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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6 01:14:05

교향곡 제13번(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번 f단조 2번 B장조
'10월 혁명에 바침'
3번 E♭장조
'5월 1일'
4번 c단조 5번 d단조
6번 b단조 7번 C장조
'레닌그라드'
8번 c단조 9번 E♭장조 10번 e단조
11번 g단조
'1905년'
12번 d단조
'1917년'
13번 b♭단조
'바비 야르'
14번 15번 A장조


정식 명칭: 교향곡 제13번 B플랫단조 작품 113 ' 바비야르'
(Sinfonie Nr.13 b-moll op.113 "Babi Jar"/Symphony no.13 in B flat minor, op.113 'Babi Yar')


1. 개요2. 악기 편성3. 곡의 형태4. 초연과 출판5. 가사 수정 문제6. 평가7. 기타

1. 개요

쇼스타코비치의 열세 번째 교향곡. 전작들인 11번 12번이 1905년과 1917년의 혁명을 소재로 해 소련 권력층들의 취향에 어느 정도 부합했다면, 이 곡은 의도했건 아니던 간에 제대로 뒷통수를 때린 곡이 되었다.

1920년대의 실험적인 작품들인 2번 3번 이후 거의 40년 만에 성악을 교향곡에 도입한 곡으로도 중요한데, 다만 혁명이나 이념에 충실한 가사를 사용한 예전 작품들과는 달리 스탈린 사후 잠시 찾아온 '해빙기' 에 꽤 도전적인 내용의 시를 여럿 발표해 주목받은 젊은 작가 예브게니 옙투셴코의 시를 가사로 삼았다.

곡의 제목인 '바비야르'[1]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 근처의 마을 이름으로, 독소전쟁 중이던 1941~43년 동안 나치 친위대 아인자츠그루펜 주도로 약 3만 여 명에 달하는 유대인 집시,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소련군 포로들이 집단 학살된 곳으로 유명하다.

작곡 시기는 12번 완성과 초연 직후인 1961년 겨울부터 이듬해 가을. 꽤 속필이었던 쇼스타코비치였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건강이 조금씩 안좋아지기 시작했고 시인인 옙투셴코와 의견 교환도 여러 차례 했기 때문에 완성이 다소 늦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2. 악기 편성

관현악 편성은 플루트 3(3번 주자는 피콜로를 겸함)/ 오보에 3(3번 주자는 코랑글레를 겸함)/ 클라리넷 3(2번 주자는 E♭클라리넷을, 3번 주자는 베이스클라리넷을 겸함)/ 바순 3(3번 주자는 콘트라바순을 겸함)/ 호른 4/ 트럼펫 3/ 트롬본 3/ 튜바/ 팀파니/ 베이스드럼/ 스네어드럼/ 심벌즈/ 탐탐/ 트라이앵글/ 탬버린/ 캐스터네츠/ 채찍/ 우드블록/ 튜블러 벨/ 글로켄슈필/ 실로폰/ 하프 2/ 피아노/ 첼레스타/현 5부(제1 바이올린-제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3관 편성에 맞춘 표준 관현악이지만, 4번 이후 오랜만에 꽤 다양한 타악기들을 갖춘 곡이 되었다. 이러한 쇼스타코비치의 타악기 선호는 후속 교향곡들인 14번 15번에서도 이어진다.

3. 곡의 형태

전체 악장 갯수는 다섯 개인데, 3악장부터 5악장 까지는 중단 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8번이나 9번과 비슷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11~12번과 마찬가지로 이 곡에서도 옙투셴코의 시 제목을 차용한 표제가 각 악장마다 붙어 있다.

1악장은 이 곡의 전체 표제와 동일하게 '바비야르' 고, 바비야르에서 벌어진 학살을 회고하는 초반부와 학살자들의 광기, 은둔 중 발각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안네 프랑크의 일화, 반유대주의에 대한 증오가 차례로 이어지는 시가 사용되었다. 다만 초반부는 어른의 사정 때문에 초연 이후 가사가 일부 수정되어야 했다. ('가사 수정' 항목 참조)

조종(弔鐘)을 연상시키는 튜블러 벨의 타주와 함께 저음 악기들의 무거운 음형 위로 약음기 끼운 호른과 트럼펫, 목관악기들이 다소 삭막한 느낌의 첫 주제를 연주한다. 이어 합창이 등장해 '바비야르에 기념비란 없다...' 로 시작되는 노래를 부른다. 이어 베이스 독창자가 '지금 나는 스스로 유대인이라고 생각한다...' 로 낭독조의 노래를 부른다. 느린 장송 행진곡 분위기지만,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담담하게 진행된다.

이어 템포가 좀 빨라지며 투박한 행진곡 리듬 위에 오보에와 바순이 신랄한 대선율을 얹어놓으며 두 번째 주제가 시작된다. 합창이 점령지에서 만취 상태로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반유대주의자들을 묘사하며, 이것이 고조되었다 가라앉으면 다시 첫 주제가 나온다. 주제 제시가 끝나면 베이스 독창이 러시아인의 개방성과 관용에 빗대어 반유대주의자들의 악랄함과 비겁함을 질타하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합창이 막바지에 들어가자 다시 두 번째 주제가 짧게 나오고, 이어 안네 프랑크를 회고하는 세 번째 대목으로 들어간다. 한결 부드러운 느낌의 선율이 담긴 노래를 베이스 독창이 부르기 시작하지만, 이내 합창이 작은 목소리로 '여기로 오는 걸까?', '문을 부수고 들어오고 있어!' 등으로 불길한 우려를 표시한다. 결국 관현악 총주가 거칠게 이어지면서 잠시나마 있었던 부드러운 분위기도 깨진다.

과격한 흐름이 중단된 뒤 첫 번째 주제가 이번에는 관현악 총주에 의해 거세게 연주되며 일종의 재현부 느낌을 준다. 튜블러 벨과 탐탐의 강타 후 합창이 나지막하게 악장 첫머리에서 불렀던 부분을 재현하며, 독창도 반유대주의자의 학살에 분노를 표하는 노래로 가담한다. 성악부와 관현악이 다시금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비통하고 강렬한 느낌으로 마무리한다.

2악장은 '유머' 라고 제목이 붙어 있는데, 그냥 쾌활하고 재치있는 유머가 아닌 독재 등 압제 상태에서 몰래 돌려 말하는 투의 공산주의 유머를 은유하고 있다. 관악기와 타악기, 현악기가 음들을 강하게 주고받으며 시작하고, 서커스 행진곡 풍으로 해학을 곁들여 큰 소리로 연주한 뒤 베이스 독창이 '세계를 지배하던 차르 황제도 유머만은 다스릴 수 없었다...' 는 내용으로 신랄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어 독창과 합창이 번갈아가며 이솝 우화로 유명한 이솝, 이슬람 민담에 자주 나오는 현자 물라 나스레딘을 언급하며 권력자들도 어찌할 수 없는 유머의 힘을 역설하는 노래를 부른다. 관현악도 이에 맞추어 아이러니와 신랄함을 한껏 강조한다. 중간부에서 권력자들의 횡포를 강조하는 불길하고 폭력적인 대목이 잠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리 길지는 않고 다시금 풍자적인 느낌을 회복해 시끌벅적하게 끝낸다.

3악장은 '가게에서' 로 되어 있고, 생필품 부족으로 가게 앞에서 오랫동안 추위를 참으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여성들의 꿋꿋함을 소재로 하고 있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연주로 시작하며, 비올라가 그 위에서 흔들리는 느낌의 대선율을 연주하는 동안 베이스 독창과 합창이 '계산대에 줄지어 있는 행렬로 몸은 얼어붙고...' 라고 묵묵히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여성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이어 불리워지는 노래들도 노동 현장에서 자기 임무를 다하면서 가족들을 부양하는 러시아 여성들의 근면성실과 가족애를 그려내며 차분하게 이어진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이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거나 무게를 몰래 늘여달아 폭리를 취하는 악덕 상인들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며 강한 관현악 총주와 함께 부르짖듯 노래하는 대목도 나온다. 흥분이 가라앉고 나면 초반부의 관현악 주제가 짤막하게 재현되고 바로 4악장으로 이어진다.

'공포' 라는 제목의 4악장은 저음 악기들의 무겁고 나지막한 연주 속에 탐탐과 팀파니, 베이스드럼이 약하게 리듬을 새기며 시작한다. 합창이 '공포는 러시아에서 죽어가고 있다...' 라고 반어적인 느낌의 노래를 띄엄띄엄 부르기 시작하며, 제정 러시아 시기나 스탈린 집권기의 공포를 회상하는 불길한 느낌을 악장 내내 유지한다.

이어 공포감을 일으키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열거하기 시작하며 조금씩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시작한다. 모 나라의 어느 의원님이 그러는 것처럼 여기서 주어는 생략되어 있지만, 이 사례들은 스탈린 시기에 대숙청 등 대규모 탄압을 겪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아챌 수 있었다.[2] 때문에 초연 때 스탈린 시기를 살아왔던 청중들은 정말로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긴장감은 선행 악장들에서처럼 관현악 총주나 합창의 강한 노랫소리로 터져나오지는 않고, 다시금 '공포는 러시아에서 죽어가고 있다' 는 노랫말이 반복된다. 베이스 독창이 시인 자신의 심경[3]을 은근히 내비치는 노래를 마지막으로 부르고 5악장으로 진입한다.

어둡고 으시시하기 그지 없던 4악장에 이어 '출세' 라는 제목의 5악장이 이어진다. 플루트 듀엣이 B플랫장조로 부드럽고 밝은 느낌의 선율을 연주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이어 독창과 합창이 2악장에서 보여준 골계미 가득한 가사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지동설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보였지만 꽉 막힌 가톨릭 근본주의 때문에 종교재판까지 받았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예를 들며, 생전에 주위의 온갖 비난과 탄압에 시달렸던 이들이 사후에 대인배로 추앙받는 것이 진정한 출세라고 주장하는 대목이다. 당시 관료주의가 팽배해 있던 소련 고위층에 대한 간접적 비난을 담고 있기도 한 부분.

이어 지금까지 나온 주제와 부주제를 대위법으로 버무린 관현악 이행부를 거쳐 '나는 그들의 신성한 신념을 믿으며, 그들의 신념은 내게 용기를 준다. 나는 그런 식으로 따르지 않는 것을 나의 출세라고 믿겠다.' 라는 반어적이고 통렬한 마지막 싯구가 불리워진다. 이어 관현악만 남아 종소리와 첼레스타의 오르골 풍으로 반짝거리는 음향이 띄엄띄엄 이어지고 조용하게 끝난다.

성악 파트는 베이스 독창자와 남성 합창으로 구성되는데, 특히 합창부에는 무거운 소리를 얻기 위해서인지 약 40~100명 가량의 베이스 가수들만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만한 규모의 베이스 합창단은 거의 없고, 서로 다른 음을 부르는 경우도 그다지 많지 않아 그냥 테너 파트까지 포함해 합창단을 구성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것은 베이스 파트만 편성하는 것이고, 때문에 합창단 두세 군데의 베이스 파트를 합쳐 임시로 대규모 합창단을 급조하기도 한다.

이 곡의 한글로 번역된 가사는 여기서 볼 수 있다. 러시아어 원문 및 영어 번역은 이곳을 참고.

4. 초연과 출판

이 곡의 초연에는 꽤 우여곡절이 많았다. 비록 돌려말하는 대목이 많아 직접적인 위험은 적었지만, 간접적인 체제 비판 대목은 누구나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에 독창자나 합창단 섭외가 특히 문제였다. 당초 베이스 독창자와 합창 지휘자로 섭외된 보리스 그미랴는 갑자기 출연을 거절했으며 절친 예브게니 므라빈스키마저 연주회 직전에 지휘를 맡을 수 없다고 통보했다.[4] 이에 쇼스타코비치는 급하게 대역을 찾아내야 했다.

공연 준비 막바지 단계에서 베이스 독창 후보로 빅토르 네치팔리오와 비탈리 그로마즈키, 지휘자로 키릴 콘드라신을 섭외했는데, 네치팔리오 역시 공연 직전 출연을 포기했다. 그로마즈키와 콘드라신 역시 당 위원회나 음악가동맹 등에서 알게 모르게 출연하지 말라는 압력을 받았는데, 어쨌든 최종 독창자와 지휘자로 결정되어 무대에 올랐다. 합창은 러시아 SSR 합창단과 그네신 명칭 국립음악원 합창단의 베이스 파트가 합동으로 출연했고, 관현악은 콘드라신이 상임 지휘자로 있던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맡았다.

이렇게 해서 1962년 12월 18일에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대강당에서 초연이 이루어졌는데, 텔레비전 실황 중계 계획도 취소되었고 정부 고위층 관객들을 위해 마련한 초대석은 텅 비어 있었다. 집권층에서 분명하게 불쾌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었는데, 하지만 일반 청중석은 입석까지 포함해 만원사례를 이루었다. 공권력이 동원되어 연주가 중단되고 관계자들이 체포되는 것 아닌가 하는 긴장감 속에 행해진 공연이었지만, 청중들의 반응은 굉장히 열광적이었다. 곡의 핵심인 1악장이 연주되고 나서는 청중들이 열렬히 환호했다고 한다.

심지어 초연 때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초연 며칠 뒤와 이듬해 1월 중순에 추가 공연 일정까지 잡혔다. 하지만 세 번째로 열린 1월 공연에서 청중들은 이전 공연과 달리 1악장 초반부의 가사가 바뀐 것을 알게 되었고, 이 곡에 확실히 정부 측의 태클이 들어갔음을 알아챘다. 그 이후 이 교향곡의 공연에서는 바뀐 가사만이 통용되었고, 1971년에야 공식 출판된 악보에도 바뀐 가사만이 인쇄되었다.

5. 가사 수정 문제

1악장 초반부에 있던 옙투셴코의 원래 가사는 유대인 화자의 입장에서 서술되어 있었고, 성경 출애굽기를 암시하는 구절이나 학살 당시의 처참함도 표현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 번째 공연부터 사용된 가사는 화자가 누군지 애매모호하게 처리되어 유대인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도 학살되었고, 학살의 희생자를 파시즘에 대항하던 러시아인들의 영웅적 희생이라고 묘사하는 선전 문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소련에 팽배해 있던 반유대주의와도 절대 무관하지 않은데, 비록 나치 독일처럼 뉘른베르크 법 같이 대놓고 법규까지 제정해가며 유대인을 탄압하고 학살하지는 않았지만 소련 사회 역시 유대인에게 관대한 곳은 아니었다. 제정 시대부터 이미 반유대주의에 의한 공공연한 만행이 자행되고 있었고, 스탈린 집권기에는 NKVD( KGB의 전신)의 사주로 여러 유대인 유명 인사들이 사고 등을 위장한 암살이나 반역죄 등 말도 안되는 죄목으로 끌려가 살해되었다.[5]

결국 유대인 학살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에 다른 인종도 살해당했다는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을 겹쳐놓고 독소전쟁에 대해 끊임없는 자뻑을 해오던 소련 측의 시각을 버무려 수정한 셈이었다. 물론 이 수정 가사의 저자는 마찬가지로 옙투셴코였지만, 그가 자진해서 이 일을 맡지는 않았다. 소련 붕괴 후 기밀 해제된 여러 문서나 관련 증언에 따르면, 이 가사 개작은 당시 서기장이었던 흐루쇼프가 직접 지시한 것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초연 때 배부된 프로그램 노트 등을 토대로 수정 전의 가사가 담긴 유인물도 당시 반체제 인사들이 몰래 돌려보던 사미즈다트 형태로 나돌았고, 이것은 서방에도 몰래 밀반출되었다. 그래서 서방에서는 소련 붕괴 때까지 수정 전의 원시를 가사로 썼고,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에서는 수정 후의 시가 든 공식 악보만을 연주에 사용했다. 그나마 이렇게 입맛대로 행한 개찬에도 불구하고, 공산권 국가에서 이 곡의 연주와 녹음은 다른 쇼스타코비치 교향곡들과 비교하면 매우 적었다.

소련 붕괴 후에는 러시아에서도 다시 원래 가사를 채택해 공연하고 있으며, 곡을 초연한 뒤 개정된 가사로 녹음을 했던 콘드라신도 1970년대 후반 서방으로 망명한 뒤에는 미개정 원시로 공연했다.[6] 쇼스타코비치보다 상대적으로 젊었던 옙투셴코도 소련 붕괴 후까지 살아남았고, 서방에서 열린 이 교향곡의 공연 때 나레이터로 등장해 각 악장 시작 직전에 시를 낭송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7]

6. 평가

11번과 12번을 통해 쇼스타코비치가 완전히 당에 충성하는 좌빨 기믹 체인지했다고 비난하던 이들은 이 곡의 존재 때문에 굉장한 혼란을 겪게 되었다. 소련 정부까지 이런저런 경로로 열폭을 감추지 않았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가 다시금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고 생각하는 반체제/서방 측의 견해까지 나왔을 정도였으니.

소련 사회의 성향과 반대되게 곡을 쓰곤 했던 쇼스타코비치의 의도가 이 곡에서도 이런저런 떡밥이 되곤 한다. 정부 입맛을 비교적 잘 맞춘 11번과 12번은 오히려 소련의 해빙기에 나온 곡이지만, 이 곡은 니키타 흐루쇼프가 해빙의 여파가 너무 지나치다며 다시금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를 불어넣기 시작하던 시기에 맞춰 발표되었다. 어찌 보면 정반합의 변증법 논리를 적용한게 아닐 까 싶을 정도로 절묘해서, 의도적으로 정권의 방향성을 엿먹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냐고까지 추측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교향곡을 정치적인 측면에서만 해석하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 쇼스타코비치가 꽤 오래 전부터 유대인들의 민속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서부터 이 곡의 근원을 찾는 이들도 많은데, 스탈린 말기에 몰래 유대인들의 민속 시를 가사로 한 '유대 민속 가곡집' 을 작곡하거나 이디시어로 된 유대 노래집의 편찬 때 감수와 편집을 맡기도 했던 것을 보면 언젠가는 나올 곡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한편 유대 음악 외에도 쇼스타코비치가 흠모했던 선배 작곡가인 무소륵스키의 영향도 주목할만 하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미 교향곡 11번에서 무소륵스키의 작곡 수법을 적극 응용한 바가 있으며, 이후에도 무소륵스키의 미완성 오페라 호반시나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하고 연가곡 '죽음의 노래와 춤'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하기도 하는 등 무소륵스키의 음악에 상당한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이 교향곡에서도 '유머' 나 '공포', '출세' 에서 보여지는 신랄한 반어적인 표현은 무소륵스키의 오페라들인 보리스 고두노프와 호반시나에 등장하는 반어적인 표현법을 연상시키는데, 특히 '출세'에서 바보나 정신병자인 척 하면서 권력자들의 부조리를 비꼬는 이들이 상당히 비중있게 묘사되는 부분은 무소륵스키의 오마쥬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처절하고 신랄하다.

그래서인지 한국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교향곡은 마치 조선시대의 광대놀이나 가면극을 떠올리게 한다. 즉, 직접적으로 비난할 수 없는 대상을 풍자와 해학을 섞어서 교묘하게 간접적으로 비판한 예프투셴코의 시에 필을 받은 쇼스타코비치가 그동안 발휘할 기회가 없었던 자신의 반골기질과 신랄한 표현능력을 마음껏 발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언제나 그랫듯이 쇼스타코비치는 이 교향곡의 작곡의도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해석은 분분하지만, 여튼 이 교향곡이 소련 정부로부터 달갑지 않게 여겨진 곡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오히려 이와 같은 소련 정부와의 마찰 덕분에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12번 때문에 불거졌던 어용 작곡가 또는 한물간 왕년의 인기 작곡가라는 오해를 확실하게 불식시킬 수 있었다. 한편으로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그래도 흐루쇼프 시절의 소련은 스탈린 시절처럼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을 썼다고 무작정 잡아가두고 수용소로 보내는 짓은 하지 않았다는 것. 덕분에 이 교향곡에서 보여준 반골정신은 이어지는 교향곡 14번로 이어질 수 있었으며 이 후속작에서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7. 기타

작품의 내용이나 편성상의 문제로 한국에서 오랫동안 연주된 적이 없었지만, 2023년 10월 광주시립교향악단이 한국에서 초연하였다.

이곡의 제목이기도 한 바비야르에는 소련이 존속하는 동안 어떤 추모비나 표식도 없었다. 추모비와 추모탑등이 건설된건 구 소련 붕괴이후에야 가능했다. 이 곡의 처음 가사에서 "바비야르 위에는 그 어떤 기념비도 없다" 라고 한게 시적 표현이 아니었던 것.

아이러니하게도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고 3월 2일 바비야르 홀로코스트 추모관 근처에 있는 방송탑에 러시아의 포격이 강타해 5명이 사망했고 이 포격은 바비야르에도 떨어졌다.



[1] 우크라이나어로 '바빈야르' [2] 예로 누군가의 밀고와 비밀 체포조가 밤중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 외국인과 친교가 있었다는 것 만으로 성립되는 반역죄, 가족들과 헤어져 끌려가는 모습 등. [3] 화자는 이 시를 쓰면서 '내가 온 힘을 다해 쓰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공포스럽다' 고 쓰고 있다. [4] 다만 거절의 변은 서로 달랐다. 처음부터 이 곡에 열광적인 신뢰를 보냈던 우크라이나 베이스 가수 그미랴는 우크라이나 공산당 위원회의 활동 제한 협박으로 인해 출연을 포기했으며, 므라빈스키는 뚜렷한 이유도 밝히지 않고 일방적으로 출연 못하겠다고 통보했다. 이 때문에 쇼스타코비치는 므라빈스키에 상당히 실망했고, 이후 화해할 때까지 그와 연락을 끊고 살았다. [5] 대표적으로 작가 이사크 바벨과 배우 솔로몬 미호엘스가 있다. 바벨은 반역죄로 수감되었다가 독소전쟁 기간 중 비밀리에 처형되었고, 미호엘스는 전후 길거리에서 NKVD 대원이 고의로 교묘히 돌진시킨 자동차에 치여 죽었다. [6] 그 중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가진 공연은 네덜란드 음반사인 필립스에서 녹음해 출시했는데, 아직 CD화는 일본 등 일부 국가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7] 그는 소련 붕괴 후에도 생존해 있었으며, 2017년 세상을 떠났다. 쿠르트 마주어 지휘의 뉴욕 필하모닉이 텔덱에 실황 녹음한 음원에서 옙투셴코의 낭송을 들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