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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22:34:11

이슬람/타 종교 간의 관계

1. 설명
1.1. 이슬람 역사 속의 비무슬림들
1.1.1. 그나마 관용적인 사례1.1.2. 불관용적인 사례
2. 이슬람의 타 종교 탄압 사례3. 타 종교 및 국가의 이슬람 탄압 사례4. 평등한 공존 사례

1. 설명

쿠란 109:1-6 말하라 오! 불신자들이여, 너희가 숭배하는 것을 나는 숭배하지 않으며, 내가 숭배하는 것을 너희는 숭배하지 않는도다. 너희들에게는 너희들의 종교가 있고, 내게는 내 종교가 있노라.
쿠란 4:47 오 성서를 받은 백성(유대인, 기독교인)들이여,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것을 믿으라, 그것은 이미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 타나크, 신약)을 확증하는 것인데, 우리가 얼굴을 지우고(코, 입, 눈 등이 없는 뒷목처럼 만들어서)그것을 뒤쪽으로 돌려놓거나 안식일을 범한 자들을 저주한 것처럼 저주하기 전에 믿으라. 알라의 명령은 항상 수행되노라.(무흐신 칸 역)[1]

오 성서의 백성들이여! 우리가 몇몇의 표면을 지우고, 뒷편으로 돌리기 전에, 혹은 우리가 안식일을 범한 자를 저주하듯이 그들도 저주 하기 전에 그대들의 것을 확증하기 위해 계시된 책을 믿으라. 알라의 명령은 반드시 수행될 것이다.(하나피파를 따르는 튀르키예 국가 종무청 공식번역)[2]
꾸란 22:19-21 불신하는 자들은 불길 속에서 옷이 찢기며 그들의 머리 위에는 끓는 물이 부어지리라.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의 내장과 피부가 녹아내릴 것이라. 그 외에도 저들을 징벌할 철로 된 회초리가 있노라. 그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저들은 다시 그 안으로 되돌려와 불의 징벌을 맛보는 소리를 듣노라.
꾸란 3:56 불신자들이여 내가 너희에게 현세와 내세에서 가혹한 징벌을 내릴 것이라. 그러나 그들은 구원자를 찾지 못할 것이라.
꾸란 3:61 그대에게 지식이 이른 후에도 예수(의 신성)에 관하여 논쟁하는 자가 있다면, 거짓말 하는 자들 위에 하나님의 벌이 있게 하여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라.[3]
꾸란 3:118 믿는 자들이여 불신자를 친구로 택하지 말라. 그들은 너희를 해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며 그들은 단지 너희가 파괴되기를 바랄 뿐이라. 그들의 입들에서 증오가 발산되며 그들의 마음은 더욱 사악하도다.
꾸란 5:57 믿는 자들이여 너희의 종교를 조롱하고 희롱하는 자들을 친구로 삼지 말라. 이들은 너희 이전에 성서를 받은 자들로 믿음을 배반했노라 너희가 믿는 자라면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
꾸란 5:72 하나님은 마리아의 아들 메시아일 뿐이라 말하니 그들은 분명 불신자들이라.
꾸란 5:73 하나님이 셋 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그들은 분명 불신자들이라.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신이 없거늘 만일 그들이 말하는 것을 단념하지 않는다면 믿지 아니한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벌이 내릴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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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체스를 두는 안달루스의 기독교인( 모사라베)과 무슬림

이슬람 기독교보다 뒤에 나온 종교로서 기독교와 유대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실제로 기독교의 구/신약 성경의 일부를 인용하기도 하고 예수 무함마드 바로 이전의 예언자로 인정하는 등 유사점이 많지만 이슬람 교리에서는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이슬람의 진리를 곡해하는 쉬르크(우상숭배자)인 '성서의 백성들 (People of the Book)'이라고 하며 이들을 무슬림 공동체 주도로 2등시민 취급하며 권리와 생활에서 무슬림들과 철저히 차별하라고 명한다.

무슬림들과 샤리아 옹호자들은 기독교도와 유대교도를 '구분' 내지는 '보호'하라는 식으로 이러한 차별을 미화하지만 종교세인 지즈야의 강요와 지즈야를 안 낼 시 교리적으로 지하드를 통한 섬멸과 정복의 대상으로 구분된다는 점[4], 개종 시도를 죽음으로 처벌하는 점, 무슬림보다 열등한 대우 및 결혼 등에서의 차별, 이슬람적 질서에 순응할 것을 명령하는 등 당시 기독교도들과 유대교도들 기준으로도, 현대 기준으로도 명백히 불합리함을 느꼈던 종교 차별이 맞다. 흔히 타 문화권의 타종교 배척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며 양비론적 논리를 쓰는 무슬림들이 많은데 이는 차별이 아니었음을 논증하는 변명의 기준이 될 수 없다.

흔히 알려진 이슬람의 종교적 관용정책은 후발주자로 출발하여 이미 타 종교가 뿌리박고 있는 지역들을 다스려야 했던 초기 이슬람의 입장에 기초한 것으로 통치가 완벽하게 확고해진 후(대략 무함마드 사후 200년 정도부터)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무함마드는 '성서의 백성들'을 실질적으로 박해하고 차별하되 형식적으로는 존중하라고 했으나 무슬림들은 가르침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이교도에 대한 강제 개종과 탄압, 심하게는 학살이 잊을만 하면 일어나곤 했다. 세금 정책은 지즈야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도시민들에게는 심각하지 않은 부담이었으나 화폐 경제에 본격적으로 편입되기 힘들었던 전근대 농촌 공동체에는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했다.[5] 다시 말해 이슬람이 관용의 종교라는 명제는 역사상 많은 시대에서 틀렸다고 할 수 있다.
무슬림들은 비무슬림지역 피정복민들에게 무함마드의 세가지 선택, 즉 개종/복종/죽음을 제시했다. 딤미[6] 신분 피정복민들이 가장 많이 개종하였는데, 이슬람만이 생존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딤미들의 불안정한 처지를 감안한다면 그들 중 다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오늘날 다수의 무슬림들은 이슬람은 강요에 의한 개종은 금지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슬람이 무력에 의해 전파되지 않았음을 강력히 주장한다. 이는 분명 맞는 말이다. 무력에 의해 전파된 것은 이슬람 체제의 정치적, 사회적 헤게모니이다.[7] 이슬람으로의 개종은 이슬람 체제가 전파된 뒤 (기독교도와 유대교도들이) 비참한 삶을 견디지 못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8]
소위 경전의 백성들이라고 한 기독교와 유대교 한정으로 '우덜식관용'을 베풀었던 시기에도 교회 시나고그(유대교 회당) 신축을 금지하거나 기독교 교회나 성당인데도 십자가를 못 걸게 하고 종교 행렬도 금지했으며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집은 무슬림의 집보다 크게 못 짓게 하고 말과 노새를 타는 게 금지된 기독교도들과 유대교도들은 무슬림들의 앞에서 굴욕감을 느끼라는 목적으로 여자들이 타는 모양새로 당나귀만을 타야 했다.

이런 구시대적인 이슬람식 관점에 대한 보다 현대적인 이슬람식 해석을 들여다볼 수 있는 튀르키예 종무청의 입장을 보면 이런 기독교에 대한 이단시는 기독교 일반이라기보다는 당시 아랍 근방에 잔존해 있던, 마리아를 아예 신격화해 섬기며 제물을 바치던 여성들로 구성된 일부의 기독교 이단 종파에 대한 무함마드의 관점이나 입장이 반영된 것이며,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의 관점과 비슷하다는 주석 또한 달고 있다. 또한 '성서의 백성', '불신자'들에 대한 적의는 쿠란 전체를 놓고 보면 (신흥종교인)무슬림을 조롱하며 적대하고 바보로 여기는 사람들 전반에 대한 적의를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1.1. 이슬람 역사 속의 비무슬림들

기독교도들과 유대교도들은 아바스 왕조, 파티마 왕조, 미르다스 왕조, 오스만 제국 등의 경우를 제외하면 관직에 진출하기 힘들었으며 무슬림보다 낮은 지위를 상징하는 터번이나 허리띠를 강제로 두르고 다녀야 했다. 거리나 목욕탕 등지에서는 무슬림과 기독교인/유대인들이 마주치면 아무리 신분이 낮은 무슬림일지라도 기독교인/유대인들이 먼저 길을 비켜주거나 공손히 절해야 했다. 법정에서 '무슬림에 대한'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증언은 효력이 무슬림보다 못 하거나 아예 없었고 그나마도 증언이 무슬림에게 불리한 것이라면 채택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뜯어보면 현대인이 생각하는 관용과는 꽤나 거리가 있는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샤리아로 비무슬림 여성과 무슬림 남성의 결혼은 허용하면서 무슬림 여성과 비무슬림 남성의 결혼은 사형이나 양육권 박탈로 처벌하는 결혼 차별[9]에 종교 세금인 지즈야까지 강제했으니 결국 1,400여 년에 걸쳐 서서히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반강제로 이슬람화될 수밖에 없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첫 칼리파 무아위야 1세의 기독교도 왕비 마이순처럼 죽을 때까지 신앙을 지킨 경우도 있었으나 이건 애초에 무아위야는 휘하 병력도 대부분 기독교도였을 만큼 종교에 관용적인 인물이라 가능했던 거고 이런 관용적인 척하면서 은근슬쩍 대놓고 차별을 조장하는 통치 시스템 치하에 놓인 많은 비무슬림들이 자신의 신앙을 장기적으로, 온전히 가지기는 대부분 불가능했다.

이슬람 치하에서 소수파는 주로 특정한 쓰임새가 있을 때 혹은 관용을 베푸는 것이 정치적이나 경제적 이익에 부합할 때나 관용되었고 반대의 경우에는 수없이 탄압받았다. 이를테면 페르시아의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은 상권을 장악하고 막대한 세금과 뇌물 공세를 통해 권리를 보장받았으나 다른 한 편에서는 아르메니아인의 고향 캅카스에서는 무슬림들의 노략질에 의해 사로잡힌 기독교인 노예가 이슬람권으로 꾸준히 유입되던 상황이기도 했다. 위 항목에서도 서술된 바와 같이 이슬람 세계에서 이미 십자군 전쟁 이전부터 기독교인이나 유대인 및 기타 비무슬림에 대한 학살이나 추방, 납치 또는 노예화가 번번히 일어났다.

1.1.1. 그나마 관용적인 사례

소수파가 쓰임새가 있었을 때 한정으로 관용을 제공해 줬던 사례로는 11세기 시리아 북부의 미르다스 왕조에선 기독교도들이 연이어 와지르 (재상)에 오르고 알레포나 티크리트 등의 도시에선 교회가 새로 건립되기도 하였고[10]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에서는 10세기 말엽 시리아를 정복한 후 첫 총독으로 기독교도를 선임하기도 한 사례 등이 있다. 특히 기존 기독교권에서 이단으로 낙인되어 박해받던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은 이슬람 지배 하에 교구를 확장하며 번영하였다. 특히 많은 네스토리우스파의 시리아 기독교도들은 아바스 왕조의 지혜의 집에서 그리스 고전의 번역을 맡았다. 그들은 칼리파들의 후원으로 기득권층에 속하였고 여러 기독교 교리서나 아랍 기독교 문학서 등이 출판되었다. 적어도 10세기까지는 이라크의 기독교는 사산 왕조 시절보다는 많은 자유를 보장받았다.

유대인들도 각자의 공동체를 유지했으며 십자군에 맞선 살라흐 앗 딘의 주치의도 유대인이었다. 16-17세기에는 스페인이 자국의 유대인들을 추방하자 이들이 바다 건너 모로코로 건너가 실향 마을을 세웠는데 그 중 하나인 셰프샤우엔은 현재 모로코의 대표적 관광지 중 하나다.

이슬람 정복 후에 파괴당한 수많은 기독교 교회들과 달리 현재까지 존재하는 예루살렘의 기독교 중심지인 성묘 교회만은 11세기 초엽 단 한 번의 파괴를 제외하곤 건재하였는데 이는 칼리파 우마르가 예루살렘 점령 후 성묘 교회의 보호를 명시한 것 덕분이었다. 이것도 전술한 수많은 보호 사례처럼 사실 경제적인 목적 때문에(성지순례자들에게 걷는 돈) 이득을 취하려고 관용을 베풀어 준 것이다. 아랍 무슬림들은 각지를 정복한 후 곧바로 현지 도시에 정착하진 않았으며 병영 도시인 암사르를 세워 현지인들과 다른 생활권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시리아와 이집트의 주류는 스스로를 아랍인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비록 아랍어를 썼지만 현지어가 많이 섞여 서로 못 알아듣기 일쓰였기 때문이다. 기존에 아랍인은 베두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현재의 아랍인 의식이 생긴 것은 20세기 들어 제국주의에 대한 반발로 아랍 내셔널리즘이 일어난 것 때문이다.

시리아와 이집트는 8세기까지 무슬림이 소수였고 14세기까지도 무슬림 인구 비율이 50%가 되지 않았다. 반이슬람 진영에서 언급하는 탄압이 지속되었다면 불가능했을 수치이다. 오히려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세금이 줄어들기 때문에 우마이야 왕조의 총독이 개종을 금하기도 하였다가 칼리파에게 경질되는 경우도 있었다. 악명높은 보호세에 가까운 지즈야(비무슬림 강제세금수취)에도 딱 하나 이점이 있긴 했는데 무슬림들은 군역을 지고 전쟁에 동원된 반면 타 종교인들은 지즈야를 내기에 전쟁 동원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약탈물을 노리는 악의적 의도로 이슬람 군대에 합류하는 비무슬림도 있었다.

능력주의가 적용되는 군대에서는 차별이 적용되지 않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시로 740년대 베르베르 대항거를 진압하고 안달루스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한 시리아 군인들은 무슬림 뿐만 아니라 기독교도 병사들도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토지를 분배받았다. 이슬람 군대에도 생각보다 많은 이교도들이 함께 했는데 전투 후의 전리품 분배에는 큰 차별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즈야 (인두세)는 이슬람 당국이 비무슬림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내는 것인데 비무슬림이 군대에 복무하면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므로 지즈야에서 면제되기 때문이다.

앞서 조금씩 언급되었듯 적어도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에서는 역사상 기독교도들이 단순히 정치적 이해 관계를 위해 잠깐 등용되는 형식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고위 공직에 임명된 사례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파티마 왕조 시기의 기독교도 재상(1135 ~ 37년간 재위한 바흐람 알 아르마니)[11] 임명에 이어 아이유브, 맘루크 왕조 시기에도 콥트 기독교의 총대주교는 술탄들의 자문을 맡았고 안정적인 통치에 협력하였다. 18세기 후반 이집트의 맘루크 정권이 세워졌을 때 무함마드 베이 (아부 알 다하브)와 무라드 베이는 콥트 기독교도인 이브라힘 엘 고하리를 2인자의 지위에 해당하는 서기장에 임명하기도 하였으며 엘 고하리는 여러 교회와 수도원을 보수하거나 재건하였고 심지어 신설하기도 하였다. 레바논에서 실질적으로 왕조를 세워 군림했던 시하브 가문이 수니파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도 주변의 무슬림 세력들이 종교를 꼬집으며 반발하지는 않았으며 대부분 (이슬람으로 분류될 수 있는) 드루즈교도였던 신민들도 그대로 충성을 유지하였다. 시하브 가문은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18세기 말부터 반세기 가량 기독교도로서 레바논을 통치하였는데 이는 이슬람 정복 후 아랍 지역에 세워진 유일무이한 기독교 왕조로 남아 있다.

1.1.2. 불관용적인 사례

한편, 이런 일부 사례와는 별개로 전반적으로 이슬람은 성립 당시부터 무슬림 아랍인이 유목민이었던 특성 때문에 동로마, 서유럽, 중근동에 대한 끝없는 침략전쟁을 통한 이슬람 개종을 반강제하는 헤게모니 확장을 피정복민들에게 강요하는 식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어갔다. 비록 몽골 제국 수준의 대규모 점령지 학살이 일어난 것은 드물었지만 정복지에서는 이슬람의 은근한 차별과 잊을 만하면 계속되는 핍박, 대규모 박해로 인해 피정복지 및 피정복민 비무슬림의 문화가 과거와 계속 단절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중세 5대 주교구가 위치하였던 다섯 도시 중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이 점령당하면서 고대 기독교의 중심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속주, 이집트, 북아프리카가 아랍인의 정복 이후 이슬람 문화권이 되었으며 이후에도 아랍인, 튀르크인의 침략에 도시가 약탈되고 불타고 주민들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의 과장은 있을지언정) 동로마 사서에 수없이 증언된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대대적 분노를 초래하여 10세기엔 아나톨리아에서 시작하여 이슬람 정복지들에 대한 대규모 재정복전쟁에 나서면서 킬리키아와 시리아 북부의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축출하는 반격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그렇지 않은 바다 문명권 민족들이 어디 있었겠냐만은 이슬람은 특히 이교도에 대한 해적질과 납치로 오래 전부터 악명이 높았다. 유럽의 대서양 노예무역만 강조하는 역사서 때문에 주목받지 못한 사실인데 남프랑스와 남이탈리아, 시칠리아와 크레타를 비롯한 유럽의 많은 기독교 지역들은 북아프리카가 이슬람화 이후 무슬림들의 해적 기지로 전락하면서 엄청난 약탈, 납치 등의 피해를 입었다. 서기 7~8세기부터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해적은 수 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와 프랑스, 동로마 제국에 무자비한 침략을 가하여 기록상으로 수백만 명[12]에 달하는 기독교도를 노예로 끌고갔다. 846년에는 심지어 로마시마저 대규모 이슬람 해적의 공격에 불타고 성 베드로 성당이 약탈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827년에 무슬림 해적 집단에 의해 점령된 크레타는 961년 니케포루스 포카스에 의해 재정복될 때까지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어마어마한 해적질과 약탈을 일삼았다.

무슨 선량한 무슬림들을 핍박한 독자적인 종교 광신도 끝판왕 비슷하게 인식되는 십자군 전쟁도 무슬림들이 전쟁 훨씬 이전인 이슬람 제국 초창기, 8세기부터 유럽, 근동 중앙아시아, 인도, 아프리카에 자행한 지독한 만행에 비하면 더 특별히 잔인할 것도 없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 공존하고 함께 반영했다고 칭송받던 중세 이베리아반도의 무슬림들 통치자들과 십자군은 잔인성과 배타성 측면에서 보면 사실 십자군이 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이나 마라트 알 누만 학살 정도를 제외하고는 현지인들에게 관용적인 편이었고 심지어 일부 측면에서는 더 자비로운 수준이었다. 실제로 십자군 왕국들은 이교도를 죽이거나 여자를 첩으로 삼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슬람이 시칠리아 점령 당시, 그리고 점령 후에 했던 짓이랑 노르만에 의한 탈환 과정을 비교해 보면 후자가 더 신사적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를 비롯한 시칠리아 왕국 관련 문서 참조.

이슬람 세력에 의한 역사상의 최대 피해자는 사실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국가에 거주하던 불자들과 인도와 힌두교도들인데 그래도 유럽은 이슬람과 적당히 치고받은 관계인 반면 인도는 9세기부터 매번의 침략마다 무슬림들에 의한 사원 방화와 도시 초토화는 기본이고 비무슬림들이 이교도라며 학살당하고 노예로 끌려갔는데도 힌두교도들은 마라타 동맹이 무굴 제국에 반격한 것 외에는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나디르 샤가 무굴 제국의 수도 델리를 함락할 때는 같은 무슬림들이 통치하는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13]

조직적인 노예무역 수요도 이슬람 세력이 원조였는데 이는 이슬람 율법에서 같은 무슬림끼리는 서로 노예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초창기에는 유럽의 노르드인들을 통해서 슬라브인 노예를 주로 수입했지만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자 무슬림 상인들은 아프리카 동부에서 조직적으로 노예를 납치했으며 이를 불신자들을 신앙의 길로 이끈다는 식으로 합리화하였다. 서구 열강이 신대륙에서 노예 노동을 통한 플랜테이션 체제를 확립하기 수백년 전인 서기 9~10세기 무렵부터 이슬람 세계는 흑인 노예 노동을 통해 이라크 남부에 대규모 농장을 경영했던 역사가 있다. 유럽 기독교 문화권에 한정하더라도 동로마 사서에 무슬림들의 침략으로 도시가 불타고 주민들이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는 구절은 연례행사처럼 나온다. 8세기부터 십자군 전쟁 시기까지 무슬림 침략자들은 시칠리아, 남프랑스, 남이탈리아, 스페인, 동로마 제국, 아르메니아, 조지아, 동유럽 등지에서 약 2~300만의 유럽인을 노예로 납치하거나 수입했다고 추산된다. 이후 출현한 악명높은 바르바리 해적은 유럽인 150만, 그리고 동유럽의 기독교인들을 집중적으로 괴롭혔던 크림 칸국은 슬라브인 3~400만을 노예로 매매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기록을 보면 크림 타타르인들은 침략한 지역에서 어린이들은 전부 말발굽으로 짓밟아 죽이고 처녀들을 주로 납치해 수레에 끌고 갔다고 않는데 노예로 납치된 인원 이상만큼 많은 인명이 학살당했을 것이다. 그 외에 인도도 있으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가 동유럽과 캅카스 다음으로 중요한 노예 공급처였다.

즉, "이슬람은 타 종교를 존중해 주고 인정해 주는데도 탄압받았던 서구 제국주의의 피해자"라고 보는 시각은 현대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 레닌주의 프레임이 반영된 역사 왜곡이다. 무슬림들과 이슬람 옹호론자들이 쓰는 주된 레퍼토리인 "이슬람권이 박해 일변도였다면 아직도 중동에 적지 않은 규모로 있는 기독교인, 이스라엘 건국 이전까지 각국에 많았던 유대인 커뮤니티들이 남아있기 어려웠을 것이다."→"따라서 이슬람은 박해가 크게 없고 온건한 종교다"는 식의 주장은 이슬람권의 역사에 대해 무지한 견해 또는 지나친 단순화와 일반화다. 같은 무슬림 측 경쟁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기독교나 유대교도들을 친위 세력으로 삼아 맞선 군주들도 있는 반면 기존 이슬람 세력의 지지를 높히기 위해 타종교를 탄압하고 세금을 올린 경우도 있다. 어쨋거나 기독교나 조로아스터교가 대다수였던 중동이 이슬람 지배가 1400년 이상 지속된 결과 전자는 소수화되고 후자는 절멸한 것을 보면 자발적인 개종만으로 현재의 이슬람 비율이 나온 것이 절대 아니며 비록 간헐적일 지라도 끈질기게 지속적인 탄압과 박해가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기적이든 지속적이든 비무슬림에 대한 차별 혹은 박해는 존재하였고 21세기에도 상당수 이슬람권에서 현재진행형이다. 무슬림들의 변명과는 달리 무슬림들이 구축하고 유지한 이슬람 교리 시스템 자체가 이를 추진하고 있으며(지즈야 강요, 비무슬림에 대한 차별조항 등) 실제로도 그렇게 실천한 무슬림 지도자, 신자들이 대다수 존재했던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무슬림들의 위선자 다음으로 배척하는 대상은 무신론자들로, 많은 무슬림들은 하디스에 따라 인간은 종교를 가지고 있어서 짐승과 구분된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아랍인들이 잔지바르를 중심으로 동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을 하던 시절 이들은 현지의 여러 원주민 부족들을 “카피르”(불신자)라고 퉁쳐부르며 양심에 별다른 가책을 느끼지 않고 노예무역을 해 왔다.[14] 세계 최대 무슬림 인구 대국인 인도네시아도 1960년대 이후 공식적으로 무종교/무신론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무신론/무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20세기 중후반의 공산주의 탄압 때문이라고 변명은 할 수 있으나 그것이 21세기에도 근절되지 않는 것은 이슬람 세력의 반발과 압력 때문임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중동 한국인 근로자들을 파견할 때 근로자들의 종교는 일괄적으로 불교로 지정되었던 적도 있었는데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권의 반감과 적개심을 과도하게 우려했기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다. 물론 무슬림 중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의 횡포에 질린 나머지 무종교인이 되거나 무종교인에 좀 더 개방적인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아랍- 북아프리카- 남아시아, 말레이시아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지역의 다수에서는 자신이 무신론자라면 가능한 한 자신이 무교라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 공산주의 치하에 있었던 중앙아시아나 알바니아, 발칸반도 지역의 보스니아인 거주 지역에서는 무신론을 내세워도 딱히 허물이 되지 않는다.

파일:Apostasy_laws_world_map_2020.jpg

이슬람권 국가들의 종교의 자유 실태. 빨간색 국가들은 이슬람에서 타종교로 개종했을 경우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 사형에 처하는 국가들, 갈색 국가들은 개종했을 경우 징역형에 처해 감옥에 보내 버리거나 무슬림 남성과 이교도 여성의 결혼을 금지하고 비무슬림의 양육권을 박탈해 버리는 국가들, 주황색 국가들은 무슬림을 타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불법인 국가들이다.[15] 튀르키예 같은 특수한 세속 국가[16]나 중앙 아프리카의 일부 국가들, 그리고 타종교인 비율이 높은 몇몇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적인 종교의 자유 개념이 아예 없다. 오히려 (비무슬림들의 눈치를 봐서라도) 종교의 자유를 형식적으로나마 보장해 주는 이슬람권 국가들마저 소수인 것을 볼 수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타종교와의 평화 공존 원칙이란
거기에다 상술했듯이 여기서의 '타종교'란 어디까지나 같은 일신교인 기독교, 유대교 정도이며 힌두교 불교 등 다신교 성향의 종교와 무신론자들은 원리원칙대로라면 이슬람 율법에서 전혀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집단이다. 종교에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종교의 자유 원칙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즉, 흔히 쿠란을 근거로 '평화와 관용' 및 타 종교인의 내세에서의 구원 등은 민주주의를 숙주로 삼아 신정 국가를 건설한다는 이슬람주의에 위배된다. 하지만 많은 비무슬림들의 염원과 달리 여전히 많은 무슬림들이 여전히 이슬람주의적 전근대적 가치관과 종교 인식에 경도되어 있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다. 근본주의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선민 사상이 뿌리박혀 있고 이는 걸프 산유국들의 근본주의 선교로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기도 한다.

무슬림 남성이 기독교, 유대교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허용되나 무슬림 여성이 기독교, 유대교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금기시하고 있다.[19] 여성이 남성의 신앙을 따르는 것이 통념이기도 하고 전통적인 남성 우월주의적 가치관에 따라 이슬람 남성과 타종교 여성의 결혼을 전도의 일환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무슬림 여성과 타 종교 남성의 결혼이나 같은 이슬람이라도 종파나 국가가 다른 남성과의 결합[20]반이슬람적이고 불명예스러운 행위로 받아들이며 이것이 명예살인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영국인 사랑한 이라크 여성 아버지가 살해 (한겨레) '명예살인' 영국 사회문제 (한겨레)

유럽에선 종종 샤리아를 유럽 법에도 적용시켜야 한다는 근본주의 무슬림들의 시위가 벌어지곤 하며 특히 이슬람주의 정당의 자유가 보장받는 영국에서 그 빈도수가 높다. 그 내용도 무슬림 사회 일반에서 받아들여지는 샤리아의 가르침에 토대를 둔 것이라 선민사상에 바탕을 둔 해석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즉, 소위 '일반' 무슬림이 생각하는 샤리아의 가르침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종교의 가르침보다는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적 극단주의자나 근본주의자의 가르침에 가깝다. 실제 프랑스 거주 35세-44세 무슬림들의 20%, 18-24세 무슬림 청년들의 27%, 영국 전체 35세-44세 무슬림들 중의 11%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를 옹호하거나 지지했다.[21] 참고로 이 수치는 파키스탄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가 창궐하는 나라의 국민적 조사의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호감 수치보다 높은 것이다. 거기다 더 답이 없는 충격적인 현실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막장 행각(이교도에 대한 성노예화, 무수한 학살, 기독교 및 야지디 박멸, 세속 문화 파괴, 전통유산 파괴 등)들이 세계 언론들을 타고 적나라하게 알려지자 오히려 그걸 보고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 대한 무슬림들의 지지도가 더 늘어났다는 점이다.[22]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샤리아 서구권 국가들의 법에 적용시켜서 무슬림의 도덕규범을 반영하라는 것인데 여기엔 일방적인 무슬림 선민사상이 들어가서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최소한 법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것조차 부정하는 내용이 많아 다른 영국인들로부터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는 반응을 자아낸다. 게다가 이들이 요구하는 것들 중에는 샤리아 법을 법 전체에 적용시킬 수 없다면 일정한 구역을 토후국(Emirate)으로 만들어 그 안에선 샤리아 법만 적용시킬 수 있게 하라는 것도 있어서 이에 따라 반이슬람 시위도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등 마찰과 대립이 커지고 있다. 특히 영국 프랑스에선 샤리아 요구 시위를 하지를 않나, 세속적 광고판에 먹칠하고 자기네 거주지를 멋대로 샤리아 구역으로 선포하는 전단지를 도배하고 다니고 독일과 동 런던 등지에서는 이들이 임의로 ' 무슬림 자경단'을 구성하여 이슬람 율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샤리아를 따를 것을 강요하고 다니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 드는 식의 사건들까지 발생하면서 유럽권에서 반이슬람을 넘어선 혐이슬람 기류 조성에 힘을 싣고 있다.

실제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중앙아시아나 유럽 지역 밖의 무슬림들의 종교적 자유에 관한 인식은 심각한 편이다. 가령 샤리아를 국법으로 하는 것을 지지하는 무슬림의 비율이 그래도 이슬람권에서는 제일 세속주의적이라는 카자흐스탄(10%)이나 튀르키예(12%)에서도 10%대였으며 중동권으로 가면 레바논(29%)을 제외하고는 모든 나라에서 과반수를 넘겼고 심지어 이라크(91%)나 아프가니스탄(99%) 같은 곳에서는 90%를 넘어갔다.[23] 다른 종교권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를 보면 이스라엘 유대인 유대교 율법을 국법으로 지정하는 데 찬성하는 비율은 29%였다. #

쿠란에는 기독교인, 유대인, 사비교인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계시가 담긴 구절들이 있다. 이에 따라 이슬람 온건파는 타 종교인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슬람 과격파에서는 해당 구절이 오직 예언자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기 이전의 경우에만 해당하며 오늘날의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은 전부 다 지옥에 갈 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비교란 딱히 특정 종교나 종교 신자들을 부르는 말이 아니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인데 아랍인 다신교도들이 보기에 무슬림들은 유일신 신앙에 따라서 단 한 분의 신만을 섬기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며 무슬림들을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의 아랍어로 “앗 사비이운”이라고 불렀다.[24] 나중에 이슬람이 팽창하고 나서 동로마 제국에서 망명 온 그리스 고대 철학을 숭상하는 이교도 공동체가 이슬람 제국에 편입되었는데 이들은 자신이 “사비교인”이라고 주장하며 권리를 보장받았다.

2. 이슬람의 타 종교 탄압 사례

이슬람 초기에는 이후의 시대보다 소위 "성서의 백성들" (아흘 알 키탑)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었다. 중세 말 이슬람 세계 동부에서는 몽골이 서부에서는 십자군 전쟁이 들어닥치고 무슬림 세계가 큰 혼란에 빠졌던 것을 계기로 하여 이슬람 지성계와 일반 민중 모두 타 종교에 대하여 보다 비타협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13세기 몽골 침공 이후 시리아에서 몽골에 협력했던 기독교도들이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의 모습이 보였다.

대체적으로 유대교 기독교가 일반적인 다신교나 계통이 같지 않은 일신교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은 탄압을 받았으나 이들도 지하드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피차일반이었다.

오스만 시절에는 정교회 성당을 이슬람 사원보다 크게 만들지 못하게 했고 문을 매우 낮게 만들도록 하여 성당 문을 반지하식으로 만들었다.[25]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들은 레반트 지역의 아랍 기독교인 상인들을 만만하게 보고 술탄에게 무언가 불만이 생기거나 하면 분풀이로 상습 약탈을 가하였다.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기독교인 학살 사례로는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과 교역했던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비즈니스 파트너로 같은 기독교인이었던 아르메니아인들을 선호하였다. 서구 열강과 오스만 제국간의 경제적 교역이 늘어나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의 경제적, 사회적 입지도 점점 강화되었다. 서구 열강의 경제적 침탈이 빈발하는 한 가지만으로도 서구 열강과 같은 종교를 믿는 소수자였던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이 위험해질 요인이 다분했으며 무엇보다 이들이 능동적으로 변화하는 정세에 맞서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자 제국 내 무슬림들의 질투가 이들에게 몰린 것이 바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근본 원인이었다.

불상을 우상숭배로 보아 불교 유적에 대한 철저한 탄압이 뒤따랐다. 인도의 유명한 불교 대학이었던 날란다 대학이 무슬림들에 의해 함락당해 파괴된 사건은 불교사에서도 인도 불교의 몰락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와 인도에서는 불자들에 대한 제노포비아가 있었다는 속설은 부정되고 있는데 쿠샨 왕국과 파르티아에서 번영했던 중동의 불교는 서기 3세기 무렵 사산조 페르시아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화하면서 적극적인 훼불 정책을 단행함에 따라 기세가 많이 꺾인 상황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불교가 융성했던 사마르칸드, 발흐, 부하라의 불교 사원들이 이슬람 사원으로 그대로 개조되고 불교의 출가자 체계가 이슬람 학교 마드라사[26]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을 보면 중앙아시아의 불교 신자들이 엘리트 계급부터 먼저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으로 보인다. 인도와 중앙아시아에서는 보통 외부인들이 힌두교 조로아스터교가 널리 퍼진 계급 사회에 들어가면 낮은 카스트를 부여받게 되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서 인도에 새로 진출하는 부족들 같은 경우에는 불교로 개종했던 경우가 많았다.[27] 이슬람이 유입되자 인도로 무력을 진출하는 부족들은 평화적인 불교보다 성전을 강조하는 이슬람을 선호하는 경향이 늘어났고 이 덕분에 인도의 불교는 결정적으로 쇠퇴하고 대신 인도는 힌두교가 득세하는 곳이 되었다.

조로아스터교는 원래 사산조 페르시아의 정권과 강력하게 유착되어 있던 종교였으나 사산조가 무너지고 나서 발원지인 페르시아에서 퇴출되다시피 한다. 오히려 조로아스터교에서 갈라져 나온 마니교, 마즈타크교등의 신흥 종교들이나 페르시아 내에 잔존한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적극적으로 저항했지만 정통파 조로아스터교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 후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하 고 그대로 붕괴되어 버렸다. 페르시아의 뒤를 잇는 이란의 조로아스터교도는 현재 15만여명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고 그나마도 시아파 극단주의 세력의 폭행과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 이슬람에 맞서 심지어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 하에서도 포교행위를 한 마니교는 이슬람에 의해 '잔다크'(사악한 이단)라고 불리며 적극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그나마 간신히 잔존이라도 한 종교들과 다르게 조직적인 학살과 박해로 결국 사멸하고 말았다.

힌두교를 비롯한 인도 전통 종교들도 역사적으로 이슬람에게 어마어마하게 탄압받은 역사가 있다. 전근대 인도의 역사는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출신 유목민들의 꾸준한 침략과 정착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중세 이후 힌두교의 역사는 북인도에 한정해서 무슬림 유목민들에 의한 탄압과 제노사이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대신 인도의 남부는 무슬림 유목민의 침략에 보다 자유로웠는데 덕분에 똑같은 힌두교도라고 하더라도 북인도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한 반감이 더 심하다. 무슬림 유목민의 꾸준한 인도 침략은 만리장성 이북의 유목민들이 중국으로 침입하던 역사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의 힌두교 박해

인도에서는 이슬람 왕조의 침략 때마다 수십만이 학살당하고 더 많은 수가 노예로 끌려가고 힌두교 신상과 신전들이 수도 없이 박살났고 대표적으로 인도에서는 가즈나 조의 마흐무드가 힌두교 신상을 파괴해서 모스크의 계단으로 재활용한 사례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일단 이슬람에서는 힌두교와 같은 다신교 신자들을 교리상으로는 타협하여서는 안 되었지만 인도의 비이슬람 인구수가 넘사벽이기 때문에 다른 다신교 민족들처럼 닥치고 학살+정복 및 강제 개종으로 이슬람화 시키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물론 지속적인 힌두교도와의 전쟁, 이슬람 왕조의 난립 속에 학살은 계속되었지만) 전근대의 인도 사회는 카스트를 바탕으로 정교하게 산업이 분업화된 사회였고 무굴 제국의 무슬림 위정자들은 이러한 카스트를 바탕으로 한 경제력과 부를 항유하기 위하여 인도의 힌두교와 힌두교인들을 이슬람의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용인한 사례가 수두룩한데 대표적으로 악바르 대제가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인도의 자이나교는 유일신 신앙을 철저하게 반대하는 교리를 가진 종교지만 자이나교 신자들은 무슬림이 다스리는 무굴 제국 하에서 상업을 장악하며 엄청난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이러한 공존은 결국 보수적 무슬림인 아우랑제브 황제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지즈야 부활 및 특정 힌두 및 시크 사원들을 파괴했다.[28] 이슬람 개종 요구 혹은 유도 등으로 인해 일부 힌두교도의 큰 반란까지 일어났고 그걸 학살과 탄압으로 억누르며 힌두 및 시크 등의 종교정치인들에 대한 정치적 박해를 지속했다.[29]

토속신앙도 주 탄압의 대상이 되는데 토속 신앙을 믿는 동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은 종교가 없으므로 인간이 아닌 짐승이라는 논리로(...) 많은 수가 노예로 납치되었으며 노예로 끌려간 흑인들 중 흑인 남성들은 성욕이 과해 일을 하지 못한다는 억측으로 인해 예외없이 거세당했다. 이슬람 국가들 안에서의 소수의 기독교 신자들(가톨릭과 개신교, 정교회)도 탄압의 대상이 된다.

이슬람 시아파에서 갈라져나온 드루즈, 알라위파 같은 경우는 원래 오스만 제국 시대에 많은 박해를 받던 종파였으나 오늘날에는 시리아의 드루즈인들은 알라위파와 힘을 합쳐 수니파에 대항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알라위파와 드루즈인들은 아예 이스라엘군에 복무한다. 마찬가지로 바하이 신앙도 이슬람 시아파에서 갈라져나온 종교인데 현대 신흥 종교를 모조리 사이비 종교 취급하는 기성 종교들의 특성상 많은 탄압을 받고 있다.

이슬람 수니파와 힌두교 교리가 융합된 시크교는 초창기에는 무슬림 중에서도 많은 추종자가 있었으나 무굴 제국으로부터 이단 취급받고 숱한 학살과 박해를 받은 후에는 적극적으로 무굴 제국과 맞서 싸웠고 이슬람과의 적대감이 계속 심해진 나머지 시크교인의 상당수는 아예 할랄 방식으로 도축된 고기를 전부 시크교 율법상 금지시켜 버리고 시크교 방식으로 따로 도축한 동물의 고기만 먹도록 율법을 바꿨다. 오늘날에도 시크교도와 파키스탄 무슬림들은 서로 과거사 문제로 이를 갈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 펀자브 지역을 중심으로 한 아흐마디야 교파는 자신들이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라고 주장하지만 이슬람에서 같은 무슬림으로 인정해주지 않고 심한 박해와 따돌림을 가하고 있다.

현재도 대표적인 신정 국가 이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수단, 이집트, 파키스탄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아체나 말루쿠, 수마트라를 비롯한 대다수 중동 및 이슬람권에서는 야지디교인이나 만다야교인들, 기독교인들, 조로아스터교인 등 소수종교에 대한 사적인 차원에서의 각종 집단 괴롭힘과 폭력, 테러, 종교시설 방화가 빈발하고 갈수록 심해지는 중이다.

명심해 두어야 할 사실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슬람에 의한 타 종교 탄압과 학살의 역사는 근대 이후 굉장히 온건해지고 순화된 여타 기성종교와는 달리 이슬람권의 사회적 혼란이 지속됨에 따라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현재 이슬람권이 세계 다른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타 종교 탄압의 강도가 압도적으로 높으며 소수파에 대한 일방적 학살과 테러 역시 갈수록 제노사이드를 방불케 할 정도로 극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현재 이슬람 사회에서 이교도나 소수파들이 받는 억압과 탄압과 박해의 강도는 이슬람이 상대적으로 관대했다고 평가되는 중세와 근대에 비해 오히려 더욱 악화된 실정이다. 심지어 같은 이슬람이라고 할지라도 사상이나 종파가 소수종파이면 타 종교에게처럼 가혹한 탄압을 한다.[30] 이슬람이 현대 사회에서 자행하는 시대착오적이고 반인권적인 타 종교 박해와 배척, 그리고 학살에 대해서는 세계 어느 곳도 옹호하지 않는다. 사실 현대의 이슬람이 비난받는 이유는 이러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3. 타 종교 및 국가의 이슬람 탄압 사례

20세기 초에는 중화주의자 군벌 진수런 신장성에서 학정의 끝판왕을 보여주었다. 진수런이 실각하고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유교의 대단위 이슬람 탄압도 끝을 맺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튀르키예의 전제적 세속주의와 민주주의 등이 사실상 무너지기 시작하고 이슬람주의가 유행함에 따라 세속주의는 뿌리채 흔들리고 있으며 이슬람주의 성향 정의개발당에 의해 변해가는 양상이다. 다만 이들은 미국식 세속주의라고 하면서 변명하는 중이다.

4. 평등한 공존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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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당 번역문은 극단주의자들이나 이슬람혐오주의 성향의 개신교 일각에서 자주 인용하고 있으나 극단주의 논란이 있는 번역이다. [2] 해당 번역이 있는 웹페이지에 달린 주석을 번역하자면 "얼굴을 지우고 반듯이 한다는 것의 의미는 얼굴의 기관들을 제거하고 없앤다는 의미이다. 비유적인 의미는 이 기관들의 유용함을 없애는 것, 못생기고, 매력적이지 못하게 되고, 쓸모없게 된다는 말이다. (해당 구절의) 진짜 의미를 참고하여 "뒤편으로 돌린다"는 말은 이 기관들을 머리 뒤편으로 둔다는 것이다. 기관들이 여기에 놓이게 된다면 앞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은 뒤로 가게 될 것이다. 해당 단어의 비유적인 의미를 참고한다면 뒤로 돌린다는 말의 목적은 이 기관들과 더불어 얻어질 축복, 지복, 풍요, 행복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 완벽을 향해 나아가는 대신 원시로 퇴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식일의 사람을 저주하는 것"에 대해 보시오. 바카라 2:65-66 구절, 아으라프 7:163) [3] 원본 구절에서 여성의 역할을 언급하기 때문에 일부 학자는 이 구절이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이 차지해야 할 역할을 강조할 근거로 본다. [4] 독일 무슬림 출신인 하미드 압델 사미드 등의 이슬람 비평가는 이러한 무슬림들의 행태를 두고 현대 사회의 마피아들이 주민들에게 시행하는 '보호세' 갈취 제도와 비슷하다고 평했다. [5] 일례로 동로마 제국에서 불가리아를 정복한 후 처음에는 불가리아인 농민들에게 세금을 곡물로 납부하도록 했으나 나중에 이를 바꾸어 불가리아 농민들에게 세금을 화폐로 납부하도록 바꾸자 바로 폭동과 반란이 일어났다. 자급자족하는 농민 입장에서는 세금으로 지불할 화폐를 ‘구입’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6] 2등 국민으로 차별받는 기독교도와 유대교도 [7] 샤리아에 의한 비무슬림 탄압과 차별 및 세금폭탄 부과와 비무슬림 양육권 빼앗기 등. [8] 로버트 스펜서 저, 《정치적으로 왜곡된 이슬람 엿보기》 163p. [9] 결과적으로 무슬림들에게 유리해질 수밖에 없다. 전근대 사회에서 아내의 종교는 남편을 따라가게 마련인데 대놓고 무슬림 남성이 비무슬림 여성을 상대적으로 취하기 쉽게 만드는데 경우에 따라선 일부다처제까지 허용하니... 더욱이 결혼 차별 문제는 근본주의적인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말레이시아 같은 비교적 온건하다고 자부하는 나라에서까지 심각한 인권문제가 될 정도로 21세기에도 철저히 현재진행형이다. [10] 이는 동로마 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미르다스 왕조의 유화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1] 앞선 4명의 재상들이 채 1년을 넘기지 못하던 난세에 2년 반이나 정권을 유지하였다. [12] 다만 중세의 역사 기록이 공적을 자랑한다던가 피해를 과장하는 식의 부풀리기가 있음은 감안해야 한다. 진짜로 이슬람권이 수백만명을 납치되고 학살한 경우가 있는데 16세기 크림 칸국에서 무슬림들이 기독교도 노예 납치를 목적으로 우크라이나에서 1년에 평균 2만명씩 정교회 교인들 수백만명을 납치하거나 학살하자 이에 질릴 대로 질린 주민들이 떠나버려 우크라이나 중부가 아예 무인지대가 된 적이 있다. 중세 초 무렵에 유럽에서 노예로 납치된 수효가 진짜 수백만명이라는 기록이 맞다면 남유럽의 많은 곳이 주민들이 전부 달아나서 황무지가 되었다는 기록이 나와야 한다. 물론 과장이 있다는 것이지 무슬림 해적들이 남유럽 에 자행한 해적질이 극심하지 않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13] 토번 제국이 강성했을 땐 불교도 어느 정도 이슬람과 싸움이 가능했으나 토번이 무너지자마자 중앙아시아는 무서운 속도로 이슬람화되었다. [14] 이 영향으로 인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카피르가 아프리칸스어로 변질된 Kaffir(꺄프르)라는 단어는 N-word를 능가하는 수위의 남아공 흑인을 비하하는 욕이 되었다. [15] 즉, 선교가 금지되는 나라다. 사실 선교가 금지되는 나라는 이슬람권 국가를 제외하고 꽤 있는 편이고 이 정도면 진정한 종교의 자유라고는 볼 수 없지만 형식상으로는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 주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실질적으로 대다수 강성 이슬람 국가에서 비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은 주요 무슬림 커뮤니티에서 극심한 핍박이나 린치를 받고 지구상 어느 종교권보다도 가혹한 사회적 매장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볼 때 현대 기준으로 위 이슬람 국가들이 꽤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준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16]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등의 중앙아시아 쪽 국가들은 보통 세속주의적이라고 하지만 이 동네는 이슬람을 포함한 모든 종교가 엄격하게 통제받는 쪽에 가까우며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라 보긴 힘들다. [17] 이 신성모독이란 것도 무슬림들 기준에서 판단되는 대단히 자의적인 기준이다. 일례로 나이지리아에서는 기도하는 무슬림들 앞으로 기독교인 여자가 단순히 그냥 지나갔다는 이유 신성모독이라며 기독교도에 대한 유혈폭동이 일어난 적도 있다. [18] 실제로 이집트에서는 해마다 지즈야를 낼 돈이 없는 많은 극빈층 콥트 정교회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으로 반강제로 개종당하는 걸로 유명하다. [19] 다만 세속주의 성향의 무슬림들은 이를 철저히 지키지 않는 경우도 많다. [20] 근데 사실 이슬람 내 세속주의가 힘을 잃지 않았던 20세기 중후반까지만 해도 중동에서조차 수니파-시아파 무슬림 사이의 결혼은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다. 당사자들도 "같은 무슬림인데 뭐 어때..." 같은 식으로 생각하고 말았다고. 그러나 갈수록 이슬람 근본주의가 부상하고 수니-시아파간 종파갈등이 극심해지면서 지금은... [21] 2014년 ICM 영국, 독일, 프랑스 무슬림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지지 여부 여론조사 자료 통계. 단적으로 말해 영국에서는 길가다 마주치는 무슬림 중장년 10명 중 1명이, 프랑스에서는 이슬람 청년들 4명 중 1명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추종/지지자라는 것이다. 괜히 2015년 11월 파리 테러 2005년 런던 지하철 폭탄 테러가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난 게 아니다. [22] 하지만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정도로 극단적으로 가면 무슬림들의 반응도 대부분은 부정적이거나 파키스탄처럼 극단적인 지역에서도 '모른다' 정도가 주된 반응이었다. 물론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극단성을 감안하면 위에 언급된 10-20%도 우려할 만한 수준이지만. # [23] 하지만 이슬람 율법을 국법으로 도입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응답한 무슬림들 중에서도 배교자 처형 등의 극단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갈렸다. 카자흐스탄 같은 경우에는 샤리아 지지자(10%) 중 배교자 처형을 지지한다는 비율은 4%에 불과했고 인도네시아(샤리아 지지자 중 18%)처럼 샤리아 지지자가 70%가 넘어가는 나라들 중에서도 이런 극단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지지율이 낮은 경우도 있었다. 물론 샤리아 지지자가 99%에 그 중 79%가 배교자 처형을 지지한 아프가니스탄 같은 사례도 있지만. 조사 대상국 전체로 보면 샤리아 지지자에만 한정해도 배교자 처형까지 지지한다는 비율이 과반을 넘긴 나라는 19개국 중 6개국에 그쳤다. # [24] 같은 맥락에서 고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다른 종교의 신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는 미신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으며 고대 로마의 다신교 신자들은 유일신 종교를 믿는 기독교인과 유대교인들을 “불경한 무신론자들”이라며 비난했다고 한다. [25] 정교회 신자들에게 기다시피 성당으로 들어가게 하여 굴욕감을 주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26]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슬람 학교 마드라사의 시스템은 중앙아시아 불교 교육 시스템을 직접 이어받았다. 그 근거로 부하라, 사마르칸드 등 중앙아시아의 불교권 도시들이 이슬람화된 후에 한동안 이슬람 신학의 중심지가 된 것 등을 들 수 있다. [27] 중국의 오호십육국시대에 비한족들이 유교 대신 불교를 선호했던 이유와 같다. [28] 시크교 여성과 유아살해는 예삿일이었고 도저히 위키에 서술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핍박을 해댔다. [29] 다만 아우랑제브는 힌두 및 시크 사원을 파괴하는 동시에 많은 힌두 사원을 보호하고 힌두인 관료들을 더욱 기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사원들이 단순히 예배를 위한 곳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반역 의지를 내보일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30]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의 타종교와의 대외적인 갈등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어서 의외로 가볍게 생각하는 부분인데 현대에 들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내부 종파간 갈등은 대부분 봉합되거나 종파간에 가시적, 물질적 박해나 폭력사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메이저 타종교들(기독교, 유대교, 불교, 힌두교)과 달리 현대 이슬람은 내부 종파간 유혈탄압과 갈등 문제에서도 정말로 답이 없다 수준이다. 전 중동에 현재진행형으로 피를 뿌려 대는 수니파-시아파간 유혈전쟁과 갈등은 더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으며 알라위파, 아흐마디야파 같은 소수종파 무슬림들은 주류 수니파들에게 정말 가혹한 차별과 유혈박해를 일상처럼 당해 왔고 지금도 근본주의 수니파들에 의해 당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21세기에 아예 국가 주도로 시아파를 이단, 사이비 종파로 대놓고 탄압하고 있다.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시아파와 소수종파 모스크들이 테러당하거나 불타는 것이 뉴스에 올라오는 상황이다. 수니파 내부에서도 살라피즘이나 와하브파 같은 종파주의에 찌든 무슬림들의 세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며 이들의 종파주의, 이슬람 근본주의는 많은 무슬림들의 형식적인 "이슬람은 온건하니 나몰라라"식 태도와 무책임한 방관 속에 끝을 모르고 확산되고 있다. 이로 인해 시아파 무슬림들은 이란 같이 시아파가 주류인 국가로 망명하고 소수종파 무슬림들은 서양 국가로 망명하는 경우가 대거 속출하고 있다. [31] 초기에는 러시아 정교회도 탄압받았지만 독소전쟁 때 인민 결집의 필요성 때문에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32] 사실 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식민 열강들도 해외 식민지에 이런 방식의 식민통치를 취했다. 그리고 식민지 우민화 통치 분야의 본좌로는 앙골라, 모잠비크를 강점했던 포르투갈이 있다. 그러나 과거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겪었던 나라들 중 비무슬림 국가들( 마다가스카르, 캄보디아, 라오스 등등)조차 상당수가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것을 보면 프랑스의 우민화 정책이 유달리 차별적이고 악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3] 당시 무슬림들은 무역상, 천문학자, 의사 등으로 활동하였고 명나라 때는 유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들도 상당수 배출되었다. 회족들이 속했던 하나피파는 현지 관습법을 존중하는 법학파였기 때문에 중국에 정착한 무슬림들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것이 종교적 터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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