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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20:17:57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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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27대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William Howard Taft
파일:27_William_Howard_Taft_-_Harris_and_Ewing.jpg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1857년 9월 15일
오하이오주 해밀턴 카운티 신시내티
사망 1930년 3월 8일 (향년 72세)
워싱턴 D.C. 와이오밍 애비뉴 2215
묘소 버지니아주 알링턴 카운티 알링턴 국립묘지
재임기간 제27대 대통령
1909년 3월 4일 ~ 1913년 3월 4일
서명 파일: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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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알폰소 태프트(1810 ~ 1891)
어머니 루이즈 태프트(1827 ~ 1907)
형제자매 이복형 찰스 펠프스 태프트(1843 ~ 1929)
이복형 피터 로슨 태프트(1846 ~ 1889)
이복누나 메리(1848 ~ 1848)
이복형 알폰소(1850 ~ 1851)
이복형 알폰소(1851 ~ 1852)
형 새뮤얼(1855 ~ 1856)
남동생 헨리 워터스(1859 ~ 1945)
남동생 호러스 더튼(1861 ~ 1943)
여동생 프란세스 루이즈(1865 ~ 1950)
배우자 헬렌 헤런 테프트(1861 ~ 1943, 1886년 결혼)
자녀 로버트 A. 태프트(1889 ~ 1953)
헬렌 태프트(1891 ~ 1987)
찰스 펠프스 테프트 2세(1897 ~ 1983)
학력 우드워드 고등학교 (졸업)
예일 대학교 ( B.A.)
신시내티 대학교 법학대학원 (LL.B.)[1]
종교 유니테리언
신체 182cm / 체중 175kg[2] / O형( Rh-)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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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db4711ee3aac25996e314d556cdc64203c8a81f2fc8bdfd2579f0f62df4add91.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2. 약력3. 생애
3.1. 초년기3.2. 대통령 시절3.3. 연방대법원장 시절3.4. 사망
4. 평가5. 여담
5.1. 미국 역사상 가장 비만인 대통령

[clearfix]

1. 개요

제27대 미국 대통령의 육성

미국의 제27대 대통령이다. 대통령직을 마치고 난 뒤에는 제10대 연방 대법원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정치적 처신 하나만은 능력있는 인물이었으나, 전쟁부 장관 재임시절 체결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대한제국 대일본제국 식민지가 되는 걸 묵인하기도 했다.

2. 약력

3. 생애

3.1. 초년기

파일:William_Howard_Taft_Yale_College_BA_1878.jpg
예일 대학교 재학 시절의 태프트.이 때부터 턱선이 안 보일 기미가 보였다.

오하이오 주 출신으로 예일 대학교를 2등으로 졸업했다. 이후 신시내티 대학교 로스쿨을 다녔는데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오하이오주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대단한 공부벌레였던 듯.

이후 오하이오 주에서 연방판사로 일하고 1900년 에스파냐로부터 얻은 필리핀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4년간 필리핀에서 일했다. 그 후 미국에 돌아와 1904년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육군장관으로 임명되면서 그의 보좌관으로 뛰었다.

1905년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 총리였던 일본 가쓰라 다로일본의 조선 식민지배를 미국이 묵인하는 대신, 일본제국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묵인한다라는 그 유명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이 밀약을 통해 초래된 결과가 을사조약 경술국치.[3] 어쨌든 루스벨트 대통령의 참모로 중용되면서 그의 신임을 받았고 개인적으로도 어지간히 친밀한 관계를 맺었는지 루스벨트는 태프트를 자신의 후계자로 내세웠다.

3.2. 대통령 시절

1908년,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지원 하에 미합중국 제2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으로서는 전반적으로는 루스벨트 행정부의 팽창 정책을 계승했지만 루스벨트와 달리 이른바 '달러 외교'라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한 무력을 수반하지 않는 평화적인 외교를 목표로 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선진국들이 강대국인 중국을 잠식해 가는 걸 억제하면서 강대국 권리의 평등한 분배를 목표로 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당연히 제국주의에 혈안이 된 선진국들이 이 말을 들을 리 없었다. 중앙아메리카에서도 유럽 열강의 자본을 배제하여 중앙아메리카의 개발을 추진, 정세의 안정을 도모했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의 무력 개입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서 오히려 중앙아메리카의 정세는 불안해졌다.

파일:윌리엄 하워드 태프트.png

대통령이 된 태프트는 능동적이고 패기 있던 루스벨트와는 정 반대로 몇몇 실력 있는 상원의원에게 끌려다니다시피 했다. 한번은 관세를 낮춰 보려고 임시의회를 열어서 관세를 낮추는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지만 로드아일랜드 주 상원의원 넬슨 올드릭(Nelson W. Aldrich)이 거부하며 수정안을 달자 그대로 서명했을 정도. 캐나다와 자유무역을 하려다가 캐나다에서 반발이 일어나 윌프리드 로리에 총리가 1911년 사임하자 공화당은 분열 크리를 맞았다. 환경보호정책을 편 루스벨트의 장관인 제임스 루돌프 가필드( 제임스 A. 가필드 대통령의 아들이다.) 대신 리처드 발린저를 장관에 임명하기도 했는데[4] 알래스카의 석탄 광산을 개발하려는 클라렌스 커닝햄을 옹호하는 게 마음에 안 든 루스벨트는 측근 기포드 핀커트 장관을 보내 장관을 교체하라고 말했지만 태프트는 반대로 그 측근을 경질시켜 버렸다. 그전에 발린저를 고발한 토지청 특수요원 루이스 글래비스가 발린저를 고발하자 글래비스도 고발해버렸다. 근데 당시 공화당 내부에는 루스벨트의 추종자가 적지 않아서 루스벨트와 다른 노선을 걷는 태프트의 정책에 반대를 일삼아 계속 태클을 걸어댔다. 이걸 보면 태프트 대통령이 열받는 것은 당연한 일.[5]
파일:external/cf.juggle-images.com/wg-william-howard-taft-5.jpg
당시 루스벨트와 태프트를 풍자한 만평. 제목을 의역하면 '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Auld Lang Syne)여...(한 판 붙자).'

파일:external/media-2.web.britannica.com/71396-004-42F10F06.jpg

어쨌든 이에 열받은 루스벨트는 '저 친구 대통령 더 시키느니 내가 다시 한번 더 뛸래'라며 다시 한번 대통령에 출마했고 태프트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러나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는 태프트가 루스벨트를 561:107이란 압도적 결과로 누르고 후보 지명을 받았다.[6] 루스벨트는 그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진보당을 차려 공화당을 분열시켜 버렸다. 그 결과 공화당의 표는 분산되었고[7] 어부지리로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 후보가 당선되었다.

3.3. 연방대법원장 시절

파일:external/www.history.com/william-h-taft-supremecourt.jpg
1925년 연방대법원 기념 단체사진[8]

대통령 임기를 마친 태프트는 모교인 예일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지내다 1921년 워런 G. 하딩 대통령에 의해 제10대 연방대법원장으로 지명되어 1930년까지 재임했다.[9] 이 경력으로 그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행정부와 사법부의 수장을 모두 역임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게다가 혹평을 받은 대통령 시절에 비해 연방대법원장으로서의 직무 수행 평가는 매우 좋았다. 법학 전공자이자 사회생활을 법조계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통령처럼 정무적 판단을 요하는 정치인보다는 법관이 더 어울리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태프트 본인도 생전에 "대통령보다 연방대법원장이 되는 게 꿈이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10] 태프트가 이끄는 연방대법원에서 대법관으로 함께 근무한 루이 브랜다이스 판사는 훗날 잠시 동안 근무기간이 겹친 필릭스 프랑크푸르터 대법관[11]에게 그에 대해 "왜 대법원장은 잘하는 사람이 대통령 할 때는 그렇게 못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언급[12]하기도 했다. 반세기 후에도 혹평 속에 퇴임했지만 대통령 퇴임 후에 다른 일은 잘 한 대통령이 나온다.

태프트 대법원장이 이끄는 미 연방대법원은 주로 연방정부의 시장 규제에 반대하는 등 보수적인 판결을 이어갔으나, 미국 사법부의 역사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태프트는 대법원장의 법관 인사권을 확립했으며, 특히 현재의 한국 대법원처럼 밀린 사건 처리에 급급하던 연방대법원을 정책법원으로 탈바꿈하는 상고허가제를 도입했다.

태프트는 항소심 판결은 순회재판소(한국의 고등법원)에서 해결되어야 하며, 주요한 사건만이 대법원에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대법원이 상고 수리의 완전한 선택권을 갖는 상고허가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태프트는 "모든 당사자에게 대법원의 판단을 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반대 여론을 향해 "당사자 사이에 정의를 세우는 데는 두 번의 재판이면 충분하다"는 반론으로 의회를 설득했다. 그의 강력한 주장과 끈질긴 설득 끝에 상고허가제를 규정한 법률안은 의회에서 3년 만에 통과되었고, 태프트를 통해 미국 연방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토론 중심의 법원이라는 오늘날의 시스템을 갖출 수 있었다.
파일:external/utahpoliticalcapitol.com/20120110094716SCOTUSbuilding_1st_Street_SE.jpg
미국 연방대법원 청사 전경

또한 태프트가 연방대법원장이 되었을 때, 연방대법원은 자체적인 청사가 존재하지 않아 회의가 있을 때마다 매번 의회 의사당을 이용해야 했고 이 때문에 사무실은 항상 어수선했다. 태프트는 1925년 연방대법원 청사를 따로 건설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을 수용한 의회가 1927년 연방대법원 청사 건축을 위해 의회 남쪽에 건설 부지를 확보하는 예산을 책정하였으나, 그는 착공 시작 이전인 1930년에 세상을 뜨면서 생전에 완공된 청사의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다. 연방대법원 청사는 그의 사후 2년여가 지난 1932년에 착공에 들어가 1935년에 완공되었다.

이렇듯 연방대법원의 시스템을 확립하고 독립된 청사를 만드는 기틀을 제공하는 등 태프트는 연방대법원장으로서 매우 뛰어났다는 호평을 받았으나, 그가 이끄는 대법원도 크나큰 오점을 남겼다. 바로 주민들의 건강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지적장애인들의 불임을 강제한 버지니아주 법의 위헌 여부를 심사한 'Buck v. Bell 재판'이다. 이는 태프트만의 오점이 아닌, 그 당시 미국 법원 전체에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은 거대한 불명예였다. 대법원장인 태프트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력이 큰 판결을 많이 내려 위대한 대법관으로 추앙받는 올리버 웬델 홈즈 대법관[13]도 이 판결에서 합헌 측에 섰고 이 둘을 포함한 8인의 다수의견에 따라 대법원은 8:1로 해당 법이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유일하게 이 법을 위헌이라고 판단한 피어스 버틀러 대법관조차 위헌을 주장하는 소수의견을 작성하지 않고 그냥 위헌 의사만 밝혔으며, 일각에서는 버틀러 대법관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불임을 부정적으로 보아 위헌 측에 선 것 같다는 추측도 나왔다. 합헌이라고 판단한 8인의 다수의견에는 "지적장애인으로 3대를 이어갔으면 충분하다(Three generations of imbeciles are enough)."는 충격적인 시각이 담기기까지 했다.

해당 판결이 나온 1920년대는 우생학이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지를 받던 시대였다. 때문에 매우 관대한 상대주의적 시각으로는 당시에는 그렇게 문제될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순 있어도, 21세기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장애인 인권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처참한 수준의 인식이다. 물론 당시에도 인권 신장을 중시하는 사람들, 특히 장애인 인권운동가[14]들로부터 숱한 비판을 받으며 사회적 파장이 컸던 판결이었는데, 연방대법원은 현재까지 이 판결을 뒤집지 못하고 있다. 오래된 역사 속 판례를 뒤집으려면 해당 판례의 핵심 논리와 긴밀하게 결부된 사건이 대법원으로 올라와야 그 사건을 다루며 예전 판례를 무효화할 가능성이 열리는데, 우생학이 인류의 오점이라는 전 세계적 비판 속에 묻힌 오늘날에 우생학과 관련된 법정 다툼이 벌어질 확률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3.4. 사망

파일:external/www.history.com/william-h-taft-wheelchair.jpg
1930년 3월 3일, 사망 5일 전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1930년 2월 3일 연방대법원장직을 사임했고, 사임 한 달여 만인 그 해 3월 8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태프트는 노화와 비만으로 인한 건강 악화에도 1929년 12월 31일 사망한 그의 형 찰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신시내티로의 여정을 고집했고 이 여정에서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1930년 1월 6일에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초안을 작성했으나 병환으로 이를 완성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때문에 휴식을 위해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쉬빌로 갔으나, 1월 말경에는 말을 하지 못하고 환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후버 대통령에게 차기 대법원장에 찰스 에반스 휴즈를 지명할것임을 확약받기 전까지 사임하지 않았다. 2월 3일, 태프트는 연방대법원장직을 사임하였고 워싱턴으로 돌아와 8명의 대법관이 헌사한 감사 편지에 대한 서명을 겨우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3월 8일 워싱턴 자택에서 사망했다. 이후 시신은 국회의사당에 안치되었고 사망 사흘 뒤인 3월 11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된 최초의 대통령이자 첫 연방 대법원장이 되었다.

4. 평가

미국에서는 그저 ' 제일 뚱뚱한 대통령'(...) 정도로 기억된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임자는 대외적으로는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으며 제국주의 정책의 신호탄을 쏘아올리고 국내적으로는 반독점법을 시행해 한창 깽판치던 미국 내 자본가들의 행패를 조져버린 강렬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이고 후임자 역시 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행정학을 정립하였으며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우드로 윌슨이다보니 그 둘 사이에 끼여서 존재감이 없는 인물. 일부에서는 대통령 시절은 몰라도 대법원장 시절엔 나름대로 혁신주의 운동을 이어나갔지만 루스벨트와 윌슨의 그늘에 가려서 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다.

5. 여담

파일:external/i.telegraph.co.uk/1911_1443742i.jpg

5.1. 미국 역사상 가장 비만인 대통령

파일:external/www.wellswooster.com/william-taft-tub.jpg 파일:external/www.philippine-history.org/Willam-Howard-Taft.jpg
태프트의 욕조. 필리핀에서 소에 탑승한 태프트.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최고로 비만인 뚱뚱보 대통령으로 유명하다. 최고로 몸무게가 나갔을 때는 175kg였다. 참고로 현 시점에서 뚱뚱한 지도자로 유명한 김정은이 150kg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120kg대나 되었는데, 대통령이 되면서 백악관에서 50kg나 불어났다고 한다. 그때 붙은 별명이 "빅 빌 태프트(Big Bill Taft).

지금이어도 182cm에 175kg이면 BMI 52.83이니 매우 심각한 상태인데 그 당시 기준을 생각하면 더 심각하다. 20세기 초반 미국인 남성의 평균 신장은 173cm 전후이고 지금같이 뚱뚱한 사람이 많을 때도 아니었다. 현재의 미국 백인 남성 평균 신장은 179cm, 평균 체중은 92kg임을 감안했을 때 현재 시점으로는 키는 190cm이지만 몸무게가 200kg를 넘는 사람을 보는 느낌과 유사하다.

친구였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활동적이고 운동을 즐겨 근육질을 가진 것과 대조된다.[18] 사실 태프트의 아버지 알폰소 태프트도 아들이 엄청난 배불뚝이로 전락하는 과정에 일조했다. 태프트의 아버지 알폰소는 굉장히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인물로, 밖에 나가서 활동하는 행위 자체를 천박하다고 여겨 싫어했다. 그 때문에 아들인 태프트도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안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고 먹기만 하다 보니 저절로 뱃살이 나왔다[19].

태프트보다 무거운 지도자로는 통가의 왕 타우파하우 투포우 4세가 몸무게가 200kg에 육박했는데, 다만 키가 196cm인 엄청난 장신이라 BMI는 52.1으로 김정은, 태프트보다는 낮았다.
이 때문에 일화가 다양하다.
다이어트 식단이라 하기에는 꽤나 풍족한 식사인데, 심지어 저 식단으로 60파운드(27kg)를 감량했다고 한다.

[1] 당시에는 법무박사 학위였으며 1960년대 이후로는 J.D.로 변경되었다. 현재에는 미국에선 쓰이지 않는 학위이며 국제적으로 보면 법학학사로 쓰이는 국가들이 존재해서 헷갈릴 수 있다. [2] 대통령 재임시절 무게, 미국 대통령 중 몸무게가 제일 많이 나간다. [3] 경술국치는 이 사람이 재임하던 시절에 일어났다. [4]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대학 동문을 임명한 것으로 나온다. [5] 하지만 당시는 강도귀족 단죄의 여론이 높았던 시대였던지라 시어도어의 노선과 반대 노선(즉, 친 자본가적인 노선)을 걷는 태프트의 정책은 당연히 민심과는 상반된 것으로, 이건 결국 대선에서 시어도어가 더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것으로서 확인되었다. [6] 진보진영의 표가 위스콘신 주지사 출신의 상원의원 로버트 라 폴렛에게 분열된 측면도 있다. 라 폴렛은 훗날 탈당해 1924년 대선에서 별도의 진보당으로 무려 16.6%를 득표하고 위스콘신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해 심혈관 질환으로 급사했다. [7] 참고로 이때 대선에서 루즈벨트는 27.4%를 득표하며 23.2%를 득표한 공화당에 대해서는 완승을 거두었다. 진보당은 하원에서 10석을 확보했으나 상원에서는 오히려 몬태나 주를 잃어 0명이 당선되었다. [8] 아랫줄 가운데 인물이 태프트이다. [9] 태프트가 어떻게 연방대법원장에서 물러났는지는 기록이 서로 엇갈린다. 어떤 쪽에서는 은퇴했다고 하고, 또 어떤 쪽에서는 사임했다고 하는데, 미국 연방대법관 직은 종신직이라 은퇴하고 싶으면 사임해야 한다. [10] 존 로버츠 대법원장에 의하면, 태프트가 대통령이 되는 걸 원했던 건 태프트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11] 프랑크푸르터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명을 받고 인준 절차를 통과해 1939년 1월 20일에 연방대법관으로 취임했고, 루이 브랜다이스 대법관은 1939년 2월 13일에 대법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따라서 두 사람은 약 20일 동안 함께 근무했다. [12] 원문: "It is difficult for me to understand why a man who is so good a Chief Justice...could have been so bad as President." [13] Buck v. Bell 재판 판결에서 다수의견을 작성하였다. 다수의견 측에 선 태프트가 집필자를 홈즈로 지정한 것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세한 건 미국의 연방대법원 항목 참조. [14] 헬렌 켈러가 1920년대 당시에 불혹쯤 접어들어 한창 열성적으로 장애인 인권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하고 있었다. [15] 사용자 뿐만 아니라 노조도 부당노동행위 주체로 인정하였고, 노조의 취업독점권인 Closed shop을 폐지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16] 본명은 헬렌 루이즈 헤론(Helen Louise Herron)으로 결혼한 뒤 헬렌 루이즈 해론 태프트가 되었다. 자서전을 쓴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클린 케네디와 함께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된 유이한 "퍼스트 레이디"다. [17] 당시 일본은 일찌감치 미국과 친교하는 정책을 시작했었다. [18] 다만 시어도어는 운동 중에서 복싱을 너무 즐기다 눈이 찢어지고 한쪽 눈은 시력을 아예 상실했다. 참고로 당시의 복싱은 베어너클이었기 때문에 펀치 드렁크 증세는 적었으나 피부가 찢어지는 일이 많았다. [19] 참고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내에서 알아주는 명문가 집안 출신인데, 그는 태프트와는 다르게 어릴 적부터 사냥과 승마, 등산을 즐겼고, 젊었을 적에는 카우보이 생활까지 했을 만큼, 매우 활동적으로 살았다. [20] 식사 직후 졸거나 자는 습관 역시 혈당 스파이크로 인한 식곤증 증세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1] 당뇨병이 심각해지면 인슐린 저항성이 심해지며 간뇌에서는 혈당이 부족하다고 판단되어 근육을 분해하라고 지시한다. 또한, 당뇨병에 의해 신장 기능이 저하되면 하체 부종이 생기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당연하지만 걷지도 못하게 된다. 통풍까지 있었으니 확인사살. [22] 잿물로 껍질 벗긴 옥수수로 만든 미국 남부식 죽이다. [23] 소고기 살코기를 넣고 끓인 물로, 육수와 비슷하지만 육수만큼 오래 끓이지 않는다. 보통 환자에게 주는 음료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