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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디아스포라3. 종교4. 기원5. 작명법6. 라트비아어 부흥과 라트비아 민족주의7. 라트비아 유대인8. 여담9. 출신 인물

1. 개요

파일:CC40BC5C-59DC-4728-BA5A-BFFBCAAAA523.jpg
라트비아 소총연대[1] 20세기 초 사진
파일:Latvians.jpg
전통 복장을 하고 있는 라트비아인들

라트비아인은 발트3국 중 하나인 라트비아를 중심으로 거주하며, 발트어파에 속하는 라트비아어를 쓰는 사람들을 말한다. 라트비아 내 130만여 명이 거주하며, 라트비아 전체 인구의 약 60%가 라트비아인이다.[2]

그 외 영국에 10만여 명, 독일에 2만7천여 명, 러시아 아일랜드에 각각 2만여 명의 라트비아인들이 거주한다. 같은 발트어족 민족인 리투아니아인과 매우 가까운 관계이다. 다른 북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평균 교육 수준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라트비아인들은 나이든 사람 포함해서 평균적으로 러시아어, 영어, 독일어, 스웨덴어를 포함해서 2~3개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

2. 디아스포라

1900년대 초반 러시아 제국의 인구 조사 당시 라트비아인 인구는 1,435,937명이었으며, 오늘날 라트비아인 인구는 미국으로 이민가서 혼혈된 사람들 후손 포함 추정치 160만여명으로 백년 전과 비슷한 수준이다. 사족으로 20세기 초중반에는 타지키스탄의 인구가 라트비아보다 적었지만 1990년대부터 202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라트비아의 인구가 줄어들 동안 타지키스탄은 인구가 폭풍같이 늘어나서 천만에 육박하고 있다. 20세기 동안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동안 라트비아인 인구는 제자리걸음이었던 셈. 이렇게 된데에는 라트비아가 소련내에서도 출산율이 낮은 지역이었기 때문이었고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경제문저로 출산율이 급감한 적이 있었고 이후로도 외국으로 돈벌러 이주한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저출산 문제는 라트비아 20세기 내내 라트비아의 골칫덩어리 취급을 받아왔다. 이미 라트비아 제1공화국 시기에 합계출산율이 인구대체수준에 미달한 2명대였기 때문에 당시 라트비아 정부에서 골머리를 앓았고, 소련 시대에도 라트비아의 출산율이 1명대 후반~2명대 초반을 오가는 수준으로 낮았기 때문에 출산장려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친 지역이 라트비아였다. 아무튼 1970년대에 러시아의 합계출산율이 인구대체선 아래로 떨어진 이후로 라트비아내에서 라트비아인들의 출산율이 러시아인들보다 조금 높았지만 평균연령이 높았기때문에 자연증가율은 낮았고, 1992년에 다시 인구가 자연감소로 돌아섰다. 1990년대 중반에 라트비아의 출산율이 1명대 초반으로 떨어져서 소련시절보다도 라트비아 민족존속에 위험을 받게 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라트비아인의 출산율이 어느정도 회복되는데 성공하여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인구의 자연증가에 까지 도달했으나 인구대체선으로 올라온것은 아니며 해외이민은 여전해서 라트비아의 골칫덩어리다.

역사적으로 여러가지 굴곡이 많았는데 1차 대전 때 라트비아에서 50만여명이 러시아로 피난간 적도 있었고 2차 대전 때는 라트비아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거나 독일로 끌려가거나 혹은 독일로 추방되었으며, 스탈린 정권 시절에 많은 라트비아인 민족주의자들이 시베리아 각지로 유배를 간 적도 있다. 출처

러시아와 벨라루스 내 라트비아인 인구는 통계상으로는 적지만 혈통으로 따지면 더 많다. 많은 라트비아인들이 라트비아 도회지의 상권을 장악한 독일인들과 싸우다 지쳐 벨라루스는 물론 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나 새로 건설되는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지역중심지들로 이주하여 러시아인과 통혼하였다. 1850년대부터 1차 대전 이전까지 30만여 명의 라트비아인들이 러시아 제국 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으며 이들 대부분은 라트갈레인이었다. 1926년 기준으로도 116,601명의 라트비아인과 9,676명의 라트갈레인이 러시아령 투르키스탄에 거주하였다.[3] 이렇게 고향을 떠나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한 라트비아인들은 추바시인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러시아인에 동화되었으며, 현재 이들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러시아에서 찾고 있다. 라트비아계 러시아인 문서 참조

미국에는 약 9만여 명에 달하는 라트비아계 미국인들이 거주하며, 상술한대로 라트비아인들이 주로 러시아로 이민하는 것을 선호한 영향인지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인구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편이다.

3. 종교

과거 라트비아인들의 조상이었던 여러 발트어족 민족들과 리보니아인들은 발트 토속신앙을 믿었으나 13세기 리가를 중심으로 정착한 독일인들의 영향으로 가톨릭이 전파되었다. 이후 독일의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으며 라트비아인들도 명목상 루터교회로 개종하게 되었다. 현재 라트비아인들은 기독교를 과거 독일인들에게 강제로 이식된 외래 문화 혹은 유럽인 정체성의 상징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편이다. 다만 이웃한 에스토니아와 비교하면 루터교회 인구가 36.2%정도로 제법 많이 남아있고[4] 그 중에는 보수적인 성향의 개신교 신자들도 있다. 이외에도 오늘날에는 라트비아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고대 발트 신앙을 부흥시키려는 신이교주의적 움직임도 활발하다. 농노 생활을 하던 라트비아인 조상들은 기독교와 토속 신앙을 동시에 믿는 이중 신앙 생활을 하였는데, 이렇게 실전되지 않고 전래된 토속 신앙을 구체적으로 복원하겠다는 움직임이다.

라트비아 동부 라트갈레 지역에는 루터교회 대신 리투아니아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을 믿는 라트갈레인이 15만여 명 거주한다. 라트비아는 공식적으로 라트갈레어는 라트비아어의 방언이며, 라트갈레인이 독자적인 소수민족이 아닌 라트비아 내에서 방언을 사용하는 일파라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4. 기원

라트비아/역사, 발트어파 문서 참조

라트비아인들은 동슬라브인 중 벨라루스인과 전통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 하지만 벨라루스인과 라트비아인의 근연 관계는 독일인들이 13세기부터 라트비아에 대거 정착하면서 단절되었고, 라트비아인들은 이후 독일과 러시아 제국의 영향을 받으며 민족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게 되었다.

오늘날의 라트비아인은 과거 라트비아 땅에 거주하던 여러 발트어족 민족(쿠로니아인, 세미갈리아인, 셀로니아인, 라트갈레인)들과 리보니아인, 보디인[5] 같은 우랄어족 민족들을 기원으로 한다. 라트비아에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이 들어서고 리가 시를 중심으로 이주해온 독일인 지주들과 상공업자, 성직자들은 리보니아인 농노들의 전통 언어와 문화를 박해했는데, 이를 계기로 리보니아인 상당수가 리보니아어를 버리고 대신 다른 발트어족 농노들의 문화와 언어를 차용하기 시작한 것을 라트비아인의 기원으로 본다.

5. 작명법

라트비아인의 성씨는 남성형/여성형으로 나뉜다. 남성형은 '-s', '-š'가 붙고 여성형은 '-e', '-a'가 붙는 것이 통상적인 방식이다. 다만 남성형(원형)의 성씨가 젤데(Dzelde)나 프리에데(Priede)와 같이 e로 끝나는 경우는 여성형으로 변환되지 않는다. 대표적인 성씨는 다음과 같다.
남성형 여성형
베르진시(Bērziņš) 베르지냐(Bērziņa)
프레이베르크스(Freibergs) 프레이베르가(Freiberga)
돔브로우스키스(Dombrovskis) 돔브로우스카(Dombrovska)
진타르스(Dzintars) 진타레(Dzintare)
라치스(Lācis) 라체(Lāce)
도벨리스(Dobelis) 도벨레(Dobele)
얀손스(Jansons) 얀소네(Jansone)
페테르손스(Pētersons) 페테르소네(Pētersone)
에제르가일리스(Ezergailis) 에제르가일레(Ezergaile)
참고로 외국인한테도 이 작명법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Joe Biden)도 라트비아어식 작명법으로는 조 바이덴스(Džo Baidens)라고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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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라트비아어 부흥과 라트비아 민족주의

파일:Keita Morfeja.jpg
라트비아 여성 전통 복식

라트비아 민족주의가 부흥하고 라트비아어가 민족어로 재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1804년 러시아 제국에서 라트비아 내 독일인 지주들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라트비아 농노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 상당수를 철폐한 것에서 비롯되었다.[6] 1820~30년대에는 라트비아인 농노들도 이름에 성을 쓰도록 법이 개정된 것을 기점으로 라트비아어가 부흥하고 1820년대부터 라트비아어로 된 주간지들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라트비아인 농노들은 독일인 지주들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농민으로써의 지위가 하루만에 개선된 아니었다. 라트비아의 사회 지도층 절대다수는 러시아인 관료들과 발트 독일인들이 양분하고, 도시 전문직은 유대인과 발트 독일인이고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는 라트비아인인 상황이 지속되었다. 도시에서 출세한 라트비아인은 대게 독일인과 동화되곤 했다. 당시에는 “라트비아인도 교육을 받으면 독일인이 된다.”라는 말이 라트비아인 사이에서 유행했으며, 라트비아인이라는 어휘는 라트비아 내 농노와 소작인을 지칭하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 그렇게 라트비아인들은 신분상승을 위해서는 독일어를 쓰며 독일인처럼 행세해야 했지만... 1880년대부터 러시아 제국에서 라트비아의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상황이 180도 변한다. 러시아화 정책에 일환으로 러시아 정부가 라트비아에서 독일인, 독일어, 독일 문화를 본격적으로 억압하기 시작하자 더 이상 라트비아인 지식인들이 독일인 행세를 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

1850년대부터 jaunlatvieši(젊은 라트비아인들) 같은 단체를 만들어서 발트 독일인들과 주도권 다툼을 벌이던 라트비아 민족주의자들은 1880년대부터 라트비아 문학과 문화, 언어, 정체성 등을 재확립하거나 고대 라트비아 신화를 바탕으로 아예 새로 창조해나갔다. 20세기 초 리가는 러시아 제국에서 가장 서구화되고 산업화된 도시 중 하나로, 라트비아 민족주의자들은 같은 라트비아인들로부터 넉넉한 후원을 받으며 이웃 리투아니아를 모방하며 민족주의를 부흥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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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라트비아 유대인

라트비아 내 유대인들은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내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리트박 유대인(리투아니아 유대인)이라고 불렸다. 다만 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에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라트비아 내 유대인들은 독일인들이 이미 도시 상권을 빈틈없이 장악하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소수에 불과했다. 20대 초반에 마르크스 전기를 쓴 이사야 벌린이 유명하다.

8. 여담

라트비아 인구 규모가 작아서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으나, 미녀, 미남이 상당히 많은 걸로도 유명하다. 이 점은 발트 3국 내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 라트비아 국내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을 시절 라트비아 여성들 중 키가 큰 여성들은[7] 상당수가 해외로 나가 모델 업에 종사하며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먹여살렸던 역사가 있다.

과거처럼 가족의 생존 문제로 모델 일에 뛰어드는 일은 줄었지만,[8] 라트비아 경제가 그럭저럭 자리잡은 오늘날에도 많은 라트비아인들이 선천적인 미모를 무기 삼아 모델 일에 진출하고 있다.

9. 출신 인물




[1] 10월 혁명 당시 볼셰비키가 동원해냈던 병력 중 최정예 병력, 볼셰비키에 가담했던 라트비아 소총연대는 후에 체카의 전신이 되었다. 연대 치고는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었다. [2] 나머지는 약 25%의 러시아인, 라트갈레족,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등이 있다. [3] 당시는 아직 스탈린의 대숙청과 강제 이주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4] 출처는 CIA 월드 팩트북 [5] 원래 이 지역에 살던 민족은 아니고 핀란드와 러시아 사이에 거주하던 민족인데, 튜튼 기사단이 노예로 써먹으려고 대대적으로 납치해옴 [6] 이어서 쿠를란트에서는 1819년, 리보니아에서는 1820년 농노가 해방되었다. 다만 라트갈레 지역은 러시아 본토와 비슷하게 1861년 무렵에야 농노가 해방되었다. [7] 패션 모델은 키와 신체 비율을 중요하게 본다. 라트비아 여성들은 평균 키가 큰 편이지만 패션 모델 업계에서 선호하는 여성 모델의 키는 이것보다 더 큰 175cm 대... [8] 금수저 모델로 유명한 켄달 제너가 이런 경우들을 생각 안 하고 한 번은 “나는 하루에 쇼를 30개씩 서는 그런 모델들과 다르다.”라고 실언했다가 갖가지 욕을 먹고 동료들에게 바보로 찍힌 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