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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06:07:53

야로슬라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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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제7대 대공
야로슬라프 블라디미로비치
Ꙗрославъ Володимѣровичь
파일:9544231def707b75a2dc79b97040b53f.jpg
<colbgcolor=#005bbb><colcolor=#ffd400> 본명 야로슬라프 블라디미로비치 (한국어)
Yaroslav Vladimirovich (영어)
Яросла́в Влади́мирович (러시아어)
Яросла́в Володи́мирович (우크라이나어)
출생 978년 ~ 988년[1]
사망 1054년 2월 20일 (향년 65~76세)
키예프 루스 키예프 비쇼로드
(現 우크라이나 키이우 비쇼로드)
묘소 우크라이나 키이우 성 소피아 성당[2]
재위기간 키예프 루스 제7대 대공
1016년[3] ~ 1054년 2월 20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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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bbb><colcolor=#ffd400> 왕조 류리크 왕조
아버지 블라디미르 1세
어머니 로그네다
형제자매 이복형 스뱌토폴크 1세
배우자 잉게르드 올로프스도터
자녀 아들 이자슬라프 1세, 스뱌토슬라프 2세, 프세볼로트 1세
종교 정교회
별명 현자, 현공[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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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아버지와 형을 들이받고 즉위하다2.3. 무서운 동생 므스티슬라프2.4. 루스를 강국으로 만들다2.5. 말년
3. 업적4. 가족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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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예프 루스의 제7대 대공. 블라디미르 1세 대왕을 계승하여 그에 필적하는 업적을 세운 키예프 루스의 성군이다. 그의 치세에 키예프 루스는 전성기에 돌입하였다. 동방 정교회가 루스 문화권 일대 전역에 꽃을 피웠고, 키예프의 올가부터 시작된 법질서 확립 역시 그의 치세에 꽃을 피웠다. 일대의 모든 국가가 키예프 루스를 강국으로 평가할 정도의 국력을 키워냈으며, 문화적으로도 절정에 달했다. 지금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문화권의 기틀을 세운 인물로서 현대에도 양국의 국민들의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는 군주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블라디미르 1세와 폴로크츠 공녀 라그네다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연도는 여전히 논쟁거리인 사안이다. 키예프 루스 초중기의 역사에 대해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으로 여겨지는 '원초 연대기'와 야로슬라프 1세 본인의 유골을 검사해서 얻은 추정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유골 검사 결과가 오차가 벌어지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원초 연대기가 야로슬라프 1세를 띄워주기 위해 979년생인 스뱌토폴크 1세보다 먼저 태어난 것으로 곡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모욕과 살인, 강간이 오간 부모님의 과거사와 제각기 야망을 가진 수많은 동복 및 이복형제들 때문에, 혼란한 가족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6] 988년 블라디미르 1세가 아들들에게 대대적으로 루스 땅을 분봉할 때, 로스토프 공작령을 받았다. 이때 부다라고 하는 이름의 가정교사 겸 섭정이 로스토프에 동행했다. 야로슬라프가 볼가 강을 통해 배를 타고 영지를 순회하다가 잠시 내린 곳에서 곰의 공격을 받았는데, 부다가 도끼로 곰을 물리쳐서 야로슬라프를 지켰다. 그 후 야로슬라프는 그 자리에 야로슬라블이라는 도시를 세워서 로스토프 공작령의 수도로 삼았다.

1010년, 이복형이자 블라디미르 1세의 아들들 중 최연장자인 노브고로드 공작 브셰슬라프가 죽었다. 노브고로드는 나라 겨레가 비롯한 풍패(豐沛)의 땅이라 노브고로드공은 키예프 루스의 저군()인데, 블라디미르 1세는 야로슬라프를 노브고로드공으로 봉했다. 가지고 있던 로스토프 공작령은 회수하고, 다른 아들 보리스에게 주었다. 원래 브셰슬라프 다음 가는 공위 계승권을 가진 이는 투로프공 스뱌토폴크였으나, 아내와 공모하여 반란을 시도하다가 잡혀서 투옥당해서 그 다음 계승권자인 야로슬라프가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야로슬라프는 노브고로드 공작, 명목상 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야로슬라프는 즉각 거주지를 로스토프에서 노브고로드로 옮겼다. 벨리키 노브고로드 근교에 야로슬라프의 궁정 터와 옛 건축물들이 남아있다.

2.2. 아버지와 형을 들이받고 즉위하다

1014년, 노브고로드에 충격적인 소식이 도착했다. 블라디미르 1세가 야로슬라프가 아닌 그의 어린 이복동생, 로스토프 공작 보리스를 공위 계승자로 선언했다는 것이다.[7] 원래 어머니와 아버지의 악연 때문에 아버지를 싫어했던 야로슬라프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연 2000흐리브냐에 달하는 중앙 정부로의 세금을 내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또, 북유럽에서 에이문드라는 바이킹과 그가 이끄는 바랑인 전사들을 대거 고용하여 내전을 준비했다. 이에 블라디미르 1세 역시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하지만 노쇠했던 블라디미르 1세는 전쟁 준비를 위해 과로하다가 병에 걸렸고, 블라디미르 1세 측의 주요한 아군이던 로스토프 공작 보리스도 페체네그족이 국경을 침범하는 바람에 이들을 막으러 키예프에서 먼 알타 강으로 떠나갔다. 이에 내전이 흐지부지될 기미가 보이자 혈기를 이기지 못한 바랑인들이 노브고로드에서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에 노브고로드 시민들이 반격을 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야로슬라프는 허겁지겁 노브고로드로 돌아가 시민들과 바랑인들을 진정시키는 데에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이때가 1015년 7월이었다. 이 폭동이 있은 직후에 키예프에서 블라디미르 1세가 사망했다.

이로써 정세가 급변했다. 반역 중이면서 가장 강력한 대공 후보였던 야로슬라프가 폭동 진압에, 블라디미르 1세가 직접 점지한 대공 후보 보리스가 페체네그족과의 싸움에 발목을 잡혀 있는 새에 갇혀있다가 탈옥해서 키예프 인근에 있던 투로프 공작 스뱌토폴크가 키예프에 즉각 입성하여 스뱌토폴크 1세로써 대공에 오른 것이다. 원래 블라디미르 1세의 측근들은 보리스를 공위에 올리기 위해 그의 죽음을 숨겼으나, 이를 스뱌토폴크가 알아내고 만 것이다. 스뱌토폴크 1세는 즉위 직후 로스토프 공작 보리스를 살해했다. 마침 키예프에는 야로슬라프의 동복여동생 프레드슬라바가 있었는데, 이에 분개하여 키예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편지로 써서 야로슬라프에게 알렸다.

야로슬라프는 즉각 반란을 선언했다. 이에 군대를 준비하던 중,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죽은 로스토프 공작 보리스의 동복동생인 무롬 공작 글레브를 만났다. 글레브는 대공의 전령을 받고 키예프로 가는 길이었다. 이에 야로슬라프는 지금 키예프에서 스뱌토폴크 1세가 권력을 잡고 동생들을 죽이고 있다며, 가지 말라고 말렸으나 글레브는 그럼에도 자신은 가야 한다며 키예프로 떠났다. 결국 글레브는 스뱌토폴크 1세에게 매수된 자신의 요리사 토르친에게 암살당했다. 보리스와 글레브가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겁에 질린 드레블랸스크 공작 스뱌토슬라프는 도망치려다 스뱌토폴크 1세에게 찍혀서 살해당했다.

1016년에, 마침내 야로슬라프가 진격을 시작했다. 이에 스뱌토폴크 1세 역시 군대를 이끌고 북진했고, 두 군대는 류베치라는 곳에서, 드네프르 강을 끼고 조우했다. 양측 모두 섣불리 크고 거친 드네프르 강을 거쳐 선공하기를 꺼려서 우선 각자 진을 쳤다. 스뱌토폴크 1세는 야로슬라프가 쉽게 선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술과 고기를 내어 잔치를 준비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야로슬라프는 과감하게 선공을 감행했다. 편하게 풀어져 있던 스뱌토폴크 1세의 군대는 기습 공격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고, 박살이 나고 말았다. 많은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도망치다가 인근의 강과 호수에 빠져죽었다. 스뱌토폴크 1세는 간신히 빠져나와 폴란드로 도망쳤다.

야로슬라프는 그대로 키예프로 입성해 야로슬라프 1세로써 대공 즉위를 선언했다. 하지만 스뱌토폴크 1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겐 강력한 처가 폴란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1017년, 스뱌토폴크 1세는 페체네그족을 매수하여 키예프로 진군, 도시를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야로슬라프는 이미 키예프의 방어 시설을 강화한 뒤였고, 아무리 강력한 페체네그족들이라도 결국 유목민족이었던 만큼 공성에는 약했다. 일부 성벽을 무너뜨리기도 하는 등의 혈투 끝에 스뱌토폴크 1세는 패배했고 군기도 빼앗겼다. 자력으로 복위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장인 볼레스와프 1세에게 지원을 부탁했다. 이에 볼레스와프 1세는 친히 폴란드 군대를 이끌고 스뱌토폴크 및 페체네그족들과 합류, 키예프로 진군했다. 이에 야로슬라프 1세도 요격을 나서, 루스 서쪽의 부그 강에서 두 군대가 조우했다. 꼭 앞서 있었던 류베치 전투와 같은 양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방심한 쪽은 야로슬라프 1세였다. 야로슬라프 1세가 진을 치고 쉴 것을 명령할 때 볼레스와프 1세가 과감한 도하를 감행, 대승을 거두었다. 야로슬라프는 키예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즉각 그의 본거지인 노브고로드로 도망쳤고, 스뱌토폴크 1세는 폴란드 군대를 앞세우고 키예프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찾은 권세는 결코 오래 가지 않았다. 폴란드 군대는 키예프에 몇달 간 주둔하면서 마구잡이 약탈을 자행하는 등 불손하게 굴었고, 볼레스와프 1세도 블라디미르 1세의 딸들을 멋대로 첩으로 삼는 등 방자하게 굴었다. 이에 키예프 시민들은 분노했고, 결국 폴란드 군대에 야습을 가해 큰 피해를 입혔다. 볼레스와프 1세는 깜짝 놀라 폴란드로 회군했다. 폴란드 군대가 돌아가자 스뱌토폴크 1세에겐 군사력이 거의 사라졌다.

한편, 폴란드 군대의 강함을 맛본 야로슬라프 1세는 공포에 사로잡혔고, 아예 노브고로드까지 버리고 스웨덴으로 망명하려고 했다. 그러자 노브고로드의 포사드니크[8] 콘스탄틴 도브루니치[9]가 야로슬라프 1세가 도망치려고 준비한 배를 불태워 버리고 그에게 정신 차리고 맞서 싸울 것을 간언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야로슬라프 1세는 다시 군대와 자금을 모아 1019년에 남진했다. 폴란드 군대의 도움을 받지 못한 스뱌토폴크 1세는 패배하고 다시 도망쳤다. 야로슬라프 1세는 키예프에 재입성하였다. 스뱌토폴크 1세는 다시 페체네그족의 힘을 빌렸다. 이에 야로슬라프 1세도 출진, 이전에 보리스가 살해당했던 페체네그족과의 최전선 알타 강에서 만났다. 이번 싸움은 야로슬라프 1세가 완승을 거두었다. 페체네그족들은 박살나서 도망쳤고, 전투 중 스뱌토폴크 1세마저 부상당했다. 스뱌토폴크 1세는 서쪽으로 도망쳐서 떠돌다 객사한다. 이 전투로써, 야로슬라프 1세는 대공 자리를 확고히 굳혔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1019년을 야로슬라프 1세가 즉위한 해로 보는 편이다.

다만, 위에 서술된 이야기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기록이 하나 있다. 바로 북유럽 사가 '에이문드의 사가'이다. 야로슬라프가 고용한 바이킹들의 대장 에이문드를 주인공으로 하는 서사시이다. 이 사가에는 에이문드가 동쪽의 두 왕 야리슬레이프와 부리슬레이프가 싸울 때 야리슬레이프에게 고용되어 부리슬레이프를 죽였다고 한다. 야리슬레이프는 야로슬라프 1세인게 다른 기록과도 교차검증되지만, 부리슬레이프가 누구인가에 대해 논쟁이 생겼다. 폴란드 국왕 볼레스와프 1세와 로스토프 공작 보리스가 모두 부리슬레이프로 불릴 수 있는데, 정황상 부리슬레이프가 보리스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리스를 살해한 것은 야로슬라프 1세가 되는 것이다. 사실 당시 정세도 스뱌토폴크 1세보다 야로슬라프 1세가 보리스를 공격할 이유가 훨씬 많기도 했다. 보리스는 스뱌토폴크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뱌토폴크 1세를 보리스 살해의 범인으로 지목하는 기록이 압도적이라, 보리스를 죽인 것은 스뱌토폴크 1세라는 것이 정설이다.

2.3. 무서운 동생 므스티슬라프

내전 종전 후, 야로슬라프 1세는 스웨덴 왕국의 국왕 올로프 3세 솃코눙의 딸 잉에게르드 올로프스도테르[10]와 결혼했다.[11]

1020년, 야로슬라프 1세의 동복형 폴로츠크 공작 이자슬라프의 아들인 폴로츠크 공작 브랴치슬라프 이자슬라비치가 반란을 일으켜 노브고로드를 공격했다. 야로슬라프 1세는 빠르게 움직여서 노브고로드를 약탈하고 폴로츠크로 돌아가려 했던 브랴치슬라프를 수도마라는 곳에서 따라잡아 뒤를 쳐서 승리를 거두었다. 브랴치슬라프는 도주했으나 결국 체포당했고, 영지를 대폭 축소당했다.

1024년, 이번에는 야로슬라프 1세의 이복동생 트무타라칸스키 공작 므스티슬라프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수즈달에서 옛 다신교 사제들이 기근을 빌미로 사람들을 선동하여 대규모 봉기가 일어난 상태였는데, 야로슬라프 1세가 이를 진압하려 출정한 사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므스티슬라프는 키예프 성문 앞까지 진격해 항복할 것을 요구했으나 키예프는 항복하지 않았고, 난공불락의 키예프를 공격하는 것은 무리라 생각한 므스티슬라프는 키예프를 피해 체르니고프, 현 체르니히우로 진격해 그곳을 점령했다. 수즈달의 봉기를 진압한 야로슬라프 1세는 우선 노브고로드로 북진해서 스웨덴에서 바랑인들을 모집했고, 그해 가을에 체르니고프로 진격했다. 폭풍우 치는 밤, 체르니고프 인근의 마을 리스트벤에서 양군이 조우했다. 이윽고 벌어진 리스트벤 전투의 결과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군세는 야로슬라프 1세 측이 우세했지만, 므스티슬라프는 별명이 용감공일 만큼 싸움을 잘하는 인물이었다. 경직된 진형을 사용하는 야로슬라프 1세의 군대를 므스티슬라프의 군대는 쪼개어져 포위해서, 대승을 거두었다. 야로슬라프 1세는 키예프도 아닌 노브고로드로 허겁지겁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므스티슬라프는 대공위를 쟁취하려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를 그만두고 1026년에 형에게 평화 사절을 보냈다. 드네프르 강 동쪽의 전역을 달라는 것이 종전 조건이었다. 야로슬라프 1세는 이에 동의하여 내전은 끝났다. 두 형제는 고로데츠라는 곳에서 만나 조약을 맺었다. 므스티슬라프는 체르니고프 대공으로 취임해 명목상으로는 야로슬라프 1세의 봉신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동맹국에 가까운 자치권을 누리는 강력한 군주가 되었다. 두 형제는 이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야로슬라프 1세는 내심 므스티슬라프가 두려웠는지, 그가 죽을 때까지 체르니고프에서 가까운 키예프가 아닌 노브고로드에 거주했다.

1028년에는 폐위된 노르웨이 왕국 국왕 올라프 2세와 그의 아들 마그누스가 망명을 왔다.[12] 올라프 2세는 야로슬라프 1세의 부인 잉에게르드의 원래 약혼자이기도 했다. 정략결혼이었지만 잉에게르드는 원래 그를 좋아했고 결혼식까지 열었지만 무슨 일인지 올라프 2세가 결혼식에 안 오는 바람에 결혼이 파토나고 야로슬라프 1세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올라프 2세와 잉에게르드의 아버지 올로프 3세 간에 전쟁까지 벌였지만 결국 잉에게르드의 이복동생 아스트리드와 결혼하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했다. 즉, 야로슬라프 1세의 동서였던 것. 그래서인지 올라프 2세의 망명은 받아들여졌다. 다만 군사를 빌려달라는 올라프 2세의 요청은 거절했다.[13] 그는 1030년에 노르웨이 내의 지지자들이 본인의 귀국을 요청하자 스웨덴 군대를 빌려서[14] 노르웨이로 귀국했다. 이때 잉에게르드는 위험한 길을 떠나니 만일을 대비해 아들 마그누스는 놓고 가라고 올라프 2세를 설득해, 마그누스는 야로슬라프 1세의 궁정에 남아 잉에게르드의 슬하에서 교육받았다. 이후 올라프 2세는 스티클레스타드 전투를 벌여 패배하고 전사한다. 남은 마그누스는 노브고로드에서 훌륭히 교육받은 후 1035년에 아버지의 지지자들의 도움을 받아 노르웨이 국왕이 된다.

1029년, 알란 계통 유목민족인 야스족이 트무타라칸을 공격하자 므스티슬라프를 도와 출진하여 야스족을 물리쳤다. 야스족을 물리친 직후 반격에 나서서 므스티슬라프의 영지가 코카서스 지방 근처까지 확장되도록 도와주었다. 1030년에는 독자적으로 지금의 에스토니아 지역으로 진격, 원주민인 추드인들을 무찌르고 그 땅에 신도시 유리이프를 세웠다. 지금의 에스토니아 타르투이다. 1031년에는 므스티슬라프와 함께 폴란드를 침공했다. 1025년에 야로슬라프 1세와 악연이 있는 폴란드 국왕 볼레스와프 1세가 사망했는데, 이때 차남 미에슈코 2세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그러자 장남 베스프림과 삼남 오톤이 왕위를 요구하고 나섰다가 패배하였다. 이에 베스프림은 야로슬라프 1세에게 망명을 갔었다. 따라서 야로슬라프 1세는, 베스프림에게 폴란드 왕위를 찾아준다는 명분으로 폴란드를 침공한 것이다. 총사령관은 얼마 전에 형과 따로 망명한 올라프 2세의 이복동생, 노르웨이의 하랄이 맡았다. 때맞춰 같은 명분으로 신성 로마 제국도 폴란드를 침공했기 때문에 전쟁은 너무나도 순조롭게 흘러가, 삽시간에 미에슈코 2세가 폐위되고 베스프림이 왕위에 올랐다. 야로슬라프 1세는 왕위를 찾아준 값으로 이전에 볼레스와프 1세가 스뱌토폴크 1세와 함께 쳐들어왔을 때 빼앗아갔던 땅을 모두 받아냄은 물론 막대한 수의 폴란드인들을 납치했다. 그는 폴란드인들을 므스티슬라프와 공평히 나눠가져서 불모지에 정착시켰다.

1034년에는 맏아들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에게 노브고로드 공작위를 주어서 공위 계승자로 삼았다. 또 1031년에 망명 왔었던 하랄이 더 큰 부와 명성을 얻기 위해 야로슬라프 1세를 떠나 동로마 제국으로 이동했다.

1036년, 마침내 야로슬라프 1세를 가장 두렵게 한 동생 므스티슬라프가 사냥 중에 돌연사했다. 므스티슬라프의 아들은 요절했기 때문에 므스티슬라프에게는 상속자가 없어, 그의 영지는 야로슬라프 1세가 물려받게 되었다. 하지만 야로슬라프 1세는 이것만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어, 므스티슬라프의 동복동생 프스코프 공작 수디슬라프를 체포해 투옥시켰다. 이로써 야로슬라프 1세는 대공 즉위 십수년 만에 키예프 루스 영토의 거의 대부분을 직접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에 페체네그족이 대대적으로 침략해왔는데, 야로슬라프 1세는 출진해 페체네그족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므스티슬라프와 페체네그족이 사라진 것을 기념해 야로슬라프 1세는 거주지를 노브고로드에서 키예프로 옮기고, 성 소피아 대성당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15] 이를 기념했다. 성 소피아 대성당 개축은 단순히 새 성당을 짓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다. 대성당 개축 공사와 함께 구시가지와 좀 떨어진 성당의 주변에 대대적으로 새로운 시가지를 만들고 여기다 야로슬라프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원래 키예프에서 가장 격이 높은 성당은 키예프의 올가가 지은 최초의 성당 성모 십일조 대성당이었는데, 키예프 최고 교회의 자리도 성 소피아 대성당이 대체했다.

2.4. 루스를 강국으로 만들다

권력이 안정화되자 1038년에는 야트빙거족, 1040년에는 리투아니아인들을 공격해서 승리했으며 1041년에는 배를 타고 폴란드의 마조비아 일대를 공격해 점령했다. 또 이 시기에 야로슬라프 1세의 궁정은 올라프 2세를 시작으로 망명 맛집이 되었는데, 1038년~1040년 사이에 잉글랜드 웨식스 왕조의 적통 망명자 에드워드 헝가리 왕국의 유력한 왕족 언드라시가 망명을 왔다. 야로슬라프 1세는 이들 모두를 받아들여 군사령관으로 기용하였다.

1042년에는 예전에 자신이 직접 쫓아냈던 폴란드 국왕 미에슈코 2세의 아들 카지미에시 1세의 왕위를 찾아준다는 명분으로 신성 로마 제국과 함께 폴란드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16] 이 시점에서는 이미 국력이 압도적인데다가 신성 로마 제국과 함께 벌인 전쟁인만큼, 너무나 순조롭게 폴란드 귀족들을 무찌르고 카지미에시 1세를 왕위에 앉히는데 성공했다. 야로슬라프 1세는 카지미에시 1세와 자신의 이복여동생 마리야 도브로네가를 결혼시켰으며, 또 자신의 차남 이자슬라프와 카지미에시 1세의 여동생 게르트루드를 결혼시켜서 이중으로 결혼 동맹을 형성했다. 이로써 폴란드에 대한 영향력을 굳혔다. 덤으로, 1042년 말에 공위 계승자인 노브고로드 공작 블라디미르가 독자적으로 핀란드 남부를 공격해 점령하기도 했다.

104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이름난 키예프 상인이 현지 로마인과 말다툼을 벌이다 싸움을 벌여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즈음 야로슬라프 1세는 동로마 제국 쪽을 노리고 있었다. 양국은 원래 블라디미르 1세 이후 동맹 관계였으나, 새로 즉위한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가 제국 내의 루스인들과 분쟁을 벌였고, 결국 많은 루스인들의 직장인 바랑기안 근위대를 해체하려 들거나 아토스 산의 루스인 수도원 시설을 부수는 등 반루스 정책을 자꾸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런 시국에 이런 사건이 벌어지자, 야로슬라프 1세는 이를 명분삼아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당대 최강국과 벌이는 전쟁이니만큼 준비를 철저히 했다. 총사령관은 블라디미르 공작이 맡았고, 노르웨이 왕족 하랄 하르드라다와 노브고로드 포사드니크 비샤타[17]가 휘하 사령관을 맡았다. 하랄 하르드라다는 원래 루스군에 복무하다가 1034년에 바랑인 부하들을 이끌고 바랑기안 근위대에 입대해 근위대장이 되어 많은 전공, 명예, 부를 얻었지만 1042년에 제국 내의 정쟁에 휘말려 사로잡혔다가 탈옥해서 키예프 루스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동로마 제국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만큼 야로슬라프 1세에게 매우 중용되었음은 물론 그의 딸 엘리시프와 결혼해 부마가 되었다.[18] 장군뿐만 아니라 병사들도 대대적으로 동원했는데, 요안네스 스킬리치스는 자신의 책 『개요』를 통해 당시 대공 야로슬라프 1세가 북방의 해양에 거주하는 동맹에게서까지 지원군을 받으며 10만의 병력을 동원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1043년 실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출현한 바이킹 함대가 약 400척 - 500척 수준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실제로는 4만이나 5만으로 잡아도 충분히 많은 병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국을 떠난 루스 군대는 중간에 위치한 불가리아 땅의 바르나에 이르러 잠깐 정박하려 했다. 약탈을 통한 보급 실시 혹은 전초 기지 마련을 위한 행동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바르나에서 이들을 기다리던 장군은 카타칼론 케카브메노스로, 당시 동로마 제국의 최고참 장성 중 한 사람이자 노련한 장군 중 한 명이었다. 카타칼론은 손쉽게 루스 군대를 격파했다. 정박에 실패한 루스 군대는 곧바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그해 6월에, 루스 함대는 마르마라 해에 진입했다. 그러자 콘스탄티노스 9세는 배상금 지불로 평화 조약을 맺고자 하였는데, 이에 대해 루스 측은 말도 안 되는 규모의 배상금을 요구하며 실질적으로 평화 협상을 파토냈다.[19] 평화 협상이 파토난 직후, 해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를 불꽃의 등대 전투라고 일컫는다. 이 전투에서 양군은 일자 대열을 펴고 팽팽하게 대치했다. 그러다 일요일 해질녘, 바실리오스 테오도라카노스 제독이 이끄는 세 척의 드로몬이 루스군을 향해 돌격, 그리스의 불을 쏴대면서 루스 함대 사이를 종횡무진 누볐다. 그 결과 루스 군대의 전함 10여척이 침몰당하거나 노획당했다. 결국 힘의 차이를 느낀 루스 군대는 퇴각하였다.

그런데 퇴각마저 순조롭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폭풍이 닥친 것이다. 폭풍은 많은 루스 배를 가라앉힘은 물론, 이들을 북쪽이 아닌 서쪽으로 밀어버렸다. 폭풍 속에서 총사령관 블라디미르 공작의 배까지 침몰해 보야르 이반 트보리미로프치에게 구조될 정도였다. 결국 불가리아 해안에 상륙하게 된 루스 군대는 회의를 했는데, 그냥 배를 수리해서 다시 바다로 가기로 결정이 났으나 사령관 중 하나인 포사드니크 비샤타는 이를 거부하고 육로로 귀환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병사들의 의사를 물어본 후 육로로 가고 싶은 병사 6천 명을 비샤타에게 딸려 보내서 육로로 오게 하고, 나머지 병력은 다시 배를 타고 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콘스탄티노스 9세는 양쪽에 모두 추격군을 보냈다. 바다에는 24척의 드로몬을, 육로에는 최소 1만 명 이상의 군사를 보냈다. 다행히 블라디미르가 이끄는 해군은 성공적으로 반격해서 동로마 해군을 무찔렀으나, 비샤타가 이끄는 육군은 참패하여 6천 명 중 8백 명만 살아남고 살아남은 인원들도 전원 포로로 잡혔다. 이들은 동로마 전통에 따라 모조리 실명당했다.

결과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은 커녕 공격도 실패했다. 그러자 야로슬라프 1세는 남은 군사를 내어 크림 반도의 동로마 거점인 케르손을 점령하였다. 이후 양국은 대규모의 원정을 벌이지는 못했다. 대신 야로슬라프 1세는 불가리아 지역을 소규모로 자주 약탈하면서 무력 도발을 벌였다. 이는 동로마인들의 피로감과 두려움을 높였고, 결국 1046년에 콘스탄티노스 9세가 평화 협상을 제안하고 이를 야로슬라프 1세가 받아들이면서 전쟁은 끝났다. 동로마 제국과 키예프 루스는 동맹 관계로 돌아왔으며, 일전에 콘스탄티노스 9세가 부순 아토스 산의 루스인 수도원은 피해 보상을 받았다. 육로로 가다가 잡힌 비샤타와 8백 명의 장님 포로들도 모두 석방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결혼이었다. 콘스탄티노스 9세의 딸과 야로슬라프 1세의 아들 프세볼로트가 결혼하게 된 것이다. 실질적으로 키예프 루스의 승리였다. 이 전쟁의 결과로 얻어낸 혼인 동맹으로 인해 키예프 루스와 야로슬라프 1세의 명성은 다시 한번 크게 올라갔다. 또 이 해에 1045년 노르웨이로 귀국했던 사위 하랄 하르드라다가 노르웨이 공동국왕에 즉위했으며, 또 다른 사위 언드라시 역시 모국 헝가리로 귀환해 헝가리 국왕에 즉위했다.

1047년에는 하랄 하르드라다가 노르웨이 단독 국왕에 즉위했으며, 폴란드에 마조비아 지역을 선물로 반환했다.

1048년에 프랑스에서 국혼 요청이 오자 이를 수락, 딸 안나를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와 약혼시켰다. 둘은 1049년 혹은 1051년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2.5. 말년

이후 야로슬라프 1세는 큰 전쟁을 벌이지 않고 내정에 집중하였다. 1050년 즈음에는 거주지를 키예프의 야로슬라프 성에서 아들 프세볼로트가 사는 프세고로드 성으로 옮겨 총애하는 아들과 같이 살았다. 또 이때 아내 잉에게르드와 사별했다.

1052년에는 공위 계승자였던 노브고로드 공작 블라디미르가 요절했다. 블라디미르에게는 아들 로스티슬라프가 있었으나 노브고로드 공작위는 단순한 공작위가 아닌 공위 계승자의 자리였기 때문에 로스티슬라프가 아닌 야로슬라프 1세의 차남 투로프 공작 이자슬라프가 물려받았다.

1053년에 노환이 악화된 야로슬라프 1세는 병석에 누웠고 결국 1054년 2월 20일에 사랑하는 아들 프볼로트의 품에 안겨 사망했다.

3. 업적

그는 재위 기간 동안 내치와 외치를 가리지 않고 뛰어난 업적을 세웠다. 우선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법률 제정이다. 키예프 루스에는 지속적으로 법치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키예프의 올가가 처음으로 국법을 만들었고, 블라디미르 1세 시대에 로마법이 도입되었다. 이것이 일시적인 개혁 시도로 그치지 않고 계속 키예프 루스 전국에서 권위 있는 법으로 작동할 수 있게 한 것이 야로슬라프 1세다. 야로슬라프 1세는 아버지가 제정한 '교회 헌장'을 개정해서 재발표하고, '루스카야 프라우다'라는 최초의 공식 법전을 편찬했다. 법전이 편찬되면서 지방 귀족들에게 하나의 법 규칙을 알려줄 수 있었고, 루스카야 프라우다는 훗날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3세 대공이 새로운 법전 수제브니크를 공포할 때까지 루스의 법으로 군림했다.

무수한 건축 사업도 벌였다. 키예프 주변에 야로슬라블, 셰고로드 등 새로운 시가지를 잔뜩 만들었고 이 시가지들이 구 시가지와 연결되면서 키예프가 대폭 확장되었다. 이 야로슬라블이라는 이름은 마치 알렉산드로스 3세 알렉산드리아처럼 야로슬라프 1세의 신도시에 대대적으로 붙었다. 키예프 야로슬라블 뿐만 아니라 로스토프 공작 시절에 지은 야로슬라블, 폴란드 땅에 지은 야로슬라블 등이 있다. 또 노브고로드 북쪽에 노브고로드 세베르스키를, 지금의 에스토니아 타르투에 유리이프를 지었다. 도시뿐만 아니라 건물도 많이 지었다. 키예프 야로슬라브에 지은 황금문이라는 화려한 목조 건물은 오랫동안 키예프의 랜드마크였으며, 무너진 이후에도 현대에 재건되어 관광객을 모으고 있다. 야로슬라프 1세 치세에 대대적으로 확장된 키예프는 엄청난 화려함을 자랑했는데, 독일의 연대기 작가 브레멘의 아담은 당시 키예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좋은 라이벌이 될만한 대도시라고 기록했다. 메르제부르크의 티트마르는 당시 키예프에 성당이 400개 이상, 큰 시장이 8개 있었다고 기록했다. 또 1030년에 성 게오르기 축일을 휴일로 제정하면서 성 게오르기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이 현대에도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의 전통 문화를 상징하는 특유의 대수도원의 시작으로, 곳곳에 수도원이 들어섰다. 성녀 이리니 수도원, 키예프-페체르스크 수도원 등이 대표적이다. 앞에서 나온 성 소피아 대성당 및 여러 성당 건설도 주요한 업적이다.

단순한 성당과 수도원 건설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또 다른 큰 업적을 남겼는데, 1051년에 최초로 독자적인 루스 총대주교를 임명한 것이다. 원래 루스의 총대주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임명했는데, 야로슬라프 1세가 최초로 루스 주교들과의 회의를 통해 루스 총대주교를 임명했다. 성 힐라리온이 최초의 러시아 총대주교로 착좌했다. 이것이 러시아 정교회 및 루스 지역 정교회 교단의 시초가 되었다. 성 게오르기우스 축일을 전국적으로 모시도록 명령한 것도 야로슬라프 1세다. 루스 문화권 전역이 성 게오르기우스를 크게 공경하는 것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종교 발전은 필연적으로 교육 발전을 수반했다. 야로슬라프 1세 본인도 고등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1028년에 노브고로드에 대규모 학교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키예프의 성 소피아 대성당에도 학교와 도서관을 지웠다. 이 학교는 루스 학문의 중심이 되었고, 이곳에서 많은 양의 동로마 및 기타 유럽, 이슬람권 등의 서적들이 교회 슬라브어 고대 동슬라브어로 번역되었다. 집중적인 번역 시설이 생기면서 루스에 선진 문화가 잔뜩 유입되었다. 이는 하술할 상공업 발전과 시너지를 일으켰다. 또 키예프-페체르스크 수도원에서도 연대기 집필과 이콘 제작이 이루어졌다. 사제와 이콘 장인을 육성하는 시설도 생겼다.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블라디미르 1세 이후 한동안 발행하지 않았던 스레브레니크 은화도 다시 발행했다. 은화에는 무장한 야로슬라프 1세의 초상화와 대공 부부의 문장, 성 게오르기의 그림이 들어갔다. 나라가 부유해지고 교육 수준이 올라가자 문화가 대단히 발전했다.

또, 외치에서도 전쟁과 외교 양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전쟁에서는 페체네그족을 영구적으로 격퇴한 것이 가장 큰 업적이다. 페체네그족은 전임자 대공들의 문서를 읽어보면 매번 등장할 만큼 키예프 루스 초중기의 대표적인 난적이었다. 수시로 키예프를 포위하고 공국 남부 일대를 약탈해대서 큰 골치였는데, 야로슬라프 1세가 결정적인 승리를 여러 차례 거두면서 페체네그족은 그 후 다시 키예프 루스 땅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20] 또 서쪽으로는 스뱌토폴크 1세 시절에 폴란드의 내정 개입을 받으며 빼앗긴 영토들을 회복했고 발트 해 연안에 지배권을 확립했으며 북쪽으로는 핀인들을 공격해서 기강을 잡았고 동남쪽으로는 캅카스 산맥까지 진출했다. 폴란드 왕위 계승에 개입해 폴란드에 영향력을 뻗치고 완승은 거두지 못했지만 동로마마저 공격해 유리한 조건의 평화 협정을 끌어 내었다. 하지만 야로슬라프 1세의 외치는 외교에서 빛난다.
증오와 다툼 속에 살면 너 자신이 멸망하고, 위대한 노동으로 얻은 당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땅을 파괴 할 것이다.
야로슬라프 1세, '원초 연대기' 中

그가 남긴 말처럼, 그는 외교를 중시했다. 특히 혼인 동맹을 상당히 중시했다. 야로슬라프 1세는 스웨덴 국왕 아눈드 3세의 매형이자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의 사돈이며 프랑스 국왕 앙리 1세, 노르웨이 국왕 하랄 3세,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1세,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1세의 장인이었다. 당대 위세를 떨치던 기독교 국가들의 상당수와 루스 측이 유리한 형태의 우호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또한 폴란드 문제 등에 대해 신성 로마 제국과도 결혼 관계는 맺지 않았지만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평화적으로 교류했다.

정치적으로는 기존의 노르드계 바랑인들의 영향력을 줄이고 현지 슬라브인들을 대거 중용하여 지금의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문화가 형성되는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4. 가족

배우자는 스웨덴 왕국의 국왕 올로프 3세 솃코눙의 딸 잉에게르드 올로프스도테르이다. 사실 이 결혼은 재혼으로, 노브고로드 공작 시절에 당시 노르웨이 왕국 섭정 스벤 하코나르손의 딸로 추정되는 안나라는 여자와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다. 둘 사이에 일리야라는 아들도 있었다고 하나, 일리야는 다른 아들의 세례명이고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설령 실존인물이었다고 해도 어린 시절 요절했다. 안나는 야로슬라프 1세가 처음 스뱌토폴크 1세를 몰아냈다가 폴란드군에 쫓겨났을 때 폴란드로 납치되어 가서 행방불명된다.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잉에게르드만 공식적인 배우자로 인정한다.

야로슬라프 1세와 잉에게르드는 최소 6남 3녀를 두었다.

1남 블라디미르는 1020년에 태어났다. 1034년에 노브고로드 공작위를 받아 공위 후계자가 되었다. 처음 공작이 되었을 때는 아직 어려 포사드니크 비샤타와 노브고로드 주교 성 루카 쥐댜타의 섭정을 받았다. 장성한 후에는 정력적으로 활동했는데, 1042년에 독자적으로 핀란드 지역을 침공해 성과를 냈고 1043년 동로마와의 전쟁에서 총사령관을 맡았다. 또 1040년대부터 노브고로드 성 소피아 성당 건축과 노브고로드 석조 요새 건축을 감독했다. 하지만 1052년, 노브고로드 성 소피아 성당이 완공된 지 20일 만에 요절하고 말았다. 배우자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아들 로스티슬라프를 남겼다. 앞서 언급했듯 로스티슬라프는 노브고로드 공작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로스토프 공작을 거쳐 볼린 공작이 된다.

1녀 아나스타샤는 1023년에 태어났다. 1038년에 궁정의 망명객이었던 헝가리 왕족 언드라시와 결혼했고, 1040년에 딸 아들레이드를 낳았다. 언드라시가 1046년에 언드라시 1세로 헝가리 왕위에 오르면서 헝가리 왕비가 되었다. 1053년에는 왕위 후계자 셜러몬을 낳았고, 1055년에는 왕자 다비드를 낳았다. 1060년에 언드라시 1세가 반란군에 패배하고 죽자 셜러몬과 다비드를 데리고 사돈인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에게 망명했다. 셜러몬이 하인리히 4세의 여동생 유디트와 약혼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나스타샤는 바이에른에 머무르다가 바이에른 공국 군대의 도움을 받아 1063년에 셜러몬을 헝가리 왕위에 앉힐 수 있었다.[21] 이후 헝가리의 섭정을 맡아 셜러몬과 공동 통치했으나 비리를 저지르고 재혼을 하는 등의 행동으로 아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1074년에 섭정직을 잃었다. 하지만 같은 해 아들이 수도에서 쫓겨나자 아들과 함께 서쪽 영지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죽었다. 정확한 사망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1094년에 그녀가 사망한 인물이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최소 1094년 이전에는 사망했다.

2남 이자슬라프는 1024년에 태어났다. 10대 초반에 투로프 공작위를 받았고, 1052년에 형 블라디미르가 죽자 노브고로드 공작위를 물려받으며 공위 후계자가 되었다. 1054년에 야로슬라프 1세가 죽었을 때, 그가 생전에 미리 계획해 둔 분할상속안에 따라 이자슬라프 1세로 즉위하였다.

2녀 엘리시프는 1025년에 태어났다.[22]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망명객이었던 노르웨이의 하랄과 친했는데, 어른이 되면서 둘은 친한 사이에서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하랄은 야로슬라프 1세에게 약혼을 청했는데, 야로슬라프 1세는 내 딸과 결혼하기엔 아직 부와 명성이 부족하다며, 더 경험을 쌓고 오라고 돌려보냈다. 그 뒤 하랄이 바랑기안 근위대에서 엄청난 부와 명성을 쌓아 돌아오자, 약속대로 야로슬라프 1세는 엘리시프와 하랄을 결혼시켰다. 하랄이 1046년에 노르웨이 국왕 하랄 3세로 즉위하자 노르웨이의 왕비가 되었고, 두 딸 잉이게르드와 마리아를 낳았다. 1066년에 하랄 3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러 떠났을 때 딸 마리아와 함께 동행해서 오크니 제도에 머물렀으며 그곳에서 딸을 잃었고, 남편마저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전사하자 잔존 병력을 인솔해 노르웨이로 귀국하여 같은 해에 사망했다. 딸 잉이게르드는 덴마크 왕자 올루프와 결혼했다가 그가 덴마크 국왕 올루프 1세로 즉위하자 덴마크 왕비가 되었으며, 이후 그가 죽자 스웨덴의 왕자 필리프와 재혼했는데 필리프도 스웨덴 국왕에 오르게 되면서 스웨덴의 왕비가 되었다. 마리아는 노르웨이 대귀족의 아들과 결혼했으나 앞서 언급했듯 1066년에 요절했다. 사실 엘리시프라는 이름은 북유럽 언어로, 다른 지역 사서에는 그녀의 이름이 엘리자베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루스 쪽에서 엘리자베타란 이름은 17세기가 넘어야 사용되기 시작하므로 어감이 비슷한 다른 이름이었을텐데, 그녀의 정확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시 슬라브 쪽 여성 이름인 올리사바가 유력 후보이기는 하다.

3녀 안나는 출생연도가 정확하지 않다. 프랑스 측은 1025년으로, 루스 측은 1032년으로 기록했다. 교육 수준이 아주 높아 슬라브어, 그리스어, 라틴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다.[23] 원래 야로슬라프 1세는 그녀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시집보내려고 했으나 하인리히 3세 측이 거절했고,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 국왕 앙리 1세가 청혼하여 결혼이 성사되었다.[24] 1052년에 필리프 1세[25]를 낳았고, 그 뒤로 딸 엠마와 아들 로베르, 위고를 더 낳았다. 문맹인 남편을 내심 무시했는지 국정에 개입하려 하다 앙리 1세와 싸움을 자주 해서 부부 사이는 금세 소원해졌고, 앙리 1세가 1060년에 죽은 뒤에야 왕실 문서에 다시 기록이 나온다. 앙리 1세가 기를 죽이려고 왕실 문서에서 이름을 죄다 뺐기 때문이다. 어린 필리프 1세가 집권하자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4세[26]와 공동 섭정에 올랐다. 그런데 섭정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벡생 백작 라울과 눈이 맞아버렸고, 결국 1061년에 아직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라울 백작과 재혼하여 벡생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이 결혼은 문제가 너무 많았다. 첫째로 프랑스 국법에 프랑스 국왕의 봉신은 죽은 선왕의 왕비와 결혼할 수 없게 되어 있었고, 둘째로 안나가 어린 아이들만 파리에 남겨두게 되었으며, 셋째로 라울은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었는데 아내 엘레오노르를 멋대로 내쫓고 결혼을 했기 때문에 교회법으로 중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교황 알렉산데르 2세가 직접 나서 조사한 끝에 둘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하고 안나는 파리로 돌아갈 것을 지시했는데, 둘은 이를 거부했고 결국 가톨릭 신자였던 라울은 파문까지 받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죄책감이 있었던지 안나는 종종 파리에 가서 자식들을 만났고, 잘못된 결혼을 속죄하는 의미로 수도원도 건립하긴 했다. 라울의 전처 엘레오노르가 죽자 라울의 파문도 해제되었다. 1074년에 라울이 죽자 안나는 다시 파리로 돌아갔고, 왕실 업무에 복귀했다가 1075년을 끝으로 기록이 끊긴다. 1075년에 죽었거나 수도원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는데, 만약 수도원에 들어갔다면 1080년대 후반에 죽었다.

3남 스뱌토슬라프는 1027년에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볼린 공작위를 받아 1054년까지 볼린을 다스렸고, 1054년에 야로슬라프 1세가 죽은 후 분할상속안에 따라 볼린 공작위를 반납하고 체르니고프, 무롬, 랴잔 공작위를 받았다. 이자슬라프 1세 치세의 야로슬라비치 삼두정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1073년에 반란을 일으켜 키예프 루스 대공위를 찬탈하고 스뱌토슬라프 2세로 즉위했다.

4남 프세볼로트는 1030년에 태어났다. 그는 야로슬라프 1세에게 특히 총애받는 아들이었다. 그래서 야로슬라프 1세는 생전에는 그에게 공작위를 주지 않고 곁에 두었다. 1054년에 야로슬라프 1세가 죽은 후 분할상속안에 따라 페레야슬라블, 로스토프 공작위를 받았다. 이자슬라프 1세 치세의 야로슬라비치 삼두정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1073년에 스뱌토슬라프 2세의 반란에 가담했으며, 그가 죽자 1076년에 키에프 루스 대공 프세볼로트 1세로 즉위했다.

5남 이고르는 1034년 또는 1035년에 태어났다. 1054년에 분할상속안에 따라 형 스뱌토슬라프가 반납한 볼린 공작위를 물려받았다. 1057년 동생 바체슬라프가 요절하자 볼린 공작위를 반납하고 바체슬라프의 스몰렌스크 공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본인도 1060년에 요절했다. 아들 다비트와 프세볼로트를 남겼다.

6남 바체슬라프는 1036년에 태어났다. 1054년에 분할상속안에 따라 스몰렌스크 공작위를 받았으나 1057년에 요절했다. 아들 보리스를 남겼다.

5. 여담

가족들 중에 성인이 정말 많다. 아버지 블라디미르 1세, 증조할머니 키예프의 올가, 이복형제 보리스와 글레브, 아내 잉에게르드, 아들 블라디미르가 줄줄이 시성되었으며 아들 스뱌토슬라프는 지역 성인으로 추앙받았고 그의 손자, 증손자 대에도 계속 성인이 나온다. 무엇보다 본인 역시 정교회 성인이다. 교회 차원에서 그를 기리는 것은 그의 사망 직후 시작되었으나 공식적으로 시성은 못 받고 있다가 2008년 우크라이나 정교회에서, 2016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시성식을 열면서 동구권 정교회 전역의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축일은 3월 4일이다.

워낙 존경받는 인물이었기에 그의 신상을 알기 위해 유골 조사가 몇 번 있었다. 20세기에 있었던 첫 유골 조사는 1936년이었다. 1939년에 다시 유골을 꺼낸 후 레닌그라드 인류학 연구소로 보내서 유골 조사를 진행한 후 관 속에 남녀 한 쌍의 유골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1940년에 다시 유골을 키예프 성 소피아 성당으로 반환해서 안장했다가 1964년에 다시 조사가 있었는데, 어쩐지 1964년 조사는 결과를 대내외에 크게 발표하지 않았다. 이후 2009년에 우크라이나 정부에서 재조사를 했는데, 큰일이 터졌다. 관 속에 여자 유골만 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연대 조사 결과 하나는 육체 노동을 많이 한, 즉 평민 내지 노예인 루스인 여자였고 다른 하나는 아예 야로슬라프 1세 시대보다도 훨씬 이전의 스키타이 민족 여자였다. 그러면 도대체 야로슬라프 1세의 유골은 어디 간 것이지 추측이 분분했다. 제일 유력한 설은 소련 공산당의 정교회 탄압과 나치 독일의 진격을 피해 독소전쟁 중 해외 정교회 신자들이 힘을 합쳐 유골을 빼돌려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다.[27] 실제로 야로슬라프 1세의 무덤에 같이 있던 것으로 알려진 이콘이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우크라이나 정교회 성당에서 발견면서, 미국 내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야로슬라프 1세의 유골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러시아와 결별 하고픈 우크라, 백방으로 수소문하는 ‘조상 유골’은

키예프 루스의 직계 후손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에서 크게 기념되고 있으며 기념비와 동상은 양국에 셀 수 없이 세워져 있다. 러시아에는 노브고로드 야로슬라프 주립대학교에, 우크라이나에서는 하르키우 야로슬라프 국립 법학 대학교에 야로슬라프 1세의 이름을 붙였다. 또 우크라이나 정부 최고등급 훈장은 야로슬라프 대공 훈장이며 러시아 해군 발트 함대에는 네우스트라시미급 호위함 2번함 야로슬라프 무드리 함이 취역해 있다.

그밖에 현행 우크라이나 2흐리우냐 주화의 도안이며, 구권 러시아 1000루블 지폐에도 그의 동상이 도안으로 들어갔었다.

'야로슬라프의 도서관'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유명한 전설이다. 야로슬라프 1세는 문화 부흥 정책 과정에서 막대한 책을 손에 넣었다. 키예프 성 소피아 대성당이 그의 도서관 역할을 했으며, 도서관에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책과 로마 신학자들의 책들은 물론, 사라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장서 복제본 일부와 옛 슬라브인들이 남긴 문서, 심지어 인도나 동아시아의 문헌까지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장서들은 1169년에 내전 중에 불탔다는 것이 정설이나, 사실은 어딘가의 땅 속에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1934년에 키예프 당위원회에서 공산당 고관의 다챠를 짓다가 출토되었는데 덮었다, 1951년에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보물지도가 발견되었다, 1980년대에 소련군에서 참호를 파다가 출토되었는데 덮었다 등의 온갖 소문이 돌았으나 사실로 확인된 것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다우징으로 장서들을 찾아보겠다며 나서기도 했다. 현재 '야로슬라프의 도서관'은 '이반 4세의 도서관'과 함께 잃어버린 옛 기록의 양대산맥으로 불린다.

수많은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미 중세 시대에 북유럽 사가에 '홀름가르드의 왕 절름발이 야리슬레이프'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하며, 여 서사시들도 야로슬라프 1세를 자세히 다루었다. 그와 그의 일가족의 모습은 당대에 키예프 성 소피아 대성당에 프레스코화로 남겨졌고, 현재는 훼손되어 1651년에 리투아니아 궁정화가가 제작한 사본만 남아있다. 현대 문학, 그림, 영화에도 자주 소재로 쓰였다. 최근에는 유명한 캐나다 드라마 바이킹스의 후속작 바이킹스:발할라에 등장한다.


[1] 원초 연대기가 978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978년설이 정설이나, 유골 검사에서 아무리 빨리 잡아도 980년대 초반이라는 설이 나왔고 다른 연대기엔 988년까지도 기록되어 있어 정확히 알 수 없다. [2] 비슷한 이름을 가진 튀르키예 이스탄불 아야 소피아와는 전혀 다른 곳이다. [3] 즉위 직후 권력 다툼으로 1018년에 일시적으로 퇴위당했다가 1019년에 복위하였다. [4] 로스토프 공작은 988년, 노브고로드 공작은 1010년에 취임 [5] 러시아어로는 Мудрый, 발음은 무드릐- [6] 자세한 내용은 블라디미르 1세 문서 참조. [7] 보리스는 어머니가 동로마 제국 포르피로게니타 안나로, 어머니의 고귀한 신분 때문에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8] 키예프 루스의 시장 직. [9] 블라디미르 1세의 외삼촌 도브리냐의 아들로 블라디미르 1세에게는 외사촌동생, 야로슬라프 1세에게는 5촌 당숙이 된다. [10] 세례명이 이리나여서 이리나로도 불린다. [11] 이때 잉에게르드는 결혼 지참금으로 루스 최북단의 넓은 영지를 받았는데, 이때 그녀의 이름이 붙게 된 땅이 바로 지금의 잉에르만란드, 즉 잉그리아다. [12] 아내 아스트리드는 스웨덴에 데려놓고 왔다. [13] 일부 기록은, 망명온 올라프 2세가 예전에 그를 좋아해던 잉에게르드 공비와 내연 관계에 돌입했다고 한다. [14] 당시 스웨덴 국왕은 올로프 3세의 아들이자 올라프 2세의 처남인 아눈드 3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15] 1011년에 블라디미르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하기아 소피아를 본떠 만든 성당이다. [16] 당시 신성 로마 제국과 야로슬라프 1세가 함께 왕위에 올린 베스프림은 즉위한 지 몇 달도 못 버티고 미에슈코 2세의 지지자들에게 살해당했다. 그 직후 미에슈코 2세가 복위했으나 다른 동생 오톤과 땅을 나누어 다스려야 했으며, 결국 그도 1034년 살해당했다. 그 직후 그의 아들 카지미에시 1세가 즉위했어야 하나, 미에슈코 2세를 죽인 귀족들이 카지미에시 1세를 어머니와 함께 추방해 모자는 외국을 떠돌아 다녀야 했다. [17] 앞서 야로슬라프 1세가 스뱌토폴크 1세와 내전을 벌일 때 그를 도운 노브고로드 포사드니크 콘스탄틴 도브루비치의 손자이다. [18] 사실 하랄 하르드라다가 동로마 제국에 가기 전부터 엘리시프와 하랄은 연인이었다. 엘리시프를 '루스의 여신'이라 부르는 하랄의 사랑시가 남아있다. 하지만 그때 야로슬라프 1세의 눈에 하랄은 유망하지만 아직 성에 안 차는 사윗감이었기 때문에 더 많은 부와 명성을 얻어 오면 딸을 주기로 약속했다. 하랄이 바랑기안 근위대에서 전설을 만들고 오자 약속을 지킨 것이다. [19] 스킬리치스에 의하면 루스 측이 전사 1명 당 현대 단위로 1kg의 금을, 미하일 프셀로스에 의하면 배 한 척 당 1000 노미스마를 요구했다고 한다. 어느 측이든 말도 안 되는 돈이다. [20] 가뜩이나 쿠만족 오구즈족에게 밀리고 있던 페체네그족은 야로슬라프 1세에게 대패한 후 아예 남하하여 동로마 제국 영지로 들어갔고, 그곳에서도 수시로 분란을 일으키다가 레부니온 전투 베로이아 전투를 거쳐 민족이 절멸당했다. [21] 이때 아나스타샤는 답례품으로 바이에른 공작 오토에게 아틸라의 검을 주었다고 한다. [22] 1022년에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엘리시프가 1녀다. [23] 당시 서유럽 쪽은 국왕이 문맹인 경우도 비일비재하여 특기할 만한 사항이었다. [24] 혼맥을 통해 프랑스와 우호 관계를 형성하고 싶었던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1세가 중매했다는 설도 있다. 이 결혼이 성사되면 언드라시 1세는 앙리 1세와 동서가 되기 때문이다. [25] 필리프 1세의 이름에서도 안나의 문화적 자존심을 알 수 있다. 원래 필리프는 프랑스인들이 쓰는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래 필리프(필리포스)는 명백히 동로마, 동방 정교회 쪽 이름이다. 그렇기에 필리프 1세의 이름은 확실히 안나가 붙였고, 이것이 관철된 것을 알 수 있다. 필리프 1세 이후로 프랑스에서는 필리프라는 이름이 흔해진다. [26] 훗날 잉글랜드 국왕에 오르는 윌리엄 1세의 장인이다. [27] 키예프 전투(1941년). 소련이 패배해 독일이 키이우를 장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