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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5 16:19:02

유남규

올림픽 탁구 남자 단식 우승자
파일:오륜기(여백X).svg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유남규
( 1988)
파일:스웨덴 국기.svg 얀오베 발드네르
( 1992)
<colbgcolor=#131230><colcolor=#eee156> 유남규
劉南奎|Yoo Nam-kyu
파일:유남규파리.jpg
출생 1968년 6월 4일 ([age(1968-06-04)]세)
부산직할시 영도구 영선동
(現 부산광역시 영도구 영선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강릉 유씨 (江陵 劉氏)
신체 170cm, 61kg, A형
학력 영선초등학교 (졸업)
부산남중학교 (졸업)
부산광성공업고등학교[1] (졸업)
경성대학교 사범대학 ( 체육교육학 / 학사)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 체육학[2] / 석사[3])
경희대학교 체육대학원 ( 체육학[4] / 박사[5])
현직 한국거래소 탁구단 감독
대한체육회 이사
직업 탁구 선수 (왼손 펜홀더 드라이브 / 은퇴)
탁구 감독
종교 개신교
가족 배우자 윤영실(1975년생), 딸 유예린

1. 개요2. 선수 경력3. 감독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수상 기록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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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탁구 선수 출신 감독. 올림픽 탁구 종목 최초의 금메달리스트다.[6]

2. 선수 경력

2.1. 1986년

유남규하면 1988 올림픽 때가 아무래도 대중들의 기억에 더 많이 남아있지만, 사실 2년 전인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먼저 가능성을 보여줬다.

8강전에서 당시 세계 최강자였던 중국의 장자량을 극적으로 꺾고 결승전에 진출해 중국의 후이준을 3대 0으로 이기고 단식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7] 당시 유남규의 세계 랭킹이 50위였는데 8강 상대였던 장자량은 세계 랭킹 1위의 선수였다. 그야말로 대이변이 일어난 셈. 경기는 5세트까지 이어졌고 마지막에 결국 장자량이 승리하는 듯했으나 14:19로 지고 있던 점수차를 유남규가 극복해내고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유남규는 이 대회 우승을 목표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남들 몰래 모래주머니를 차고[8] 달리기를 하고 돌아와서 다시 아침 달리기를 했다고 한다.[9] 실제로 당시 선수 달리기 1등은 으레 유남규였다고. 훈련이 끝나고도 남아서 늦게까지 개인연습을 했고 결국 단식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또 단식 외 안재형 김완의 활약으로, 한국팀이 우승하면서 마무리된 중국과의 단체전 결승전도 한국 탁구사에서 손꼽히는 명승부로 뽑힌다. 여기서 유남규는 3경기 3패로 팀 패배의 원흉이 될 뻔했으나 안재형의 3승과 김완의 2승으로 극적인 버스우승을 했다. 당시 유남규는 10대 고3 학생으로 일반적으론 중압감을 떨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식에서 랭킹 1위 장자량과 후이준이라는 쟁쟁한 선수들을 모두 꺾고 우승한 게 특이한 거였다. 그래서인지 유남규 본인도 훗날 인터뷰에서 이 아시안 게임의 우승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힌 바 있다.

2.2. 1988년

1988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여, 8강전에서 스웨덴의 레전드 요르겐 페르손, 준결승전에서 스웨덴의 에릭 린드를 꺾고 올라가, 결승전에서 김기택을 꺾고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즉, 남자 구기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되었다.[10]

대진운도 따랐는데, 당시 에릭 린드가 8강에서 세계랭킹 1위인 중국의 장자량을 꺾는 파란을 일으키고, 유남규의 선배 김기택이 스웨덴의 최강자이자 중국의 대항마로 일컬어지던 얀오베 발드네르를 8강에서 꺾는 이변을 선보였다. 또 헝가리 백전노장 티보르 클람파가 노쇠화라는 평가를 넘어서 띠동갑인 중국의 천롱칸[11]까지 8강에서 잡아냈다.

물론 장자량은 2년 전 유남규가 아시안게임 준결승전에서 이미 한번 이겼었기 때문에 장자량이 올라온다고 유남규가 무조건 불리했다는 보장은 없긴 하며, 8강전의 상대 페르손도 당시 전성기였기 때문에 유남규가 준결승까지 무조건 쉬운 상대만 만난 것은 아니었다.

2.3. 1989년

세계선수권 혼합 복식 종목에 현정화와 함께 참가하여 우승하였다. 둘은 아시아 선수권에서도 1988년과 1990년에 혼합 복식 부문을 우승하였다.

2.4. 1990년~ 1992년

1990년 월드컵과 1992년 월드컵 남자 복식에서 김택수와 함께 우승해 월드컵 복식 2회 우승을 달성했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복식에서 김택수와 함께 동메달을 목에 걸었으나, 단식에선 16강에서 프랑스의 복병 장 필립 가티엥에게 세트 스코어 2대3으로 아쉽게 패배하며 탈락했다. 참고로 가티엥은 결승까지 진출해 은메달을 획득하게 된다.[12]

2.5. 1996년

1996 애틀란타 올림픽 남자 복식에서 이철승과 함께 동메달을 획득했다.

훗날 본인 말에 따르면, 이후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팀이 휘청이는 등 악재가 겹치면서 자연스럽게 현역 은퇴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한동안은 그래도 금메달리스트인데 일자리는 구하겠지 싶어 큰 걱정을 안했으나, IMF 여파로 노는 기간이 점점 늘어나자 생활고를 겪었다고 밝힐 정도로 나름 어려운 시기도 겪은 모양. 물론 현역 시절 연간 1억 이상 벌었다고 하고, 금메달리스트로 연금은 꼬박꼬박 나왔을테니 진짜 노숙자처럼 산 건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3. 감독 경력

세월이 흘러, 여러 실업 탁구단 감독을 맡았으며 국가대표팀 감독을 겸임하기도 했다. 다만 2010년대 맡은 S-OIL 탁구단은 해체되었다. 이후 2016년 삼성생명 탁구단 여자부 감독으로 부임하였는데, 이는 한때 그가 코치로도 있었던 농심 삼다수 탁구단이 해체될 당시 추교성 감독의 행보와 비교되며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당시 추교성 감독은 구단 해체에도 선수들을 독려하고 타 팀에서 운동할 수 있도록 노력한 반면, 유남규 감독은 곧바로 새로운 팀의 감독으로 부임하였기 때문이다.

초창기 선수단을 지도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천재가 범재를 가르치는 형식"이었다고 알려져있다. "야~ 이렇게 하면 돼" 하면서 알려줘도 선수들이 못했다고 한다.[13] 후에 자신의 지도 방식에서 문제점을 깨달아 선수들에게 알기 쉽게 자세히 알려주는 방식으로 바꾸었고, 이후 선수들이 잘 따라와 주면서 괜찮은 성적을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14]

2020 도쿄 올림픽을 위해 국가대표 선발 기준을 바꾸었다. 기존의 여자 탁구 대표팀 선발 방식은 세계 랭킹을 기준으로 탑급 추천 선수를 뽑고 나머지 선수들끼리 선발전을 치르는 것이었으나, 유남규 감독 때는 아예 세계 랭킹 기준을 없애고 무한경쟁을 통해 선발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일부 국내 랭킹 탑급 선수들과 갈등을 빚었고, 급기야는 2019년 11월 서로 갈등이 심했던 전지희가 대화 내용을 녹음한 뒤 탁구협회에 제출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에 유남규 감독은 전반적인 책임을 지고 한달 뒤인 12월에 자진 사퇴했고, 두 사람간의 갈등 해결을 위해 탁구협회는 스포츠공정위원회의 힘을 빌리기로 결정했다. 스포츠공정위에서는 이미 사퇴한 유남규는 참고인이라 징계대상이 아니고 전지희에게만 견책 처분 결정을 내렸다.[15] 결국 선발 방식에 대한 견해차와 특정 선수의 특정 코치 선임 요구에 의한 갈등으로 사퇴한 셈.[16]

2022년부터 한국거래소 탁구단의 감독을 맡고 있다. 그래서 MBC 해설위원으로 2024 파리 올림픽 탁구 혼합 복식 중계 당시 한국거래소 소속인 임종훈이 신유빈과 함께 동메달을 따내자 우리 팀 선수라고 좋아하기도 했다.

4. 플레이 스타일

왼손잡이 펜홀더 선수로, 민첩한 몸과 잔발 스텝으로 재빠르게 움직이며 대부분의 공을 포핸드로 잡아치는 스타일이다. 공격 랠리, 짧게 놓는 리시브, 2구 선제공격, 서브와 3구 공격 등 모두 고루 좋았다. 또한 꾀돌이라는 별명답게 접전 상황에서의 서브 선택과 코스 변경, 그리고 상대의 수를 미리 예측하고 허를 찌르는 영리한 수싸움도 뛰어났다. 하지만 유남규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강력한 포핸드 드라이브였다. 세계적인 선수들도 유남규의 회전 많은 풍차 드라이브를 받기 상당히 까다로워했다. 빠른 박자의 스매싱도 최고 수준이었다.

다만 안정감 면에서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치고는 아쉬운 모습을 보일 때도 종종 있었다.[17] 특히 준비가 잘 안 되어있을 때와 불편한 포지션에서 불확실한 공격을 할 때 범실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백핸드 능력과 수비력 또한 강력했던 포핸드 공격력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백핸드가 약했던 건 결코 아니다. 유남규는 긴장되는 상황 속에서도 높은 집중력을 통해 받아낼 수 없을 것 같은 볼도 받아내고 펜홀드 백핸드로도 엄청난 드라이브와 스매싱을 성공시켜 상대를 당황하게 하는 등 멋진 장면도 많이 만들어냈다. 여러모로 유승민, 김택수 이전 시대 펜홀더의 로망 스타일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5. 수상 기록

올림픽
금메달 1988 서울 단식
동메달 1988 서울 남자 복식
동메달 1992 바르셀로나 남자 복식
동메달 1996 애틀랜타 남자 복식
세계 선수권
금메달 1989 도르트문트 혼합 복식
은메달 1993 예테보리 혼합 복식
동메달 1987 뉴델리 남자 복식
동메달 1993 예테보리 남자 복식
동메달 1995 텐진 단체전
동메달 1997 맨체스터 단체전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86 서울 단체전
금메달 1986 서울 단식
금메달 1990 베이징 단체전
은메달 1986 서울 남자 복식
은메달 1990 베이징 혼합 복식
은메달 1994 히로시마 단체전
은메달 1994 히로시마 남자 복식
은메달 1994 히로시마 단식
은메달 1998 방콕 단체전
동메달 1990 베이징 남자 복식
동메달 1990 베이징 단식
동메달 1994 히로시마 혼합 복식
아시아 선수권
금메달 1988 니가타 혼합 복식
금메달 1990 쿠알라룸푸르 혼합 복식
은메달 1988 니가타 단체전
은메달 1998 오사카 남자 복식
은메달 1998 오사카 단식
동메달 1988 니가타 남자 복식
월드컵(단식)
동메달 1992 호치민 단식
월드컵(복식)
금메달 1990 서울 남자 복식
금메달 1992 라스베가스 남자 복식
월드컵(단체전)
금메달 1995 애틀랜타 단체전
주니어 아시아 선수권
금메달 1986 나고야 단체전
동메달 1986 나고야 남자 복식
동메달 1986 나고야 단식

6. 기타



[1] 경성전자고등학교 [2] 체육교육 전공 [3] 석사 학위 논문: 탁구연습 경기시의 스트레스 호르몬 변화 및 운동강도 분석(2000) [4] 스포츠의학 전공 [5] 박사 학위 논문: 엘리트 일반탁구선수와 어깨관절 impingement syndrome 선수의 좌·우 등속성 근력 특성 비교(2006) [6] 탁구가 1988 서울 올림픽부터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었기에, 홈그라운드에서 그는 최초의 올림픽 탁구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7] 대신 후이준은 탱위와 짝을 이룬 남자 복식 결승에서 유남규-김완 조를 꺾고 금메달을 땄다. [8] 다만 오늘날 탁구인들 사이에선 모래주머니 훈련이 효과가 있다 vs 없다로 의견이 나뉘는 편이다. [9] 사실 유남규는 현역 시절 꾀돌이, 게으른 천재 소리를 듣기도 했을 정도로 운동을 열심히 한다는 인상을 주는 선수는 아니었는데, 밖에서 보여지는 것과 달리 본인 나름대로는 또 열심히 한 모양. [10] 여담으로 여자는 핸드볼 대표팀이 첫 금메달을 차지했다. [11] 클람파는 1953년생으로 만 35세였고, 천롱칸은 1965년생 만 23세였다. 당시 최고령 선수였고, 실제로 세계 탁구계에서 노쇠화가 왔다는 평가도 받고 있었지만, 중국선수를 꺾으면서 이를 멋지게 극복했다. 단지 아쉬운건 준결승전에서 한국의 김기택에게 패배한 이후에 3위 결정전에서도 에릭 린드에게 패배하여 동메달을 못 땄다는 점이다. [12] 금메달은 스웨덴의 얀오베 발드네르. [13] 대략 이런 스타일이다: "쟤가 뿅 때릴 땐 한발 물러서 있어. 그리고 얘가 이렇게 나오면 라켓 딱 올리고 따닥따닥 괴롭혀. 무슨 말인지 알겠지. 따닥따닥" - 실제 2012 런던 올림픽 남자 단체전 포르투갈전 중 유승민 선수에게 2세트 종료 후 전달한 작전 사항 중에 한 이야기이다. [14] 2012년 MBC 예능 라디오 스타에 출연했을 때도 관련 일화를 언급한 적이 있다. [15] 다만 이렇게 갈등 관계가 생겼음에도 이후 전지희가 국가대표팀에 출전한 경기 해설할 땐 나름 중립적으로 해설했다. [16] 여담으로 이후 기존 방식으로 선발된 선수들이 도쿄올림픽에 참가했으나 노메달을 기록했고, 결국 남녀 탁구대표팀 모두 무한경쟁을 통한 선발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했지만, 2024 파리 올림픽에선 다시 세계랭킹 30위권 내 선수가 3명이면 3명 다 거기서 뽑되, 미달시 선발 경쟁전을 통해 뽑기로 하면서 여자팀의 경우 신유빈, 전지희는 자동 출전하고 경쟁전 끝에 이은혜가 대표팀에 합류하게 되어 동메달을 획득하긴 했다. [17] 그래서인지 유남규의 전성기 기간도 2살 어린 김택수보다 짧았다. 실제 허리 부상이 겹친 1992 올림픽부턴 김택수가 사실상 대표팀의 에이스였다. [18] 게다가 홈버프도 없이 낸 기록이다. 때문에 이걸로 유승민 기승전최고라고 주장하는 키워사람들도 심심찮게 있다. [19] 이경규, 김용만, 박수홍, 윤정수 중 박수홍이 그나마 에이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