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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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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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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알폰스 무하
Alfons Mucha | Alphonse Mucha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82px-Alfons_Mucha_LOC_3c05828u.jpg
본명 알폰스 마리아 무하
(Alfons Maria Mucha)
출생 1860년 7월 24일
오스트리아 제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이반지체
사망 1939년 7월 14일 (향년 78세)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프라하
국적
[[체코|]][[틀:국기|]][[틀:국기|]]
직업 화가
학력 뮌헨 미술원
줄리안느 아카데미
콜라로시 아카데미
수상 레지옹 도뇌르 훈장 (1901)
가족 어머니 아말리에 말리
아버지 온드레이 무하
이복누나 알로이시아 무하 (~1879)
이복누나 안토니아 무하 (1880)
이복 ??[1]
여동생 아델라 무하
여동생 안나 무하
배우자 마리 히틸로바 (1906년 결혼)
슬하 1남 1녀[2]
종교 가톨릭[3]
서명 파일:알폰스 무하 서명.png

1. 개요2. 생애
2.1. 첫 일자리2.2. 첫 후원자2.3. 파리에서의 독립2.4. 지스몬다 포스터의 성공2.5. 상업화가로의 전성기2.6. 뉴욕에서의 인물화2.7. 프라하에서의 민족주의
3. 사후
3.1. 1940~1950년대, 탄압3.2. 1960~1990년대, 재평가3.3. 2000~2020년대, 재인기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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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체코 화가.

2. 생애

2.1. 첫 일자리

1860년 7월 24일, 오스트리아 제국 보헤미아 왕관령 산하 모라바 변경백국의 이반지체에서 태어났다. 무하의 어머니 아말리에 말라는 독신주의자였다. 그리하여 30대까지 비혼을 고수해왔는데, 어느 날 천사가 내려와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길 부탁하는 꿈을 꾼다. 때마침 그녀의 친척에게 편지가 왔는데, 마지막으로 중매를 권하는 편지였다. 그녀는 이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이미 아이 셋 딸린 홀아비였던 법원 직원 온드르제이 무하와 결혼하여 아들 알폰스와 딸 아델라, 안나를 낳았다.

무하의 어머니는 첫번째 자식인 알폰스 무하를 굉장히 아끼고 사랑하며 키웠다. 어릴 적 어머니는 무하에게 장난감을 사주고 싶었지만, 그들이 살던 곳은 시골이라 방편으로 연필이 달린 목걸이를 만들어 선물했다. 그렇게 알폰스 무하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렸으며,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유년기에는 성화를 주로 그렸다.

1872~1877년, 브르노에 위치한 슬라브 그래머 스쿨에서 공부했다. 성가대원으로 뽑혀 브르노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중도에 그만두게 된 까닭은 변성기가 와서 성가대를 나왔다는 설이 있다.

1877~1879년, 모라비아 이반지체로 귀향해 서기(scribe)로 생활하며 초상화를 그렸다. 프라하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고자 했지만 거절당했다.

1879~1881년, 으로 상경해 카우츠키 브리오시 브루크하르트 공방에 취업해 무대 배경그림, 극장 커튼 등을 제작했다. 훗날 이 곳에 구스타프 클림트도 일하게 된다. 그리고 한스 마카르트(Hans Makart)의 작품을 이 무렵 알게 된다. 작업장에 불이 나서 회사가 문을 닫게 되어 다시 모리비아 이반지체로 귀향하여 프리랜서로 장식예술과 초상화를 그렸다.

2.2. 첫 후원자

1882~1885년, 모리비아 남쪽 미쿨로프의 쿠헨 벨라시 백작(Count Eduard Khuen Belasi)의 눈에 들어, 그에게 고용되어 흐루쇼바니와 티롤 2곳에 있는 백작의 성 복원 작업을 했다.

1885년 가을, 뮌헨 미술원(Academy of Fine Arts)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1885년 11월, 보헤미아 왕국 미술학생협회(슈크레타, Skreta)에 가입했다.

1887년 가을, 프랑스 파리 쥴리앙아카데미에(Académie Julian)서 공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곳의 보수적 교육에 싫증을 느끼자, 쿠헨 백작이 아카데미를 옮기게 해 주었다.

1888년 11월, 파리의 콜라로씨아카데미(Académie Colarossi)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쿠헨 백작은 무하가 1년 넘게 그림을 주지 않자 지원을 더 이상 해주지 않겠다고 했다.

쿠헨 백작이 후원을 끊기 전에 무하와 티롤과 북이탈리아를 함께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런 그가 1년 조금 넘게 작품을 내지 않았다고 후원을 끊은 것은 의아한 부분이다. 수련 기간이 끝났으니 독립심을 기르라는 뜻에서 후원을 일부러 끊었다는 설도 있고, 그냥 늦어지는 게 괘씸해서 끊었는데 무하 입장에서 변명할 말이 없었단 이야기도 있다. 당시 쿠헨 백작은 무하에게 1달에 200프랑을 지불하고 있었는데, 이건 현재 물가 기준으로 적지 않은 금액이니까.

2.3. 파리에서의 독립

1889년 1월 무렵, 자유주의 사상에 매료된 합스부르크 가문 황위 계승자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 왕자가 불행한 결혼을 비관해 자살로 인한 변사체가 발견되었는데, 체코 민족주의자인 무하는 그가 왕위를 즉위하면 제국 내에서의 슬라브 민족에 대한 위치가 조금은 나아질 것을 기대했지만 일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려 큰 충격을 받았다.

1889년, 잡지 <Zlatá Praha>와 <Svetozor>에 삽화를 실으며, 인기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생계를 꾸릴 수 있게 되었다.

1890년, 일간지 <La Vie populaire>의 표지를 디자인했다. 프랑스 출판사들과 일러스트레이션 협력 작업을 했다.

1890~1891년, 극장 <Le Costume au Theatre>의 의상디자인과 무대장치 드로잉을 참여했다.

1893년, Svatopluk Cech, Adamite의 서사시 삽화를 출판했다. 샤를 로리유 에 씨(Charles Lorilleux & Cie)의 달력을 제작했다. 이 무렵 폴 고갱, 루텍 마를드와 교우했다.

2.4. 지스몬다 포스터의 성공

1894년 크리스마스에 무하는 휴가를 떠난 친구의 부탁을 받아 인쇄소에서 교정 보는 일을 대신 하고 있었다. 이 인쇄소는 당시 프랑스 최고의 연극 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4]가 감독하고 출연한 연극 '지스몬다' 광고 포스터 제작을 맡았는데 연휴인 크리스마스까지 베르나르에게 OK를 받지 못했다. 인쇄소 운영자는 연극 개막일이 1월 4일이라 마음은 급한데 직원들이 다 휴가 중이었기 때문에 인쇄소에 와 있던 무하에게 광고 포스터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무하는 석판화 일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할 수 있다고 대답하고 극장으로 가 리허설 중인 연극 무대를 보며 스케치한 후 인쇄소 운영자도 휴가를 떠난 사이 석판화를 만들어 12월 30일에 완성했다. 이것은 당시 포스터라고 하면 생각하던 크기가 아니라 사람을 실물 사이즈로 그린 대형 그림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7px-Alfons_Mucha_-_1894_-_Gismonda.jpg
1895년에 발표한 '지스몬다' 포스터

이 광고 포스터는 1895년 1월 1일 파리 광고탑에 붙자마자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삽화가 제롬 두세는 잡지 '레뷰 일뤼스트레'에 "이 포스터는 하룻밤 사이에 파리의 모든 시민이 무하의 이름에 친숙해지게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포스터가 아름다워 사람들이 거리의 포스터를 하룻밤에 모두 떼 갈 정도였다.

무하는 당대 최고의 스타 베르나르와 6년 계약을 맺는다. 지스몬다 상연 당시 사라 베르나르는 50대 초반이었으나, 무하는 일부러 그녀의 신비함과 여성스러움을 보여주는 젊은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사라 베르나르는 지스몬다 포스터를 4,000장 추가 주문했으며, 의상과 무대 디자인까지 무하에게 일임했다. 알폰스 무하는 하루 아침에 무명의 신예에서 파리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상업 화가가 되었다.

2.5. 상업화가로의 전성기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무하 작품 상당수가 이 지스몬다 작업 직후부터 1900년 사이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2.6. 뉴욕에서의 인물화

1904년 3월 미국을 처음 방문했다. 이 때 훗날 <슬라브 서사시>의 후원자 찰스 리처드 크레인(Charles Richard Crane)을 만났다.

1905년 1월 미국으로 아주 이주하여 1910년까지 있는다. 초상화작업 및 강습으로 생활했다. <인물 장식집>을 출판했다.

1906년 베르나르의 미국 순회공연에 따라 <동백꽃 여인 / 미국 순회공연> 포스터를 그렸다. 뉴욕, 필라델피아, 시카고, 보스턴에서 순회전을 개최했다. 미술학도 마리 히틸로바(Marie Chytilova, 1882-1959)를 만나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의 매니저이자 딜러로 활동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중 아들 이르지(Jiří, 1915-1991)는 번역가 겸 작가로 아버지에 대한 전기를 썼으며, 딸 야로슬라바(Jaroslava, 1909-1986)는 화가로 활동하면서 부친의 작품을 복원한다. 이렇게 복원된 작품 중 대표적인 것은 슬라브 서사시. 두 아이들은 무하의 작품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1908년, 10월 뉴욕 내 독일 극장의 디자인을 제작했다. 보스턴 필하모니 콘서트에서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교향시 볼타바(Vltava)에 감명을 받고 고향에 돌아가 슬라브 민족의 위상, 역사, 문화에 집중하기로 한다.

1909년, 찰스 크레인으로부터 <슬라브 서사시> 후원을 약속받는다. 민족 역사의 기록화/역사화/서사시로, 1900 파리 박람회 때 그리고자 했으나 오스트리아 정부가 너무 민족주의적이고 우울하다고 거부했던 구상이었다. <조국의 역사에 선 슬라브인들> <불가리아 황제 시메온> <얀 후스의 설교> <그룬반트 전투가 끝난 후> <고향을 떠나는 얀 코멘스키> <러시아의 농노해방령> 등. 이 슬라브 서사시는 잘 알려진 섬세하고 화려하기만 한 화풍과는 좀 거리가 있는 편. 장엄하고 화려한 그림도 속해있지만 의외로 죽음이나 슬라브 역사의 음울한 묘사도 상당하다.

2.7. 프라하에서의 민족주의

1910년, 고국 체코로 돌아와 제롬 콜로레도 만스펠트 백작(Count Jerome Coloredo-Mansfeld)의 즈비로흐(Zbiroh) 성의 크리스탈 방에 집과 작업실을 마련했다.

1911년, 프라하 시립회관 시장홀 장식을 완성했다. 무하가 감각적이고 상업적인 석판화를 버리고 민족주의적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아르누보 화풍의 유행 자체가 20년만에(1890~1910) 끝나버렸다.

1912년, <국립연합 복권> 포스터 - 새 정부가 슬라브 민족을 위한 교육을 할 수 있도록 기금 활동을 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어 독립된 체코슬로바키아가 형성되었다. 이 새 정부를 위한 관제적 양식, 즉 우표, 은행권, 문서 등을 디자인했다.

1919년 4월 27일, 프라하의 클레멘티눔(Klementinum)에서 <슬라브 서사시> 연작 11점을 전시했다.

1920년, 미국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에서 <슬라브 서사시> 전시회를 개최했다.

1921년, 미국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슬라브 서사시> 전시회를 개최했다.

1922년, 프리메이슨 체코지부 총본부장이던 알폰스 무하가 로잔에서 열린 회의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의회 설립에 큰 역할을 한다. 무하의 호칭은 '주권 대표(Soverign Great Commander)'가 되었다.

1923년, <황야의 여인>

1924년, 책 <프리메이슨>을 출판했다.

1926년, 제8차 소콜(Sokol) 회의에서 <볼타바 강(Vltava River)에서 슬라브 형제재단(Slavonic Brethren)>이란 축제연극을 기획했다.

1928년, 무하가 가족과 함께 프라하 Bubenec의 신축 공간으로 이주했다. <슬라브 서사시> 20연작을 프라하 샘플 박람회장에 전시했다.
파일:external/2.bp.blogspot.com/Mucha+-+Glass+Windows+St+Vitus+INTERNET.jpg
1931년, 체코 프라하 성 비타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1931년, 슬라브 정부의 요청으로 프라하 성 비타 대성당에 스테인드글라스를 그렸다. 일반적인 스테인드글라스가 조각난 색유리를 조합해 하나의 그림으로 구성하는 반면, 무하는 유리에 직접 그림을 그린 후 가공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1934년, <사랑, 이성, 그리고 지혜에 대해> 도서를 출판했다. 프라하 협회 홀라홀(Hlahol)을 위한 그림을 제작했다. 프랑스 정부에게 레지옹 도뇌르(Ordre National de la Légion d’honneur) 훈장을 받았다.

1936년, 파리 Jeu de Paume에서 무하와 Frantisek Kupka의 공동 회고전을 열었다. 무하는 삶과 작품에 대한 3가지 연설을 개인 인쇄물로 자체 출판했다.

1939년 3월, 나치 독일 체코를 점령했다. 알폰스 무하의 애국심/민족주의는 독일 정부가 그를 '적/불온인물'으로 간주한 명부에 올릴 정도였기에, 게슈타포는 몇 번이나 고령에 다다른 무하를 검거해 심문을 가했다. 이로 인해 그는 폐렴에 걸려 7월 14일 사망하고, 비셰그라드의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나치는 무하의 장례식에 사람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그럼에도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3. 사후

3.1. 1940~1950년대, 탄압

그의 <슬라브 서사시> 등의 작품들은 나치 제2차 세계 대전을 피해 모라비아의 작은 성에 피신해 있었다.

세계대전 이후엔 모더니즘이 세를 얻고 체코가 소련 치하에 놓이며 감각주의, 상업주의로 매도되기도 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체코 당국이 무하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몰랐던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무하의 유가족에게서 작품을 압수하기 위해 일부러 트집을 잡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체코 당국은 무하의 작품을 압수하고자 여러 차례 시도했고, 무하의 유가족은 작품을 지켜내기 위해 힘든 싸움을 벌여야 했다.

3.2. 1960~1990년대, 재평가

1960년대 이후 무하의 작품이 재평가를 받기 시작해 명성을 되찾았다. 현대미술에 끼친 지대한 영향 탓에, 현대 일러스트레이션의 시조로 여겨진다. [5] 도리어 현대에는 일반인에게는 거부감이 심한 현대미술(추상, 행위예술 등)과 달리 취향을 덜 타는 편이라 인기가 좋다. 특히 기호화된 자연물과 인물의 형태는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자포네스크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아서 탄생한 아르누보의 거장 무하의 화풍은 후에 일본의 망가 화풍, 특히 미소녀 그림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과거 뿐만 아니라 현대의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도 무하 특유의 화풍을 모방하거나 오마주하는 경우가 많다.[6] 덕분에 아르누보의 유행기간은 짧았지만,[7] 현재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 사이에선 여전히 이 아르누보가 알게 모르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아담 휴즈, 야마다 아키히로, 아소 미코토, 이즈부치 유타카 등이 있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CLAMP 로도스도 전기,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 일러스트, 일본 애니 전영소녀 오프닝과 비디오 자켓 그림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꽃과 도안,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과 옷자락에 둘러싸인 미소녀 캐릭터의 일러스트와 알폰스 무하의 그림을 비교하면 유사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순정만화에도 영향을 많이 끼쳐서, 주로 인물이 꽃이나 화려한 장식 배경과 함께 나오는 장면을 잘 보면, 무하의 장식미를 강조하던 화풍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즈부치 유타카는 한국 강연 중에 "아르누보와 무하에 영향받은 나의 일러스트는 파쿠리"라는 너스레를 떨기도 하였다. 이런 관계는 현대에도 찾아볼 수 있는데, 서구는 일본의 망가 화풍을 받아들인 만화, 반대로 일본은 서구의 카툰 화풍을 받아들인 만화가 제작되기도 한다.[8]

해당 작품이 연소자 관람 불가인데다 너무 오래 된 작품이라 국내에 알려져 있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의 시조인 데즈카 오사무 무시 프로덕션에서 내놓은 1970년대 초 극장판 애니 시리즈인 아니메라마 3편도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았다.

3.3. 2000~2020년대, 재인기

2006년, 일본 애니메이션 디그레이맨의 한 장면으로 파리-모나코까지 여행을 홍보하는 모나코 몬테 카를로 철도 포스터이다. 디그레이맨의 작중 배경과 등장인물이 기차를 타고 다니는 걸 생각해보면, 비록 가상 19세기이지만 알폰스 무하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시기가 된다.
파일:dg macha.png
파일:external/www.dana-mad.ru/alfons%20mucha_selected_monaco%20-%20monte-carlo.jpg
D.Gray-man 1기 오프닝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 삽화 / 원본 삽화

2012년, 그의 역작이었으나 한동안 잊혀졌던 <슬라브 서사시> 역시 프라하 박물관에 전시되며 재발굴되었다. #

2013년, 대한민국의 전시회에 알폰스 무하의 손자 존 무하가 내한했다. #

2016년, 일본 애니메이션 죠죠의 기묘한 모험 TVA 4부에서 츠지 아야 편(20화)에서는 중간중간 알폰스 무하의 화풍을 오마쥬한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츠지 아야가 들고다니는 아르누보풍. 그중에서도 무하의 화풍으로 신데렐라 동화책 같은 느낌을 내기 위한 연출인 것으로 추측된다.
파일:츠지 아야 동화.jpg
죠죠의 기묘한 모험 TVA 4부에 등장한 삽화

2016년 12월, 대한민국의 전시회에 존 무하와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 이즈부치 유타카의 특강이 있었다. 해당 전시회에 알폰스 무하의 영향을 받은 작가의 작품도 전시했으며, 임주연, 고야성, 추혜연[9], CLAMP, 이즈부치 유타카가 참가했다.

2019년 11월, '알폰스 무하 展', 아름다운 이들을 위한 찬사(카이스트 신문)

2020년 3월, 알폰스 무하, 사람들의 외로움을 어루만지다(아트인사이트)

2021년 11월, 부와 이상을 모두 성취한 성실한 예술가, 무하(한겨레)

2021년 12월, 알폰스 무하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연합뉴스)

4. 여담

예술의 소재로서 여성을 좋아한 것과는 별개로, 성적인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다. 여자관계로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많은 남성 화가들과 다른 점. 말년에 민족 예술가로 활동하다 나치에 찍힌 시기를 빼면 풍족한 삶을 영위했으며, 20세기 유럽 남성 수명을 한참 넘긴 79세에 사망했다. 요약하면 재능이 탁월하며 금전운이 따르고, 인간관계도 원만했으며,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삶을 살았던 셈. 상업예술과 민족예술이라는 2가지 분야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드문 인물이기도 하다.

무하는 사교적인 성향이라 모임에 자주 얼굴을 내밀었고, 친구가 많았다. 또한 성격이 무른 편이어서, 누가 돈 빌려달라고 찾아오면 호구처럼 다 내줄 때가 잦았다고 한다. 좋아하는 예술가에겐 지원도 아낌 없이 해주었다. 그가 가장 좋아한 친구는 그보다 12살 많은 폴 고갱이었다. 둘 다 돈 없고 미래가 불투명하던 시절 파리에서 만났으며, 고갱이 무하의 아틀리에에서 장기간 숙식한 적도 있다.


[1] 하술하듯 알폰스 무하의 아버지 온드레이 무하는 첫 결혼에서 3명, 두번째 결혼에서 3명으로 총 6명의 자식을 보았으며, 전원 'a'로 시작하는 이름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알폰스 무하는 두 이복누나 알로이시아와 안토니아 외에도 이복형 또는 누나가 한명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자료가 없다. [2] 관리자 Randy Schoenberg, " Marie Mucha (Chytil)", geni.com [3]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신비주의가이기도 했고, 모라비아 민족 정체성을 매우 중요시 여기기도 해서 민족 신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4] 19세기를 풍미했던 대배우로, 연기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시의 사회적 공헌으로도 유명하다. 햄릿 연기로 '여신 사라'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사고로 인해 다리를 자르게 된 후에도 극작가들이 그녀를 위한 각본을 제작해 주었다. [5] 심할 경우 현대의 모든 일러스트레이터들은 무하의 파쿠리라는 평가까지 있다. [6] 일단 무하를 비롯한 아르누보 계열 작품의 특징이 딱 봐도 화려하고 아름다워서 이목을 끌기 쉽기 때문. 즉 대중이 접근하기에 진입장벽이 낮다. [7] 20년쯤 된다. [8] 이는 일본 망가체의 영향을 짙게 받은 한국/중국의 만화나 일러스트도 마찬가지다. 극화 > 모에 > 세미체로 일러계의 흐름이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 [9] 웹툰 창백한 말의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