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본의 종교인, 정치인, 옴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2.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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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의 사진 |
그의 형 마츠모토 만쿄는 1950년대에 미나마타병으로 당한 환자들이 되려 매국노 취급을 당했다면서 치를 떨었던 바 있다. 야츠시로시가 미나마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이유로 환자로 인정받지 못했고 어릴 적부터 앞을 보지 못했음에도 되려 주변에서는 자신들의 유전병을 미나마타병으로 엮어 야츠시로시의 이미지를 망친다며 비난을 당해 왔기 때문에 사람을 증오해 왔다고 했다.[3]
학창 시절은 구마모토 현립 맹인학교에서 보냈으며[4] 학교가 친가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졸업은 1975년 3월에 했다. 스무 살에 도쿄대학 문과1류를 지망하여 같은 해 3월 말에는 도쿄도 오시마마치, 8월에 시나가와구로 이주했으나 9월에는 본가로 돌아갔다. 1976년 큰형의 가게에서 전 종업원이 찾아와 형을 모욕하자 그 종업원의 머리를 타박하여 9월 6일, 상해죄로 15,000엔의 벌금형을 받는다.
3. 옴진리교 창설 이전
1977년 4월, 22세에 다시 상경하여 요요기제미날 시부야교[5]에 입학했으나 도쿄대학 합격에는 실패했다. 이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침술을 배우고 도쿄에서 접한 선도나 요가에 흥미를 느껴 조금씩 수련하기 시작했다. 1978년에는 입시학원에서 알게 된 부인 마쓰모토 토모코[6]와 결혼하고, 치바현 후나바시시에 신혼집을 차리고 침술원 '마쓰모토 침술원'을 개원했다. 침술원은 그럭저럭 장사가 잘 됐으나 본인의 육체적, 정신적 컴플렉스로 인해 같은 해 9월 15일 침술원을 접었다. 이후 혼마치의 진료실 겸 한방 약국 '아세아당'을 개업하였지만 1980년 7월에 보험료의 부정청구가 적발되어 670만 엔의 반환을 요구받았다. 아사하라 본인의 저서에 따르면, 이 시기의 아사하라는 도쿄대학 수험도 좌절되고 부양해야 할 가족까지 생기면서 정신적인 공허함을 많이 느꼈다고 하며, '변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갈증을 점점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한방약국을 개업했을 때는 사주명리학과 기학, 점술, 영어, 중국어 등을 계속해서 독학했다. 그는 영성가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1927-1976)의 저서를 탐독하기도 했다.[7]동년 8월 25일, 25세에 신흥종교단체 아함종(阿含宗)[8]에 입신하고 이후 3년간 재적하였다. 이 3년 동안 아사하라는 아함종의 교리대로 '천좌행(千座行)'이라는 수행을 시작한다. 이는 악한 업을 녹이기 위해 천 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40분간 절을 하며 공양을 올리는 수행법으로, 이 수행을 하던 중인 1981년, 아사하라는 쿤달리니가 열리는 신비체험을 했다고 한다. 마침 이 당시의 아함종은 밀교와 힌두교의 요가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신도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고, 평소 요가에 관심이 많던 아사하라는 이를 열심히 따라 배웠다.[9] 1981년 2월 아사하라는 건강약품판매점 'BMA약국'을 개업했으나, 1982년 무허가 의약품을 제조/판매한 혐의로 같은 해 6월 22일에 약사법 위반으로 체포된 후 벌금형 20만 엔을 받았다. 이 무렵 경영아카데미 등을 운영하고 있던 니시야마 쇼운(西山祥雲)이라는 사람의 제자로 들어가 '쇼코'라는 이름을 받고서, 스스로를 '마쓰모토 쇼코'라고 소개하기 시작했다. 1983년 여름, 28세에 도쿄도 시부야구 사쿠라오카에서 선도, 요가, 동양의학 등을 종합한 (초)능력개발을 지도하는 학습학원 '봉황경림관(鳳凰慶林館)'을 개관하였고, 이때부터 '아사하라 쇼코'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는 아수라와 샤카와 비슷하게 들리도록 의도하고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1985년 아사하라는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신비체험 두 가지를 하게 된다. 그 중 첫째가 그 유명한 공중부양이었다. 아사하라가 생전에 썼던 책 《최후의 해탈자》와 교단에서 제작한 홍보 애니메이션인 초월세계에서는 아사하라가 공중부양의 첫 단계를 거친 뒤 수 초간 공중에서 정지했으며, 이를 주변의 수행자들이 목격하고 증언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물론 판단은 알아서. 이즈음 당시 오컬트계 잡지인 무(Mu)[10]가 옴의 회를 일본의 요가 단체로서 취재하여 사진이 실린 기사를 연재하면서, 오컬트 계에서 아사하라의 인지도는 급격히 커진다. 이 사진은 좌선을 한 채로 도약하는 것으로서, 후에 옴진리교가 말하는 '다르두리-싯디(darduri-siddhi)' 공중부양의 원형이 된다. 실제로도 인도 요가 중에 저렇게 가부좌를 하고 도약하는 요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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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부양했다고 주장하는 사진 |
이것이 소위 말하는 공중부양 사진인데, 합성같은 느낌이 많이 들지만 의외로 합성‘은’ 아니다. 알고 보면 별 게 아니고 그냥 양반다리를 한 상태에서 몸을 움츠렸다가 펴면서 그 반동으로 허벅지를 아래로 내려 바닥을 차면서 점프하는 그 나름대로 꽤 대단한 재주이긴 하지만 충격적이게도 옴진리교인들이 옴진리교를 믿는 이유가 달랑 이 한 장의 사진 때문이라는 것이다. 엘리트 교육을 받은 핵심 간부도 이 사진 하나 때문에 아사하라 쇼코를 숭배하게 된 것이다.[11] 사실 그렇게까지 대단한 재주도 아니다. 몸이 너무 무겁지 않고 상당한 근력과 유연성이 있는 사람이 충분한 연습을 한다면 따라할 수 있다.[12][13] 무엇보다도 단순히 근력을 이용한 점프일 뿐 신통력 따위와는 아무 관계 없다. 이 때문에 옴진리교 반대 운동에 참여했던 변호사 타키모토 타로[14]가 아사하라 쇼코의 거짓말을 논파하기 위해 똑같이 연습해서 성공한 사진을 공개, 현재까지도 트위터 프사로 사용되고 있다.[15] 한때 디시인사이드 등지에서 오쇼라 빈라즈덴[16]이라는 짤로 퍼지기도 했다.[17] 바닥과 벽의 경계의 가운데 부분만 움푹한 데다 바닥재의 색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밝은 푸른색의 바닥임을 고려하면 애초부터 바닥이 아니라 매트 같은 탄성력이 좋은 물체에서 튀어오른 것일 수도 있다.
같은 해에 그는 '일체중생의 고통'에 공감하기 위해 허무승(코무소) 생활을 하면서 가나가와현 미우라 해변에서 오체투지 수행을 하던 어느 날, 무아지경 속에서 시바 신의 환영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시바 신의 환영은 아사하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아비라케츠노미코토(アビラケツノミコト)[18]에 임명합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스스로를 메시아적 존재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종교단체를 세우고, 자신과 같은 초능력자들을 모아 ‘샴발라 왕국’을 세우겠다는 포부를 품는다. 사이비 종교 지도자 아사하라 쇼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4. 옴진리교 창설
1984년 아사하라 쇼코는 요가도장 「옴의 회(オウムの会)」를 결성해 운영하고 있었다. 의외로 요가는 제대로 가르쳐서 이걸로 신뢰를 얻은 신자도 꽤 있는 모양이다. 실제로 아사하라가 지은 요가책을 보고 입회한 인물도 꽤 있었다.일련의 신비체험 이후 1987년, 아사하라는 자신의 도장을 「옴 신선회(オウム神仙の会)」로 개칭하고, 본격적으로 불교식 수행과 해탈을 회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선전환으로 인해 그냥 요가나 배우러 들어왔던 회원들이 상당수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노선 전환이 당시 정신적 공허함을 느끼던 고학력층에게 어필됐고, 이 때부터 아사하라의 도장에 대학생 이상의 엘리트가 하나둘씩 가입하기 시작한다.[19][20] 이때 자신의 머리카락이나 목욕물 등을 팔았는데, 특히 아사하라의 피가 섞인 음료는 20cc 100만 엔에 팔았다.
또한, 아사하라는 '라-테일' 1985년 11월호에서 사카이 카츠토키[21]의 예언서 '신비의 일본'에 근거하여, 초능력 개발을 가능하게 해서 영적으로 진화하기 위한 돌 히히이로카네[22]를 발견했다는 기사를 투고하였다.
1987년 도쿄도 시부야구에 있었던 옴 신선회를 개칭하여, 종교단체 옴진리교가 설립되었다. 동년 11월에는 뉴욕 지부도 설립하였다. 1989년 8월 25일에는 도쿄도에서 종교법인으로서 인증받았다. 이후 소련 등[23] 외국에도 대거 개설하기 시작했다.
5. 달라이 라마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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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와 만난 아사하라 쇼코 |
아사하라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일본 대표였던 빼마 갤뽀와 접촉하여 그의 조력으로 1987년 2월 24일 및 1988년 7월 6일에 달라이 라마 14세와 인도에서 회담하였다. 아사하라 측은 양자가 대화하는 모습을 비디오와 사진으로 촬영하였고, 회담에서 달라이 라마 14세가 "일본에서 진정한 불도를 펼치세요."라고 아사하라에게 전했다며 옴진리교의 광고 및 선전에 크게 활용되었다. 그러나...
6. 진상
달라이 라마는 평범하게 올바른 부처의 가르침을 알리라고 말한 것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올바른'이라는 말은 일본의 불교가 잘못되었으니 아사하라가 올바른 불교를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 아닌, 부처의 가르침을 곡해하지 말고 올바르게 알려달라는 부탁의 말이다. 그냥 무난한 종교적 덕담이다.또한, 달라이 라마가 명목상 한 나라의 지도자이긴 하지만, 티베트 망명정부는 결국 망명정부인지라 한 명이라도 해외 협력자가 아쉬운 상황이다. 불교에 기반을 둔 티베트 망명정부는 각국의 불교 단체와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서 해외 협력자를 늘려나가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조계종 같은 일반적인 불교 단체가 대표적이다.[24] 문제는 이때는 아직 일본 국내 사정에 어두워서 옴진리교가 평범한 불교 단체 코스프레를 하고 찾아오자 수상한 단체라는 걸 몰랐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먼 나라에서, 덤으로 눈도 성치 않은 사람이 "나 불교 수행자요." 라고 찾아왔다면 그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아, 그래요? 그럼 그 곳에서 올바른 불도를 펼치세요." 라고 덕담을 해주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달라이 라마는 그냥 이렇게 일반적이고 무난한 덕담을 건넸을 뿐이다. 그런데 옴진리교는 이를 ' 티베트 불교의 종주 달라이 라마가 아사하라의 가르침이 올바르다고 인정했다' 라는 식으로 왜곡하여 교세 확대에 활용한 것이다. 그 예시로, 옴진리교는 자체제작 애니메이션 초월신력에서 티베트 불교의 고승 '칼 린뽀쩨'와 초월신력으로 만나고 그의 죽음에 아사하라가 신통력을 빌려 티베트 불교에서 연락하려던 것보다도 더 빨리 도착했다는 내용의 에피소드를 실었다.
다행히 빼마 갤뽀는 금방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옴진리교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적극적으로 대립하게 되었으며, 티베트 망명정부에 아사하라와 관계를 멀리할 것을 충고하였다. 그 직후 티베트 망명정부와 티베트 불교의 승단에서는 옴진리교와의 관계를 모두 단절하였다. 이게 씨가 되어서 이후로 일본의 몇몇 신흥종교에서 일본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티베트의 린뽀쩨(고승)를 이용하는 경우가 일어났다.
7. 노선 전환과 망상의 시작
아사하라는 대량의 LSD를 항시 투약하고 있었는데, 이 LSD를 제조하는 설비가 옴 교단 내부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며 LSD의 복용도 수행의 일부라는 견해를 피력했다.[25] 포아(ポア)[26]라는 살인정당화 논리를 제공하여 제자에게 살인을 강요했고, 자신을 재림예수라고 자칭하면서, 제3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후에 스스로 신성법황으로서 일본을 다스리겠다고 생각한 과대망상증을 보였다.아사하라 쇼코의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하면 마하야나와 바지라야나(ヴァジラヤーナ)[27]인데, 마하야나는 온건한 종교적인 활동으로서의 구제활동을 의미하는 것이고, 바지라야나는 무력투쟁을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종교적으로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한 자는 낮은 수준의 인간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로 사용되었다.
여하튼 옴진리교가 교세를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옴진리교 신도가 가족과 연락을 끊는 일이 잦아지는 것은 당연했고, 점차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컬트 종교 정도의 이미지였지만 사회적인 비판을 받기 시작하자 이런저런 대응에 나섰는데 그 대응 가운데 하나가 TBS 비디오 문제와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사건이었다. 그러나 살인사건 자체는 일본 경찰의 미적지근하기 그지 없는 대응으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7.1. 진리당과 총선 참패, 그리고 본격적인 폭력 노선
어떻게 되었든 아사하라는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 살해사건 문제로부터 찜찜하지만 시선을 돌리는 데 성공한 후, 교세를 확장하면서 이 세력이 국가적인 영향력을 뻗치게 하기 위해 진리당을 결성한다. 신진정당이 선거를 나가는 것도 보통 문제가 아닌데 진리당이 도전한 것은 치바, 사이타마, 도쿄, 카나가와라는 대도시 지역구였으며, 아사하라가 출마한 것은 그 중에서도 격전지[28] 도쿄4구(도쿄도 시부야구/나카노구/스기나미구)[29]였다. 결과는 당연히 낙선. 이렇게 된 이유로는 진리당 자체는 그저 특이한 장난 정당 정도의 취급을 받았고, 또한 출마 이후에 사카모토 츠츠미 실종사건과 연계가 되어있다고 보여 이를 묻어버리려고 출마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기 때문이다.[30] 실제로 사카모토 변호사 사건을 일으킨 간부 6명은 전원 입후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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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회 중의원 선거 당시 출마연설을 하는 아사하라 쇼코 |
그리고 집회를 소집해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33]
이번 선거의 결과는, 확실하게 말해 참패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참패였냐고 하면, 이것은 사회에 진 것입니다. 아니면,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국가라는 것에 진 거라고 결론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결과를, 여러분이 어떻게 분석할 지는 모르겠지만, 전 처음에는 혼자서 홀린 것 같은 상태로 그 결과의 추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결과가 결정된 이후에는, 장녀 두르가(ドゥルガー), 그리고 삼녀 우마 파르바티(ウマー・パールヴァティー)[34]가 "아버지, 어떤 조작(トリック)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랬습니다. 즉, 선거관리위원회를 포함한 대규모의 조작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제 자식들이 저에게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는대로, 진리당의 기초표는 1만 수천표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1만 수천표가, 적어도 기초표일 그 1만 수천표가 모두 투표되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온 건 겨우 1천 수백표[35]. 이미 눈치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도쿄주변, 즉 치바, 사이타마, 카나가와의 표는 그대로 나왔지만, 도쿄의 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즉, 생각할 수 있는 건, 선거관리위원회 주도의 커다란 조작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말이죠. 이건 즉, 국가에게 진 것입니다. |
7.2.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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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 ? |
창당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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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정당 해산 사망 |
7.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구) 도쿄 4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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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 (0.33%) | 낙선 (13위) |
8. PSI(Perfect Salvation Initiation)
자신의 뇌와 연결해서 자신의 뇌파를 수행자에게 옮김으로써 최종해탈을 이끄는 행위를 PSI(Perfect Salvation Initiation / 完全救済イニシエーション)[36]라고 불렀다. PSI는 다른 옴진리교의 수행 과정과는 다르게 아사하라 쇼코는 완전 해탈자이므로 아사하라의 사고는 무조건 옳다는 병맛 같은 사고방식에서 시작되었다.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이후에 옴진리교가 세간의 관심을 받자, 아사하라의 뇌파를 복사한다는 헤드기어도 일본의 매스미디어에 오르내렸다. PSI를 착용한 신도 모습 / PSI를 착용한 신도 모습2 / 아사하라 쇼코 착용 모습옴진리교 교리에서 소위 말하는, 자신의 마음 속에 타락한 데이터를 지우고 완전해탈한 마하 구루 아사하라의 데이터를 삽입하는 것으로 사마나도 완전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교리를 바탕으로, 개인의 독자적인 판단 능력을 부정하고 아사하라 쇼코의 논리는 무조건 옳다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비판없이 교조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기묘한 분위기가 중의원 선거 참패 이후의 옴진리교의 무장노선을 추진하는 기반이 되었다.
PSI 세트
PSI 사용에는 당연히 돈을 지불해야했는데 1회 임대 즉 하루 임대가 10만 엔, 완전 구매에는 100만 엔이었다고 한다. 신도들 대부분이 그런 돈을 지불하면서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헤드기어 형태를 착용하고 작동하면 전류가 흘러나오는데 처음부터 매우 미세한 전기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전기고문이나 다름이 없는 물건이었다.[37] 이 전기 고문은 지속할수록 강도가 점점 쎄졌는데 마치 밀그램의 복종 실험과 거의 동일한 세뇌 방식이었다.[38] 워낙 전기 쇼크가 컸던 탓에 신도들이 발작을 하거나 심지어는 헤드셋을 벗어 버리는 등의 생존본능에 의한 저항을 했고 이 때문에 아예 손과 발을 묶고 정좌 상태나 독방 침대에서 누운 상태로 이것이 강요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전기쇼크에 의한 시력저하가 발생하는 신도들이 많았다고 하며 장시간 사용시에는 전자제품 특성상 이마나 머리 부분에 옅은 화상을 포함한 염증이 다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39]
9. 다키니
본격 옴진리교판 기쁨조. 원래는 티베트 불교에서 죽음의 여신들을 의미하는 단어지만 여기서 의미가 왜곡되었다.9.1. 다키니 해설
옴진리교 출가 신도의 계율에는 불사음(不邪淫)이라는 것이 있어서, 공식적으로는 연인 및 배우자와의 성관계만 허용되었고 그외 자위행위 및 성관계가 금지되어 있다. 연인 및 배우자와의 성관계는 허용한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신도가 된 부부나 연인에게 별거를 강요하고 성관계 금지를 종용했다. 따라서 말이 좋아 허용이지 실질적으로는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만 제외하고 모든 신도들은 성관계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그런데 아사하라 본인은 '최종해탈자'로서 계율도 초월한 존재이므로, 아사하라 전용의 일종의 하렘을 건설하였다. 아사하라 본인은 오오쿠(大奥) 제도를 확립한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환생이라고 통했기 때문에 같은 조직을 지어도 상관없다는 핑계였다. "젊은 여성을 높은 차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좌도 탄트라[40][41]이니시에이션(左道タントライニシエーション)을 최종해탈자의 의무로써 베풀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종교적인 논법도 사용하였다. 다키니는 약 30명이고, 제2사티안에는 상시 10~15명이 살았다. 평상시에는 이 제2사티안 1층의 라면가게에서 일했다고 한다. 다키니가 된 여성은 홀리네임 '다키니'가 이름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9.2. 다키니의 선발과 그외
- 옴진리교에서는 입교할 때 얼굴 사진을 찍게 되어 있다. 이 사진을 교단 본부에 보내서, 아사하라의 취향에 맞는 여성이 선발되었다. 한 번 고려 대상이 된 여성은 다시 얼굴 사진 촬영을 하고 아사하라에게 사진이 제출되었다.[42]
- 선발된 여성은 본부에서 아사하라 본인, 그리고 간부 중 하나인 무라이 히데오(村井秀夫)와 직접 면담을 나누었다. 무라이 히데오는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사건의 첫 살인시도 및 실제 살해사건 범행자[43]이기도 했는데 이후 1995년에 야쿠자에게 살해당했다. 일명 무라이 히데오 척살 사건. 옴진리교 문제의 입막음을 위해 살해당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지만 지금까지 이에 대해 완전히 밝혀진 부분은 없다.
- 면담을 통과한 여성은 아사하라로부터 '좌도 탄트라이니시에이션(左道タントライニシエーション)'을 받았다.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결국 성관계를 의미한다(...). 이 시점에서 숫처녀였을 경우, 다키니가 될 수 있었다.
다키니가 되면 특권들이 존재했고 특히 다키니는 머리를 길게 길러야 했는데 이유는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가 긴머리 여성이 취향이라 그 취향을 맞추는 게 당연했기 때문이다.[44] 공개된 아사하라 쇼코의 성적 취향은 다음과 같다.
- 15~25세 사이 여성.
- 긴머리와 미모를 갖춘 여성.
- 처녀 즉 성경험 없는 여성을 선호함.
특히 그가 다키니들을 통한 하렘을 구성하면서 이를 합리화하는 수단 중 하나가 본인의 트라우마였는데 젊은 시절 자신의 성기가 작다고 느낀 것에 대한 트라우마를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라고 합리화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단언했고, 성기가 큰 사람은 전생에 성적 카르마가 깊었기때문에 해탈에 이르지 못하는 존재라고 합리화도 했다고 한다.
다키니의 특권은 다음과 같다.
- 교단 내에서 높은 예우를 받을 권리.
- 운전수가 딸린 차량을 탈 권리.
- 사복을 구입하여 착용 할 수 있는 권리.
- 갓 만든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권리.
- 아사하라의 고향인 쿠마모토의 특산품 멜론을 하사받을 권리.
다키니가 되고싶지 않은 여성은 머리를 짧게 잘랐다고 한다. 옴진리교의 과거 취재 영상을 보면 머리가 짧은 여성들이 여럿 나온다. 머리를 기르는 건 다키니로 발탁(?)된 여성들에게 강제되어지는 것이었다고 한다(‘월간 포스트’ 2000년 3월 10일호 발췌)
여담으로 아사하라는 자신과 성관계를 맺은 여성의 음모를 작은 병에 담아 보관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경찰이 아사하라를 체포할 때 이후 옴진리교의 거점에 대해 실시한 압수수색에서 당시에 나온 병의 수는 100개가 넘어갔다고 한다.
10. 체포와 사형 판결
아사하라와 옴진리교 교단은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벌였고, 이에 따라 일본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와 함께 아사하라 쇼코를 체포했다. 체포 당시에는 숨겨진 다락방에서 PSI 헤드기어를 착용한 채 거액의 현금과 과자를 숨긴 채 웅크리고 숨어있다가 적발되었으며[45] 체포된 뒤에는 자신을 신으로 칭하면서 위엄을 나타내던 모습은 어디가고 "죄송합니다..."라고 한 뒤 고분고분한 태도로 경찰의 수사에 협조했고 존댓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린 사건을 포함한 13개 사건의 용의자로 기소되어 형사재판을 받았다. 변호인단들은 사건에 대해 아사하라가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그를 변호했지만 정작 아사하라는 재판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나타냈다고 한다. 결국 2004년에 1심에서 사형이 판결되었다. 아사하라 측은 항소 및 상고, 재심 요청을 거듭했으나 모조리 기각되고 결국 사형이 확정되었다.사형 판결 이후 아사하라를 비롯 옴진리교 일당의 존재는 거의 잊혀졌는데, 그 후 일본의 매스컴에서 그의 근황에 대해 다룬 바에 의하면 아사하라는 똥오줌을 가릴 수 없어서 기저귀를 차고 있고 혼자서 소리를 지르는 등 정신이상을 보였다고 하며, 자기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머리도 많이 빠진 데다 앙상하게 말랐고, 어째서인지 안구도 없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부인을 포함한 가족도 알아보지 못해 면회도 가지 않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이것은 가석방을 노리는 연극일 가능성도 있다.[46] 제2차 아베 신조 내각 때 일본에서 사형 집행이 급증한 데다가 이전이라면 사형수 중에는 상대적으로 사회적 물의가 적고 갓 사형이 확정되어 살 기회를 오래 주는 게 보통인 사형수까지도 주저 없이 사형장에 보내는 와중에 재심을 신청했기 때문.
한편 아사하라 자신은 사형 집행 전까지 재심 청구 이외에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 수하 중에 사형이 확정된 3명이 특정 사건의 증인으로 출석한 적이 있다.
11. 석방 운동
아사하라의 체포 이후 옴진리교의 목표는 아사하라의 석방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를 위해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탈옥시킨다는 시도가 적발되기도 했다. 이 와중에 러시아제 헬기를 1대 밀반입하기도 했으나 결국 범행에는 활용되지 못했다. 헬기는 나중에 압수처리 당했다. 아사하라 체포 직후 옴진라교 신자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소수 과격파들이 존사님 몰래 했을 것이다” 또는 “존사님이 설령 직접 계획한거다 해도 큰 뜻이 있으셨을 것”이라며 현실부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알레프로 이름을 바꾼 옴진리교는 2인자였던 조유 후미히로[47]의 개혁으로 아사하라 석방을 위해 아사하라는 교주에서 전 대표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그의 가족과 교단은 연관을 부정되었다. 그렇게 마츠모토 일가는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사라졌으나 아사하라를 신이라 부르는 걸 부정하자 결국 불만이 폭발한 구 장로단은 2인자인 조유 후미히로 측과 분열하게 되었고 결국 2007년 조유는 ‘빛의 고리(히카리노와=ひかりの輪)’라는 유사 옴진리교를 만들었다.
표면적으로는 아사하라와의 관계를 부정했으나 아사하라는 구속 후에도 신으로 숭상받고 있어서, 그의 가족들은 교단 측에서 계속해서 지원을 받았다. 그들은 탈퇴자인 척 하는 신도에게 둘러싸여 편안하게 생활하였으며, 특히 아사하라의 아내 마쓰모토 토모코는 계속하여 교단 인쇄물 등에 실리는 그림 사용료라는 명목으로 생활비 지원을 받았다. 아사하라를 혐오하여 직접 인연을 끊었던[48] 넷째 딸은 현재 수도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12. 수감 중 이상행동
아사하라는 오랜 수감생활 동안 구치소와 법정에서 이상행동을 보였다고 관계자들이 증언한 바 있다.아사하라가 보인 이상행동으로는 이런 게 있다. #1
- 갑자기 괴성을 지른다.
- 의미를 알 수 없는 혼잣말만 반복한다.
- 밤에 자면서 똥이나 오줌을 쌌다.
- 감방에 똥오줌 등 오물을 곳곳에 칠했다.
법정에서도 마찬가지로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자해를 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했다고 한다. #
이러한 이상행동은 수감 직후엔 멀쩡하다가 2010년대 부터 이러한 이상행동이 점점 심각해졌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오랜 수감 생활 동안 정신상태에 이상이 생긴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아사하라 본인이 이러한 이상행동으로 정신문제에 대한 참작을 받아 감형을 받거나 정신병동 등에 이감을 통해 구치소 밖을 나가려는 목적으로 일부러 이상행동을 보였을 확률이 높다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결정적으로 사형 당일 본인의 사형사실을 알았음에도 이상행동을 보이긴 커녕 묵묵했다고 한다.
13. 사형 집행
2018년 7월 6일 오전,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사형수 현황에 대해서는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과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사건을 참고. 아사하라 쇼코를 포함해 총 7명이 동시에 처형되었는데 1998년 이후 최다 인원이 동시에 사형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대규모 사형 집행은 2019년에 아키히토 덴노가 퇴위하고 나루히토 황태자가 덴노로 즉위했는데 아사하라 쇼코 사형 시점에 쓰이는 헤이세이 연호도 5월부터 레이와로 바뀌었기 때문에 새 연호가 제정되기 전에 흉악범 사형 같은 좋지 않은 일을 미리 처리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9]
이후 집행에 입회한 관계자가 언론사의 취재에 응하여 사형 집행의 분위기에 대하여 설명을 했다.[50]
7월 6일 오전 7시에 기상한 후 아침식사를 끝낸 직후인 7시 40분에 방에서 끌려 나온 뒤, 집행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 후 종교인에 의한 의식에도 응하지 않고, 집행 후의 자신의 유해를 누구에게 넘기겠냐는 질문에 처음에는 아무 말이 없다가 집행관이 재차 묻자 넷째 딸에게 넘겨달라는 말만을 남겼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형수와 달리 딱히 저항하거나 하지도 않았으며, 8시 조금 넘은 시각에 집행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교수형 집행은 보통 방에서 끌려 나온 다음 종교인에 의한 고별식 및 유언 작성, 사후 처리 등을 묻는 등의 절차가 있기 때문에 방에서 나온 뒤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는 걸리는 게 보통이지만, 그의 경우에는 사후처리 외에는 딱히 아무 말도 안 했고 집행이 끝날 때까지 멍하게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위와 같이 순순하게 형을 받아들였다는 거 가지고 정신 이상 혹은 사형 집행 전날에 미리 집행일을 알려준 거 아니냐 라는 주장이 돌아다니는데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게 위의 넷째 딸에게 시신 인도를 반대하는 마쓰모토의 아내와 셋째 딸이다. 즉 심신미약 상태인 사형수를 억지로 사형시켰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 일본의 사형 제도는 사형 집행 당일까지 절대 본인에게 집행일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유는 1960년대에 먼저 알려줬다가 수형자가 자살한 케이스 때문인데, 이 사람 정도의 거물이 만일 전날 알려줘서 자살기도 혹은 자살했다고 치면 그 책임 아무도 못 진다. 물론 일본 법 및 만일 그랬을 경우에 생길 후폭풍을 생각하면 그냥 뇌피셜이다. 사형이 집행되는 것과 수감 도중 질병 등 다른 사유로 사망한 것은 엄연히 다르다.
이후 유해를 인도받은 넷째 딸은 바다에 뿌려버릴 거라고 선언했다. 이유는 성지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
사실 아사하라가 자신의 유해를 받을 사람을 넷째 딸로 지정한 건 좀 신기한 일인데 이 사람은 옴진리교가 가장 활동적인 시기에 태어난 탓에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수련 시설에 거의 감금되듯 살았던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이러한 이유로 옴진리교 관계자가 구속된 뒤에 대놓고 부모와 연을 끊겠다고 선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유언에 대해 아직도 옴진리교의 후속 단체와 관계가 있다고 여겨지는 아내와 셋째 딸이 이의를 제기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사형수라고 해도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넷째 딸에게 인도되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넷째 딸은 교단 쪽과 척을 진 상태이므로 신변의 위협이 우려되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인도하고, 인도한 뒤가 어떻게 될지가 큰 문제라고 한다. 같은 이유로 같은 날 사형당한 엔도 사형수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본인의 유언이 가장 중요하다는 원칙에 따라 옴진리교의 후속 단체인 알레프에 그대로 인도됐다.
사형 집행이 끝난 지 3일 뒤인 7월 9일에 도쿄구치소에서 장례 및 화장이 끝났고, 유언에 따라 넷째 딸에게 유골을 인도할 시기를 조정하기 위해 동 구치소에서 임시 보관되었다. 유골 인도 문제로 소송 공방까지 불거졌으나 # 사형 집행일로부터 3년이 되기 하루 전인 2021년 7월 5일, 일본 최고재판소에서는 결국 아사하라의 유골을 둘째 딸에게 인도할 것을 결정했다.
일본 사법부가 20년 이상 아사하라 쇼코의 사형을 집행하지 못했던 이유는 모든 수배자들이 체포되지 않아서 실체적 진실을 재판에서 모두 밝혔다고 확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관료적일 정도로 이런 제도적인 절차를 철저하게 따지기 때문. 옴진리교 관계자들이 사건 계획의 상세정보를 불지 않았기에 경찰 및 검찰 측에서도 모방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정보를 끌어내야 했었고, 아사하라 본인도 처음에는 정신이상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워낙 죄가 커서 어지간한 정신 이상으로는 사형을 면하기 힘들다는 게 분명해지자 그 대신 테드 번디처럼 수배 중인 신도가 체포되면 그에 대해 증언을 해 주고, 사형이 집행될 것 같으면 다른 신도가 자수를 해서 사형 집행을 미루는 식으로 20년 넘게 집행을 질질 끌어왔다. 다른 수배자가 추가적으로 자수하거나 체포될 때마다 재판이 연장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증인으로 세워야 하는 아사하라의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들이 아사하라의 목숨줄을 이어주기 위해 쿨타임 찰 때 "잡혀 준"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도 있었다. 아사하라 및 일당들에 대한 사형이 전격적으로 집행된 것은 모든 수배자들이 다 체포되어 재판이 절차적으로 마무리되고, 아사하라를 더 이상 살려둬 봤자 밝혀낼 것은 이미 다 밝혀졌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살려둬서 성역화를 막고 욕보이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속설이 한국에는 널리 퍼져 있지만, 옴진리교는 무슨 더 실추될 명예 따위가 존재하는 집단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 성역화를 막을 것 같았으면 위의 엔도 같은 사람의 유언을 절차대로 집행해 줬을 리가 없다.
[1]
이 사람은 구마모토현 출신으로, 익산에서 경찰서장을 지냈다.
[2]
現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춘포면
[3]
만쿄는 동생의 사상과 옴진리교의 교리는 미화하거나 동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크게 비판했지만 쇼코와 만쿄의 과거가 저랬던 만큼 만쿄는 쇼코를 비판하면서도 이렇게 만든 건 일본이라며 양쪽을 동시에 비판했다.
[4]
이 시기 아사하라는 전맹이 아니지만 맹인학교에 들어가 14~15년 동안 기숙 생활을 하는 사이에 가족의 정도 느끼지 못해 '가족과 있지도 않고 이 사람들처럼 전맹도 아니지만 정상도 아닌'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진 게 아닌가 하는 지적이 있다. 학창시절에도 상상력이 풍부하고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을 하는 등 자아가 강한 모습을 보였다는 동창들의 증언이 있다.
[5]
일본의
입시학원을 말하는 것이다.
[6]
이 사람도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당시로서는 고학력자였기 때문에 아사하라의 저서를 상당수 대필하기도 했다. 옴진리교의 교세가 왕성하던 시기의 홀리네임은 '마하마야'(훗날 '야소다라'로 바꿈)였으며, 자녀들과 함께 신의 화신으로 숭배받았다. 다만 토모코는 남편에 비해서도 불교나 요가 수행에 별로 진지하지 않았다고 하며 이미 결혼생활 초기부터 아사하라의 영적 방황과 잦은 외박으로 인해 정신 불안 증세가 있었다. 아사하라가 본격적으로 타락하고 다키니를 거느리면서부터는 더욱 사이가 소원해졌으나 남편의 범죄행위 자체는 알면서도 묵인했다.
[7]
이 영향으로, 옴진리교 특유의 이런저런 종교와 오컬트가 섞인 듯한 교리 역시 다카하시가 세운 신흥종교 단체인 갓 라이트 어소시에이션(GLA)의 것을 많이 참고한 흔적이 보인다.
[8]
이름은
아함경과 비슷하지만, 정작 교리는 아함경의 가르침과 금강승 밀교, 힌두교 요가 수행 등을 섞어놓은 종교단체였다. 이곳의 교주 키리야마 세이유(桐山靖雄)는 사업에 실패한 후 자살하려 하다가 우연히 불교 경전을 접하고 마음을 돌려서 불교 수행에 입문했다. 그는 처음에는 밀교를 자기 식으로 소화해서 신흥종교단체를 만들었으나, 반발이 심해지자 아함경을 전면에 내세우고 밀교 교리를 섞어 다시 종교단체를 세웠다. 일본의 바둑 시합
아함동산배가 이곳과 관련이 있다. 키리야마는 생전에 바둑을 아주 좋아했으며, 명예9단 자격도 있었다. 그는 본인에게
신통력이 있어서 바둑이나
쇼기를 둘 때 상대의 수가 다 보인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9]
당시 아사하라가 배웠던 아함종식 요가는 일본의 종교학자 사호다 츠루지(佐保田鶴治, 1899~1986)가 소개했던 수행법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었다. 평소 병약했던 학자 체질이었던 사호다는 인도인 청년으로부터 요가를 처음 전수받고, 62세의 나이에 간 인도 여행에서 본격적으로 요가를 수행하면서 건강을 회복했다. 이후 일본에서 쓰던 전통적인 어휘인 유가(瑜伽, ゆが)도 아니고, 미국에 전해져서 미용체조화된 요가(ヨガ)도 아닌, 힌두어 원어에 가깝게 장음이 들어간 ヨ―ガ라는 독음으로 현대 인도 요가를 열정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이비적 의도가 아니라, 학자로서 순수하게 인도의 수행법을 소개한 것이었다. 2020년대 기준으로 일본의 젊은 층은 사호다의 영향을 받아 ヨ―ガ라는 표기법에 익숙한 반면, 중장년층은 ヨガ라는 표기법을 쓰는 경우가 있다. 여담으로 이 사람은 한국 현대요가의 선구자 중 하나였던 정태혁 씨와도 친분이 있었다.
[10]
오늘날까지도 발행되고 있는 잡지이며, 따라서 일본 내에서 오컬트 관련 언급이 나오면 이 잡지도 자주 언급되는 편이다.
[11]
몇몇 신자들은 당시 공중에 잠시 점프한 순간을 촬영할 수 있을 정도로
셔터 속도가 빠른 카메라가 흔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저 사진을 공중부양 장면이라고 믿기도 했다. 그러나 타키모토 변호사가 찍은 사진에서 보듯이, 일본에서 이 정도 성능의 카메라는 마음만 먹으면 구매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그 때나 지금이나 세계 최고의 카메라 메이커들은 일본에 다 있다시피 하다. 일본에서 못 구하는 카메라라면 전 세계 어디를 가도 구하기 힘들다는 소리다. 게다가 전문 카메라가 되었든 일반 카메라가 되었든, 잡지사진 한 컷을 위해 카메라 동원대수를 늘리고 필름을 몇 통을 사용하듯이, 공중부양 연출장면을 카메라를 여럿 동원했든 스포츠 기자들이 쓰는 카메라로 연사를 했든 하면서 여러번 촬영해서 한 컷을 건져낸 경우일 수도 있다. 당장 한눈에 봐도 공중부양과는 거리가 먼 사진인 걸 누구나 알 수 있지만, 그러한 상식적인 모든 걸 덮어버리는 게 사이비 종교다.
[12]
대단한 재주는 아니라지만 허벅지 힘이 만만치 않아야 하고 더불어
유연성도 있어야 하기에 누구나 막 따라하는 재주까진 아니다. 다만 신통한 능력치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13]
엉덩이가 안 아플 수는 없겠지만 엉덩이 부위가
인체에서
쿠션이라 부를수 있는 부위인 만큼 어지간히 착지 실패를 하지 않는 한 다칠 가능성은 낮다.
[14]
그 역시 옴진리교로부터 테러를 당할 뻔했다.
[15]
사실 타키모토 타로 변호사가 연습 초기 공개한 사진을 보면 표정도 심하게 찡그린 상태이고 뛰어오른 상태에서 몸의 기울어짐도 아사하라 쇼코보다 심한 편이었다. 물론 "연습만 좀 덜했을 뿐이지 신통력이 아니라 연습하면 평범한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임을 폭로하는 데는 충분했다. 현재 공개된 사진의 경우 표정 관리와 그럴싸한 자세로 쇼코의 거짓말을 완전히 발라버릴 작정으로 계속 연습한 결과 여유로운 표정과 완벽한 균형을 갖추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16]
인도의 유명한 구루인
오쇼 라즈니쉬와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의 이름을 짬뽕한 이름이다.
[17]
사실 이 자세 자체는 아무 문제될 게 없고,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는 단순히 '공중부양 수행의 첫 단계'일 뿐이다. 애초에 이런 수행법은 완전히 근본도 없이 아사하라 쇼코가 뿅 하고 생각해 낸 건 아니다. 차크라를 열거나 단전에 기를 모으면 육신이 어느 순간 떠오른다고 믿는 심신수련집단은 의외로 많다. 심지어 공중부양마저 스쳐가는 중간 단계에 불과하고
유체이탈 정도까지는 가야 그래도 어느 정도 수련한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 물론 쇼코의 경우는 의도부터가 불순한 수련법이니 정말 무슨 심신적인 효과가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남자가 결가부좌를 하고 책상다리 상태로 팔짝팔짝 뛰어다녔으니 당연히
전립선에 충격이 주어지면서
평소에는 느낄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을 것이고, 이걸 가지고
차크라가 열렸네, 단전에 생명 에너지가 느껴지네 운운한 거라고 까기도.[51] 어쨌든 이 공중부양 수행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는데 그 중 첫 단계가 이처럼 바닥에서 양반다리를 한 채로 점프하는 게 첫 단계이다. 각 수행원마다 그 단계 분화는 다르지만 보통 3~5단계로 나뉜다. 물론 실제로 다음 단계는 그딴 거 없다.
[18]
아사하라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신의 군대를 통솔하는 빛의 신”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온 누리에 두루 뻗치는 보호’를 뜻하는 아비라크샤(Abhirakṣā)라는 단어가 있기는 하나, 뜻이 다르므로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있던 아사하라가 무의식 중에 떠올린 단어였을 수도 있다.
[19]
1990년대만 해도 일본에서 대학생은 진짜 사회의 엘리트였다. 4년제 대학을 나오면 더 그랬다.
[20]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도 단학 관련 단체가 설립되었을 때 일부 지식인과 명문대생들이 그 공허함 때문에 단체에 투신하기도 했다.
[21]
1874-1940.
기독교 전도사였으나, 1918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당시
통역병으로 종군하며 러시아
백군 장교를 접대하다가 그로부터
시온의정서의 존재를 알게 되어
반유대주의 음모론자가 되었다. 그는
일유동조론자였으며, 히로시마의 어떤 야산을 두고 '일본의 피라미드'라고 주장하면서 대중에게 유명해졌다. 그는 가짜 고대 예언서인 《타케우치 문서》를 세상에 퍼뜨리기도 했으며, 히히이로카네 이야기도 이 문서에서 언급되었다.
[22]
《타케우치 문서》라는 가짜 고대 예언서에서 언급한 신비의 금속. 옴진리교는 이 히히이로카네가 삿된 기운을 없애준다고 주장하며 이니시에이션 의식에 활용했는데, 훗날 경찰의 조사 결과 녹슨 떡철(餅鉄, 흐르는 물에 마모된
자철광)이었음이 밝혀졌다.
[23]
이 러시아 지부(소련 붕괴 후)는 옴진리교가 무장 투쟁을 하기 위한 무기 개발/연구의 또다른 중심지였다. 옴진리교가 실제로 사용했던 방법인 화학 무기뿐만 아니라 총화기도 실험되었다.
[24]
조계종은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찬성하는 등, 티베트 망명정부와 협력하는 입장에 있다.
[25]
아시아권 종교가
히피 운동의 영향을 역으로 받으면 이렇게 된다. 비슷한 경로로 비슷한 또라이가 된
오쇼 라즈니쉬의 행보도 이와 꽤나 유사하다.
[26]
아사하라는 이 단어를 차용하여 자신의 손으로 저지르는 살인을 완곡하게 가리키는
은어로 삼았다. 해탈한 자에게 살해당하면 구제를 받으므로,
구제불능이라고 판단한 인물을 제자 손으로 살해하여 전 세계를 구원으로 인도하노라고 정당화했다.
[27]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마하야나(Mahayana)는 '큰 수레'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한자로 '대승'(大乘)이라고 번역하는데,
대승 불교의 그 대승이다. 바지라야나는 일본식 발음이고 한국에서는 보통 '바즈라야나'라고 쓰는데, 산스크리트어로 Vajrayana를 말한다. 한국불교학회의 음역법으로는 와즈라야나라고 쓴다. 이는 금강승(金剛乘), 즉
밀교를 가리키는 단어다. 아사하라 쇼코는 멀쩡한 불교 용어를 본디 의미와는 전혀 다른 별도의 뜻으로 왜곡해 사용한 것이다. 위의 달라이 라마와의 일화도 그렇고 아래의 좌도 탄트라이니시에이션 등 아사하라가 주장한 바지라야나의 기본 개념은 티베트 탄트라 불교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28]
1990년 중의원 총선거 도쿄4구 당선자 중 최저득표율과 낙선자 중 최고득표율의 차는 겨우 0.9%p였다. 이는 1963년의 0.4%p 이후 최저였다. 최저 당선득표율 12.4%, 아사하라 득표율 0.3%.
[29]
1994년 이후 선거제도 변경으로 폐지. 즉 선거제도 변경 이후 지정된 현재의
도쿄 4구와는 무관하다.
[30]
이는 범행현장을 수사하던 중 옴진리교 간부 나카가와 토모히사(中川 智正)가 옴진리교 표식이 쓰인 배지를 떨어뜨려놨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31]
오랫동안 지켜온 자민당의 과반 투표율이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무너졌다. 과반 의석수는 지켰지만 이 반란은 결국 1948년
아시다 히토시 이래 45년간 존속해온 자민당 체제를 종결하고 1993년에 총리가
일본신당 출신의
호소카와 모리히로로 바뀌는 데까지 이어진다.
[32]
그런데 이나마도 차라리 진리당에선 선전한 것이었다. 옴진리교 후보 득표수/최저득표 당선자의 득표수(일본 위키피디아 문서에는 석패율로 기록되어 있으나 석패율의 정의로 기록되어 있는 '최고득표자에 비례한 득표율'이라는 정의와 수치가 맞지 않아 따로 기록한다.)가 1%를 넘은 게 단 2명(아사하라 2.69%, 나카가와 1.27%(카나가와 3구))였으며 진리당의 모든 후보의 득표를 합쳐도 10,089표, 진리당에서 나간 선거구 중 당선 되는 구가 없다.
[33]
번역을 한국어로 이해되기 쉽도록 존댓말투로 하긴 했지만 원문은 더듬더듬 말하면서 어미로 と(번역하자면 ~라는 것입니다, ~라는 것이죠), で(그러니까)를 많이 넣었다.
[34]
본명 마쓰모토 리카. 이 사람은 부친인 아사하라의 수감 이후에도 아사하라에게 동정적이었다.
[35]
이 발언에서 '진리당의 기초표'라는 것은 아사하라 자신이 출마한 '도쿄 4구의 진리당의 기초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천 수백표가 1만 수천표로 늘어봤자 어림도 없다. 아사하라의 주장인 '도쿄4구의 1만 수천표'를 실제로 기록한 당으로는 진보당(進歩党, 여기서의 진보당은 1987년 타가와 세이치(田川 誠一)가 창당 1993년 해산한 정당을 말한다.)이 있는데(다나카 료(田中良). 이후 도쿄구 의회 의원, 스기나미 구 의회 의원(현직) 등을 거쳤다.), 당수 본인이 카나가와 2구에서 당선되며 의석을 가져가기도 했지만 이 당이 10년을 못 가 해산했다.
[36]
한국어로 번역하면 =완전구제 이니시에이션= 이라는 의미로 고된 시련의 의례들을 통한 완전한 구제라는 의미다.
[37]
이 물건이 더 잔인한 건 헤드기어와 연결된 스피커나 컴퓨터 화면을 통하여 아사하라 쇼코의 뇌파를 비추어주거나 스피커를 통하여 들려주는데 그 뇌파의 파동을 보거나 소리로 듣는 신자(착용자)는 그 두뇌 파동에 따라 전류의 강약을 눈과 귀로 보거나 듣고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강한 공포감을 느꼈다고 한다. 파동이 크면 전기충격 역시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38]
실제로 연결된 PSI와 연결된 PC를 통하여 다른 방에서 신자가 전기충격을 조정하고 있었다.
[39]
일부
광신도들은 아예 아사하라 쇼코에 동일한 수준에 올라서겠다고 두개골까지 까맣게 화상을 입을 정도로 착용한 채 PSI를 키고 자칭 수행을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마 수술을 포함한 뇌 수술이 요구되는 중상들을 입었다고 한다. 사실 전기쇼크에 의한 시력저하도 근본적으로는 뇌 손상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40]
탄트라는 정신적인 지식을 넓힌다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이다. 후술하는 '좌도 탄트라' 종파의 의미와 함께 이중으로 왜곡되어 채용된 것으로 보인다.
[41]
정확히는 여기서 말하는 '좌도 탄트라'는 일명 좌도밀교로 불리는 탄트라 불교의 분파로, 섹스 등의 욕구를 적극적으로 몸으로 해소함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는 아사하라가 벌인 하렘의 일방적인 해탈자와 피구원자의 관계의 의미가 아니라 고도의 수행을 거친 남성과 여성이 서로의 육체의 결합을 통해 음과 양이 합쳐지듯이 완전해진다는 의미이다.
[42]
시각장애인은 안 보이지 않느냐고 태클 걸 수 있는데, 알다시피 같은 시각장애인이라도 여러 범주가 있고, 이 작자는 상술했듯 전맹이 아니다. 브라운관에 얼굴을 갖다대다시피 하면 TV를 시청할 수 있을 정도의 시력이었다고 한다.
[43]
정확히는 범행자 전원이 옴진리교 간부로서 동참했다.
[44]
아사하라의 아내였던 토모코도 머리를 길게 기르고 다녔다.
[45]
체포 직전 경찰이 촬영한 은신 중인 아사하라의 사진은 미공개 상태로 있다가 2015년 일본 경찰에 의해 공개되었다.
[46]
이후 옴진리교의 신도와 아사하라 일가는 일본 정부가 사리 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정신질환자를 처형했다고 언론플레이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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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조유는 최측근은 맞았으나 원래부터 2인자는 아니었고, 오히려 아사하라와 대립하다가 러시아 지부로 유배갔다 온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2인자가 될 수 있었던 계기는 자기 위에 있는 사람들이 싸그리 다 사형 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권력 공백을 메운 것에 더 가깝다. 옴진리교의 실질적 2인자는
척살당한 무라이 히데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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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성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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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1997년 사형 집행 중단 직전,
김영삼 정권이 차기
김대중 정권에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퇴임 직전 마지막으로 대대적으로 사형을 집행한 적이 있었다. 이는 민간 형법에 의한 마지막 사형 집행(교수형)이었고, 군 형법상 마지막 사형 집행(총살형)은 1986년
제28보병사단 화학지원대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박모 이병을 처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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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도가 높은 사형수에 관해서는 약간 시간이 지나면 언론 등에
인터뷰하는 경우도 많으므로 일반적인 경우다. 물론 어느 정도 일반인에게 반향이 적도록 각색은 하지만.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봐도 주목도가 높았던 사건의 경우, 후일에 공개된 내용이 사형수가 마지막으로 어떤 걸 먹었는지까지 공개되는 게 일본 언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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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가 아사하라 쇼코는 처음 '공중부양'을 했을 때
"불타오르는 기분"이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HOX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