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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3:42:31

수도기계화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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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부르면! 맹호는 간다!
<colbgcolor=#137f33><colcolor=#fff> 창설일 1949년 6월 20일(수도경비사령부)
1950년 7월 8일(수도사단)
1973년 3월 21일(수도기계화보병사단)
상징명칭 맹호(猛虎)부대
약칭 수기사
소속 대한민국 육군
상급부대 제7기동군단
경례구호 맹호
규모 사단
역할 공격 부대, 전시 진격, 적 종심 돌파
사단장 소장 김성구(육사 51기)
위치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현리

1. 개요2. 역사3. 예하부대4. 과거부대5. 출신 인물
5.1. 사단장5.2. 장교/부사관5.3. 병
6. 특징
6.1. 훈련6.2. (구)제20기계화보병사단과의 라이벌 관계6.3. 맹호 기수6.4. 명칭과 상징6.5. 과거의 악습
6.5.1. 2000년대 이후
6.6. 맹호회관6.7. 사단가
7. 사건 사고
7.1. 전쟁 범죄7.2. 염순덕 상사 피살사건7.3. 김희성 일병 자살 사건 (유가족 조의금 횡령사건)7.4. 조재윤 하사 사망사건
8. 기타
8.1. 외박구역
9. 미디어

[clearfix]

1. 개요

사단령
제1조(설치) ① 육군에 사단을 둔다. ② 사단은 관할구역의 작전·훈련 및 군 행정에 관한 사항을 관장한다.
대한민국 육군의 기계화보병사단. 한국 전쟁 발발 전에 창설한 부대로 메이커 사단 중 하나이다. 상징명칭은 맹호부대[1], 경례구호는 맹호이며, 사단 공식 구호는 조국이 부르면! 맹호는 간다! 이다.

약칭은 '수기사'로써 수방사, 정보사 같은 ' 사령부'의 약칭인 줄 아는 사람들이 꽤 있다. 특히나 수방사와 비슷하기 때문에 여기에 배속받은 신병들은 서울 간다고 좋아하기도 하는데, 아래에도 서술돼 있지만 이름과는 달리 서울에 있는 부대가 아니다. 경기도 동북부 가평군, 포천시 쪽이라 보면 된다. 차라리 30기갑여단이 서울에 더 가깝다. 수도군단과 비슷한 케이스. 그래도 둘 다 수도에 있으니 완전히 틀린 명칭은 아니다.[2]

서울과의 접점이라고는 전쟁기념관에 있는 창설지 기념석과 육군사관학교 내부에 있는 강재구 소령 동상 정도. 강재구 소령 동상은 육사에서도 꽤나 유명하며 수기사 1여단에서 가끔 간부 한 명을 보내 동상상태를 살피고 있다.

육군 전투서열 0순위 부대.[3] 타 사단과는 달리 유일하게 숫자가 아닌 부대 자체명칭을 사용하며, 국방전산시스템에도 수기사단이 1사단보다 앞서있다. 그러나 실제로 수기사는 8사단과 함께 49년 6월 20일에 창설된 부대로 부대역사는 1순위가 아니다. 매년 임관시즌이 되면, 전국에서 장교로 임관하는 육사,학군,3사생 들 중 최고의 엘리트만 차출해간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정예화에 초점을 두는 사단이다.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 역시 육군사관학교 출신 동기수 중 가장 엘리트를 선발해 가장 먼저 임명한다. 대부분 사단장을 이임하면 진급하는 코스를 밟는다.[4] 현임 최장식 사단장은 첫 학군 출신이다. 그러나 사단장에 포병, 기갑 출신이 많기 때문에 대장 진급자는 적다.[5]

수도기계화 보병사단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예하 여단의 예하 대대들 기준으로 전차대대가 가장 많다. 전차대대 5개, 기계화보병대대 4개, 포병대대 4개. 오히려 이름을 기계화보병사단에서 병과 중립적인 기동사단으로 바꾼 제8기동사단 제11기동사단은 예하 여단 예하 대대 기준으로 기계화보병대대가 가장 많다.

2. 역사

1949년 6월 20일에 (구)수도경비사령부로 창설되었는데, 당시에는 그 명칭처럼 서울 향토방위를 담당하던 경비부대였다. 초대 사령관은 의열단, 한국광복군 출신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차장을 역임한 권준이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한강 방어선 전투를 끝으로 서울이 함락되어 수도방위라는 의미가 사라지자 7월 5일에 해체된 (구)수도사단(현: 7사단)으로부터 '수도' 명칭과 1연대를 넘겨받아 7월 8일 1연대, 8연대, 18연대 근간의 새로운 수도사단(오늘날의 수기사)으로 재편되었다.

이 신생 수도사단 역시 박격포 정도가 중화기였을 정도로 매우 열악한 상태에서 진천 전투를 치르었으나, 김석원 준장의 활약으로 북한군 2사단을 7일간 묶어두었고, 청주 전투에서도 민가에서 빌린 곡괭이와 대검으로 진지공사를 해야 할 정도였으나 이 역시 부대 건재를 유지하며 속리산을 거쳐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한다. 그 후 안강-기계 전투를 치를 때 제7보병사단 재창설을 위해 8연대가 떠났고, 그 빈자리에 독립기갑연대가 예속되었다.

그리고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북진이 시작되자, 유엔군과 함께 38도선을 넘어 함경북도 청진까지 진격하였다. 정확히는 청진에서 조금 더 북쪽에 있는 부령군까지 갔다. 이는 한국전쟁 유엔군의 최대 북진선의 최북단이었다. 초산 압록강변에 도달했던 6사단의 전공에 밀려서 상대적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수도사단은 현재까지도 한반도 최북단까지 가본 부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수기사가 간 곳은 2024년 현재 부거역이라는 곳이다. 당시는 부령군이었으나 2024년 현재 청진시 청암구역으로 편제돼 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흥남에서 배를 타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와중에 18연대가 3사단 26연대와 배를 바꿔타 버렸는데, 철수의 난잡함 속에서 원대복귀를 위해 서로 목적지를 바꿀 수도 없어서 결국 연대를 맞교환해 18연대 대신 26연대가 예속되었다. 그 후 38선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고지전에 투입되기도 했으며, (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 등) 이따금 후방의 지리산 공비 토벌에도 투입되었다.

휴전 협정 이후 수도사단은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과 이동면에 산재해 있게 되며 1953년 9월 18일 기갑연대 3대대 11중대장 안도현 대위와 일행 장교가 2개 중대를 이끌고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으로 이동했는데, 이후 이 중대들은 훗날 제27보병사단 모체가 되었다.

참고로 전쟁이 끝나고 서울지역 향토방위 위수부대는 제6군관구사령부(현 수도군단)와 예하 30사단(현 30기갑여단), 33사단(현 17사단)이 담당하게 되었고, 지금의 수방사는 1961년 용산구 후암동에서 재창설된 수도경비사령부의 후신.

베트남 전쟁 때 파병된 부대 중 하나이며 현재도 최정예 주력 부대로 수도권 방위 및 반격 작전의 중추를 맡고 있다.

베트남전에서 철수한 후, 사단은 사실상 해체된 상태였으나(베트남전 파병시 여기저기서 파견을 받아 병력이 운용되었기에) 미7사단 철수 때 장비를 인수받아 만들어진 최초의 기계화사단이었던 32사단으로부터 각종 장비를 인도받아 73년 3월 20일 수도기계화보병사단으로 재창설 되었고 32사단은 향토사단으로 되돌아갔다. 사실 맹호부대는 여러 사단에서 파견받은 병력으로 구성되었었다. 그래서 베트남철수 후 모두 원대복귀 또는 소수인원이 남게 되었기에 맹호부대(수도사단)은 해체되었고 32사단이 간판만 수도기계화보병사단으로 바꿔달았다. 그러나 군부대는 이름이 가장 중요하기에 현재 32사단이 아니라 수도기계화보병사단으로 남게 되었다. 참고로 충남지역 향토향토사단이던 (구)51사단이 간판을 32사단으로 바꾸었다. (즉, 가평 32사단->수기사로 명칭변경, 충남 (구)51사단->32사단으로 명칭변경된 것이다.)

현재는 제20기계화보병사단(2019년 해체됨)과 함께 제7군단의 예하부대로 편성되어 있으며, 현재 경기도 일대에 주둔하고 있다. 1980년대 이전에는 제5군단의 예하부대로 편성되어 있던 적이 있으며 지금처럼 제7기동군단로 편성된 것은 1983년 이후이다. 그 당시 막 기계화보병사단이 된 제20기계화보병사단과 함께 제7군단 예하로 예속변경이 되었다.

2021년 들어 명칭면에서 유일한 기계화보병사단이 되었다.(나머지 기보사는 기동사단으로 변경.) 기동사단 명칭을 쓰지 않는 것이 후일 K2 전차 추가생산 후 기갑사단으로 개편하기 위해서라는 소문도 있다.

월남전 당시 작전 기록은 수도기계화보병사단/월남전 참전기록 참조.

2018년까지 1기계화보병여단, 26기계화보병여단, 포병여단, 1기갑기계화보병여단 등 4개 여단을 예하에 두고 있었으나, 2019년 1기갑기계화보병여단을 8사단의 16기계화보병여단과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개편되었다.

개편이전 사단은 모듈화 개편이전 미군 기계화보병사단의 표준인 전차 4 / 기계화보병 5의 편제였지만, 16여단을 배속받으면서 전차 5 / 기계화보병 4의 비율을 가지게 되어 기계화보병사단이라는 명칭과 달리 육군 유일 기갑사단의 편제를 갖고 있다.[6]

3. 예하부대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예하부대
제1기계화보병여단 제16기계화보병여단 제26기계화보병여단
포병여단
※ 군 공통의 직할부대( 본부근무대, 의무근무대 등)는 소속 부대 문단 참고

3.1. 사단 직할대

3.2. 제1기계화보병여단 비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1기계화보병여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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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3.3. 제16기계화보병여단 번개[8]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16기계화보병여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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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제26기계화보병여단 혜산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26기계화보병여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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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포병여단 상승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수도기계화보병사단 포병여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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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과거부대

4.1.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 번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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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5. 출신 인물

5.1. 사단장

볼드체는 대장 진급이 된 사단장.
||<-6><bgcolor=#137f33> 역대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 ||
<rowcolor=#fff> 대수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초대 권준 예) 소장[11] 황포 4기 제3군관구사령부 사령관
8대 송요찬 예) 중장 군영 1기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외무부장관
17대 채명신 예) 중장 육사 5기 제2야전군사령관
18대 류병현 예) 대장 육사 7기 합동참모의장
19대 정순민 예) 소장 육사 4기
20대 윤필용 예) 중장 육사 8기 수도방위사령관
21대 김학원 예) 중장 육사 18기
22대 이희성 예) 대장 육사 8기
23대 정득만 예) 소장 육사 8기
29대 손길남 예) 소장 육종 29기 제2야전군 부사령관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발기인
33대 조남풍 예) 대장 육사 18기 제1야전군사령관 재향군인회장
35대 이유수[12] [13] 예) 중장 육사 20기 제7기동군단장
36대 정정택 예) 소장 육사 23기 제29보병연대
37대 김희상 예) 중장 육사 24기 수도군단장
41대 박경서[14] 예) 소장 육사 29기 前 국방부 조달본부장
45대 엄기학 예) 대장 육사 37기 제3야전군사령관
46대 권오한 예) 소장 육사 39기 사단장
47대 이석구 예) 중장 육사 41기 국방대학교 총장, 국군기무사령관
48대 김선호 예) 중장 육사 43기 수도방위사령관, 現 국방부차관
49대 유기종 예) 소장 육사 45기 제1군단 부군단장
50대 양태봉 예) 소장 육사 47기 육군포병학교
51대 최장식 소장 학군 30기 육군훈련소장
52대 김성구 소장 육사 51기 사단장

5.2. 장교/부사관

5.3.

6. 특징

6.1. 훈련

일반 소속부대 역시 훈련의 강도가 높고 빈도도 매우 잦은 편이어서 맹호부대에 입대한다면 시간이 정말 빨리 갈 것이다. 한 전역자 왈, 장갑차 좀 탔다 내렸다 하다보면 전역한다. 정말 훈련빈도는 지나칠 정도로 높아서 한 달에 3회, 심하면 4회 하는 경우도 있다. 준비태세만 하루에 4번이다.[18]

한때는 국군에서 제일 먼저 최신장비를 배치받았지만 지금은 제20기계화보병사단에 밀리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덕에 수기사에서는 20사단을 테스트베드 부대이기 때문에 장비들이 먼저 들어오는 거지 수기사랑 붙으면 양기사는 상대도 안 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정확히는 K1전차는 수기사가 그 이후 개량형인 K1A1과 K21장갑차는 20사단이 먼저 지급을 받았다. 이제는 K2흑표전차도 20사단에 들어온다. 하지만 K21은 수기사에도 배치가 되고 있고 어느새 전량 배치가 완료되었다. 그리고 K2흑표전차의 양산이 늦어져 새로 개발한 K1A2같은 경우에는 2014년 수기사 예하 전차대대들에 배치되어 있으며 2015년까지 점진적으로 확장할 예정이다. 더불어 최신장비 들어온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닌 것이 이전에 쓰던 주차호를 전부 없애고 새로 만들어야 하고 그에 따른 교리 및 교범 사용법 등이 바뀌기 때문에 그에 따라 다시 교육훈련을 실시해야 하므로 그만큼 간부나 병사나 죽어나는상황이 일어난다. 따라서 이런걸 종합적으로 따져볼 때 실상은 붙으면 그게 그거다. 20사단이 화력 최강부대라고는 하지만 최신 장비가 언제나 1순위로 배급되는 같은 7군단인 이상 수기사와는 큰 차이가 없다.

해병대의 구호인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의 원조가 "한번 맹호는 영원한 맹호"라는 말이 있는데 한국해병대의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은 미해병대의 'Once Marine, Always Marine'에서 빌려온 구호이므로, 당연히 틀린 말이다. 이는 월남전에서 접촉한 맹호부대원들이 임의로 자신들의 구호로 차용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일반 기보 및 전차 대대기준으로 큰 이벤트라면 전투사격훈련, 공중지상 합동훈련, 여단급 전술훈련, 군단급 FTX, 호국훈련 호국훈련을 단골로 뛰는 부대. 격년으로 뛴다고 한다.[19] 2012년 20사단, 수기사의 호국훈련은 역대 최악의 박터지는 호국 훈련이었다고 혹자들은 말한다. 수기사 포병대대가 20사단 포병대대와 기갑여단을 몰살시키기도 하고 20사단 포병대대가 수기사 포병여단을 쓸어버리기도 했다! 심지어 양기사를 잡으려고 기동하라는 전차는 기동을 안하고 산을 뛰어 다니면서 잡을 정도였으니 운 좋으면 호국훈련을 안 뛸 수도 있다. 2011년 KCTC 훈련 당시 여단본부 인원은 그해 호국훈련 파견을 나갔다가, 지원이 끝난 뒤 바로 KCTC 훈련에 투입되었다고 한다.[20]

그리고 전투장비지휘검열이 있다. 소대원 전원이 탑승 장비에 달려들어 의자 뜯고 포 뜯고 갈고 닦아 먼지하나 없도록 만드는 그 상큼한 맛이 일품. 또한 전투사격 훈련의 경우 대규모로 진행되면 정말로 스펙타클하다. 포가 펑펑 터지고 지원온 코브라가 발칸을 갈겨대는데 정말 TV에 나오는 기갑부대 훈련 같다. 문제는 먼지와 진흙탕 속에서 굴러다니는 그 기갑부대가 바로 당신이다. 공지합동 훈련은 주로 포천 일동에 있는 훈련장에서 진행하는데, 계획표대로 훈련이 진행되지 않아서 전차포와 공격헬기 사격이 다 끝나서 다들 물러났음에도 뒤늦게 전폭기가 날아와서 폭탄을 떨구는 장면을 목격하는 경우도 있다. 산 정상 부근에 있는 지휘소에서 훈련장에 있는 병력들을 무선으로 지휘하기도 하는데,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병력들을 보면서 육두문자를 날려대는 대대장이나 중대장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텐트치고 지내는 호국훈련과는 달리 다행히도 승진훈련장에는 제대로 된 막사가 존재해서 여건은 나은 편이다.[21]

하지만 사실상 공지합동훈련이나 군단급 FTX같은 대형 훈련은 모든 대대가 참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구경도 못하고 전역할 수 있다. 일반적인 훈련으로는 소,중,대대 및 여단급 전술훈련, 유격훈련, 혹한기훈련 정도가 있다. 전설적인 진급으로 유명한 모 장군이 사단장으로 역임했던 당시에 군단급 FTX에 7군단 소속으로 참가했던 일도 회자된다. 군단급 FTX는 군단들끼리 편제를 비슷하게 맞춘 뒤 공격/방어를 연습해보는 실기동훈련으로, 각 군단 지휘소도 야전에 실제로 설치되며 지휘관을 비롯한 사령부도 야전에서 주야지속해서 작전을 지휘한다. 공격작전 당시 수기사가 주공을 맡았는데, 군단장이 취침하러 간 사이에 흥이 올랐던 수기사단장이 돌파를 시도해서 전선에 돌출부가 형성되었다. 사단장을 말릴 짬밥이 없던 군단사령부는 숨만 죽이고 있었는데 새벽에 군단장이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라이브로 쌍욕을 시전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외에도 2011년 당시 막 부임하지 얼마되지 않은 권오한 사단장은 훈련장에서 포탄낙하 상황에서 병사들이 뛰어다니는 게 마음에 안 들자 각개전투 교범에서나 볼 법한 각종 포복을 사용하며 직접 시범을 보여줬는데, 이 모습을 본 각 참모들과 여단장, 대대장 및 많은 간부들이 시범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한 참모가 갑자기 쓰러지자 사단장이 "이게 바로 실제 같은 응급처치 상황이지" 라면서 참모를 들쳐업고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고 한다. 대대 훈련 중 화생방 상황 재현한다고 대대장이 직접 CS캡슐 사방에 터트리는 건 화제 축에도 못낄 정도. 오죽하면 5군단 예하배치되면 똥 밟았다고 하고 수기사로 오면 똥통에 빠졌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 시기에 신병 포병 교육대대에서 교육을 받던 몇몇 신병들의 오줌색은 붉은색이었다고 하는 전설도 내려온다.[22]

6.2. (구)제20기계화보병사단과의 라이벌 관계

(구)제20기계화보병사단과는 경쟁심리가 강한 편이었다. 합동훈련이라도 하는 날엔 기를 쓰고 이기려 들며, 정작 그쪽 군인들이 싫어하는 '"양기사'"라는 표현을 거리낌없이 사용했다.[23] 수기사 병사들이 20사를 양기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가 수기사니까 그쪽도 양기사가 낫지 않나 라는 생각인데, 자기들 기준에 맞춰서 남을 부르는데 당사자가 싫어하는 게 당연하다. 마치 연고전 고연전처럼. 물론 이런 성향은 20사단도 마찬가지로 수기사에서 싫어하는 사단이라느니 사단이라느니 X사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쩌다 파견 때문에 두 부대원이 모이기라도 하면 서로를 '살쾡이치토스', '자일리톨'이라고 까기도 한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서로 간의 라이벌의식이 심하게 존재하여 파견나간 수기사 병사가 훈련 중 버린 입맛을 돋우기 위해 PX에 가면 수기사 소속이라면 물건을 안 파는 경우도 있었다.

라이벌이 된 이유는 여러 가지라고 알고 있지만 주로 많이 나돌고 있는 설은 12.12사태. 당시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은 육군 유일의 기계화보병사단이었는데 12.12사태 당시 수기사는 26사단과 함께 충정부대(수도권의 시위, 쿠테타 진압부대)로 유사시 수도경비사령관이 배속받을 수 있었기에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 었던 장태완이 가장 먼저 찾았던 부대였다. 반면 쿠데타 주역인 박준병이 사단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20사단은 자연스레 반란에 가담했다. 수기사는 작전처에서 포탄 적재계획/수송계획 등 출동계획까지 세웠으나 최종적으로 국방부장관 노재현의 출동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출동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단 보안부대장 최우천 중령의 설득으로 출동계획이 폐기된 후 사단장 손길남은 취침에 들었다. 출동했어도 육사출신 수기사 포병단장 김도수 대령이 이미 포차로 경춘국도 다리목에 바리케이드를 새워 뒀기에 같은 사단 병력들끼리 싸울 판이었다.[24]

보면 알겠지만 이때 수기사에 쿠데타에 동조한 하나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수기사가 보여준 대응도 차량 동원조차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하나회의 회유가 아닌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의 명령으로 복귀한 9공수여단과 비교하면 미적지근하기 그지 없었지만 어쨌든 충정부대였기에 군사정권이 무너진 후 나름의 명예가 되었다.

사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단순히 보병사단이었던 20사단이 1981년에 차량화보병사단으로 승격하고, 다시 1983년 기계화보병사단으로 개편한 다음 수기사를 5군단에서 빼내 20사단과 묶어 제7기동군단이란 공세 지향적 부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같은 기계화사단에, 같은 군단에 묶여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최신장비들을 지급받으니 라이벌 의식이 안생길 수가 없었다.

수기사는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부대, 20사단은 현존 최강화력 부대[25]라는 걸 내세운다. 2006년 그 이전 20사단 전역자의 증언을 따르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서로 간의 라이벌의식은 더 심했다. 물론 지금이야 시대가 바뀌었으니 어느 정도 희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요 장비를 운용하는 장갑차 조종수와 전차 조종수들이 육군 기계화학교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고 오는데 항상 수기사 vs 양기사 라고 교육을 많이 하는 바람에 상관없는 다른 부대 기갑조종수[26]들까지도 수기사 vs 양기사를 알고 있어서 라이벌 매치는 계속된다.

원래 전통적인 라이벌 관계는 6.25 전쟁 당시 전공으로 유명한 제3보병사단이었으나[27] 지금은 그보다는 20사단과의 라이벌 매치가 더욱 더 부각 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 간부들이나 이런 거에 진지하게 반응하지, 예나 지금이나 병사들은 크게 관심이 없다. 그저 뺑이치기 바쁠 뿐. 사실상 주변에서 계속 얘기하니 괜히 그렇게 된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2005~2007년 수기사 1기갑기보여단 출신 경험으로 말하자면 양기사 라이벌 그런 건 복무기간 내내 없었다.(다만 같은 사단이라도 여단 대대마다 성향이 다를 수는 있긴 하다) 1998~2000 년 같은 여단 출신 경험으로는 매우~~~심했다...단 전차대대 와 기보대대 간의 성향이 다르니...18전차의 경우 32전차 와의 라이벌 의식이 매우 강했다...

결국 국방개혁에 의해 20사단이 2019년 해체되어 제11기계화보병사단으로 통합되기로 결정되었고 2019년 11월 30일에 제20기계화보병사단이 폐지되어 이 라이벌 관계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6.3. 맹호 기수

(1973년 3월 23일 ~2016년 09월 07일) (맹호1기 ~ 762기)
수도사단이 베트남 전쟁 종료 후 기계화 부대로 개편되면서 사단 신병교육대(수도기계화보병사단 신병교육대(맹호신병교육대))가 신설되면서 이 신병교육대의 출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1기에서 762기까지 교육이 이루어 졌다. 수도사단이 기계화부대로 바꾸고 난 뒤 신병교육을 받은 기수를 1기로 친다고 한다. 1973년 3월 23일이 1기 기수일이다. 그전에 복무한 맹호부대원들은 군번으로 하고 베트남 파병시절 군 복무를 한 전역자들은 월남파병 군번이라고 한다.

가끔 운전병들 중에서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신병교육대에서 훈련 받고 제3야전수송교육단[28] 교육을 받은 뒤에 수도기계화보병사단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는 흔치 않은 맹호 운전병이라고 한다. 주로 소총수나 박격포, 기타 사단급 부대에서 자체 내에서 심화 주특기 훈련이 가능한 군번이 맹호기수로 수도기계화보병사단에 간다.[29] 가뭄에 콩나듯 의무병으로 선발이 되기는 하는데 학과가 의무관련쪽이면 겪을 수 있었다. 이 경우 특기교육을 수료하지 않았음으로[30]주사와 같은 직접업무를 하지는않고 의무 행정, 약제 쪽의 일을 본다. 물론 다른 부대를 자대로 배치 받은 사람은 맹호기수가 의미 없지만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신병교육대를 수료하면 대부분이 수도기계화보병사단으로 배정되었다는 것이 함정...[31]

맹호부대 전역자 모임인 맹호전우회에서는 맹호기수도 쓰기는 하지만 주로 군번으로 구분을 한다고 한다. 만약에 X여단 1982년도 군번이면 X여단 82 이런식으로...

소총수에서도 다른 사단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받고 온 병사들도 있어서[32] 맹호기수는 점차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부사관들 중에서 병장까지 군 생활 마치고 수도기계화보병사단에서 부사관 하는 선임 부사관들 중에는 은근히 맹호기수를 따지는 경향이 남아있으며, 아직까지 맹호 신병교육대 출신 맹호 기수들 간에 정은 있는 편이다. 단 맹호 기수라고 해서 해병대 기수처럼 빡센 건 아니고 선배 기수면 그냥 예의차 선배님이라고 불러주는 식.

유명인들 중에서는 축구 선수 박지성 선수가 병역 특례를 받은 뒤 기초군사훈련 4주를 수도기계화보병사단에서 받았다. 최근에 SG워너비의 가수 이석훈이 맹호 708기로서 훈련을 받았지만 연예 병사로 차출되어 맹호부대와는 인연이 끊어졌다.[33] 또한 같은 연예병사였던 영화 국가대표에 출연한 탤런트 최재환(당시 계급 병장)이 연예병사 폐지 후 수도기계화보병사단으로 자대배치가 되어 군복무를 하였으며, 2013년 11월 12일날 수도기계화보병사단에서 현역제대를 하고 이후 MBC 수목 미니시리즈 미스코리아에 출연 하는 등 배우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사단 신병교육대인 (구)맹호신병교육대가 입대 병력 감축으로 인한 해체를 함으로써 이제 사단 병력은 충청남도 논산 육군훈련소나 같은 군단 내 다른 사단 신병교육대에서 오는 인원들로 충원을 한다고 한다. 마지막 기수는 2016년 09월 07일에 수료를 한 762기 군번이다. 사단 자체에서도 역사와 전통이 있는 부대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맹호 기수를 남기려고 했으나 전방 보충대인 (구)제306보충대대가 2014년 12월에 (구)제102보충대대가 2016년 11월에 해체되고 사단 신병교육대도 해체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가 없다고 한다. [34]

(구)신병교육대가 있던 자리에는 군사경찰대, 군수지원대, 화생방대대 등이 들어 섰다.

6.4. 명칭과 상징

일반적인 사단과는 달리 번호로 매기는 형식이 아닌 저런 식의 이름을 채용하는지라 몇 사단인지 궁금해하는 훈련병들도 존재하는데 숫자로 분류할 시에는 대체적으로 0사단이나 10사단이라고 부른다. 애초에 다른 사단과 달리 숫자로 명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라도 말하지 않으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제3보병사단하고 많이 엮이는데 그 이유로는 원산 최초 입성문제가 있다. 이 이유는 원산 전투 당시 원산에 함께 투입된 제3보병사단과의 전투지경선이 애매하게 설정된 탓에 서로 이를 자주 침범했고, 급기야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과 3사단 26연대장 이치엽 대령이 여왕산 산록에서 옥신각신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이 문제는 서로가 원산에 먼저 입성했다고 주장하는 수준으로도 번졌고, 참다못한 당시 1군단장이었던 김백일 장군이 당시 사단장이었던 이종찬 장군과 송요찬 장군을 불러 공동입성으로 합의를 시켰다고 한다.

상징은 울부짖는 호랑이. 맹호 마크의 의미는 외곽의 방패는 국가방위, 포효하는 호랑이는 용맹한 비호부대, 번득이는 눈은 번개부대, 녹색바탕은 희망을 상징하며 혜산진 부대를 나타낸다. 적색 맹호 혓바닥은 수기사 포병여단, 백색둘레는 단결을 의미한다. 군복의 부대 마크는 보안 문제로 한동안 폐지되었다가 1982년 여름에 다시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병사들이 휴가를 나갈 때 마장동 군장품 가게에서 사제를 부착하고는 했다. 그런데 새로 지급된 마크에 비하면 사제는 그야말로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부대 마크가 새로 디자인되었기 때문으로, 인터넷을 뒤지면 훨씬 볼품없는 옛 마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타 사단과 달리 맹호마크는 워낙 복잡해서 그랬던 것.

현재는 위장용 투컬러 패턴의 마크로 교체되어 저 원색의 부대마크는 일반 전투복에서는 보기 힘들어졌다. 다른 부대도 마찬가지이지만 전차 전면장갑 등에 그려넣었던 부대 마크도 전부 지워진 상태. 공식적으로 원색 마크를 사용할 수 있는 복장은 근무복이나 정복 아니면 예복. 물론 사단 소속 병사는 군악대가 아니라면 평생 입어볼 일 없는 옷들이다. 전역 때 군장점에서 원색마크의 오버로크를 쳐서 나갈 수는 있다만 디지털 전투복에 이 약장을 달면 너무 눈에 띈다는 게 흠. 오히려 위장색 부대패치가 색상 대비 때문에 더 멋지다는 장병들도 많았다.

한때 저 마크의 호랑이 눈과 눈싸움을 시키는 가혹행위도 있었다. 그 외에도 후임의 군복 맹호마크를 손가락으로 누르면 이등병은 야옹! 상병부터 어흥! 하게 하는 가혹행위나 여단 탱크 비표를 누르면 각 여단 상징을 이야기하게 하는 가혹행위도 있었다. 응용해서 이름 오버로크를 누르면 관등성명을 대기도 했다. 근데 가혹행위가 아니더라도 점호 중 맞은편 관물대에 걸려있는 맹호 마크와 눈싸움을 하라는 식으로 시선처리 방법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 부대의 짬타이거에게 이등병은 경례를 때려야 하는 사단의 이름에서 유례한 가혹행위도 사단 전반에 걸쳐 있었다.[35]

6.5. 과거의 악습

장비를 다루다 보니 과거에는 악습이 상당했다. 기계화보병대에 배속된 장갑병들은 수가 훨씬 많은 보병과 늘 대립하는 상태라 더욱 그랬다. "장갑차 앞에서 (선임을) 보면 맹호, 뒤에서 마주치면 또 맹호." 이런 식으로 가르쳤다. 또한 장갑병(정원은 조종수+부조종수)34명에 정비병까지 포함한 이 병력은 모두 기갑을 전공한 하사관인 정비반장이 통괄하지만 반장 자신도 이리저리 뛰느라 바쁜 까닭에 주로 병사들끼리 통제해야 했고, 그만큼 위계질서는 엄청 강했다. 아침에 중대 주차장에 내려가 각자의 차량을 점검하다가 중대 선임이 '집합'을 걸면 그때부터 주차장은 맹꽁이 밭으로 돌변한다. 각 차량호에서 뛰어온 병사들이 연달아 "맹!" "맹!"을 외쳤기 때문

같은 시기의 다른 육군부대에 비해 유별날 정도로 굉장히 구타가혹행위가 심해서 한때 '폭력의 파라다이스'라는 불미스런 별명이 붙었던 적도 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따귀나 아구창 한 대 날리는 수준이 아니라 급소가 터지고 입안이 찢어져서 봉합수술을 할 정도의 잔혹한 구타가 2001년까지도 그치지 않았다. 웃기게도 전입한 지 100일이 안 된 신병은 손대지 않는다는 룰이 있긴 했는데 아무도 안 지켰다. 간부들도 암암리에 구타, 가혹행위를 방조[36]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한때 전군 통틀어 사고율 1위를 찍은 적도 있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자대도 아닌 자체 신병교육대 내에서 조교들이 훈련병을 맨손으로 구타하고 조인트를 까는 일들이 실제로 있었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이, 육군훈련소나 다른 전방 신병교육대에서는 폭력과 구타가 거의 사라진 시점이었는데 맹호부대에만 폭력이 남아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부대는 가혹행위가 사라져가고 있는데도 맹호부대 만큼은 왜 그렇게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한 폭력[37]이 성행했는지 원인을 찾아보면, 1차적인 원인은 맹호부대 일선 간부들에게 있다. 선임병에게 암암리에 폭력을 방조하면서 병사를 쉽게 통제하려고 들었기 때문에 폭력이 사라질 수가 없었던 것.

상급부대에서 아무리 가혹행위 퇴출 정신교육, 강의를 해봤자 간부들이 선임병들을 데리고 나가서 술 먹이면서 "니들 요즘 애들 관리 안 하냐, 눈치껏 못하냐"라고 은근슬쩍 압박을 주는 식이었다. 심지어 1999년까지만 해도 상처까지 보여주면서 폭행 당한 사실을 행정보급관 같은 간부에게 고발하면 상부에 보고조차 안 하고 오히려 폭행을 가한 선임병에게 고발이 들어왔고 저 놈은 맞으면 긁는 놈 같으니 잘 감시하라고 알려줄 정도로 막장이었다.사실상 군대가 아니라 군복을 입은 폭력조직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2001년부터는 사고사례 발생율이 전군 통틀어서도 너무 높다며 사단에서 게거품을 물며 압박을 가하자 간부들이 고발을 무시하는 행위만큼은 안 하게 됐다.

1998년 ~ 2000년 과도기에는 간부들이 통제를 위해 병사들의 가혹행위를 방조하는 수준을 넘어서 자기들끼리 BOQ에서 엄청나게 폭행을 해댔다. 오죽했으면 이 시기에 18전차대대에서 간부 간의 폭행으로 2명의 부사관(당시에는 하사관)이 불명예 전역을 했다. 더군다나 오후 일과집합 시간에 사열대 앞에서 초임 장교와 병장이 주먹질까지 했으니. 2000년에는 60포병대대와 61포병대대에서 1달 간격으로 구타 사망사고가 발생했는데, 하나는 선임이 후임을 때려죽이고 다른 하나는 후임이 선임을 때려죽였다. 참 명예와 전통에 빛난다는 부대에서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이 시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병들과 부사관들이 학력도 높아지고 생각도 바뀌기 시작하면서 흔히 말하는 본전 생각 하지 말고 이런 개같은 상황 우리 대에서 끝내자고 노력하는 간부들과 선임병들도 함께 존재했다. 여러모로 혼돈의 카오스 시대.
기갑수색대대[38] 1990년대 후반 입대자 기준으로 보면 1999년도에는 정말 무시무시 했었다. 이른바 일병 선임이 이병 일병을 관리하고 선임 상병이 그 이하를 관리하고 상병 말호봉되면 손 뗀 상병이라 해서 최선임 허락하에 물주전자 가득 마시는 행사(?)를 하고 모든 후임 관리 및 청소에서 말 그대로 손을 뗀다. 병장들은 다놀고. 구타와 암기강요는 일상이었고 밤에 넌다고해서 당직병장의 널어 한마디에 선임 상병 밑으로 깍지끼고 구 내무반 나무관물대 꼭대기에 발을 올려야했다. 심지어는 선임하사들이 대가리박아를 시키던 시절. 그러나 2000년도 들어서 대대적인 소원수리와 개혁으로 병사들 간에 일병 선임이니 선임 상병이니 하는 게 싹 사라지고 병장들도 강제로 내무실 담당구역을 배정받고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새로온 신임하사를 병장들이 줘패거나 그럴 수는 없었다. 물론 경례 안 하고 개무시하거나 하긴 했지만(물론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새로 온 하사를 병장들이 때렸던 건 1990년대 초반이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부대에 부사관들도 많고 파워가 워낙 셌던지라 말그대로 중사만 되어도 병사들은 꾸벅 엎드려야 했다.

'폭력의 파라다이스'라고 불리던 시절에 수도기계화보병사단에서 군복무를 했던 사람들의 쓰라린 경험담을 군부심으로 치부하기도 하나 결코 당사자들은 자랑하거나, 혹은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으로 말하는 게 아니다. 그냥 끌려가도 억울한 군생활인데 그걸 또 맞아가면서 했다는 억울한 마음에서 토로하는 것뿐이다. 오죽하면 똑같은 시기에 다른 부대에서 군생활한 친구들한테 그 당시 난 그렇게 맞으면서 짬밥 먹었다고 토로해봤자 그때 그렇게 두들겨 패는 데가 어딨냐라는 식으로 잘 안 믿어주거나 군부심 취급당한다.

6.5.1. 2000년대 이후

다만 2003년경부터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인권위의 감시활동이 활발해지고 군 내부에 각종 사건들이 터지면서 군 인권문제가 크게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력을 방조하는 것으로 병사들을 통제하던 간부들이 더이상 자신들의 방식이 통하지 않는 분위기가 굳어지자 희망전역을 시작하면서 맹호부대에서 사라진 원인도 있다. 쓰레기 새끼들 자칫하면 본인들에게도 불똥이 튈까싶어서 전역을 택한 것이다.

그렇지만 완전히 뿌리뽑지는 못했고 2010년대까지도 몇몇 부대에 병영 내 구타가 잔재했다고 한다. 하지만 병영문화 개선의 노력으로 많이 사라졌으며 결정적으로 2011~2012년경에 재임했던 사단장의 역할이 컸다. 당시 구타를 뿌리뽑겠다며 일종의 시범케이스로 폭행을 했던 선임병을 바로 구속시켜 육군교도소로 보냈기 때문이다. 구속시킨 게 뭔 대수냐 하겠지만 의무복무자는 어지간해선 군 내부의 자체징계로 끝내는 경우가 절대다수이다. 구속을 시켰다는 의미는 정말로 교도소 생활을 시키겠다는 의지가 표명된 것이다. 일단 폭행자체가 군 형벌에서도 처벌규정이 나와 있기도하고 국방부 등지에서 명령을 통해 구타를 수시로 금지했기 때문에 명령불복종으로도 처벌이 가능하다. 즉 재판에만 넘기면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이 차고 넘치는 셈....

참고로 이 당시까지만 해도 군 내부의 폭행은 쌍방과실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폭행당해서 마음의 편지를 작성했더니 폭행 한 사람과 당한 사람 모두 사이좋게(?) 영창을 갔다는 얘기가 항상 회자되기도 했다. 하지만 폭행을 저지른 사람만을 거의 일방적으로 처벌한 저 조치에 대해 당시 복무했던 수기사 장병들이 굉장히 당황해 했다는 후문이다.

일부는 사단장이 너무 오버를 떤다면서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다. 분명 그 후임병도 잘못한 게 있었는데 선임병에게만 너무 가혹한 처벌을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었다. 폭행했던 선임병은 결국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겁주기 용이 아닌 진짜로 정식 기소 후 처벌은 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초범이라면 집행유예 가능성이 높긴하나 어쨋든 전과기록은 남는다. 일정기간이 지나면 전과기록이 경찰 내부 열람용 문서에만 남긴 하지만 인생에 적지 않은 오점을 남긴 건 분명한 사실이다.[39]

물론 그 이후로는 무조건 교도소에 보내지는 않고 있으며 사건 경중을 따지긴 하지만 구타에 가담한자는 당시 최소 15일 영창, 다른 부대 전출 처분을 내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현재도 가담자는 최소 군기교육대 입소 이후 다른 부대 전출처분을 내리는 중이다. 참고로 이런 방침은 비단 수기사뿐 아니라 대부분의 육군부대에서 시행중이며 폭력사건과 관련하여 거의 표준적인 조치가 되었다.

여튼 이런 노력의 결과 '폭력의 파라다이스'라는 별명은 잊혀진 별명이 되었다. 2013년경부터는 아예 선임병들 사이에서도 후임이 잘못하는 게 있다면 괜히 가해자가 되지 말고 마음의 편지나 면담 등 공식절차로 해결하자는 분위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40] 2016년 기준으로는 병사 간의 상호 경례가 금지되기에 이르렀다가 2021년 기준 다시 병 상호간의 경례가 부활하였다. 경례를 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부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병사들 입장에서도 그냥 경례로 인사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6.6. 맹호회관

맹호회관
猛虎會館
Ferocious Tiger Hall
위치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현리 413-1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6.7. 사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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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사 사단가

1절
조국의 운명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백전백승에 강철 같은 신념으로
안강에서 함흥에서 길주 청진 혜산진까지
피흘려 싸워온 빛나는 수기사단

[후렴]
비호같은 호 부대[41] 번개의 기갑부대[42]
삼팔선을 돌파한 이름 높은 혜산진 부대[43]
북진의 최선봉 상승포병부대[44]
조국통일 위하여 싸우는 맹호부대

2절
내 겨례 위하여 그 무엇을 아낄소냐
험악한 설악산 가리봉 향로봉에서
화랑의 기백으로 원수들을 무찔러치고
서울을 지키는 철옹성 수기사단

[후렴]

3절
자유의 부름받아 이백만 리 월남땅에
힘차게 진군한 불퇴전의 맹호용사
두코에서 안케에서 정글 속에 실화심고
온세계 용맹 떨친 무적의 수기사단

[후렴]

4절
천지를 진동하는 철갑의 위력으로
맹호는 달린다 새 역사의 선봉에서
민족웅비 염원다져 백두산 압록강까지
조국을 수호하는 천하제일 수기사단

[후렴]

파일:수도기계화보병사단 부대마크.svg
현재 쓰이는 사단가는 처음에는 2절까지였으나, 1983(실제로는 2000년 넘어서)년쯤 사병들에게 3~4절 노랫말을 공모하여 추가된 것이다. 1~2절이 6.25 전쟁, 3절이 베트남 전쟁, 그리고 마지막 4절이 오늘날의 수기사단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후렴도 달라졌는데, 당시에는 상승포병부대(포병여단)가 들어 있지 않고 대신 "청사에 찬란히 전공을 세우며"로 되어 있었다.[45] 3-3-3-3조라서 바뀐 가사에 맞추면 다소 부자연스럽다. 또한 곡(멜로디)도 '혜산진부대' 연에서 정점에 이르렀다가 그 뒤로는 잔잔해지는데 다른 부대가 더 들어갔기 때문에 뭔가 어색함을 느끼게 된다. 후렴 마지막은 "통일독립 위하여 싸우는 수도사단"이었다.

6.7.1. 맹호들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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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건 사고

7.1. 전쟁 범죄

7.2. 염순덕 상사 피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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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김희성 일병 자살 사건 (유가족 조의금 횡령사건)

육군수도기계화보병사단 26여단 본부중대 소속 김희성 일병(당시 20살)은 2011년 12월4일 부대 화장실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다. 김 일병은 군 입대 직후 복무 부적응(자살 징후) 등으로 판정받아 관심사병으로 분류돼 특별 관리 받아야 했지만 선임인 정아무개 일병은 김 일병에게 잠을 재우지 않고 욕설과 인격 모독을 가했다. 부대 간부들은 이 사실을 알고도 김 일병과 정 일병의 내무반만 격리했다. 전체 병사가 60여명인 작은 부대에서 김 일병은 이후에도 정 일병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김 일병은 우울증 치료를 받는 가운데 자살했다. 군 수사기관은 우울증 악화로 자살했다고만 결론내렸고, 김 일병의 부모도 이를 받아들여 부검도 하지 않은 채 장례를 마무리지었다. 해피엔딩 같지만 실상은

그러나 김 일병의 3개월 선임인 김 씨[47]는 전역 후, 2012년 11월 오늘의유머 한 게시판에 '나는 살인을 방관했고, 나 또한 살인자다'란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가족들은 가혹행위, 은폐, 기록 조작, 허위진술 강요 등이 이루어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임병 김 씨와 유족들이 만나면서 사건조사가 진행되었고, 이 사건을 조사한 국민권익위원회는 지난달 24일 김 일병을 순직 처리하라고 국방부에 권고하면서 국방부 측에서는 이 권고를 받아들여 2014년 5월 31일, 순직처리되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여기서 핵심은 군 사망자 유가족 조의금보다 사망원인 및 부실수사를 밝히는 게 우선인데 역시나 우리의 국뻥부는 언론이 무관심해 지고 피해자가 순직처리 되니깐 관련자 처벌하지도 않고 흐지부지하고 끝냈다. 기사

여기서 도응조 여단장[48]의 악랄한 행위가 드러났는데, 자살한 김 일병의 조의금 290만 원을 가로채 군사경찰대 등 부대 간부들에게 회식비로 건넨 사실이 드러나면서 현재 이 부분은 수사 중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도 여단장은 수시기록을 보여달라면서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49]

2014년 11월 10일,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은 1심 보통군사법원에서 인사행정부사관인 A 상사에 대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 도 여단장과 B 주임원사는 각각 무죄가 선고되었다. 군 관계자는 "재판부가 주임원사도 인사행정부사관과의 공범 관계를 입증할 증거가 없는 것으로 (군사법원이) 판단해 무죄를 선고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군 검찰과 가해자 변호인 측은 항소할 뜻을 밝힘에 따라 사건은 2심 고등군사법원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2014년 06월 25일, 김 일병의 선임은 '나는 살인을 방관하였고, 나 또한 살인자다. 그 후의 이야기'[50]를 자신의 블로그에 담았고, 다음카페 맹호전우회에서 김 일병과 같이 근무했다는 또 다른 병사가 뉴스 기사 내용을 허위, 과장 됐다는 식으로 글을 올리기도 해 논란이 되었다. 수사결과에서는 이미 사건 축소/은폐, 조작 정황이 드러났는데도 말이다... 해당 병사의 글 현재 삭제됨

7.4. 조재윤 하사 사망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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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타

8.1. 외박구역

외박 시 출타가능구역이 과거에는 현리 일대 주둔 중인 부대들을 기준으로 봉수교차로 - 서파교차로 - 청평검문소 - 세구지검문소까지로 구역 내 번화가는 현리터미널 일대가 전부였기 때문에 사실 상 현리가 출타가능구역으로 통했다. 다만 현리 이북에 있던 부대들은 일동까지가 출타범위었으며 현리일대의 숙소난으로 인해 비공식적으론 청평까지 출타를 허용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2013년경 사단에서 출타범위를 넓히라는 지침이 있었다. 이에따라 일부 부대들이 출타구역을 넓히긴 했으나 여전히 대부분의 부대들이 병사들의 관리 편리성으로 인해 출타범위를 기존의 범위로 고정하고 있었다. 심지어 출타범위를 넓히지 않은 부대들이 넓힌 부대들에게 다시 출타범위를 좁히라는 압박까지 넣었을 지경이었다. 그러던 것이 2014년 경 이등병캠프에 간 모 이등병이 사단장과의 면담시간[56]에 "저는 연고지 복무병으로 군 입대를 했는데 내가 사는 지역(포천)까지 출타를 못 나가는 것이 아쉽습니다."라고 말한 후 다시한번 지침이 내려가면서 사건이 일단락 되었다.

실제 출타범위 문제로 인해 연고지 복무병들의 불만이 상당했었는데 과거 출타범위에 따르면 거의 대부분의 연고지병들이 외박으로 자신의 집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57] 이는 연고지 복무병 제도의 취지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행위기도 했으며 국가의 정책을 일개 군인 집단들이 거부한 꼴이었다. 당시에는 휴대전화등이 활성화 되지 않아 그냥 묻혔지, 지금 이런일이 발생했다면 그야말로 메인 뉴스감이다. 거기에 출타범위를 제한했던 부대 간부들도 줄줄이 징계를 먹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봐야 경고장 정도겠지만 현재 진급적체가 심함을 감안하면 이는 굉장한 치명타이다.

어쨋든 1차로 넓어진 출타범위에 따라 현리에 주둔지가 있는 부대들을 기준으로 대략 남양주 평내 일대까지 갈 수 있었다. 2시간 복귀규정을 적용하긴 했지만 차가 밀려도 2시간 이내 복귀가 가능해야 된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출타범위가 넓어진 부대들의 장병들은 서울까지 못 가서 아쉬워 하긴 했지만 경춘국도[58]와 현리가는 37번 국도[59]의 정체를 한번 경험해보면 이와 같은 조치에 대체로 수긍했었다. 대부분의 장병들이 현리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과거 엄청난 사건으로 인해 현리의 물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해진 것도 한 원인이었다. 원래 현리일대도 강원도에 있는 여느 군부대 주둔지처럼 바가지가 일상이었다고 한다. 결국 참다못한 한 사단장이 외박 출타지역을 1330-4번이 다니는 곳 즉 청량리일대까지 확 넓혀버린다. 이게 지속되면서 현리일대의 상권이 거의 파멸직전까지 갔다. 결국 상인들이 다시는 바가지를 씌우지 않겠다고 사단장에게 빌면서 사건이 일단락 되었다. 그 후로는 하나로마트등이 생기기도 했고 출타지역이 넓어지면서 바가지를 씌우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2019년부터 위수지역규정이 완전히 폐지되면서 2시간 이내 복귀할 수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었다. 도로망이 잘 되어있어 차량기준으로는 서울 전역을 가는 것도 가능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동서울, 잠실, 상봉정도까지는 어찌 나갈 수 있으나 그 이상은 무리가 따른다. 누가 태우러 오지않는 이상 굳이 멀리 갈거 없이 과거의 출타구역인 평내일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합리적이다. 현리기준으로 환승없이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고 영화관과 이마트도 있어 시간보내기는 나쁘지 않다.[60]

다만 위에 모든 얘기들은 현리일대 부대들에 한정된 얘기이다. 만약 포천 쪽이 근무지인데 차량이 없이 이동해야 한다면, 그냥 시외버스를 타고 동서울로 가거나 시내버스를 이용해 의정부로 가는 수밖에는 없다.

9. 미디어

베트남 전쟁 파병 등으로 세계에 잘 알려진 대한민국 국군 부대이기 때문에 한국인 캐릭터 관련 설정으로 자주 붙기도 한다. 물론 대한민국 내에서도 메이커 사단에 속하는 부대답게 미디어에 자주 출연하거나 언급된다.

[1] 공식 영문명칭은 Tiger division [2] 이는 부대 구호에서도 알 수 있다. 수도군단은 그나마 서울 근교의 안양, 부천, 김포공항, 이천 등에 포진되어 있다 보니 구호에서도 서울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조국의 심장을 지킨다'고 비유해서 표현하고 있는데, 수기사는 그조차도 없이 그냥 조국이 부르면 맹호는 간다가 구호이다. 다만 밑의 사단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2절에 서울을 지킨다고 표현이 되어 있기는 하다. 이름뿐인 수도 부대이지만 그래도 수도 서울과 아주 조금은 명분이 남아있다. [3] 전투서열(Order of battle)은 전투력 서열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부대를 숫자별로 목록을 만들어 관리하는 서열이다. 물론 수기사는 사단 단위 전투력에서도 최상위권이긴 하다. [4] 엄기학 대장 전 3야전군사령관 사단장 이임 후 작전 직능 소장 2차보직 최요직인 합참 작전부장 역임, 권오한 소장 사단장 이임 후 합참 작전부장 역임, 이석구 중장 사단장 이임 후 합참 작전기획부장 역임 등. [5] 최근 사단장 5명 모두 포병/기갑장교다. 기본적으로 육군에서 비 보병 병과 출신이 대장에 진급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데(물론 애초에 보병장교의 TO가 기갑&포병 TO보다 월등히 많은 이유도 있음.), 7기동군단이나 수도사단은 국군 작계에서 인민군의 종심을 돌파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 보병 출신보단 기갑 출신에서 임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다보니 부대의 명성에 비해 대장 진급자가 잘 안 나오게 되는 것. 오히려 2020년 이후 대장을 가장 많이 배출한 군단장 보직은 5군단장이고 사단장 보직은 1군단 산하 1사단&9사단이다. [6] 8, 11사단은 전차/기보의 비율이 4/5였다가 기동사단으로 변경되면서 3/6으로 되었다. [7] 복합형비호 전력화 [8] 한미연합사단 소속 겸임 [9] 원래 백조였으나 2015년 명칭이 변경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로 창설된 6개의 포병부대 중 하나로 창설 당시에는 야전포병단 7대대였다. [10] 여단에서 제일 먼저 K9을 굴리기 시작했다. 2010년 여름에 수령했고, 2011년 가을에는 K10을 수령했다. 장비는 좋은 걸 가장 먼저 받았다. [11] 복무 당시 계급은 대령 [12] 기갑출신 첫 3성장군 및 첫 군단장 [13] 1991년~1992년 [14] 염순덕 상사 피살사건 당시 사단장 이다. [15] 노태우 전 대통령이 대대장 역임 [16] 고 강재구 소령이 실제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부대 [17] 육군훈련소 수료 [18] 물론 병과 또는 예하 부대마다 다르다. 전역자 증언으로는 정비대대 일반지원중대 궤도반 나왔지만 정비나 훈련지원보다는 궤도반 공장 앞 연병장 풀 뽑기가 더 많았다고 한다. 삼대 땡보로 의무, 정비, 항공이란 말이 돌았다. 2005~7년 사병 기준. [19] 격년이라지만 나가기는 매년 나간다. 한 해는 지원부대로, 한 해는 주공부대로 참가하는데 지원 부대나 주공부대는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변하므로 운 좋으면 군 생활 중 2번 할 수도 있다!...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훈련부대가 아닌이상은 대부분은 간부와 소수의 병사들만 훈련 통제 등의 목적으로 파견 나간다. 그리고 지금은 기계화 부대가 대폭 증편돼서 이 훈련을 아예 경험 못해보고 전역할 수도 있다. [20] 그때 그때 다르겠지만, 정말 운이 없는 경우 야외에서 세 달 가까이 생활하는 경우도 있다. 보급은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해 주지만 씻을 수가 없다. [21] 주로 이 훈련은 통합화력훈련이라 하여 포천 일동의 승진훈련장에서 실시한다. 이 훈련의 경우 일반인도 관람할 수 있다. [22] 과도한 구보로 인해 오줌에 피가 섞여 나와 붉게 보인 것이다. 병사들에게 혈뇨가 나온 이후 포병 교육대대에서의 훈련 강도는 다소 약해졌다. [23] 20사단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본래 양기사의 뜻은 양평에 주둔하고 있다고해서 계화보병단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며, 20사를 놀리는 의미가 강한 별명이다. 포항공과대학교 학생들이 카이스트를 대전공대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의미 [24] 12.12 쿠데타를 논할 때 굉장히 중요한 게 전두환, 노태우 같은 장성급들만이 아니라 그 뒤를 뒷받침한 대령, 중령들이다. 연대장, 대대장, 참모에 위치한 사람들이 실무담당자로서 일선에서 부대를 이끌고 비하나회 장군들을 회유했다. 이들이 없었으면 쿠데타는 성공할 수 없었다. 이건영 3군 사령관의 출동금지 명령을 무시하고 9사단 29연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입시킨 이필섭 대령과 노태우의 출동명령을 이필섭에게 하달한 9사단 참모장 구창회 대령, 26사단장 배정도를 회유해 출동하지 않게 만든 26사단 보안부대장 김현 중령, 끝까지 저항한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체포한 수경사 헌병부단장 신윤희 중령 등이 대표적이다. 2017년 알자회가 이슈가 되었을 때 군내에 사조직을 결성했다는 그 자체의 문제와 별개로 제2의 하나회니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일부 네티즌의 주장은 헛소리에 불과했던 이유가 마지막 기수인 43기가 이미 별을 단지라 행동대장 노릇할 대령, 중령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하여 알자회엔 전투부대 지휘관이 강원도 1군 지역의 12, 22사단장 뿐으로 수도권 주변 주요부대에 대한 영향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25] 최신장비를 현재 가장 먼저 보급받는다. 수기사에 먼저 안 주냐며 궁시렁 대는 현역병, 부사관, 장교들도 있지만 장비교체 시 작업의 주인공은 바로 수기사의 인원들이다. 전장비(CMI라고 부르며 보통은 전투 지휘 장비 검열로 부른다) 이상으로 현행장비를 말끔하게 수리하고 광내고 도색하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채워야 하며 이렇게 구형장비를 다른 곳에 보내도 다시 새로운 장비가 오면 생기는 작업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론 행정, 군수, 보급, 지휘는 더 골치를 썩이는 데다 결정적으로 기존의 훈련과 전술을 갈아엎고 새로바뀐 장비에 맞게 새로 교육, 훈련해야 한다. [26] 수기사, (구)20사단을 제외한 다른 부대 기보사단 인원들과, 기갑여단 인원들 [27] 6.25 전쟁 당시 원산 입성때는 1군단 소속이었고,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 7군단으로 가기전에는 같은 5군단 소속이었다. [28] 2019년 제3야전군사령부가 폐지되면서 제3야전수송교육단도 폐지되었고 육군종합군수학교로 이관되어 제3수송교육연대가 신설되었다. [29] 심지어는 특기학교가 따로있는 정비병도 사단 신병교육대에서 바로 배정된다. 이런경우 명령지에 자체교육이라는 문구가 들어간다. [30] 의무병 양성과정에 주사실습이 있다. [31] 그나마 확률이 높았던 곳이 제7기동군단 직할부대였으며 정말 운이 좋다면 제3야전군사령부, 청평병원 등으로 배정되기도 했다. 그나마 야전수송교육단에서 후반기를 받는 운전병 정도나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을 벗어날 확률이 높았다. [32]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소총수 특기를 받고 수도기계화보병사단으로 올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이 본부중대와 같은 기행부대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기계화부대다 보니 일반적인 보병들도 '기계화보병' 이라는 보직이 따로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신병교육대가 해체된 지금은 의미없는 얘기이다. [33] 이 후에 국방홍보원 홍보지원대에서 복무 중이었으나 세븐 상추 안마시술소 출입 사건이 터지면서 연예병사가 폐지돼 제7보병사단으로 배치되었다. [34] 후에 제7기동군단으로 이관된 제8기동사단, 제11기동사단, (구)제26기계화보병사단은 2018년에 제8기동사단에 통합되어 폐지되고 (구)제20기계화보병사단은 2019년에 제11기동사단에 통합되어 폐지되면서 기동/기계화보병사단에 있던 신병교육대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35] 물론 2024년 현 시점에서는 오래된 옛날 이야기니, 장난으로라도 절대 따라하지 말자. [36] 눈이 멍들거나 입안이 터진 정도는 그냥 걷다가 넘어졌다고 보고하면 대충 넘어갔다.에라이 쌍놈들아 [37] 예를 하나 들면 후임병을 세워놓고 싸대기나 조인트를 까는 정도가 아니라 주먹으로 패다가 쓰러지면 발로 잘근잘근 짓밟다가, 그래도 분이 안 풀리면 쇳덩어리나 다름 없는, 벽돌 만한 크기의 4FM 배터리를 내무반 바닥에서 고통스러워하며 뒹구는 후임병 가슴에 집어 던지는 놈도 있었다. 새 천년과 21세기를 눈 앞에 둔 1999년인데도 맹호부대는 이런 짓을 하고도 영창 한번 안 가고 전역이 가능한 미친 분위기였다. [38] 사실상 이 폭력의 파라다이스에서 기보대와 함께 폭력의 투탑. [39] 당장 영창등의 이유로 다른 사람과 군복무기간이 조금만 차이나도 이를 면접등지에서 해명해야 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군대에서 전과기록 가지고 전역했다면 더 이상 말 할 필요가 없다. [40] 물론 분대장이 하는 약간의 훈육은 허용. 분대장은 엄연히 녹색견장을 찬 지휘자이기 때문이다. 병영생활 행동강령에도 분대장에 의한 훈육규정이 나와있다. 이 때문에 육군의 경우 훈련소나 신병교육대에 있는 병 조교들은 공식직함이 분대장이다. [41] 비호부대인 제1기계화보병여단을 뜻한다. [42] 번개부대인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을 뜻한다. [43] 혜산진부대인 제26기계화보병여단을 뜻한다. [44] 상승부대인 수기사 포병여단을 뜻한다. [45] 2003년경 바뀜, 사단장의 지시로 억지로 개사되었다는 당시 풍문이 있음. [46] 출처3: 신기철, "전쟁범죄" 121p [47] 몇 년 뒤 발생한 20만원짜리 컴퓨터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48] 수많은 군사서적을 집필한 인물이나, 알고 보면 외국 서적을 번역하여 저술하였다. 그리고 번역 역시 본인이 한 게 아니고 부대에서 영어 좀 한다고 하는 병사들을 싸그리 불러모아서 일 시키는...그러다보니 전문 군사용어에서 발번역이 많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49] 디시 수기사갤러리에서 도 여단장을 엄청 깠는데 도 여단장이 대대장 중령시절에 양기사에서 복무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양기사 찌끄레기 출신이 대 수기사를 더럽혔느니 어쩌느니 이야기가 나왔었다. [50] 아쉽게도 비공개로 바뀌었다. [51] 통신, 작전 등 [52] 과거에는 장갑차도 함께 파견을 갔다. 장갑차의 특성상 속도도 느렸고 승차감도 별로라 가는길 부터가 고행길이었다. [53] 1위-육군 제6보병사단(청성부대. 김종오 장군 지휘. 춘천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 2위-육군 제1보병사단(전진부대. 백선엽 장군 지휘. 다부동전투, 평양 탈환전 등), 3위-해병대(진동리 전투, 통영 상륙작전, 인천 상륙작전, 도솔산전투 등), 4위-육군 제3보병사단(백골부대. 38선 첫 돌파, 현리전투 등), 5위-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 송요찬 장군 지휘. 원산탈환.) [54] 기계화부대가 증가하면서 약간 줄긴 했는데 평균적으로 봤을 땐 여전히 다른 부대들보다 훈련이 많다. [55] 간부들은 중방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도 기갑 이외의 보직을 가진 간부들은 이 부대를 별로 선호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최전방이면 점수라도 많이 받겠지만 여긴 위치도 어중간한데다 거의 기갑을 보조해주는 역할이라 진급에 크게 어필을 할 수 없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기갑이다보니 병력이 일반보병부대보다 적다. [56] 이등병 캠프에 사단장이 가는 것은 흔하지는 않은 케이스인데, 당시 터졌던 윤 일병 사건, 임 병장 사건이 영향을 끼친것으로 보인다. [57] 심지어 같은 행정구역내에 있었던 설악면지역, 가평읍 지역도 기존의 출타범위상으로는 갈 수 없었다. [58] 현리로 갈 때 그 유명한 청평을 지나야 한다. 참고로 출타범위로 지정돼있는 평내까지도 차가 밀리면 2시간안에 복귀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 구리까지 출타범위를 넓힌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가평등지에서 오래 살았던 장병들은 도로사정때문에 힘들거라는 의견을 제시했었다. [59] 이쪽도 운악산이나 각종 계곡들로 인해 정체가 상당한 곳이다. 과거 국도 개량전에는 타이밍 잘못 맞추면 현리에서 청평까지 2시간 가까이 걸렸을 정도로 악명이 자자했으며 신도로가 개설된 지금도 차 밀리면 한 시간 이상은 각오해야될 정도라고...... 참고로 평소에는 15-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60] 구리도 있긴한데 역 인근에는 백화점 밖에 없어 쇼핑하기가 난해하다. 만약 구리까지 나갈 생각이라면 차라리 청평, 대성리역등지에서 경춘선을 이용해 상봉역으로 가서 시간 보내는 게 더 합리적이다. 전철을 이용하게 되면 구리가는 것과 시간이 거의 동일하게 걸리고 버스 기준으로 해도 구리 가는 것과 비교해 20분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아니면 아예 시외버스를 이용해 동서울이나 잠실로 가거나... [61] 2014년 4월 20일 ~ 5월 19일 방영분은 세월호 참사의 여파로 휴방. [62] 과거에는 20사단 예하 여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