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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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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성경에 나오는 지옥3. 기독교 각 교파들에서 보는 지옥
3.1. 가톨릭의 지옥관3.2. 정교회의 지옥관3.3. 개신교의 지옥관
4. 기타 이론
4.1. 총체적 구원론
4.1.1. 오리게네스(185년?~254년)4.1.2. 니사의 그레고리오 (335년?-395년?)4.1.3. 고백자 막시모(580년-662년)
4.2. 종결적 형벌설
4.2.1. 영원4.2.2. 멸망4.2.3. 영원한 고통의 근거 본문 해석에 대한 반론
5. 기독교를 접할 기회가 없던 사람들의 문제6. 보복의 장소?7. 기타8. 같이 보기

1. 개요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 마르코의 복음서 9:42~48)[1]
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역겨운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죽음[2]이다.” ( 요한의 묵시록 21:8)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지 못한 모든 영혼들이 가는 기독교의 사후세계이다. 일단 죄를 지은 사람들과 비기독교인이 얄짤없이 모두 지옥에 가는지는 교리적으로 모든 종파에서 의견이 통일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고' (기독교에서 규정하는) 죄의 상태에 지속적으로 머물고 있는 사람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자의적[3]으로든 타의적[4]으로든 '본인의 의지'로 거부한 사람들과 죄를 짓고도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려 노력하지 않거나, 회개하고 죄악된 생활을 개선하려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5] 이 지옥에 가게 된다고 보고 있다.

윤회사상의 법칙에 따라 형벌에 끝이 있고, 이에 따라 일정 기간동안 형벌을 받고 나면 지옥을 벗어나게 되는 불교의 지옥과 달리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거의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알려져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불구덩이는 '불못'이라고 말한다.

2. 성경에 나오는 지옥

사실 구약성경만 보면 저승 비슷한 것은 있으나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적 지옥에 딱 들어맞는 서술은 없다. 구약 시대 초기 유대교의 개념은 '을 믿고 가르침을 잘 따르면 자손이 창대하고 대대로 번창하며, 신을 버리면 현세적 징벌을 당하게 되거나 그 세대는 여려가지 악재나 병고로 고통받으며, 자손이 이어져도 회개하지 않으면 징벌이 이어진다는 전형적인 기복신앙이었다. 스올 등 사후에 대한 관념도 영이 머무는 그저 비참하고 어두운 장소로만 여겼고 초기엔 구약성경에서도 묘사가 상당히 불확실했다. 하지만 이후 기원전 6세기 경부터 유대교 교리에서도 영생(구원받은 사람의 영원한 삶)의 개념이 발전되기 시작했고, 스올에서도 죄인들이 사후에 고통받으며 머무는 곳의인들이 사후에 편안하게 머무는 곳으로 갈려진다고 보는 성경 해석이 늘어났다.[6] 이후 유대교의 사후세계 교리는 기독교 시대로 접어들면서 가톨릭의 고성소 교리[7]로 발전한다.

그러다 신약 시대에 와서 비로소 지옥의 성서적 개념이 명확해지기 시작한다. 복음서의 설명에서 주로 지옥이 언급되는데, 루카 복음서 16장 19~31절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에 대한 내용에서 지옥 불구경이 나온다. 이 구절에서는 선량한 거지인 라자로가 천국에 가서, 사악한 어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을 아브라함과 함께 보는 장면이 있다. 부자 왈 "아버지 아브라함이여[8], 제게 자비를 베풀어 라자로의 손가락 끝에 을 찍어 제게 보내 주십시오" 아브라함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거부한다. 마찬가지 맥락으로 마르코 복음서 9장에도 불도 영원히 꺼지지 않고 구더기들도 사라지지 않는 불지옥이 언급되며, 또한 악인이나 이교도들이 죽은 후에 음부(지옥)[9]에 떨어져 이를 갈며 후회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에서 수차례 언급된다.

예수도 복음서에서 천국보다 지옥에 대한 경고와 이야기를 더 많이 언급했다고 한다. 참고로 예수가 지옥을 설명하는데 예로 든 힌놈 계곡 게헨나는 당시의 일종의 쓰레기 소각장이었는데, 1년 365일 동물들의 시체와 쓰레기들을 계속해서 소각해야 해서 불길이 꺼지지 않았으며, 과거에는 아이를 희생하는 우상 숭배행위가 벌어지는 등 대단히 불결한 곳이었다. 소각을 해도 가장자리라거나 외곽 불길이 잘 닿지 않는 부분에도 던져졌을 경우 시신의 쪼가리 같은 게 남아 벌레가 알을 까고 구더기가 생긴다. 태울 것이 계속 공급되는 한 구석의 찌꺼기도 계속 존재할 것이며 구더기 또한 계속 있게 될 것이다. 즉, 지옥에 대한 설명에서 '구더기가 죽지 않으며' 라는 표현은 진짜로 지옥에 영생하며 사람을 파먹는 식인벌레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지옥에 형벌대상인 죄인들이 영원히 존재하며 고통받을 것을 표현한 것이다. 복음서에서는 여기에 비유해서 지옥의 끔찍함을 설명했으며, 이후 초대 교회 시기와 교부 시대를 거쳐 점차 지옥의 개념이 신학적으로 확립되어 갔다.

헬라어 원문 기준으로, 신약성경에서 지옥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들은 여러 가지이다. 이 중 음부로 번역되는 스올 하데스는 동의어로, 악인이든 의인이든 상관 없이 일단 죽으면 가는 곳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불가타 성경에서 infernus로 번역된다. 반면 게헨나는 악인들을 죽은 후에 멸망시키는 꺼지지 않는 불(마 10:28, 막 9:43)과 동일시되며, 불가타 성경에서 gehenna로 번역된다. 이 외에 타르타로스가 있는데, 타르타로스는 명사가 아닌 동사 '타르타로오(ταρταρόω)'의 형태로 나타나며(벧후 2:4), 번역될 때는 보통 '지옥에 던져진다'는 뜻으로만 해석된다. 다만 감리교 신학자 아담 클라크 및 일부 복음주의 주석들은 해당 구절의 타르타로스를 타락한 천사들이 갇혀있는, 게헨나와는 다른 곳이라고 해설했다. 한편 킹 제임스 성경은 위 단어들을 전부 다 hell로 번역했다.

이 외에 무저갱으로 번역되는 '아비소스'는 히브리어 '테홈', '술라', '라합'의 번역어로, 창세기 1장 2절처럼 혼돈(카오스) 등을 뜻하지만, 신약에서 스올 및 게헨나와 비슷한 용법으로도 쓰였다.

3. 기독교 각 교파들에서 보는 지옥

대부분의 기독교 종파에서는 지옥의 형벌은 영원한 것이라는 교리를 공식적인 입장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아래의 성경 구절들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10]
티끌로 돌아갔던 대중이 잠에서 깨어나 영원히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영원한 모욕과 수치를 받을 사람도 있으리라. (다니엘 12:2)
또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붙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한 눈을 잃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마태오의 복음서 18:9)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마태오의 복음서 25:41)
괴로움을 당하는 여러분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을 누리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 일은 주 예수께서 당신의 능력 있는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께서는 불꽃 가운데 나타나셔서 하느님을 거부한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을 처벌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 앞에서 쫓겨나 영원히 멸망하는 벌을 받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1:7-9)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변의 도시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음란에 흐르고 비정상적인 육욕에 빠졌으므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아서 후세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유다의 편지 1:7)
자기들의 부끄러운 행실을 거품처럼 뿜어올리는 거친 바다 물결과 같고 길을 잃고 헤매다가 영원히 암흑 속에 빠져버린 별들과 같습니다. (유다의 편지 1:13)
또 셋째 천사가 뒤따라와서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그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절을 하고 자기 이마나 손에 낙인을 받는 자는 하느님의 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진노의 잔에 부어 넣은 순수한 포도주다. 이런 자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의 구덩이에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불과 유황의 연기가 그 구덩이에서 영원토록 올라올 것이며 그 짐승과 그 우상에게 절을 하고 그 이름의 낙인을 받는 자는 밤에도 낮에도 휴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요한의 묵시록 14:9-11)
그들을 현혹시키던 그 악마도 불과 유황의 바다에 던져졌는데 그 곳은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영원 무궁토록 밤낮으로 괴롭힘을 당할 것입니다. (요한의 묵시록 20:10)

3.1. 가톨릭의 지옥관

15. 예수께서는 끝까지 믿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가게 되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고 있는(마태오 복음서 5,22. 마르코 복음서 9장 43~48) 지옥(게헨나)에 대해 자주 말씀하신다. 그 곳에서는 영혼과 육신이 함께 멸망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천사들을 파견할 것이고 그들은 (중략) 범법을 일삼는 자들을 그의 나라에서 끌어모아 그들을 불가마에 던질 것입니다.(마태오 복음서 13, 41~42)하고 엄숙히 예고하시며,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영원한 불 속으로 가라"(마태 25,41)하고 단죄하실 것이다.
18.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시지 않는다.[11] 자유 의사로 하느님께 반항하고(대죄를 짓고) 끝까지 그것을 고집함으로써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 미사 전례와 신자들의 일상 기도를 통해 교회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2베드 3,9) 바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중.
지옥에서 어떤 고통을 당하는가?
저주받은 이들은 지옥에서 말로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고통을 겪는다. 첫째로, 그들은 결코 하느님을 볼 수 없고 영원히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 둘째로 그들은 불의 고통을 당하고, 영원히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움을 당하며, 악마들의 무리 속에서 살아간다.
독일 가톨릭교회 교리서 중.[12]

가톨릭과 정교회에서, 지옥은 죄인들과 불신자들이 사후에 가게 되는 상태이자 장소이다. 그런데, '비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지옥에 가는가?'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일단 논란의 여지가 많긴 하지만 로마 교회(가톨릭, 정교회) 모두 '비기독교 신자들이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든 전부 다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견해가 공식 가르침이다. 이는 비신자의 죽을 때의 상태(어떤 마음가짐이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데, 예를 들어 교회나 성당에 다니지 '못하고'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비고의적 비신자들도 상당히 많고, 또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으나 마음으로 알게모르게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된 삶을 살지도 모르기 때문. 또 평생 죄인으로 살았던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죽기 전에 혹시 회개했을지 본인과 기독교의 하느님을 제외하면 다른 이들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13] 그러나 이런 류의 사람들의 구원 가능성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앙의 삶을 산 교인들과 비교하면 극도로 가능성이 적다고 본다.[14]

즉 로마 교회 교리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비기독교 신자의 상태는 지옥에 무조건 가게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지옥에 문턱까지 와 있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매우 위험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의 경우에는 비가톨릭 신자의 구원 가능성[15][16]에 대해서 조건이 붙는다. 첫째로 가톨릭 교회와 복음에 대하여 접해본 적이 없거나 들어본 적이 없거나 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로 비신자 스스로 종교적 진리를 알기 위하여 자기 나름대로(가톨릭의 교리를 모르는 상태에서라도) 영혼 구원의 진리를 탐구하려 열심히 노력하는 자세[17]양심의 명령(어느 문화권에나 보편적으로 있는 도덕률을 따르는 태도)으로 알려진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힘(즉 비신자의 구원 가능성 문제 역시 비신자 스스로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 이뤄진다는 것을 말한다)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자세를 서술한 것이다. 이런 태도 없이 나는 종교같은거 필요없이 구원받고 싶다는 식으로 나간다면 구원의 가능성조차 받을 수 없다.]가 필요하다. 이 두가지를 하지 않는다면 가톨릭 교회를 알거나 복음을 듣고도 본인의 의심때문에 결국 자유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태만적인 불신의 죄를 짓게 되기 때문에 구원의 가능성을 긍정할 수가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착한 이교도[18]"나 "(자아가 발달하기 이전의) 유아"들의 경우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분분한 의견이 있다. 이를 지옥의 가장자리인 유아들의 림보에 거주한다고 하는 신학 이론이 있어왔으나, 가톨릭의 정식 믿을 교리로 공인된 것은 아니며, 현대 가톨릭에서는 세례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의 구원 가능성을 대단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19] 물론 가장 확실한 건 죽어서 하느님한테 물어보는 것이지만, 돌아와서 대답을 전할 방법이 없으니...

가톨릭에서는 이교도 문제에 대해 "자기의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자기의 탓 없이 하느님을 아직 명백히 인정하지는 못할지라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올바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섭리가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치 않으신다."고 교회헌장에서 밝히고 있다.[20]

또 굉장히 중요한 사실은, 이 교리는 단순히 타종교인이나 무신론자가 착하게만 산다고 구원이 열려있다는 주장이나, 비가톨릭 신자가 가톨릭을 믿을 생각이나 진리 탐구를 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거나 영적으로 게으름을 피워도 된다는 면책 특권 따위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에 대해 알지 못하는 비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은총에 따라 양심을 갖고 올바르게 살아간다면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의해 구원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추측일 뿐이다.(그래서 신자들의 케이스와 달리 구원의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

일단 가톨릭의 기본적인 입장은 '구원은 하느님이 주관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은총의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가 확실히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의 입장에 따르면 본인과 타인의 구원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믿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선교에 동참하고, 죄인들과 비신자들이 생전에 회개하여 구원의 은총을 받기를 열심히 기도하며, 세상에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펼 수 있게 노력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과 이미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등이 있다.[21]
가톨릭 교리에서는 지옥벌은 영원하다고 규정한다. 이는 지옥벌이 영원할 것이라는 성경상 언급에 충실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신학적인 지옥벌의 영원성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며 전선함(지극히 선한 속성)과 권위는 무한하기 때문에 이 무한한 권위와 선을 인간이 대죄로서 침범하였을 경우, 그리고 용서받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았을 경우 사후에 치를 그 벌의 강도 역시 지극히 무한하여야 한다. 그런데, 인간 영혼은 하느님처럼 무한한 능력을 갖추지 못하기 때문에 벌의 강도의 무한함을 치를 수가 없다. 따라서 형벌의 기간이라도 무한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이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가톨릭은 오리게네스와 일부 교부들이 주장한 총체적 구원론(만인구원설, 하단참조)이나, 현대의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에서 주장하는 지옥 부정설, 대부분의 이슬람 종파들에서 주장하는 것같은 지옥벌의 차별적인 한정이론[22], 그리고 바하이에서 주장하는 장소적 지옥 부정 등의 설들을 모두 부정하고,[23] 이를 이단으로 단죄하여 왔다.
만일 누군가 악마들 또는 불경한 사람들이 받는 형벌이 임시적이며 어느 순간 끝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단죄될지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노드(543년) 문헌 제 9항.

지옥의 '묘사'에 대해서는, 가톨릭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과거에는 지옥을 악마들이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을 온갖 이상한 방식으로 고문하고 엄청나게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받는 곳으로 보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유럽의 오래된 성당의 벽화들을 보면 이런 관점의 성화들과 벽화들이 수두룩하다. 당시 나름 생각할 수 있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을 죄다 콜라보레이션해서 넣었기 때문에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의 지옥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가톨릭의 교리문답서에 의하면, 지옥의 실제적 존재와 엄청난 고통을 인정하지만 지옥의 고통에 관해서는 " 하느님과의 영원한 결별" + 지옥에서의 형언하기 힘든 실제적 고통이 지옥 형벌의 핵심으로, 지옥 '묘사'의 세부적인 사항에 관해서는 "구체적이라기보다는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통적 성화들의 지옥 형벌 묘사에 대하여)어떤 그림에는 끓는 무쇳물을 퍼먹이기도 하고, 구렁이가 휘감고 있기도 하는데 이것은 지옥벌이 (그만큼) 무섭다는 것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가톨릭 교리해설서 <상해천주교요리>(서울대교구 윤형중 마태오 신부, 1956년 저), 상권, 310p.
"성서에 표현된 지옥 묘사의 '구더기'를 본래 의미로 알아듣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불은 거의 모든 이가 본래 의미로 알아들으며, 이것을 명백한 어조로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가톨릭 신학자 프리드리히 엠마누엘 폰 후르터(1787~1865)

그런데, 지옥에서의 세부적 묘사 중, 지옥의 꺼지지 않는, 죄인들에게 고통을 주는 영원한 '불'(Ignis)에 대하여는 가톨릭 교회는 비유나 상징으로 보지 않는다. 예수회 출신의 근세 가톨릭의 권위적 신학자인 프란치스코 수아레즈는 악마와 악한 영혼들을 벌하기 위하여 준비된 (지옥)불은 비유가 아닌 진정한 불이고 '본래 의미의 불'[24]이라는 것은 명백한 가톨릭적 견해라고 규정하였고, 교황청 교도권의 공식 견해 또한 이 입장을 수용하였다. 교황청 내사원[25]에서는 "지옥의 불이 실제적 불이 아니라 그저 상징이나 비유라고 보는 신자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청원에 일단 제대로 된 교리를 알려주고, 그럼에도 고집스럽게 지옥불이 상징이라고 주장한다면 경고의 의미로 죄의 사면을 거절하라는 지침을 내린 바 있다.(1890년 4월 30일 발표) 따라서 비록 '지옥의 불이 실제적 불이라는 교리'는 사도신경, 성모무염시태 교리나 공의회 결정 사안처럼 결정적인 무오류성을 띤 것은 아니지만, 신자들이 따라야 할 지옥 교리에 대한 교황청 공식 가르침이다.
교회는 지옥의 존재와 그 영원함을 가르친다. 죽을 죄( 대죄)의 상태에서 죽는 영혼은 죽은 다음 곧바로 지옥으로 내려가며, 그곳에서 지옥의 고통, 곧 영원한 불의 고통을 겪는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5항.

종교학대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가톨릭에서는 지옥의 고통을 정신적인 고통인 '상실의 형벌'(이를 '실고'라고 일컫는다)과 물질적인 고통인 '감각의 형벌'(이를 '각고'라고 한다)이라는 두 고통으로 정의해 왔다. 지옥에 있는 저주받은 죄인들은 하느님을 바라보며 함께 있는 행복과 그 안에서 편안함을 발견하는 영혼의 능력도 상실하게 되며, 그와 동시에 모든 초자연적인 혜택(은총)도 받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 극도의 공허가 지옥에 떨어진 자들에게 엄습하며, 공허감은 헤아릴 수 없는 고민을 불러 일으킨다고 한다. 즉 쉽게말해 지옥에 떨어진 영혼은 끝없는 스스로의 양심의 가책, 그리고 정신적인 고통속에 몸부림치게 된다고 한다.

2007년에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오늘날 신자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은 죄를 용서받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지옥불에 떨어질 것을 잊고 산다"라고 발언했을 때, 바티칸 보도국에서 곧바로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교황이 사람들의 이해가 빠르도록 교구 사제처럼 말한 것이며,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아니다"라는 보도자료를 발표했던 적이 있는데, 사실 교황의 이 발언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고 봐도 교리에 어긋난 것은 아니다. 위의 지옥불의 존재는 확실하다는 교황청의 신학지침도 있는데다, 어디까지나 지옥의 실제와 지옥에서의 고통이( 성경에 묘사된 것이 상징적이든 실제적이든 간에)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는 것, 그리고 대죄를 지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기본 교리는 가톨릭에서도 단 한번도 부인한 적이 없기 때문. 또 파티마의 성모 발현이나 파우스티나 성녀의 예수님 자비의 환시등 현대 가톨릭 교회에서 인준된 성모 발현 및 기적 사례에서도 마귀들과 악인들, 불의 고통이 가득한 불지옥의 환시가 상세히 보여지고 가톨릭 교회의 믿을 만하다는 인정을 받은 적이 있으며, 아직도 가톨릭 신자들 중엔 기존의 지옥 가치관을 고수하는 신자들이 상당히 많다. 결론적으로 베네딕토 16세의 지옥불 언급도 교리에 어긋나거나 잘못된 말이 아니라는 것.

현대 가톨릭에서 말하는 지옥이란 결론적으로 말해 " 하느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따라서 신의 보호가 완전히 사라짐으로 인해 형언하기 힘든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절망적인 영원함 속에 방치되는 상태(이자 영적 공간)"이다. 하느님이란 완전하고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존재이며, 지옥이란 인간이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그에 대한 형벌로 죄에 생전의 대한 값을 치르며 무한한 사랑과 자비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또한, 특정한 인간이 천국 연옥, 지옥 중 어디로 가게 될지의 기준은 신학적으로 명확하나(소죄만 짔거나 용서받은 대죄인은 연옥행, 대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지옥행) 그 개인이 용서받았을지 여부는 하느님의 영역이기에 인간은 함부로 판단할 수 없으며(때문에 가톨릭 교회에서는 천국으로 가는 가장 확실하다고 판단된 길을 지켜야 할 교리로 제시해주는 것) 인간은 그저 겸손히 예수를 통해 복음을 선포하고 죄와 투쟁하며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부단히 노력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하느님이 자비롭고 인간을 사랑해도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 많이 존재하는 것이다. 최후의 최후까지 하느님이 싫어서 거부하고 도망간 자들이기 때문. 하느님이 싫어서 그의 자비를 끝까지 거부한 이들에겐 거기에 걸맞은 곳을 준다는 것. 물론 죄인들이 지옥을 좋아서 간다는 뜻은 아니다. 천국에 가자니 하느님이 싫겠지만 그렇다고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선택권이 없을 뿐.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의 짧지 않은 시기의 기회를 끝까지 거부한 이들에겐 자비없는 심판이 기다린다.

다만 지옥의 선고가 하느님에게서 직접 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한 부분이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라칭거 추기경이었던 때 한 말을 들어보자.
그리스도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파멸을 선고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어디까지나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파멸은 그리스도께서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에게서 멀리 벗어나서 혼자만의 세계에 파묻히고자 하는 인간에게서 온다. 구원의 제공자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길 잃은 인간이 자신과 그리스도 사이에 차단벽을 세우고, 스스로 구원으로부터 분리한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베네딕토 16세, Eschatologie (1977).[26]

3.2. 정교회의 지옥관

그들은 하느님과 멀어진 상태에서 악마들과 함께 영원한 고통과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빛은 그들에게 불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벌하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원하여 받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을 불경하게 하여 행복한 낙원에서 하느님과 사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정교회 교리서 중.

정교회는 하느님을 완전히 알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기보다는 무엇이 아닌지를 설명하는 신학적 사고방식이 발달했다. 교회가 정한 도그마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가톨릭보다 지옥관이 훨씬 유연하다. 정교회에서는 가톨릭처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단절"이 아닌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을 버티지 못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정교회와 가톨릭 양쪽에서 성인으로 인정받는 시리아인 이삭의 말을 살펴보자.
사랑을 거스려 죄를 지은 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슬픔은 다른 어떤 고통보다 더 날카롭다. 지옥에 있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박탈당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사랑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한다. 저주받은 자들에게는 고통으로, 축복받은 자들에게는 기쁨으로![27]
시리아인 이삭, Mystic Treatises.

물론 가톨릭과 유사한 지옥관을 갖는 경우도 많고, 일부는 소극적인 만인구원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정교회에서는 연옥의 존재는 부정하지만,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바친다. 정교회는 천국에 들어간 영혼은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필요가 없고, 지옥에 떨어진 영혼은 영원히 하느님과 단절됐기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본다. 천주교와 같이 연옥의 개념을 구체화하여 체계적인 교리로 가르치지는 않더라도 그러한 중간 상태를 인정하는 것이며, 연옥을 인정하지 않고 중간 상태도 완전히 부정하는 개신교와 다르다.

3.3. 개신교의 지옥관

사악한 자들의 영혼은 지옥에 던져진다. 거기서 그들은 고통과 어두움 가운데서 대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눅 16:23~24, 행 1:25, 유다서 1:6-7, 벧전 3:19).
장로회 헌법 요리(교리)문답 32장 '사람의 사후 상태와 부활에 관하여' 중.

개신교의 캐치프레이즈(??)라고 할 수 있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성경에서 "모두가 죄를 범하였으니 다 죽을 수 밖에 없다."와 "믿지 않는 자는 단죄받을 것이다"라는 말, 그리고 "회개하고 구원을 받지 않은 자는 모두 죄인이다"를 이용해 유추해낸 것이다. 예수 외의 다른 이름으로 구원이 주어지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사실 이 문구는 주로 개신교의 전유물인 양 쓰이고 있기는 하나, 가톨릭과 정교회도 원론적인 구원관 이론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성경에 쓰여있는 것은 어떻게 하면 사람과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구원을 받는가에 관한 것이지 어떠어떠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가 아니기 때문에(물론 그렇다고 악인에 대한 단죄나 지옥 형벌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어찌어찌한 이유로 기독교를 접하지 못하고 죽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지옥에 가냐고 묻게 된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불완전한 인간인 우리는 정확히 모른다. 오직 전능하신 주님만이 알고 계신다"로 하기도 한다.[28]

의외로 이 문제는 신학자들과 신자들 사이에서 상당히 좀 골칫거리인데, 한 신학자는 "당신의 할머니는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지옥에 갈 것이라고 믿는다면,(또는 믿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당신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할머니의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심리적으로 할머니로부터 거리를 둘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한 고통 가운데 있다고 믿으면서도 당신은 일상을 그냥 살아갈 수 있겠는가? 지옥을 믿는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그가 사랑하는 비기독교인의 죽음에 맞닥뜨리고 있지만, 놀랍게도 이 문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아무도 이런 점에 관해서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일종의 침묵의 공모가 존재한다."고 언급한다. 이는 절대다수 아니 사실상의 모든 1세대 기독교인들이 안게 되는 고민으로, 여기에 대한 보수 개신교의 신학적인 관점은 다음과 같다. 죄로 본성이 완전히 타락한 인간은 철저히 악으로 물들어 있어, 은혜 없이 본성만 남은 인간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한 자들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아직도 부분적인 기쁨과 평화가 혼재하고 있다. 사람이 고생 가운데서도 겪는 일상의 음식이나 친구와의 교재, 배우자와의 만남, 자연환경, 치안과 지도자, 깨어졌지만 남아있는 사람의 양심의 작용을 통해 선을 옳게 여기고 행하고자 하며 사회가 돌아가게 유지하는 것 등을 일반 은혜(common grace)라고 칭하며, 이는 예수를 통해 구원을 받는 특별은혜와 구별된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희망이 없어보이던 시기에 하느님의 성령의 영향력이 강하게 부어져 많은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죄를 참회하고 앞장서서 기도하는 영구한 자발적인 신도가 되는 초대교회로의 회귀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부흥'이라고 한다. 이 때엔 신자들이 대폭으로 늘기도 하지만 신자가 되지 않고 그대로 살아가는 이들의 도덕성에도 변화가 생기는데, 범죄율이 급감하고 술집이 장사가 안 되어 문을 닫는 등의 사회적 현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신의 은혜와 그 영향력은 구원의 밖에 있는 자들에게도 큰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은 이는 천성적으로 죄를 사랑하는 아담적 본성과 성령에 의해 살아난 의를 좋아하고 신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부분이 혼재하게 된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땅에서 부패하고 영혼은 각기 다른 곳으로 나뉘게 되는데, 구원을 받지 못한 이는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며(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를 보는 부자 이야기), 구원을 받은 이들은 신의 곁에 거하며 안식을 누리지만 아직 슬픔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고 남아있는 상황[29] 즉, 마지막 심판이 오기 전까진 에녹이나 엘리야 같이 죽지 않고 천국에 올라간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모든 죽은이들은 혼으로서 자신의 생전의 기억을 가지고 존재한다.

최후의 심판의 때가 차면 모든 죽은 자들이 예수의 음성에 부활한 육체로 깨어날 것이며, 구원을 받은 이들은 죄의 본성으로부터 해방된 새롭고 완전한 육체로 천국에 영원히 거하며 악인들은 지옥의 고통을 온전히 느낄 다른 의미에서의 완전해진 육체를 입고 불못에서 밤낮 쉼 없이 고통받게 된다.

'낙태당했거나 낙태는 아니더라도 어린 나이에 죽어 버린 아이들, 또는 성인으로서 일반인 같은 삶을 누리다 죽었으나 선천적으로 지능발달장애 등을 앓아 복음을 이해할 기회가 없었던 자들에 대한 처우는 어찌 되는가?' 하는 주제는 위보다는 의견이 쉽게 견해가 모이고 희망적이다. 그들은 모두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간다. 그들이 무죄한 이들이어서가 아니라(다윗의 시편에서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주터 죄인임을 시사) 심판은 철저히 그 사람의 행위와 그 동기에 의거한다는 것. 나쁜 것이 나쁜 것임을 알고도 행하는 것에 죄에 대한 책임성(accountability)이 부과되는데, 선악의 구별을 할 능력이 부족한 이들은 여기서 자유롭다는 것. 성경에선 이 주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구절은 없으나 간접적으로 뒷받침한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면 곳곳에서 등장하는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이가 태어난 자보다 낫다거나,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하여 낳은 아이가 죽자 '(후에 죽으면) 그가 있는 곳에 내가 갈 것이다' 고 한 말 등이 있다. 다윗은 이미 구원 받은 신자였는데 자신이 죽어 갈 곳에서 죽을 아이를 만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개신교는 오직 '믿음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연옥의 존재를 부정한다. 죽은 자에게 제2의 회개와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것은 대부분 부정한다.[30] 계시가 보다 부분적이고 한정적이었던 구약성경에 묘사되는 시기에선 계시된 부분만큼을 믿은 이들에게 칭의가 주어졌고(예:아브라함이 믿으매 그를 그의 의로움으로 여기시고), 신약성경이 완성된, 즉 닫힌 오늘날엔 예수 그리스도 외의 구원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한국과 같이 기독교 전파가 비교적 늦게 이루어진 곳일 경우 고민이 더 크게 마련인데, 이순신 장군 같은 과거의 위인들을 존경할 경우 등이다. 복음을 접할 기회가 아예 없었으나 자연, 양심 등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생애 전반에 걸쳐 양심을 지키고 자연과 사람을 창조한 조물주인 하느님을 인정하며 산 사람들에 대한 처우는 어찌 되는지는 기독교인들에게도 대단히 궁금한 주제이나, 여기에 대한 개신교의 견해는 일반적으로 불가지론을 취하고 있다.[31]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는 말이나 많이 받은 이는 더욱 많이 맞을 것임이요 라는 구절 등에서는[32] 지옥의 형벌에도 사람의 삶의 내용에 따라 무거움의 차이가 있을 것이나, 좀 덜한 지옥이라 해도 지옥임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해야 한다.

개신교적 관점에서는, 지옥벌은 태초에 인간의 선택에 대한 존중 즉 자유의지를 인정하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신은 인간을 사랑하기에 인간을 자기 멋대로 취급할 수 있는 인형으로 다룰 수 없고, 그리하여 인간 스스로의 선택과 그 책임으로 사후가 나눠지는것이다. 이렇게 신이 인간을 너무나 사랑해서 인간의 몸으로 내려와 모욕과 죽음을 겪으면서까지 죄에서 벗어나 살 길을 내놓았는데 일말의 관심도 시도마저 거부한다면 어쩔 수가 없다는 것.

다만 일부의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만 베푸는데 거부하니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가는 곳이 지옥' 이라는 의견은 성경의 관점은 아니다. 그 지옥을 창조하고 무한한 힘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면서 죄인들을 존재의 소멸(annihilation)도 못하게 막으며 영원히 고통을 가하며 유지하는 것도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의 안전에서 쫓겨나는 것은 맞으나, 엄밀히는 신과 완전한 의미로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이 형벌에 있어서 신은 매우 주동적이다. 성부와 완전히 하나이며 공생애 기간 인간으로서도 가장 친밀한 관계를 누렸을 성자 예수가 성경 누구보다도 지옥을 자주 설명했으며 모든 수를 다해서 우선적으로 피하라고 경고하는 만큼, 인정이 많고 마음이 약해서 사람을 지옥 못 보내는 하나님은 사람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불과하다.[33]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야훼)은 여러가지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사랑과 자비, 은혜로움, 공의로움, 선함, 거룩함 등이 동시에 완전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사랑이 많고 자비로워 죄악을 용서하길 좋아하나, 동시에 죄를 너무나도 미워하며[34] 공의롭고 공평하기에 잘못을 그에 알맞게 갚는 재판관의 속성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생기는 것이 딜레마인데, 여호와(야훼)가 정의로우면 죄인들을 형벌 없이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성삼위의 제2격인 성자가 인간 예수로서 세상에 내려왔고 인간이 된 하나님으로서 완전한 무죄의 삶을 살고 죄인들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부활했다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이다. 이 때 성부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철저히 주동적으로 버리고 짓밟았는데, 왜냐하면 이 때 성자에게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인간들의 모든 죄가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 채찍질이나 십자가형도 견디던 예수가 딱 한 번 자신의 고통을 호소했으며[35], 이렇게 철저히 버림받음으로써 공의가 실현된 것이다. 즉 성경의 여호와는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과 자비가 넘쳐서 사람을 도저히 지옥에 못 넘기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된 곳에 불이 우연히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스스로의 은혜로부터 격리시킨 죄인들 고통받으라고 불을 만든 것이다.

또한 감각적인 형벌(각고)에 대해서는, 불에 의한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 신학자들과 성경의 주요 논지이다. 또한 동일한 형벌을 당하며 고통받는 자들과, 또 악마들과 살게 됨으로서 고통이 더욱 처절하게 되는 등의 형벌이 가해진다고 본다. 단 고통을 굳이 육체적인 것이 없을 것이라고 볼 근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직관적으로 읽었을 때 가장 쉽게 이해될 내용 또한 육체적 고통이다. 악인은 영혼만 음부에서 고통을 받다가 지옥심판 전에 육체를 새로 입고 부활하는데, 이 육체는 지옥의 고통을 영육간에 느끼도록 준비된다는 의견이 있다. 성경의 언급대로 불과 유황으로 묘사되는데, 지옥의 묘사 중 어둠 또한 있으니 그럼 이 또한 모순 아니냐, 불은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자세히는 그리지 않으나 내세의 많은 것이 이 세상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현세에서 그 고통을 비교할 만한 것이 불과 유황이라면[36] 그것이 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겠나며 지옥을 피하라는 것이 개신교의 입장이다.육적인 고통이냐 영적인 고통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쨌든 엄청 고통스럽다는 게 중요한거다.

진짜 단순하게 이야기 해보자. 튀김하다가 기름 좀 튀는 것도 잠깐이나마 아프고, 불에 데이는 건 그보다 더 격한 고통이다. 그런데 온 몸이, 밤과 낮, 24시간, 세세토록, 쉼을 얻지 못하고, 영원히, 존재의 소멸 같은 것도 없이 누우나 서나 숨을 쉬나 불이며, 주위엔 함께 고통받는 수많은 자들과 마귀들이 있고, 울음소리와 이를 가는 소리가 가득하며, 현세에선 아무리 심한 독감에 걸려도, 망치에 손을 찧었어도, 과로로 쓰러져도, 시간이 지나고 조리를 잘 하면 나아지고 고통이 멎을 것이라는 희망이라도 있지, 단테의 곡에서 표현하듯 이곳은 아무런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지옥이다. 인간이 인생을 살며 지은 죄에 비해 형벌이 과도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나, 죄를 지은 존재가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는 어떤 의미 부여를 하며 스스로 변호하거나 장렬히 소멸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기 위하여, 지옥에서는 존재의 소멸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만이 절대적 진리가 되어야 하는데, 지옥의 형벌이 영원하지 않다면 여러 존재들이 존재의 소멸을 걸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여러 기준들을 만들어 낼 것이므로 지옥의 형벌이 영원하다는 의견이다.

물론 개신교에서도 지옥이라는 곳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탄이나 악마가 사람들을 불로 괴롭히는 곳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이에 관해서도 사탄도 지옥에서 같이 벌을 받는데 이들이 죄인들을 괴롭히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주장도 있는 반면, 악마들이 최후의 심판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징벌에 처해질 때까지는 지옥에서도 죄인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고 보는 신자들도 있어서 갑론을박이 좀 있다. 그러나 일단 성경에서 말하는 불못(lake of fire)은 우선적으로 '사탄과 그 휘하의 타락한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곳'이다. 천사들이 인간보다 먼저 타락했고, 성경에서 정확한 이유는 언급이 없으나 그들에겐 예수를 힘입어 구원입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37] 그들은 때가 차면 무조건 들어가기로 예비된 것이다. 구원이 없는 인간들은 그들과 본성적으로 같이 악하기 때문에 함께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땐 마귀가 일종의 고문관 역으로서 인간을 괴롭히고 있는 장면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지옥의 고통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동적인 힘으로 가해지는 것이기 때문.

또한, 요즘 인터넷 등에 자주 돌아다니는 지옥을 본다는(사적인 지옥간증 등) 체험은 성경적, 교회적으로 검증되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당연히 그릇된 것이다.

지옥을 포함한 종말론 전체에 대해서는 성공회 신학자 톰 라이트의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가 훌륭한 서적이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읽어 보는 것도 좋다. 종파에 관계없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으며 파격적인 주장보다는 전통적인 논증을 통해 새로운 지옥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해당 책에서는 게헨나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는 현세에서 회개하지 않은 경우 사후에서 겪을 일에 대한 경고라기 보다는 당대 로마에 대한 무장 반란의 결과에 대한 경고로 보고 있으며,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비유 역시 사후의 운명이 아니라 현세에서 정의와 자비를 가르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지옥에 대해서 예수님의 비유에서 명확한 결론을 끌어내기는 어렵다고 보는 입장이다. 톰 라이트 스스로는 지옥에 있는 인간은 '한때는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피조물'로서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4. 기타 이론

4.1. 총체적 구원론

기독교 역사상 소수파에 속하는 이론이나, 지옥의 형벌은 유한한 것이며 하나님이 결국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이론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39] 오리게네스 등 여러 교부 및 신학자에 의해 꾸준히 제기되었다.[40] 그러나 이 주장은 가톨릭에서는 일관되게 단죄되고 배척된 사상이다. 대다수 개신교 신학자와 정교회 신학자들도 총체적 구원론을 부정하나, 일부 신학자는 희망적인 해석을 하기도 한다.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정론의 재해석을 통해 그러한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겼으며[41] 위르겐 몰트만 역시 만유화해론을 주장하였다. 총체적 구원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다음 성경 구절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42]
그러니 한 사람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로마서 5:18-19)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로마서 11:3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2)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10-11)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 (골로새서 1:20) [43]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요한계시록 15:4)
"요한계시록에서 "만국"이라는 말은 항상 "회개의 촉구를 끝까지 거부하고"(계 14:6) 성도들 및 어린 양에 맞서 최후의 전쟁에 나서는(20:8), 그리하여 하나님의 종말론적 진노의 대상이 되는 악인들을 가리킨다(계 11:8; 12:5; 19:15). 그러나 요한계시록 15:4과 새 예루살렘의 성문이 만국이 들어가도록 열린다고 말하는 요한계시록 21:24-25은 마지막 때에 "만국"에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신학교에서 그리스어 본문을 주석하면서 한 단어나 어구의 의미를 알아내는 한 가지 방법은 성경 저자가 다른 본문에서 그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패리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에서 "만국"은 항상 악인들을 가리키기 때문에 나는 나의 주석 규칙에 따라 요한계시록 15:4에서 "만국"은 모든 사람을 가리키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와서 경배할"것이라고 결론 맺을 수 있다."[44]

4.1.1. 오리게네스(185년?~254년)

우리도 이 주제들에 대하여 확실하고 결정적인 해결책을 내놓기보다는 매우 두렵고 조심스런 마음으로 논의하고 검토하는 자세로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교의로 분명하게 결정되어야 할 주제들이 무엇인지 앞에서 제시하였다. 삼위일체에 관하여 논할 때 우리는 이에 관해 있는 힘을 다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주제들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토론하는 형식을 취하고자 한다. (중략) 악마의 권세 아래서 행동하며 악마의 사악에 복종하는 이 계층들 가운데 어떤 존재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자유의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미래의 시대에는 언젠가 선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가? 아니면 계속되고 고질화 된 사악이 습관이 되어 완전히 굳어지는가?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도, 보이는 현세에서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내세에서까지(2코린 4,18참조) 창조의 한 부분이 최후의 일치와 조화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갈 것인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중략) 수많은 세월 동안 견뎌 내야 하는 벌을 받고 혹독한 교정을 거치면서 모두 회복되고 복원될 것이다. 먼저 그 심부름꾼들이 교화되고 그다음에는 상위 세력들이 교화될 것이며, 이런 식으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존재들에까지 이르게 되며, 각자 교화의 정도에 따라 천상 세력의 직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
오리게네스 원리론 제1권 6장, 티란니우스 루피누스의 라틴어 역본[45]
이러한 영혼은 자신의 분열과 해체로 불의 시험을 겪은 뒤, 의심할 나위 없이 내적 일치의 강화와 회복으로 굳건해질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우리 영혼의 의사이신 분에게만 알려진 다른 벌도 많다. (중략) 다양한 죄악과 범죄로 생긴 우리 영혼의 병을 씻어내길 원하시는 우리 의사인 하느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형벌 치료법을 사용하시고, 영혼의 건강까지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불의 형벌까지 내리시지 않겠는가?
오리게네스 원리론 제2권 10장, 티란니우스 루피누스의 라틴어 역본[46]
2세기 교부이자 최초의 조직신학자로 일컬어지는 오리게네스는 만물의 끝은 언제나 그 시작과 상응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총체적 구원론을 주장했다. 다만 오리게네스가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할 때는 단언이 아닌 가정법을 구사하였으며,[47] 해당 견해는 악마의 회개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인 것으로 보여지나 오리게네스 자신은 악마가 구원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48]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가 저서 '약상자'에서 오리게네스를 이단중 하나로 거명한 이후 이른바 '오리게네스 논쟁'이 벌어졌다. 400년 로마 종교회의에서 오리게네스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에 충실한 신앙인이 아니라는 선언이 반포되었으나 이후에도 논쟁이 지속되었다. 최종적으로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543년 반 오리게네스 칙령을 반포하였으며,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오리게네스가 이단자로 지명되어 오리게네스 논쟁이 종결되었다.[49]

4.1.2. 니사의 그레고리오 (335년?-395년?)

악은 본질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죄인은 그의 악행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면 한계에 부딪히므로 지옥의 벌은 하느님이 영원한 것처럼 그렇게 영원하지는 않다고 보았다. 즉 피조물은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회개 이후 그분에게 돌아가도록 운명지어졌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가톨릭 교회에 의해 한번도 단죄되지 않았다.[50][51]

4.1.3. 고백자 막시모(580년-662년)

한마디로 모든 피조물의 본성은 정해진 때가 되면 부활을 통해서 육신의 완전성을 되찾는다고 말해야 한다.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억겁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의 영혼에 달라붙은 악의 흔적이 사라지게 되고, 결코 평온(stasis)을 유지할 수 없는 오랜 시간의 배회가 끝나면 결국에는 어떠한 한계(peras)도 없는 하느님께 당도하게 된다. 이렇게 그는 죄인이었음에도 하느님을 온전히 알아보게 되지만, 처음의 상태로 되돌아가서(apokatastenai) 하느님께 참여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창조주의신 하느님께는 그들이 저지른 죄악이 어떠한 형태로든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 발타사르의 지옥 이야기, 134p
그레고리오를 두둔하여 모든 악인이 마지막에 하느님께 돌아온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그들도 지복직관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4.2. 종결적 형벌설

지옥은 예수께서 이루신 속죄에 의지하지 않는 자가 스스로의 고난을 통해 속죄를 이루어야 하는 상황이며, 그런 자들은 형벌을 받은 후에는 사라진다는 이론[52]으로 해당 이론에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영원', 멸망' 등의 용어를 영원한 고통을 주장하는 입장과 다르게 해석한다.[53]

4.2.1. 영원[54]

해당 이론에서는 성경에서 '영원'이라는 단어는 반드시 시간적으로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며 다음의 구절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출애굽기 12:24-25
그 때에 솔로몬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
열왕기상 8:12-13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11-12
위 구절에서 '영원한'은 그리스도께서 지속적으로 속죄를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며, 오히려 속죄가 단번에 이루어짐을 강조하고 있다.

4.2.2. 멸망

다음 구절을 예로 들어 멸망이라는 단어는 종결적인 멸망을 의미함을 지적하고 있다.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 시편 37:9~10, 개역개정판)
주의 복을 받은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끊어지리로다(시편 37:22, 개역개정판)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미래는 끊어질 것이나(시편 37:38, 개역개정판)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 같이 만국인이 항상 마시리니 곧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 같이 되리라(오바댜 1:15~16, 개역개정판)

4.2.3. 영원한 고통의 근거 본문 해석에 대한 반론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4장 9~11절, 개역개정판
요한계시록이 크게 의존하는 구약성경에서 '쉼'은 경험의 중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것으로서의 안식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그런 운명에 처한 죄인은 결코 쉼을 얻지 못하고 고통을 겪고 죽게 될 미래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중략)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요한계시록 20장 10절, 14절, 15절. 개역개정판
해당 본문에서 사망과 음부가 세세토록 괴로움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이며, 그 대신 사망과 음부가 끝난다고 보아야 본문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악인들은 불못에 던져지지만 영원히 고통받는다는 구절이 있는 마귀, 짐승(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와는 달리 영원히 고통받는다는 언급이 없으므로 불못에 던져져 소멸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5. 기독교를 접할 기회가 없던 사람들의 문제

나를 공경하던 자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게 되었다. 이 야훼는 그것을 똑똑히 들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나를 공경하고 내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나는 책에 적어두고 잊지 않으리라. ( 말라기 3:16, 공동번역성서)

당장 아브라함부터 예수를 믿지 않고 죽었지만, 마태복음 8장 11절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천국에 가게 된다고 되어 있다. 또한 마태복음 12장 41절에 따르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이방인 니느웨 사람들 역시 천국에 있다고 나와 있다. 요한복음 8장 56절에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보고 기뻐하였다고 나왔고, 십자가 사건 이전임이 분명한 누가복음의 부자와 나사로 일화에서 아브라함이 좋은 곳에 있는 것으로 나오는 것으로 볼 때, 기독교를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며 하나님에 대한 진실된 믿음을 가지고 죽은 사람들은 말라기 3장 16절에서 말하는 기념책에 기록되어 유대인 이방인 상관 없이 좋은 임시거처에 머무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성육신 이후로 예수를 믿을 기회를 얻었다.

로마서 1장 20절에는 누구나 만물을 보고 창조주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고, 로마서 2장 14-15절에 이방인들은 자신의 양심이 율법의 역할을 한다고 나와있다. 즉, 누구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해서 하나님을 믿을 기회 자체는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를 접하지 못했어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죽으면 지옥에 가게 되고, 기독교를 접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유일신 신앙을 가지고 살다 죽은 사람이 나올 경우 죽어서 아브라함이 있던 곳에 가서 예수를 믿을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이 있다. 만약 기원 후에 기독교를 접할 기회는 없었지만 아브라함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다 죽은 사람이 지옥에 갈 경우, 아브라함이나 그 사람이나 똑같은 기회 하에서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죽었지만 예수님이 이미 오셨다는 이유 때문에 한명은 천국에 가고 한명은 지옥에 가는 불공정함의 문제가 생긴다. 물론 요한복음 3장 36절을 볼 때 기독교를 접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예수를 믿지 않았을 경우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지옥에 가게 될 것이다. 이슬람교의 경우 이슬람교 경전인 꾸란에 기독교를 비판하는 내용이 있어서 기독교의 존재를 모를수가 없으므로 기독교에서는 이슬람교에 구원이 없다고 본다. 또한 마태복음 24장 14절에 따르면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믿을 기회가 주어져야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되어 있는데,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역사상 살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구원의 기회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기독교를 접하지 못했을 경우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죽으면 죽어서 예수를 믿을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석했을 때, 구원에 있어서의 불공평함이 해소된다.

다만 행위구원, 연옥, 사후 복음을 접할 기회 등의 주제에 대해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교파들 사이에서 다양한 이견이 있다.

6. 보복의 장소?

기독교가 한때 박해받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파된 종교라서 그런지, 기독교 계통의 지옥을 묘사한 그림은 거의 공통적으로 천국이 같이 묘사되고 있으며, 한결같이 천국에 있는 자들이 질서정연하게 지옥에서 괴로움에 신음하는 자들을 내려다 보고 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온 악한 부자와 거지 라자로가 각각 엄청나게 먼 거리인 지옥과 천국에 있었으면서도 서로를 볼 수 있었다는 묘사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고, 현세에서 악인들에게 시달리고 고통받던 신자들에게 위로감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글귀가 2세기경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쓴 지옥에 관한 글.
그 날의 광경이 얼마나 장엄할까! 난 어떤 장면에서 처음 웃음을 터트리고 박수를 치게 될까나?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지던 왕들은 그들이 올라가는 걸 지켜봤다는 그들 신들의 왕 유피테르와 함께 어두운 심연 속에 빠져 고통의 신음을 하고 있겠지. 주님의 이름을 박해한 통치자들이 용감한 기독교도들을 죽이려고 지른 불보다 훨씬 더 맹렬한 불꽃 속에서 녹아가고 있을 테지. 불구덩이에 함께 빠져 제자들 앞에서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는 현명하다던 철학자들, 세계는 하느님 관심 밖에 있다는 그들의 주장을 추종한 자들, 애초에 영혼이란 없다고 믿거나 아님 자신들의 영혼은 본래 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확신했던 자들은 어떻게 될까?

유피테르의 아들 라다만튀스나 미노스의 심판대 앞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벌벌 떠는 시인들의 모습, 놀랍지 않은가? 자신들의 멜로 드라마 속에서 통곡하는 비극 배우들의 목소리는 어쨌든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불 속에서 펄쩍 뛰는 희극 배우들이야말로 볼만할 것이다! 전차를 몰던 유명한 전사는 그의 불바퀴 위에서 구워질 것이고, 운동 선수들은 경기장에서가 아니라 불속에서 바퀴처럼 굴러갈 것이며… 이것들 모두 서커스장이나 어떤 극장, 운동경기장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신나는 일들일 거야!

근데 사실 이런 생각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이라는 게 성경의 가르침이다. 기독교 신자의 기본 자세는 악인 누구누구가 지옥에 가서 고소하다 낄낄같은 게 아닌, 악인의 회개를 항상 기도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생전에 뉘우쳐서 지옥에 가지 말기를 바라야 하기 때문.[55] 물론 애초에 로마제국 시대의 박해받는 기독교인 및 순교에 감동해서 개종했고, 방어적 호교론의 달인에다 나중에 몬타누스파 이단에 빠질 정도로 성격이 불같았던 테르툴리아누스의 성격을 감안해서 이해해야 하겠다.

그러나 이는 '죄'의 개념을 상식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며. 성경에서 죄는 수직적인 것으로,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한 것이 우선시된다.

신으로부터 스스로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말까지 들었던 다윗이 충성스러운 장군 우리야를 남의손을 빌려 죽이고 그 아내와는 간통하여 아이를 낳고 은폐하고자 기도하였다. 이는 어지간한 막장드라마 못지 않은 큰 죄악이었지만 그는 회개기도에서 '제가 오직 주님 앞에 죄를 지었사오나' 라고 하는데, 이는 다윗이 우리야나 그 아내에게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 인해 가장 크게 모욕을 입은 이가 계명을 무시당한 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길게 살아봐야 100년 동안인 사람이 죄를 그동안 지은 것을 가지고 어떻게 영원한 벌이 합당한가? 과도한 잔혹함(overkill)이 아닌가?' 에 대한 성경의 대답이 이것으로, 비유하자면 물건을 파손할 경우 무엇보다 그 물건의 주인에게 죄를 짓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겠다. 그만큼 하느님이 높은 분이라 죄에 대한 대가가 크다는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의로운 하느님은 인간이 사소하다고 여기는 죄 하나까지도 맹렬히 증오하고 그것을 반드시 심판한다. 죄를 하느님의 기준으로 인식하면, 지옥의 영벌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공의로운 심판인것이다.

즉 영원히 고통 받는 형벌로도 죗값을 다 못 갚아 지옥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성경의 관점에선 구원을 받지 못한 무수한 이들의 영원한 고통<<<<<<<<<<<<<<<<예수의 속죄 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불의에 대한 처벌을 탄원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를테면 돌을 맞고 죽은 예언자 즈카르야, 또는 묵시록의 순교자 등에 대한 일화 등이 그렇다.

하지만 위의 문단을 "우리 집에 입양한 고양이가 내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파손했다고 해서 고양이에게 고양이가 이해할 수 없는 형벌을 내려야하는가?"로 치환해서 생각해보면 굉장히 자기중심적이고 과잉된 처벌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고양이는 내려지는 형벌만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만큼 훈련이 가능할 수도, 못할 수도 있고, 물론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문맥에 따라 케바케일 것이다. 하지만 실수 한번 할때마다 그걸 무한한 존재의 공의랍시고 감정 내키는대로 다 쌓아 올려서 형벌을 내려버리면 고양이가 배울 기회가 얼마나 될까? 둘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고양이가 집사를 더 이상 안믿고 마음을 닫아버리고 삐뚤어져 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하다 못해 현대의 인공지능의 학습도 수많은 실수를 하며 만들어진다. 인공지능의 실수의 크기들을 상대적으로 정량화하는 매 loss function의 반환 값마다 무한한 존재의 공의랍시고 화가난다고 무한을 더하거나 곱해 버리면 인공지능이 제대로된 학습이 가능할까? 무기력을 학습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애초에 우리 인간이라도 이런 과정을 감당하지 못할거면 애초에 입양을 하지 않는 게 나를 위해서도 고양이를 위해서도 차라리 현명한 선택이며, 이런 식의 변증은 그냥 말이되는 말들을 갖다 붙여 그 상황에서만 말이 되게 만들고 대충 넘어가버리는 책임없는 애드혹 논증으로 밖에 보여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위와 같은 논증은 하나님은 무한히 큰 존재이므로 그가하는 행동이나 가치관의 '거칠음' 혹 '비정밀도' 역시 무한히 커지고, 따라서 그 역수인 '섬세함' 혹 '정밀도'는 무한히 떨어진다는 자기모순적인 얘기 밖엔 안된다. 하나님의 심판이 늘 광역기인 이유

그리고 성경에는 정작 위에서 말한 "성경에는 불의에 대한 처벌을 탄원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의 정 반대도 경우들도 있다. 예수의 죽음이나 스데반의 순교 같은 경우일 것이다. 예수의 경우 자신의 핍박자들의 무지를 이해하고 용서하기를 원했고[56], 사도행전의 스데반의 경우 돌을 맞으며 죽는 상황에서까지 자신의 핍박자들을 용서하고 싶어했다.[57] 더구나 위에서 언급된 "묵시록의 순교자" 중에는 스데반도 있을텐데, "기독교의 첫 순교자라고 알려져있는 스데반이 그때에는 처벌을 원할까?"에 대한 대답은 비신자들이 대답해줄 수 없는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문제일 것이다.[58]

7. 기타

단테의 신곡에서 등장한 지옥은 후대에 창작되는 무수한 지옥에 모티브를 주었으며, 또 그렇게 묘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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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로댕이 만든 ' 지옥의 문'. 윗부분의 턱을 손으로 받치고 앉아있는 모습의 조각이 바로 로댕의 대표작인 ' 생각하는 사람'이다. 단테의 < 신곡>에서는 지옥의 입구에 있는 문에 이러한 글귀가 적혀 있다고 쓰고 있다.
나를 지나는 사람은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나는 사람은 영원한 비탄으로,
나를 지나는 사람은 망자에 이른다.
정의는 지고하신 주를 움직이시어,
신의 권능과 최고의 지성과
원초의 사랑으로 나를 만들었다.
나보다 앞서는 피조물이란
영원한 것 뿐이며 나 영원히 서 있으리.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59]

"Per me si va ne la citta dolente,
per me si va ne l'etterno dolore,
per me si va tra la perduta gente.
Giustizia mosse il mio alto fattore;
fecemi la divina podestate,
la somma sapienza e 'l primo amore.
Dinanzi a me non fuor cose create
se non etterne, e io etterno duro.
Lasciate ogni speranza, voi ch'entrate."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 현대의 기독교 신자들은 천국보다 지옥을 훨씬 잘 안다. 천국에 뭐가 있는지를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뭇거리지만, 지옥에 대해서 물어보면 술술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 비해서 지옥에 대한 성경의 서술이 상대적으로 더 많고, 논의 또한 훨씬 더 구체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으며, 천국에 뭐가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오늘날까지도 상당히 추상적인 선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근대와 현대의 기독교가 천국에 대한 약속보다는 지옥에 대한 공포를 불어넣는 방식으로 포교를 했다는 증거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오늘날의 기독교 신자들 역시 기독교가 정확히 무엇을 약속하는지는 알지 못하고 단지 지옥이 무서워서 교회로 피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현대의 기독교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문제 중 하나다.

사실 그렇게 이상한 현상은 아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람들은 좀 더 자극적이고 두려운 기억을 머리에 더 잘 각인하게 된다. 애초에 예수가 가르치던 사상들이 지옥에 중점을 맞춘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시선이 쏠려버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 생산계급들은 지배계급보다 교육상태가 열악하기 마련인데 그들에게 포교를 하려면 서적이나 논리적인 대화보다는 보기에도 웅장한 종교건물과 자극적인 예시와 비유가 더욱 효과적이었다. 기독교뿐 아니라 세계적인 종교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포교를 하였는데 불교의 세밀한 지옥묘사를 보면 오히려 기독교의 지옥이 설정이 탄탄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 또한 요한 계시록의 경우도 세계의 멸망보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서 쓰여졌다는 것을 한 번만 읽어봐도 알 수 있게 되지만 (물론 내용이 난해해서 정확한 뜻은 모를테지만) 정작 요한 계시록이 지금 어떤 책으로 유명한 지를 생각해보자. 이런 기적이나 멸망에 집착하는 모습은 모든 종교에서 볼 수 있는 당연한 것이며 이것이 굳이 기독교의 특징이라고 보기엔 거시기한 편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도 그의 말이 틀려서가 아닌 자신들의 생각과는 다른 너무나도 평범한 모습과 기득권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여서였다는 것도 생각해보자. 결국 사람은 기본적으로 말의 속뜻이나 의미보다는 겉에 보이는 신비함과 두려움에 좀 더 집착한다는 것으로 이런 문제는 종교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퍼져있는 선입견이라 반성이 필요하다.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의 발언을 인용해서 '하느님은 창조론에 의심을 가지는 놈들을 위한 지옥을 세계창조 이전에 만드셨다'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저서인 고백록에 이 발언을 써 놓긴 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진지하게 이를 주장한 것은 절대 아니고 '이런 식으로 농담으로 대답하지 말고, 창조론에 대해 제대로 대답해야 한다. 모른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모른다고 해라.'라는 표현이다.[60]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옥에 갈 가능성을 절대 무시하지 말라며, "두 명 중 하나는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두명 중 하나는 지옥에 간다. 두려워하라." 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즉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지만 하느님을 끝까지 거부하는 삶을 살면(그것이 불신죄든 일반 죄악이든) 결국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는 도덕적인 경고의 말이다.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는, 주인공이 다니던 학교 신부가 지옥에 대한 설교로 학생들에게 겁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의 결론은 주인공이 오히려 주인공이 배교하고서 예술가의 길을 가기로 하는 것이지만, 문제의 지옥 묘사는 매우 생생하게 잘 되어 있다.

생전에 수많은 기적을 보였고, 가톨릭의 20세기를 빛낸 거룩한 성인으로 유명한 오상의 성 비오 신부는 생 말년에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많은가요?"라는 어떤 사람의 질문에 강물처럼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일화가 유명하다. 참고로 비오 신부가 저 말을 했을 때는 20세기 중반이였다.[61] 그래도 지옥보다는 천국에 가는 사람들이 더 많을것 같다는 이야기 또한 하긴 했다.

8. 같이 보기



[1] 기독교 가정에서 아동학대를 저지르는 부모가 이 구절을 인용하여 자신들의 학대를 정당화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2] 왜 '두 번째' 죽음이냐 하면, 죄인이 이승에서 한번 죽고 최후의 심판날에 부활한 뒤 다시 불지옥의 영원한 멸망 형벌로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영원한 지옥 형벌을 둘째 죽음으로 묘사한 것.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두 번째 죽음의 형벌을 면한다(= 천국의 구성원이 된다)는 구절이 요한 묵시록에 적혀 있다. [3] 고의적인 무신론(반신론이나 반종교주의도 포함)이나 불가지론, 냉담자의 길에 빠지거나, 교리에 대한 고의적 거부, 배교 또는 타종교로의 개종 등으로도 이뤄질 수 있다. [4] 이런 경우의 신앙 거부로는 외부의 압력이나 겁박에 의한 반강제적 배교나 우상숭배 행위 등의 예시를 들 수 있다. 이런 경우도 압박에 자유의지로 저항할 수 있었는데도 안했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것이므로 회개와 외부의 불신앙에 굴하지 않는 태도가 신자들에게 필요하다. [5] 당연한 말이지만, 이 범주에는 고의적인 불신자, 이단자들 뿐만 아니라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올바른 가치관이나 행실로 살기를 거부하는 기독교 신자 죄인 역시 들어갈 수 있다. 즉, 신자라고 해서 구원에 대해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된 삶을 살아가려 반성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6] 물론 다 그런건 아니라서, 사두가이 파처럼 여전히 토라만 인정하고 사후세계를 부정하는 종파들도 있었다. 이후 소멸했지만. [7] 유아 림보가 아닌 구약 시대의 의인들이 머물렀다 천국으로 올라간 곳, 가톨릭 신학에서는 유대교의 사후세계=스올=고성소로 본다. [8] 일부 번역본에는 할아버지, 조상님으로 번역하였다. [9] 한자가 陰部라, 여성의 생식기관을 일컫는 단어와 한자 철자가 똑같다. 복음서에서 묘사되는 음부는 스올과 동일시되며, 예수가 악인들이 가는 유대교의 저승 개념 = 지옥으로 사람들에게 설명한 것이라 본다. [10] 로빈 A. 페리 외, '지옥 논쟁', 새물결플러스, 2019, 31-56p에서 발췌. 이하 '지옥 논쟁'으로 표기 [11] 지옥에 가는 사람들에 관해, 칼뱅식 예정론을 견지하는 경우가 많은 개혁주의 개신교와의 차이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12] 페터 제발트 저, <가톨릭에 관한 상식사전>에서 인용. [13] 이 점 때문에 예를 들어 현대 가톨릭에서는 이전에는 자살자는 무조건 지옥에 가는 죄인이라며 장례미사도 안해주던 관습을 벗고 자살자에 대한 미사나 기도를 해주는 편이다. 가톨릭의 성인인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의 일화 중에도 관련 이야기가 나오는데, 가족 중 한명이 투신자살한 것 때문에 고통받는 여교우에게 (하느님에게 영적인 기적과 은사를 많이 받은) 비안네 신부가 "그는 죽기 직전 짧은 시간동안 회개하여 지금 연옥에 있으니 안심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 고 이야기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사실 이론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쉽지 않을 것이다. [14] 가톨릭 신학자들의 해설 문헌들을 보면, 교회에 소속된 충실한 교인들의 구원과 죄인/비신자의 구원의 차이는 홍수에서 안전한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과, 물에 빠져 헤엄치고 있는데, 죽을 확률이 높지만 간신히 살아날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조난자의 상태와 비슷하다고 한다. [15] 엄청나게 많은 비가톨릭 사람들과 타교파 교인들이 오해하는 것인데, 가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올바른 행실로 신앙생활을 해야 지옥벌을 면하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쳤지 가톨릭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들도 천국에 확정적으로 갈 수 있다는 식의 만인구원론이나 종교다원주의성 주장은 역사상도 지금도 단 한번도 인정한 적이 전혀 없다. 차라리 이단설로 배격했으면 배격했지... [16] 또한 같은 맥락에서, 가톨릭 서적 등에서 종종 보게되는, "가톨릭 교회는 단 한 사람도 지옥에 떨어졌다고 확정적으로 단언한 적이 없다." 은근히 유명한 말이 있는데, 이런 식의 설교나 해설도 주의해서 알아들어야 한다. 일단 서술 자체는 사실이지만, 이는 지옥에 갔거나 가게 되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구원의 문제는 하느님만의 영역이라서, 인간의 입장에서는 어떤 특정 개인이 구원받았는지, 지옥에 갔는지, 아니면 연옥에라도 있는지 확실히 장담할 수가 없다는 매우 겸손한 표현이다. 이를 비신자들도 천국에 간다~는 식으로 오해하면 절대 안된다. [17] 하단에 서술된 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18] 대부분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죽어 세례를 받지 못한 선한 사람들, 또는 온갖 위인들처럼 살아 생전 선량하게 살았으면서 기독교가 뭔지조차 모르고 죽은 사람들. [19] 신학적으로 봐도 크게 무리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지옥에 가게 되는 가장 큰 원인 두가지는그리스도에 대한 '고의적인 불신'과 죄(대죄와 중죄)를 짓는 생활인데, 유아는 아직 충분한 지성과 자유의사가 없으므로 이 두 가지를 모두 짓지 않은 채 죽기 때문이다. 원죄는? 가톨릭에서는 사람이 원죄 가지고 있을 경우는 원죄만으로 지옥에 가는건 아니라고 본다. 사람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원죄 때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자유의지로 짓는 중대한 죄( 대죄) 때문이다.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역사속 현인들과 선인들의 경우도 이 '유아의 구원 문제'와 얼추 비슷하다. [20] 여기서 핵심은 '자기의 탓 없이'라는 어구인데 이로 미루어 볼 때 위에서도 주구장창 설명했지만 가톨릭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구원의 길을 인정하는 것(종교다원주의)이 절대 아님을 잘 알 수가 있다. [21] 소죄라고 해도, 통념상 어지간히 선하게 살지 않았다면 주일미사에 거의 빠진 적이 없는 신자라도 천국에 직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누군가 선종했을 경우, 연옥에 갔을 것이라는 전제를 기본으로 깔고(물론 드러나지 않는 불신이나 죄로 지옥에 갔을 지도 모르지만, 혹여나 하느님의 자비로 회개하여 연옥에라도 가게 되었을지 인간의 입장에서는 알기 힘드므로) 죽은 이의 구원을 위한 기도인 연도를 한다. [22] 무슬림은 지옥에 가도 시간이 지나면 천국에 가고, 비무슬림은 영원지옥이라는 사상. [23] 지옥은 장소가 아닌 인간의 영혼 상태 그 자체라고 보는 사상. [24] 정확히 설명하면, '본래 의미의 지옥불'이라는 표현을 쓰긴 하지만 우리가 직접 현실에서 마주하는 그런 성질의 불은 아니고, 고통의 상징 또한 아니며, 악마, 악한 영혼과 구별되면서 실제적 고통을 주는, 신비스러운 불이라고 규정했다. [25] 교황청의 상급 사면기관으로서, 일반 사제나 주교의 권한으로 사면이 불가능한 심각한 대죄(예를 들어 성체모독에 대한 사면 등)와 관련된 사안을 검토하는 기관이다. 교회법에 명시된 사면 유보의 중죄(교황에 대한 폭행이나 성체모독사건 등) 사건이 교황청으로 올라오면 해당 죄인의 상태를 심사, 사면 여부를 결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26]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발타사르의 구원 이야기』, 바오로딸, 2018에서 재인용 [27] 즉, 하느님을 사랑하는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하게 느껴질 하느님의 그 사랑이, 하느님을 적대하며 구원받지 못한 이들에게는 마치 불과 같이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것. [28] 성경을 '구원에 도달하는 가이드북'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 가이드북을 본 사람은 이미 기독교와 믿음에 대해 알고있다고 전제할 수 있고, 이때의 선택지는 믿느냐와 믿지 않느냐로 갈린다. 어디까지나 가이드북은 가이드북을 읽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쓸데없는 사족은 서술하지 않는것이 책을 읽는 입장에서 편하기 때문 [29] 우편 강도는 예수와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을 들었다. 요한계시록엔 하느님 주위에 거하는 순교한 영혼들이 자신들에게 가해진 불의함을 속히 갚아주시지 않으시냐고 탄원하는 묘사가 존재한다. [30] 일반적으로는 그러하나 몰트만 등 일부 신학자들은 만유화해론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31]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4150 [32] 예수 안에서 보다 성숙한 이가 고의로 잘못했을 경우 거기에 대한 징계가 더 크다는 경우에도 적용되나(예: 모세는 거룩한 이였기에 죄에 대한 징계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 경우는 신자의 생전의 징계일 뿐 구원에는 영향이 없다. 그 외엔 문맥상으로 복음을 전파 받고도, 즉 직접 계시된 은혜를 더욱 누리고도 믿지 않은 이에 대한 형벌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더욱 엄할 것이라는 걸로도 해석된다. [33] 이마저도 '결국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고통 받을거다'라는 선택의 환상을 주는 것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일맥상통하기 때문. [34] 사람도 처음 지은 죄가 어렵지 2, 3번째는 쉽다는 말이 있다. 죄를 지으면 지을 수록 거기에 대한 감정도 무뎌지고 혐오감이나 양심의 가책도 사라져 간다. 야훼는 모든 방면에서 완전히 선해서 어떤 죄든, 사람들 관점에선 대수로워 보이지 않게 된 잘못들에도 크게 혐오감을 느낀다는 것 [35]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뜻으로, 언제나 아버지라고 부르던 신을 하나님으로 불렀다. 이 때 죄를 뒤집어 쓴 그와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이는 정말로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닌 호소로, 예수는 처음부터 자진해서 세상에 내려왔고 십자가에서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36] 뜨거운 것에 닿는 작열통은 인체가 느끼는 가장 큰 고통 중 하나로 꼽힌다. [37] 천지창조 이전부터 하나님을 최측근으로 섬기며 그 장엄함을 보고 큰 권능을 얻고도 스스로 타락했기 때문이란 의견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 루시퍼. [38] "자넨 지옥에 있었던 거야. 만약 자네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연옥'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C. S. 루이스, 『천국과 지옥의 이혼』, 홍성사, 2006, 51p [39] 그에 따르자면 사후의 모든 형벌은 개선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 한스 우르스 발타사르, 발타사르의 구원이야기, 바오로딸, 2018, 87p, 이하 '발타사르의 구원이야기'로 표기 [40] 히에로니무스와 아우구스티노스도 초기에는 보편 구원론을 주장하였다. '지옥 논쟁', 154p [41] 다만 바르트 본인은 총체적 구원론을 부정하였다. [42] '지옥 논쟁', 155p, 308-309p [43] 이 구절은 성공회 성찬기도문에서 인용된다. (캐나다 BAS 성찬기도문 3번 등) [44] '지옥논쟁', 308-309p [45] 하성수 등 역주 해제, '원리론', 아카넷, 2014(이하 '원리론'), 361~367p 번역 발췌 [46] '원리론', 522p 번역 발췌 [47] 발타사르의 구원이야기, 81p [48] '원리론', 366p [49] 흔히들 오해하는 사실이지만, 교회사 속의 네임드 교부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교회사적 권위와는 별개로 교부들의 모든 신학해석, 주장이 맞는 말이라거나 믿을 교리가 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유명한 교부들 중에서도 이후 무류한 공의회에서 확정된 사안과는 다른 주장을 한 교부들도 있고, 이단 사상에 빠진 교부들도 있다(대표적인 경우가 해당 사상인 총체적 구원론을 내세운 적이 있던 오리게네스나 말년에 몬타누스주의 이단에 빠진 교부 테르툴리아노). 보편교회의 믿을 교리를 무류하게 선포하는 주체는 교회이지 무류성도 지니지 못한 교부 일개 개인이 아니기 때문. [50]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발타사르의 지옥 이야기, 바오로딸, 2017, 132-133p, 이하 '지옥 이야기'로 표기 [51] 해당 서에 의하면 이 주장은 가톨릭 교회에 의해 한번도 단죄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런 서술은 매우 주의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가톨릭교회가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의 해당 주장을 단죄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총체적 구원론 자체를 이단으로 단죄하였기 때문에 니사의 그레고리오가 주장한 총체적 구원론 역시 그 발언 자체가 단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믿어도 된다"거나 "가톨릭의 믿을만한 신학이론의 하나다"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가톨릭에서는 금지된다. 상술했듯이, 보편교회의 필수적인 믿을 교리는 지옥의 형벌은 영원하다고 가르치기 때문. [52] '지옥 논쟁', 91-92p [53] 이하 내용은 '지옥 논쟁', 98-110p에서 발췌함 [54] 히브리어 '올람'(םלוע), 헬라어 '아이오니온'(αἰώνιον) [55] 즉 "쟤는 지옥 갔구나 쌤통이다" 가 아닌 "주님께서 나를 지옥에 가지 않게 해주셨으니 나도 다른 사람들을 지옥에 가지 않도록 도와줘야지" 가 그리스도인들의 자세여야 한다는 것. [56] 누가복음 23:34 [57] 사도행전 7:55-60 [58] 계 20:4 [59] 원문이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어인데다, 국내에는 일본어 중역이 가장 널리 퍼져있다. 또한 이 글귀는 로뎅의 지옥의 문에도 쓰여 있는 유명한 글귀이다. 그리고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건 문이 1인칭을 사용해가면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번역과정에서 아차 실수하면 말이 꼬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는 한다. [60] 그 뒤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 이전에는 시간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설명한다. [61] 이상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지음, <오상의 성 비오 신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