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V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헤일로 시리즈의 함선에 대한 내용은
CPV급 중구축함 문서 참고하십시오.관련 문서: 베트남/정치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350px><tablebordercolor=#fff> |
베트남 국회 원내 구성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베트남 공산당|
베트남 공산당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dfa00; font-size: .8em;"]] |
||||||
[[무소속(정치)|무소속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F; font-size: .8em;"]] | |||||||
재적 499석
|
|||||||
정원은 500석이나 1석은 당선인의 자격미달로 공석으로 남음 | }}}}}}}}} |
베트남 공산당 Đảng Cộng sản Việt Nam | 黨共產越南[1] |
|
당기 | |
<colbgcolor=#DA251D><colcolor=#fdfa00> 약칭 | CPV |
구호 |
Đảng Cộng sản Việt Nam quang vinh muôn năm! 영광스러운 베트남 공산당 만세! |
총비서 | 또럼 |
창당 |
1930년
2월 3일(
인도차이나 공산당) 1976년 7월 2일(실질적) |
창당자 | 호찌민 등 |
중앙 당사 | 381 P. Đội Cấn, Cống Vị, Ba Đình, Hà Nội |
청년조직 | 호찌민 공산주의 청년단 |
국제조직 |
|
당원 | 약 5,100,000 명 (2021년) |
국회 | 총 500석 중 485석 |
이념 |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호찌민 사상 사회주의 시장경제 ( 도이머이) 베트남 내셔널리즘 |
정치적 스펙트럼 |
극좌, 혼합정치[2] |
홈페이지 |
[clearfix]
1. 개요
베트남 노동당, 인민혁명당이 기반인 베트남 유일 합법정당이다. 오늘날 베트남 국부인 호찌민이 이끌던 정당이었다.2. 역사
1930년 2월 3일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호찌민(胡志明)이 베트남 국내의 여러 급진적 사회주의 정당을 규합해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하였다.[3] 같은 해 10월의 제1회 중앙위원회에서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개칭하였고, 초대 총비서로 쩐푸(Trần Phú, 陳富)를 선출했다. 1935년에는 최초의 당대회인 제1차 당대회를 (베트남 본국은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으므로) 마카오에서 거행했다.1945년에는 베트남 민주공화국( 북베트남, 초대 국가주석은 호찌민) 성립 후, 인도차이나 전쟁을 보다 광범위한 기반에서 전개하기 위해 월맹(베트남 독립 동맹회)에 합류하면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해산되었다.
1951년 2월에는 베트남 북부의 투옌꽝 성(宣光)에서 제2차 당대회가 개최되어 호찌민을 당주석으로 하는 《베트남 노동당》을 재발족한다. 1960년의 제3차 당대회는 수도인 하노이에서 열렸고, 여기에서 ‘ 남베트남의 해방’과 ‘북부의 사회주의 건설’을 결의하였다. 1969년 9월 2일 호찌민이 사망하자 공석이 된 당주석의 자리에 당 제1비서였던 레주언(黎筍)이 직무를 계승했다. 북베트남이 베트남 전쟁에 승리하면서, 베트남 노동당은 제4차 당대회를 열어 다시 베트남 공산당으로 개칭했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1979년에 크메르 루주를 몰아내고 캄보디아에 군사 개입을 하게 되고 국제적으로 고립 상태가 되자 경제적인 어려움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1986년 7월 레주언이 사망하면서 쯔엉찐(Trường Chinh, 長征)이 총비서가 되었지만 12월에 열린 제6차 당대회에서 도이머이 노선이 채택되어 응우옌반린(Nguyễn Văn Linh, 阮文靈)이 총비서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을 모방한 일당독재체제[4]의 유지와 외국자본 도입에 의한 경제성장의 추구가 기본정책이 되었다. 1991년에는 도므어이(Đỗ Mười, 杜梅)가 총비서가 되었고, 1997년부터는 레카피에우(Lê Khả Phiêu, 黎可漂), 2001년부터는 농득마잉(Nông Đức Mạnh, 儂德孟)이 총비서를 맡다가, 2011년부터 응우옌푸쫑이 총비서로 집권했다.
2006년 4월에 열린 제10차 당대회에서는 그 직전에 발각된 오직 사건으로 교통 운수부 차장이 체포되어서 악화되는 당관료의 부패에 대한 농득마잉 총비서의 책임을 묻는 소리가 강해졌기 때문에, 반대파가 응우옌민찌엣를 세워 중앙위원의 자유선거로 총비서를 선택하기로 결정되었다. 직전에 응우옌이 사퇴했기 때문에 투표는 행해지지 않고 농 총비서는 재임되었지만, 이는 당원의 의식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으로서 베트남 국외에 크게 전해지기도 했다.
3. 선거
일당제 특성상 베트남 국회 의석의 절대 다수를 늘 차지하고 있다. 무소속 의원들이 상당수 있기는 하지만 반체제 인사들은 사전심사를 통해[5] 탈락시키는 것이 관행인지라 야당인사들은 실질적인 의석을 차지하진 못한다.다만 국회의원 선거에서 1 선거구당 다수의 후보를 내기 때문에[6] 평판이 안 좋은 국회의원은 유권자들이 낙선시킬 수 있는지라 그나마 중국이나 북한같은 곳보다는 물갈이가 잘 된다는 평이다. 그리고 중국과 북한처럼 글로벌 어그로를 끌진 않고[7] 인민들의 비판도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는 정당이라[8] 그런지 현재 남아있는 공산당 계열 중에선 상대적으로 온건한 편이다.[9]
심지어 주석 직선제[10] 얘기도 종종 나오긴 하는데, 아직은 국회의원 선출 수준에만 머무르고 있다.
4. 조직
마르크스-레닌 공산당 계열 정당들이 보통 그렇듯이 5년에 한번 개최되는 베트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Đại hội Đại biểu toàn quốc Đảng Cộng sản Việt Nam, 大會代表全國黨共産越南[11]), 즉 당대회가 최고 주권기관이며 당대회에서 중앙집행반(중앙위원회)을 선거한다. 그리고 그 산하에 정치부(Bộ Chính trị, 部政治[12], 당중앙정치국), 중앙검사위반(당중앙검사위원회), 비서반(당중앙비서국)을 둔다.4.1. 정치부
2021년 1월, 13차 당대회에서 선거된 정치부 위원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응우옌 푸 쫑: 총비서, 중앙군사위원회 비서: 2024년 7월 19일 임기 중 사망.
- 2. 응우옌 쑤언 푹: 국가주석,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 → 부정부패 혐의로 숙청.
- 3. 팜 밍 찡: 정부수상,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
- 4. 브엉 딩 후에: 국회주석. -> 부패 혐의가 제기되자 사임
- 5. 르엉 끄엉: 베트남인민군 정치총국 주임(총정치국장),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 → 또럼의 총비서 선출 이후 국가주석 선출.
- 6. 판 딩 짝: 당비서, 중앙내정위원장.
- 7. 또 럼: 공안부장. → 보반트엉 사임 후 국가주석으로 조동 → 응우옌 푸 쫑 총비서 사망 이후 총비서직 선출
- 8. 보 반 트엉: 당 상임비서. → 응우옌 쑤언 푹 사임 후 국가주석에 선출됐으나 부정부패 혐의로 숙청.
- 9. 응우옌 쑤언 탕: 호찌민국가정치학원 감독.
- 10. 응우옌 화 빙: 당 비서, 최고인민재판소장.
- 11. 쯔엉 티 마이: 당중앙 상임 서기, 중앙조직위원장. -> 사임
- 12. 쩐 뚜언 아잉: 중앙경제위원장. → 부정부패 혐의로 숙청.
- 13. 쩐 껌 뚜: 당 비서, 중앙검사위원회 주임.
- 14. 판 반 장: 중앙군사위원회 부비서, 국방부장.
- 15. 쩐 타잉 먼: 국회 제1부주석.
- 16. 팜 빙 밍: 정부 부수상. → 부정부패 혐의로 숙청.
- 17. 딩 띠엔 중: 하노이시위 비서.
- 18. 응우옌 반 넨: 호찌민시위 비서.
13차 당대회를 연지 3년만에 18명의 정치부 위원 중 무려 4명이, 그것도 국가주석이 2명이나 잘리는 이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후로도 대대적 개편이 이어져 2024년 5월, 13기 9차 전원회의에서 4명의 정치부 위원을 보선하였다. 새로 보선된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레민훙: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당중앙조직위원장 겸 당중앙판공실장.[13]
- 응우옌쯔엉응햐: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당중앙선전부장.
- 부이티민호아이: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당중앙대중동원위원장.
- 도반찌엔: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조국전선 중앙위원장.
4.2. 비서반
- 1. 응우옌푸쫑: 총비서, 정치부 위원.
- 2. 쯔엉티마이: 당조직위원장, 당 상임비서, 정치부 위원.
- 3. 쩐껌뚜: 당중앙검사위원장, 정치부 위원.
- 4. 판딩짝: 당중앙내정위원장, 정치부 위원.
- 5. 응우옌호아빈: 최고인민재판소장, 정치부 위원.
- 6. 도반찌엔: 조국전선 중앙위원장.
- 7. 응우옌쫑응이아: 당중앙선전위원장.
- 8. 부이티민호아이: 당중앙대중동원위원장.
- 9. 레민카이: 부수상.
- 10. 레민훙: 당중앙판공실장.
- 11. 보반트엉[14] → 레호아이쭝: 당중앙대외위원장, 2023년 10월 13기 8차 전원회의에서 보선.
중국이나 북한과 달리 당정 분리가 철저하지 않아 정부인사들도 당 비서를 맡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정부인사의 실권이 중국이나 북한보다 강하다는 것.
4.3. 전문부서
베트남은 같은 한자 문화권이긴 하지만 공식적으로 한자 사용을 중단했기 때문에 한자 표기를 얻기 쉽지 않고, 분명 같은 조직이건만 한자권 공산주의 국가들이 죄다 당내 기구, 직위 명칭을 다 따로 쓰기 때문에[15] 표기가 통일되어 있지 않고, 논문들마다 다르게 번역하는 감이 있는데, 북한에서는 위원회로 번역하지 않고 자기네 시스템에 맞처 부로 번역한다.- 당중앙판공실
- 당중앙검사위원회
- 당중앙조직위원회
- 당중앙선전위원회
- 당중앙대중동원위원회
- 당중앙경제위원회
- 당중앙내정위원회
- 당중앙대외위원회
5. 역대 총비서
[[베트남 공산당#s-5|{{{#fdfa00 베트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베트남 노동당 ( 베트남 민주 공화국)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초대 | 제2대 | 제3대 | |||
쯔엉찐 | 호찌민 | 레주언 | }}} | |||
베트남 공산당 (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레주언 | 쯔엉찐 | 응우옌반린 | 도므어이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레카피에우 | 농득마인 | 응우옌푸쫑 | 또럼 |
(※ 볼드체는 베트남 공산당 정치국 내 서열 1순위)
인도차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16] | |||||||
이름 | 집권 기간 | ||||||
쩐푸 (Trần Phú) | 1930년 10월 27일 ~ 1931년 9월 6일 | ||||||
레홍퐁 (Lê Hồng Phong) | 1931년 10월 27일 ~ 1936년 7월 26일 | ||||||
하후이떱 (Hà Huy Tập) | 1936년 7월 26일 ~ 1938년 3월 30일 | ||||||
응우옌반끄 (Nguyễn Văn Cừ) | 1938년 3월 30일 ~ 1940년 11월 9일 | ||||||
쯔엉찐 (Trường Chinh) | 1940년 11월 9일 ~ 1945년 11월 11일 | ||||||
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주석 | |||||||
이름 | 집권 기간 | ||||||
호찌민 (Hồ Chí Minh) | 1951년 2월 19일 ~ 1969년 9월 2일 | ||||||
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17] | |||||||
이름 | 집권 기간 | ||||||
쯔엉찐 (Trường Chinh) | 1951년 2월 19일 ~ 1956년 10월 5일 | ||||||
호찌민 (Hồ Chí Minh) | 1956년 10월 5일 ~ 1960년 9월 10일 | ||||||
레주언 (Lê Duẩn) | 1960년 9월 10일 ~ 1976년 12월 20일 | ||||||
베트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 |||||||
레주언 (Lê Duẩn) | 1976년 12월 20일 ~ 1986년 7월 10일 | ||||||
쯔엉찐 (Trường Chinh) | 1986년 7월 14일 ~ 1986년 12월 18일 | ||||||
응우옌반린 (Nguyễn Văn Linh) | 1986년 12월 18일 ~ 1991년 6월 28일 | ||||||
도므어이 (Đỗ Mười) | 1991년 6월 28일 ~ 1997년 12월 26일 | ||||||
레카피에우 (Lê Khả Phiêu) | 1997년 12월 26일 ~ 2001년 4월 22일 | ||||||
농득마인 (Nông Đức Mạnh)[18] | 2001년 4월 22일 ~ 2011년 1월 19일 | ||||||
응우옌푸쫑 (Nguyễn Phú Trọng) | 2011년 1월 19일 ~ 2024년 7월 19일 | ||||||
또럼 (Tô Lâm) | 2024년 8월 3일 ~ |
[1]
당공산
월남. 한국어 어순에 따라 배열하면 월남공산당이 된다.
[2]
1986년,
중국공산당의 개혁개방 정책을 참고한
도이머이(쇄신) 이후 경제 자본은 대부분 국유화를 하지만 시장 경제 정책을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여러 후보 중 하나를 뽑는
선거를 한다.
# 물론
반체제 인사는 사실상 출마가 불가능하지만, 당 내 계파 견제는 이루어지는 상황이다.
[3]
처음 당명은 베트남 공산당이었으나, 나중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4]
1988년까지는
구색정당이 존재하는
헤게모니 정당제였다가 이후는
일당제가 되었다.
[5]
국회대표 등 선거에 출마하려면 후보자 추천 및 등록을 총괄하는 조국전선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 조직 위원들은 으레 공산당 인물들이 독식하다보니, 후보자 심사 기준 중 하나인 '애국심과 애민정신'이란 애매모호한 조항으로 자기들 입맛에 맞게 후보자를 고를 수 있다.
[6]
참고로 베트남의 선거제도는
중선거구제이다.
[7]
중국은 위구르나 홍콩 민주운동 탄압, 일대일로를 이용한 타 국가 간섭 등으로 어그로를 끌고 있고, 북한은 강대국도 아니면서
미치광이 전략의 일환으로 핵과 미사일 도발을 일삼고 인권 문제에서도 이 중에서도 가장 할 말이 없는 반면, 베트남 공산당은 호찌민 시절부터 그나마 온건한 편인데다 베트남전 이후부턴 중국과도 사이가 나빠지면서 다시 미국과 밀월 외교를 해야 할 필요성도 생기는 등의 문제로 서구권 눈치도 적당히 보는 투트랙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8]
베트남은
국가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행위를 하지 않는 이상
정부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 그리 신경쓰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중국공산당에 비하면 비판점을 수용하려고 하는 편이다. 이는
소련 시절의
소련 공산당도 그런 편이었다. 그래도 공산국가는 공산국가인지라 공산당 타도를 내세우면 가차 없이 응징한다. 국가 체제의 전복에 대한 응징은 한국 등 민주국가에서도 행하는 일이긴 하지만(때문에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기도 하다) 여당 타도를 주장해서 잡아가진 않는다. 다만 공산국가에서는 당이 곧 국가와 정부이고, 국가체제이기 때문에 비슷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9]
당장 중국, 북한과 달리 베트남에선
페이스북,
구글,
유튜브 등 서구권 SNS 접속이 자유롭다. 특히 페이스북은 과장 좀 보태 거의 국민 SNS 수준. 물론 체제 전복성 주제에 대해선 단속하는 모양.
[10]
참고로 베트남 실권을 쥐고 있는 정부 서열 1위는 공산당 총비서다. 주석도 아예 권력이 없는건 아니라 일종의 견제 관계에 있다. 호찌민, 응우옌푸쫑, 또럼처럼 국가주석과 총비서직을 동시에 겸직하는 경우도 있으나(응우옌푸쫑은 다시 주석직을 반납했다) 일반적이진 않다.
[11]
한국어 어순에 맞게 쓸 경우 越南共産黨全國代表大會.
베트남어는 프랑스어처럼 수식어가 피수식어 뒤에 온다.
[12]
한국어 어순에 맞게 쓸 경우 政治部
[13]
2024년 6월에 당중앙판공실장에서 해임.
[14]
국가주석 선출에 따라 소환.
[15]
예컨대 중국과 일본은 서기, 북한과 베트남은 비서. 류한수같은 일부 학자들은 간사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서기장도 총간사로 번역한다.
[16]
1930년 2월 3일에 베트남 공산당으로 창당했다가 동년 10월 제1회 중앙위원회에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당명 변경.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당수 및 정치국 서열 1순위는 총비서였으나 독립 이전이라 정치적 실권에 큰 의미가 없었고 설립자인
호찌민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쯔엉찐 이전의 모든 총비서들은
프랑스 당국에 반프랑스 혐의로 투옥 중 옥사하거나 사형되는 등 탄압을 받았기에, 쩐푸의 후계인 레홍퐁은 해외집행위원회(OEC) 총비서로서 실질적으로(de facto) 중앙위원회 총비서직을 역임하였다.
[17]
제1비서는
호찌민을 제외하고는 항상 정치국 서열 2순위였으며, 1순위는 당 중앙위원회 주석인
호찌민이었다. 호찌민이
1969년 사망한 이후로는
레주언이 제1비서로서 최고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이후 베트남 통일 이후 다시 레주언이 총비서직을 신설하여 총비서 직에 오르며 총비서가 다시 서열 1순위로 돌아오고 현재에 이른다.
[18]
베트남
소수민족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