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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4:14:40

안녹산의 난


당나라 실패한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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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755년
2.1. 안녹산 거병2.2. 당나라의 대응2.3. 봉상청의 필사적인 방어와 실패 - 낙양 함락2.4. 의병 봉기: 안고경과 안진경
3. 756년
3.1. 전반기: 당의 반격
3.1.1. 안녹산, 칭제 : 의 건국3.1.2. 하북의 전황 - 곽자의 이광필의 활약3.1.3. 낙양, 하남의 전황
3.2. 후반기
3.2.1. 평정의 기회를 놓치다 - 동관 함락3.2.2. 당숙종, 영무에서 즉위하다3.2.3. 장안을 점령한 반군 - 반란의 전성기3.2.4. 당의 반격 대전략 수립.
4. 757년
4.1. 전반기(I) 안녹산의 죽음, 연의 공세에 대한 당의 방어
4.1.1. 안녹산의 죽음4.1.2. 하동: 최대 격전지4.1.3. 하남: 수양, 남양의 방어4.1.4. 평로군진의 당으로의 귀부
4.2. 전반기(II): 당의 군대 재건, 대반격의 전초전
4.2.1. 영무: 군대의 재건4.2.2. 봉상: 대전략의 수정4.2.3. 전초전
4.3. 후반기: 당의 반격.
4.3.1. 당군, 봉천을 나서다4.3.2. 양경 탈환전(I) : 항적사 전투 - 장안의 탈환.4.3.3. 양경 탈환전(II) : 신점 전투. - 낙양의 탈환.4.3.4. 수양성 함락4.3.5. 하남, 하동의 평정4.3.6. 사사명의 귀부4.3.7. 안록산의 난 전후 처리
5. 영왕 이린의 난과 진압(756년 ~ 757년)6. 758년
6.1. 정부 재정비6.2. 사사명의 재봉기와 하북 토평 시도
7.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external/i269.photobucket.com/-01.jpg


당나라 제6대 황제인 현종 천보 연간에 벌어진 안사의 난 안녹산이 일으킨 반란이다. 이후 사사명의 난으로 이어졌다. 안녹산의 난이 먼저 일어났고, 양란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 보니 두 반란을 합친 안사의 난 자체를 안녹산의 난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2. 755년

2.1. 안녹산 거병

천보 14(년)[1](755) 11월 10일 범양( 베이징)에서 거병한 범양절도사 안녹산은 본거지에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150,000명의 대병력에 투항한 거란족 해족의 기병 8,000여 명을 선봉에 내세워 남하를 시작했다. 안녹산의 휘하 부장이었던 평로병마사 사사명 및 최건우, 채희덕, 안사의, 하천년, 이일월 등 군사[2]급 부장들 다수도 동조했다. 안녹산은
간신 양국충을 토벌하자

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거병했다.

사실 안녹산의 거병 시기 자체는 그렇게 영 좋지 않았다. 추운 겨울, 그것도 엄동설한이 시작되는 시점에 머나먼 동북방 범양에서 군대를 일으킨 것도 문제였지만 일단 안녹산의 아들 안경종 태복경에 임명되어 수도 장안에 체류 중이라서 반란이 발생하면 처형될 것은 너무 뻔했다. 게다가 자신이 거병한 곳에서 장안까지의 거리가 상당했기 때문에 중간에 경유해야 할 곳의 지휘관을 포섭하는 절차가 필요했는데 이것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킬 뜻은 있었으나 그 규모가 ' 멸망과 안록산 왕조로의 대체'가 아니라 진짜로 양국충을 몰아내고 자기가 정권을 잡는 정도에 불과했으며, 양국충의 정치 공세에 더 이상 현직을 유지할 수 없었기에 황급히 반란을 결행한 최후의 발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3]

그러나 안녹산은 천보 13재(754)부터 사병의 확충과 기존 군진 병력들의 환심을 사는 정책을 벌이며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했다고 볼 여지도 많다. 실제로 천보 13재(754) 정월, 안녹산이 입조했을 때 그는 한구/군목등사+지총감사를 겸해, 전마와 다른 여러 마필의 확보에 분주했었으며, 2월에는 부하들에 대한 대규모 훈격을 허락해 줄 것을 허락받아 2,500여 명에 달하는 부하들에게 이를 베풀어 군심을 사기도 했다. 천보 14재(755) 2월에는 진내의 한장 32명을 번장으로 대체하겠다는, 무척이나 속보이는 요청을 하기도 했으며, 7월엔 말 3,000필, 번장 22명과 병사 6,000여 명을 경내로 보내 호종하겠다고 하기도 했다. 이런 주장을 한 것은 반란을 일으킬 때 길 안내 및 당나라 내부의 혼란을 유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당현종이나 양국충도 이런 의도를 눈치챘다고 한다. 이런 기록들로 볼 때 안녹산의 거병은 확실히 준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실수를 왜 저질렀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후술하겠지만 전략적 식견이 부족하고 안목이 영 좋지 않았으므로 준비를 허술하게 한 것이었다.

거병 직후 평원 태수 안진경(항복하지 않고 저항의사를 보였으나 서생으로 여기고 무시해 버렸다.), 상산 태수 안고경(위장 항복 이후 반란을 계획했다.) 등을 제외한 하북 전 지역이 일시에 항복했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어이없게도 양국충 토벌의 명분이 주변 관리들에게 먹힌 데다가, 현종의 밀명을 참칭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도 당현종 친위 쿠데타를 통해 양국충을 제거한다고 착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안녹산군은 정부군을 자처하면서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급히 장안으로 향하는 모습만 보여주었다.

덕분에 순식간에 광활한 하북을 획득한 안녹산군은 12월 2일, 황하를 건너 영창, 박릉, 상산, 진류, 형양 등 중원 일대를 휩쓸며 동도 낙양으로 전진했다.

안녹산은 극히 소수의 병력을 점령지에 남기고 주력부대를 지휘, 낙양으로 접근했으며, 동시에 대동군사 고수암이 이끄는 일부 병력으로 길을 열고. 신임하는 부장인 사사명이 지휘하는 강력한 별동대로 태원을 노렸다.

이를 볼 때 안녹산의 전략상 목표는 단기간에 동경(낙양), 북경(태원)을 장악하고 이 길을 통해 최종 목표인 수도 서경(장안)을 함락하여, 당나라의 수도 및 준수도급 위상을 지닌 세 도시를 조기에 제압함과 동시에 황제를 사로잡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제국은 건국 초부터 이 세 도시 및 인근 지역에 3부, 즉 '경조부(장안), 하남부(낙양), 태원부(태원)'를 설치해 단순히 장안을 둘러싼 관중뿐만 아니라 이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수도권으로 삼고 중시했으며, 따라서 당제국에 대한 어떤 반란 세력도 이 세 지역을 무시할 수 없었다. 장안과 낙양은 , 당이 이 두 도시를 오가며 천도를 거듭할 정도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대도시였으며, 태원은 당왕조의 발상지이자 대 돌궐(쾩튀르크) 전선의 사령부로서 다수의 군대와 관문이 위치한 매우 중요한 군사도시였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말했듯이 현종이나 양국충이 신속하게 반응하기 전에, 그리고 장안에 있는 아들 안경종이 처형당하기 전에 구해내려고 한 목적도 있었으므로 진격 속도가 신속했다.

2.2. 당나라의 대응

안녹산의 거병 소식을 들은 당 조정은 처음에는 이를 믿지 못했고, 반란이 확인된 직후에도 처음에는 '안녹산이 미친 것이기 때문에 수하들에 의해 금방 처리될 것'으로 여겼다. 이는 무시무시한 정치력을 통해 조정 내 세력 뿐만 아니라 절도사들도 완벽하게 통제하던 이임보 집권 기간의 타성에 젖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1월 15일, 결국 당현종을 필두로 한 당 조정은 반란이 일어난 현실을 깨달았다.

부병제 원활하게 작동하던 시절, 수도 장안의 숙위 병력은 120,000명에 달했다. 그러나 부병제의 마지막 변통 시도였던 '착기'가 북아금군인 '우림군'에 흡수되면서 최종적으로 부병제가 붕괴한 안녹산의 반란 당시 장안을 지키는 병력은 약 4~50,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관중 주변의 번진들은 기본적으로 맡은 임무가 있는데다 양국충의 남조 원정에 동원되었다가 심각한 피해를 입기까지 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바로 끌어올 수 있는 예비 병력도 부족했다. 부병제 붕괴와 그에 대응한 군제개혁 과정에서 군사권의 중앙집권화 원칙이 깨어진 것이며 그로 인해 안사의 난이 일어난 것이었다.

부병제의 붕괴 이후, 후방의 치안을 담당하며 유사시 예비군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단결병'이 있었는데, 이는 각지의 자경대에 가까운 것으로 어떤 지역에서든 일정 수준의 질을 보장하던 부병들과는 달리 지역에 따라 질이 천차만별이었다.

당 조정은 일단 방어전에 들어갔다. 특히 중점을 둔 곳은 장안과 동관, 낙양을 잇는 길목으로, 안녹산의 주력군이 쳐들어올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이었다. 때마침 안서절도사 봉상청이 11월 16일에 장안으로 와서 조현했는데, 당현종은 그를 명목상의 범양 및 평로절도사로 삼고 낙양으로 보내 병력을 소집하여, 방어할 것을 명령했다. 봉상청은 10일 만에 낙양에서 60,000여 명을 모집하고 하양교를 끊어 방어전에 돌입했다. 또한 최초의 본격적인 내지절도사직인 하남절도사직을 설치하고, 장개연을 임명하여 진류 방면으로 파견했다.

또한 당 조정은 황실 물자를 모두 꺼내어 이를 가지고 '천무군'이라는 즉응군을 모집, 10일만에 장안 일대에서 11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모았다. 이는 기존의 중앙군인 '비기', '착기'에다가 저자거리에서 급히 초모한 병력을 합친 것이었으나, 중앙군 체제는 벌써 붕괴해 버렸고, 길가에서 초모한 병사들의 전투력은 영 기대할 것이 못되었다.

어쨌든 이 중 50,000여 명을 낙양의 뒤를 받치는 지원군으로 편성하고, 영왕 이완[4] 총사령관으로, 우금오대장군 고선지 부사령관으로, 환관 변영성을 정치장교 감군으로 삼아 동쪽으로 파견했다. 여기까지는 정상적인 조치로 볼 수 있는 것이, 실질적인 지휘관은 명목상 부지휘관으로 삼고, 황제의 아들이나 황족들을 지휘관으로 삼아 정당성을 제공하는 사례는 역사적으로 동•서양 할 것 없이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변영성 또한 고선지의 서역 정벌 때 동행했으며 고선지를 옹호하는 장계를 올려 그를 구원한 적도 있었으니 일단 어울리는 인선으로 보였다.

사사명의 별동대가 쳐내려오는 태원 방면으로는 안녹산의 일족[5]이었던 삭방절도사 안사순 호부 상서로, 그 동생 안원정을 태복경으로 삼아 장안으로 불러들였다. 이들은 안녹산의 반란 음모를 밀고하여 목숨을 건졌지만 역적 친척이라 연좌제로 의심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전의 태복경은 위에서도 언급한 안녹산의 아들 안경종이라 이미 처형한 상태였다. 대신 삭방우상병마사이자 구원태수였던 곽자의에게 삭방절도사로 임명함과 동시에 제3의 수도인 태원의 방어를 맡겼다. 또한 금오장군 정천리를 하동으로 보내 병력을 모집하도록 했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볼 때 당군의 방어대책은 일단 낙양과 태원을 지켜내고 이후 병력을 모아 반격을 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긴급한 방어대책을 세운 당 조정은 12월 7일, 당현종 자신이 직접 친정할 것을 선언하고 삭방, 하서, 농우의 주력 병력은 행영(황제가 위치한 군영)으로 보내고 잔존 병력은 '남아서 성루를 지키도록' 했는데, 이는 반란의 규모를 지나치게 작게 평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을 받기도 하며, 봉상청이 사망하면서도 조정에 올린 장계를 보면 실제로 그런 듯 하다. 그러나 당현종의 친정 선언은 얼마 못 가 취소되었다.

2.3. 봉상청의 필사적인 방어와 실패 - 낙양 함락

당의 대응으로 파견된 사령관 중 가장 먼저 안녹산군 본대와 맞닥뜨린 것은 하남절도사 장개연이었는데, 치소인 진류에 도착했지만 방금 급조된 자리인 데다가 중국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진류에 기존 병력이랄 것도 거의 없었으니 불과 며칠 만에 안녹산 본대의 공격을 받고 사로잡혀 참살당했다.

하지만 장개연의 죽음은 무의미하지 않았는데, 전투 과정에서 장개연에게 협력한 진류성의 주민이 안녹산에게 모두 학살당하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안녹산군이 누려왔던 양국충 타도라든가, 황제의 밀명이라든지 하는 명분이 일거에 싹 사라진 것은 물론 안녹산군의 잔인한 면모가 그대로 드러난 탓에 일반 백성들이 안녹산군을 적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안녹산군은 제대로 된 저항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빡대가리짓을 하는 사람을 예전에도 본 것 같은데...

이후 낙양 방면에서 최전방에 나선 봉상청은 말 그대로 필사적인 방어전을 시도했다. 무뢰에서 저지를 시도했으나 참패했고, 잔존 병력을 재편해 규원에서 다시 방어전을 펼쳤지만 또 패배했다. 그후 낙양성 상동문 안에서 시가전을 벌였지만 다시 패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상청은 낙양성 안에 설치되어 있었던 도정역에서 다시 시가전을 시도했으나 또 패배했고, 선안문에서 다시 한번 방어선을 펼쳐 보려 했으나 역시나 패배 근성이다. 한 후 간신히 남은 병력을 모아 섬군으로 가 고선지와 합류했다.

10일만에 되는대로 긁어모은 60,000여 명의 병력으로 150,000명에 달하는 정예군단을 상대로 몇 번씩이나 방어전을 시도하고, 격파된 병력을 다시 모아 방어선을 치니 이걸 근성이라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흩어진 병력을 다시 모으는 것이 극히 어려운 일이란 점을 생각하면 봉상청의 통솔력은 확실히 우수한 편이란 평가는 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안사의 난 한 달 만에 낙양이 함락되자[6] 섬군을 지키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여긴 봉상청과 고선지는 동관으로 철수했고 동관을 요새화, 방어태세를 정비한다. 직후 안녹산군이 접근했지만 간신히 방어한다.

이후 안녹산은 최건우를 선봉으로 내세워 섬군에 배치, 동관 공략을 노리는데 임여, 홍농, 제음, 복양, 운중군이 안녹산의 기세에 놀라 항복했다. 그러나 안녹산이 칭제를 위해 낙양에서 움직이지 않자 장안의 당 조정은 병사들을 좀 더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당 조정은 엄청난 실책을 저지른다. 봉상청이 세 번이나 올린 표는 보지 않고 감군 변영성이 올린 패전보고만을 받아봤으며, 변영성이 고선지에 대해 원한을 품고 올린 "봉상청은 적을 이용하여 병사들을 흔들었고, 고선지는 섬군 땅 수백 리를 버렸으며, 또 줄어든 군사들의 식량으로 내린 것을 도둑질했습니다"라고 참소(간단히 요약하자면 '물러난 게 죄'라는 내용)한 것을 보고는 둘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

이러한 당의 행동은 당시부터 현재까지 전형적인 뻘짓으로 평가받는다. 봉상청은 이때에 죽으면서도 안녹산의 형세가 위협적이란 것을 알리는 표문을 올렸고, 고선지가 죽을 때에는 자신의 휘하 병사들에게 "내 죽음이 정당하지 않으면 '억울하다'라고 외쳐달라."라고 말하자 이에 병사들이 "억울하다! 억울하다!"라고 외친 소리에 땅이 흔들릴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로써 한때 서역을 정벌한 당의 일대명장 고선지와 부장 봉상청은 억울하게 처형되었다.

어쨌든 동관을 지키던 당에 충성스러운 두 장군이 죽은 공백을 메꾸어야 했는데, 때마침 두 개 절도사를 겸직하던 가서한이 병이 들어 집에 돌아와 있는 것을 불러 병마부원수로 제수하고 충원병력 8만을 이끌고 동관으로 보낸다. 가서한이 대 토번, 대돌궐 전역에서 명성이 자자한 당 최고의 숙장이었고, 이민족 출신 중에서 안녹산과 사이가 매우 나쁘다는 사적인 이유까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때 당이 동관에 배치한 20만 병력을 지휘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가서한은 전량구를 어사중승으로, 소흔을 판관으로, 화발귀인[7] 등으로 하여금 자신의 부족 병력을 거느리고 따르게 해 동관에서 고선지가 이끌던 병력과 합류, 그 한심한 꼬라지의~~ 20만 대군을 눈으로 확인한 다음 안녹산 본대에 대한 방어전에 들어간다.

전황이 당에게 유리하게 넘어간 것은 태원 방면부터였다. 안녹산은 낙양까지는 쉽게 점령할 수 있을지 모르나 동관 돌파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예상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태원부를 장악하고 장안으로 가는 다른 길을 뚫는 것을 상당히 중시했다. 자신의 오른팔로 신임하던 사사명에게 본대병력이라 할 수 있는 군진을 맡겨서 태원으로 보낸 것을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에 구당서에 따르면 안녹산은 자신의 주 기반 중 한곳인 하동지역을 맡겼던 대동군사 고수암으로 하여금 하곡 일대까지 진출시켰는데, 이는 범양에서 전진해 오기 때문에 시간도 오래 걸리고 피로도 더할 사사명 부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대응한 것이 막 삭방절도사직에 오른 곽자의였다. 진무군까지 전진한 고수암군을 대파한 곽자의는 내친김에 정변군까지 진격했으며, 대동병마사 설충의가 정변군으로 공격해 들어오자 이를 다시 한번 격파해 7천여 명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이 전투에서부터 이후 시대의 주요 인물들로 거론되는 여러 장군들의 이름[8]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에 곽자의는 하동진으로 진격, 운중( 대동)을 포위함과 동시에 공손경암이 이끄는 별동대를 보내 마읍( 삭주)을 함락했으며, 태행 8형 중 다소 북쪽에 쏠려 있던 동형관을 장악한다. 곽자의는 이 전공으로 어사대부직을 받으며, 이후 혼란기 당의 최고의 위상을 가진 장군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곽자의의 이러한 진격은 안녹산의 주요 기반 중 하나였던 하동진을 당이 대부분 회복했음을 뜻하며, 안녹산의 다른 본거지인 범양, 평로진까지 의 위협에 직면함을 뜻한다.

안녹산은 낙양을 함락한 다음 장통오를 수양태수, 양조종을 진류장사로 임명하고 호족 기병 1천여를 편성해 동쪽으로 보내는데, 동평태수 사오왕 이지, 제남태수 이수가 이를 막고 장통오를 처형한다.[9]

2.4. 의병 봉기: 안고경과 안진경

안사의 난 초기 하북 일대의 당 관리들은 안녹산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복종했었다. 그러나 곧 이 지역에서도 안녹산에게 반하는 봉기가 일어난다. 이를 이끈 것은 안고경과 안진경이었다.

처음으로 반 안녹산 봉기를 주도한 것은 안진경이었다. 안진경은 이 당시 평원태수로 있었는데 안녹산의 반란을 일찍부터 눈치채고 평원의 방어태세를 공고히 하고 있었으며,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평원과 그 근처의 박평의 병사(단련병) 7천여를 모아서 의병을 일으킨다. 이때에 당현종은 "24군 가운데 한사람의 의사도 없었단 말인가!" 하고 탄식하고 있었으나 이 소식이 전해지자 "짐은 안진경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하였는데, 어찌 이같이 할 수 있는가!" 하고 기뻐했다고 한다.

안진경이 저항의사를 밝히자 열흘만에 1만여의 의병이 모였으며 이에 용기를 낸 친당파 세력들이 결집해 안녹산이 각 지방에 파견한 관리를 제거하고 안진경을 맹주로 삼아 봉기한다. 이에 안녹산은 장헌성으로 하여금 상곡, 박릉, 상산, 조군, 문안 일대의 단결병(자경대)들을 거느리게 해 이들을 제압하려 시도, 또한 사사명의 별동대도 태원으로 나아가기 이전에 이 지역 평정에 힘을 나누어야 할 상황에 처한다.

여기에다 안진경의 사촌형이자 일시적으로 항복했던 상산태수 안고경이 하북의 17개군의 호응을 받아 반기를 들고 정형관까지 장악하자 안녹산의 전략은 시작하자마자 실패의 위기에 직면한다.

안고경의 거병은 안녹산-사사명이 반란 초기 직면한 반란군측 최대의 위협이었는데, 이는 안고경이 정형관을 장악해 태원으로 가는 길을 끊었을 뿐만 아니라 안녹산 최대의 근거지인 범양진을 담당하던 범양절도부사 가순과 접촉해 안녹산에게 반기를 들게 하려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원윤 왕승엽이 장통유의 참소를 듣고 안고경을 지원하지 않은 사이에 사사명의 군대가 들이닥쳤고, 안고경은 필사적으로 방어하면서 왕승엽에게 지원을 청했지만 결국 왕승엽의 외면으로 인해 상산이 함락되고 포로로 사로잡힌다. 이후 사사명은 그를 낙양으로 보냈고 안녹산은 그를 기둥에 묶고는 능지형을 실시해 죽여버렸다. 이때에 그의 일족 중 죽은 자가 3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후 그와 행동을 같이했던 하북 17개군은 다시 사사명에게 항복했고 요양태수 노전성만이 유일하게 저항을 계속했다. 사사명은 요양을 포위공격했고 이에 하간사법 이환이 7천여 명을, 경성장사 이위가 8천여 명으로 구원군을 편성, 파견하지만 사사명에 의해 격파당해 요양 구원엔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안고경의 거병은 그것이 사사명에게 제압된 후에도 큰 영향을 끼쳐 동형관의 상실을 가져왔고 곽자의에 의해 제압된 정형관까지 합쳐 태행 8형(태원을 지키는 8개의 요새지. 태행산을 둘러싸는 형태로 있다 하여 '태행 8형')을 모두 장악하고 사사명의 진격로를 막아선다. 이는 안녹산의 기본 전략인 낙양, 태원의 두갈래 길을 통해 장안으로 진격의 한쪽 축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3. 756년

3.1. 전반기: 당의 반격

3.1.1. 안녹산, 칭제 : 의 건국

756년 1월 1일, 안녹산은 낙양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대연황제라고 스스로를 칭했으며 연호를 성무라고 고치고 달해순을 시중으로, 장통유를 중서령으로, 고상과 엄장을 중서시랑으로 삼았다.

3.1.2. 하북의 전황 - 곽자의 이광필의 활약

756년 전반기에 전세가 급변한 것은 산서, 하북 일대였다.

상산이 함락되고 의병을 일으켰던 안고경이 1월 8일에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후, 다음 날인 1월 9일에 당 조정은 곽자의로 하여금 운중의 포위를 풀고 삭방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병력을 모아 하북- 하남으로 진출할 것을 명한다. 이러한 명령의 의도는 명확했다. 즉 당현종을 필두로 하는 당 조정은 안녹산의 근거지인 범양을 공략하는 것보다는 낙양을 탈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 또한 장수 한명을 뽑아 동쪽에서 서진해오는 사사명의 공세를 정형에서 저지하고 오히려 치고 나가서 하북 또한 평정할 것을 명한다.

하지만 이 임무를 혼자서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곽자의는 별동대를 이끌 인물로 이광필을 천거한다. 이광필은 작년에 사실상 평정하다시피 한 하동진을 맡아 하동절도사[11]로 임명되었다. 이후 2월, 두 장군은 군을 움직인다.

먼저 움직인 것은 이광필이었다. 요양 구원을 위해 보병, 기병 1만여 명과 태원의 노병 3천여 명을 이끌고 정형을 출발한 이광필군은 상산의 항복을 받고 단련병 3천여 명을 받아들인다. 이에 한 달여를 요양 공략에 투입했던 사사명은 기병 2만여 명, 보병 5천여 명을 움직였고, 요양과 상산이 200리가 채 안되는 거리라는 점을 이용해서 하루 만에 기병이 먼저 상산에 도착한다. 이에 이광필은 성 밖으로 보병 5천여 명을 내세우고 성 위에 노수를 늘여세워 전투를 벌여 상산 외곽으로 사사명을 물러나게 한다.

이후 이광필 또한 휘하 병력을 성 밖으로 편성, 파견하여 상산 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 기록은 전투묘사가 나름 잘 나와있으며, 이시기 동양 전쟁사에서 보병의 대기병전술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자치통감을 인용한다.
이광필은 병사 5천을 내보내 길 남쪽에 창성을 만들고서 호타수를 끼고서 진을 첬는데, 적이 자주 기병을 가지고 맞부딪치며 싸워왔지만, 이광필의 병사는 그들을 쏘았고, 사람과 말 가운데 화살에 맞은 것이 절반을 넘자 이내 물러나 조금 쉬면서 보병이 오기를 기다렸다.

어떤 마을의 백성이 적의 보병 5천이 요양으로부터 오는데, 낮과 밤으로 배의 속도로 170리를 와서 구문 남쪽의 봉벽에 이르면 숨을 돌릴것이라 하였다. 이광필은 보병과 기병 각기 2천을 파견하여 깃발과 북을 숨기고 나란히 물속으로 가게 하여 봉벽에 이르렀는데, 적이 바야흐로 막 밤을 먹으므로 병사들을 풀어서 뜻하지 않은 사이에 쳐서 남김없이 살해하였다. 사사명이 이 소식을 듣고 대세를 잃자 물러나 구문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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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이광필은 이 승리로 인해 기존의 하동절도사직에 더해 범양장사, 하북절도사직에 오른다.

그러나 이러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사명군은 강력했고, 상산에서 사사명과 이광필은 40여 일간 대치에 들어간다. 이때 사사명은 상산으로의 보급로를 끊고, 이광필은 이에 대해 병력을 나누어 상산의 각 현들을 공략해 나가는 것으로 대응했다. 또한 이광필은 사사명의 보급선 절단에 대향하여 노수 1천여 명과 보급병들을 방진을 짜고 보급부대 호위에 투입했다고 한다.

2~3월에 걸처 이광필과 사사명이 상산 일대에서 대치하고 있는 동안 곽자의는 삭방에서 병력을 증강, 4월 이광필의 요청에 따라 병력을 출진시킨다. 상산에서 이광필군과 합류하자 호왈 10만을 바라볼 수준의 규모에 달했다. 그러나 삭방진은 평시 약 6만여 명을 보유했다.[12]

곽자의와 이광필은 이 병력을 이끌고 사사명이 지키던 구문성으로 진격, 성 남쪽에서 야전을 시도한 사사명을 대패시킨다. 이 전투를 구문 전투라고 한다. 이곳에서 당대종~ 당덕종 시기 당을 지켜낸 3대 명장 중 한명인 혼감의 이름이 처음으로 통감에 모습을 보인다. 반란 이전 사사명과 거의 동격 직위였던 이립선을 활로 쏘아 사살했다고 한다. 이어 두 장군은 사사명이 도주한 조군으로 진격, 하루 만에 이를 수복한다. 이후 상산으로 귀환하자 사사명은 다시 병력 수만여를 모아 도전해오나 곽자의는 사사명의 행보을 읽어 행당으로 유인하면서 사사명군을 피로하게 만들었고 이를 눈치챈 사사명이 철수하자 오히려 역공을 가해 사하에서 사사명군을 다시 패배시킨다. 이 전투가 사하 전투다.

이러한 하북에서 곽자의와 이광필의 활약은 안녹산에게 큰 위협이 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삭방-하동군이 하북을 평정하게 되면 안녹산은 본거지인 범양이 위태로울 뿐만 아니라 본거지와 낙양 사이의 교통로가 확실하게 끊기며, 또한 동관의 당군과 함께 안녹산군을 협공시킬 수 있었기 때문. 비록 안녹산이 이끈 병사들이 동북방의 정예병이라고는 하나 삭방군을 필두로 하는 당의 서북방 병력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정예병력이었기에 질적으로도 잘해야 대등한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에 안녹산은 사사명에게 지원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안녹산은 구문 전투에서 패한 후 낙양으로 도주한 최희덕에게 보병과 기병 2만여 명을 거느리고 사사명에게 파견했으며, 또한 범양을 지키던 우정개로 하여금 1만여 병력을 추가로 징발하여 사사명에게 파견한다. 굳이 낙양, 범양에서 병력을 편성한 이유는 그 병력들의 질 때문. 실제로 5월에 사사명이 이들 병력과 합류한 후 사사명군의 총병력은 5만여에 달했는데, 이 중 이민족인 동라와 예락하 출신이 1만에 달했다는 것으로 볼때 안녹산은 근처의 단결병들을 대충 긁어모아 숫자만 채운 병력보다는 질적으로 우수한 병력을 편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긴듯 하다. 이러한 병력을 편성한 후 사사명은 다시 삭방군에 도전한다.

곽자의와 이광필은 이 병력을 항양에서 맞이한다. 사사명군의 질적 수준, 그리고 기병이 주력이 되었던 사사명군[13]을 맞이해 곽자의는 야전축성을 통한 방어전으로 대응했고, 동시에 중소규모 병력으로 지속적으로 야습을 걸어 사사명군의 전력을 약화시킨 후 5월 29일, 가산에서 일전을 벌인다. 이 전투가 가산 전투다.

가산 전투는 곽자의-이광필군의 대승리였다. 5만여에 달했던 사사명군은 무려 4만에 달하는 전력을 손실했으며 사사명은 심지어 말에서 떨어져 맨발로 전장을 이탈해 밤중에야 간신히 본영으로 귀환했다고 한다. 이후 남은 전력을 모아 사사명은 박릉으로 도주, 곽자의와 이광필은 그 뒤를 쫓아가 박릉을 포위한다.

곽자의와 이광필이 사사명을 몰아붙이고, 안녹산이 동관 공략에 매진하는 사이 의병을 일으킨 안진경은 평원, 청하의 군진을 아우르고 병력을 모아 하북 일대의 안녹산 세력을 제압하기 시작한다. 안녹산이 파견한 태수인 원지태가 병력을 모아 저항했으나 당읍에서 벌어진 일전에서 패배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북해태수 하란진명 등이 안진경에게 합류하면서 안진경군은 그 규모가 더더욱 커져 하북의 대부분을 평정한다. 안진경은 의병을 일으킨 공로로 평원태수직에 더해 하북채방사직이 더해진다.

3.1.3. 낙양, 하남의 전황

낙양-동관 축선에서는 가서한이 동관의 지휘권을 인수한 직후 대치국면에 들어간다. 가서한군은 지속적으로 지원군을 받아 20만에 달하는 병력을 거느려 안녹산의 본대에 비해 숫적으로는 우세했으나 절반정도는 저자거리에서 쇼 미 더 머니 돈을 뿌려 징집한 병력이기에 질적으로는 문제가 많았고, 때문에 동관을 중심으로 방어전을 벌이면서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이때에 가서한은 풍질을 앓고 있는 상태라 휘하 장수들에게 대부분의 지휘권을 이양했다고 한다.

동관에서의 대치기간 동안 양국충은 이게 다 너 때문이다는 원망을 듣고 있어 인망이 극히 떨어진 상태였다. 거기다 안녹산이 '양국충 토벌'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웠기에 양국충만 죽여버리면 난이 평정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많아 양국충은 극히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14] 이에 두려움을 가진 양국충은 '동관 배후에 예비병력이 없어 불안하다' 핑계를 대면서 자신을 보위할 군대를 파상에 1만여, 장안에 3천여 병력을 따로 편성하지만 가서한이 이를 눈치채고 파상군을 동관에 흡수하면서 양국충의 위기감은 더더욱 심해진다. 이는 얼마안가 대참사를 불러온다.

그외에 당은 오왕 이지를 영창태수, 하남도지병마사로 삼아 안녹산 토벌을 명령하자 그는 가분이라는 장수에게 병력 2천여 명을 맡겨 옹구로 파견했으며, 진원현령인 장순 또한 하남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1천여 명을 이끌고 옹구로 가서 합류한다. 옹구[15]는 안녹산의 세력 측후방을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성이기에 곧 안녹산군의 집중공격을 받았고 가분은 곧 전사하나 장순이 지휘권을 인수해 오왕의 선봉사라 칭하며 옹구를 사수한다. 안녹산의 장수인 영호조가 3월에 4만여 병력을 이끌고 옹구를 60일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 이어 철수하는 안녹산군에 대해 장순은 오히려 역공을 가해 호족 병사 2천여 명을 사로잡는 성과를 거둔다. 이후로도 장순은 최대로 잡아도 3천 명을 넘기지 않는 소규모 병력으로 여러 차례 수성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해 당의 전쟁영웅으로써 안녹산군의 골칫거리가 된다.

3.2. 후반기

3.2.1. 평정의 기회를 놓치다 - 동관 함락

이때, 안녹산은 비록 하낙(河洛)에 있었지만, 그 군사들은 동에서 ·에 머물러 있었고, 남으로 을 넘지 아니하였다. 이광필·곽자의가 하삭(河朔)의 군사를 통솔하자 (안녹산은) 항과 정에서 연이어 패하였다. 만일 효와 함(동관)을 고수하고 병사들이 경거망동하지 않았다면, 훙역(兇逆)의 세력은 스스로 멸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서한이 출정을 한 지 며칠이 되지 않아, 황제는 도망치고 조정은 함몰하고 백관 관료는 목을 매달고 와 그 무리들은 죽임을 당하고 군대는 천하에 가득하고 독은 사해에 흐르니, 이 모두는 양국충이 부른 앙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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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 양국충전}}}
안녹산의 난은 한 달 만에 하북 전지역과 하남 상당수, 낙양까지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으나 채 6개월도 못 가 장악지역이 낙양 주변으로 축소되었다. 이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녹산 세력이 조기 진압될 것이라 희망했고, 안녹산은 반란을 일으킬 타이밍을 잘못 잡았다면서 애꿏은 수하들을 책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녹산이 위기감을 느끼는 만큼 양국충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반란 이전 양국충과 가서한의 관계는 그럭저럭 원활했다. 안녹산을 견제하기 위해 천보 14재(755)에 서평군왕[16]으로 추천한 것도 양국충이다.

하지만 가서한이 호부상서 안사순[17]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가서한은 살적평반을 위해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안사순이 안녹산의 당형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안녹산의 필체를 모방하여 안사순이 안녹산과 내통하고 있다고 무고한 뒤 안사순의 죄 7가지를 나열하면서 그의 주살을 청했고, 안사순은 그 동생 안원정과 함께 목숨을 잃은 뒤 그의 일족들은 영외로 이주당한다.[18] 이에 양국충은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한다. 아무리 감시목적으로 불러들였다고 해도 엄연한 조정의 대신인 안사순을 일족이라는 이유로 임의대로 처형할 수 있는 가서한의 힘을 실감했으며, 전란의 책임으로 따지면 양국충 자신보다 더한 인물도 없었기 때문.

일단 이 때의 가서한의 위치는 사실상 당 군부의 최고위직이었는데, 원래 반란 발발 이전부터 안녹산에 맞먹는 군부 내 최고의 위상을 가졌다. 당장 장안을 방위하며 안서, 북정 지역과 당 본토를 잇는 지역인 하서, 농우절도사직을 동시에 겸하고 있다는 것은(동원가능 전력 15만) 다른 절도사급에 비해서도 한 단계 위라 봐도 좋다. 안녹산과 라이벌의식을 가졌다고 볼 만한 기록도 많은 편이다. 덤으로 반란이 진행되면서 동격 절도사들이 대부분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거기다 양국충이 가서한의 지휘권을 벗어난 병력을 마련하려 시도했다가 그것마저도 가서한에게 빼앗기자(...) 양국충은 가서한의 급부상에 대해 두려워하게 된다.

거기다 가서한 주변 사람들이 양국충을 주살할 것을 가서한에게 건의하고[19], 실제로 양국충이 동관으로 납치되기도 하는 등[20] 양국충이 느끼는 생명의 위협은 갈수록 상승하게 된다.

결국 양국충은 당현종에게 말해 가서한으로 하여금 동관을 나가 안녹산을 공격하라는 최악의 명령을 내리게 한다. 이는 가서한의 지휘권을 견제함과 동시에 가서한의 드높은 위상을 깎아내고자 함아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문제는 이 발상이 전형적인 내 정치적 라이벌이랑 반란군이랑 치고박고 싸우다 둘다 죽어버리라는, 멍청한 발상이었다는 것.이런 막장이 윗대가리라고 떡하니 있으니 반란이 끝날 생각을 안 하는 것도 당연하다 더군다나 양국충에게 군사적 안목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으니 나름의 제대로된 계산조차 없이 나라의 흥망을 자기 정치생명을 위한 도박패로 던져버린 세계사에 길이 남을 트롤링이었다.

이때 동관을 거점으로 하는 가서한군의 질은 물론 작년(755년) 봉상청과 고선지가 지휘하던 병력에 비하면 질적으로 많이 향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가서한이 동관을 진수하면서 지원병으로 끌고간 8만여 병력에는 하서, 농우, 삭방번진의 병력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는 재물로 저자거리에서 급하게 초모한 기존 병력에 비하면 월등한 질을 갖춘 병력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어쨌든 20만에 육박하는 가서한군 병력의 절반 정도가 급하게 초모한 오합지졸인 것은 여전했으며, 안녹산군이 물론 하북에서의 전개로 인해 낙양 일대에서 고립된 상태였다고는 하나 범양, 평로, 하동번진의 정강한 군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서한군이 질적으로 안녹산군에 비해 많이 부족한 상태였다는 것은 딱히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서한은 물론 이점을 깨닫고 있어 '안녹산군이 약하게 보이는 그거 함정입니다' 하는 주문을 거듭 올렸고, 사사명군 완전 제압을 눈앞에 두고 있던 곽자의와 이광필 또한 '범양만 평정하면 안녹산군은 자중지란으로 붕괴될 것이니 함부로 동관을 나서면 안됩니다'는 건의를 올렸으나 양국충, 그리고 양국충에 의해 설득된 당현종이 거듭하여 가서한에게 진격명령을 내리자 가서한은 어쩔 수 없이 동관을 나섰다.

가서한군은 안녹산군의 지휘관인 최건우와 함곡관 서쪽 평원에서 조우했다. 가서한은 자신의 군대를 왕사례가 정예병력 5만여를 이끌고 전방에, 아직 질적으로 미숙한 병력은 방충 등이 지휘하여 후방에 전개하고 가서한 자신은 예비군 3만여를 이끄는 포진을 하는 등 부족한 부분을 최대한 메꾸려 노력했던 것으로 보이나 최건우는 숫적 우위를 바탕으로 몰아붙이는 가서한군의 진격을 좁은 지형을 활용한 복병으로 저지하고 동라의 정예 기병으로 하여금 질적으로 부족한 군사들이 위치해 있던 후방을 가격한다. 이에 후방의 군대가 붕괴되면서 앞서 나가던 정예병력까지 한꺼번에 전열이 붕괴되어 버렸고, 동관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병력은 단 8천이었다고 한다. 이후 간신히 돌아온 가서한은 후방의 관서역으로 물러나 흩어졌던 병사들을 다시 긁어모아 동관 방위에 나서려고 했으나 화발귀인이 고선지와 봉상청의 최후를 못 보았느냐며 가서한을 납치한 후 안녹산에게 같이 가서 항복한다.[21] 안녹산은 반란 이전 자신과 맞먹던 위상을 가진 인물인 가서한의 항복을 환영했던 듯 보이나, 가서한이 이광필, 오왕 이지, 노경을 회유하겠다면서 보낸 편지가 효과가 없었고, 특히 자신이 천거했던 노경에게는 욕까지 먹을 정도로(...) 경과가 안 좋자 그대로 낙양에 억류된다.[22]

동관의 함락은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으며 하동, 화음, 빙익, 상락의 방어사들이 이 소식을 듣고 대거 군을 이탈, 도주하기도 했다. 만약 이때 동관을 계속 지키고 있었다면 안녹산의 난은 아마 756년 중에 평정되었을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동관의 전투는 당 조정이 당한 최대 최악의 전략적 패배였다.

3.2.2. 당숙종, 영무에서 즉위하다

관중 방어군이 한큐에 풍비박살나버리고 가서한군의 패잔병들이 장안에 도착하면서 동관의 함락소식이 전해지자 당 조정은 두려움에 빠졌다. 이에 당현종은 으로 비밀리에 피신할 것을 계획하고 일단 장안 사수를 결의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미 동관 함락소식이 전해져서 대부분의 조정대신들은 피난을 가거나 숨어든 상태였다. 결국 당현종 자신도 황실 일가족과 환관, 양국충을 비롯한 조정 대신 몇명과 해외에서 온 사신들을 이끌고 6월 13일, 장안을 떠나 지금의 사천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몰래 도망치는 상황인데다가 준비도 제대로 못하고 먼 길을 가야 했기 때문에 첫날부터 호위병력이나 대신들, 사신들은 물론이고 황족들까지 식량이 떨어져 고생해야만 했다. 황제가 피란간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들이 가져온 쌀에 보리와 콩을 섞어서 먹었다고 한다.[23]

그러나 백성들도 피난을 떠나는 판국에 충분한 식량이 있을리가 없었고, 이에 호위 병력과 수행인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여기에 도망치던 피난통에 양국충은 난 예전에 이런 일이 있을 거라 말했는데 황제가 안들은거야 하고 책임을 면피하고 다녔고, 마외역에 도착했을 때 황제 일행과 행동을 같이하던 토번 사신 20여 명이 굶주리고 피곤하다면서 양국충을 붙잡고 하소연한 것이 병사들의 눈에 띄자 "양국충이 호족 오랑캐와 더불어 반란을 모의하였다"면서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켜 양국충은 살해되었다. 이후 병사들을 달래기 위해 양귀비마저 자결한다.

일단 양씨 일가들이 진멸당하면서 가까스로 병사들을 안정시킨 당현종은 때마침 가서한의 패배 이후 간신히 황실 일행과 합류한 왕사례를 하서, 농우절도사직에 임명한 후 길을 재촉하는데 때마침 모여든 일대의 부로들이 관중을 떠나지 말 것을 간청했다. 당현종이 떠날 생각을 굽히지 않자 태자라도 남겨달라고 하자 당현종은 호위병력 2천여 명을 붙여 황태자(충왕 이형. 당숙종)에게 분조를 세울 것을 명하고 서북쪽으로 보냈다. 이후 당현종은 간신히 부풍까지 가서야 아직 떠나지 않은 관리들의 영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에 호위병사들이 아직도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당현종은 성도에서 올라온 비단 10만여 필을 뜰에 펼쳐놓고 호위병력들을 위무해서 병사들의 불만을 잠재운 후 성도로 들어갔다.

파촉 지역은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난 지역이었기에 당현종은 그제서야 편히 쉴 수 있었고, 때마침 촉군장사였던 최원이 마중나오자 크게 기뻐하며 최원을 중서시랑, 동평장사로 삼았다. 또한 황족 중 한 명인 농서공 이우를 한중왕, 양주 도독, 산남서도 채방방어사로 임명하여 한중으로 파견해 방어임무를 맡겼다. 또한 하서의 여러 호족들이 당에 반기를 들자 하서병마사 주필을 하서절도사로 삼고 농우병마사 팽원요를 농우절도사로 임명한 다음 왕사례를 행재도지병마사로 삼아 하서, 농우 일대의 돌궐 부락 기미주들을 이끌고 파촉으로 들어와 이들을 관리하라고 명한다.

황태자인 충왕 이형은 분조를 이끌고 서북쪽으로 길을 나서나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이때 황태자의 아들들인 광평왕 이숙, 건녕왕 이담이 삭방번진으로 갈 것을 강력하게 건의하여 삭방번진 방향으로 향했다.
전하께서 옛적 일찍이 삭방절도대사가 되셨는데, 장리가 세시에 치계하여, 건녕왕이 대략 그 성명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하서, 농우의 무리가 모두 패배하여 적에게 항복해, 부형자제가 적중에 많이 있어, 혹 다른 꾀가 생길지 모릅니다. 삭방도는 가깝고, 사마는 모두 성하며, 배면은 의관 명족이니, 반드시 두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적이 장안에 들어가 바야흐로 노략질하여, 땅을 돌아볼 겨를이 없으니, 이에 타고 속히 가서 그를 취하여, 천천히 대거를 도모하면, 이는 상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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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즉, 하서, 농우는 불안하니 안녹산이 장안을 노략질하는 동안 재빨리 삭방도로 가서 병력을 끌어모으자는 것. 이에 황태자가 동의하고 동관에서 패해 흩어진 패잔병들을 불러모으면서 북상했다. 허나 강행군이었기 때문에 병사들을 불러모으는 것 이상으로 많은 병사들이 이탈하기도 했고,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과 도적떼들이 황태자 일행을 습격하기도 했는데, 이때 건녕왕 이담이 직접 창을 들고 부상까지 입어가면서 황태자를 호위했다고 한다. 이후 황태자 일행은 영무에서 7월 12일에 금군의 추대로 제위에 올랐으니 당숙종이다.

이러한, 황제의 허락 없는 황태자의 황제 즉위는 그 정통성이 매우 미약한 것으로써 자칫하면 반역으로 선언되어 황실 내의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현종은 비록 피난처인 촉의 특성상 숙종의 즉위 소식을 늦게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숙종의 즉위와 난의 책임을 과감히 인정하고 태상황으로 물러난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당숙종의 이러한 즉위과정은 이후에도 정통성 측면에서 문제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숙종의 고난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즉위시킨 신하들을 방위를 위해 이곳저곳에 배치하고 나자 문무 관원이 30명이 안 될 정도로 분조의 규모는 조촐했으며 풀밭에서 조정을 세워야 할 정도로 상황이 열약했다. 사람 손이 워낙에 없다보니 심지어는 이때 황후[24] 임신한 장량제는 영무에서 자식을 낳고 4일 만에 일어나서 병사들의 옷을 꿰멨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이에 박릉을 포위하고 있던 곽자의, 이광필. 그리고 안서번진, 하서번진 등에 명해 병사들을 이끌고 영무에 올 것을 명했으며, 명재상 이필을 불러들여 그나마 조정의 위엄을 조금식 세워갔다. 단, 숙종 시기 이필은 관직에는 올랐으나 거듭 사양했고 결국 재상직에 오르지는 않았다. 당숙종과 어린 시절 친구라는 명목으로 조언자로 활동했을 뿐이다.[25] 곧 얼마 안 가 고선지의 부장이었으며 봉상청과 함께 용맹으로 유명한 하서절도부사 이사업, 안서행군사마 이서균 등이 각각 5천여, 7천여 병력을 이끌고 영무로 도착했고, 곽자의, 이광필이 이끌던 삭방군이 5만여에 달하는 대병력을 이끌고 영무에 합류하면서 비로소 조정으로서의 위세를 떨치며 군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숙종의 즉위와 양씨 일가에 대한 숙청은 안녹산 거병의 의미를 완전히 퇴색시켰고, 안녹산의 칭제까지 겹쳐 확고부동한 대의명분을 얻었다. 또한 당현종은 파촉으로 들어갈 때에 자신의 아들들을 여러 지방으로 파견해 지방의 단련, 단결병들을 기초로 한 지방군을 계속 장악하고 있을 것을 명했다. 이는 당현종이 아직 총기가 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증거로 손꼽힌다. 단지 게을러져서 결국 반란을 초래했을 뿐이지만 어쨌든 이런 종실제왕들을 확고하게 통제하고 상하관계를 명확히 하는데 황태자로서는 부족한 감이 있었으나 황제로서는 조칙과 제서를 통해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었기에 반격의 준비가 시작되었다고 평할 수 있다.

3.2.3. 장안을 점령한 반군 - 반란의 전성기

동관을 돌파하고 황실을 변방으로 쫓아보내며 장안을 점령한 것은 756년 6월 말. 이후 757년 8월 완전히 재건된 당 중앙군이 장안, 낙양 탈환에 나설 때까지의 1년여가 안사의 난의 전성기이자 의 최대 위기로 평가된다. 이 시기 안녹산은 태원을 제외한 당의 핵심지역을 모두 함락시켰을 뿐 아니라 이 전과로 인해 하북 일대에서 당에게 귀부하던 세력들이 다시 안녹산에게 돌아서 세력이 확대되었고 혼란으로 인해 중앙정부가 마비되어 정국 통제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때 안녹산이 조금만 더 장기적 안목이 있었다면 이 1년, 아니, 안녹산이 아들에게 살해당하기 전까지인 6개월 안에 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나라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안녹산에게는 그런 안목이 없었다. 안녹산은 당 조정이 6월 13일에 장안을 떠난 것을 진작에 알고도 최건우에게 명령해 일시 정지했다가 10일이 지난 후에야 손효철에게 병력을 맡겨 장안을 점령한다. 이때 장안을 떠나지 않았던 변영성(고선지의 죽음의 원인제공자)이 장안성 황궁의 열쇠를 들고 항복한다.(변영성은 후에 장안을 탈출해 숙종에게 도망쳐오나 그대로 처형당한다.) 또한 장안을 점령한 후에도 추격군을 편성해서 당현종을 쫓지 않고 안녹산은 낙양에 머물며 군기가 빠져 향락을 즐겼다. 그 결과 장안 인근 관중지역조차도 제대로 장악이 안 된 상태여서 관중 일대에서는 자주 '태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고, 이 소식을 듣고 용기를 얻은 관중지역의 주민들이 안녹산군을 공격하는 경우가 빈발했다고 한다. 간간히 칙서와 비단 재물을 사신들에게 들려보내 당에 충성하는 지방을 매수하려고 시도했을 뿐이나 그냥 보낸 사신의 목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러나 당의 상황 또한 결코 낙관적이지 못했다. 일단, 하북을 보자면 곽자의, 이광필이 귀환함으로 인해 범양의 강병을 지휘하던 사사명은 박릉에서 섬멸당할 위기에서 벗어났으며, 이후 박릉에서 군을 재정비하고 다시금 하북평정에 나선다. 때마침 평로절도사 유정신이 안녹산을 배신하고 범양을 기습하려 하자, 이는 안녹산의 세력기반이 사실상 범양 일대로 축소됨을 뜻했기 때문에 사사명은 일단 이것부터 격파한 후 하북으로 전진해 나갔다.

곽자의, 이광필은 박릉에서 철수하면서 신도태수 오승은에게 삭방의 병사 3천여를 남기고 안진경, 하란진명[26]과 협조해 하북에서 사사명을 억제할 것을 명했으나 사사명에 의해 별 저항도 못하고 항복했다.[27] 이후 사사명은 고성을 함락시켰고 9월, 조군과 상산을 함락시키며 태원으로 가는 길목을 다시 확보한다.

그 후 11월에 하란진명이 조정에 입사하고 곧 하남절도사로 임명되는 사이 사사명은 안진경이 이끄는 의병과 맞부딪친다. 안진경은 상당히 분전했으나 애초에 의용병 내지는 단련/단결병(자경대)가 주류인 안진경의 군대로써는 동북방의 강병과 이민족군의 혼성으로 이루어진 사사명을 감당할 수 없음은 자명했다. 결국 평원까지 함락되자 안진경은 황하를 건너 형주로 몸을 피했다가 다음해에 조정으로 입사한다. 이후 755년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받고서도 1년이 넘게 저항하던 요양까지 함락되고 이를 지키던 장흥이 사사명에 의해 톱으로 머리를 썰려 참수당하는 것으로 결국 하북의 전황은 종결된다.

안진경이 이끌던 의병군의 참패와 소멸은 곧 안녹산군의 하북 재평정을 의미했으며, 하북에서 당에 충성하며 저항하던 세력 전체가 궤멸당한 것을 의미한다. 이후 사사명의 난 시기를 보면 하북에서의 저항은 조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북지역은 안녹산-사사명군에 의해 평정당했다. 이후 사사명은 그 다음해인 757년 1월, 채희덕, 고수암, 우정개와 함께 당의 3경 중 마지막으로 당의 손에 남아있던 태원 공략에 나서 이광필과 다시 한번 맞부딪치게 된다.

하남지역에서는 양경의 함락과 이에 놀란 하남 일대의 군현들이 안녹산에게 대거 항복하는 가운데 사실상 안녹산세력 한가운데인 옹구( 하남성 기현)에서 버티고 있는 장순의 활약이 이어졌다. 현종의 파천소식이 전해지자 항복을 건의했던 6명의 휘하 장수들을 과감히 E를 때려서 처형하여 병사들을 다잡은 장순은 영호조의 공격을 거듭하여 막아냈으며, 3천여 명의 수비병력만으로도 오히려 몇 차례나 역습을 가해 패퇴시키고 만여 호를 다시 귀부시키는 공적도 쌓았다. 안녹산이 임명한 하남절도사인 이정망이 이민족이 포함된 병력 2만여로 접근해오자 초전에 바로 야습을 걸어 패배를 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모의 차가 현격하기에 완전히 격퇴할 수는 없었으며, 거듭된 전투로 인해 3천이던 병력이 12월에는 1천까지 감소한다. 결국 안녹산군이 지속적으로 공세를 걸고, 또한 안녹산의 장수인 양조종이 옹구에서 후방으로 물러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인 영릉을 2만여 병력으로 공격하려 하자 결국 장순도 옹구에서 영릉으로 철수, 수양태수 허원과 합류해 양조종을 격퇴했다. 비록 옹구에서 물러나긴 했으나 그 과정에서 분전했다고 여겨졌는지 장순은 이후 하남절도부사로 임명된다.

또한 이 시기 아사나종례가 안녹산군을 갑작스럽게 이탈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아사나종례는 안녹산군에 소속되어있던 돌궐족의 추장으로써 돌궐족 병사들을 지휘했는데 7월 22일, 아사나종례가 자신을 따르는 돌궐 기병 5천여 명과 마필 2천여 필을 훔처 삭방군 쪽으로 이탈한 것이다. 아사나종례의 의도는 삭방군 변방의 구성부와 알더스 고원에 당이 사민시켰던 돌궐, 철륵 동라 등 여러 이민족들을 선동해 봉기시키고, 이들을 지휘해 당의 변방지역을 장악하고 유력한 대외 세력으로 성장하고자 함이었던 돌궐부흥운동으로 추정된다. 돌궐 제2제국이 멸망한 후 회흘이 아직 북방 초원지대의 패권을 잡기 이전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돌궐 부흥운동은 당에게는 또 하나의 중대한 위협이었다. 당숙종은 삭방진, 안서4진, 하서진 등 서북쪽 일대의 번진들을 주축으로 삼아 군을 재건하고 또한 이민족 사역군 및 지원군을 받아들여 군을 증강시키고 있었는데, 아사나종례의 의도가 성공할 경우 왕년의 돌궐 제국이 중흥하여 서북 쪽 번진지역의 군대를 동원하기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이민족 병사들도 그 수가 크게 감소할 것이기 때문. 따라서 당숙종은 9월, 곽자의, 복고회은으로 하여금 군을 이끌고 아사나종례를 토벌할 것을 명했고, 복고회은의 아들인 복고빈이 동라에게 패해 사로잡혔다 탈출해 돌아오자 자기손으로 처형할(!) 정도로 군기를 다잡은 복고회은의 활약으로 아사나종례가 이끌던 동라-돌궐집단은 격파되었으며, 12월 회흘의 지원병력까지 인수한 곽자의가 다시 한번 유림하 북쪽에서 동라를 필두로 하는 반란을 일으킨 이민족들을 다시한번 격파, 참수 3만에 포로 1만이라는 큰 전과를 거두고 영무로 귀환한다.

또한 강남지역에서는 영왕 이린 분리독립할 생각을 가지고 세력을 확대하려는 기도가 12월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번외항목으로 따로 기술한다.

장안이 함락되고 하북이 다시 사사명의 손에 들어가며 하남지역에서도 안녹산의 세력이 확대되고 서북쪽 변방에는 아사나종례의 동라-돌궐집단의 발호가 일어나는 데다 강남에서는 영왕 이린이 자립할 야심을 가지자 숙종이 영무에서 즉위한 후의 전황은 결코 영 좋지 못했다. 이에 당숙종은 이를 한번에 뒤집으려는 도박수를 두게 된다. 756년 10월 방관의 지휘하에 병력을 편성, 장안을 탈환하려 시도한 것이 바로 그것.

방관은 이시대에 이름이 상당히 잘 알려진 문사로, 청담을 즐기며 빈객을 좋아하고 이름이 알려진 인사들과 교유관계를 원활히 유지해 그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다. 9월 말에 당숙종이 황제임을 인정하는 조서와 옥새를 들고 합류하자 바로 재상직에 임명할 정도였으니 그 명성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방관이란 인물의 실상은 꽤 한심했다. 빈객을 잘 끌어들이고 인맥을 유지하여 명성을 얻었을 뿐 군사적, 행정적 재능은 전혀 없는 무능한 인물이었던 것.(...) 9월에 합류한 이후 그 명성으로 인해 당숙종의 신임을 얻자 때마침 조정에 입사한 북해태수 하란진명이 방관에 대해 저거 순 왕연 같은 놈이라고 평할 정도였던 것.[28]

10월, 이 방관은 스스로 장안과 낙양을 수복하겠다면서 당숙종에게 청을 올리고, 당숙종은 이를 받아들여 지절·초토사경검방어포장양관절도등사(길기도 하다. 뜻은 '서경을 불러 토벌하고 포관과 장(동)관 두 관문을 방어하는 병마사 및 절도사'가 되겠다.( 권중달 교수의 주석))직을 제수한다. 이에 방관은 자신을 보좌할 참모들을 자신이 뽑겠다고 나서 어사중승 등경산, 호부시랑 이읍, 급사중 유질을 참모로 삼았다... 문제는, 방관이나 방관이 뽑은 참모들이나 죄다 백면서생에 불과한 인물들이었다는 것. 유유상종 당숙종도 이게 염려되었는지 병부상서 왕사례로 하여금 방관을 돕게끔 했으나 방관은 숙장인 왕사례의 도움을 깨끗하게 무시한 듯 싶다.

방관은 군(전후 사정으로 볼 때 6~7만은 되는 듯 싶다. 꽤 대규모 군대다.)을 정석적으로 3군으로 나눠 양희문, 유귀철, 이광진(이광필의 동생)에게 맡겨 진격한다. 11월 20일 즈음에 함양에서 안녹산군과 접전을 벌였는데, 방관이 어디서 본 건 있었는지 옛 병법을 따르겠다면서 우마차 2천승을 준비해 내세우자 안녹산군은 간단히 그 우마차를 불태워 소들을 폭주하게 만들어 당군을 대패시킨다. 첫 전투에서 사상자가 4만이었다고 한다.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방관은 23일에 남은 군을 추스려 다시 한번 도전했으나 간단히 박살이 나고 양희문, 유귀철은 안녹산군에 항복한다. 이에 당숙종은 매우 분노했고 방관을 계속 재상직에 남겨는 놓았지만 실상이 드러난 이 인간을 더이상 신뢰하지는 않았다. 이후 방관은 정신 못차리고 정국을 다시 주도해 보려고 하나 당숙종은 다시는 그를 쓰지 않았다. 이는 간신히 재건되던 당 중앙군 전력을 다시 한번 약화시켜 후에 이민족 병력, 특히 회흘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낳는 한 요인이 되었다.

이 해에 당은 북해절도사, 상당절도사, 흥평절도사직을 설치했다. 이러한 내지절도사의 설치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최종적으로는 남양절도사, 하남절도사, 산남서도절도사, 산남동도절도사, 관내절도사, 회남절도사, 회남서도절도사, 경기절도사, 동기절도사, 청밀절도사, 상당절도사 등 당 대부분의 지방이 절도사들의 지배권에 들어가게 되며, 기존의 지방행정체계는 절도사들의 번진체계에 흡수되어 버린다.[29]

그외에, 개원~천보 연간 동안 강화된 당의 군사력에 의해 억눌러져 있던 토번은 안사의 난으로 당의 주력군이 반란 토벌을 위하여 내지로 이동한 틈을 타 다시금 쳐들어와 위융, 신위, 정융, 선위, 제승, 천성 등의 군진과 석보성, 백곡성, 조과성 등 당에 의해 빼앗겼던 요충지를 공략해 빼앗는다.

3.2.4. 당의 반격 대전략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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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의 뻘짓으로 인한 실패까지 이어지자 당숙종은 이필에게 '정말 안녹산의 난을 진압할 수는 있겠는가?' 하고 조언을 청한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전황은 영 안 좋은 것뿐이기 때문에 불안했던 것. 이에 이필은 '2년 안에 평정 할 수 있사옵니다. 염려 놓으시오소서' 하는 답변을 한다. 이후 이필은 추후 전략에 대한 조언을 했다고 한다.
"역적의 날랜 장수는 사사명(史思明)·안수충(安守忠)·전건진(田乾眞)·장충지[30]·아사나승경 등 몇 명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지금 만일 이광필로 하여금 태원으로부터 정형으로 나오도록 하고 곽자의로 하여금 빙익으로부터 하동으로 들어가게 한다면 사사명과 장충지는 감히 범양과 상산을 떠나지 못하고 안수충과 전건진은 감히 장안을 떠나지 못하니 이 때문에 두 군대가 그들의 네 장수를 잡아매면 안녹산을 좇는 사람은 오직 아사나승경뿐입니다.

바라건대 곽자의에게 칙서를 내려서 화음을 빼앗아 양경의 통로를 항상 통하게 만들고 폐하께서는 징발한 군대를 가지고 부풍에 주둔하여 곽자의·이광필과 더불어 서로 나아가 그들을 공격하게 하면 저들이 머리 쪽을 구원하면 그들의 꼬리를 치고, 꼬리쪽을 구원하면 그들의 머리를 처서 역적으로 하여금 수천 리를 오고 가게 하면 분명하느라고 피곤하게 되지만 우리는 항상 편안한 상태에서 지처있는 군대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역적이 도착하면 그 칼끝을 피하고, 물러나면 그 틈을 탈 것이며, 성을 공격하지 않고 길을 막지도 않습니다. 다가오는 봄에 다시 건녕왕 이담에게 명령하여 범양절도대사로 삼아 나란히 요새지대의 북쪽으로 나아가 이광필과 더불어 남쪽과 북쪽에서 기각의 형태로 범양을 빼앗아 역적의 소굴을 뒤엎어 버리게 합니다. 역적은 물러나더라도 돌아갈 곳이 없고 남아있더라도 편안함을 얻지 못할 것이니 그렇게 한 후에 대군이 사방에서 합처져서 그들을 공격하면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게 됩니다."

황상은 기뻐하였다.- 자치통감

이를 정리하자면 '곽자의와 당숙종 자신은 양경 일대의 교통로를, 이광필은 태원에서 하북으로 나아가 안녹산군을 묶어놓은 다음 치고빠지기로 힘을 빼고, 다음해(757년) 봄에 일단 근거지인 범양부터 공략한 다음에 압박한다'는 것이다. 이는 추후 당의 대대적인 반격 당시 범양 공략보다 양경 탈환부터 우선시한 숙종에 의해 대전략이 수정되지만 당의 안녹산의 난 진압의 기본 방침이 되어 이광필에 의한 태원 방어 성공과 이후 하북 압박, 곽자의의 장안-낙양 축선 교통로 위협 등의 작전이 수행되게 된다.

4. 757년

4.1. 전반기(I) 안녹산의 죽음, 연의 공세에 대한 당의 방어

4.1.1. 안녹산의 죽음

안녹산의 공세가 한참 진행되던 중 안녹산이 거병 이후 앓던 안질이 악화되어 맹인 수준까지 떨어졌고, 또한 등창을 앓으면서 주변 사람에게 포악하게 행하기 시작하면서 안사의 난은 전환점을 밟게 된다.

특히 안녹산의 폐첩인 단씨가 안경은이라는 아들을 낳자 기존의 후계자였던 2남 안경서를 대신해 안경은을 세우려는 의도를 보였고, 이에 안경서가 반발하면서 757년 1월, 안녹산은 안경서에 의해 피살당한다. 이는 당의 반격의 실마리가 된다.

안녹산의 군재가 뛰어난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그에게는 장기간에 걸친 지휘경험, 그리고 반란 이전 3개 절도사직을 역임하면서 그 수하들에게 가진 유무형의 권위 등이 존재했다. 그러나 안경서에게는 안녹산이 가진 경험과 권위가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능력이 있던 것도 아니기에 그저 수하 제장들에게 후하게 베푸는 것만으로 어떻게든 통제하려 시도할 수밖엔 없었다.

이에 안녹산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여러 장수들은 슬슬 안경서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고 특히 안녹산의 본래 근거지인 범양 일대를 사실상 총괄하던 사사명은 후에는 안경서보다도 세력이 더 커지게 된다.

4.1.2. 하동: 최대 격전지

안녹산은 아들에게 비참하게 죽었으나, 세력 자체는 아직도 매우 강성했다.

이 시기의 주요 격전지역은 하동지역[31]으로 당은 이필이 입안한 전략에 따라 곽자의, 이광필이라는, 이때 당이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두 장군을 전면에 내세워 서쪽으로는 태원을 지켜내 하북의 사사명을 견제하고 남쪽으로는 양경일대를 위협하고자 시도하고, 안녹산의 연군 또한 하동지역을 장악하고 당의 후방인 삭방, 하서, 북정지역까지 진격하고자 시도하여 두 세력의 최고 장군들이 맞부딪치는 전장이 된다.

특히 연의 주 목표는 3경 중 하나인 태원이었다. 757년 1월, 사사명은 채희덕, 고수암, 우정개 등 자신의 지휘 하의 장수들과 병력 10만을 끌어모아 태원으로 진격, 이광필과 격돌한다.

이미 지난해(756년) 8월 이광필은 호부상서에 임명되어 재상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았으며, 또한 동시에 북도(태원)유수로 임명되어 다시 한번 태원 방위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삭방군 병력을 주축으로 하는 정예병력은 대부분 영무에 그대로 남긴 채로 경성과 하간의 병력 5천여 명을 이끌고 가야만 했다. 하북성 출신 병사들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병사들은 그 출신이 안진경의 하북의병이었으며 이들은 이미 756년 안진경이 사사명에 의해 참패했다는 데서 볼 수 있듯 그 질은 사사명이 이끄는 병사들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태원에 도착한 후 기존의 태원 방위군과 주변지역 병사들을 끌어모았지만 그 규모는 채 1만이 되지 못했을뿐더러 상당수가 임시로 징집한 단결병이라 질도 떨어졌다. 거기다 상산까지 진작에 사사명에게 함락된 상태였기 때문에 태원을 외곽에서 방위하는 요새지인 태행 8경은 이미 방어거점이 되지 못했다. 이에 사사명은 태원을 손쉽게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이후 삭방과 하, 농지역을 공격해 영무의 당숙종을 관중의 안녹산군[32]과 협공할 행복회로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광필은 여기서 다시 한번 태원을 지켜내었다. 미리미리 태원의 백성들을 동원해 벽돌을 수십만 장 만들어 놓았다가 상황에 맞게 이를 사용하여 방어시설을 보수했고 성 밖에 참호를 깊게 파놓는 등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고 태원 내에서 특기가 있는 사람을 모집해 상황에 맞게 활용하였다고 하며, 태원 밖으로 비밀 땅굴을 만들어 적을 기습하고 공성무기를 끌여들여 파손시키고 야습까지 감행하는 등 이광필의 슬기로운 수비가 빛을 발했다고 한다. 여기에 곽자의-이광필군이 엉무로 들어가면서 후방에 남겨놓았던 일부 부장들이 후방에서 게릴라를 펼처 공성무기를 파괴하기도 했다. 결국 사사명은 1개월 동안의 공성전 기간 중 전사자만 1만에 달하는 큰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이후 안녹산의 죽음이 전해지자 사사명은 범양으로 귀환, 채희덕 등이 남아 태원 공략을 계속한다.

이후 이광필은 타이밍을 노리다가 결사대를 이끌고 채희덕군의 본진을 급습, 자치통감에 의하면 7만여 명을 참살하고 진짜냐 태원의 포위를 푼다. 채희덕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해 숨어들었다. 이에 안경서는 사사명을 범양절도사로 삼고 항양군의 일을 겸하여 관장하도록 하였으며 규천왕으로 책봉한다. 우정개로 하여금 안양군의 업무를 담당시키고 장충지를 상산태수 겸 단련사로 삼아 정형을 계속 유지하게끔 한다. 이는 위에서 제안된 이필의 전략대로 이광필이 태원을 수비하는 데 성공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북지역의 안경서세력을 압박하는 데 성공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곽자의 또한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인 '양경의 교통로 압박, 제어'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막중한 업무에 대한 보상차원인지 곽자의는 영무에 이광필과 같이 삭방군을 이끌고 합류했을때 삭방절도사직에 더해 무부(병부)상서·영무장사직을 겸하여 마찬가지로 재상직에 올랐다. 이때에 곽자의는 하동이 양경 사이에 있기에 이 지역을 빼앗으면 양경을 압박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1월 28일, 비밀리에 하동으로 접근한다.

이때 하동은 앞서 동관을 함락시킨후 북진하여 하동지역의 절반을 장악한 최건우가 지키고 있었는데, 곽자의는 몰래 사람을 보내 하동에 남아 항복했던 당의 관리들을 다시 회유하는 공작을 수행. 2월 11일에 이를 통해 한번에 하동을 함락시켰다. 최건우는 성 북쪽의 병사들을 동원해 저지에 나섰지만 곽자의에 의해 4천여 명이 전사, 5천여 명이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맛보았으며 안읍으로 철수하자 곽자의는 빠르게 따라붙었다. 여기에 안읍의 거주민들 또한 곧바로 곽자의에 협조, 최건우군이 성에 반쯤 들어왔을 때 냉큼 문을 닫아버리고 들어온 병력들을 학살한다음 곽자의에게 귀부했다. 운 좋게도 안읍에 아직 들어가지 않았던 최건우는 백령경으로 도주하면서 하동지역은 완전히 곽자의에 의해 평정된다.

이후 곽자의는 2월 22일, 그의 아들인 곽간과 병마사 이소광, 복고회은, 대장 왕조를 파견해 동관을 처서 함락시키고 수비병력 중 5백여 명을 참살하나 안경서가 급하게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동관을 공격하자 병사 1만여 명과 이소광, 왕조가 전사하고 곽간과 복고회은만이 간신히 황하를 다시 넘어 살아돌아오는 실패를 맛본다. 그러나 3월 23일, 안경서군의 관서절도사인 안수충이 기병 2만을 이끌고 하동을 공격하자 곽자의는 이를 격파해 참수 8천, 포로 5천이라는 승리를 거두어 하동지역의 장악을 공고히한다.

이 시기에 상당[33]에서는 채희덕이 태원에서의 참패 이후 상당을 함락시키기 위해 공세를 펼치고 있었는데 상당절도사 정천리에게 거듭 패했다. 정천리는 안녹산의 난 발발 이전 금오장군을 하고 있다가 상당으로 가서 지역 민병을 모았다. 그러나 9월 2일에 기병 100여 기를 이끌고 교전하다가 철수하던 중에 다리가 무너져(...) 사로잡히게 된다.[34]

4.1.3. 하남: 수양, 남양의 방어

하동지역에 비해 하남, 남하[35]지역은 상대적으로 전란이 비켜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수양(誰陽, 하남성 상구시)을 지켜낸 장순, 남양(南陽, 하남성 등주시)을 수비한 노경이 연의 침공을 막아서는 방패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경이 남양을 수비하기 시작한 것은 756년 5월부터였다. 전진하여 목책을 세웠다가 무령순, 필사침의 공세에 패배해 남양성으로 들어가 수비하기 시작했던 것. 이후 무령순, 필사침, 전승사 등의 공세에서 남하지역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노경은 필사적으로 남양을 수비한다. 그리고 이 방어전는 1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계속된다.

747년 4월, 남양에는 식량이 고갈되었다. 하도 먹을 것이 없어서 쥐 한마리 가격이 동전 수백에 달했다고 한다. 이에 당숙종은 환관장군[36] 조일승을 파견해 남양성을 격려하고자 했다. 그러나 연군의 포위망이 강고했기 때문에 쉽게 들어가긴 힘든 상황. 양양태수 위중서는 조일승이 연군에 의해 피살당할까 두려워 보내지 않았다.

이때에 하북에서 사사명에게 패해 남하지역으로 와 있었던 안진경이 조일승이 남양으로 가는 것을 막지 말라고 조언한다. 이런 조언이 가능한 것은 안진경은 4월 즈음에는 영무로 가기 때문에 조일승은 4월 이전에 양양에 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위중서는 조일승이 남양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고, 기병 10기를 호위병력으로 붙인 조일승은 연군의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남양에 도착해 이들을 격려한 후 양앙으로 되돌아온다. 이때에 남양에 식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안 조일승은 호위병력 1천여 명을 붙여 양양에서 식량을 가져와 당장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게끔 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경은 더이상은 남양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4월 15일에 휘하 병력을 이끌고 남양을 탈출, 양양으로 철수한다. 이에 전승사는 노경을 추격했지만 잡지 못했다고 한다.

남양의 함락 이후 연 세력은 남하지역 또한 공격하고자 했으나 노경이 요충지를 잡고 잘 수비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수비전은 수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안경서는 윤자기를 변주자사·하남절도사로 삼고 하남지역까지 제압할 것을 명령했고, 1월 25일 윤자기는 규주(하북성 회내현)와 단주(북경시 밀운현)의 단결병들, 그리고 동라와 해족 출신 이민족 병사들을 합처 13만에 달하는 병력을 편성, 수양으로 진격한다. 이에 수양태수 허원이 영릉으로 물러나 있던 장순에게 도움을 청하자 장순은 자신이 이끌던 병력 3천여 명과 함께 수양으로 이동, 허원이 지휘하던 병력 3천 800여 명과 이를 합친다. 이 7천여밖엔 안 되는 병력으로 장순은 다시한번 뛰어난 수성전 능력을 선보여 16일 동안 윤자기군의 장교 60여 명을 생포하고 2만여에 달하는 피해를 안겨주어 철수시켰다. 이를 통해 당의 영역에 남아있던 하남지역은 또 한번 지켜질 수 있었다.

3월, 윤자기는 다시 한번 대병력을 동원해 수양 공략에 나선다. 이에 수양을 지키던 수성전의 달인 장순 또한 방어에 나선다. 윤자기군이 도착하자 장순은 소를 잡아 잔치를 벌여 병사들의 사기를 고양시킨 다음 성문을 열고 기습에 나서 3천여 명을 죽이고 일시적으로 적을 뒤로 물렸다. 윤자기는 지치지도 않고 다시 접근해 공세에 나섰으나 장순은 남제운, 뇌만춘 등을 이끌고 윤자기의 본진을 강습, 5천여 명을 살상하고 윤자기를 포위해 사살할 뻔하기도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후 수양성 공방전은 10월까지 이어진다.

4.1.4. 평로군진의 당으로의 귀부

여기에 평로군진지역[37] 또한 안녹산에게 다시 반기를 든다. 평로절도사 유정신이 범양에서 사사명에게 패해 돌아오자 안동도호 왕현지가 그를 독살해 버렸고, 이후 안녹산이 서귀도를 평로절도사로 삼자 왕현지는 평로장수 후희일과 함께 그를 기습해 죽여버렸다. 이후 병마사 동진은 군대와 함께 뗏목을 만들어 바다를 건너가(...) 전신공과 힘을 합처 평원과 낙안을 공략, 함락시켜 반란군의 발목을 다시 한번 잡아챈다. 이에 빙하초토사 이선은 자신이 당 조정에게서 위임받은 권한를 활용해 동진을 평원태수로 삼았다.

또한 6월, 전건진이 안읍을 포위했는데 섬군의 안경서군 장수인 양무흠이 당에 귀부하고, 하동태수 마승광이 거기에 동조해 섬군이 당에게로 넘어가자 전건진은 철수한다. 그러나 7월, 안수신이 섬군을 공격하자 양무흠은 이에 저항하다가 섬군이 함락될때에 전사하는 일이 있었다.

4.2. 전반기(II): 당의 군대 재건, 대반격의 전초전

4.2.1. 영무: 군대의 재건

756년 7월, 영무에서 당숙종이 제위에 올랐을 당시 당의 중앙군은 사실상 소멸한 상태였다. 이에 당숙종은 필사적으로 군을 끌어모았으며, 곽자의, 이광필이 8월에 삭방군진의 5만여 병력을 이끌고 옴으로써 겨우겨우 군대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고 자치통감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정도 전력으로는 방어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공격은 취할 수 없었다. 거기다 상술하였듯 방관이 10월에 다시 한번 병력의 상당수를 상하게 하는 뻘짓까지 있었다.

이에 당숙종은 당 외부의 이민족들에게 눈을 돌린다. 우선 돌궐 제2제국의 멸망 이후 각 지역에 사민시켰던 돌궐을 비롯한 이민족들에게서도 병사들을 징발하도록 했다. 이는 당숙종 즉위 이전인 756년 7월부터 이미 시행되었는데, 주필, 팽원요를 하서절도사, 농우절도사로 임명해 보내면서 그 지역의 돌궐 기미주들의 도호였던 사결진명을 같이 파견, 병력을 징집하도록 하였으며, 756년 9월 빈왕 이수례의 아들 이승채를 돈황왕으로 삼아 당의 통제를 받던 발한나( 중앙아시아 나망간)의 병사들을 징발하고, 서역에서 성곽을 가진 국가에 일일이 유세를 가서 후한 포상을 약속하고 병사들을 안서4진 병사들과 함께 당에 들어와 원조하도록 청한다.

이민족 군대를 모음에 있어 특히 공을 들인 것은 회흘 즉 위구르 제국이었는데, 돈황왕 이승채가 복고회은과 함께 유세하자 회흘 측은 그를 공주와 결혼시켜가며 후히 대접하고, 아울러 많은 군사를 보낼 것을 약속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회흘군을 청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대가를 지불한 것은 훗날의 큰 화근이 되었다.

회흘이 돌궐을 대체하긴 했으나 그 세력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은 아니었고, 아직 키르기즈 카를룩과 같은 적대세력들이 남아 있었다. '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만고의 진리를 생각하면, 그리고 돌궐 제2제국과 상대하면서 당 자신이 겪었던 고생을 생각하면 돌궐과 같은 강대한 통일 유목민족 제국이 다시 만들어지는 것은 피해야만 했다. 그러나 당숙종은 회흘에게서 병력을 지원받는 대가로 막대한 자금을 제공해 준 것은 물론 공주와의 결혼까지 지원해주어 회홀이 유목제국으로써 북방 초원지대를 통일할 수 있는 힘과 권위를 제공해버렸다. 회흘은 이러한 호기를 놓치지 않았고, 이로부터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위구르 제국을 성립시키며 당과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38]

이 시점의 당군은 외부의 병력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자체 병력 또한 계속 증강하였다. 이로인해 '요새의 정병들은 모두 뽑혀 역적들을 토벌하는 데 들어갔고, 오직 남아있는 노약자가 변방을 지켰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당숙종은 누가 천하병마원수가 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까지 보여준 군재로만 따진다면 건녕왕 이담 역시 자격이 충분하였으나, 건녕왕 이담이 계속해서 전공을 세운다면 적장자인 광평왕 이숙( 당대종)의 위치가 흔들리기 때문. 이 문제는 757년 1월, 건녕왕 이담을 동쪽으로 나아가 범양을 공략하게 할 때에 다시 불거졌고, 이에 심기가 편찮았던 당숙종은 이담과 사이가 영 좋지 않았던 환관 이보국과 황후 장량제가 옆에서 참소하자 그만 건녕왕 이담에게 죽음을 내렸다. 이런 데서 부전자전 영무까지 도주할 때에 건녕왕 이담이 직접 창을 들고 당숙종을 호위해서 간신히 몸을 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비정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후에 당숙종은 이필에게 이담이 광평왕 이숙의 위치를 노렸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이필은 두 형제는 사이가 좋았고 태자가 건녕왕 이담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했다면서 당숙종을 뻘쭘 무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는 숙종의 손자인 당덕종과 이필이 대화할 때에 당덕종이 당숙종의 성격이 급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말함으로써 확인사살 공식입증까지 되었다.[39]

또한 이때에 제오기를 기용, 소금 전매법을 실시해 재정을 보충한다. 당의 소금 전매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보통 소금 전매는 민란을 가져오는 일등공신이라는 것을 볼 때 이때부터 당은 군자금 확보를 위해 본격적으로 비상을 건 것으로 보인다.

757년 1월, 당숙종은 안서, 북정, 발한나, 대식 등 여러나라의 군대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장안에 상당히 근접한 지역인 봉상(鳳翔, 섬서성 봉상현)으로 행재소를 옮긴다.

4.2.2. 봉상: 대전략의 수정

당숙종이 삭방군이 중추가 된 중앙군을 이끌고 봉상까지 내려온 것이 2월 10일. 농우, 하서, 안서에서 지원군으로 온 당군과 서역에서 온 외국 군대 또한 열흘 안에 봉상에 집결했고 이들을 먹일 강남, 회남지역에서 올라온 막대한 군량미 또한 양천과 한중에 도착했다. 거진 반년에 걸처 재건한,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당이 준비할 수 있는 최대 최고의 병력과 그 병력을 보급할 군수물자가 마련된 상황. 당의 대규모 역습이 시행될 것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자명했다. 장안의 주민들 또한 이 소식을 접하고 봉상으로 계속 도주해 왔다고 한다. 당숙종은 이때에 당현종이 있는 성도로 보내는 편지와 사신이 끊이지 않았다 할 정도로 당현종과도 긴밀히 접촉하며 반격을 준비한다. 또한 이 시기에 토번에 선물을 주어 변방 군대의 이탈로 약화된 방위력을 커버하고자 한다.[40]

이때에 당숙종은 이필과의 논의에서 대전략을 변경할 것을 이야기한다.

이필이 756년 12월 당숙종에게 논한 전략은 위에 나와 있듯 현재 봉상에 모인 전력으로 하남의 곽자의와 함께 낙양~장안 축선 상의 연 세력을 견제하고, 일단의 병력을 귀주와 단주를 통해 서북쪽으로 파견, 태원의 이광필과 함께 안녹산, 사사명의 본거지인 범양을 먼저 공략한 후에 하북을 평정하며 남하, 사방에서 둘러싸고 공격을 가해 양경[41]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반면, 이때에 당숙종이 제시한 것은 현재 모여있는 병력으로 범양보다는 양경을 먼저 탈환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 즉, 현재의 구도에서 봉상에 모인, 당이 운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한방병력을 가지고 우선 장안, 낙양을 탈환한 다음 하북으로 나아가겠다는 것.

당숙종의 작전변경에 대해 이필은 "지금 이 무리를 가지고 곧바로 양경을 빼앗는다면 반드시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역적은 반드시 다시 강해질 것이고 우리는 반드시 또 지칠 것이니 오래도록 편안해지는 책략이 아닙니다"며 반대했다. 적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범양을 먼저 제압하지 못한다면 적은 다시 세력을 회복해 남하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전쟁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는 알수가 없다는 이야기.

그러나 당숙종은 이에 대해 "짐은 새벽과 저녁에 부모를 살피는 그리움이 절실하여 이 결정을 기다릴 수 없다"며 양경을 먼저 탈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당현종을 하루속히 성도에서 모셔와야 한다는 이야기다.

결과적으로는 이필의 말대로 되었다. 당군은 양경을 탈환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사사명이 범양에서 세력을 키워 재차 남하하고, 반란은 몇년을 더 끌었던 것.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숙종의 주장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숙종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부족한 황제로써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당현종을 어떻게 해서든 수도로써의 상징성이 짙은 장안에 모셔와야만 했다. 영무에서 황제의 명 없이 단독으로 즉위했다는 점은 당숙종이 지고 있는 크나큰 약점이었으며, 따라서 중대한 정치적 상징성과 전략적 중추지를 지닌 장안, 낙양을 신속하게 탈환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안경서가 황제로써 내세울 수 있는 것도 두 수도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 양경에서 쫓겨난다면 결국 자체붕괴될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안경서가 으로 쫓겨간 후 연 세력은 이탈자가 늘어나며 붕괴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니 당숙종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말하기 힘들 것이다.

어쨌든, 당의 대전략은 양경의 조속한 탈환으로 변경되었다. 회흘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진격까지는 아직 6개월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당의 목표는 정해졌다. 수도, 장안으로.

4.2.3. 전초전

장안으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맨 먼저 움직인 것은 관내절도사 왕사례였다. 왕사례는 무공에 진을 치고 병마사 곽영예와 왕난득을 동서로 늘여세워 교전을 건다. 그러나 왕사례는 안수충의 공세에 패배, 부풍으로 물러난다. 당군은 첫 교전에서 패배를 당한 것.

전초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당숙종은 마지막 인선을 고심하고 있었다. 천하병마(天下兵馬)부원수직을 누구에게 내리냐는 것. 광평왕 이숙이 황제의 적장자로써의 권위가 존재하긴 하나 군 경력이 일천하므로 형식상의 총사령관의 위치라는 것은 명백한 이상 천하병마부원수직은 실질적인 총사령관으로써 군을 지휘해야만 했다. 결국 당숙종은 4월, 그 인물로 곽자의를 선택, 사공·천하병마부원수직에 임명하고 봉천으로 부른다.

곽자의가 선택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광필은 태원에서 사사명을 방어해내고 있었고, 노경이나 하란진명은 권위가 부족했으며, 왕사례는 동관에서나 무공에서처럼 군재가 충분하다고 보긴 힘들었다. 결국 757년 당시 62세로 가장 연장자이자 뛰어난 전공을 세웠고 그 직함도 가장 높은 편인 곽자의야말로 대반격의 총사령관으로써 적절한 인재였다.

당숙종의 명을 받고 곽자의가 봉천으로 이동하자 안경서군의 일원인 이귀인이 철갑으로 무장한 중장기병 5천여 기로 삼원(섬서성 삼원현 도욱)에서 곽자의를 저지하고자 했으나 곽자의는 복고회은, 왕중승, 혼석진, 이약유와 함께 유운교로 끌어들여 이귀인의 기병대를 격파한 후 봉천으로 들어간다.

봉상에서 곽자의는 이전까지 군을 지휘하던 왕사례와 서위교(섬서성 함양시 서남)에서 합류, 장안성 서남쪽을 흘러가는 위수의 지류인 휼수까지 전진했다. 그러나 5월 6일 안수충과 벌어진 교전에서 곽자의는 안수충의 거짓 퇴각에 속아 전진했다가 장사진을 친 기병 9천여를 양익에 늘여세워 양면공격을 가한 안수충에 의해 패배했다. 이 패배는 곽자의가 직접 지휘한 전투 중 최초의 참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판관 한액과 감군 손지고가 사로잡히고 각종 군사물자를 상실하는 피해를 입어 무공까지 철수한다. 곽자의는 이일로 스스로 벼슬을 깎아달라 청원하여 좌복야로 좌천되었으나 천하병마부원수직은 유지했다.

8월 26일, 어사대부 최광원이 낙곡에서 연군을 격파한다. 이후 행군사마인 왕백륜과 판관 이춘은 2천명을 거느리고 함양시 동부의 중위교를 공격해 천여명을 살상하고 장안까지 나아가 원문에 도달했다. 이에 봉상의 당군을 방어하던 무공의 연군이 후방으로 돌아가 이를 격파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 당군이 무공을 장악하면서 장안으로 가는 것을 막고 있던 연의 마지막 방위선은 사라졌다.

4.3. 후반기: 당의 반격.

4.3.1. 당군, 봉천을 나서다

8월 초 무공지역까지 당의 손에 떨어지면서 이제 남은 것은 장안으로의 진격뿐이었다.
그러나 아직 동북지역의 정병을 중심으로 하는 연군은 강력했고, 서북지역의 정병을 주축으로 하는 당군이라 해도 불안감이 적지는 않았다. 이에 당은 막판까지도 병력 충원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당이 공을 들인 것은 회흘이었다. 실질적인 총사령관을 맡은 곽자의는 회흘 출신 병사들이 정예병이니 추가적으로 징발할 것을 권했고, 회흘은 당의 청을 받아들여 추가적으로 4천여 명의 병사들을 엽호[42], 장군 제덕에게 딸려 파견한다. 이때에 당숙종은 엽호를 회유하기 위해 잔치를 벌이고 바라는 만큼의 물품을 하사했고 도시 함락시 약탈을 허용했다. 광평왕 이숙도 또한 엽호와 의형제를 맺겠다는 말까지 하면서 회흘에게 대접했다고 한다.

그리고, 9월 12일.
정해일, 원수 광평왕이 삭방, 안서, 회흘, 남만, 대식의 무리 20만을 지휘하여, 동쪽으로 향해 적을 토벌했다. - 구당서

정묘일, 광평군왕 이숙이 천하병마원수가 되었고, 곽자의가 그를 보좌하였으며, 삭방, 안서, 회흘, 남만, 대식의 병사로 안경서를 토벌하였다. - 신당서,

정해일, 원수 광평왕 이숙이 삭방 등의 군대 및 회흘, 서역의 무리 15만을 거느리고, 20만이라 칭하면서, 봉상을 출발했다. - 자치통감

이로써 모든 병력이 합류하고 준비를 마친 당군은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봉천 출격 당군 구성.

<군사령부>
<군 실전지휘>
<군 구성>

4.3.2. 양경 탈환전(I) : 항적사 전투 - 장안의 탈환.

당군이 장안 근교까지 도달한 것은 9월 27일(임인일). 당군은 장안 서쪽에 위치한 항적사 북쪽, 풍수의 동쪽에 진을 첬다. 이에 안경서의 연군 또한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장안을 나온다.

당군은 충분한 전력을 모아 봉상을 나왔으나, 장안은 결코 만만한 도시가 아니었다.
수당시기 낙양과 함께 최대의 대도시인 장안을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대규모 회전을 치러 지키던 병력을 완파해 버리고 무혈입성하던가,[43] 그게 아니라면 치열한 시가전[44]을 치러야만 했던 것. 당연히 당군도 회전 또는 시가전을 벌일 각오를 하고 동진했다 봐야 할 것이다.

전투의 전개는 양적으로 열세이나 기병전력이 우세한 연군이 진지를 끼고 치고 빠지는 형태로 전술을 펼치고, 당군은 진지를 압박하면서 연군의 교란작전을 격퇴해 나가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연군이 진문을 열고 대규모 강습에 나서 치중을 불태우려 하자 이미 고선지 휘하에 있을 때부터 유명했던 이사업이 "오늘 몸으로 역적에게 먹이지 않으면 군대에 남을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면서 웃통을 벗고 긴 칼을 잡고 진영 선두에서 무쌍난무를 벌여 수십명을 처죽여 이를 저지하기도 했으며, 도지병마사 왕난득이 그의 부장을 구원하다가 화살이 눈썹에 맞아 가죽이 벗겨져 눈을 가리자 화살을 스스로 뽑아 얼굴이 피범벅이 되면서도 격렬한 전투를 거듭하기도 했다.

전투가 당에게 우세하게 넘어간 것은 정예 기병을 동쪽으로 우회시켜 후방을 강습하려던 연군의 의도를 회흘군을 지휘하던 복고회은이 눈치채고 이를 막아낸 때부터이다. 이로인해 적의 기세가 꺾이자 이사업은 자신이 이끌던 전군에다가 회흘 병력들을 합처 연군의 후방으로 돌아들어가 전면에서 공세를 펼치던 중군 및 후군과 함께 정오부터 오후 6시까지 연군의 진영을 향해 맹공을 가해 결국 연군이 6만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면서 무너져 내리는 것으로 전투가 종료. 안수충, 이귀인, 장통유, 전건진 등이 이끈 연의 잔존 병력은 장안으로 도주한 다음 그날 밤 동관을 거처 낙양으로 도주. 당군은 28일 장안으로 입성하여 당의 수도 장안을 탈환한다.

과거 봉상에서 당숙종은 회흘에게 "성에서 이기는 날에 토지와 사인과 서민은 당으로 돌리고 황금과 비단, 그리고 자녀는 모두 회흘에게 돌려주겠다"라고 약속한 바 있다. 즉 약탈을 허용하겠다는 것. 항적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장안에 입성한 회흘군이 이러한 약속대로 행하려 하자 광평왕 이숙이 지휘관인 엽호를 "지금 처음으로 서경(장안)을 얻었는데 만약 갑자기 포로로 잡고 약탈하면 동경(낙양)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역적을 위하여 굳게 지켜서 다시 차지할 수 없게 될 것이니, 바라건데, 동경에 도착하면 마침내 약속대로 하시지요"라고 절까지 해 가면서 말렸고, 이에 엽호는 맞절을 하면서 이숙의 요청을 받아들이겠다고 한 후 회흘과 서역의 군대를 장안성 내가 아닌 성 밖 남쪽으로 이동시켜 진영을 세운 후 통제하였다. 이에 약탈의 공포에 떨던 장안성의 백성, 군사, 호족 포로들은 광평왕 이숙에게 울면서 절을 하며 감사해했다고 한다.

장안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29일 봉상으로 전해졌다. 이 소식에 당숙종은 성도로 사신을 보내 당현종을 모셔오기로 하고 그 자신도 장안으로 들어갈 채비를 한다. 검남도 하나 주면 거기서 혼자 살겠다는 당현종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려서 당숙종이 봉상을 떠난 것은 약간 늦은 10월 19일이았으며, 10월 22일 장안에 입성한다.

4.3.3. 양경 탈환전(II) : 신점 전투. - 낙양의 탈환.

장안성 함락 후에도 당군의 전진은 멈추지 않았다. 동관에서 당군은 퇴각하는 연군의 뒤를 잡아 5천여 명을 참살했으며 화음과 홍농에서도 승리를 거두고 포로 100여 명을 관중으로 헌상하기도 했다. 장통유 등 장안을 지키던 연군이 낙양에 도착하자 안경서는 낙양을 지키던 방위병력을 총동원해 당군을 막고자 출격시켰고, 낙양 근교인 신점에서 다시 당군과 조우한다.

신점 전투는 항적사 전투와 약간 전개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낙양의 방위병력을 총동원, 15만에 달하는 전력을 구축한 연군은 산을 의지하며 진을 치고 곽자의 등이 이끌던 당군과 교전한다. 그러나 곽자의가 거짓 퇴각으로 연군을 끌어낸 후 미리 남산 북쪽으로 따로 떼어내 주둔시켜 놓았던 회흘 및 서역군으로 하여금 그 후방을 가격하게 하여 연군의 전열을 붕괴시켜 격파한다.[45] 이에 지휘관이었던 엄장과 장통유 등은 섬성을 버리고 동쪽으로 도주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안경서 또한 10월 16일에 낙양을 버리고 하북으로 도주하면서 낙양 또한 회복된다. 도주하면서 안경서는 가서한과 정천리 등 그때까지 포로로 잡았던 당의 장수 30여 명을 모두 죽이고 떠났다고 한다.

낙양이 함락되면서 회흘은 당숙종이 약속한 대로 낙양을 약탈하려고 했다. 통감의 서술로 볼때[46] 낙양으로 오는 길에 함락한 도시들에서 회흘은 약탈을 수행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에 이숙은 회흘의 낙양 약탈을 막기 위해 부로들을 통해 비단 1만여 필을 거두어 회흘에게 뇌물로 바첬고, 회흘은 이를 받고서야 약탈을 멈추게 된다.

양경 탈환전을 진두지휘하면서 곽자의는 당대 최고의 장군이자 안녹산의 난 진압의 최고공로자 구국영웅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당숙종은 곽자의에게 "나(당숙종)의 집안과 나라는 경을 통하여 다시 만들어졌소." 하며 위로할 정도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로써 당대의 장수들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전공과 명예를 쌓게 되었기에 이후 당 조정내 여러 인물들의 견제를 심하게 받기 시작한다.

낙양의 탈환소식은 당숙종이 장안에 도착할때에 맞추어 전해졌다. 이에 병사와 백성들이 환호했다고 한다. 이로써 당숙종은 대반격의 목표였던 양경의 탈환을 실현하는 데 성공했다.

4.3.4. 수양성 함락

장안-낙양 축선에서 이 반란의 메인 매치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수성전 마스터 장순과 윤자기가 맞붙은 수양성 공성전은 계속 이어졌다. 수양성은 이미 7월에 식량이 바닥났는데, 원래는 수양에 허원이 6만석의 양식을 비축해 놓았기에 본래대로라면 여유가 있었으나, 괵왕 이거가 허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양성의 식량의 절반을 복양, 제음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제음이 안녹산군에 투항(756년 12월)해 버리면서 외부로 옮겨놓은 식량을 먹을 길이 없어져 버린것. 덕분에 식량부족으로 사실상 함락 직전까지 몰렸고, 7천여에 달하던 병사들 또한 7월에는 1천 600여 명까지 감소해 버렸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장순은 다시 3개월을 버텼다. 한계에 몰린 시점에서도 경이로운 근성 수성 능력을 보여준 장순에게 질릴대로 질린 윤자기는 수양성 주변에 목책을 쌓아 굶기기로 항복시키려 했으나 장순은 여기에도 끝끝내 저항했다. 그러나 초군에 있던 허숙기[47] 팽성에 있던 상형, 임회에 있던 하란진명 등 근처의 당군은 오히려 서로 견제하느라고 구원을 거부했다. 이런 사태가 난 이유는 하린진명은 하남절도사로써 책임이 있었으나 방관또 이 인간이냐과 사이가 안좋아 방관이 임명한 허숙기가 자신을 공격할까봐 움직이질 못했다는 것이다.아무리봐도 반란군이 강해서 진압이 안된다기보다 지들끼리 이전투구가 안멈추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더하지만 정작 장순과 허원은 '언젠간 저들이 구원오겠지.' 하는 희망을 가지고 버텼고, 겨우 영릉의 병력 3천만이 수양성 구원에 나서 성 외곽을 포위하던 윤자기군의 후방을 급습해 뚫고 수양성에 도착하나 수양성에 도착했을때는 고작 1천만이 남았다고 한다.

결국 10월 6일, 식인까지 해 가며 버티던 수양성은 함락된다. 함락 당시 수양성에는 단 400여 명만이 남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성을 함락시킨 윤자기는 장순 이하 36명의 장교들을 처형하고 허원은 산채로 낙양으로 보냈다.[48] 하란진명을 대신해 하남절도사직에 오른 장호가 절동, 절서, 회남, 북해절도사들에게 격문을 돌리며 수양성을 구원하고자 시도했으나 수양성 함락 4일 뒤에야 도착했다.

이로써 치열하게 버티던 수양성은 함락되었고, 하남의 나머지 지역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수양성이 함락될 때에는 이미 당의 주력부대가 장안을 토벌하고 낙양에 접근하고 있었다. 결국 수양성 함락 10일 후에 낙양까지 당군에 의해 탈환되었으며, 이에 병사들이 동요하면서 수양성에서 승리를 거둔지 딱 13일만에 윤자기도 병사들의 손에 살해되었고, 휘하 부대는 당에 투항했다.

4.3.5. 하남, 하동의 평정

낙양까지 당의 손에 탈환한 후 광평왕 이숙과 곽자의는 군을 재정비한다.

회흘을 비롯한 이민족군은 전투력은 강력했으나 앞서 말한대로 각종 수단으로 약탈을 방지했지만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약탈피해도 너무 컸기에 각자의 본국으로 귀환시키고, 낙양을 토벌한 군대를 일부 쪼개어 하남, 그리고 하동 지역의, 아직 연의 손에 남아있는 지역으로 파견해 탈환하도록 한다.

좌우병마사 장용제, 우무봉사 혼석지가 하남으로 파견, 장용제와 혼석지는 하양 하내를 탈환했고, 영천에서 회남서도절도사 내진과 격전을 벌이던 전승사는 무령순과 함께 하북으로 도주했다. 이후 하남절도사 장호는 노경, 내진, 오왕 이지, 이사업, 이환 등 다른 다섯 절도사들과 함께 하남과 하동의 각 군현을 돌면서 연의 세력 하에 있던 군현들을 공략, 북해를 점거한 내원호와 대동을 점거한 고수암을 제외한 다른 군현 전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4.3.6. 사사명의 귀부

낙양을 탈출한 안경서는 업군으로 도주, 그곳을 수도로 삼고(업군을 안성부(安成府)로 개칭) 연호를 천성(天成)으로 고첬다. 이는 저항 의지를 공고히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항복해봤자 황제까지 칭한 인간에게 돌아올 것은 잔혹한 처형뿐이겠지만.

업성에 처음 도착했을때 안경서를 따르던 병력은 보병 천여명, 기병 삼백여 명뿐이었으나 열흘만에 상당에서 온 채희덕, 영천에서 내진과 싸우다 낙양 함락소식을 듣고 탈출한 전승사, 남양에서 온 무령순 등이 합류. 여기에 하북에서 추가로 병사들을 긁어모아 6만여에 달하는 병력을 다시 모았다.

그러나 이미 사사명과 안경서의 세력차는 역전되었다. 안경서가 낙양을 탈출하면서 그를 따르던 북평왕 이귀인과 휘하의 예락하[49]와 동라[50], 육주호[51] 수만여 명이 범양으로 도주해온 것을 사사명이 대부분 흡수하고 반항하던 동라는 격파하자 사사명은 명백하게 안경서보다 더 강력한 세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안경서는 이를 시기해 범양으로 아사나승경과 안수충을 파견, 범양에서 지원병력을 긁어모음과 동시에 은밀히 사사명을 처리하고 그 세력을 흡수할 기도를 보였다.

그러나 사사명 또한 안경서를 더이상 따를 생각이 없었다. 사사명이 진심으로 따른 것은 안녹산이었지 안녹산을 죽인 것이 확실시되는 안경서는 아니었으며, 거기다 당에 의해 장안과 낙양을 상실하자 누가 봐도 세가 기울어진 것처럼 보이던 것이 이시기의 상황이었다. 이에 경인지와 오승자가 '뭐하러 역적 안경서와 운명을 같이하려 하나요? 당에게 귀부하면 용서받고 잘살수 있음' 하면서 사사명에게 유세하자 사사명은 이에 동의한다.

사사명은 아사나승경과 안수충이 5천여 기병을 이끌고 범양에 도착하자 이를 환대하는 척 하다가 사로잡은 후 휘하 장수인 두자앙을 보내 범양 일대의 13개 군과 8만에 달하는 병력을 들고 당에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대동을 지키던 (연 세력 하에서의) 하동절도사 고수암도 이 소식을 듣고 당에 귀부할 뜻을 밝힌다.

이 소식을 듣자 당숙종은 몹시 기뻐하면서 사사명에게 범양절도사의 관직과 귀의왕이라는 작위를 내리고 사사명의 아들 7명에게 모두 고위 관직을 제수했다. 동시에 오승은과 내시 이사경을 파견해 사사명으로 하여금 안경서 토벌에 동참할 것을 명령한다.

사사명은 이에 따른다. 안경서가 임명한 상산태수 장충지를 불러들이고 설악을 파견해 섭항주자사로 삼음과 동시에 정형을 장악, 조군태수 육제를 불러들여 항복시키고 그의 아들인 사조의를 파견해 섭기주자사, 영호창을 박주자사로 임명하여 하북의 안경서 세력을 평정하게끔 한다. 여기에 오승은이 하북을 돌면서 사사명이 당에 귀부했음을 밝히는 조서를 선포하자 창주, 영주, 안주, 심주, 덕주, 예주 등 하북 북부의 각 주들도 다시끔 당으로 귀부한다. 이는 이미 사사명이 안경서보다 더 강력했고, 하북에서의 사사명의 영향력이 안경서보다 더 컸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로써 연 세력은 업성 주변으로 축소되었고, 반란은 사실상 종결 국면으로 치달았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4.3.7. 안록산의 난 전후 처리

12월 3일, 당현종 또한 성도에서 장안으로 돌아온다. 형식적이긴 하나 당숙종은 당현종에게 황제로 복귀하라 하였으나 당현종은 이를 사양하였고 그가 황자시절 거주했던 흥경궁으로 가서 머문다. 두 황제의 만남은 당의 조정 대신들에게는 사실상 반란 종결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사실상 안록산 반란이 진압 국면에 도달한 것으로 보이자 당은 안녹산에게 귀부했던 여러 관리들에 대한 처벌 논의가 수면으로 부상한다. 안녹산이 낙양, 장안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여러 신하들이 안녹산에 붙었었기 때문.

모조리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강경파와 경중에 따라 나누어 너그럽게 처리해야 한다는 신중파의 논의 끝에 당숙종은 신중파의 의견대로 죄질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어 죄를 처벌하기로 정한다. 죄질이 가장 중한 자는 저자거리에서 사형, 그 다음이 자결 명령. 자결 다음이 곤장 100대,[52] 그 다음은 귀양을 보내고, 그나마 경한 것이 벼슬 삭감의 순.[53]

12월 29일, 죄가 가장 중하다 판단된 달해순[54] 이하 18명을 저자거리에서 참수, 진희열[55] 등 7명에겐 자결을 명령했다. 곤장은 경조부의 문에서 때렸다.

이때 당숙종은 전에 장기에게 목숨을 건진 적이 있었다.[56] 이런 이유로 인해 진희열과 함께 안녹산의 재상으로 임명되었던 장기와 장균 형제[57]의 목숨을 부지시켜 주려고 했다. 그러나 상황인 당현종이 이 둘이 자신의 사위임에도 불구하고 처벌을 강경하게 주장했기에 결국 장균은 죽고 장기만이 간신히 유배로 끝나는 일이 있었다.
황상(숙종)이 장균과 장기의 죽음을 면제시키려고 하니, 상황(현종)이 말했다.
"장균과 장기는 역적을 섬겼고, 모두 권세가 있는 요직을 맡았다. 장균은 역적을 위하여 우리 집안의 일을 훼손하였으니 죄는 사면할 수 없다."

황상은 머리를 조아리며 두 번 절하고 말했다.
"신은 장열 부자가 아니었으면 오늘날이 없었습니다. 신이 장균과 장기를 살릴 수 없어서 죽은 사람( 장열)로 하여금 알게 하면 구천에서 무슨 면목으로 장열을 보겠습니까!"

이어서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상황은 좌우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상을 붙잡아 일으키도록 하며 말했다.
"장기는 너 때문에 남령 이남으로 오랫동안 유배시키겠으나 장균은 반드시 살릴 수 없을 것이니 너는 다시 구하려고 하지 마라."

황상이 울면서 명령을 좇았다. - 자치통감

이런 기록을 보면 당현종이 무기력했다느니 하는 게 거짓으로 보이기도 하는 듯. 이러한 당현종의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은 후에 당숙종과 당현종 사이에 틈이 생기는 화근이 된다.

어쨌든 당숙종은 신중파의 의견대로 경중을 나누어 처벌했다. 그러나 후에 안경서에게서 다시 당으로 귀부하려던 사람들이 진희열이 죽었단 소식을 듣고는 행동을 멈췄다.는 이야기를 듣자 이마저도 후회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사마광'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 왜 후회하는 건데?' 하면서 이런 분위기를 비판했다.

또한, 양경 탈환의 명목상 최고지휘자인 광평왕 이숙을 초왕으로 삼고 곽자의, 이광필을 사공으로 삼았으며 이징과 노역, 장청[58], 안고경(顔杲卿)과 원이겸(袁履謙)[59], 허원, 장순[60] 장개연[61] 방견[62] 등 당을 위해 목숨바친 충의지사들의 관직을 추증하고 그 자손들에게 조세와 부역을 고작 2년간 면제시켜주었다.

5. 영왕 이린의 난과 진압(756년 ~ 757년)

안사의 난이 한참 시끄러울 때에 막간극으로, 영왕 이린이 반란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영왕 이린은 당현종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당현종 곁에서 자랐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항상 그(현종)를 끌어안고 잤다고 한다. 당현종이 촉 땅으로 들어가면서 아들들을 여기저기 보내 절도사로 세워 각지를 통제할때 영왕 이린 또한 강남으로 보내졌다.

근데 이 사람이 안녹산이 한참 기세등등한 것을 보고 또한 풍요로운 강동 강남의 재화를 획득하자 '천하가 한참 소란스러우니까 금릉( 남경)을 장악하고 있으면 동진처럼 될 수 있겠다.'는 야심을 품어버렸다. 그리고 실제로 분리독립을 시도한다. 이 반란은 당, 그리고 안녹산 진영 양측의 주목을 끌어 공격을 받았으나 이린은 오히려 당의 저지를 뚫고 안녹산 진영까지 공격해 안녹산 휘하의 숙장 중 한명인 아사나승경까지 항복시키기도 했다.

이 반란은 1년이 채 안돼서 진압된다. 당은 이린을 진압하기 위해 회남절도사, 회남서도절도사를 설치하고 강동절도사와 함께 이를 진압하게끔 하자 이린은 곧 세력을 잃었으며 결국 강서채방사 황보신에게 사로잡혀 죽는다. 그런데 당숙종은 이린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황보신은 이미 나의 동생을 산 채로 잡았는데, 어찌 그를 촉으로 보내지 않고 멋대로 죽였는가!" 힐책하면서 황보신을 파직시켜 버렸다.

여담으로, 시선 이태백이 이때 이린의 편에 섰다가 토벌 이후 귀양을 갔는데, 곽자의와 인연이 있어서 곽자의의 옹호로 인해 용서받았다. 이 때문인지 곽자의는 이태백이 황실 시인으로서 일할 때의 황실 일원들 제외하면 동시대 인물로는 유일하게 이태백의 찬양을 받은 인물이 되었다.

6. 758년

6.1. 정부 재정비

758년 새해, 당숙종 연호 건원으로 바꾸었다. 이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으로 사실상 난의 종결을 선언하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때부터 다시 년도 표기를 '~재(載)' 에서 '~년(年)'으로 바꾸었다. 즉, 758년은 건원 원이다. 또한 전국에 조서를 내려 758년 세금 중 '조(租)'(전세)와 '용(庸)'(요역)을 면제했다. 여기에 개원 16년 시작된 달력 개정이 완료되었다.

또한 초왕[63] 이숙을 성왕으로 삼았다가 5월에 결국 황태자로 삼았다. 또한 최원을 태자소사로 삼고 재상이었던 이린을 소부로 삼았다. 채방사직을 이름을 바꾸어 관찰사[64]로 명명하기도 했다. 안동부대도호 왕현지를 영주자사·평로절도사로 임명했고 장호를 형주방어사로, 대신 예부상서 최광원을 하남절도사로 삼았으며 이사업을 회주자사·진서·북정행영절도사로 삼았다. 또한 방관이 빈객들을 통해 뻔뻔하게 재상 복직을 청원하자 죄를 일일이 따져서 오히려 빈주지사로 좌천시켰다.

대외적으로는 회흘을 공식적으로 책봉하고 당숙종의 어린 딸인 영국공주와 결혼시켰다.

이러한 행보는 반란이 진압되었고 평화의 시대가 돌아왔다는 것을 내외에 과시하는 행위였다.

6.2. 사사명의 재봉기와 하북 토평 시도

업으로 쫓겨가고, 하남과 하동에서 완전히 추방되었으며, 사사명의 귀부로 본거지인 범양에서까지 유리되었으나 안경서의 연 세력은 아직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업을 기반으로 7개 군과 60여 성을 점거해 버티고 있었으니 아직 세력이 제법 있긴 했던 편. 비록 안경서를 따르던 세력이 지속적으로 이탈하고(연의 북해절도사 내원호 귀부(2월 1일), 평원태수 왕간, 청하태수 우문관이 당에 항복(4월)) 있었으나, 사사명을 제거하자는 이광필의 의견에 당숙종이 동의했다가 이게 뽀록 발각되면서 사사명이 재봉기한다. 사사명이 다시 반기를 들면서 안경서를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사사명과 협력하여 반란이 다시 커질지 모른다는 위험요소가 발생했다.

이에, 당 조정은 9월 21일. 삭방절도사 곽자의, 회서절도사 노경, 흥평절도사 이환, 활복절도사 허숙기, 진서·북정절도사 이사업, 정채절도사 이광심, 하남절도사 최광원, 하동절도사 이광필, 관내·택로절도사 왕사례 등 9명의 절도사와 평로병마사 동진에게 지휘권을 주어 9절도사들의 20만 병력을 동원, 업의 안경서를 토벌하게끔 했다. 이들은 하나하나가 지금까지의 전란 속에서 여러모로 활동한 유능한 장수들이었고, 병사들의 질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후에 60만으로 규모만 증가하면서 다수의 투항병, 합류한 현지 단련병과 의병이 대거 합류해 평균적인 질적 수준이 격감하게 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또한 이때의 토벌군은 당 중후기의 당군의 형태, 즉 다수의 절도사들이 각지의 세력권에서 군을 이끌고 합류하는 연합군적 성격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양경 토벌시 이민족 군대까지 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통합된 지휘부와 지휘체계를 갖추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통일성이 많이 감소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다, 이 토벌군에는 총사령관이 없었다. 곽자의와 이광필이 너무 공적이 크다보니 서로 복종하기 힘들고, 다른 사람의 명은 당연히 들을 리가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한 숙종이 총사령관(원수)를 두지 않고 대신 환관인 어조은을 관군용선위처치사로 삼아 각군의 연락과 연합작전만 관장하게 해 버린것.

토벌군은 10월, 하북으로 들어갔다. 곽자의가 선두로 황하를 건너 연의 장수인 안태청을 격파하고 위주로 몰아넣자 노경, 이광필, 최광원, 이사업이 제각기 황하를 건너 위주에서 곽자의와 합류. 안경서가 7만에 달하는 전병력과 최건우, 전승사를 이끌고 위주 구원을 시도하나 곽자의가 궁병 3천여를 보루에 매복시켜 기습 공격을 가하자 참패, 업성으로 도주하자 남은 절도사들도 모두 업성에 결집해 안경서를 포위한다. 이 과정에서 안경서는 그나마 있던 병사들 중 3만여 명을 다시 상실했다. 이후 공성과정에서 이사업이 비록 화살에 맞고 전사하나 전황은 당군 측에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사사명이 안경서를 구원하기 전까지는.

또한, 이때에 평로절도사 왕현지가 병사하자 비장이던 이회옥이 왕현지의 아들을 죽이고 고종사촌형인 후희일을 절도사로 내세우는 일이 있었다. 후에 이회옥은 당 조정으로부터 '정기'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이정기'가 된다. 바로 이정기의 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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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현종은 천보 3년부터 '년'(年) 대신 '재'(載)를 쓰도록 했다. [2] 각 군진의 담당자. [3] 실제로 아들인 안경종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안녹산이 "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아들을 죽인단 말인가!"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4] 당현종의 아들. [5] 안록산의 사촌. [6] 한 달이나 되는 시간을 벌었다는 것에는 높은 평가를 줄 수 있다. 나라 꼴이 정상적이었다면 애초에 반란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겠지 저 한 달 동안 후방의 병력을 결집하여 끌어올렸어야 한다. [7] 번장, 즉, 이민족으로써 자기 부족의 병력을 이끄는 장수. [8] 삭방좌상병마사 이광필, 우상병마사 고준, 좌무봉사 복고회은, 우무봉사 혼석지( 혼감, 통칭 혼태사의 아버지) 등 [9] 참고로 이지와 이수는 둘 다 종실이다. 현종은 자식들을 홀대한 것과는 달리 종실, 특히 자신의 형제들과 정이 깊은 모습을 보여왔고, 그로 인해 종실들은 이런 대위기 극복을 위해 앞장섰다. [10] 역사적으로 통칭 호연(胡燕). [11] 또는 하동절도부사. [12] 전부 끌고 나왔을 리는 없으니 10만은 어디까지나 ' 호왈'일 가능성이 높다. [13] 사사명은 기병 운용에 숙련성과 자신감을 가진듯 이전에도 이후로도 대규모 기병부대를 주력으로 운용한다. [14] 일단 오초칠국의 난의 사례도 있었으며, 실제로 가서한의 부하인 고구려계 유민 출신인 왕사례가 기병 30여 명으로 양국충을 동관으로 납치해 죽여버리려다가 가서한이 말려서 그만두기도 했다.아깝다 [15] 雍丘, 현재의 하남성 사현. [16] 안녹산이 바로 전해에 동평군왕직을 받았다. [17] 삭방절도사였다가 안녹산이 봉기하자 호부상서로 임용되어 조정에 입사했다. 안사순이 안녹산의 일족이었기 때문에 감시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8] 천하 사람들이 안사순의 죽음을 억울해해였다. 그래서 안사순은 안사지란 평정 뒤, 곽자의의 주청으로 누명을 벗게 된다. [19] 구당서에 따르면 '안녹산이 병사에 의거하면서, 양국충 주멸하는 것으로 명의를 삼고 있으니 만약 병력 3만 남겨서 관을 지키게 하고, 정예로 모두 돌려 양국충 주멸하면, 이는 한나라가 7국을 꺾은 계책인데 해보는 게 어떻습니까?'이라고 가서한에게 건의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20] 왕사례가 기병 30명으로 납치했었다고 통감이 전한다. [21] 이후 화발귀인은 안녹산에 의해 처형당하였다. [22] 이후 가서한은 나중 안경서가 낙양을 탈출할 때 그동안 억류되어 있었던 다른 조정 대신들과 함께 살해당한다. 그의 아들은 당덕종 시기 4진의 난 진압에 투입되었으나 별 활약은 못했다. [23] 일단 당현종은 안사의 난을 불러들인 최종 책임자이나 의외로 들릴지 모르지만 말년까지 백성들의 원망을 심하게 산 적이 없었다. 말년에 당숙종 옹립파의 경계와 두려움을 산 것도 이 때문이다. [24] 일 수도 있다. [25] 이필과 함께 숙종의 또다른 친구였던 왕충사는 벌써 사망한 상태였다. [26] 안진경에게 합류한 인물로 군사적 재능이 있었는지 안진경은 그에게 자신이 이끈 의병의 지휘권을 전담시켰다. [27] 사사명은 오승은을 상당히 후대했는데, 이는 다른 비슷한 장수들의 운명을 보면 운이 좋아야 억류당했다 살해당했던 걸로 끝난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사사명이 오승은의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인맥빨 그러나 사사명의 재봉기 당시 오승은이 당 조정의 명에 따라 사사명을 제거하려 시도하다가 사사명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28] 왕연은 청담사상가로, 영가의 난으로 서진의 멸망을 가져온 주역 중 하나다. [29] 이는 안사의 난 진압 이후에도 복고회은의 난, 사진의 난, 주차- 이회광의 난 등으로 대표되는 당 중후기의 연속적인 번진 반란이 일어나는 근본 요인이 된다. 또한 과도하게 늘어난 절도사들과 그들이 지휘하는 군사력은 당의 재정상황을 심각하게 압박하며 이를 유지하기 위한 과도한 증세는 결국 당의 멸망을 가져오는 황소의 난이 일어난 근본적인 요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0] 張忠志, 이전까지 안충지라고 불리고 있었으나 양부의 성씨인 '장'으로 복귀. [31] 현재의 산서성(山西省) 현재의 이지역의 성회 소재지도 타이위안 시(太原市), 즉 태원이다. [32] 태원 전투 당시에는 아직 사사명에게 안녹산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33] 上黨. 산서성 장차시. [34] 이후 정천리는 낙양으로 이송돼 억류되어 있다가 안경서가 낙양을 탈출할때 가서한과 살해당한다. [35] 호북성, 형주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36] 환관으로써 장군의 일을 담당하게 하여 붙여진 명칭. [37] 요령성 조양시 일대를 본영으로 한다. [38] 사실 회흘에게 이만큼 지원을 퍼주었더라도 당과 대등해지기까지는 10여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으니 당이 이 반란을 안녹산의 난에서 끝냈다면 회흘이 지나치게 커지기 전에 이이제이 등의 방책으로 제어를 시도할 수도 있었겠지만, 사사명의 난으로 반란이 더 길어져 회흘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사명을 섣부르게 건드린 것이나 상주에서 9명의 절도사들을 지휘할 원수를 임명하지 않아 결국 패하게 만든 것도 결국 당숙종에게 일정부분 책임이 있는 일이니만큼 더욱 아쉬운 일. [39] 황실에서도 유력한 인물로 부상한 데다 확실히 군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담이 살아있었다면 당대종~당덕종~당헌종 시기 혼란했던 당의 어려움이 어느 정도 줄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많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40] 그러나 토번은 막대한 재화를 받고도 당군이 빠지자마자 냉큼 농우번진의 처소가 있는 서평을 함락시켰다. [41] 장안과 낙양. [42] 인명이 아니라 투르크 작위 야브구. 친왕에 비견된다. [43] 약간 다르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20만에 달하던 동관 수비군이 완파당하면서 거대한 장안을 지킬 병력이 없어 도주한 당현종이 비슷한 사례일 것이다. [44] 봉상청이 안녹산을 상대로 근성있게 벌인 낙양 시가전이나 후의 신책군을 지휘하는 이성이 주차-이회광의 난 당시 치른 장안 탈환전과 같은 공성전. [45] 구당서에 따르면 이때 회흘군을 지휘한 것은 이사업이다. [46] '회흘은 속으로 아직 만족하지 않으니 이숙은 그것을 걱정하였다. - 자치통감. [47] 영창태수이나 영창이 포위당하자 초군으로 철수. [48] 낙양으로 가던 중 허원은 살해된다. [49] 曳落河, 안녹산 휘하의, 안녹산과 의형제를 맺어 놓았던 이민족 출신 정예부대 [50] 同羅, 철륵의 일파. 현재의 몽골 울란바토르 시 북부를 기반으로 하는 당의 부용 이민족. [51] 六州胡, 동북방 일대 6개 기미주에서 안녹산에 호응해 온 이민족들. [52] 당연하지만 곤장 100대 맞으면 무조건 죽든가 재수 좋아 살아도 평생 불구 내지 앉은뱅이 신세다. 그래서 귀양형보다 등급이 높은 것. [53] 마지막 등급은 죄가 없는 자이며, 당연히 처벌도 없다. [54] 안녹산이 스스로 황제를 칭했을때 시중직에 오름 [55] 천보 연간의 재상 중 한 명이었으나 이 시기 관직을 잃었었는데 안녹산의 장안 함락시 안녹산에 붙어서 연의 재상이 됨 [56] 좀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천보 6재(년)에, 충왕 이형(후의 당숙종)이 왕충사(이시기의 하서-농우절도사로 군부의 N0.1이었던 인물. 어린시절 당현종이 데려다 키웠던지라 충왕 이형과 불알친구였다.)과 함께 반역을 일으키려 했다는 이림보의 무고로 인해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것을 장기와 고력사가 적극적으로 감싸고 이형 자신도 근신했기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일이 있었다. 일단 일이 터졌다 생각될 경우 아들에게도 상당히 냉정했던 당현종이니만큼 말 그대로 구사일생했던 셈. [57] 당현종 시기의 명신이었던 장열의 아들들이었다. [58] 이상 셋은 낙양 함락시 당에 충성을 바치다 죽었다. [59] 이 둘은 상산에서 반 안녹산 봉기를 이끌다 죽었다. [60] 이 둘은 수양성을 지키다 함락되면서 죽었다. [61] 하남절도사로 임명되어 진류에서 안녹산을 막으려다 죽었다. [62] 연천에서 패사. [63] 양경 함락의 공적으로 광평왕->초왕. [64] 조선 도(행정구역) 장관 관찰사의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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