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0a3d00><colcolor=#FFFFFF> 관련 문서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생애 · 특징 · 작품목록 · 평가 · BWV | |
바흐의 작품 | 골드베르크 변주곡 · 인벤션과 신포니아 · 토카타와 푸가(BWV 565) ·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 ||
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는 샛별인가 | |||
음악의 헌정 · 푸가의 기법 | |||
G선상의 아리아 ·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 |||
371 Harmonized Chorales · Komm, süßer Tod · 마태수난곡 · 미사 B단조 · 요한수난곡 | |||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 무반주 첼로 모음곡 · 샤콘느 |
1. 개요
그의 생애는 보통 그가 옮겨다녔던 지역을 따라 구분하는데 대체로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아른슈타트 시절(1703 ~ 1707), 뮐하우젠 시절(1707~1708), 바이마르 시절(1708 ~ 1717), 쾨텐 시절(1717 ~ 1723), 라이프치히 시절(1723–1750) 이렇게 구분한다.2. 초기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 요한 헤어리치우스 作 의 1685년경 초상화 |
1685년 3월 신성 로마 제국의 튀링엔 지방의 소도시 아이제나흐에서 음악가인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1]의 아들로 태어난다. 3월 23일에 그 곳의 성 게오르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출생한 것은 3월 21일이라는 설도 있다.). 바흐 가(家)는 200년간 유럽의 명문 음악가문으로 군림한 본좌급 집안이기에 제바스티안 역시 아버지나 형들의 영향을 받아 음악에 다양한 관심을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사촌 큰아버지한테서 오르간을 배우고, 한편으로는 교회 부속학교에도 다니면서 성가대원으로서도 활약하였다. 아이제나흐는 종교 개혁자 루터가 신약성서 번역을 한 곳이며, 이는 작센 선제후가 그를 보호해 주었기에 가능했다. 어린 바흐의 음악성과 종교적 품성의 기초는 이러한 환경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9세에 어머니를 잃고 이듬해엔 아버지를 잃었던 그는 1695년 둘째형 요한 야코프 바흐와 함께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71-1721)가 살고 있던 오르드루프(Ohrdruf)로 옮겨간 후 형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의 기초를 배웠다.[2] 이 형은 당시의 대 작곡가 요한 파헬벨[3]의 제자로서, 제바스티안도 형을 통해 파헬벨의 양식을 배웠으며 그의 초기작품에서는 파헬벨의 영향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맏형은 또한 요한 야콥 프로베르거, 요한 카스파르 케를,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등 당대 명 작곡가의 작품 사보를 많이 소장하고 있어서 어린 제바스티안은 몰래 그것들을 달빛에 의존해서 필사해가며 공부하다가 형에게 들켰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오르드루프의 학교에서 라틴어와 루터 정통파 신학을 배운 것도 장래의 바흐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이었다.
[clearfix]
3. 뤼네부르크~바이마르
그러다 형 부부가 아이를 계속 낳으면서 부양할 가족이 늘어나자 바흐는 자립을 해야 했다. 당시 오르드루프의 칸트로였던 엘리아스 헤르다(Elias Herd, 1674~1728)는 독일 북부에 위치한 뤼네부르크의 기숙학교를 추천해주었고 15세때인 1700년 바흐는 친구였던 게오르크 에르트만[4]과 함께 뤼네부르크 미카엘 교회 부속의 미하엘 학교에 입학하였는데[5] 이 학교는 가난한 학생을 위해 무료로 숙식을 제공해주는 학교였다. 뿐만 아니라 미카엘 학교에는 저명한 작곡가 175명이 작곡한 악보 1102권이 소장돼있는, 당시 독일에서도 손꼽힐 만한 엄청난 음악도서관이 있었는데 이 도서관은 어린 바흐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또한 당시 뤼네부르크 성 요한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던 게오르크 뵘(Georg Boehm, 1661-1733)의 음악을 접하게 되었으며 재학중 여러번 함부르크로 여행을 가서 빈센트 뤼베크(Vincent Lubeck, 1654~1740)과 당시 북스테후데와 쌍벽을 이루는 북독일 오르간악파의 거두인 요한 아담 라인켄(Jan Adams Reinken, 1643~1722)의 연주를 들었다.또한 바흐가 프랑스 양식의 음악을 처음 배운곳도 뤼네부르크이다. 당시 뤼네부르크를 다스리던 게오르크 빌헬름 공작은 프랑스인과 결혼하여 당시 궁정에는 프랑스 양식이 유행중이었고, 또 공작은 궁정악단을 만들기도 했는데 여기서 바흐는 프랑수아 쿠프랭이나 장 바티스트 륄리와 니콜라 드 그리니 같은 저명한 프랑스 음악가들과 그들의 음악을 익히게 되었다. 뤼네부르크 시절에 바흐가 작곡한 음악에는 뵘이나 프랑스 느낌이 다분하게 드러난다.
1702년 4월 바흐는 성 미하엘 학교를 졸업하였다. 본래 학생 코스대로라면 그 뒤에는 대학을 갔어야 했으나 대학에 갈만한 경제상황이 되지 못했던 바흐는 곧바로 일선으로 뛰어들게 된다. 바흐는 당분간 큰형의 집에 머물면서 아이제나흐와 장어하우젠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자리에 지원했으나 실패하였고 이듬해인 1703년 1월에 작센 바이마르 공국 요한 에른스트 3세의 악단에 바이올린과 비올라 주자와 시종을 겸한 자리로 들어가게 된다. 바흐는 이때 당대 최고의 바이올린 거장이었던 요한 파울 폰 베스트호프(Johann Paul von Westhoff, 1656–1705)를 만나게 된다.
4. 아른슈타트 시절
새 교회(Neue Kirche). 현재는 바흐교회라 불린다. |
젊은 바흐에게 기회는 곧 찾아오게 되었는데, 같은 해인 1703년 7월 아른슈타트(Arnstadt) 성 보나파치우스 교회의 새 오르간을 시연해달라는 요청이 온 것이다. 바흐의 공개연주회는 13일에 열렸고, 그의 너무나 훌륭한 연주에 반한 관계자들은 8월 9일 바흐에게 50굴덴(약371만원)의 연봉을 약속하며 오르가니스트로 채용하게 된다. 이 자리는 음악가로써 바흐의 공식적인 첫 직책이기도 하였다. 그가 할 일은 상당히 널널한 편이었는데 월, 수, 일요일마다 2시간씩 오르간을 연주하고 소규모 합창단을 지도하는 일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런 의의와는 별개로 새교회 음악의 수준은 별로 높지 않았고, 바흐는 그들에게 좀 더 높은 음악 수준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심지어 바흐는 교회 바순 주자인 요한 하인리히 가이어스바흐에게 연주실력에 대해 핀잔을 주었다가, 그날 밤 앙심을 품은 가이어스바흐는 각목으로 바흐를 공격하였고 바흐도 이에 맞서 허리에 차고있던 검으로 난투극을 벌인 안건이 1705년 8월 5일 아른슈타트 지방법원에 올라오기도 했다. 이처럼 자신의 음악 스타일과 원칙을 고집하는 바흐의 성향은 나이 들어서도 계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당연히 고용주들과 기타 음악가들과도 갈등을 많이 빚었다.
1705년 11월에 그는 당대의 대작곡가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연주 및 그가 지휘하고 있는 저녁 음악회를 듣기 위해 4주간의 휴가를 얻어 450km 떨어진 뤼베크까지 걸어 갔다. 근데 4주 휴가라고 해놓고 갔다온 기간은 4개월이다 정말 교회가 스트레스 기는 했던 모양이다.
바흐의 열정과 재능이 매우 마음에 들었던 북스테후데는 이미 70이 넘은 고령이었으므로 자신이 맡고 있던 뤼베크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바흐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조건이 문제였는데 당시 그 자리를 승계하려면 전임자의 딸과 결혼[6] 즉, 북스테후데의 딸 마르가리타와 결혼해야 했다. 당시 마르가리타는 바흐보다 10살이나 위인 30살인데다 별로 예쁘지도 않았고 바흐는 자신의 6촌이자 한살 위였던 마리아 바르바라와 한참 연애중이었기 때문에 이 조건을 거절하고 뤼베크를 떠나게 된다. [7][8] 어쨌든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바흐는 북스테후데의 작품과 오르간 연주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으며, 이 영향은 이 시기 바흐의 오르간곡에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유명한 오르간 곡인 <토카타와 푸가> (BWV 565)도 이때 작곡했다.
바흐가 쓰던 보나파치우스 교회 오르간의 건반대. 당시 바흐가 쓰던 건반대만 뜯어서 아른슈타트 박물관에 전시중 |
하지만 바흐가 뤼베크에서 아른슈타트로 복귀한 후 교회의 감독격인 시의 성직회의에서는 그가 4개월이나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한 무책임을 비난했으며, 오르간 연주시에 그간 들어보지 못한 이상한 악구를 많이 삽입하고 코랄을 괴상하게 즉흥연주한다는 이유로 온갖 생트집을 잡으며 바흐에게 징계를 먹이며, 또 금녀의 구역이었던 성가대석에 여인을 데려왔다는 이유로 또 다시 징계를 내린다. 당시 1706년 2월 21일 아른 슈타트 성직회의록에는 다음과 같이 바흐의 죄목이 써있다.
1. 교회의 허락 없이 장기간 자리를 비운 일 2. 너무 현란하게 연주하여 신도들을 혼란스럽게 함 3. 예배에서 오르간을 너무 길게 연주함 4. 지휘자로써 단원들과 다툼 5. 처음보는 여자를 성가대에 세움(이 여성이 누군지는 후술)] |
이런 지저분한 딴지를 견디다 못한 바흐는 결국 뮐하우젠에 채용된 후인 1707년 6월 29일 사직하며 이 자리는 그의 사촌이었던 요한 에른스트 바흐가 이어받는다.
이처럼 바흐와 아른슈타트는 그리 아름답지 못한 인연을 갖고 있다. 하지만 현재 아른슈타트는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바흐 기념관과 젊은 시절의 바흐 동상이 있다. 그리고 기차역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있는 관광 안내판에 '바흐의 도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바흐가 관광객들이 이 도시...라기보다는 마을을 찾는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
5. 뮐하우젠
17세기 중반 뮐하우젠의 도시 전경. 가운데의 가장 높은 교회가 블라지우스 교회이다. 마테우스 메리언 作 |
뮐하우젠에서는 교회 오르가니스트로서 활약하는 한편 종교음악에 대한 열의를 다지면서 생애 처음으로 종교 성악곡인 칸타타를 작곡하기 시작하며, 《주여,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사오니Aus der Tiefen rufe ich, Herr, zu dir, BWV 131》, 《하나님의 시간이 최상의 시간이라Gottes Zeit ist die allerbeste Zeit, BWV 106》 등, 북스테후데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초기 칸타타들을 작곡하였다.[9] 특히 시 의회의 취임식 기념행사 음악으로 위촉되어 2월 4일 옆 성 마리아 교회에서 연주된 대규모 편성의 화려한 칸타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도다Gott ist mein König, BWV 71》는 다음 주일에 재연주를 가질 정도로 엄청난 호응을 얻었고 시의회도 매우 만족해하며 가사와 악보의 출판을 허락하게 된다.[10] 이 성공을 바탕으로 바흐는 시의회로부터 교회 오르간의 대폭적인 개선 약속을 받아 내었다.[11] 시의회는 이 칸타타에 얼마나 흡족해했는지, 바흐가 바이마르 공국 오르가니스트로 재직 중인 1709년, 1710년에도 시의회 선거 기념 음악을 바흐에게 의뢰했다.[12]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도다Gott ist mein König, BWV 71》의 첫 합창 자필악보 1708년경 |
신의 영광을 기리는 교회음악을 연주하라는 소명을 받들어 제 미약한 능력이나마 교회음악에 진력한 결과인지 이제 거의 모든 도시에서 음악수준이 향상되었으며 때로는 여기보다 한 층 더 다듬어진 화음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저는 약간의 비용을 들여 가장 엄선된 교회음악을 골라 선집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저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오르간의 결함을 수선하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어디에서나 기꺼이 제 임무를 수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제가 이러한 의무들을 수행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따르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앞으로도 기대하는 만큼 상황이 호전될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제 자신이 이 교회를 위해 기꺼이 영혼을 바치기로 했는데도 말입니다. 게다가 더욱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현재 저의 생활은 궁핍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집세는 한 번밖에 내지 못했고 생필품도 가장 기본적인 것만 구입하고 있으니 현재로서는 그저 생계가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러던 차에 신의 은총을 입어 생계와 삶의 목표는 물론이거니와 제대로 된 교회음악을 간섭받지 않고 만들어 볼 수 있는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작센 바이마르 대공 전하의 궁정교회와 실내악단에서 저를 받아주신다는 관대한 처분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상이 제가 시의회에 무한한 존경을 표시하면서 잠시 이 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허락해 주십사 적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 본연의 임무는 교회음악이 있다는 걸 명심하고 있습니다. 향후에도 저에게 교회에서 일할 기회를 주신다면 저는 평생동안 말보다 행동으로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친애하는 신사와 후원자 여러분께
귀하의 충실한 종,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1708년 6월 25일, 뮐하우젠
바흐가 낸 사직서
그러나 사실 제가 이러한 의무들을 수행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따르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앞으로도 기대하는 만큼 상황이 호전될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제 자신이 이 교회를 위해 기꺼이 영혼을 바치기로 했는데도 말입니다. 게다가 더욱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현재 저의 생활은 궁핍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집세는 한 번밖에 내지 못했고 생필품도 가장 기본적인 것만 구입하고 있으니 현재로서는 그저 생계가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러던 차에 신의 은총을 입어 생계와 삶의 목표는 물론이거니와 제대로 된 교회음악을 간섭받지 않고 만들어 볼 수 있는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작센 바이마르 대공 전하의 궁정교회와 실내악단에서 저를 받아주신다는 관대한 처분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상이 제가 시의회에 무한한 존경을 표시하면서 잠시 이 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허락해 주십사 적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 본연의 임무는 교회음악이 있다는 걸 명심하고 있습니다. 향후에도 저에게 교회에서 일할 기회를 주신다면 저는 평생동안 말보다 행동으로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친애하는 신사와 후원자 여러분께
귀하의 충실한 종,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1708년 6월 25일, 뮐하우젠
바흐가 낸 사직서
바흐는 1708년 6월 중순 쯤에 작센 바이마르 궁정의 초청으로 바이마르의 공작 앞에서 바이마르의 보수한 오르간을 연주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마침 작센 바이마르 공이 그를 데려가려고 하였고 그는 바로 승낙하며 6월 25일 사직서를 제출한다. 다만 그는 자신이 계획한 오르간의 개축이 완료될 때까지 공사 감독직은 그대로 맡기로 하였으며 다음해 개축이 완료되자 뮐하우젠에 가서 기념 연주를 하기도 했다. 후에 1735년에 아들 고트프리드 베른하르트가 뮐하우젠 성 마리아 교회 오르가니스트에 지원했을 당시 무료로 감정을 해주기도 했다.
6. 바이마르 시절
17세기 중반 작센 바이마르 공국의 전경. 마테우스 메리언 作 |
1708년 7월 4일 바흐는 작센 바이마르 공국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실내음악 작곡가라는 직함으로 공식 취임한다. 한때는 악사로서 취직하였던 추억의 고장으로, 이제 젊은 대가가 된 그는 궁정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서 돌아왔으며 바흐의 능력을 높이 산 바이마르 왕실에서는 그에게 뮐하우젠 시절의 2배에 해당되는 150굴덴[1020만원]이라는 연봉을 약속하였다. 공식적으로 그는 바이마르 궁정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이지만, 동시에 궁정 악단의 연주자이기도 했다. 월급도 높아진 건 바이마르 영주의 배려도 물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투잡을 뛰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후에 공작은 바흐의 연봉을 200굴덴으로 올려주었고, 별도의 생필품도 지급해주었다. 이것으로 당시 바흐의 고용주였던 빌헬름 에른스트 공작이 얼마나 바흐를 총애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인구 5만의 작센 바이마르 공국은 두 명의 공작이 다스리는 통치체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바흐가 왔을 때에는 빌헬름 궁전에 거주하였던 빌헬름 에른스트 공작(William Ernest, 1662–1728)과 붉은 궁전에 거주하였던 조카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공작(Ernst August, 1688–1748)이 공동으로 통치중이었다. 이 두 공작은 모두 음악을 좋아하였지만[15] 서로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었으며 이런 궁정의 공공연한 암투가 후에 바흐가 바이마르를 떠나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빌헬름 공작은 궁정악단이 자신의 허락 없이 조카가 머무르는 붉은 궁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지만 바흐는 이를 무시하고 붉은 궁에서 열리는 여러 가지 음악행사에 참여하거나,[16] 혹은 기타 사유로 수시로 붉은 궁에 드나들었으며[17] 이는 빌헬름 공작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한 행동이었다.
1660년경 바이마르 궁정 교회 내부. 일명 '천국의 성' 크리스티안 리히터 작 |
오페라와 가장 유사한 양식인 음악 드라마(Dramma per musica)도 이 바이마르 시기에 처음 작곡하게 되는데, 일명 '사냥 칸타타'로 불리는 유명한 《힘이 나는 사냥은 나의 즐거움이라Was mir behagt, ist nur die muntre Jagd, BWV 208》도 1713년 작품. 옆동네였던 작센 바이센펠스 공국의 크리스티안 공작(Christian, 1688 ~ 1736)의 생일 날 행해질 사냥 이후의 만찬 음악을 바흐에게 의뢰한 작품이었다. 바흐는 그 후로도 몇 번 바이센펠스 공국으로 연주 여행을 갔고 여러 칸타타를 헌정하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6.1. 할레
할레 교구의 담당목사이자 음악 애호가였던 요한 미하엘 하이네치우스 (Johann Michael Heineccius, 1674~1722) |
다음해였던 1월 14일 바흐의 연봉 등 처우 협의안이 통과되어 바흐의 연봉이 기본 140탈러[1081만원]에 추가로 거주비와 생필품비를 지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바흐에게 계약서가 전달되었으나, 바흐는 바이마르에 사직허락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와 보수에 대한 사항을 추가 협상하고 싶다는 이유로 계약서를 돌려보내며, 이번 주 안으로 결정하겠다고 교회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바흐는 결정을 몇 주 동안 끌고 있었다. 2월 1일 보수 협상이 결렬되었고 3월 1일에는 바흐가 오르가니스트 임명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고 할레 교구회의록에 적혀있다. 이로 인해 바흐는 단순히 바이마르 연봉 인상을 위해 할레에 왔다는 오해를 듣기도 했다.[20]
6.2. 바이마르의 악장 바흐
1715년경 바흐로 추정되는 요한 에른스트 렌취(Johann Ernst Rentsch)의 그림. 논란이 조금 있는 그림인데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조. |
바흐가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알게 된 바이마르 궁정에서는 그를 붙잡아두기 위해 월급을 인상해주고 1714년 3월 2일에는 궁정악단의 악장(콘체르트마스터)으로 승진되었다. 승진되면서 바흐에게는 새로운 의무가 생겼는데 바로 매달 1곡씩 새로운 칸타타를 작곡하여 선보이는 것이었다. 3주후인 성 수태고지일에 바이마르에서의 첫 종교 칸타타인 《하늘의 왕이시여, 어서 오소서Himmelskönig, sei willkommen, BWV 182》로 첫 스타트를 끊었고, 이 바이마르 시기의 칸타타로는 《울며, 탄식하며, 근심하며, 두려워함은Weinen, Klagen, Sorgen, Zagen, BWV 12》, 《그리스도인들아, 이 날을 새겨라Christen, ätzet diesen Tag, BWV 63》 등을 포함한 20여 개의 칸타타가 남아있다.[21]
안토니오 비발디의 협주곡집 《조화의 영감L'estro armonico, Op.3(1711)》에 수록된 11번 협주곡 RV 565를 편곡한 《오르간 협주곡 d단조, BWV 596》의 자필보, 1714년경 |
작센 바이마르 공국의 빌헬름 에른스트 공작 |
이런 공식 업무 외에도 바흐는 붉은 궁 출입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붉은 궁을 드나들며 에른스트 공작과 요한 에른스트 왕자의 개인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추가로 과외비를 받기도 했다. 전술하였듯이, 특히 이 둘은 음악적 재능도 아주 뛰어나서 직접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참가하였으며 특히 에른스트 왕자[22]는 직접 곡을 쓰기도 했다. 1716년 1월 24일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공작과 안할트 쾨텐 공국의 엘레오노레 빌헬미네(Eleonore Wilhelmine)의 결혼식이 열렸으며 피로연 음악으로 역시 바흐의 결혼식 칸타타가 연주되었다.[23] 아마 이 결혼식에 빌헬미네의 오빠였던 레오폴트 공작도 참석했을 것이며, 아우구스트 공작의 주선으로 바흐가 다음 일자리를 옮기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716년 4월 말 바흐는 완성된 오르간을 감정하기 위해 요한 쿠나우와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롤레와 함께 다시금 할레에 5일 동안 머물렀으며 성대한 만찬을 대접받았다.[24]
이 해 말에 공국의 궁정악장 사무엘 드레제가 세상을 뜨자, 에른스트 공작은 이 자리를 바흐가 아닌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에게 제안했지만 거절당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이 드레제가 죽은 후 당연히 자신이 궁정악장 자리를 계승할 줄 알았던 바흐의 자존심을 긁어 바이마르 악장직에 마음이 떠났다는 설도 있다.
어수선한 와중에 바흐는 레오폴트 공작으로부터 쾨텐 공국의 카펠마이스터 자리를 제안받게 되고, 1717년 8월 5일 바흐는 최종적으로 쾨텐 공국의 궁정악장 계약서에 서명하였다.
6.3. 드레스덴
작센의 수도였던 드레스덴 중심 광장(Neumarkt)의 풍경 베르나르도 벨로토(Bernardo Bellotto) 作, 1749년 |
1717년 8월에 드레스덴의 콘체르터마이스터(악장)이었던 장 바티스트 볼뤼미에(Jean-Baptiste Volumier)[25]가 바흐에게 편지를 띄워, 당시 드레스덴에 머물고 있었던 건반악기 연주자였던 프랑스의 루이 마르샹(Louis Marchand)과 연주대결을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루이 마르샹은 드레스덴에 머물며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26] 앞에서 연주한 대가로 100두카트[2100만원]의 가치가 있는 두 개의 메달을 받았다. 그러나 연주실력과는 별개로 마르샹은 당시에 상당히 거만했던 사람으로 유명해서,[28] 드레스덴에 큰소리치며 떵떵거리던 마르샹을 아니꼽게 여긴 당시 악장이었던 볼뤼미에가 마르샹의 기를 꺾고자 바흐를 초청했을 것이다.
1754년 카를 필리프 엠마누엘 바흐와 바흐의 제자였던 아그리콜라가 쓴 바흐의 추도문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바흐는 볼뤼미에의 초청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드레스덴으로 갔다. 볼뤼미에는 바흐를 기쁘게 맞으며 마르샹의 연주를 먼저 들을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 뒤에 바흐는 마르샹에게 어떤 곡을 제시하더라도 즉흥적으로 연주하겠으니 마르샹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응해달라고 정중하게 편지를 썼다. 이것은 위대한 대담성의 증거였다. 마르샹도 이에 기쁘게 응한다고 하며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선제후에게 이를 알렸다.
바흐는 약속된 시간에 약속 장소였던 요아힘 프리드리히 플레밍 백작의 집에 나타났다. 그곳에는 고위직의 남성들과 여성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마르샹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고 백작이 마르샹에게 시간이 되었다고 사람을 보냈으나 마르샹이 새벽에 마차를 타고 드레스덴을 떠났다는 사실이 전해졌고 모든 사람들은 이에 경악하였다.
경연장에 남은 유일한 대가였던 바흐는 무장했던 그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였으며 그곳의 모든 사람들은 바흐의 연주를 듣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왕은 바흐에게 부상으로 500탈러[29]를 주려 하였다. 하지만 상금을 가로채 이익을 챙기려 하였던 어떤 하인에 의해 바흐는 상금을 박탈당하였고 연주에 대한 보상은 오직 명예뿐이었다.
바흐는 약속된 시간에 약속 장소였던 요아힘 프리드리히 플레밍 백작의 집에 나타났다. 그곳에는 고위직의 남성들과 여성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마르샹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고 백작이 마르샹에게 시간이 되었다고 사람을 보냈으나 마르샹이 새벽에 마차를 타고 드레스덴을 떠났다는 사실이 전해졌고 모든 사람들은 이에 경악하였다.
경연장에 남은 유일한 대가였던 바흐는 무장했던 그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였으며 그곳의 모든 사람들은 바흐의 연주를 듣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왕은 바흐에게 부상으로 500탈러[29]를 주려 하였다. 하지만 상금을 가로채 이익을 챙기려 하였던 어떤 하인에 의해 바흐는 상금을 박탈당하였고 연주에 대한 보상은 오직 명예뿐이었다.
이러한 내용인데 드레스덴에서 경연 대회가 벌어진 것 자체는 맞지만 마르샹이 바흐의 연주를 듣고 패배가 두려워 달아났다는 추도문의 주장은 근거가 별로 없다. 마르샹과 그의 작품은 당시 독일 내에서 프랑스 건반음악의 대표적 작품으로 꽤 알려져 있었을 정도로 유명인이었기 때문이다. 바흐도 마르샹의 작품을 알고 있었다. 아무튼 이 경연에 대한 마르샹의 입장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왜 마르샹이 드레스덴을 떠났는가는 미스터리이다. 또한 부상 500탈러의 횡령 사건도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드레스덴에서 안토니오 로티와, 친구였던 피젠델, 하이니헨을 만났을 것이다.
그 후 사퇴 수속을 마치기 위해 바로 바이마르로 돌아왔다. 하지만 빌헬름 공작은 바흐에게 좋은 대접과 높은 연봉을 하사했건만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바흐에 대해 섭섭해 하고 있었을 텐데, 추가로 자신과 상의도 없이, 그것도 하필 자기와 사이가 나쁜 조카의 주선으로 급하게 이직을 추진한 데다 멋대로 드레스덴 여행까지 다녀온 젊은 음악가에 대해 화가 머리 끝까지 나 허락 대신 구류명령을 내려보냈다. 바흐는 실제로 11월 6일부터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는데, 바흐는 감옥에서도 평균율 클라비어 1권과 오르간 소곡집 등의 곡 개정과 작곡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2월이 되면서 영주의 마음이 풀려서 간신히 이직 허락이 떨어졌다.
7. 쾨텐 시절
쾨텐 시절의 바흐로 추정되는 유화 요한 야콥 이흘레(Johann Jakob Ihle)가 그린 1720년경 그림. |
1718년 8월, 바흐는 쾨텐 궁정에 악장(카펠마이스터)으로서 취임하였다. 궁정악장은 당시의 독일에서 음악가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사회적 지위이며, 음악을 사랑한 젊은 영주 레오폴트 공작도 바흐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바흐에게 400탈러[₩]의 연봉을 약속하고, 추가적으로 계약금으로 50탈러[₩]을 선불하는 등 이례적인 후대를 베풀었다. 레오폴트 공작은 음악 활동에 상당한 궁정 예산을 소비하였고, 바이올린과 비올라 다 감바를 능숙하게 연주하였으며 바흐도 레오폴트 공작을 '음악을 사랑하였고 또한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라고 평하였다.
당시 쾨텐 공국은 1713년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해산시켜버린 궁정악단을 재빨리 스카우트 해 당시 최고의 악단을 거느리게 된다. 쾨텐은 인구 만명의 작은 공국이었고 칼뱅주의여서 교회음악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으므로[32][33] 바흐의 중요한 직무는 영주나 귀족들을 위하여 세속적인 합주곡이라든가 실내악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영주의 탄생일과 신년 등의 기념행사에는 칸타타와 종교음악와 한 곡씩 연주되었다. 추가로 왕족의 생일이나 장례식 등에도 칸타타가 연주되었을 터인데 최소한의 기념행사만 따져도 최소한 24곡의 칸타타가 남아 있어야 하나 현재는 9곡의 존재만 알려져있으며 그 중에 남아있는 작품은 2곡의 칸타타만 전해질 뿐이고 나머지는 전해지지 않는다.[34]
또한 이 시기에는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WV1046-1051),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BWV1001-1006), 무반주 첼로 모음곡(BWV1007-1012)을 비롯한 그의 대표적인 기악곡의 대다수가 작곡되었다.
7.1. 기악음악에 열중하다
안할트 쾨텐 공국의 레오폴트 공작 |
바흐는 레오폴트 공작의 신임을 받았고 궁정 안팎의 모든 음악 활동을 총괄하였다. 1719년 3월 1일 바흐는 베를린으로 새 하프시코드를 구입하러 갔고 6일 할레로 잠깐 돌아온 조지 프레드릭 헨델을 만나러 급히 마차를 타고 할레로 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또한 이들 아이들이나 또는 바흐의 명성을 흠모하여 모여든 제자들을 위하여 <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제1권(BWV846-869), < 인벤션>(BWV772-801)을 비롯한 수많은 클라비어곡도 작곡하였다. 1721년 3월 24일 유명한 6곡의 합주협주곡(BWV1046-1051)을 작센 바이센펠스의 크리스티안 공작에게 바쳤다.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풍성한 생활을 반영하는 것처럼 그것들은 밝고 즐거운 표현으로 넘쳐 있었다. 사생활도 평온해서 바흐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7남매를 얻었다고 한다.[35]
그런데...
7.2. 가족들
1720년 7월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사망했다. 당시 바흐는 쾨텐 공작 레오폴트를 따라 근처였던 칼스바트로 온천으로 요양 여행을 갔다왔는데 쾨텐에 7월 7일 도착하니 이미 아내 장례까지 치른 뒤였다고 한다. 바흐는 크나큰 상심을 했다고 하며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장의사가 청구서를 내밀자 바흐는 무심한 말투로 "아내에게 물어보시오..."라고 말했다고...다음해인 1721년 12월 3일, 그는 16세 손아래인 소프라노 가수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하고, 13명의 아이를 얻었다. 바흐는 당시 결혼식에 다량의 포도주와 맥주를 주문했는데, 이 때 자신의 연봉의 20%인 84탈러(650만원)을 써버린다.
모두 20명의 자녀 가운데서 약 절반은 어렸을 때에 사망하였는데,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선천적으로 뛰어난 음악적 재질을 지니고 있었으며, 특히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차남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36]는 음악사(史)에 이름을 남기는 뛰어난 작곡가로 성장하였다.
동시에 1721년 2월 29일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가 사망하여 바흐는 장례식에 참석하며 1722년 4월 6일 작은 형 요한 야코프가 사망하게 된다.
7.3. 함부르크로
바이마르의 저 유명한 오르가니스트가 해놓은 일들을 보았다... 참으로 그 사람은 높이 존경을 받아야만 한다.
― 요한 마테존, 『음악적 애국자Der Musicalische Patriot(1728)』 中
― 요한 마테존, 『음악적 애국자Der Musicalische Patriot(1728)』 中
아무튼 아내가 사망한 지 4개월 후인 11월에 바흐는 함부르크의 성 야코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직에 도전하러 가는데 당시 9월 12일 하인리히 프리제가 세상을 뜨면서 공석이 되었다. 바흐가 함부르크로 간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성 야콥 교회에는 아르프 슈니트거가 만든 60개 음전에 4단 건반의, 역사적으로도 가장 훌륭한 오르간에 매혹되었다는 설, 바흐는 여기서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과 다시금 재회했으며 요한 마테존과도 만났다. 그리고 그토록 존경하던 요한 아담 라인켄을 만나게 되었다. 다만 오디션은 일 주일 미뤄졌으며 오디션 장소도 성 야콥 교회가 아닌 성 카타리나 교회로 변경되었다.
에마누엘 바흐와 아그리콜라가 쓴 바흐의 추도문에는 바흐가 11월 16일 예배 후 카타리나 교회에서 여러 고위직들과 유명인사 앞에서 장장 2시간 동안이나 연주했으며 아주 감탄을 자아냈다고 한다. 바흐가 연주했다고 전해지는 곡은 총 세 곡인데 예배 때에 연주되었던 칸타타 《내 마음에 근심이 많도다(Ich hatte viel Bekümmernis, BWV 21)》이며 《환상곡과 푸가 BWV 542》[37]와 코랄 전주곡 《바빌론의 강가에서 BWV 653a, b》이었다. 이때 심사위원 자격으로 바흐의 오르간 연주를 들은 라인켄은 바흐에게 나는 이러한 예술이 소멸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아직 그대 안에 살아 있음을 알았네.라고 크게 칭찬하며 개인적으로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함부르크 성직 회의에서는 바흐가 11월 23일 레오폴트 대공에게 돌아가야 했다고 하며, 공식적인 선출일을 12월 12일이었으나 네 명의 심사위원들[38]은 후보에 만족하지 않았기에 바흐의 공식적인 답변이 도착할 때까지 선출을 미뤘다. 바흐의 편지는 12월 19일 도착했고 자신은 후보에서 빼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39] 그 후 야콥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직은 요한 요아힘 하이트만(Johann Joachim Heitmann)이 선출되었고, 이에 대한 감사로 4000마르크를 지불했다고 한다.
당시 함부르크 대성당 음악감독이었던 요한 마테존은 『음악 비평(Critica musica)』, 『대 통주저음 교본(Grosse General-Baß-Schule, 1731)』에서 바흐의 두 작품을 상세히 언급하며 음악적 애국자에서 바흐의 함부르크 에피소드를 자세히 언급하며 바흐를 옹호하고 있다.[40]
나 자신 뿐 아니라 아마 많은 사람들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지금은 존경받는 칸토르직에 오른 한 위대한 비르투오조가 쾌 큰 마을의 오르가니스트 후보로 지원하였다. 그는 가장 화려하고 훌륭한 오르간들[41]을 연주하였고 모든 사람들이 그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동시에 부유한 장인의 아들도 다른 숙련되지 못한 직인들과 함께 지원하였다. 그는 손가락보다는 탈러로 전주곡을 연주하는 데 더욱 익숙하였으며 예상대로 그가 임명되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결과에 분개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당시 웅변술이 뛰어났던 담임목사[노이마이스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날 때 천사들이 연주한 음악에 관한 복음을 아주 그럴 듯하게 설명하였다. 성직매매에 반대하였던 목사는 연관해 최근 오디션에서 떨어진 한 예술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설교를 마쳤다. 성 야콥 교회 오르가니스트가 되고 싶어 하늘로부터 내려와 아주 성스러운 연주를 하였더라고 만약 빈털터리였다면 다시 하늘로 날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요한 마테존, 『음악적 애국자Der Musicalische Patriot(1728)』 中
당시 웅변술이 뛰어났던 담임목사[노이마이스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날 때 천사들이 연주한 음악에 관한 복음을 아주 그럴 듯하게 설명하였다. 성직매매에 반대하였던 목사는 연관해 최근 오디션에서 떨어진 한 예술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설교를 마쳤다. 성 야콥 교회 오르가니스트가 되고 싶어 하늘로부터 내려와 아주 성스러운 연주를 하였더라고 만약 빈털터리였다면 다시 하늘로 날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요한 마테존, 『음악적 애국자Der Musicalische Patriot(1728)』 中
다만 바흐가 떠난 날짜는 다른 후보들이 오디션을 치르기 전이며, 그에 따르면 기부금과 관련된 문제는 아니다. 아무튼 후보자 중 하이트만이 돈을 내 오르가니스트 직에 올라간 것은 사실로 보이며 바흐가 오르가니스트 직을 철회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7.4. 쾨텐을 떠나다
바흐는 모처럼 행복한 음악생활을 하게 된 쾨텐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하였고, 이는 후술할 바흐가 에르트만에게 보낸 편지에도 나온 고백이다. 하지만 이 바흐의 계획은 금방 틀어지게 되는데, 바흐가 결혼 한 후 1주일 후 12월 11일 레오폴트 공작이 안할트 베른부르크의 공주인 프레데리카 헨리에타와 올린 결혼이 그 시발점이었다. 문제는 공주가 음악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는 데에 있었고, 이것이 레오폴트 공작에게도 영향을 주어 공작 역시도 음악에 대한 관심을 접어가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쾨텐 궁정의 암투나, 칼뱅교였던 쾨텐 공국의 상황이 중첩되어 옛날 바이마르 공국의 일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그로 인해 그는 6년만에 라이프치히로 옮기게 된다. 교회음악에 대한 욕심도 있었겠지만 실제로는 좀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후에 그가 에르트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흐는 아들들을 대학에 보내고 싶은데 쾨텐에는 대학이 없었다는 것, 라이프치히의 급여 제안이 상당히 좋았다는 것 등등을 쾨텐을 떠난 이유로 들고 있다. 추가적으로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기에 쾨텐은 너무 작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행히 대인배였던 쾨텐의 영주는 바흐가 사임의사를 밝히자 바이마르 영주처럼 지저분하게 굴지 않고 깨끗하게 바흐를 놓아주었으며 큰 도시 라이프치히로 떠나는 바흐의 건승을 기원해 주었고, 심지어 추천서까지 써준다. 바흐가 쾨텐을 떠난 후에도 레오폴트 공작과는 사이가 좋아서 바흐는 명예 카펠마이스터 직을 받았고, 종종 소프라노였던 안나 막달레나와 쾨텐으로 행사 작품 연주 등의 이유로 갔고 1728년 레오폴트공의 장례식에서도 바흐는 자신의 칸타타 Bwv 244a를 연주한다. 하지만 바흐의 선택은 그리 현명했다고 볼 수는 없는데......
쾨텐 기차역에 내리면 관광안내판에 '바흐의 도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7.5. 라이프치히 칸토르 준비
시장 고트프리트 랑에(Gottfried Lange, 1672~1748) 시의회의 대표자인 동시에 법률, 철학 박사였다 |
처음에는 당시 가장 유명한 작곡가이자 마찬가지로 함부르크 오주(五州)교회의 칸토르였던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이 이미 8월 11일 칸토르로 임명되었으나 3달 후인 11월 텔레만은 라이프치히의 제의를 거절했다.[44] 그 외에 7명의 후보가 있었고, 12월 21일 추가로 두 명의 후보가 물망에 올랐는데 바로 역시 만만찮은 당대의 인기작곡가였던 다름슈타트 공국의 궁정악장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와 바로 바흐였다. 그라우프너 역시 성 토마스 학교 졸업생이자 라이프치히 대학의 학생이어서 바흐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두 음악가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며 그라우프너와 바흐 각각 1월 17일과 2월 7일에 라이프치히가 보낸 가사에 칸타타를 두 곡씩 연주하는 것으로 오디션 내용이 정해졌다.[45] 쾨텐에 머물며 바흐는 칸타타 《당신은 진실로 하느님이시며, 다윗의 자손이십니다Du wahrer Gott und Davids Sohn, BWV 23》과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거느리시고Jesus nahm zu sich die Zwölfe, BWV 22》를 작곡했다. 그러나 문제는 바흐가 라이프치히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라우프너가 칸토르로 선출되어 버린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름슈타트에서 그를 적극 붙잡는 바람에 그라우프너도 결국 오지 못했다. 그라우프너는 5월 4일 편지를 띄워 바흐는 교회음악과 성악곡의 권위자이며 오르간에도 아주 뛰어납니다. 분명히 바흐는 맡겨진 직책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수행할 것입니다라고 썼다.
이에 라이프치히 시 참사회에서 '최고를 얻을 수 없다면 평범한 사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라는 발언이 나왔는데 그 2류 작곡가가 바로 바흐(...).[46] 그나마 라이프치히 시장 고트프리트 랑에가 '바흐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텔레만을 곧 잊을 것이다'라며 바흐를 적극 두둔해주어 바흐는 만장일치로 5월 5일 칸토르로 임명되었다. 근데 바흐는 이틀 뒤에 깐깐하게도 라틴어로 된 신학시험을 또 보고 그 뒤에 근로계약서에 서명했다. 근로계약서에는 도시 무단이탈 금지나 대학과 관련된 일 금지 등 빡빡한 조항들도 있었고 기본적으로 바흐에게 음악가보다는 선생으로서의 의무가 더 강조되었다. 14개 조항으로 돼있는 근로계약서를 한 번 살펴보자. 계약서에서 시의회는 고자세로 나오며 바흐에게 가오를 잡고 있는데,(...) 음악 양식까지 하나하나 간섭하는 깐깐한 시의회의 태도로 인해 바흐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1. 나는 소년들의 바른 행동과 삶을 위하여 먼저 모범을 보일 것이며, 한교 수업에 열심을 내어 학생들을 성실하게 가르치겠습니다.
2. 나는 이 도시의 2개의 중심교회에서 최선을 다해 음악활동을 하겠습니다.
3. 나는 존귀한 시의회에 대하여 존경과 복종으로 대하며, 그 명예와 이름을 어디서나 높이고 알리며, 또한 어떤 시의원들이 소년들에게 노래나 연주를 시킨다면 주저없이 그의 말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시장이나 학교 이사들의 허락 없이는 어떤 경우라도 외부의 장례식이나 결혼식에 학생들을 동원하고 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4.나는 존귀한 시의회가 학교의 감독관들과 이사들에게 부여한 권한을 인정하고 따를 것 입니다.
5. 나는 음악의 기초를 배우지 못했거나 음악교육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학생들을 학교에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반드시 학교 감독관과 이사장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맡을 것입니다.
6. 나는 학생들에게 노래와 악기를 열심히 배우게 하여 교회가 불필요하게 별도의 지출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7. 나는 교회의 음악이 정돈되고 제 몫을 감당하려면 연주시간이 너무 길지 않고 적당해야 하며, 가곡풍의 음악은 안 되고, 청중이 예배할 마음이 나도록 도와주는 음악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8. 나는 새교회에 좋은 학생들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9. 나는 소년들엥게 친절해야 하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생각합니다. 만약 그들을 벌주거나 그들의 집에 알리면 그들은 선생을 따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10. 나는 학교에서 주는 많은 정보와 나에게 유익한 것을 성실하게 인지하겠습니다,
11. 나는 존귀한 시의회나 학교의 소속이 아닌 다른 어떤 기관을 통하여 이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12. 나는 시장의 허가 없이는 도시를 이탈하지 않을 것입니다.
13. 나는 장례식에는 어떤 경우라도 소년들을 동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14. 나는 존귀한 시의회의 동의 없이는 대학에 관련된 일을 받지도 않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2. 나는 이 도시의 2개의 중심교회에서 최선을 다해 음악활동을 하겠습니다.
3. 나는 존귀한 시의회에 대하여 존경과 복종으로 대하며, 그 명예와 이름을 어디서나 높이고 알리며, 또한 어떤 시의원들이 소년들에게 노래나 연주를 시킨다면 주저없이 그의 말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시장이나 학교 이사들의 허락 없이는 어떤 경우라도 외부의 장례식이나 결혼식에 학생들을 동원하고 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4.나는 존귀한 시의회가 학교의 감독관들과 이사들에게 부여한 권한을 인정하고 따를 것 입니다.
5. 나는 음악의 기초를 배우지 못했거나 음악교육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학생들을 학교에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반드시 학교 감독관과 이사장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맡을 것입니다.
6. 나는 학생들에게 노래와 악기를 열심히 배우게 하여 교회가 불필요하게 별도의 지출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7. 나는 교회의 음악이 정돈되고 제 몫을 감당하려면 연주시간이 너무 길지 않고 적당해야 하며, 가곡풍의 음악은 안 되고, 청중이 예배할 마음이 나도록 도와주는 음악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8. 나는 새교회에 좋은 학생들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9. 나는 소년들엥게 친절해야 하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생각합니다. 만약 그들을 벌주거나 그들의 집에 알리면 그들은 선생을 따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10. 나는 학교에서 주는 많은 정보와 나에게 유익한 것을 성실하게 인지하겠습니다,
11. 나는 존귀한 시의회나 학교의 소속이 아닌 다른 어떤 기관을 통하여 이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12. 나는 시장의 허가 없이는 도시를 이탈하지 않을 것입니다.
13. 나는 장례식에는 어떤 경우라도 소년들을 동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14. 나는 존귀한 시의회의 동의 없이는 대학에 관련된 일을 받지도 않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8. 라이프치히 시절
8.1. 1720년대
1735년경의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 |
바흐는 이 라이프치히 칸토르에 취임한 후 평생 이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결코 라이프치히의 음악환경이 평온했던 것은 아니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과감하게 행복한 쾨텐생활을 정리하고 온 바흐였지만 라이프치히의 생활은 기대했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라이프치히는 쾨텐의 영주처럼 자신을 조용하게 음악일에 전념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았고 봉급도 분기별로 100탈러[₩]로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적었다. 라이프치히의 음악행정은 시참사회, 성직회의, 라이프치히 대학 등 세 곳의 협의로 이루어졌는데 문제는 이 셋이 사이가 아주 안 좋아서 심심하면 싸워댔다는 것(...).[48] 바흐는 라이프치히에서 이들의 이전투구와 등쌀에 계속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라이프치히의 합창단과 악단은 제대로 훈련되지 않았으며 규율도 엉망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흐는 성 토마스 교회와 성 니콜라이 교회, 성 베드로 교회와 새교회 4곳의 음악활동을 담당해야 했으며 네 교회에서 노래할 학생들의 성가대 훈련 뿐 아니라 자신이 라틴어와 교리문답까지 직접 가르쳐야 했다.
처음 몇년 바흐는 초인적인 작업능력을 발휘해 일주일마다 칸타타를 한곡씩 작곡하였다. 당시 바흐가 해야하는 일들과 비교하면 진짜 엄청난 작업량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 시기에는 프린트라는 게 없었으므로 관현악과 성악 파트보를 바흐와 조교들이 일일이 써야했으며 리허설까지 해야했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했다. 5월 30일 라이프치히의 첫 칸타타를 시작으로[49] 그 해 크리스마스 바흐는 새로운 칸타타 6곡을 포함하여 화려한 마그니피카트와 상투스를 선보이는 등 왕성하게 일했다. 거기에 1724년 《요한 수난곡(Johannespassion, BWV 245)》과 1727년 《 마태수난곡(Matthäuspassion, BWV 244)》이라는 경이로운 두 걸작을 성 금요일에 연주함으로써 바흐의 활동은 정점을 찍게 된다. 그러나 점점 갈수록 칸타타의 수가 줄어들면서 칸타타의 작곡빈도가 크게 줄어들게 되며 곡은 다른 작곡가들의 곡을 연주하게 된다.
칸타타 《마음과 입과 행동과 삶으로Herz und Mund und Tat und Leben, BWV 147》에 수록된 코랄 《'Wohl mir, dass ich Jesum habe'》의 라이프치히 초기의 자필보 |
또한 바흐는 독립적인 라이프치히 대학 부속 교회였던 성 바울 교회의 음악도 담당해야 했다. 그러나 대학은 바흐의 음악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당연히 바흐에게 지불해야할 봉급도 몇 년동안 주지 않았는데, 이에 분개한 바흐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에게 직접 세 차례에 걸처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1726년 1월 선제후는 오히려 대학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와는 별개로 바흐는 대학의 행사를 위한 음악들을 대학 당국으로부터 많이 요청받았으며 특히 대학 학생들은 바흐에게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의 부인이었던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를 위한 장례식 음악을 위촉하기도 하는 등 바흐의 명성을 드높일 기회들이 많이 있었다.
1729년에 바흐는 라이프치히를 방문한 크리스티안 공작을 위해 여러 차례 연주회를 여는 공로로 인해 작센바이센펠스 공국 명예 카펠마이스터직을 받게 되었고 그 해 3월 29일에는 텔레만이 창단한 연주단이었던 콜레기움 무지쿰을 지휘하게 된다. 또한 대학 교수들이나 고위 직들을 위한 음악을 쓰면서 인맥을 넓힌다.
자신의 이상을 끝까지 관철코자 했던 원칙주의자 바흐는 시의 당국자나 교회의 책임자들과 자주 충돌하다가 점차 교회음악 일에 열의를 잃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이자 종교음악의 절정을 이룬 마태 수난곡(BWV244), 부활절 오라토리오, 160여곡의 교회 칸타타 등의 작품들은 대부분은 라이프치히 시대의 최초의 수년간에 작곡된 것이며 1730년 정도를 기점으로 교회음악 작곡 빈도는 급격하게 줄어든다.
8.2. 1730년대
최근에 발견된 바흐의 1733년경 초상화. 잘려있으며 나머지 부분은 남아있지 않다. 화려한 옷 색깔을 보면 당시 작센 궁정작곡가 타이틀을 따고 기념으로 그린 것일 수도 있다. |
이렇게 점점 음악가로써 명성이 높아지는 바흐와는 별개로 충돌을 거듭하던 바흐는 시 참사회에 『좋은 교회음악을 위한 짧지만 필요한 제안서』를 8월 23일 보내나 답장을 받지 못했고 어이없게도 시 참사회는 결국 1730년 8월 2월 시 참사회가 바흐의 직무태만과 바흐가 건의한 개선안의 불경함 등을 문제삼아 감봉을 결정하고 바흐는 바흐대로 죽마고우였던 에르트만에게 다른 직장을 구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쓰는 등 다른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직장을 옮기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았으며 설령 옮긴다고 해도 라이프치히보다 사정이 나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결국 그는 이직을 단념하는 대신 과외활동에 눈을 돌린다.
이로 인해 종교음악에 흥미를 잃은 바흐는 1730년경부터 교회의 칸토르로서 의무적으로 작곡/연주해야 했던 종교음악은 자신이 과거에 작곡했던 곡을 재탕하거나 조금 수정해서 연주하는 식으로 때우면서[50] 콜레기움 무지쿰을 위한 음악 작곡에 더 많은 공을 들였다.
그가 죽마고우였던 에르트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의 사정과 바흐의 속마음이 잘 나타나있다.
혹시 이 편지가 당신을 성가시게 하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당신이 내 편지에 답장을 준 것이 어느덧 4년 전의 일이 되었군요. 당신이 나의 안부를 궁금하게 여기실 것 같아 송구스럽지만 몇 자 적겠습니다.
당신은 나의 젊은 시절부터 카펠마이스터로 쾨텐으로 옮기기까지의 일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나는 그곳에서 음악을 사랑하는 공을 만나 평생을 지내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공이 음악을 따분하게 여기는 베렌부르트의 공녀와 결혼한 뒤로는 음악에 대한 관심이 영 시들해져 버렸답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뜻을 따라 성 토마스 교회의 음악감독과 칸토르로 부임하여 라이프치히로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한때 카펠마이스터였던 내가 칸토르가 되었다는 건 지난 석 달 동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적절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자리에 그나마 호감을 가진 것은 내 아이들이 이곳에서 학업에 열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라이프치히에 자리를 잡고 생활에 변화를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이후 나는 주님의 뜻을 받들어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첫째, 이 자리는 그렇게 보수가 높지 않고(사람들이 내게 얘기해준 것처럼), 둘째, 또 이 자리는 너무나 많은 일들로 묶여 있고, 셋째, 이 지역은 물가가 너무 비싸며, 넷째, 이곳의 높으신 분들은 훌륭하지만, 음악에는 별로 흥미가 없기 때문에, 나는 항상 불쾌감을 느끼며, 시기와 박대를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내 운명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귀하께서 계신 도시에 이 진실한 옛 종을 위해 적당한 자리를 알거나 발견하신다면 나를 가장 좋은 말로 추전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귀하께서 나를 위해 최고의 중재를 해준 것에 대해 최선을 다해 만족스럽게 갚아드리며, 그 은혜에 보답하는데 결코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현재 일자리는 약 700탈러(약6천만원) 정도 수입을 가져다 준답니다.[51] 물론 평소보다 장례식이 더 많으면 그에 비례하여 보수도 오르지요. 하지만 좋은 공기에서는 반대로 보수도 떨어지는데, 지난해에는 장례식이 보통 수준에 머물러 100탈러 이상이나 감소했답니다.사람이 죽지를 않아 돈이 안된다는 바흐의 위엄 튀링겐에서는 400탈러만 되어도 여기 라이프치히에서 거의 두 배 되는 돈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이곳의 아주 비싼 생활비 때문에 그렇답니다......
당신은 나의 젊은 시절부터 카펠마이스터로 쾨텐으로 옮기기까지의 일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나는 그곳에서 음악을 사랑하는 공을 만나 평생을 지내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공이 음악을 따분하게 여기는 베렌부르트의 공녀와 결혼한 뒤로는 음악에 대한 관심이 영 시들해져 버렸답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뜻을 따라 성 토마스 교회의 음악감독과 칸토르로 부임하여 라이프치히로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한때 카펠마이스터였던 내가 칸토르가 되었다는 건 지난 석 달 동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적절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자리에 그나마 호감을 가진 것은 내 아이들이 이곳에서 학업에 열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라이프치히에 자리를 잡고 생활에 변화를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이후 나는 주님의 뜻을 받들어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첫째, 이 자리는 그렇게 보수가 높지 않고(사람들이 내게 얘기해준 것처럼), 둘째, 또 이 자리는 너무나 많은 일들로 묶여 있고, 셋째, 이 지역은 물가가 너무 비싸며, 넷째, 이곳의 높으신 분들은 훌륭하지만, 음악에는 별로 흥미가 없기 때문에, 나는 항상 불쾌감을 느끼며, 시기와 박대를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내 운명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귀하께서 계신 도시에 이 진실한 옛 종을 위해 적당한 자리를 알거나 발견하신다면 나를 가장 좋은 말로 추전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귀하께서 나를 위해 최고의 중재를 해준 것에 대해 최선을 다해 만족스럽게 갚아드리며, 그 은혜에 보답하는데 결코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현재 일자리는 약 700탈러(약6천만원) 정도 수입을 가져다 준답니다.[51] 물론 평소보다 장례식이 더 많으면 그에 비례하여 보수도 오르지요. 하지만 좋은 공기에서는 반대로 보수도 떨어지는데, 지난해에는 장례식이 보통 수준에 머물러 100탈러 이상이나 감소했답니다.
다행히도 이후 바흐의 절친한 친구였던 요한 마티아스 게스너가 성 토마스 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자 상황은 나아지기 시작했다. 게스너는 전반적으로 부실했던 토마스 학교를 수리하는 데 거금을 사용했고, 무엇보다도 게스너는 음악을 상당히 좋아했다. 바흐는 이 때 자신의 임무를 축소하는 데 성공한다.
한편 1731년경부터는 기존에 작곡한 것을 고치거나 몇 편의 작품을 묶어 곡집 형태로 정리하여 출판하는 작업에 힘을 썼다. 클라비어를 위한 파르티타(BWV825-830, 1731), 이탈리아 협주곡과 프랑스 서곡(각각 BWV971, BWV831, 1735), 골트베르크 변주곡(BWV988, 1742), 오르간 미사곡( BWV552, BWV669~689, BWV802~805, 1739)이 4곡집을 클라비어 위붕이라는 이름으로 잇달아 출판했다.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제 2권(BWV 870~893) 또한 이 시기의 작품.
8.2.1. 콜레기움 무지쿰 & 작센 궁정 작곡가
바흐에게 본격적으로 칸타타를 헌정받기 시작한 1733년 경의
아우구스트 3세. 루이 드 실베스트르(Louis de Silvestre) 作 |
바흐는 1729년부터 1742년까지 일종의 아마추어 악단인 대학생 연주단체인 콜레기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의 비공식 음악책임자로 부임해 악단을 위해 많은 칸타타와 클라비어협주곡을 작곡했으며 특히 몇몇 세속 칸타타, 유명한 《커피칸타타(BWV211)》도 이 악단을 위해 작곡되었다. 물론 텔레만이나 헨델, 피에트로 로카텔리,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같은 다른 작곡가들의 곡도 자주 연주되었다. 특히 왕이 참석하는 연주회에는 시골에서도 사람이 올라왔다고 한다. 바흐 콜레기움 무지쿰은 매주 겨울에는 금요일 오후 8시부터 여름에는 수요일 4시부터 고트프리트 침머만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열었고, 1737년 8월쯤 잠시 그만 두었다가 1739년 10월부터 1742년까지 지휘를 하게 된다.
라이프치히 총독 요아힘 프리드리히 폰 플레밍 장군 (Joachim Friedrich von Flemming, 1665~1740) 마르샹 사건때부터 바흐와 친분이 있었던 그는 바흐의 최고 후원자들 중 한 명이었다. 바흐가 헌정한 3곡의 칸타타가 남아있다 |
라이프치히 시기에 바흐는 이런저런 이유로 드레스덴을 자주 여행했으며, 특히 이곳의 성 소피아 교회와 프라우엔키르헤에 있는 고트프리트 질버만(Gottfried Silbermann, 1684.1.14 ~ 1753.8.4)이 제작한 오르간들과 친숙해질 수 있었다. 현재 알려진 바흐의 공개 리사이틀만 3차례인데 1725년 9월 19일과 20일에, 드레스덴 지역 신문의 말을 빌리자면 '왕실과 도시에 있는 그 지역의 비르투오소 음악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 소피아 교회에서 첫번째 리사이틀을 가졌고, 6년후 1731년 9월 14일 드레스덴 오페라 극장에서 요한 아돌프 하세의 오페라 《클레오피데Cleofide》의 개막 공연 후 모든 궁정인들과 음악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오후 3시부터 리사이틀을 가졌다. 1736년 12월 1일에는 '경외하는 러시아 대사 카이저링 백작[53]을 비롯한 다른 많은 사람들과 예술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드레스덴 성모 교회에서 2시부터 4시까지 리사이틀을 열었다. 당시 드레스덴 신문에는 '아주 감탄을 자아내는 연주를 하였다'라고 쓰여있다.
바흐는 드레스덴이라는 도시를 좋아한 편이었고, 바흐가 1730년 8월 23일 성직회의와 시회의에게 쓴 『완성도 있는 교회음악을 위한 제안서』를 보면 '드레스덴으로 가 한번 보십시오. 그곳의 음악가들은 생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 개개인이 자신있는 최고의 음악만을 들려주면 되기 때문입니다'라고 일갈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 선제후 전하
지극히 높으신 선제후 전하, 자비로우신 영주님! 비천하기 이를 데 없는 제가 작곡한 이 하찮은 것을 작품이라 생각치 마시고 온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전하의 자비로운 눈으로 헤아려 주시기를 앙망하나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저를 힘있는 전하의 보호 안에 품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저는 현재까지 여러 해 동안 라이프치히의 두 군데의 주 교회에서 음악감독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저의 직책에 대한 보수도 삭감되고, 앞으로 완전히 보수를 받지 못할 수도 있는 억울한 상황이옵니다. 높으신 전하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저에게 궁정 작곡가의 직책을 허락하시고, 높으신 명령으로 이에 관한 문서가 관리에게 하달된다면 이러한 부당함이 일시에 사라지리라 믿습니다
저의 머리를 조아린 간청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받아 주신다면 저는 전하에 대한 존경으로 평생 복종하며 살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원하시는 교회나 악단을 위한 음악 작곡에 피곤을 모르는 열심을 내겠사오며, 온힘을 다하여 전하를 받들어 모실 것이옵니다.
1733년 7월 27일 드레스덴
비천하고 충성스런 전하의 종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올림
―바흐가 미사 b단조와 동봉한 청원서
지극히 높으신 선제후 전하, 자비로우신 영주님! 비천하기 이를 데 없는 제가 작곡한 이 하찮은 것을 작품이라 생각치 마시고 온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전하의 자비로운 눈으로 헤아려 주시기를 앙망하나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저를 힘있는 전하의 보호 안에 품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저는 현재까지 여러 해 동안 라이프치히의 두 군데의 주 교회에서 음악감독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저의 직책에 대한 보수도 삭감되고, 앞으로 완전히 보수를 받지 못할 수도 있는 억울한 상황이옵니다. 높으신 전하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저에게 궁정 작곡가의 직책을 허락하시고, 높으신 명령으로 이에 관한 문서가 관리에게 하달된다면 이러한 부당함이 일시에 사라지리라 믿습니다
저의 머리를 조아린 간청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받아 주신다면 저는 전하에 대한 존경으로 평생 복종하며 살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원하시는 교회나 악단을 위한 음악 작곡에 피곤을 모르는 열심을 내겠사오며, 온힘을 다하여 전하를 받들어 모실 것이옵니다.
1733년 7월 27일 드레스덴
비천하고 충성스런 전하의 종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올림
―바흐가 미사 b단조와 동봉한 청원서
1736년 11월 왕은 드디어 바흐에게 폴란드 국왕 겸 리투아니아 대공 겸 작센 선제후의 궁정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라는 거창한 칭호를 하사했다. 이 칭호는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이점도 있었다. 바흐가 작센 선제후의 후광을 입고 있는 작곡가가 되자 라이프치히의 찌질이들이 예전처럼 바흐에게 멋대로 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바흐도 분명 이런 점을 노리고 작센 선제후에게 줄을 대려고 했던 것 같다. 이후로도 바흐는 아우구스트 3세가 라이프치히 방문을 할때 연주회를 감독하거나, 아우구스트 3세나 왕실 가족의 생일마다 화려한 칸타타를 바치는 등 선제후를 만족시켰다. 바흐가 선제후 앞에서 자신의 칸타타 《축복받은 작센이여, 너의 행운을 찬양하라''Preise dein Glücke, gesegnetes Sachsen, BWV 215》 연주할 당시 상황을 기록한 다음 글을 읽어보면 아우구스트 3세가 친히 라이프치히로 행차할 때마다 바흐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저녁 9시 쯤에 여기 대학의 대학생들이 트럼펫과 북을 가지고 폐하께 즐거움을 드릴 저녁음악을 연주해 드렸는데, 이것은 카펠마이스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작곡한 칸타타였다. 이때 600명의 대학생들이 촛불을 들었고, 4명의 백작들이 장교로 연기하였다. 그리고나서 이어진 이 행렬은 슈바르츠 브레트가에서부터 시작하여 리터 슈트라쎄, 브륄 가, 카타리넨 슈트라쎄를 지나 왕 폐하가 계신 아펠 하우스까지 올라갔다. 음악가들이 시청의 북쪽에 도착했을 때 트럼펫과 북도 마찬가지로 위로 올라갔고, 그동안에 다른 합창 단원들은 시청에서 아펠 하우스까지 갔다. 라틴어로 된 봉축 시를 낭독할 때 네 명의 백작은 폐하의 손에 키스하도록 허락되었다. 폐하와 왕비 그리고 왕자는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에 창문을 떠나지 않으셨고 음악에 감탄하며 귀 기울이셨다. 폐하의 맘에 흡족했던 것이다.
― 당시 라이프치히 연대기 작가 요한 잘로몬 리머(Johann Salomon Riemer)의 연대기 1734년 10월 5일자 부분
― 당시 라이프치히 연대기 작가 요한 잘로몬 리머(Johann Salomon Riemer)의 연대기 1734년 10월 5일자 부분
8.2.2. 그를 둘러싼 사건들
게스너는 겨우 4년간 부임하고 그 뒤는 교감이었던 요한 아우구스트 에르네스티가 1734년 11월 21부터 이어갔다.그런데 이 에르네스티란 인간은 영 바흐랑 잘 맞지 않았다.[54] 처음 에르네스티는 바흐 아들의 대부를 서주는 등 사이가 좋았으나 1736년 에르네스티는 바흐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칸토르 조교를 멋대로 뽑게 되는데 그로 인해 2년동안 합창조교 임명권을 두고 칸토르와 교장이 서로 의회에서 설전을 벌인다. 결국에 바흐는 자신의 궁정작곡가 지위를 이용해 왕에게 탄원서를 올리고, 왕은 1737년 겨울 바흐를 편들면서 이 문제는 봉합되게 된다.
1737년 음악비평이라는 잡지에 요한 아돌프 샤이베[55]라는 젊은 음악가가 바흐의 음악에 대한 비판을 게재하였다.
그가 보다 쉽게 작품을 썼다면, 작품의 자연스러움이 과장됨과 혼란한 형식으로 손상되지 않았더라면, 작품의 아름다움이 과도한 기교의 사용으로 위축되지 않았더라면 이 위대한 인물은 엄청난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연주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뭐든지 자신이 건반으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이라면 가수나 연주자들도 그들의 목소리와 악가로 연주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음악비평(Der Critische Musikus)』 1737년 5월 14일 자
그는 자신의 손가락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연주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뭐든지 자신이 건반으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이라면 가수나 연주자들도 그들의 목소리와 악가로 연주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음악비평(Der Critische Musikus)』 1737년 5월 14일 자
한마디로 말하자면 샤이베의 주장은 바흐의 기교가 음악의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을 덮어버렸다인데 미츨러나 비른바움 등 여러 음악가들이 이에 반박하면서 큰 호응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결국 샤이베는 생각을 바꾸게 되며, 1739년 샤이베는 바흐의 이탈리아 협주곡을 들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바흐를 높게 평가하게 된다.
공개적 출판을 통해 유명해진 음악작품들 중에 라이프치히의 유명한 바흐가 작곡한 클라비어 협주곡이 탁월하다...(중략)
어느 누가 이 협주곡을 독주 협주곡의 완전한 모범으로 보지 않을 이 있을 것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탁월하고, 이렇게 잘 짜여진 방법으로 만들어진 협주곡은 거의 볼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별히 건반에 독보적인 바흐 씨와 같은 대가만이 이런식의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음악비평(Der Critische Musikus)』 1739년 12월 22일
어느 누가 이 협주곡을 독주 협주곡의 완전한 모범으로 보지 않을 이 있을 것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탁월하고, 이렇게 잘 짜여진 방법으로 만들어진 협주곡은 거의 볼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별히 건반에 독보적인 바흐 씨와 같은 대가만이 이런식의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음악비평(Der Critische Musikus)』 1739년 12월 22일
8.3. 1740년대
무명화가가 그린 1748년의 바흐. |
1744~45년부터 바흐는 눈에 띄게 노쇠한 모습을 보였으며 작곡 빈도도 크게 줄었다. 하지만 이 말년에 작곡된 소수의 작품들은 모두 바로크 음악의 최정점에 서 있는 중요한 곡들이다.
1747년 5월 바흐는
당시 독일의 여러 신문들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당시로써는 최신 악기였던 피아노를 가져와 자신이 직접 푸가의 주제를 연주하고, 이어 바흐가 이 주제로 푸가를 만들었다. 포르켈의 서술은 조금 다른데 왕이 음악가들과 여러방을 돌며 바흐에게 여러 피아노의 시범을 부탁했고, 바흐가 왕에게 직접 주제를 요청했다고 하며 이러한 주제에 바흐가 3성 푸가를 연주하자 같은 주제로 왕은 같은 주제로 6성푸가를 연주할 수 있냐고 묻자 바흐는 제시된 주제로는 6성 푸가가 어렵다고 말하고 자신이 만든 주제로 6성 푸가를 연주했다. 다음날에는 포츠담의 성령 교회로 가 오르간을 연주하여 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하며, 그날 저녁에는 프리드리히 2세가 6성 푸가를 만들어보라 하자 바흐는 즉석에서 연주해낸다. 바흐의 평전을 쓴 사학자 포르켈에 의하면, 당시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며칠간 바흐를 데리고
이것이 동기가 되어 바흐가 작곡한 것이 프리드리히 2세에게 헌정한 《음악의 헌정Musikalisches Opfer, BWV 1079》이다.[56] 이 작품에서 바흐 음악의 엄격 대위법과, 젊은 고전음악에 뒤지지 않는 바흐의 다감 양식을 엿볼 수 있다.
한달 뒤에는 바흐의 제자이며 내과의사이자 작곡가였던 로렌츠 크리스토프 미츨러(Lorenz Christoph Mizler)가 창립한 음악협회에 14번째로 가입했다. 1738년 만들어진 단체로 서신을 통해 음악이론과 창작수법등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협회의 명의로 음악이론과 관련된 많은 논문이 발표됐으며 오늘날 봐도 재미있고 참고할 만한 논문들이 많다.[57] 바흐의 이 협회 가입은 두 가지 측면에서 유명한데 한 가지는 협회를 위해 오르간곡 중에서도 난곡으로 손꼽히는 카논 변주곡 《나는 높은 하늘에서 왔도다';Vom Himmel hoch da komm' ich her, BWV 769''》가 작곡되었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이 항목의 맨 처음에 나오는 특이한 악보[58]를 들고 있는 바흐의 초상화가 그려졌다는 것이다.
8.3.1. 말년
미사 b단조 중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Crucifixus' 부분의 자필보, 1749년경 |
이어 1748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최후의 대작 《푸가의 기법Die Kunst der Fuge, BWV 1080》의 작곡이 진행되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다. 이 세 대작과 더불어 바흐가 마지막으로 추진했던 프로젝트는 미사 b단조의 마지막 부분을 써나가는 것이었다. 그 후 죽기 직전에 제자들의 도움으로 코랄 전주곡 BWV 668을 손본다.
1749년 5월에 뇌일혈로 졸도하여 시력이 크게 나빠졌으며, 1750년 3월 존 테일러라는 돌팔이 안과 의사에게 두 차례의 백내장 수술을 받아 더 악화되었다고 한다.[59] 이 존 테일러는 엉터리 치료로 헨델도 실명시킨 아주 몹쓸 인간이었는데, 자세한 것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문서 참고.[60] 바흐는 이후 3개월 동안 병상에서 투병하게 된다. 그러다가 세상을 떠나기 10일 전에는 갑자기 눈이 좋아졌는데, 몇 시간 뒤에 다시 쓰러졌다.
바흐는 1750년 7월 28일 저녁 8시 15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조용히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향년 65세. 그의 유산은 1160탈러(대략 1억원 정도)였다.
[1]
궁정이나 교회에 소속된 전문적인 음악가는 아니었고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고 한다.
[2]
한편 제바스티안의 작은 형 야코프는 스웨덴에서 활동하였다.
[3]
캐논과 지그로 유명한 그 파헬벨이다.
[4]
후에 외교관이 되며 평생 바흐와 우정을 나누었다.
[5]
오르드루프와 뤼네부르크의 거리는 350Km나 됐었는데 당시 경제사정이 궁핍했던 바흐는 뤼네부르크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6]
북스테후데 자신도 전임자였던
프란츠 툰더의 딸과 결혼했다.
[7]
한편 바흐가 북스테후데를 만나기 2년 전에
헨델과
마테존이 뤼베크에 와서 북스테후데에게 똑같은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둘 다 이 요청을 거절하고 뤼베크를 떠났다.
[8]
북스테후데는 결국 큰 딸이 결혼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고, 북스테후데의 근심이었던 큰 딸은 북스테후데 사후에 요한 크리스티안 쉬페르덱커라는 작곡가 겸 오르가니스트와 결혼함으로써 북스테후데의 후임자는 정해지게 되었다.
[9]
총 6곡이 현존한다.
[10]
당시의 출판 비용은 현재와 달리 매우 비쌌기 때문에 대편성의 악보를 인쇄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가사 역시도 화려한 그림이 곁들여져 인쇄되어 행사의 성대함을 짐작케 해 주며, 이 칸타타는 바흐 생전에 출판된 몇 안되는 작품들 중 유일한 칸타타이다.
[11]
당시 바흐는 1급의 오르간 연주자인 동시에 뛰어난 오르간 감정가이기도 했다.
[12]
이 두 칸타타 모두 다시금 출판되었으나, 두 곡 모두 소실되었다.
[13]
바흐의 집안은 음악가 집안답게 대대로 정통주의에 속했다.
[1020만원]
[15]
빌헬름 공작은 교회음악이나 오르간 음악을 좋아했던 반면에 에른스트 공작은
이탈리아 양식의 실내악을 선호하였다.
[16]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요한 에른스트 공작 둘 다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나 악기를 직접 연주할 줄 알았다. 나아가 요한 에른스트는 자신이 직접 협주곡들을 작곡했는데, 바흐는 이런 에른스트 왕자의 협주곡들을 건반 독주곡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17]
엠마누엘 바흐와 아그리콜라의 추도문에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공은 바흐의 연주를 듣고 기뻐하시었고, 그 기쁨에 바흐가 오르간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예술적 기술을 시도하기를 바라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바흐에게 추가적인 급료를 지불했다고 한다.
[18]
헨델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1081만원]
[20]
할레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은 65개에 3단 건반의 초고퀄 오르간이었으므로, 바흐에게는 탐이 날 만한 자리였다. 후에 이 자리는 바흐 살아생전인 1746년 아들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가 임명됨으로써 대리적으로나마 그 기분을 풀었을 것이다. 물론 이 오르간은 현재에 남아있지는 않다.
[21]
바바흐가 바이마르 악장직에 있었던 해수를 새보면 적어도 45곡 이상의 교회 칸타타를 작곡했을 것이나, 알려져있는 칸타타는 30곡 초반이고, 그마저도 몇 곡은 악보가 소실되었다.
[22]
1715년 8월 18일 젊은 나이로 죽었으며 에른스트 공작은 6개월간의 추모 기간을 선포하며 모든 음악의 연주도 금지시켰다. 바흐는 국장기간이 끝난 두 달 뒤인 4월 2일 추모예배에서 자신이 작곡한 《삶이란 무엇인가(Was ist, das wir Leben nennen, B 19)》를 연주했으나 소실되었다.
[23]
음악은 분실되었다.
[24]
메뉴표가 아직도 남아있는데, 햄, 소시지, 양고기, 송아지, 비프 알 라 모드에 샐러드, 호박 등 갖가지 야채와 레몬절임, 버찌 절임 등이 나왔다고 한다.
[25]
이전에도 바이마르에서 피젠델과 함께 바흐를 만난 적이 있다.
[26]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색욕마인으로 잘 알려진
아우구스트 2세.
[2100만원]
[28]
프랑스 작가였던 티통 뒤 티예의 예술인 전기 모음집인 『프랑스의 파르나소스Parnasse François(1732)』에는, 마르샹에 대해 대단한 성공을 거두는 것은 순전히 그에게 달린 것이었지만 그의 불안정한 정신과 몹시 괴상한 행동은 자신에게 주어진 온갖 좋은 기회들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고 기록되어있다.
[29]
3800만원
[₩]
3000만원
[₩]
386만원
[32]
애초에 이런 칼뱅파 예배에서는 루터교회 예배와는 달리 예배 중 악기나 성가대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33]
추가로 바흐는
루터교회여서 궁정 예배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34]
그나마 몇 곡은 바흐가 나중에 라이프치히에서 다시 써먹으면서 단편적이나마 알 수 있다.
[35]
그 시절에는 아이들이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아서 되도록 아이를 많이 낳는 게 흔했다.
[36]
이 사람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도 친하게 지냈다.
[37]
푸가 주제는 네덜란드 출신이었던 라인켄을 고려하여 네덜란드 민요 Ich ben gegroet에서 따온 선욜이다.
[38]
함부르크 칸토르와 함부르크 세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39]
이 편지는 남아있지 않다.
[40]
마테존이 바흐를 높게 평가한 것과는 별개로, 마테존과 바흐의 관계가 어땠는지 뒷받침해주는 자료는 많이 남아있지는 않다. 후에 마테존은 내가 전기모음 하나 쓸건데
자기소개서좀 보내주셈 ㅇㅇ이라고 편지를 보냈고, 이에 대한 바흐의 답장은 남아있지 않다. 이 전기가 바로 『개선문의 기초Grundlage einer Ehren-Pforte(1740)』로, 모두 149명의 현역뿐만 아니라 구시대의 음악가들의 삶도 담고 있는데 이 중에 바흐가 없는 걸로 봐서는 아마 안보낸듯.
[41]
바흐가 함부르크의 여러 오르간을 연주하였음을 시사한다.
[노이마이스터]
[43]
28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중 14명은 박사 학위를 갖고있는 고학력자들이었다.
[44]
텔레만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함부르크 시는 텔레만에게 더 높은 봉급을 약속하였으며, 추가적으로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의 감독직으로 임명하였다. 쾨텐을 오고가는 길에 텔레만이 바흐에게 칸토르직을 부추겼을 수도 있다. 텔레만은
바이마르에서 바흐의 차남 카를 필리프 엠마누엘 바흐의 대부를 서주기도 하였으며, 또 바흐가 죽은 후인 1751년
그를 추모하는 소네트를 쓰기도 했다.
[45]
참고로 그라우프너의 오디션 칸타타는 《깊은 구렁에서 당신을 부르짖습니다Aus der Tiefen rufen wir, GWV 1113/23a》와 《온 나라들아, 주를 찬양하라Lobet den Herrn alle Heiden, GWV 1113/23b》였다.
[46]
오늘날 바흐를 2류라고 여기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당대의 바흐는 텔레만이나 헨델 그라우프너등보다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흐가 대학을 가지 않아서(...).
[₩]
780만원
[48]
심지어 바흐의 칸토르 임명 건은 시참사회가 성직회와 회의도 없이 무단으로 바흐를 임명한 것이다(...).
[49]
교회력에 따라 주일마다 사용한 칸타타 모음을 싸이클이라 한다. 바흐의 칸타타는 다섯 개의 사이클을 작곡했다고 하며 이 중에 세 개의 사이클 정도가 거의 완벽하게 남아있다. 텔레만이나 그라우프너 등의 작곡가가 작품수가 많은 것은 이 칸타타 사이클이 수십 개는 되기 때문이다.
[50]
재탕 수준은 아니지만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의 경우도 과거에 사용했던 음악을 많이 차용한 작품이다.
[51]
당시 칸토르 연봉은 100탈러였다. 칸타타 의뢰비, 원정 연주비, 오르간 감정비, 장례 연주비, 결혼식 축하연 음악 등 잡무가 주는 돈이 칸토르 수입보다 훨씬 많았던 것.
[52]
하지만 정작 아우구스트 3세는 부친 아우구스트 2세와 달리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는 3차례의
폴란드 분할 끝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53]
바흐와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웠고, 바흐가 궁정작곡가 직위를 얻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 문서도 참조하자.
[54]
능력은 있었으나 음악을 싫어했다는 게 제일 큰 문제였다.
[55]
바흐에게 젊은 시절 라이프치히에서 배운 적이 있다.
[56]
여기에 얽힌 일화가 재밌다. 언급했다시피 프리드리히 2세가 주제를 던지면 바흐가 다성 푸가를 즉석에서 작곡해내고 그걸 반복하는 묘기를 선보였다. 그 중 한 주제를 3성 푸가로 즉석 연주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왕이 이번엔 6성 푸가를 요구하자 바흐는
이건 못 하겠는데요를 시전했다. (본문에 6성 푸가를 성공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영문 위키피디아의 내용과 사뭇 다르다. 다만 당시 왕이 던진 주제가 여럿이었고, 바흐는 방금 언급한 단 하나를 제외한 모든 도전에서 성공했다고 알려져 있다는 걸 감안하면 딱히 틀리지도 않은 내용일 것이다.) 대신에 이건 나중에 따로 악보 상으로 작곡해서 보내드리겠다고 하는 한편, 바흐 자신의 즉흥적인 주제로 6성 푸가를 연주해내는 것으로 상황을 무마했다고 한다. 이 일이 동기가 되어 작곡된 게 바로 이 《음악의 헌정》인 것이다.
[57]
이 협회는 1750년대 중반때까지 활동을 유지하였다.
[58]
이 악보의 정체는
이 동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59]
존 테일러의 백내장 수술은 마취도 안 하고 생 눈에 바늘을 찔러넣어 눈 안에 있는 수정체를 터트리는 수술로 엄청나게 고통스럽고 아프기만 한 고문형식의 엉터리 수술이였다.
[60]
MBC의
서프라이즈에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었다. 이 기사에서는 헨델이 존 테일러의 수술 8개월 후 사망했다고 해 놓았는데 실제로 헨델은 수술 후 8년 뒤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