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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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寔
(220 ~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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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 삼국시대의 조위, 서진의 인물.2. 정사 삼국지
청주 평원군 고당현 출신으로 자(字)는 자진(子眞)이며, 전한의 제북정왕 유발(劉勃)의 12대손이다.젊은 시절에 가난했지만 학문을 익혀서 계리, 하남윤의 승, 상서랑, 정위정, 이부랑, 상국군사를 지내다가 순양자에 봉해졌다.
265년 순양백에 봉해지면서 소부에 임명되었다가 태상, 상서를 지냈고, 벽옹비를 통해 278년에 태상과 함께 수양작의 작위를 가진 것이 확인된다.
279년 손오 정벌( 오멸망전)에 참전해 진남군사를 지냈으며, 아들 유하가 뇌물을 받은 일이 있어 연좌로 면직되었다가 대사농에 임명되었지만 오래하지 않았고 국자좨주, 산기상시가 되었다.
280년 11월 사마염이 사마휼을 위해 수준 높은 관료를 선발해 보좌하게 했는데, 이 때 산기상시인 유식이 뜻과 행동이 깨끗하고 소박했기에 사마염의 명에 따라 사마휼의 스승이 되었다. 당시 풍속이 권력자에게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고 염치있고 양보하는 사람이 드물자 숭양론을 저술해 관직에 임명된 사람들이 감사하는 글을 올릴 때 반드시 현명한 사람을 추천하고 능력있는 사람에게 양보해야 하지만 그 글을 올릴 수 있게 하도록 했다.
291년 순양후에 봉해졌고 태자 태보로 옮기면서 시중, 특진, 우광록대부, 개부의동삼사, 령 기주 도독이 더해졌다.
300년 4월 7일에는 사공이 되었다.
302년 여름 5월에는 태부가 되었다가 늙고 병들어서 파직되었다.
304년 11월 태위로 임명되었지만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해 임명되지 않았다.
307년 12월 18일 사마치가 태위로 삼으려고 하자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했지만 허락받지 못해 태위가 되었는데, 몇 년 동안 계속해 늙어서 사직하겠다고 청했지만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309년 정월 유탄이 그의 청을 들어줄 것을 상주하자 28일에 집으로 갈 것을 명받고 순양백에 봉해졌다.
이듬해인 310년 91세의 나이로 졸했으며, 시호는 원(元)이다.
아버지 유광(劉廣)은 현령을 지냈으며, 유식의 전처인 노씨(盧氏)는 유제(劉躋)를 낳은 뒤 죽었고, 후처인 화씨(華氏)는 유하(劉夏)를 낳았다. 유식의 9세손 유소(劉昭)는 오호십육국시대 남량의 문학가이다.
3. 삼국지연의
263년 종회와 등애가 촉 정벌을 위해 출병하자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면서 부러워했지만 유식은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으며, 이에 왕상이 종회와 등애가 이번에 촉을 평정할 수 있냐고 묻자 촉은 평정하겠지만 두 사람 다 고향에 돌아오지 못할까 그게 걱정이라 했다. 왕상이 그 이유를 물었지만 웃기만 하면서 대답하지 않아 미친 소리로 여기고 더는 묻지 않았다고 하며 둘의 사망 플래그의 복선을 깔았다. 그의 추측은 등애와 종회의 비참한 최후로 실현되었다.4. 미디어 믹스
삼국지 9 일러스트 |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9에서만 등장하며 능력치는 42/23/72/68로 혼란, 매도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