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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파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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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의미의 확장과 이에 대한 지적4. 비판5. 또 다른 평가6. 오용7. 기타

1. 개요

신파극()이란, 근현대 동양(특히 일본)에서 서양 연극을 기반으로 쓴 희곡을 가리키던 말이다. 즉, 일본의 기성 연극인 가부키를 ' 구극()' 혹은 '구파()'라 하고 그 반대인 서양식 연극을 '신파'라고 이른 것에서 유래된 개념이다. 1888년 즈음에 시작되어 19세기 말~ 20세기 초까지 유행하였다.

2. 역사

신파극이라는 개념이 막 자리잡기 시작했던 초기에는 계몽적, 선전적,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의 성격을 많이 띄었기에 감정을 크게 자극할 수 있는 과장된 연출을 넣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점차 정치색은 퇴색하고 나중엔 서민들의 현실과 애환, 치정 등의 통속적인 내용을 주로 그리게 되었다.[1]

한국에서도 일제강점기 때 일본산 신파극을 수입하여 상영되었다. 일부 신파극은 국내에서 창작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국산 작품으로는 이수일과 심순애가 있다.[2] 하지만 이 당시 신파극은 장르 변주의 과도기였기 때문에 아직 정치적 색채를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예컨대 극 내에서 변사가 개입하여 "아아, ~하지 아니한가!"와 같이 특정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과장스럽게 선동하는 연출적 장치가 잔존해 있었고,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주제의식을 직설적으로 외치는 방식의 전개 방식 또한 그대로 있었다.

정치 색깔을 완전히 빼내고 순수하게 예술로서 인기를 얻었던 국산 신파극으로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작품이 있다. 1936년 초연하여 훗날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면서 생긴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라는 가사의 주제가가 유명하다.[3]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 일을 하던 홍도가 운 좋게 부잣집 아들과 결혼하지만 끝내 남편에게 버림받고, 결국 남편의 약혼녀를 살인까지 한다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신파극은 가정의 간통이나 로맨스, 사랑을 다루는 데 치중했다.

이후 일제강점기가 끝난 이후 일제 잔재 청산 과정에서 이런 고전적인 신파극은 완벽하게 소멸했다. 1950년대 당시 몇몇 극소수의 연극을 빼고는 신파극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영화와 드라마 등의 신문물이 급속도로 보급되어 대중문화로 자리잡은 것 또한 신파극이 쇠퇴한 원인 중 하나다. 사실 광복 한참 전이었던 1920년대부터도 신파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낡은 연극이라고 비판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당시에도 이런 노골적이고 세련되지 못한 연출 방식은 매우 촌스럽게 보였던 듯하다. 관련 기사

3. 의미의 확장과 이에 대한 지적

신파'극'이라는 장르는 소멸했지만, 그 의미가 넓어져 '신파'라는 용어는 살아남았다. 대개 '감정 과잉, 사랑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핑계삼아 논리와 개연성을 무시하는 억지 전개 방식, 관객에게 감정을 강요하는 연출 방식'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 오늘날 주로 사용되는 "영화가 너무 신파적이다" 같은 표현은 이런 의미이고, 역사적인 의미의 신파극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후술될 비판 및 재평가 문단에서 논해지는 신파 또한 역사의 신파극을 지칭한 것이 아닌 이 ' 감성팔이가 들어간 작품'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내용의 통속성과 관객 대중의 정서에 대한 자극'이 신파 영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나 이것만 가지고 신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무리한 접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초기 한국영화 작품 중에는 표현과 내용 모든 면에서 일본의 신파극이나 신파 영화에 근접한 것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부 유사한 특성이 있다 하여 기타의 많은 영화를 신파라는 범주 안에 포함시켜 다루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여러 정황을 살필 때 한국영화 역사에서 사용되는 신파라는 단어는 일반인들의 언급과 학술적 용어 사이의 엄정한 구별이 없는 애매하고 모호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대중(2013), 《 초기 한국영화와 전통의 문제
한편 '신파'라는 단어를 이렇게 넓은 의미로 쓰는 것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우선 이렇게 포괄적인 의미로 인용되는 '신파'의 개념이 어원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지적된다.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신파'라는 것은 '구파', 즉 일본의 가부키에 대응된 서양 연극을 뜻하는 말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극 = 서양 극이 되고 초기 근대 일본의 일본 극 vs 서양 극이 대립되던 시대가 지나간 지금은[4] 단어 자체로만 보면 '신'이라는 글자가 당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더구나 한국은 당시 일본에게 강제로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을 뿐, 원래 일본 문화를 향유했던 국가가 아니므로[5] '구파'와 '신파'의 대립이 있던 시기에조차도 무엇이 '구'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신파'라는 말을 받아들인 셈이다. 그 구파, 신파 운운하는 개념 자체가 일본 국내에서 자기네들끼리 멋대로 정의했을 뿐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단어를 어원대로 써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이렇게 단어 구조로부터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후술하듯이 의미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신파극이 과잉된 감정을 자주 연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 과잉인 작품이 신파극만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식의 연출 방식은 상술된 '신파'라고 일컬어진 서양 극작계에서조차 이미 오래 전부터 ' 카타르시스', ' 파토스' 등의 단어로 정의하고 있었을 정도로 극의 중요한 요소로서 중시했던 인류 보편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역사적 장르 표현과 혼동을 빚을 여지가 있는 신파라는 단어보다는, 대중들 사이에서 신파라는 말이 알려지기 전부터 널리 사용해 왔던 한국식 표현인 감성팔이 억지 감동이라는 직관적인 표현을 쓰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과잉'이라는 것은 그 기준이 개인마다 주관적이기 때문에 장르를 판단하는 객관적인 지표로 삼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사를 다루는 창작물에서 인간의 감정을 아예 표현하지 않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같은 작품이어도 사회적으로 감정을 활발히 표현하고 있다면 과잉이라고 느껴지지 않겠지만, 반대로 감정을 절제하는 분위기였다면 이전까지는 평범한 감정선을 유지하고 있었더라도 해당 장면이 유달리 튀기 때문에 과잉으로 느껴질 것이다.

신파의 주된 비판점이 "작품 향유자들이 생각하는 작품 내 감정의 역할에 비하여 창작물의 감정이 너무 과하다"라는 것인데, 그렇게 본다면 외국인들이 한국의 신파극을 별 거부감 없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인의 시각에서는 속된 말로 "오버한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외국인들에게는 그것이 과잉이 아니라고 느껴질 뿐이다. 이를 뭉뚱그려 "한국인은 신파를 싫어하는데 외국에서는 좋아하더라"라는 식으로 말하면 현상을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개중에는 '신파'라는 용어를 ' 한국 영화 특유의 감정 과잉'으로, 주로 비판적 의미로 한정하여 쓰기도 한다. 가령 "미국 영화는 (한국 사람이 보기에) 가족애 정서가 너무 과도하긴 하지만 신파는 아니다"라고 하는 식이다. 그러나 '한국 영화 특유의 감정 과잉'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상업성이나 작품성에 영향을 주는 요소인지 명료하게 정의하지 않으면 이런 비판은 논리적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즉 "한국식 감정 과잉 A는 작품성이나 상업성을 저해하는 요소이지만, 미국식 감정 과잉 B는 A와 이런저런 차이가 있어 그렇지 않다"고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을 때에만 그러한 용법이 타당성을 갖출 수 있다. 이 역시 '신파'라는 용어가 정확한 의미를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에 생기는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4. 비판

대체 왜 그렇게 신파를 못 잡아먹어서 난리인가... 신파 영화를 비판하는 이유 평론가도 신파에 눈물을 흘릴까?
대체 아리랑 제3편에서 나운규가 보여주려 한 것은 무엇인가. 컴컴하고 더러운 화면, 불유쾌한 녹음은 설비의 불완전으로 핑계해 버릴지라도 아리랑 제1편에서부터 적지 않은 세월이 흘러간 오늘날 2편보다 낫기는 고사하고 1편에서 보여준 그 정조와 리듬은 어디다 다 집어치워버리고 신파 활극을 다시 되풀이하는 책임은 누가 져야 옳을 것인가?
1936년 5월 27일자 매일신보 기사. 이처럼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신파극은 비평적으로 영 좋지 못한 소리를 들었다.

신파극이 대세였던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신파극은 비평적인 관점에서 두 가지 지적을 받았다.
현대에 드라마, 영화, 연극에서 첫 번째 요소는 다소 극복하였음에도, 두 번째 요소는 아직까지도 미숙한 연출 기법으로 인해 자주 지적받는 편이다.

장애인이 등장하는 신파극에서는 슬픔이나 과장된 감동을 유발하기 위해 장애 당사자를 시혜적으로 묘사해 이와 관련된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감성팔이, 선즙필승 등의 표현들이 자주 쓰이는 데서 엿볼 수 있듯 별 이유 없이 감정적인, 특히 슬픈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생겼다. 그와 동시에 외국의 건조한 작품들을 접하게 되면서[7] "한국 작품은 유난히 감정이 과잉되어 있다"라는 인식이 어느 정도 생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근거 없이 눈물을 유도하는 작품이 실패할 때면 "이제 신파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비평이 나오곤 한다. 2023년 더 문 역시 그러한 사례이다. 기사

5. 또 다른 평가

한국인 기준으로는 '감정 과잉'이라고 느끼는 부분도 외국인들에게는 '가족애' 등으로 받아들이면서 좋은 반응을 얻기도 한다. 예컨대 영화 부산행에서 주인공 좀비에게 물려 감염되었을 때, 좀비가 되어가는 와중에도 딸이 태어났던 날을 떠올리는 마지막 장면에 대한 국내외의 상반된 평가가 있다. 국내에서는 긴박한 좀비 추격 상황에서 뜬금없이 분위기를 해치는 대표적인 감성팔이 장면으로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해외에서는 반대로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조차 가족을 생각한다는 그 자체를 포인트로 여겨 호평이 우세했으며 심지어는 " 할리우드보다 한국 영화계가 섬세한 감정표현 연출이 더 뛰어나다"는 의견도 나왔다. 특히 미국 같은 경우 더 그런 경향이 있는데, 미국 특유의 가족애를 선호하는 정서와 한국식 감정 과잉적 연출이 잘 맞물린 결과로 보인다.

이런 반응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특히 많이 보였다. 기사 해외에서 한국식 신파에 가장 크게 공감하는 코드가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끈끈한 유대의식과 책임감인데, 이것이 전통적인 가족상이 붕괴해 가는 현 시대에서 극단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지키려 하는 모습이 어필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 주된 평이다.[8]

영화 평론 유튜버 김채호의 필름찢기는 자신은 신파를 싫어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신파 영화가 없어지는 것도 긍정적인 현상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유는 조부모부터 손주들까지 온 가족이 영화관 나들이를 왔을 때는 필연적으로 모든 세대가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볼 수밖에 없는데, 그 범주에 속하는 것이 바로 신파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화 시장에서 신파 영화가 전부 사라지면 결국 노인 세대를 극장에서 내쫓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국제시장보다 조커가 명백히 훌륭한 영화지만, 그렇다고 할머니와 함께 영화관에 갔는데 국제시장을 놔두고 조커를 볼 수는 없지 않느냐는 논리다. 아니 할머니 취향이 조커라면 조커 볼 수도 있지 즉, 신파라는 장르 자체는 죄가 없다. 그냥 영화를 못 만드는 감독들의 잘못이다.

6. 오용

신파의 비판점은 소재에서 오는 공감을 성의없이 끌어 와 게으르게 사용한다는 데에 있다. 아들을 잃은 부모, 부모를 잃은 자녀 등 가족을 주제로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키워드로 쉽게 슬픈 상황을 연상시킬 수 있고, 이런 상황만을 만들기 위해 아무 개연성 핍진성도 없이 억지 전개를 일삼는 대중문화들이 흥행하는 현상에 질려 버리는 일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일 이다.

그러나 오용이 지나쳐 간혹 슬픔을 연출하는 것 그 자체를 신파라고 정의하며 배척하는 경우를 생각보다 흔히 볼 수 있다. 휴머니즘을 다룬 작품까지 신파로 치부하며 영화를 보지도 않은 채 무조건 배척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심지어 슬픔을 연출하되 오버하지 않고 절제된 톤으로 그려낸 작품조차도 슬픈 장면이 들어갔다고 신파라 잘못 정의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다시 말해 "슬픔을 연출=무조건 신파극"이라는 잘못된 도식이 또다른 편견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러나 신파는 특정한 클리셰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시류일 뿐이다. 본 문단에 예시로 삽입된 이동진 평론가의 영상을 보면 신파는 국내와 일본에만 있는 개념이라고 선을 긋는 동시에, 우리가 흔히 신파라고 부르고 있는 연출은 일본과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닌 쉰들러 리스트 등의 사례를 들면서 정확하게 신파적으로 감정을 연출하고 있다고 평했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신파적인 연출 자체는 작법상 활용하기 좋은 클리셰이며,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인도 영화 등 다른 국가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작법이기 때문에 특정 국가의 전유물이라고 말할 수 없다. 훌륭한 영화에도 신파적 연출이 사용될 수 있다는 얘기다.

가령 시리즈 내내 가족애와 우정을 강조하는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시리즈의 경우 평가와 흥행에서 좋은 성적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짱구 극장판 시리즈도 엄연히 신파적인 요소를 활용하고 있다. 고조되는 감정, 알기 쉽게 연출되는 비극, 주변 인물들의 격정적인 슬픔 등. 그럼에도 내러티브가 철저하게 주제를 중심으로 힘 있게 이야기를 끌고 가고, 식상한 소재를 다루더라도 새로운 시점으로 볼 수 있도록 참신한 시도를 많이 하고, 극의 장치들이 짜임새 있게 설정되어 있어 몰입을 해칠 만한 요소를 배제했기 때문에 감정 과잉이 잘 느껴지지 않아 누구든지 즐길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시리즈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그리는 것도 아니다. 철저히 상업적인 시리즈임에도 꾸준히 완성도 높은 좋은 작품을 내고 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 종류의 클리셰들을 너무 많이 접해왔기 때문에 거부감이 드는 것은 한편으로선 이해되는 일이다. 같은 이야기를 수십, 수백번 접한다면 당연히 피로도는 상당할 수 밖에 없고, 익숙한 장면으로 짜여져 있다면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감정적으로 무뎌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으로서 이해받을 수 있는 거부감이라 할 수 있다. 비슷한 이야기를 다루더라도, 다른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반 세기 전만 하더라도 기술이 현대처럼 발달하지 못해 서로가 조금만 먼 곳으로 떠나면 생이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에서 편지를 쓰는 행위는 매우 큰 의미가 부여되지만, 통신과 교통이 발달된 현재에 와서는 그러한 모습에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계층이 몇이나 될까?

시대라는 것은 결국 변화하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더라도, 십년전 이십년 전 플룻이라 하더라도 현대적으로 변환하고 변주하면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슈퍼히어로 영화의 경우 191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시도되어 온 장르이다. 그리고 현대 슈퍼히어로 영화 프랜차이즈의 기틀을 다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오기까지, 히어로 영화는 계속해서 뽑아져 나왔다. 지금의 마블 팬들이 78년작 슈퍼맨 영화를 보고 감동을 얻긴 힘들 테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정의롭고 선량한 영웅이 평소엔 소심한 기자로 회사에서 근무하는 일반인으로 살아가고, 휴대전화 박스 안에서 변신을 하면 무적의 슈퍼 히어로가 되어 사람을 구한다는 이야기는 지금으로선 지루할 만큼 고리타분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것이 최초로 나왔을 때의 대중이 받아들였던 충격과 경험은 상상 이상의 것이였다. 그러나 이 슈퍼맨의 서사를 포함한 히어로 무비의 이야기들 조차도 전부 그리스 신화 서사를 기본 골짜로서 갖추고 있는 작품들이며, 그 안에서 변주만 할 뿐임에도 시대에 맞게 번안하고 고쳐서 나오기에 의미있는 것이다. 제우스의 아들딸이 신들에게 권능과 무기를 이어받아 영웅이 되었다는 오래 된 이야기에서 제우스와 신들의 유물이 더 공감하기 쉬운 유전자 조작이나 원자로, 우주인으로 바뀐 것 뿐이고 단순히 시민들을 구하는 영웅의 이야기가 모두에게 익숙해지니 그 익숙함에 다양한 물음을 던져 책임감 없는 영웅이나 악역에 가까운 영웅 같은 다양한 인간 군상이 나온 것 이다.

따라서 아무리 신파라 하더라도 그 시대상의 질문을 반영한다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전쟁이 일어난 시대에 부모와 생이별한 자식이 부모를 찾아 모진 고생을 하며 가족과 다시 재회하는 이야기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크게 공감을 살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시대가 지나, 평화가 너무나 익숙한 시대에 부모와의 불화로 가출하고 세상의 쓴 맛을 보며 온갖 고생을 한 자녀가 다시 용기내어 늙은 부모를 만났을 때 그제서야 부모님 품의 감사함을 느끼는 이야기는 대중의 공감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라는 것은 그렇게 비슷한 골짜를 가지고 있더라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던지는 물음이 달라지고, 대중들의 고민이나 삶이 복잡할수록, 작중 등장인물들 역시 그 고민과 삶에 충분히 공감할 여지가 있는 섬세한 이야기가 소비되는 것이기에 결과적으론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야기 방식은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둘 다 신파적인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누구나 다 한국말을 할 줄 안다고 해서 어린이용 한글 교보재가 없어지는 게 아니듯, 뻔한 이야기라 해도 새로운 세대들이나 대중매체를 많이 누리지 못하는 계층에게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음에도 신파극에 대해서는 유독 냉정한 느낌이다. 점점 질문 할 것들이 소진되어 가는 듯이 보이는 히어로물들에 대해서도, 마틴 스콜세지는 "영화라기보다는 테마파크와 유사하다"는 분석을 했는데, 그런 그도 테마파크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주제에 대해 질문할 것이 소진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유사성이 짙은 이야기들이 계속 반복되가며 안정적인 이득을 추구하고자 하는 행위는 회사 입장으로서 당연한 것일 뿐, 그것이 이야기의 골짜와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 자체를 망가트리거나 의미없게 만들어버리진 않는다는 얘기다. 이러한 이야기에서의 도구들은 언제 어떻게 쓰냐에 따라서 언제든 유효하다.

따라서 슬픔이라는 요소가 들어간 장면을 두고 그 자체로 무턱대고 신파라 매도하며, 작품을 망가트리는 요소라 규정해서는 안 된다. 맥락상, 내러티브상 별 지적할 점이 없는 훌륭한 작품들이나, 그 장면 자체는 뻔해서 신파라는 비판을 받긴 해도 전체적인 짜임새를 봤을 때 완성도가 높은 창작물까지 단지 "신파적인 색깔이 짙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것은 분명히 경계해야 한다.

신파라는 단어가 오용될 때의 문제는 주로 독자의 의견이 창작자에게 쉽게 전달되는 상황이 만들어질 때 생긴다. 물론 독자가 비록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특히 접근성이 높은 웹툰 웹소설에는 유독 지나치게 슬픈 장면, 고구마 장면,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죽음에 유독 대해 민감한 경향이 있다. 일부 극성 팬들은 신파를 핑계로 별점테러를 가하거나 악플러 짓을 하는 등 선 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행위는 결과적으로 상업적인 작품만 만들어 내도록 창작자들의 자유를 강제로 제한하는 일에 불과하다. 실제로 소위 '팔리는' 특정 장르 외의 작품들은 거의 씨가 마르다시피 변한 현 실정이 이러한 인식과 결코 무관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7. 기타


[1] 비슷한 사례로 엔카가 있다. 정치적인 선전, 선동을 "연설하듯이 노래한다"는 뜻으로 연가(演歌, 엔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다. 이후 프로파간다적 색채가 빠지고 대중음악이 되었다. [2] 다만 순수 창작은 아닌 번안극이었다. [3] 여담으로 이 공연에서 주인공 홍도의 남편 역을 맡은 배우가 다름아닌 심영이다. [4] 이는 비단 공연 문화뿐 아니라 대다수 서양 문물이 그렇다. 하물며 과자조차도 ' 양과자'라고 부르던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정반대로 전통 과자를 한과라고 부르는 형편이다. [5] 한국에는 역사적으로 일본의 가부키에 대응될 만한 실내 전통극은 없다. 그나마 '실내극'이라는 개념에 한해서는 판소리가 가까울 수 있는데, 이 역시 그 점 하나만 가지고 가부키와 같은 장르로 엮일 수 없을 정도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근세 조선에는 일본과 달리 실내 극장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많이 이용하지 않았다는 점 역시 조선 문화사와 일본 문화사의 큰 차이점으로 거론되는 점 중 하나이다. [6] 비슷한 사례로 일본 애니메이션 일본 영화, 일본 드라마가 자주 지적받는 과장된 연출이 '오글거림'을 불러일으키는 연출법도 이것과 궤를 같이 한다. 이 경우 신파극의 원조 국가인 만큼 그 영향도 만만치 않지만, 그 이전에 일본의 전통극인 가부키가 이런 연출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사실 근대 신파극 특유의 감정적으로 크게 자극할 수 있는 과장된 연출 문법 자체가 이 영향을 받았음을 무시할 수 없었기도 하다. [7] 외국이라고는 해도 주로 미국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CSI 미국 드라마가 이러한 이미지가 강하다. "한국 드라마는 의사가 나오면 수술 빼고 다 하지만, 미국 드라마에선 의사가 정말 수술을 한다"는 평이 이러한 인식을 나타낸다. 2012년 중앙일보 칼럼 한국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국가 중 하나인 일본은 오히려 한국보다도 더 감정이 과잉된 작품을 생산하는 국가이기에, 일본 작품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다. 다만 후술되겠지만 한국과 일본 외의 국가, 특히 미국에서도 이런 식의 감정 과잉을 유도하는 작품이 아예 없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8] 비슷한 예로 미국 영화 월드워 Z가 좀비물 매니아들에게는 평이 나빴지만 일반 관객들에게는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이 영화 역시 가족애가 드러나는 장면이 많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