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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25대 재무장관 | |||
미합중국 제6대 연방대법원장 새먼 P. 체이스 Salmon P. Cha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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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1b><colcolor=#f2ba37> 본명 |
새먼 포틀랜드 체이스 Salmon Portland Cha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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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08년 1월 13일 | ||
미국 뉴햄프셔주 설리번 카운티 코니시 | |||
사망 | 1873년 5월 7일 (향년 65세) | ||
미국 뉴욕주 뉴욕시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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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 제23대 오하이오 주지사 | ||
1856년 1월 14일 ~ 1860년 1월 9일 | |||
제25대 재무장관 | |||
1861년 3월 7일 ~ 1864년 6월 30일 | |||
제6대 연방대법원장 (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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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12월 15일 ~ 1873년 5월 7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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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1b><colcolor=#f2ba37> 묘소 | 스프링 그로브 묘지 | |
부모 |
아버지 이타마르 체이스 어머니 자넷 랄스턴[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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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캐서린 제인 가니스 (1834년 3월 4일 결혼, 1835년 사별) 엘리자 앤 스미스 (1839년 9월 26일 결혼, 사별) 사라 벨라 던롭 러들로 (사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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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장녀 케이트 체이스 차녀 자넷 네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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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다트머스 대학교 ( 법학 / 학사) | ||
직업 | 정치인, 판사, 변호사 | ||
소속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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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선수 | 1 (연방상원) | ||
의원 대수 | 31, 32, 33 (연방상원) | ||
지역구 | 오하이오 | ||
경력 |
신시내티 시의회 의원 자유당 오하이오주 대표 제31-33대 연방상원의원 제23대 오하이오 주지사 제25대 재무장관 제6대 연방대법원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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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이자 연방 대법원장으로 연방상원의원과 제23대 오하이오 주지사, 그리고 남북 전쟁 동안 제25대 재무장관 (1861년 ~ 1864년)을 지냈다.2. 생애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체이스는 변호사로서 자신의 초기 경력을 빈번히 도망친 흑인 노예들을 변호한 것으로 유명하며 "도망친 노예들을 위한 검찰총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그는 1855년부터 1859년까지 오하이오 주지사를 지냈다.야망이 큰 인물로, 그의 동료 정치인 중 한 명은 "그는 좋은 사람이지만 신학적으로 불손하다. 그는 삼위일체에 네 번째 인물이 있는 줄 안다"라고 말하며 그의 자존심을 비꼬았다. 자유토지당 창당에 관여했으며, 1860년 대통령 선거 공화당 경선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의 주요 경쟁자 중 하나였으나 링컨에게 패했다. 이는 그가 민주당-자유토지당 출신으로 당시 공화당 주류인 북부 휘그당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링컨은 계파 안배 차원에서 재무 관련 경력이 없는 그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하여 공화당 급진파 등 그의 지지층을 포섭했다. 체이스는 남북 전쟁 동안 재정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고 국내 은행 제도를 설립하여 지폐 통화( 그린백)를 발행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전반적으로 역할을 잘 해내고 전쟁 수행에 기여했다고 평가되지만, 재무장관의 역할 범위를 넘어 전쟁 수행 방침에도 관여하고 싶어했으며 대통령직에 대한 야심을 숨기지 않아 링컨과 불편한 관계였다.[2] 여러 차례 사임을 요구했으나 그가 차기 대선에 경쟁자로 나설 것을 우려한 링컨에 의해 반려되었다.
1864년 6월 마침내 재무장관직에서 사임한 그해 후순에 대법원장 로저 터니가 사망하자 링컨에 의해 미국 대법원의 연방 대법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873년 사망할 때까지 이 직위를 지냈다. 체이스는 노예해방론자답게 대법원장이 되자마자 흑인 존 록(John Rock)을 대법원 변호사 협회(Supreme Court Bar)에 받아들여 연방대법원에서 사건을 맡을 수 있게 했다. 앤드루 존슨 대통령 탄핵 당시 대법원장이었으며,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에 대한 반역죄 혐의를 기각하기도 했다.
연방대법원장이 되어서도 대통령직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못해 1868년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려 시도했으나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1872년에는 공화당에서 갈라져 나온 자유공화당(Liberal Republican Party) 창당에 관여하고 대선후보가 되는 것을 노렸지만 역시 실패했다.
3. 여담
- 1934년 1만달러 지폐 속 초상화
- 미국의 주화에 표어 'In God We Trust(우리는 신을 믿습니다)'가 새겨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체이스였다.
- 이 사람의 이름이 굉장히 의외인 곳에 남아있는데 바로 JP모건 체이스. 재무장관을 역임할 정도로 경제에 바삭한 인물이 은행 하나 정도 세워서 거기에 자기 이름이 들어가도 이상할 것 없지 않나 싶겠지만, 의외인 이유는 바로 체이스는 위의 은행과 하등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냥 체이스 연방인가은행(Chase National Bank) 설립 당시 창립자가 그를 기리기 위해서 끌어다 썼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