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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자츠그루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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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자츠그루펜의 사진

1. 개요2. 조직3. 역사
3.1. 폴란드에서의 전쟁범죄3.2. 폴란드전 이후 일시적 해체3.3. 독소전쟁 당시의 학살
4. 협력자들과의 관계5. 주요 학살 요약6. 절멸 수용소와의 연관성7. 전후(특수작전집단 재판)8. 관련 문서

1. 개요

친위대의 사설 무장부대이며 인종말살만을 목적으로 삼은 나치 독일의 민간인 학살 전문부대이다. 공식적인 본래의 명칭은 '보안경찰 및 보안국 특수작전집단(부대)'이라는 뜻의 Einsatzgruppen der Sicherheitspolizei und des SD(아인자츠그루펜 데어 지허하이츠폴리차이 운트 데스 에스데)이며 비공식적으로 줄여서 '특수작전집단'이라는 뜻의 Einsatzgruppen(아인자츠그루펜)으로 통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의 번역명에는 각 백과사전마다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위의 특수작전집단과 더불어 '특무부대(Task force)', 혹은 '전개집단(Deployment Groups)' 등이 자주 쓰인다.

2. 조직

기본적으로 SS 게슈타포로 이루어진 부대였던 이들은 당시 친위대 국가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와 보안국(SD)과 보안경찰(Sicherheitspolizei, 약칭 SiPo)의 총사령관이며 친위대 돌격대지도자(SS소령)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감독과 지시에 따랐다. 이들은 오스트리아 병합, 체코슬로바키아 병합, 폴란드 침공, 독소전쟁과 같이 독일이 동부로 영토를 확장하려 할 때마다 보안경찰 혹은 국가보안본부에 의해 조직되었다. 아인자츠그루펜의 지휘권은 1942년 5월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영국 특수작전행정부(SOE)의 요원들과 체코인들에게 암살당해 죽을 때까지(유인원 작전) 계속 맡았다고 하며, 하이드리히가 죽고 난 이후 아인자츠그루펜의 지휘권은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에게 넘어갔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인종 청소 및 학살에 뛰어든 것은 독일이 소련에 침략전쟁을 개시한 이후이며, 아인자츠그루펜은 히틀러가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자살할 때까지 제3제국이 점령한 각 지역에서 인종-정치적 적대 세력의 학살 임무 및 장애인 학살 임무를 수행하였다. 본부는 베를린의 프린츠 알브레히트가 8번지(Prinz-Albrecht-Strasse 8)에 있는 국가보안본부(RSHA)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3. 역사

3.1. 폴란드에서의 전쟁범죄

폴란드 침공 직후의 아인자츠그루펜은 주로 지식인, 성직자, 정치가 등 지도자 층을 총살하는 학살을 저질렀다. 하지만 독소전쟁 이후 아인자츠그루펜은 유대인 및 집시, 공산주의자 등을 상대로 총살을 실시했다. 그 지휘관은 국가보안본부의 장교들로 임명되었는데, 아인자츠그루펜의 지휘관이 된다는 것은 국가보안본부에서 승진과 지위의 보전을 의미하기도 했다. 한편 그 지휘를 받는 대원은 일반 친위대 및 질서경찰 상급대장인 쿠르트 달루게 휘하의 치안경찰의 경찰관이 많았다.

아인자츠그루펜의 기원은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 당시 보안경찰장관이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독일군의 점령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공산주의자와 자유주의자 등 정치적인 적들을 심판 후 총살하기 위해 창설한 이동학살부대를 만든 것이 시작이다. 아인자츠코만도라 불린 이 이동학살부대는 1938년 9월에 주데텐란트 합병과 1939년 3월의 체코슬로바키아 보호령과 함께 규모를 확대했다. 주데텐란트에서 조직 개편 당시에 아인자츠코만도의 사령부로서 아인자츠그루펜이 처음으로 설치된 것이다.

그리고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의 점령 통치를 위해 아인자츠그루펜은 다시 조직되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1939년 9월 21일에 아인자츠그루펜의 지휘관들 앞에서 "폴란드의 지도자층, 지식인층을 뿌리 뽑을 것"을 훈시했다. 폴란드의 아인자츠그루펜은 1대, 2대, 3대, 4대, 5대, 6대, 폰 뷜슈 대의 일곱 부대로 구성되어 각각의 부대 휘하에 수많은 아인자츠코만도가 조직되었다. 폴란드 침공 당시 아인자츠그루펜의 대원 숫자는 2,700명이었다. 폴란드가 점령된 후 총살 대상이 된 것은 주로 교사, 성직자, 귀족, 훈공자, 퇴역군인 등의 폴란드 지도자 층 및 유대인, 집시 등이었다. 1939년 9월 1일부터 10월 25일에 걸쳐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에서는 폴란드 침공 당시 발생한 폴란드 민간인(15만-20만) 피살자를 제외하고도 16,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그런데 그 중 40%가 아인자츠그루펜이 저지른 학살이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1939년 9월 21일에 농촌에 거주하던 유대인을 도시로 모은 후 도시마다 유대인 평의회를 창설시켜 유대인을 일괄 관리하는 아인자츠그루펜의 지휘관들을 대상으로 조직적인 제거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3.2. 폴란드전 이후 일시적 해체

폴란드에서의 학살이 끝난 후 게슈타포와 유대인 담당 친위부대에게 주요 학살 임무가 넘어가면서 아인자츠그루펜은 해체되었고 대원들은 본인들이 원래 소속되어 있던 게슈타포와 보안국 등으로 복귀했다. 이후 독일군은 전광석화처럼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지방을 점령했지만 딱히 인종 청소를 위한 부대를 창설할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해 아인자츠그루펜이 조직되지 않았다.

3.3. 독소전쟁 당시의 학살

하지만 1941년 6월초 무장친위대는 앞으로 수행할 거대한 전쟁에서의 청소를 위해 다시 아인자츠그루펜을 부활시켰다. 그리고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시작된 독소전쟁에서 이들은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수많은 대량학살의 주력부대로서 활동을 펼쳤다.

파일:attachment/아인자츠그루펜/Kiev_Jew_Killings_in_Ivangorod_(1942).jpg
독일의 전쟁범죄 중 잘 알려진 사진 중 하나. 동부전선 이반고로드 인근에서의 유대인 민간인 학살. 사진은 원래 동부전선에서 독일로 보내지던 도중에 홀로코스트의 증거를 모으던 폴란드 레지스탕스에게 탈취되었다.[1]

파일:EMr61.jpg
아인자츠그루펜 D의 일원이 1942년 우크라이나 빈니차에서 시신들이 채워지고 있는 집단 학살 무덤 앞에 꿇어앉아 있는 유대인을 향해 쏘기 바로 전에 찍힌 사진. 이 사진은 1943년 미확인된 독일군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사진 뒤에는 "빈니차의 마지막 유대인"이라 쓰여져 있다. 사진 뒤에 있는 사람들은 독일 국방군[2], 독일 노동국과 히틀러 청소년단 소속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A0706-0018-030,_Ukraine,_ermordete_Familie.jpg
1941년 7월 4일 유대인 청소년을 총살하기 직전의 아인자츠그루펜 대원들. 소년의 가족은 이미 살해되어서 소년 앞에 시체가 되어 있다. 소년 오른쪽의 사람들은 부대원을 지원하는 독일인들 및 비독일인 부역자들이다.

1941년 7월 말과 8월 초 사이에 찍힌, 독일에 점령당한 라트비아의 리예파야 시에서 벌어진 유대인 집단 학살 영상. # 당시 리예파야 해변 사구에서 약 5천에서 7천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아인자츠그루펜과 보안국의 주도 하에 질서경찰(OrPo), 국방군(그 중에서도 육군 해군) 및 라트비아인 부역자들이 구덩이 속에 유대인들을 한 줄로 세우고 총살한 후 흙으로 덮는 것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영상에서 확인 가능하듯 수많은 국방군, 무장친위대, 민병대원들과 심지어는 주민들이 이 사건을 목격하고도 막지 않았으며, 오히려 구경하며 학살을 방관하였다.

이 영상은 라인하르트 비너(Reinhard Wiener) 해군 중사 코닥 8mm 필름 카메라를 통해 촬영하였다. 그는 동프로이센 메멜(현 리투아니아 클라이페다 시)에서 라트비아의 리가로 향하던 중 리예파야를 지나게 되었는데, 지역 주민인 한 여자아이와 잠깐 동행해서 걷던 도중 이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영상을 찍었다. 그가 현장에서 보란듯이 기록을 남기는데도 불구하고 제재는 거의 없었으며, 이는 당시 반유대주의가 무장친위대, 국방군, 심지어는 피점령국 현지인들까지 가리지 않고 얼마나 '일반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 알 수 있다. 촬영자인 비너 중사는 종전시까지 살아남아 전후인 1981년에 인터뷰를 통해 이 사건의 상세 정황을 설명하였는데, 그 인터뷰 영상 또한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의 공식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1941년 6월 27일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에서, 한 독일 육군 대령이 대중으로 둘러싸인 한 주유소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함성들과 박수 소리들이 있었다. 어머니들은 그들이 잘 보도록 하기 위해, 아이들을 높이 들어올렸다. 이 장교는 거기에 다가가서, 그가 참여한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콘크리트로 된 사형대에 중간 키에, 금발에, 대략 25세 가량 되어 보이는 남자가 묶여 있었다. 그는 손도끼로 짓눌린 상태였고, 그 도끼는 그의 가슴을 내리칠 기세였고, 그는 그런 상태였다. 그의 발 쪽에는 15에서 20구의 시체들 혹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배관을 통해 물이 흘러나왔고, 도랑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 사람의 몇 발자국 뒤에, 무장한 사람들의 감시를 받는 스무 명 가량의 사람들이 있었고, 자포자기하고 얼빠진 듯 보였고, 이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한 신호 후에, 다음 사람이 조용히 앞으로 나와, 도끼로 죽을 때까지 가격을 당했고, 각각의 가격은 구경꾼들의 환호를 받았다." 모든 희생자들이 살해되자마자, 이 금발의 살인마는 시체들 위에 올라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구경꾼들은 리투아니아 국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마치 이 도살극이 민족적 행사인 것처럼 말이다. - 독일 슈피겔 지 보도 중 일부

아인자츠그루펜 부대의 학살이 가장 대규모로 이루어진 것은 독소전쟁 당시였다. 독소전쟁에 앞서 1941년 6월에 동유럽과 소련 내에 존재하는 정치적인 적들을 총살하기 위해 아인자츠그루펜 부대가 다시 조직되기 시작했다. 이때 아인자츠그루펜은 A대, B대, C대, D대의 네 부대로 구성되어 각각의 휘하에 아인자츠코만도와 존더코만도라는 부대들을 창설했다. 소련 점령지에서 독일군에 대한 빨치산 활동이 격렬해지자 파르티잔, 공산주의자 등의 혐의가 의심되면 무조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기에 민간인의 피해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만 갔다. 그리고 전쟁 중에 나치는 유대인 절멸 계획을 추진했기에 아인자츠그루펜도 이 때문에 더 무자비한 학살을 저질러 희생자 숫자는 이전의 폴란드에서 아인자츠그루펜이 저지른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상승했다. 독소전쟁 당시 아인자츠그루펜 D의 사령관이었던 오토 올렌도르프의 증언에 의하면 1942년 봄에 하인리히 힘러로부터 여자와 아이들에 대해선 총이 아닌 가스 트럭으로 살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소련 점령지역의 무장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인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나중에 폴란드에서 약 20만명을 학살하였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1941년 8월에 하인리히 힘러 민스크를 방문시 아르투어 네베가 사령관으로 있는 아인자츠그루펜 B의 총살 광경을 시찰했는데, 시체를 본 하인리히 힘러가 기분이 나빠졌다고 한다. 이 때 힘러는 총 쏘는 법이 서투르다고 화를 냈다고 하며 이에 총살 외에 다양한 수단으로 학살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트럭의 배기 가스인 일산화탄소를 연결한 이동식 가스실을 트럭에 장착하여 희생자들을 죽이는 가스차(Gaswagen)였다. 가스차는 1941년 늦가을 동부전선에 처음 등장하였으며, 아인자츠그루펜이 작전을 수행하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유대인과 다른 희생자들 학살에 총살과 병행되어 사용되었고, 이러한 만행으로 독소전쟁 당시 아인자츠그루펜의 직접 학살 숫자는 약 85만 명~130만 명에 이른다. 다만 이 수치도 적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다수이다. 독소전쟁 당시 학살된 민간인은 수백만명이 넘는데[3], 전선 후방지역에서 이루어진 대부분 학살들은 바로 이 아인자츠그루펜이 관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41년 6월 소련 침공이 시작된 후, 아인자츠그루펜은 독일 침략군과 함께 소련 지역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였다. 아인자츠그루펜은 독일군과 경찰조직의 지원 아래 지방의 시민들을 대량 학살하기도 하였다. 보통 독일 침략군의 인종 청소가 마을과 도시에서 게토로, 게토에서 집단 학살 수용소로 이송하여 손쉽고 빠른 학살을 도모하려한 것과는 달리 아인자츠그루펜은 직접 유대인의 집으로 찾아가 그들을 살해하였다. 또한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자원 모집 및 강제 징집한 현지의 '풀뿌리 부역자'들을 보조 경찰로 활용하면서 소련 관헌과 저항적인 비유대인과 유대인들을 밀고하면서 아인자츠그루펜을 도왔다고 한다.

초기의 아인자츠그루펜은 주로 유대인 남성들만을 총살하였다. 그러나 1941년 늦여름 경부터 아인자츠그루펜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이라면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총살하였다. 아인자츠그루펜은 신속하게 소련으로 들이닥쳤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도망갈 여유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아인자츠그루펜 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학살 부대는 마을이나 도시로 들어가서는 모든 유대인 남성, 여성 및 어린이들을 체포했다. 이들은 많은 공산당 지도자들과 로마니( 집시)들도 잡아갔다. 희생자들은 귀중품을 내놓고 옷을 벗도록 강요 받았는데, 그것들은 나중에 독일에 보내지거나 지역 협력자들에게 배급되었다. 아인자츠그루펜은 때에 따라 그들은 지역 정보 제공자와 통역관의 도움으로 해당 지역의 유대인들을 지목하여 지정된 장소에 모이게 하기도 하였다. 이 때 모인 사람들은 행군을 하거나 트럭을 타고 참호가 미리 준비된 학살 장소로 이동하였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에 의하면 이런 과정도 생략해버리고 대낮에 길거리에서 발견하자마자 쏴 죽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아인자츠그루펜은 희생자들을 따로 구분해낸 뒤, 희생자들을 묻기 위해 이들을 점령지 마을과 도시의 외곽에 있는 공터, 숲 및 협곡으로 행진하도록 만들었고, 그곳에는 미리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져 있거나 총살당할 피해자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했다. 그리고 희생자들이 가지고 있던 귀중품을 몰수하고 강제로 탈의하게 한 다음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열린 참호 앞에 서거나 엎드리게 했고 그 후 2명 이상의 사수를 세워 연발로 총을 쏴 살해한 다음 희생자들이 떨어진 구덩이를 흙으로 덮고 땅을 밟아 평평하게 해 놓아 흔적을 없앴다. 그리고 사람들을 가스차로 학살한 다음 대형 매장지에 시체들을 버리기도 했다. 이런 작업을 할 때 부족한 인원은 점령지에 주둔한 독일군이나 점령지의 치안 유지를 맡은 경찰 조직, 그리고 강제 동원되거나 자발적으로 참여한 점령지 주민들을 동원하였고, 주민들은 그동안 알고 지내던 이웃이 길거리나 공터에서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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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을 침공하는 독일군을 따라 이동하는 아인자츠그루펜은 4개의 대대 규모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인자츠그루펜 A는 동프로이센에서부터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그리고 에스토니아를 지나 레닌그라드로 향하였다. 그들은 카우나스 리가, 그리고 빌뉴스에서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했다. 아인자츠그루펜 B는 폴란드 내 점령 바르샤바 지역에서 시작하여 벨라루스를 거쳐 스몰렌스크 민스크를 지나 그로드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슬로님, 고멜 모길레프 등 기타 지역의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했다. 아인자츠그루펜 C는 크라쿠프로부터 작전을 시작하여 서부 우크라이나를 거쳐 크라쿠프 로스토프나도누를 향했다. 그 부대원들은 르부프, 타르노폴, 졸로체프, 크레메네츠, 하리코프, 지토미르 키예프에서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여러 연구 자료에 따르면 이 아인자츠그루펜 4개의 부대가 독소전쟁 개전 후 3개월 동안 대략 50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과 포로들을 학살했다고 하는데, 이는 독소전쟁 개전해인 41년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92%를 차지한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파울 블로벨 SS 대령이 이끌던 아인자츠그루펜 c 소속의 제4 특공대 팀은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지 3개월 후인 1941년 9월 19일에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외곽에 위치한 골짜기인 바비야르에서 안전보장을 운운하는 거짓 선전문을 이용해 유대인들을 자발적으로 학살장에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겨우 36시간 만에 3만 7천 771명을 살해하였는데, 이를 바비야르 학살, 혹은 바빈야르 학살이라고 부른다. 동쪽으로 진군하여 소련 영내에 들어온 독일군이 29일간의 전투 끝에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에 입성했으나 곧 시내에서 벌어진 일련의 폭탄 공격으로 수많은 독일 병사를 잃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NKVD에 의해 실시된 테러 공작이었으나 이를 유대인들의 테러로 오판한 SS는 테러 행위를 보복하는 의미에서 아인자츠그루펜에 키예프에 거주 중이던 유대인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 명령을 변형시켜 부역자 등을 제외한 키예프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라는 명령으로 변형되었다. 쇼스타코비치 13번 교향곡도 이 학살 사건을 소재로 작곡된 작품이다. 그리고 라트비아 리가 근처 룸불라 숲에서는 2만 5천여 명의 유대인을 이틀 만에 학살하는 등 끔찍한 전쟁범죄를 일으켰다. 나치 독일은 1941년 11월 30일부터 12월 8일까지 이 지역에 유대인들을 비롯한 희생자들을 모아 인종 청소를 실시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은 독일과 루마니아 왕국, 크로아티아 독립국,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비시 프랑스 홀로코스트에 적극적 태도를 보였던 다른 추축국 군인들[4] 및 지역 협력자들과 다른 SS 부대원들의 협조를 많이 받았다. 아인자츠그루펜 부대원들은 Allgemeine-SS(일반 친위대)나, 무장친위대, 보안국(SD), 보안경찰(SiPo), 특명경찰, 기타 경찰로부터 차출되었다. 1943년 봄까지 아인자츠그루펜과 특명경찰은 백만 명 이상의 소련 유대인, 수천에 달하는 소련 정치위원, 빨치산 포로, 집시, 그리고 병원 시설에 수용된 장애자들을 살해하였다. 아인자츠그루펜이 자주 쓴 방법으로는 총살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는 비효율적이고 총살 시행자들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는 방법이었다. 아인자츠그루펜 부대가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독일 당국은 유대인에 대한 대규모 살상을 자행하기 위하여 가스실이 설치된 중추적 집단학살센터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도 동유럽의 많은 지역에 이런 학살된 이들이 묻힌 곳이 더 있을지도 모르나, 워낙 넓은 지역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고 그나마도 밝혀지지 않은 학살도 있었던 데다, 세월이 지나면서 풍경까지 변해 버렸기 때문에 현재까지 살아 있는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그마저도 세월이 지나면서 목격자들이 나이가 들어 하나 둘 죽음을 맞이하고 있어 밝혀진 곳 외의 학살 현장을 추가로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4. 협력자들과의 관계

약 2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 총살 피해자들을 고작 3000명에 불과한 특무대원들이 학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이들의 학살에 거대한 조력자들이 꾸준히 기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주체는 바로 독일 국방군이었다. 상급기관인 보안국(SD)은 육군최고사령부와 협력하며, 그 산하의 특무대(Einsatzgruppen)는 후방사령부(Befehlshaber des rückwärtigen Heeresgebietes)와 협조했다. 실제 학살을 수행하는 특공대(Einsatzkommando/Sonderkommando)는 각 집단군과 야전군에 배속되었다. 1941년 국방군 병참감 에두아르트 바그너와 친위대 국가보안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간에 맺어진 협약에 따르면 국방군은 이들의 행군과 숙식에 대해 지원할 의무를 졌다. 또한 정치장교 명령은 국방군이 사로잡은 소련군 정치장교를 특무대에게 넘길 것을 명시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국방군 집단군 사령부들은 소련군과의 전투가 벌어지는 전방 지역 뒤의 점령 지역에 후방 지역(Rückwärtiges Armeegebiet)을 두었다. 특무대가 소속되어 활동했던 것 역시 이 지역들이다. 이들은 3개의 국방군 보안사단들과 수 개의 국방군 비밀 야전 경찰 제대들을 거느리고 소위 지역 안정을 담당한 제대였다. 후방지역은 북, 중앙, 남부 집단군별로 하나씩 해서 총 세 곳이 존재했다. 개별 특무대는 각 후방사령부와 조력하여 파르티잔과 소련군, 유대인, 또는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학살을 수행했다.[5] 특무대의 대표적인 학살로 알려져 있는 바빈야르 학살 역시 마찬가지다. 키예프 전투에서 NKVD 잔당의 테러로 골머리를 앓던 제6군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가 지역 유대인들을 NKVD의 동조자로 지목했고, 협력관계에 있던 특무대 C 지휘관 프리드리히 예켈른에게 대응을 주문하면서 벌어진 게 바빈야르 사건이다.

그 외에도 이들은 각 점령지의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들이 이끌며 파르티잔 토벌작전을 벌이던 무장친위대 질서경찰 전투대대들의 지원 역시 받았다. 루마니아군 등 동맹 군대 및 현지 협력자들과의 협조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1941년 오데사 학살은 바빈야르 학살과 마찬가지로 NKVD와 소련군의 부비트랩에 피해를 입은 루마니아군이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리면서 일어난 학살이었다. 특무대는 루마니아군이 벌이는 학살에 조력했다. 동시에 특무대는 곳곳에서 벌어진 학살에 우스타샤, 아라이스 코만도, 벨라루스 보조경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 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 운동, 흘린카 근위대, 밀리스, 크비슬링 정권, 전쟁 후반부에는 화살십자당, 검은 셔츠단까지 현지 친독 부역자들을 다수 동원했다. 고작 3000명 뿐이었던 특무대가 수천만 명을 살해하는 것은 이 모든 협력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뤄지지 못했다.

5. 주요 학살 요약

1941년 6월 22일부터 아인자츠그루펜에게는 독일의 소련 침공이 진행되는 동안 유대인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부대는 독일군이 소련 영토로 깊숙이 진격함에 따라 대량 학살 임무를 수행한다. 먼저 이동 학살 부대는 주로 유대인 남성들을 사살한다. 얼마 되지 않아 이동 학살 부대는 가는 곳마다 유대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이라면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무조건 총살한다. 1943년 봄까지 아인자츠그루펜은 100만 명 이상의 유대인과 수십만 명의 유격대원, 로마니( 집시), 그리고 소련 정치인 등을 학살한다.

1941년 9월 21일 유대인의 신년 하루 전날, 리투아니아의 작은 마을인 에이시시키(Ejszyszki)로 아인자츠그루펜 부대가 들어왔다. 학살 부대원들은 마을과 주변 지역에 있는 4000명의 유대인들을 3개의 예배당으로 몰아 넣고는 2일간 음식이나 물을 주지 않은 상태로 감금했다. 그 다음 이틀간 유대인 남성, 여성 및 어린이들은 묘지로 끌려 가서 학살 당했는데, 그들은 구덩이 앞에 일렬로 세워져 총살 당했다. 이러한 학살극으로 오늘날 에쉬스키에는 유대인들이 더 이상 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마을에서의 학살은 홀로코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유대인들이 살해된 수백개의 도시, 마을 및 유대인 촌 중에서 하나일 뿐이다.

1941년 9월 29-30일 바비야르에서 약 3만 4000명의 유대인 학살, 이른바 바빈야르 학살이 일어났다. 독일군은 키예프(Kiev)[6]의 유대인 주민들에게 도시 외곽으로 이주해야 하므로 멜닉 거리(Melnik Street)로 집결하도록 명령한다. 실제로는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멜릭 거리를 따라 유대인 묘지와 바비야르(Babi Yar)라고 하는 협곡으로 향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귀중품을 내놓고, 옷을 벗고,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 협곡으로 이동하도록 명령을 받는다. 그러고는 독일 학살 부대와 우크라이나인 보조 부대가 이들을 총살했다. 대량 학살은 이틀간 계속된다. 여기에서 약 3만 4000명의 유대인 남성, 여성 및 어린이들이 학살된다. 이후 수 개월간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바비야르에서 추가로 총살된다. 로마니(집시)와 소련 전쟁 포로를 비롯한 비 유대인들도 협곡에서 살해되었다.

1941년 12월 1일 "예거 보고서(Jaeger Report)"에서 SS 대령인 칼 예거(Karl Jaeger)는 자신의 부대가 1941년 7월 2일부터 12월 1일 사이에 리투아니아에서 실시한 학살 기록과 관련하여, 그는 자신의 부대가 13만 7346명의 유대인 남성, 여성 및 어린이들을 살해했다고 보고했다. 1941년 여름 동안 카우나스, 우크메르게 및 빌뉴스의 유대인들이 일련의 대량 학살에서 살해되었고 리투아니아의 작은 도시와 마을에 살던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학살되었으며, 예거는 카우나스, 빌나(빌뉴스) 및 샤울레이 게토에 겨우 3만 5000여명의 유대인들만이 강제 노동자들로 남아 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6. 절멸 수용소와의 연관성

나치의 수뇌부들은 아인자츠그루펜의 학살 결과를 평가하면서 세 가지의 중대한 문제점을 발견하였다. 먼저 보안의 문제가 심각했다. 학살이 마을에서 자행되다 보니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여기저기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학살에 참여한 대원들이 사적으로 학살 현장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찍어 보관하거나 집에 보내 자랑을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물론 이 덕분에 아인자츠그루펜의 천인공노할 범죄의 증거가 많이 남을 수 있게 되었지만, 국내외의 비난 때문에 학살을 은폐해야 했던 나치 수뇌부들에게는 골치 아픈 문제였다. 또한 처형 방식도 문제점이었다. 전쟁 중인 상황에서 한 발 한 발 아껴도 모자란 판인 총알을 학살에 사용하는 것은 물자 낭비라는 지적이 나왔다. 마지막 문제는 처형을 집행하는 대원의 정신 문제였다. 학살이 일상처럼 계속되다 보니 학살에 무감각해지는 대원도 있었지만, 반대급부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대원들이 발생했다. 심지어 이것 때문에 나치즘에 반감을 가지게 된 일부 극소수 대원들은 상부 몰래 유대인들이나 집시족을 석방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걸리면 사형당하지만, 이런 행동을 한 대원들은 나치 패망 이후 전범 혐의를 벗는 걸로 양심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독일군 중에서 가장 PTSD에 많이 걸린 사람들도 양심적으로 행동한 아인자츠그루펜 대원들이었다. 왜냐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치는 대원들의 정신적 피로를 덜기 위해 처형에 현지 치안조직 같은 대체 인력을 동원하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물론 정상적인 정권이라면 이 시점에 학살을 중단하고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것이나, 정작 나치는 오히려 더 효율적으로, 더 빠르고 확실하게 학살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가스실이 존재하는 절멸수용소였다. 이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을 내놓은 자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하였던 아르투어 네베였다. 이 자는 반유대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자로서 아인자츠그루펜 B의 총책임자였다. 아인자츠그루펜은 이 때부터 야전 대신 학살수용소에서, 총 대신 일산화탄소 치클론 B로 유대인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7. 전후(특수작전집단 재판)

전후 특무대원들은 뉘른베르크 특수작전집단 재판을 통해 다수 처벌받았다. 14건의 사형 판결이 내려졌는데 이는 전후 연합군이 주도한 재판 중에서는 가장 높은 수치의 사형 판결이었다. 그러나 실제 사형이 집행된 것은 고작 4건 뿐이었다. 징역형을 받은 나머지 특무대원들 역시 출소한 후 독일 사회에 별 문제 없이 녹아들었다. 대다수는 직장을 구하고 일상을 영위했고, 심지어 33명 가량은 신설된 독일 총리실 직속의 대외정보기관인 연방정보국(BND) 창설에 참여했다.[7] 차 안에서 시동을 켜고 잤다가 죽을 뻔한 경험에서 가스실 학살의 아이디어를 고안했던 발터 라우프 친위대령 같은 일부는 재판도 받지 않고 남미로 도망쳤다. 라우프 대령은 서독 정부에 쫒기는 와중에도 피델 카스트로를 추적하던 미국 중앙정보국과 협력하기도 했다.

독일 사회가 이들에 대한 역사적 철퇴를 내리기 시작했던 것은 1958년 울름 특수작전집단 재판(Ulmer Einsatzgruppen-Prozess)부터였다. 그전까지 나치 범죄를 직시하지 않고 회피하기 급급했던 독일인들은 울름 재판에서 특무대가 벌인 학살이 낱낱이 드러남에 따라 충격에 빠졌다. 울름 재판으로부터 몇 년 후에는 아이히만 모사드에 잡혀 목이 매달리며 나치 청산 운동에 불이 붙었다. 이후에야 독일 정부와 사회는 사회에 녹아든 나치 부역자들을 서서히 몰아내기 시작했다.

8. 관련 문서


[1] 예지 토마셰프스키(1924 ~ 2016)라는 폴란드 기자가 촬영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상식적으로 이렇게 가까운 근거리에서 레지스탕스 소속 기자가 사진을 찍고 살아남았을 확률은 전무하다(...). 아무튼 토마셰프스키는 이 사진 외에도 다양한 전쟁범죄 증거를 찍거나 폴란드 레지스탕스 등의 사진을 찍었다. [2] 사진 좌측의 병사들 오른쪽 가슴에 선명한 국가수리 마크를 볼 수 있다. [3] 전투에 휘말린 민간인을 포함할 경우 2천만명이 넘지만, 그 중 의도적으로 학살된 민간인에 대한 통일된 추정치는 없다. [4] 의외로 전쟁 발발 직전부터 독일과 가까이 지내기 시작한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은 전쟁 초기에는 유대인 학살에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아 독일에서 도망친 유대인들을 보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둘 모두 전쟁 후반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헝가리 국민단결정부의 형태로 독일의 괴뢰국 신세로 전락한 이후에는 전 정권에게 찬밥 신세를 받거나 탄압당하며 숨어있던 검은 셔츠단, 화살십자당 등 현지 반유대주의자들과 친독 부역자들이 양지로 나와 유대인들을 자발적으로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넘겨버리는 등 홀로코스트에 적극 협력하여 많은 희생자를 냈다. 멀리 떨어져 있던 일본 제국 역시 요제프 마이징거를 내세운 나치 독일의 유대인 탄압 회유에 적극 화답하지 않고 유대인들을 대충 상하이 게토에 수용하는 식으로 유대인들을 학살하지 않고 어물쩡 방조했다. [5] 남부전선에서 활동하던 대독일사단 복무자인 기 사예르가 남긴 회고록 잊혀진 병사에서 후방 지역 특무대와 국방군 간의 합동 작전이 묘사되어 있는데 본대로 복귀하는 와중 친위대의 파르티잔 소탕 작전에 차출된다. 파르티잔을 방자한 민간인 학살작전이 아닌 정말로 무장한 파르티잔을 소탕하는 작전이었는데 소탕 작전을 끝낸 이후 체포된 파르티잔에 대해서 그는 담담히 '아마 처형되었을 것이다'라고 적어두었다. [6] 우크라이나 키이우 [7] 연방정보국은 현 독일연방공화국 정부기관 중 나치 청산이 가장 미흡했던 조직이다. 창설 당시 대부분의 요원들은 전직 게슈타포 아프베어 요원들로서 홀로코스트에 깊게 관여했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하술할 울름 재판 이후에야 대대적으로 물갈이되었다. 연방정보국의 역사를 종합하는 프로젝트 역시 2011년에야 시작되어 2022년에 종결되었는데, 이 때에도 연방정보국은 대규모로 문서를 삭제하고 연구진들의 정보 접근을 방해하는 식으로 자신들의 과거사를 은폐하고자 시도했다는 의혹을 강하게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