다. (중략) 하나님 나라 신학은 몇 가지 구체적 명제들로 표현됩니다.
1. 천지창조와 인간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다스림에 있습니다. (중략)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통치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신학이 하나님 나라 신학입니다. 이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통치는 사랑의 교제와 감복을 가리킵니다. (중략) 이 놀라운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통치 원리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도 영적, 인격적 통치에만 순복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중략)
2. 하나님의 다스림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참여할 때 일어납니다( 시편 22:3). 인간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찬양을 드리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납니다. (중략) 하나님의 다스림은 우리가 신뢰와 순종을 드릴 때, 찬양하고 기도할 때 경험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중략)
3. 하나님 통치는 하나님의 맏아들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가장 현저하게, 지속적으로, 기획적으로 나타났고 그 절정이 아브라함의 후손 나사렛 예수를 통해 구현되었습니다. (중략)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불순종한 아담 인류와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저주받은 역사가 속량되고 갱생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100% 구현된 영토요 백성이었고, 그 스스로 하나님 통치권을 매개하고 구현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혹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라는 말과 동의어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중략)
4. 하나님 나라는 나사렛 예수를 주(主)로 영접한 사람들에게 성령 내주와 성령충만으로 실현됩니다. (중략) 하나님 나라 신학은 부활, 승천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세계를 통치하고 계심을 믿는 신학입니다. 개인의 인격과 삶이 하나님 통치에 편입되는 일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가능해집니다. (중략) 곧 성부의 성자 파송, 성자의 성부 증언과 성부 순종, 성령의 성자 대리와 증언이 부단한 선순환과 상호 침투를 일으키는 과정을 부각시키는 삼위일체 신학입니다.
5.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는 동심원적 확장 구조를 이루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중략) 하나님 나라 신학은 지금도 예수가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세계를 다스리심을 믿습니다.[16]

3.4.2. 감리회의 입장

감리회는 좀더 적극적으로 '천국'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다. 1930년도에 나온 교리적 선언과, 1997년도에 나온 신앙 고백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감리회는 직접적으로 '천국'을 '하느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 곧 '하느님의 나라'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장로회와 마찬가지로 재림, 심판, 부활, 영생, 하느님의 나라를 믿는다.

3.4.3. 성공회의 입장

성공회의 신앙고백인 성공회 39개 신조에는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언급은 없다.[17] 그러나 39개조 신조 가운데 하나가 니케아 신경, 사도신경,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내용이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니케아 신경이 번역본이 많은데 이건 성공회 것이다. 여기에서 '그분의 나라'가 바로 이렇듯 이상 세계로서의 하느님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통해서는 성공회에서도 장로회, 감리회와 유사한 재림, 심판, 부활, 영생,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공회 신학자이자 전 더럼교구의 주교인 인 톰 라이트(Tom Wright) 는 '죽음 이후에 영으로 머무르는 중간 상태와 최후 심판 때에 모든 사람이 부활하여 심판을 받고 영생과 영벌로 나뉘게 되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18] 즉 1번 개념과 2번 개념은 서로 구분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3.4.4. 루터회의 입장

루터교회의 신앙고백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와 있다.
Also they teach that at the Consummation of the World Christ will appear for judgment, and will raise up all the dead; He will give to the godly and elect eternal life and everlasting joys, but ungodly men and the devils He will condemn to be tormented without end.

이것은 예수가 이 세상에 다시 와서 심판을 집행하실 것이며, 모든 죽은 사람들이 부활하게 될 것이고, 의인들(the godly)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영속되는 기쁨을, 그리고 악인들과 악마들에게는 끊임없이 고통 받는 저주를 줄 것이라는 내용이다. 다른 종파의 종말 및 부활에 대한 인식과 일치한다.

4. 같이 보기


[1] 천국과 영생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부귀와 곧 사라질 명예를 버리고 믿음과 선행으로 자신을 천국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라는 뜻이다. [2] 연옥은 천국이나 지옥과 동떨어진 제 3의 장소가 아니라, 구원받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 거치게 되는 정화의 과정이다. 즉 연옥 또한 천국의 일부. [3] 성 디스마.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으며 축일 3월 25일. 끝까지 회심하지 않다가 죽은 좌도의 이름은 제스따스(게스따스)라고 한다. [4] 그 네 생물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개씩 가졌는데, 사방으로 또 안으로 눈이 가득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밤낮 쉬지 않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 어좌에 앉아 계시며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께 생물들이 영광과 영예와 감사를 드릴 때마다, 스물네 원로는 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금관을 어좌 앞에 던지며 외쳤습니다. “주님, 저희의 하느님 주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주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생겨나고 창조되었습니다.” (요한묵시록 4장 8-11절) [5] 루카 복음서 13장 28절, 16장 22-23절 참조. [6] 단, 교도권 차원의 문서가 아니라 교황 개인의 연구저서이다. [7] http://m.goscon.co.kr/articleView.html?idxno=28314&menu=1 [8] 때문에 (결과적으론) 악인들만 남게 된 지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9] 합동신학대학원의 김영재 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자신의 논문 <믿음 그리고 행함>에서 지적한 바 있다. 같은 대학원의 이승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흔히 천국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 있다. '죽어서 천국 간다'는 식의 생각이다. 이는 천국을 죽고 나서 가는 곳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하늘나라'라는 말을 '저 하늘에 있는 나라'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과는 다르다." 출처 [10] 김형국, <청년아 때가 찼다>, 죠이선교회, 2012, pp.56-58 [11] 출처: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6429 [12] 출처: 김형국, 위의 책, pp.97-99 [13] 장로회에서는 하느님 나라 개념과 사후 세계로서의 낙원 개념을 명백하게 구분한다. 자세한 내용은 낙원/기독교 항목 참조. [14] 출처: http://www.nazuni.pe.kr/faith/creeds/westminster/confession.php [15] 출처: 위의 기사 [16] 출처: 김세윤/김회권/정현구, <하나님 나라 복음>, 새물결플러스, 2013, 18-24 [17]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공회는 문서는 해당 이런 신조는 제한적 진리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 시대에, 그 장소의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그 입장을 존중하나, 인간은 무오하지 않기에 시대가 변하면 성공회의 입장도 변할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자면, 39개신조는 성공회에서 존중하는 문서이고 가치가 있다고 보나 그 내용을 그대로 모든 세계성공회공동체가 동의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영국 국교에 해당하는 내용이라 다른데서 적용하기는... 그렇다고 영국 성공회(잉글랜드 성공회)에서도 저걸 그대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 [18] 출처: Tom Wright, For All the Saints, SPCK 2003, pp. 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