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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2 20:15:09

야로폴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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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제 4대 대공
야로폴크 스뱌토슬라비치 | Yaropolk Sviatoslavich
파일:Yaropolk.webp
<colbgcolor=#005bbb><colcolor=#ffd400> 이름 야로폴크 스뱌토슬라비치
Yaropolk Sviatoslavich
현대 러시아어 이름 Ярополк Святославич
고대 슬라브어 이름 Ꙗрополкъ Свѧтославичъ
전임자 스뱌토슬라프 1세
후임자 블라디미르 1세
생몰년도 952년?[1] ~ 978년 (향년 22~26세)
재위 키예프 루스 대공
972년~ 978년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아버지의 죽음, 즉위2.3. 내전과 죽음
3. 가족

[clearfix]

1. 개요

키예프 루스 제 4대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의 장남이다. 오래 자리를 지키지 못 하고 희대의 인물이었던 막내동생에게 자리와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950년대 초중반에 출생했으며 태어난 해는 선대 대공들보다는 추정 범위가 작다. 952년에서 955년 사이로 추정된다. 태어난 곳도 알 수 없으나 태어났을 때가 키예프의 올가 치세이므로 자란 곳은 확실히 키이우이다. 원초 연대기[2]에는 스뱌토슬라프 1세가 젊은 시절 낳은 아이들은 모두 키예프의 올가가 거두어 길렀다고 한다. 스뱌토슬라프 1세가 군사 행동에 심취해 너무 많이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성녀인 할머니의 슬하에서 크는 동안 야로폴크는 아버지와 다르게 기독교에 친숙해졌다.

964년, 아버지 스뱌토슬라프 1세가 공식적으로 키예프 루스 대공으로 즉위하며 야로폴크와 형제들은 공자가 되었다. 969년, 키이우 페체네그족에게 포위 공격을 당할 때 키이우에 있었다. 스뱌토슬라프 1세가 회군해 페체네그족을 격퇴한 후, 할머니 키예프의 올가가 사망했다. 그 직후 야로폴크와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루스 땅을 분할받았다.[3] 야로폴크는 장남답게 키이우와 루스 남부의 주요 영토를 받았다. 그의 둘째 동생 올레그 스뱌토슬라비치 키예프의 올가가 개척한 브루치[4]와 옛 드레블랴인들의 땅[5]을 받았다. 그의 셋째 동생 블라디미르 1세 노브고로드와 루스 북부 일대를 받았다. 사실 스뱌토슬라프 1세는 원래 블라디미르를 배제하고 루스를 남북으로 가르려고 했는데 노브고로드 지역이 대표자를 보내 노브고로드 일대도 공작을 지정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노브고로드는 키이우와 너무 멀어 야로폴크와 올레그가 거부했고, 그래서 막내 블라디미르가 노브고로드 공작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부터 야망이 넘쳐흐르던 세 형제의 분쟁은 예견되었다.

2.2. 아버지의 죽음, 즉위

971년, 스뱌토슬라프 1세는 불가리아에서 동로마 제국 요안니스 1세 황제에게 참패를 당했다. 거기다 귀향길에 페체네그족 매복까지 알게 되었다. 고위 장군 스베날드르는 전리품을 적게 챙기더라도 안전하게 육로로 갈 것을 강권했으나 스뱌토슬라프 1세는 드네프르 강을 탈 것을 고집했다. 대신 스베날드르가 분견대를 이끌고 육로로 키이우로 가도록 했다. 스베날드르는 키이우에 도착해 야로폴크에게 스뱌토슬라프 1세를 구원하러 가야 한다고 했으나 야망이 넘쳐흐르는 야로폴크는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972년에 스뱌토슬라프 1세는 드네프르 강을 강행돌파하려 시도하다 전사하고 말았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야로폴크 1세는 즉시 대공으로 즉위했다. 동생 올레그와 블라디미르는 일단은 형의 대공 즉위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즉위 후 가장 크게 변화한 정책은 종교 정책이었다. 야로폴크 1세는 즉위하자마자 친기독교 성향을 숨기지 않았다. 973년, 키예프 루스 사절단이 신성 로마 제국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부활절 기념 제국회의에 참석하여 함께 부활절을 축하했다. 니콘 연대기에 의하면 교황의 선교사도 루스에 도착해 활동했다고 한다. 야로폴크 1세 본인의 개종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어떤 연대기들에는 개종했다고 되어 있고 어떤 연대기들에는 개종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정설은 개종 후 또는 개종하려던 중에 블라디미르 1세에게 공격당했고, 블라디미르 1세가 키예프의 올가와 함께 루스 제일의 성인이 되면서 후대의 역사가들이 기독교 군주인 형을 죽였다는 흠을 감추기 위해 개종 여부를 숨겼다는 것이다.

2.3. 내전과 죽음

내전은 975년에 시작되었다. 그 발단은 놀랍게도 스베날드르 장군이었다. 스베날드르는 이 시점에 루스 최고의 권신으로 발돋움했으나, 정작 그의 원래 영지였던 드레블랴인 지역은 올레그 공작에게 빼앗겨버린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973년에 스베날드르의 아들 루트 스베넬디히[6]가 올레그의 영토에 들어가 멋대로 사냥을 벌였다. 정치적 상황을 보았을 때 이는 분명한 루트 또는 스베날드르의 도발이었다. 올레그는 즉각 대응해, 루트를 잡아다 죽여버렸다. 이에 스베날드르는 야로폴크 1세에게 가서 올레그를 모함하고 전쟁을 선동했다. 야로폴크 1세는 막상 동생과 일전을 벌여 그를 죽이는 것이 부담되었는지 처음에는 전쟁을 거부했으나 스베날드르의 2년간에 걸친 설득 끝에 결국 975년, 브루치로 출병을 결단했다. 올레그는 야전을 결단했고 브루치 성 앞으로 나아가 싸웠다. 전투에서 올레그의 군대는 참패했고 병사들은 다급히 브루치 성 안으로 도망치려 시도했다. 올레그는 성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막고 군대를 수습하려 했으나 인파에 떠밀려 다리에서 떨어져, 해자로 추락해 사망했다. 브루치는 즉각 야로폴크 1세에게 항복했다. 야로폴크 1세는 우선 동생부터 확보하려고 수색대를 꾸렸는데 며칠 간 찾아내지 못 했다. 수색은 어느 현지인이 전투 때 올레그 공작께서 다리에서 떨어지는 걸 보았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멈췄다. 해자에서 동생의 시체를 찾아낸 야로폴크 1세는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러고는 스베날드르를 돌아보며
자, 이것이 당신이 원했던 거요!
이라고 일갈했다. 올레그를 브루치 성에 장사지낸 후 야로폴크 1세는 키이우로 돌아갔다.

이 때, 큰형이 둘째 형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셋째 블라디미르 1세는 즉각 노브고로드에서 도망쳤다. 원초 연대기는 그가 '바다 너머'로 도망갔다고 기록했는데, 뒷일을 보았을 때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도주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야로폴크 1세는 얼떨결에 북부 지역 통제권까지 얻었고, 3년간 평화로운 통치를 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스베날드르가 죽었고, 스베날드르의 자리는 다른 귀족 블루드가 차지했다. 하지만 978년, 블라디미르 1세는 엄청난 수의 바랑인 군대를 이끌고 노브고로드로 귀환했다. 그가 돌아오자 노브고로드와 일대의 통치권은 즉각 블라디미르에게 돌아왔다. 블라디미르 1세는 이제 대놓고 야로폴크 1세와 전쟁을 시작했다. 그는 우선 결혼 문제로 자신을 모욕한 야로폴크 1세의 지지자 폴로츠크 공작을 쳐 무너뜨리고 키이우로 진군했다. 야로폴크 1세는 블루드를 믿고 싸우려 했으나, 사실 블루드는 일찌감치 블라디미르 1세와 밀약을 맺어놓은 상태였다. 블루드는 최근 키이우의 민심이 블라디미르 1세에게 기울어 여기서 싸웠다간 백성들이 성문을 열 수 있다며, 인근에 있는 작지만 튼튼한 요새 로덴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야로폴크 1세는 이에 따랐다. 곧 블라디미르 1세가 당도해 키이우에 무혈입성하고 로덴을 포위했다. 작은 요새 로덴은 물자 비축량이 많지 않아 금세 기근 상태에 빠져버렸다. 상황이 악화되고 야로폴크 1세가 근심에 빠지자 블루드는 블라디미르 1세와 협상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야로폴크 1세의 친구이자 충신인 바랴즈코는 분명히 계략이고 협상장에 갔다가는 죽을 거라며 대공을 말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키이우로 갔다. 6월 8일에 야로폴크 1세가 키이우 궁전에 들어서자, 블라디미르 1세는 우선 궁전을 봉쇄한 후 3일 간 형에게 큰 연회를 베풀며 안심시켰다. 그리고 6월 11일, 블라디미르 1세는 전사 둘을 보냈다. 두 전사는 야로폴크 1세를 기습해 가슴을 칼로 찔러 죽여버렸다.

그의 사후 충신 바랴즈코는 페체네그족에게 투항해 야로폴크 1세의 복수를 하려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 했다. 1044년, 그의 조카 야로슬라프 1세는 야로폴크 1세와 올레그 공작의 유골을 파낸 뒤 유골에다 세례하게 하고[7] 키이우 십일조 대성당의 블라디미르 1세 무덤 옆으로 이장하도록 지시했다.

3. 가족

원초 연대기는 그의 아내가 로마인 수녀라고 기록했다. 스뱌토슬라프 1세가 동로마에서 납치해 온 수녀를 아들에게 하사했다는 것.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스뱌토폴크 1세를 낳았다. 스뱌토폴크 1세는 블라디미르 1세 사후 키예프 루스 대공에 즉위한다. 또 폴로츠크의 로그네다 공녀와는 결혼했다는 말도 있고 약혼까지만 해놓고 결혼은 못 했다는 말도 있는데, 정황 상 결혼까진 못 한 것으로 보인다. 루스가 기독교에 물들기 시작했지만 아직 다신교 풍습이 진하게 남아있어 일부다처제가 합법이었다.
[1] 952년 설과 955년 설이 있다. [2] 러시아 고대-중세 역사를 다룬 거의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완벽한 기록. 연대기 작가이자 키예프의 수도자였던 네스토르(1056~1114)가 1113년경에 완성한 연대기이다. 키예프 루스 영토 전역에서 막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하여 쓴 연대기로 많은 역사적 사실은 물론 슬라브 전설, 게르만 전설도 많이 담겨 있어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다만 역사와 전설을 섞어 써서 중요한 데서 정확도가 떨어지는 시대적 한계도 있다. [3] 스뱌토슬라프 1세 본인은 불가리아를 직할령으로 삼았다. [4]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오우루치. [5] 러시아어로 드레블랸스크라 불렀던 모양. 올레그는 드레블랸스크 공작 올레그로도 불린다. [6] 슬라브식 이름 표기로, 노르드어 이름은 뢰트르 스베날드르손. [7] 원래 기독교 교리로는 불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