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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16:41:58

삼성 라이온즈/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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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삼성그룹 | 제일기획 | 삼성스포츠 | 삼성 라이온즈 | 삼성 라이온즈 2군
주요 인물 구단주·대표이사 유정근단장 이종열감독 박진만2군 감독 이병규주장 구자욱
경기장 1군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 · 포항 야구장2군 경산 삼성 라이온즈 볼파크
스프링캠프 온나손 아카마 볼파크재활 삼성 트레이닝 센터이전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주요 정보 선수단 등번호 유니폼마스코트 블레오 사건 · 사고 프랜차이즈 스타 삼성 왕조 암흑기 ( 2차) 통산 기록 일지
관련 정보 삼적화 여름성 이마양 채최박 조원수박차 JOKKA 라인 곤규엽 굴비즈 삼나쌩 · 삼상바 클럽 기롯삼한 라떼동맹 임김오
라이벌리 vs KIA 달빛 시리즈vs 롯데 클래식 씨리즈vs 두산 싸대기 매치vs 현대 재계 라이벌 시리즈
영구 결번 10 양준혁22 이만수36 이승엽
최종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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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2002 2005 2006 2011 2012 2013 2014
현재 시즌 삼성 라이온즈/2024년
팬덤 정보 응원가( 구단 · 선수)|디시인사이드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유튜브 LionsTV네이버 카페 사자 사랑방팬 게시판 사자후 (폐쇄)응원단장 김상헌 허니크루 치어리더 대구아재
지역 연고 경북고 대구고 상원고 포철고 경주고 강릉고 설악고 도개고 예일메디텍고
기타 이승엽 와도 자리 없다 나믿가믿 삼팬이지만 인정한다 돈 내놔라 먹튀야 못 참겠어서 왕조 선언합니다 김헌곤 유니버스 | 세이브 조작단 | 오승환/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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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시즌 역대 감독 역대 주장 역대 1차지명 응원단 코칭스태프 투수 포수 내야수 외야수 육성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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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에 관한 공통분모로 꼴리검 대구아재와도 일정 부분 연관이 있다.

삼성 라이온즈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관련 자료[1]

1. 경기 관련
1.1. 1984년 OB와의 충돌1.2. 1984년 고의로 롯데에 져주기 논란1.3. 1984년 이만수 타격왕 밀어주기 논란1.4. 빙그레-한화와의 잇단 난투극1.5. 1990년 잠실구장 삼성-OB 집단 난투극1.6. 1996년 현대와 빈볼 시비1.7. 1997년 부정배트 의혹1.8. 2010년 한국시리즈 4차전 대구구장 내야 조명 소등 사건1.9. 2011년 대구구장 정전 사건1.10. 2011년 대구구장 전광판 화재 사고
2. 선수 관련
2.1. 2001년 갈베스 잠적 사건2.2. 2002년 진갑용 도핑 사건2.3. 2003년 임창용 간통 사건2.4. 2008년 선수단 도박 사건2.5. 2010년 광주 KIA전 강봉규 퇴장 사건2.6. 2014년 정형식 음주운전 사건2.7. 2015년 삼성 원정 도박 사건2.8. 2016년 안지만 도박사이트 개설 사건2.9. 2017년 최경철 도핑 사건2.10. 2019년 박한이 숙취운전 사건2.11. 2020년 최충연 음주운전 사건2.12. 2020년 윤성환 불법 도박 및 승부조작 사건2.13. 2020년 신동수 SNS 막말 사건2.14. 2021년 대구 kt전 마이크 몽고메리 로진백 투척 난동 사건2.15. 2022년 대전 한화전 데이비드 뷰캐넌 불펜카 장난 논란
3. 팬 관련
3.1. 1982년 대구 OB전 관중 난동 사건3.2. 1982년 대구 OB전 관중 난동 사건3.3. 1984년 대구 OB전 오물 투척 사건3.4. 1986년 한국시리즈 3차전 해태 버스 방화 사건3.5. 1986년 한국시리즈 4차전 관중 난동 사건3.6. 1988년 플레이오프 3차전 관중 난동 사건3.7. 1989년 대구 빙그레전 관중 난동 사건3.8. 1990년 대구 해태전 관중 난동 사건3.9. 1990년 대구 OB전 관중 난동 사건3.10. 1990년 대구 롯데전 김종석 새총 저격 사건3.11. 1990년 대구 해태전 이만수 깡통 투척 사건3.12. 1992년 대구 빙그레전 관중 난동 사건3.13. 1996년 대구 해태전 관중 난동 사건3.14. 1998년 대구 현대전 관중 난동 사건3.15. 1998년 플레이오프 1차전 관중 난동 사건3.16.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관중 난동 사건3.17. 2003년 대구 SK전 관중 난동 사건3.18. 2010년 플레이오프 5차전 관중 난입 사건3.19. 2011년 대구 넥센전 관중 난입 사건3.20. 2015년 대구 LG전 관중 난입 사건3.21. 2016년 포항 한화전 관중 난입 사건3.22. 2016년 대구 kt전 최형우 타구 판정 번복 사건3.23. 2017년 대구 LG전 이천웅 욕설 퇴장 사건3.24. 2019년 창원 NC전 원정 응원 논란
4. 구단 관련
4.1. 1983년 구단과 서영무 감독의 갈등4.2. 1987년 김성길 편법 영입 논란4.3. 1993년 양준혁 편법 입단 논란4.4. 1995년 최창양 편법 입단 논란4.5. 장효조 트레이드 및 홀대 논란4.6. 이만수 은퇴 강요 및 코치 계약 파기 논란4.7. 2005년 TV 중계 뒷거래 의혹4.8. 2014년 정현석 FA 보상선수 재지명 논란4.9. 2016년 삼성 팬 현수막 제지 및 시위 사건4.10. 2017년 최규순 게이트4.11. 2017년 강민호 FA 이면계악 논란4.12. 2018년 응원가 저작권 침해 집단 소송4.13. 2022년 팬 스케치북 검열 사건4.14. 2022년 라팍 운동회 진행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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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기 관련

1.1. 1984년 OB와의 충돌

1984년 삼성과 OB의 사이는 최악이었다. OB와 김영덕 감독의 악연은 1983년 10월 성적부진과 박철순의 부상에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감독을 사퇴하면서 시작됐다. 김 감독은 사퇴 후 거취문제에 대해 "자신의 야구이론을 정리한 뒤 일본 유학"을 밝혔었다. 하지만 OB 감독을 사퇴한 11일 뒤에 삼성 감독으로 입단 계약을 마쳐 OB가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었다.[2]

OB 선수들도 김영덕 감독에게 서운한 감정을 갖고 있었기에 유독 1984년 전기리그에는 OB 선수들과 충돌이 잦았다.

4월 10일 OB와 첫 3연전 때 OB 선수들은 김영덕 감독을 보고도 본채 만채 했고 다음 날에도 OB 선수들은 김영덕 감독을 무시했다. 12일에야 OB 선수들이 김영덕 감독을 찾아와 인사했는데, 이번에는 김영덕 감독이 선수들의 인사를 무시했다. 그러자 OB 선수들은 그날 경기 내내 김영덕 감독을 험담하며 야유를 보냈다. OB의 감독이던 김성근 감독이 만류했지만 선수들은 도저히 듣지 않았다. 그러다 문제가 터졌으니, 선수 중 유독 배원영이 큰 소리로 김영덕 감독에게 야유를 보냈는데 배원영은 신인이라 김영덕 감독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 있을 수가 없었다[3]. 경기 후 김성근 감독의 권유로 OB 선수들은 김영덕 감독을 찾아가 사죄를 구했지만, 김영덕 감독은 배원영의 뺨을 때리며 "니들이 그러고도 프로냐"라며 도리어 야단을 쳤다. 주위에서 말리는 바람에 다행히 큰일 없이 거기서 일이 끝났다. 김성근 감독의 자서전에서는 이때 상당히 불쾌했었다고 한다. 김영덕은 김성근에게 재일교포 출신 선배였고 실업야구시절부터 인연이 있었고 바로 전년도인 1983년에는 감독과 코치였지만, 이때 완전히 돌아서게 됐다고 한다.

5월 2일 대전 OB와의 경기에서는 빈볼 사태가 벌어졌다. 1회초 OB의 계형철이 삼성의 김근석의 몸을 맞췄고, 삼성에서 항의를 했으나 심판의 제지로 큰일 없이 넘어갔다. 삼성이 11대4로 크게 앞서있던 8회말에 이번에는 삼성의 김일융이 던진 공에 조종규가 맞자 OB 선수들이 마운드를 향해 달려왔다. 삼성 선수들 역시 달려나가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OB 선수들에게 얻어맞은 김근석은 심하게 다쳐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이 때문에 몇몇 OB 선수들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불미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다.

5월 12일 대구에서도 충돌이 있었다. 6회말 삼성의 공격 때 OB의 3루수 양세종이 포수 김경문의 견제 송구를 받아 3루 주자 천보성의 머리쪽으로 태그를 한 것. 삼성 선수들이 이에 흥분했으나 다행히 별 소동 없이 무마되었다. 그러나 흥분한 관중이 내던진 빈 병이 OB 1루수 구천서의 머리에 강타해 구천서의 이마가 찢어졌다.

6월 2일 대전에서 또 충돌이 있었다. 2회말 내야수 실책으로 출루한 OB의 이홍범이 타자 조범현의 번트 타구에 병살을 막기 위해, 2루로 달려오던 삼성의 유격수 오대석의 허벅지를 걷어찬 것. 이홍범은 5경기 출전 정지로 끝났지만 오대석은 커리어 내내 허벅지 부상에 시달렸다.

1.2. 1984년 고의로 롯데에 져주기 논란

1984년 프로야구는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누어 100경기를 치렀다. 그래서 한국시리즈는 전기리그 우승 팀과 후기리그 우승 팀이 맞붙어 승부를 겨뤘다. 당시 전기리그에서 우승한 삼성은 후기리그까지 제패, 한국시리즈를 무산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후기리그 들어 우승할 길이 멀어지자 파트너 선택으로 머리를 돌렸다. 한국시리즈에 대비해 전력을 비축하는 한편 코칭스태프에서는 '후기리그 1위로 어떤 팀을 밀어줄 것인가' 로 회의를 하며 손 쉽게 이길 수 있는 팀 탐색에 들어갔다. 코치들의 의견은 확실한 에이스가 없는 해태 타이거즈 OB 베어스였으나, 김영덕 감독은 롯데를 선택했다.

이래서 선택된 팀이 전기리그에서 4위를 차지했던 롯데였다. 삼성은 전기리그 때 롯데에게 9승 1패로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고, 시즌 중 롯데 자이언츠의 에이스 최동원을 이긴 적이 있다는 것이 김영덕 감독이 롯데를 고른 이유. 그러나 롯데에서 감독으로 있었던 박영길 타격코치는 완투가 가능한 최동원이 페이스까지 조절하면 상대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코치가 감독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으니 롯데가 한국시리즈 상대로 정해졌다.

한국시리즈 진출권이 걸린 후기리그 우승의 향방은 롯데와 OB가 각각 2게임을 남겨 놓은 상태에서도 오리무중이었다. 롯데는 27승 1무 20패로 1위를 달리고 있었고 OB는 1게임 뒤진 26승 1무 21패로 롯데를 추격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두 팀이 우승과는 거리가 먼 삼성과 해태와 각각 2게임을 치러야 하는 점이었다. 그것도 같은 날(9월 22~23일) 롯데는 홈인 부산에서 삼성과, OB는 제주에서 해태와 2게임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관심은 온통 부산에서 치를 삼성-롯데전(9월 22~23일 구덕구장)에 쏠려 있었다. 삼성이 롯데를 얼마만큼 봐주느냐에 따라 우승의 향방이 결정되는 갈림 길이었기 때문이다. OB가 제주경기에서 2승을 건져도 삼성이 롯데에 2게임 모두 져주면 만사는 끝이었다. OB는 삼성이 최소한 1게임 만이라도 잡아주길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김영덕 감독 입장에서 보면 어림없는 소리였다. 김감독은 그만큼 OB를 싫어했다.
OB와는 안팎으로 악연이 많았다. 이런 팀을 파트너로 선택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또 롯데는 최동원을 빼면 모든 면에서 삼성에 뒤졌다. 후기리그에서 우승한 것은 롯데의 힘이 아니었다. 기적이었다. 나는 중위권만 들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ㅡ 당시 언론에 밝힌 김영덕 감독의 인터뷰.
그 뿐만이 아니었다. OB에서 사퇴해 삼성으로 오면서 그 때문에 1984년 전기리그에서 양쪽 선수들이 사소한 문제로 주먹 다짐을 벌이는 일이 예사였다. 이러니 김영덕 감독 입장에서는 OB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결사적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삼성의 김영덕 감독은 9월 22일 사직 경기를 갖기 전 "고육지책으로 롯데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OB와 한국시리즈에서 만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어떤 방법을 쓰던 롯데를 밀어주어 한국시리즈에 함께 가겠다"고 밝혀 여차하며 '져주기 게임'도 감행한다는 언질을 주었다. 그러나 져준 방법이 문제였다. 큰 점수 차로 이기다가 어거지로 패해[4] 많은 팬들의 분노를 샀다.

9월 24일자 동아일보 체육 면을 보면 "프로야구 오명의 ‘84"라는 제목으로 프로야구를 질타하는 기사가 가득 채워져 있다. 경향신문도 "야구냐 야바위냐"란 제목으로 절반 이상을 채우고 있다.

1984년 9월 23일 프로야구 후기리그 우승은 롯데에게 돌아갔다. 삼성을 등에 업은 롯데가 OB를 1게임 차로 따돌리고 정상에 올랐지만 찝찝한 기분은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된 롯데는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4승 3패로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한다.

야구냐 야바위냐 연이틀 팬 우롱한 져주기 졸전(당시 기사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3. 1984년 이만수 타격왕 밀어주기 논란

1984년 삼성의 이만수는 홈런과 타점에서 1위를 질주하며 타격 부문을 두고 롯데의 홍문종과 마지막까지 엎치락 뒤치락하며 트리플 크라운을 노렸다.

당시 재일동포 출신으로 한국프로야구에 뛰어든 롯데 홍문종은 간발의 차이로 이만수(.340)에 이어 타격 2위(.339)를 기록했다. 단 한 개의 안타면 순위가 뒤바뀔 상황이었지만, 삼성은 정정당당한 승부를 거부했다.

정규시즌 타격부분 1위를 결정짓는 9월 22일부터 23일까지의 롯데 vs 삼성 마지막 2연전. 야구 팬들은 여기서 세기의 대결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하였지만,

9연타석 고의사구라는 진기록이 탄생하였다.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 신기록.

홍문종은 9월 22일 경기에서 5번의 고의사구를 당했으며, 이에 야유가 쏟아지는 등 분위기가 좋아지지 않자 23일 경기에서는 대놓고 포수가 일어서는 고의사구는 하지 않았지만 볼을 계속해서 밖으로 빼는, 사실상의 고의사구를 4번 했다. 이 작전에 따라 이만수는 덕아웃에서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면 됐다. 덕분에 홍문종은 삼성의 치밀한 작전 덕택에 10연타석 출루기록을 세웠다.

문제는 2차전에서 이 때문에 홍문종이 장효조의 출루율을 추월할 지경이 되었다는 점. 장효조의 출루율도 포기할 수 없었던 김영덕 감독은 결국 롯데에 져주는 대신 홍문종을 엔트리에서 빼자고 했고, 롯데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7회 수비에서 홍문종은 결국 교체되었고, 이만수와 장효조의 타이틀은 지켜질(?) 수 있었다.

이만수는 이 해 타격 3관왕을 차지했지만 결국 MVP를 수상하지 못하였다. 이만수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밝히고 있다. “1984년만 해도 나는 팀의 막내였다. 감독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선수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지금 같으면 타격3관왕을 못하더라도 정정당당한 승부를 했을 것이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지, 이 때의 수혜자 중 한 명이었던 장효조는 1991년 시즌에서 역시 고의사구로 1리 차이로 타격왕을 빼앗겼다.[5] 그리고 이것과 거의 똑같은 장면이 25년후 2009년 박용택 - 홍성흔의 타격왕 다툼에서 똑같이 재현된다. 참고로 세 명의 2위가 전부 롯데소속이었다.

1.4. 빙그레-한화와의 잇단 난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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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990년 잠실구장 삼성-OB 집단 난투극

1990년 6월 5일 잠실(삼성-OB전).

집단 패싸움의 발단은 OB의 5번째 투수로 등판한 김진규가 7회초 삼성의 선두타자 강기웅에게 빈볼에 가까운 초구를 던지면서 시작됐다. 강기웅이 “무슨 놈의 야구를 이 따위로 하느냐”라고 중얼대자 이를 들은 OB 포수 조범현이 "선배에게 무슨 말버릇이냐"라고 발끈했다. OB는 1주일쯤 전인 5월 31일 대구경기에서 3-20으로 삼성에게 대패한 뒤 이날 경기에서도 4-9로 끌려가고 있어 모두들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주심이 양측 선수들에게 즉시 '경고' 조치를 내렸지만, 곧이어 김진규가 던진 2구가 강기웅의 왼쪽 허벅지에 맞았다. 이에 분노한 강기웅이 배트를 움켜쥔 채 김진규에게 달려갔고 양 팀 벤치의 선수들이 벌떼처럼 몰려 나가 집단 난투극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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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팀 선수들이 일제히 그라운드로 뛰쳐나와 10분간 치고받고 발길질을 하는 등 그라운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난투극으로 삼성 투수 박용준은 이가 부러지고 얼굴이 찢어지는 등 크게 부상 당했고 싸움을 말리던 김동앙 주심도 갈비뼈가 부러져 각각 병원으로 후송됐다.

경기는 22분 가량 중단됐다. 삼성 선수들 가운데 강기웅을 비롯한 김종갑, 박정환이 퇴장을 당했고 OB에서는 김진규, 조범현, 김태형이 쫓겨났다. 그러나 이 패싸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야구위원회는 상벌위원회를 소집, 싸움의 원인 제공자인 강기웅과 김진규에게는 10경기 출전 금지에 제재금 100만원, 싸움에 가담한 박정환, 김종갑 및 OB의 조범현, 김태형에게는 30만원씩 벌금을 물렸다.

1.6. 1996년 현대와 빈볼 시비

재계 라이벌 시리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에피소드. 6월 2일 인천 현대 유니콘스와의 경기에서 빈볼 시비가 있었다. 당시 현대가 주말 3연전 중 앞선 두 경기를 이겼고, 이날 경기도 7대1로 리드하고 있었다.[6] 그런데 삼성의 우완투수 이상훈이 6-7-8회 연속으로 현대 타자 3명을 상대로 몸에 맞는 공을 던졌다. 당시 이상훈은 전혀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현대 타자들에게 '뭘봐, 불만있어?'란 투의 표정을 지어 현대 선수단의 심기를 건드렸다.

파일:external/file.osen.co.kr/201301101207773068_50ee32c9bba3f.jpg

이에 9회초 현대의 마무리 투수 정명원이 등판하였는데,[7] 나오자마자 양준혁에게 빈볼성 공을 던졌다. 다만 양준혁이 정명원보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별일 없이 잠잠했다. 그러자 삼성 벤치는 양준혁의 대주자로 정명원의 선배인 이종두를 기용했고 이어 정명원이 이승엽의 옆구리를 맞췄다.[8] 이에 1루에 있던 이종두는 위의 사진에서 보듯 정명원의 옆구리를 걷어찼고 나머지 삼성 선수들과 현대 선수들도 마운드로 모두 뛰어나와 5분간 40여 명 선수들이 주먹다짐을 벌였다. 주심이 정명원을 퇴장시켰지만 이승엽은 호흡곤란 증세로 한동안 그라운드에 쓰러져 있었다.

이후 6월 17일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빈볼 시비로 따로 화해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양팀의 백인천 감독과 김재박 감독, 양팀 주장인 이종두 김경기, 빈볼 시비의 당사자인 정명원 이승엽, 양준혁이 만나 앙금을 풀었다.

1.7. 1997년 부정배트 의혹

1997년 5월 3, 4, 5일 3일간 대구구장에서 삼성과 LG 3연전이 열렸는데… 문제는 점수였다. 3일간 삼성은 절정의 타격감을 보여주며 17개의 홈런을 포함해 49점을 내버렸다. 특히 5월 4일에는 LG를 27:5라는 어마어마한 스코어로 이겨버렸다. 이에 LG 포수 김동수는 우리 투수들의 공이 좋지는 않았지만 배트에 공이 맞는 소리가 다르다 주장했고, 천보성 당시 LG 감독이 삼성 타자들의 배트가 이상한 게 아니냐며 심판실을 찾아 항의하다 백인천 당시 삼성 감독과 부딪혀 논란이 커졌다. 이에 KBO는 현장에서 배트 두 자루를 수거해 목공소에 절단을 의뢰, 문제 없음을 확인했지만 뜬금없이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의 감독이었던 김성근이 KBO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여 사태는 더욱 커져 배트 제작사인 미즈노, MLB사무국, 브라운대학 등에서 검사를 받게 했고 6월 중순이 되어서 이상없음이 밝혀졌다. 물론 각 구단들은 동일한 배트를 구하기 바빴고 천보성 감독도 배트가 마음에 들었던지 "배트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했지 압축 배트라고 한 적은 없다. 8개 구단이 다 쓰면 모를까 삼성만 이 배트를 사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라며 배트를 수소문했다. 천보성 감독의 항의를 모두 징징거림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 당시 경기 전 심판이 타자들의 배트를 검사해 불도장을 찍게 하던 규정이 사문화되어 있던 상태였다. 이에 KBO는 규칙위원회를 소집해 KBO와 JBO(일본야구기구) 공인마크가 없는 배트는 사용할 수 없게 하여 기나긴 감정싸움은 끝난 게 아니라 6월 중순 당시 박종환 KBO 총재가 구단주들과 골프모임을 갖던 중 구본무 LG구단주와 이 사건으로 인해 부딪힘이 있었고, 1998 시즌 전 옷을 벗었다. 한편 2011년엔 기아 안치홍이 NPB 공인마크가 찍혀있던 배트를 써도 되냐 문의했다 안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 규정도 은근슬쩍 바뀌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상관도 없었던 쌍방울 당시 감독 김성근이 사주한 것으로 보인다는 설이 기사를 통해 제기되었다. 압축배트인지 확인해달라는 공문은 LG측이 아닌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나왔다. #

이런 의혹이 나올 정도 1997년 삼성의 타선은 미쳐있었지만 그럼에도 투수진이 빈약해서 우승에 다가가지 못했고, 결국 여러 투수를 영입하기 시작했다.

1.8. 2010년 한국시리즈 4차전 대구구장 내야 조명 소등 사건

SK가 삼성에 4연승 스윕으로 우승을 차지한 직후, SK 선수들이 세리머니를 하려는 순간 갑자기 내야 조명이 일제히 꺼져버렸다. 덕분에 우승 세리머니부터 김성근 감독의 헹가래 사진이 모두 제대로 나오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남의 집 잔치에 제대로 찬물을 끼얹은 비매너 행동. 이에 대해 KBO에서는 "불꽃놀이를 위해 조명을 껐다"라고 해명하였다. #

1.9. 2011년 대구구장 정전 사건


아 씨! 안해!
- 미상[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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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16일 두산 vs 삼성의 경기 도중 7시 25분 경에 정전이 되면서 모든 전등이 나가버렸다.

두산이 3:2로 앞서 있던 8회 초에 정수빈이 번트를 대고 1루로 향하던 순간 불이 꺼진 것. 사실 정수빈의 타구는 타이밍상 거의 내야안타성 타구였는데, 갑작스런 정전으로 판정이 불가능해지며 안타 하나를 잃게 되었다.

그와중에 태연하게 "여기는 불꺼진 대구구장입니다"라며 광고 전 멘트를 날리는 권성욱 캐스터는 덤.

이후 일부 조명탑과 전광판은 복구되었지만 좌익수 쪽 조명탑은 불이 켜지지 않아 결국 심판진의 합의 끝에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되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삼성의 새 홈구장 건설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 경기 덕에 시에서 10년 가까이[10] 외면했던 대구시가 다시 시민운동장 문제점을 보게 되었고, 새 야구장 축구장[11]이 지어질 명분을 제공하여 시설 개선이 되었다.

1.10. 2011년 대구구장 전광판 화재 사고

2011년 8월 12일, 삼성 라이온즈의 수호신이자 국가대표 소방관 오승환이 세계 최연소, 최단경기 200세이브 기록을 세우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구장에서는 오승환의 이러한 세계기록 달성을 축하하기 위해 전광판에 대형 현수막을 폈고 그 전광판 주위에서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그렇게 선수와 관중들 모두가 불꽃쇼를 관람하고 오승환이 본격적으로 SBS중계진과 인터뷰를 하는데 순간 카메라에 전광판 정면 좌측 윗 부분에서 미칠듯한 불꽃이 치솟았고 불은 걷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12] 인터뷰 도중에 오승환도 신경이 쓰였는지 계속 뒤를 돌아봤고, 결국 경기장안에 진짜 소방관들과 소방차가 출동해서 물을 뿌리기 시작, 화재는 겨우 진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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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출동한 소방차를 보고, 일부 팬들은 오승환의 200세이브 달성을 축하하기 위한 세리머니인 줄 알았다.

최훈카툰 #, 불암콩콩코믹스 #, 2011 한국프로야구만화 팬북 삼성 라이온즈 등등 수많은 카툰과 삼갤 등의 야구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오승환의 세이브와 함께 소방차 세이브 드립이 나왔다. #

2. 선수 관련

2.1. 2001년 갈베스 잠적 사건

2001년 8월 중순 외국인투수 발비노 갈베스가 모친의 병환으로 출국했다. 그러나 복귀 예정일이 되었는데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 갈베스는 '위독한 모친을 고국에서 미국으로 옮기는데 절차가 복잡해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얘기했지만 나중에는 '개인적으로 피로가 누적된 것도 있고 어깨도 안 좋아서 다시 몸 만드는데 시간이 걸린다' 등의 핑계만 대며 복귀를 미뤘다. 구단에서는 통역직원을 현지에도 보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갈베스의 복귀가 늦어지자 어깨 부상으로 치료차 늦는다는 구단측의 공식 발표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시즌 옵션을 두고 구단과 마찰이 있어 안 오는 것'이라는 그럴듯한 추측 외에 '같은 팀의 외국인 선수 카를로스 바에르가가 무서워서 안 오는 것이다'라는 이상한 추측도 돌았다.[13]

갈베스는 7번이나 소속팀 복귀를 미루다가 결국 김재하 당시 삼성 단장이 직접 찾아가서 데리고 왔다. 1달 반만의 복귀였다. #

2.2. 2002년 진갑용 도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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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003년 임창용 간통 사건

2002년 겨울 부인과 이혼한 임창용은 2003년 5월 4일 대구 북부경찰서에 간통 혐의로 피소되면서 부적절했던 사생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커다란 충격을 줬다. 이로 인해 삼성 라이온즈는 2003년 5월 9일 간통 피소와 이혼파동 등으로 구단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투수 임창용에 대해 벌금 380만원을 물렸다. 이 날 당사자의 합의 하에 고소가 취하되었던 점을 감안한 벌이라 삼성 구단은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조치는 2003년 4월 폭행사건에 휘말린 투수 김진우를 1군 엔트리에서 제외했던 기아의 엄중징계와 대조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결국 KBO에서는 5월 14일 상벌위원회를 열어 추가 징계를 논의했다.

그러나 정작 심판을 우롱했다는 이유로 현대 용병 마이크 프랭클린은 벌금 300만원과 5경기 정지 판정을 받은 반면 임창용의 경우 아무런 추가 징계 없이 단순히 추후 처벌 규정을 보완한다는 이야기만 한채 위원회는 마무리지었다.

관련기사
삼성 라이온즈 자체 징계
KBO 추가 징계 논의
상벌위원회 결과

2.4. 2008년 선수단 도박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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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010년 광주 KIA전 강봉규 퇴장 사건

2010년 3월 31일에 발생했다. #

2010 시즌 KBO는 경기시간을 단축시키는 방안으로 스트라이크존을 확대하여 공격적인 야구를 유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충분한 준비기간없이 중요한 규칙을 변경하다보니 심판과 선수들 모두 혼란에 빠져 오심과 그에 따른 항의가 속출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온라인 오프라인 상으로 큰 반향이 있었는데 온라인 상으로는 일부 야구팬들 사이에서 일부 심판이 기아 타이거즈에 유리한 편파 판정을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오프라인상으로는 이와 같은 사례가 속출하자 KBO는 2010 시즌 후반기 스트라이크존 확대를 철회하고 이전의 스트라이크존을 쓰기로 결정, 발표하지는 않고 각 구단들에 공문을 보냈다.

2.6. 2014년 정형식 음주운전 사건

2014년 8월 18일 음주운전이 적발되었다. 그리하여 다음달인 9월 4일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입건되었다. 음주운전이 적발됐을 당시에는 2군에 있었는데, 정형식은 이러한 사실을 숨겼고 9월 2일 1군에 올라왔다. 음주운전에 적발된 사실을 숨긴 것에 대한 괘씸죄가 적용돼 같은 날 임의탈퇴 조치되었다. 참고로 삼성 프런트는 2011년 신인 김 모 선수가 음주운전에 적발되어 바로 임의탈퇴를 시킨 전적이 있다.

2.7. 2015년 삼성 원정 도박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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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016년 안지만 도박사이트 개설 사건

2016년 7월 20일 안지만이 도박사이트 개설 연루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는 기사가 나와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미 안지만은 원정도박에 연루되어 물의를 빚고 징계도 어정쩡하게 넘겨 팬들의 여론이 안 좋은 상황에서 선수들의 승부조작 사건과 연타로 터져 만약 사실로 판명되면 야구판을 떠나야 할지 모른다.

21일 오후 해외 원정도박과 국내 인터넷 도박을 한 혐의(상습도박)로 안지만을 불구속 입건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그리고 삼성 구단은 안지만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

2.9. 2017년 최경철 도핑 사건

4월 6일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에서 최경철이 2월 스프링캠프에서 실시한 도핑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

2.10. 2019년 박한이 숙취운전 사건

2019년 5월 26일 대구 키움전에서 9회 2사 후 극적인 역전 끝내기 안타를 쳐낸 박한이가 당일 밤 회식에서 술을 마신 후 다음날 아침 자녀들을 학교에 태워주다 접촉사고를 내는 바람에 숙취운전 사실이 적발되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은퇴선언을 하였다. 결국 그 끝내기 안타가 박한이의 야구인생 끝내기 안타가 되었고 성대한 은퇴식과 코치/감독 영전, 영구결번의 꿈도 하루아침에 날아가버렸다.

2.11. 2020년 최충연 음주운전 사건

2020년 1월 29일 음주 적발사고가 터진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가운데 최충연이 알코올 농도 0.036인 상태로 운전하다 적발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구단에게 즉각 보고된 상황.

KBO 상벌위에서 50경기 출장 정지 및 제재금 300만원 봉사활동 80시간을 부과했고, 구단 자체 징계로 100경기 출장 정지 및 제재금 600만원이 추가되어 총 150경기 출장 정지에 제제금 900만원이 부과되어 2020 시즌 아웃이 확정되었다.

2.12. 2020년 윤성환 불법 도박 및 승부조작 사건

시즌이 끝난 뒤인 2020년 11월 16일 아침, 삼성 라이온즈 프랜차이즈 A가 거액의 빚을 지고 행방이 묘연하다는 단독기사가 나왔다.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되고 있다. 프렌차이즈 A는 30대이고 2015년 도박 사건 당시 연루되었던 선수라는 점, 그리고 행방이 묘연하다는 이야기가 나온 윤성환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지난 8월 21일 문학 SK전에서 승부조작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서 윤성환 본인이 해명에 나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선수 본인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금전적 문제가 법적 소송으로 이어진건 사실이지만 자신 또한 피해자이며 해당 이슈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과 더불어 잠적 의혹에 대해서는 "구단 관계자의 재계약 불가 통보에 서운함을 느끼고 원만한 해결을 위해 대표이사와의 면담을 요청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훗날 다시 연락이 왔지만 거부감을 느껴 연락을 피했다. 하지만 다른 관계자와는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고 밝혔다. 선수 본인은 결백을 호소했지만 결국 11월 16일 자유계약선수로 삼성라이온즈에서 방출됐다. 구단의 입장은 20시즌 후반 은퇴 경기와 은퇴식[14]을 제안하였으나 선수 본인의 현역 연장 의지가 강해 방출 예정이었지만 상기 사건으로 인해 급하게 방출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2015년에 도박 물의를 일으킨 사실이 있긴 하지만 무조건 결백하다는 소속팀 프랜차이즈 선수를 기사 하나로 사실상 강제은퇴 시켜버렸다. 어차피 은퇴 예정이기는 했지만 팀의 선수, 그것도 20년 가까이 한 팀 유니폼만을 입은 프랜차이즈 스타를 이런 식으로 방출시켰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사건의 전말의 어느 정도 밝혀진 이후 전부터 누적된 프런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대구 시내 곳곳에 삼성 프런트의 퇴진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그 후에는 선수측이나 구단측 모두 해당 이슈 관련 언급이 전무하여 팬들의 관심에서 어느정도 잊혀진 느낌이지만 여전히 삼갤에서는 해당 사건을 언급하며 윤성환을 그리워하는 팬들이 일부 보인다. 초기에는 비난의 화살이 프런트에 맞춰졌지만 장강훈이라는 기자[15]의 만행이 밝혀진 이후에는 이 사건만큼은 프런트보다 해당 기자가 더 욕을 먹고 있다.

하지만, 유명 야구 유투브인 야구부장의 영상에 따르면, 삼성 구단에서는 윤성환이 해당 채무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한다면 은퇴식을 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윤성환 측과 어느 정도 긍정적인 이야기가 오갔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해가 지난 2021년 6월 2일, 경찰이 윤성환에게 승부조작과 불법도박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였다. #

2.13. 2020년 신동수 SNS 막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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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2021년 대구 kt전 마이크 몽고메리 로진백 투척 난동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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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2022년 대전 한화전 데이비드 뷰캐넌 불펜카 장난 논란

2022년 6월 26일,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에서 열린 한화전에서 홈구단 한화의 불펜카에 물과 얼음을 뿌리는 기행을 벌였는데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뷰캐넌 측은 한화 불펜카 운전기사와 안면이 있어 운전기사를 즐겁게 하기 위해 저런 장난을 친 것이고 그때 당시 기분 나쁘지 않았고 즐거웠다는 운전기사의 메시지를 가져와 해명했다. # 삼성 구단 관계자는 뷰캐넌에게 다른 팀을 자극할 수 있는 행동을 하지 마라고 주의했고 뷰캐넌도 이를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

3. 팬 관련

3.1. 1982년 대구 OB전 관중 난동 사건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당시 재능있는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여 강력한 선수층을 구축한 삼성은 전기리그 우승을 놓고 OB와 치열한 순위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전기리그 순위 싸움의 열기가 한창 고조되던 5월 22일과 23일 양 팀은 대구구장에서 맞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원정팀인 OB가 2연전을 모두 승리하며 전기리그 우승에 절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된다. 이미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빈 술병과 빈깡통을 운동장에 투척하던 삼성 팬들은 리그 우승을 놓고 벌어진 홈 2연전이 연패로 끝나며 우승 실패가 확실시되자 흥분하여 소주병 등 빈병과 빈깡통을 운동장에 투척하며 난동을 벌였다. 이 때 관중들이 던진 빈병 중 하나가 정통으로 김영덕 OB 감독의 머리에 맞아 부상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관중들의 소요로 인해 이긴 OB 선수단이나 진 삼성 선수단 모두 경기장을 빠져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전경이 출동하여 관중을 통제하고 선수단을 안전 귀가시켰다. 참고로 프로야구가 출범한 후 야구장에 전경이 출동한 것은 이것이 최초의 일이었다. #

경기가 끝나고도 삼성 팬들은 분을 삭이지 못했고 다음날 날이 밝자 "구단을 해체하라"라는 삼성 팬들의 항의 전화로 삼성 구단은 업무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3.2. 1982년 대구 OB전 관중 난동 사건

1982년 전기리그는 결국 OB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고, 삼성은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이어 후기리그가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은 8월 12일 대구구장에서 삼성과 OB의 경기가 열렸다. 전날 경기에서 롯데에 패하여 심기 불편했던 삼성 관중들은 이날도 경기가 기울어 7대4로 삼성의 패색이 짙어진 채 9회말 2아웃 상황에 이르자 흥분하여 돌과 병을 경기장으로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이에 경기가 중단되었고, 자제해달라는 안내방송이 나왔지만 관중들은 계속 병을 던졌다.

주심은 관중이 경기 속행을 방해하는 행동을 할 경우 홈팀에게 패배를 선언할 수 있도록 한 규정에 근거하여 마지막 한 타석 남은 경기를 속행시켜 삼성 타자에게 고의 삼진을 선언하고 경기를 종료하고 말았다. 이에 삼성 관중들은 더욱 흥분했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관중들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대구구장 시설과 사무실 기물을 파괴했으며, OB 구단 버스로 달려가 유리창을 부수는 등 구단 버스를 파손했다.

OB 구단은 조범현 등 세 명의 선수가 부상을 당했고, OB 구단 버스가 파괴되어 기차를 이용하여 대전으로 이동해야 했다.

삼성 선수단은 관중들이 "대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라고 흥분하며 난동을 일으킨 탓에 2시간여나 운동장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OB 구단은 KBO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남은 대구구장에서의 경기를 거부하겠다는 강경입장를 밝혔다.

KBO는 대구구장 관중 난동 및 9회말 2사후 고의삼진을 준 심판의 경기운영 미숙 문제를 놓고 대책회의를 가지기로 했다. #

3.3. 1984년 대구 OB전 오물 투척 사건

1984년 5월 14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OB의 경기에서 OB 구천서가 대구구장에서 관중이 던진 소주병 빈병에 머리를 얻어맞아 부상을 당했다. #

0-2로 뒤지고 있던 OB가 6회 말 1사 2, 3루 때 김경문의 3루 견제구를 3루수 양세종이 주자 천보성의 머리에 태그, 시비가 일어난 것이 빌미가 됐다. OB의 7회 초 공격을 앞두고 덕아웃 앞에 선수들이 모여 있는 사이, 흥분한 관중들이 각종 오물을 투척했고, 결국 구천서가 소주병에 맞았다. 구천서는 유리 파편에 코 부위가 찢기고 이마가 부어오르는 부상을 당했다.

이에 김성근 OB 감독은 심판에게 ‘몰수게임’을 요구하며 경기 속행 거부했다. 그 바람에 경기가 1시간 24분이나 중단됐다. 사고 보고를 받은 서종철 KBO 총재가 “OB가 경기속행에 불응하면 게임을 몰수하고, 관중 소란이 또 일어나면 삼성에 몰수게임 패를 선언하라”라고 지시하여 사태를 겨우 수습했다.

3.4. 1986년 한국시리즈 3차전 해태 버스 방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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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1986년 한국시리즈 4차전 관중 난동 사건

해태 타이거즈 버스 방화 사건은 세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정치계와 언론에서는 다음날 예정된 대구에서의 한국시리즈 4차전을 취소하고 서울에서 치르라는 주장이 거셌다. 그러나 4차전을 서울에서 치를 경우 향후 프로야구 존립에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한 KBO 수뇌부는 대구시와 대구 경찰당국의 협조를 구해 4차전도 대구에서 강행했다.

4차전은 무려 500여명의 전경이 동원된 삼엄한 경비 속에서 진행되었다. 경찰은 관중들의 소지품을 엄격하게 검사했다. 관중석 곳곳에는 사복 경찰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삼엄한 경비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또 패하자 성난 관중들이 또다시 난동을 일으켰다. 1만2천명의 입장 관객 중에서 약 3,000여명의 관중들은 난동에 참여했다. 경기가 끝나자 관중들은 양팀 선수단에게 오물을 투척했다. 양팀 선수단은 덕아웃에서 추위에 떨며 11시반까지 갇혀 있어야만 했다.

500명의 전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 경기를 취소하라"라고 외치는 관중들의 난동이 30여분째 지속되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여 강제 해산에 나섰다. 그러고도 한시간 가까이 더 지속되고야 난동 관중들이 완전히 해산되었다.

그러나 관중들의 상당수는 최루탄은 피해 태평로로 나왔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돌과 병을 던지며 경찰이 최루탄을 던진 것에 대해 항의했다.

경찰은 현장에서 난동을 부린 5명을 연행하여 조사했다. #

3.6. 1988년 플레이오프 3차전 관중 난동 사건

1988년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이 빙그레에 3연패로 스윕당하며 무기력하게 탈락하자 흥분한 대구 관중들이 난동을 일으켰다.

이날 패배로 삼성은 해태 버스 방화 사건으로 유명한 1986년 한국시리즈 3차전부터 3연패, 1987년 한국시리즈 스윕패(4연패)에 이어 1988년 플레이오프에서도 스윕패(3연패)를 당하며 포스트시즌 10연패라는 불명예 기록을 수립했다. 이로 인해 삼성이 큰 경기에 약하다는 이미지를 더욱 고착화되었다.

경기가 기운 9회말 2아웃 후 관중석에서 대형 플라스틱 휴지통 10여개를 비롯해 각종 유리병, 깡통, 음료수 박스 등의 오물이 장내로 투척되어 그라운드가 난장판이 되었다. 경기 종료 후 흥분한 관중들은 대구시민운동장 정문 앞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호돌이 아치를 파손하여 쓰러뜨리기 직전의 상태로 만드는 등 폭력사태를 저질렀다. 결국 경찰이 사과탄을 발사하고 나서야 뿔뿔이 흩어졌다. #

3.7. 1989년 대구 빙그레전 관중 난동 사건

1989년 7월 20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빙그레의 경기에서 삼성이 7대3으로 패하자 계속된 연패에 분노한 삼성 홈 관중들이 최근의 부진에 거세게 항의하며 그라운드에 난입하는 등 난동을 일으켰다. #

3.8. 1990년 대구 해태전 관중 난동 사건

1990년 4월 17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해태의 경기에서 하오 9시 30분께 삼성이 패하자 흥분한 관중들이 난동을 부려 대구구장 주변에 세워둔 40여대의 차량이 파손됐고 야구장 주변 공중전화박스 유리창 5장이 깨졌다. #

3.9. 1990년 대구 OB전 관중 난동 사건

1990년 4월 27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OB와의 경기에서 삼성이 두산에게 역전패를 당하자 1,3루 관중석에 있던 2천여명의 극렬팬들이 "삼성 구단은 반성하라"는 등의 구호와 욕설을 하며 대형 쓰레기통 20여개와 깡통 등 2백여개를 그라운드 내에 마구 던져 20여분간 소란을 피웠다. #

3.10. 1990년 대구 롯데전 김종석 새총 저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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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5월 16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롯데의 경기에서 삼성의 한 관중이 롯데 투수 김종석의 이마를 새총으로 저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롯데가 6-5로 앞선 상황에서 삼성의 마지막 공격인 9회말 무사 1루 상황에서 롯데 투수 김종석이 삼성 이현택을 상대로 볼카운트 2-2에서 공을 던지려는 순간 어디선가 10원짜리 동전이 날아와 김종석의 이마를 강타했다. 김종석은 바닥에 주저앉았고 롯데 덕아웃에서 곽기수 트레이너가 황급하게 달려 나가 김종석의 이마부위를 살폈다. 김종석이 넘어진 자리 부근에서 10원짜리 동전이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경기가 중단되었고 결국 롯데 김진영 감독은 안창완으로 투수를 교체했다. #

3.11. 1990년 대구 해태전 이만수 깡통 투척 사건

1990년 5월 29일 대구구장, 삼성이 해태에 연이어 패해 대구 관중들의 심기가 몹시 안 좋았다. 특히 이 날 경기에서도 일방적으로 끌려다니자 관중들은 해태가 득점할 때마다 깡통을 던지며 야유를 했다. 그러던 중 이만수가 병살타를 치자 분노한 한 대구 관중이 이만수가 돌아서는데 빈 깡통을 던져 이만수의 등에 맞췄다. 분노한 이만수가 그 빈 깡통을 도로 관중석으로 던지자,[16] 흥분한 관중들이 난동이 일어났다. 관중들은 액체가 가득한 술병 등 각종 이물질을 그라운드에 투척했는데, 그 중에는 경기장에 비치된 대형 쓰레기통 20여 개가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이만수의 증언에 따르면 자기가 맥주 캔을 도로 던지자 관중들이 자기들 주변의 모든 것들을 다 집어던졌다고... 또 관중들은 경기장 10여군데에서 쓰레기를 모아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경기가 20여분 중단되었다. #

경기가 끝난 후에 정동진 감독이 이만수와 함께 그라운드로 나와 관중들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난 뒤에도 300여 명은 스탠드에 남아 관중석 의자 700여 석을 파손해 불태우면서 오물을 투척했다. 난동이 계속되자 경찰병력 1백여 명이 진입, 1.3루 관중석을 향해 최루탄 20여발을 쏴서 강제 해산시켰다.

다음날 이만수는 관중의 난동을 일으킨 행동에 책임을 물어 구단 차원에서 무기한 출전 정지[17]와 벌금 100만원의 중징계를 받았다.

이만수는 후에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당시 얘기를 회상하며 당시 그 사건으로 공개사과를 하고 톱 뉴스에도 나온 사연을 전하며 "사건 이후, 사람들이 보는 눈초리가 다르다. 무식한 놈으로 보더라. 또 그날은 큰 아이가 담임 선생님과 함께 구경 온 날이기도 했다. 그 날 아이가 날 보지도 않더라. 상처를 준 것이다. 후회한다"라고 고백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체육부는 김용균(金容鈞) 차관 주재로 프로종목관계자를 불러 대책회의를 열어 '경기장폭력 대책'을 마련할 것을 엄중 지시했고, 관중 난동 등 폭력 사태에 대해 '강력대처방침'을 밝혔다.

3.12. 1992년 대구 빙그레전 관중 난동 사건

1992년 5월 14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빙그레의 더블헤더에서 홈팀 삼성이 두 경기 모두 역전패하자, 흥분한 1000여명의 관중들이 대형휴지통 10여개를 그라운드에 투척하고 40여개의 의자를 부수고 관중석에 불을 지르는 난동을 부렸다. #

3.13. 1996년 대구 해태전 관중 난동 사건

1996년 4월 16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해태의 경기에서 해태 이건열의 타구에 대해 심판이 홈런 판정을 내리자 삼성 백인천 감독이 펜스를 맞고 운동장 안으로 들어왔다고 항의했다. 이에 관중들도 깡통과 빈병 등을 그라운드로 투척하며 난동을 벌였다. 이에 경기가 10여분간 중단되었다. #

3.14. 1998년 대구 현대전 관중 난동 사건

1998년 8월 26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현대의 시즌 14차전에서 현대가 19-4로 무려 15점이나 앞서 있던 8회 말에 4번째 투수 안병원이 삼성 타자 이승엽을 고의 볼넷으로 거르자 대구 관중들이 물병이나 깡통, 휴지 뭉치 따위를 가리지 않고 그라운드로 마구 집어던졌다. #

3.15. 1998년 플레이오프 1차전 관중 난동 사건

1998년 10월 15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LG의 1998년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13,000석의 대구구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삼성이 3대 5로 뒤진 9회초에 2점 홈런을 맞아 패색이 짙어지자 물병과 쓰레기통을 던지는 등 난동을 피워 경기가 30여분간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

3.16.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관중 난동 사건

1999년 10월 20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롯데의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삼성이 2대0으로 앞서나가고 있던 6회초 롯데 펠릭스 호세가 솔로 홈런을 치자 흥분한 삼성 관중들이 컵라면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물질들을 그라운드로 마구 투척하기 시작했다. 이중 계란이 날아와 호세의 사타구니(...)를 맞추었고 라면용기에 담겨있던 국물이 호세의 머리에 맞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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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에게 배트를 투척하는 펠릭스 호세

그래도 롯데 측 코칭스태프가 말려서 호세가 참고 들어가려는데, 관중들이 상황파악을 못하고 거기에다가 또 쓰레기를 투척했다. 이에 제대로 열받은 호세는 야구 방망이를 삼성 관중석으로 집어던지게 된다. 관중 한명이 호세의 방망이에 손목을 다치게 됐고 이후 관중 난동은 겉잡을 수 없이 과열되었다. 호세의 방망이 투척 후 약 20여 분 동안 각종 이물질 투척이 계속되며 그라운드 주변은 온통 쓰레기와 오물로 뒤덮였다.

호세의 퇴장 이후 1,000여 명의 롯데 팬들도 자극을 받아 물병과 쓰레기 등을 날리며 대응했고, 이어 관중들간의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관중들의 싸움이 확대되려던 찰라 경찰 1개 중대가 급히 스탠드에 추가 투입되면서 가까스로 난투극을 방지했다.

당시 대구구장에는 경기 과열을 우려하여 경찰 병력 2개 중대가 배치돼 있었지만 성난 관중들을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경기가 중단된 상황에서 6명의 심판원들이 긴급 회동, 6심 합의 끝에 임채섭 주심은 오후 8시 8분 호세에게 퇴장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주장 박정태를 비롯한 롯데 선수단은 “원인 제공을 한 관중들이나 관리책임이 있는 홈팀 삼성에는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고 우리 선수만 퇴장시킨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라며 “선수들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경기를 할 수 없다”라고 장비를 챙겨서 경기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자 1루 쪽 관중석에서는 퇴장하는 롯데 선수들을 향해서 다시 쓰레기를 마구 던져대는 추태를 부렸다.

이에 김명성 당시 롯데 감독은 "경기를 포기하는 것은 프로야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게 된다"라면서 "다음에 또 한 번 관중 폭력사태가 발생하면 심판에게 몰수게임을 강력하게 요청하겠다"라며 선수들을 설득했고 그제서야 롯데 선수들은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왔다. 롯데 선수들이 다시 돌아오자 심판진은 관중 난동이 지속되면 삼성의 몰수패를 선언하겠다고 공식 발표했고 그제서야 1시간 여만에 관중들의 난동은 진정되고 다시 경기가 재개되었다. 호세는 퇴장당했지만 이후 롯데는 연장 11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삼성을 6대5로 쓰러트리고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한다.[18]

동점 접전과 연장승부가 진행될 때까지는 잠깐 참고 봤지만 경기에서 삼성이 패하자 팬들의 폭력 사태는 다시 시작되어 그치지 않았다. 10시 35분경 경기가 끝나자 대구 관중 1천 여명이 1시간 30여 분동안 경기장 안팎에 남아 퇴장하지 않고 난동을 벌였다. #

한국야구위원회(KBO)는 20일 대구구장에서 발생한 관중 폭력사태와 관련해 21일 오후 4시 야구회관에서 상벌위원회를 개최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안해 중징계가 내려졌다. 관중석으로 방망이를 투척한 롯데 외국인 선수 펠릭스 호세에게 10경기 출장금지와 벌금 300만원을 부과했다. 또 선수들을 이끌고 경기를 거부하려 했던 롯데 주장 박정태에게는 벌금 50만원이 부과되었으며, 관중난동을 예방하지 못한 삼성 라이온즈 구단에게도 벌금 100만원을 부과했다. #

호세의 방망이 투척이 과격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쓰레기를 던지고 욕설에 온갖 폭력을 행사했던 관중들은 그 문제에 대해 전혀 할말이 없다.

한편 그해 연말 시상식에서 정규시즌 MVP를 차지한 이승엽은 수상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플레이오프 7차전 때 대구 관중의 폭력 사태와 관련해 "대구시민으로서 죄송하게 생각하며, 팬들도 우리 야구가 선진국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사과 및 당부의 말을 전했다. #

3.17. 2003년 대구 SK전 관중 난동 사건

2003년 9월 28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SK의 경기에서 9회말 당시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노리던 이승엽이 볼넷으로 나가자 관중들이 경기장으로 물병을 던지는 등 난동을 부려 경기가 10여분 동안 중단됐다. # 이날 대구 관중들의 난동이 예상되어 경찰 병력 4개 중대가 배치된 상황이었다. #

3.18. 2010년 플레이오프 5차전 관중 난입 사건

삼성과 두산의 2010년 플레이오프 5차전이 끝나고 관중이 그라운드에 난입. #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융화되는 모습이 인상적, 사진에는 안 보이지만 한 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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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입 후 선수들과 포옹하고 승리를 자축하는 선동열 감독과 쿨하게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사실 뭐 딱히 행패를 부린 건 아니고 그냥 경기장에 뜬금없이 난입해서 선수들과 기쁨을 같이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삼리건 아저씨에게 쿨하게 미소를 보인 선동열은 쿨동열이라는 별명을 이 날 한정으로 받았다.

선동열은 갑자기 빨간 모자가 나타나서 당황했었다고 그 때를 회상했다.

대구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구나라고 놀란 사람들이 많았지만 원래 대구아재들은 마산아재, 꼴리건들과도 어깨를 겨루던 사람들이다.

3.19. 2011년 대구 넥센전 관중 난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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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2011년 6월 24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넥센의 경기 도중 어떤 삼리건이 좌익수 수비를 보던 최형우의 앞으로 나왔다. 그 삼리건은 무릎을 꿇고 공을 달라고 했다. 그러다가 안전요원에 의해 끌려나갔다.

3.20. 2015년 대구 LG전 관중 난입 사건

2015년 7월 4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LG의 경기 도중 이지영이 2점 홈런을 쳤을 때, 박석민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은 한 삼리건이 이지영이 친 홈런볼을 들고 홈까지 뛰어와 홈플레이트에 슬라이딩을 하고 안전요원에 의해 끌려나갔다.이지영이 친 홈런볼이 관중석을 맞고 그라운드로 들어갔는데 상대팀에서 수비를 보던 좌익수 박용택이 홈런볼을 그냥 두어 관중이 주우러 간 것으로 보인다. 박석민의 유니폼을 입고 있다. # #

3.21. 2016년 포항 한화전 관중 난입 사건

2016년 5월 19일, 포항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한화의 경기 7회말 삼성 공격에서 취객으로 보이는 남성 관중이 외야에 난입했다. 난입한 관중은 외야에서 현란한 춤사위를 선보이는 등 소동을 벌이다가 보안요원에 의해 퇴장되었다. #

한편 중계를 맡았던 KBSN 스포츠는 관중 난입부터 퇴장까지의 모습을 상세히 중계하는 것도 모자라 현란한 춤사위를 느린 그림으로 보여주는 등 또다른 관중 난입을 장려하는 듯한 스탠스를 취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20]

3.22. 2016년 대구 kt전 최형우 타구 판정 번복 사건

2016년 6월 25일,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열린 삼성과 kt의 경기 3회말 삼성 공격에서 2사 1루에서 최형우의 타구가 펜스까지 멀리 나가며 1타점 3루타를 때려났다. 그런데 이대형이 심판에게 사인을 보내 비디오로 다시 확인해보니 외야의 한 관중이 글러브로 공을 건드렸다가 그라운드로 떨어진 정황이 포착되었다. 1타점 3루타는 정정되어 인정 2루타가 되었고 공을 잡으려던 관중은 즉시 퇴장당했다. #

3.23. 2017년 대구 LG전 이천웅 욕설 퇴장 사건

2017년 7월 21일, 라팍에서 열린 삼성과 LG의 경기 11회말에 외야에 있던 한 관중이 외야 수비를 보고 있던 LG 이천웅에게 심한 욕설과 폭언[21]을 하여 퇴장당했다. # 이 관중은 무려 1회부터 11회말에 퇴장당할 때까지 욕설과 폭언을 쏟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3.24. 2019년 창원 NC전 원정 응원 논란

2019년 9월 15일, 엔팍에서 열린 삼성과 NC의 경기에서 7회초 원정을 간 삼성팬들이 응원 도중 NC 측 경호원에게 응원을 하지말라며 제지를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경호원들은 삼성팬들이 통로를 막는다, 계단에서 응원한다면서 제지를 했고 삼성팬들은 바로 강하게 반발해 말싸움으로까지 번졌다. 나중에는 NC 구단 직원까지 와서 제지하는 상황에 대해 설명한 이후 "올해가 개장 첫 해라 서투르다며 양해를 부탁드린다, 피드백을 통해 바꿔 나가겠다" 등의 얘기를 하면서 마무리가 됐다고 한다.

당초 거기에 있던 팬들은 황당하다는 액션을 취했고 나중에는 삼성팬들과 NC팬들의 댓글 전쟁으로 까지 번졌으나 생각보다는 빠르게 잦아들었다. 차후에 확인한 결과 사사방 회원 한 명이 들고간 미니 확성기가 문제였던 것. 앰프나 미니 확성기, 부부젤라 등은 홈 구단의 협의가 있지 않는 한 KBO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반입 금지품목이다. 사사방에서도 이에 대해 응원도구 공문을 넣었으나 NC 구단이 공식응원단만 가능하다고 말하며 거절당했는데 그걸 무시하고 그대로 들고 왔다가 이 사단이 난 것.[22]사실 경호원이 최초에 제재할 때 홈 경기니까 제재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가 나중에 NC 측 직원이 와서 확성기가 문제였다고 했고 결국 일시적으로 응원을 허가해줬다. 그 팬들이 차후에 NC 구단에 연락했고 경호원 측도 NC 구단을 통해 사과했다고 한다. # 또한 이 회원이 이 사건을 언급할 때 확성기 얘기는 쏙 빼둔 것이 두 팀 팬들간의 파이어로 번진 것.

4. 구단 관련

4.1. 1983년 구단과 서영무 감독의 갈등

1982년 창단 첫해 막강한 전력에도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OB에 패하여 준우승에 그치자, 구단에서는 1982년 11월에는 미국 연수를 빌미로 임신근 코치를 해임하고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수비코치를 하고 있던 재일교포 이충남조감독이란 직책으로 영입했다. 일개 코치직으로 두기엔 워낙 유명하고 유능했기에 조감독이란 직책을 만들어 서영무 감독을 보좌하고자 함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서영무 감독을 견제하면서 언젠가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속셈이었다.

서영무 감독도 이에 맞서 이충남이 한큐에 있던 시절 팀 선배였던 김호중 서울고 감독을 투수코치로 영입했다. 어차피 이충남이 투수코치가 아니기에 투수코치가 필요하다는 게 그 명목.

시즌 초반 팀이 부진하자 구단에서 이런저런 간섭을 하면서 참다 못한 김호중이 그에 대해 일갈해, 구단에서는 성적 부진의 책임을 물어 시즌 시작 15일 만에 김호중 해임시켰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는 서영무 감독을 총감독이란 직책으로 승진시켜 그의 감독 권한을 뺏고, 이충남을 감독대행으로 승진시켜 실질적인 감독으로 기용했다.

4.2. 1987년 김성길 편법 영입 논란

일본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활동하고 있던 재일교포 김성길을 영입하려고 1986년 국내 몇몇 팀이 영입 경쟁을 벌였고 결국 1987 시즌 개막을 앞두고 삼성이 김성길을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당시 KBO 규정에 따르면 당해 2월 28일을 넘기면 군제대 선수와 트레이드된 선수 외에는 추가등록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규정대로라면 김성길은 1987 시즌은 선수로 뛸 수 없었고, 1988 시즌에야 선수로 등록될 수 있었다. 그런데 삼성에서는 김성길을 트레이드한 것으로 등록했고 KBO가 이것을 승인하자 논란이 발생했다.

당시 김성길 영입 경쟁에 나섰다가 실패한 해태 타이거즈 등이 이에 항의했다. 김성길이 한큐에서 임의탈퇴 처리된 상태인데다가 선수계약 양도협정서도 없기에 전혀 트레이드가 아니며, 따라서 김성길은 1987 시즌에 선수등록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KBO는 관례상 선수계약동의서를 양도협정서로 간주할 수 있으며, 임의탈퇴 선수는 한국에는 규정이 없지만, 일본 규정에 따르면 해당 구단 소속 선수로 보기에 김성길 트레이드에는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4.3. 1993년 양준혁 편법 입단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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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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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1995년 최창양 편법 입단 논란

1995년 12월 삼성이 최창양을 편법적으로 영입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마산고와 중앙대 출신의 최창양은 위력적인 빠른 공으로 고교시절과 대학시절 큰 주목을 받았고 대학 졸업 후 연고 구단인 롯데 자이언츠에 지명될 것이 유력시되던 선수였다. 그런데 최창양은 중앙대 시절인 1994년말 돌연 미국 진출을 선언하고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헐값에 계약하고 미국에 진출했다.

최창양은 국내에서는 유망주였지만 애초에 미국에 진출할 만큼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 필라델피아와의 계약금은 불과 4만 달러(3167만원[23])로 120만 달러를 받은 박찬호의 1/30밖에 안되었고, 1년 후 삼성에서 받은 계약금 5억원의 1/15도 안되는 헐값이었다. 최창양은 1년간의 마이너리그 싱글A 시절을 거쳐 1년만인 1995년 12월 국내로 유턴하여 삼성 라이온즈에 신인으로는 역대 최고액인 계약금 5억과 연봉 4천만원을 받으며 입단했다. 이와 별도로 삼성은 필라델피아에 1억 6천만원의 현금 트레이드 비를 지불했다.

그러자 삼성이 타구단 연고지 출신의 유망주를 가로채기 위해 미국에 진출시킨 후 복귀시켜 영입한 것이라는 의혹이 일며 파문이 일었다. 당시 스포츠신문과 주간지 등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포도하며 큰 파장이 일었다.

논란이 발생한 후 최창양의 연고 구단인 롯데 자이언츠가 법정 대응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런 사태를 생각지도 못했었기 때문에 관련된 규정 자체가 아예 KBO에 없었다. 때문에 최창양의 편법적인 영입을 제재할 수단은 전무했다. 결국 최창양 사태 직후 미지명된 해외진출 선수는 국내 복귀시 신인 지명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KBO 규정이 바뀌게 되었다. 소급 적용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사자인 최창양은 이 규정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24]

삼성은 최창양을 영입하는데만 현금 트레이드비를 포함해 총 7억 원을 들였을 뿐만 아니라, 입단 당시 이같은 편법 논란에 휩싸이면서 삼성 구단의 이미지까지 실추시키는 홍역을 치렀지만, 최창양은 구속이 빠르지만 제구가 안되는 투수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하며 삼성 스카우트의 흑역사로 남고 말았다.

4.5. 장효조 트레이드 및 홀대 논란

장효조는 1980년대 삼성 라이온즈의 간판 타자로, 삼성 라이온즈 선수 가운데 가장 최초로 레전드라 불릴만한 선수였다. 하지만 그는 공교롭게도 한국시리즈 때마다 자주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이때문에 김시진과 더불어 삼성이 우승을 하지 못하는 원흉으로 꼽혔다. 게다가 장효조는 매시즌 연봉 협상 때마다 삼성 구단과 상당한 마찰을 일으켰다. 1988년 선수협 파동까지 일자 삼성은 팀의 레전드인 장효조와 김시진을 롯데의 최동원, 김용철과 맞트레이드한다.

장효조가 은퇴한 후에도 팀 레전드인 장효조에 대한 삼성 구단의 홀대와 외면은 이어졌다. 장효조는 삼성 구단에서 부름을 받지 못했고, 롯데 등에서 계속 코치 생활을 했다. 2000년 장효조가 삼성의 타격코치가 되었으나, 이는 장효조와 절친했던 김용희 감독이 장효조를 타격코치로 써야겠다고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김용희는 김응용을 영입하기 전 땜빵 감독이었기 때문에 장효조도 1년 쓰다가 버릴 계획으로 영입한 것에 불과했다. 실제로 2000 시즌 후 김용희와 장효조는 같이 경질되었고, 삼성 구단은 김응용 사단으로 재편된다. 이후 삼성팬들은 팀 최초의 레전드인 장효조를 코칭스태프로 기용해달라고 끊임없이 구단에 목소리를 높였지만 구단은 10년간이나 그를 다시 코치로 기용하지 않으면서 이를 외면했다. 2000년대 전반 장효조는 부산 지역 신문에 야구해설위원으로 위촉된 것으로 겨우 야구와의 끈을 이어갈 수 있었다.

2004년 부산일보의 장효조 인터뷰가 나가며 당시 사실상 쉬고 있는 장효조의 근황이 알려진 후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삼성은 2005년 장효조를 스카우트로 영입했다. 그러나 삼성은 끝내 그를 코치로 기용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 삼성은 언론 기자들에게 장효조가 워낙 성격이 모난 사람이기 때문에 코치로는 부적합하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스카우트 시절 장효조는 삼성 경기가 있을 때 마다 기자실에서 기자들에게 경기 해설을 하며 현장 복귀 의지를 나타내곤 했다. 심지어 장효조는 2008년경 한 신문 인터뷰에서 자신의 성격이 모나다는 구단의 지적을 의식해서인지, 최근 성격을 고치려고 많이 노력 중이라면서 다시 코칭 스태프로 기용될 실낫같은 가능성에 대한 의지를 엿보이기도 했다... 이 당시 스카우트의 처우는 대단히 열악했고, 훗날 장효조는 스카우트 시절 너무 고생을 해서 병을 얻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야구계의 문화가 각 팀의 레전드를 대우해주는 분위기로 흘러가자 삼성은 압박을 받았다. 삼성은 장효조 뿐만 아니라 다른 팀레전드인 이만수, 김시진과도 껄끄로운 관계였다. 당시 삼성은 팀의 레전드로 류중일을 밀어주고 있었으나, 커리어가 커리어인지라 한계가 있었다. 최초의 팀 레전드인 장효조에 대한 처우에 대한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받던 삼성은 결국 2010년에야 장효조를 2군 코치로 기용했다. 그러나 불과 1년여 후에 장효조는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4.6. 이만수 은퇴 강요 및 코치 계약 파기 논란

이만수는 기량이 쇠퇴하지 않는 한 40살까지 뛰고 싶다고 공언해 왔다. 하지만 이만수의 기량은 이미 1993년 이후부터 쇠퇴하고 있었고[25] 삼성 구단은 이만수가 37살 때인 1995년, 미국 코치연수 보장을 조건으로 은퇴를 종용했다. 하지만 이만수는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하며 구단의 은퇴 및 코치연수 제안을 거절하고 다음해에도 선수로 뛰었다. 이때부터 삼성 구단은 이만수를 눈엣가시로 여기기 시작한다.

1995 시즌 이후 삼성은 이만수를 후보선수로 앉혀놓기만 하는 등 은퇴를 압박했다. 1996 시즌이 끝나고 삼성은 이만수에게 플레잉코치를 제의했지만 역시 이만수는 거절했다. 결국 1997 시즌 종료 후 삼성 구단은 사전동의없이 이만수를 방출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야구선수를 삼성에서는 영구결번은 커녕, 은퇴식 한 번 없이 자유계약선수로 방출한다는 전화 한통으로 결별했다.

삼성에서 방출당한 이만수는 타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려는 시도 전혀 없이 곧바로 은퇴를 결심했다. 당시 PC 통신 커뮤니티에 이만수 본인이 직접 자신이 방출 및 은퇴 결심, 그리고 유학을 가겠다는 계획을 알리는 글을 올리기도 했는데, 이미 삼성에서 방출당한 후였지만 '삼성 라이온즈 이만수 올림'이라고 쓰며 글을 마무리했다.

은퇴 후 이만수는 당시 관례와 달리 삼성으로부터 일체의 유학 경비를 지원받지 못하고, 가족들을 한국에 둔 채 혼자서 자비로 미국 코치연수를 떠났다. 1998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산하 마이너리그 싱글A 팀에서 코치 연수를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선수들과 코칭스태프가 조촐한 은퇴식을 해주었다고 한다.

이만수는 무릎팍 도사에 나와 당시를 회고하면서 “95년부터 벤치 생활을 하면서 젊은 세대와의 교체를 위해 구단에서 은퇴를 종용했다. 좋은 조건으로 미국에 공부하러 가라는 조건도 제시했다. 하지만 나는 나이 30만 넘으면 노장이 되고, 35이면 퇴물취급 받는 국내 야구계 풍토를 바꾸고 싶었다. 40이 되어도 야구를 할 수 있는 풍토로 바꾸기 위해 계속 (선수 생활을) 하다보니 구단과 마찰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벤치 생활을 하다 1997년 은퇴를 했다. 하지만 구단과 사전합의가 안 된 것이었다. 한 마디로 짤린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방출, 좋게 말하면 명예퇴직이다”라고 밝혔다. 이만수는“너무 충격이 컸고 준비를 못한 상태였다. 한국에 있는 것이 창피하더라. 팬들 보기도 부끄럽고 16년간 한 팀이었던 구단에 서운함 감정도 있었다. 힘들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정상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진 기분을 견딜 수 없었고, 가족들도 상처를 받았다. 나도 오랜기간 구단생활을 했던 만큼 가족들을 불러 멋지게 은퇴식을 하고 싶었는데…. 결국 도망가다시피 미국을 갔다. 그런데 (미국 생활이) 죽기보다 싫더라”라고 말했다.

그나마 삼성은 팀 레전드인 이만수를 기리는 의미로 훗날 그의 등번호 22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지만, 이마저도 그가 은퇴한 지 6년이나 지난 2003년 6월에야 이뤄졌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2003년 시즌 종료 후, 삼성은 당시 시카고 화이트삭스 불펜코치였던 이만수에게 코치직을 제안하면서 국내 복귀를 타진하였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코치로 간신히 자리를 잡았던 이만수는 이 때 삼성의 코치 제안을 받아들이고 주저없이 화이트삭스에 사표를 낸 뒤 집과 차를 모두 처분하고 비행기표까지 발권해두는 등 귀국 준비를 했으나, 돌연 삼성 측에서 없던 일로 하자며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해버렸다.

졸지에 오갈 곳이 없어진 이만수에게 다시 손을 내민 쪽은 시카고 화이트삭스. 계약관계에 냉정한 미국 사회에서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사정을 전해들은 화이트삭스 구단이 다시 재계약을 해줘서 다행이지 이만수 입장에서는 친정 팀 삼성 때문에 하마터면 지도자 경력까지 망칠 뻔한 사건이었다.[26] 이로서 이만수는 2006년까지 화이트삭스에 몸담으면서 2005년 월드 시리즈 우승도 맛봤다.

한편 이만수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제는 삼성 라이온즈에 대한 마음을 좋았던 추억으로 마음 속에 접고 싶습니다. 프렌차이즈 스타이기 때문에 불러야 하고, 가야하는 그런 부담스러운 관계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삼성 라이온즈가 한국프로야구를 선도할 진정한 명문구단이 되기를 먼곳에서 성원하는 것으로 제 마음을 표현합니다"라며 삼성 구단에 대한 서운함을 에둘러 표현했다.

4.7. 2005년 TV 중계 뒷거래 의혹

2005 시즌 당시 KBO 리그를 중계하던 MBC ESPN(현 MBC SPORT+), KBS SKY 스포츠(현 KBS N 스포츠), SBS 스포츠 등에서 삼성 등 특정 구단의 프로야구 경기가 빈번하게 중계되던 반면 비인기 팀이었던 현대, SK의 경기는 거의 중계되지 못했다. 지금처럼 한 경기당 하나의 채널이 확보되지도 않은 환경하에서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중복 중계는 심각한 수준이었는데, 당시 신생 채널이었던 엑스포츠는 MLB만 중계하던 상황에서 삼성 경기 중계율은 100%를 초과했다. 반면 상대적 비인기 구단인 현대, SK(당시 중계율 7, 8위)는 최하위의 중계율을 기록하면서 많은 피해를 보았다.

이에 2005년 KBS 1TV ‘미디어 포커스’에서 삼성이 방송사에 돈을 주면서 자팀 위주로 중계방송을 편성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 '미디어 포커스'는 스포츠 방송사들과 삼성 구단과의 계약(= 몇 경기 이상 중계하는 조건으로 돈 얼마를 받는 조건)이 있었다는 주장을 보도했다. 당시 KBS ‘미디어 포커스’는 이러한 의혹을 보도하면서 삼성 라이온즈 구단과 전화 인터뷰를 시도했는데, 삼성 구단 관계자는 이를 부인하면서 “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구단이 돈이 없잖아요”라는 명드립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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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삼성 라이온즈는 모그룹으로부터 풍부한 자금을 지원받아 아낌없이 돈을 쓰면서 돈성이라고 불리던 시절이었다. 2004년 기준으로 삼성 라이온즈는 8개 구단 중 가장 많은 연간 300억원에 가까운 운영비를 쓰고 있는 구단이었다. #

2000년대 중반까지 삼성은 FA와 현금 트레이드로 수많은 우수한 선수들을 영입해 왔다. 이미 김성근 감독 시절부터 KBO 리그에서 현금 트레이드의 큰 손[27]이었던 삼성은 90년대말 재정이 넉넉치 못했던 쌍방울과 해태의 주축선수들을 대거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임창용, 조계현, 김기태, 김현욱 등이 그들이다. 2000년 FA 제도가 도입되자 삼성은 이강철(해태)과 김동수(LG)를 영입한 것을 시작으로 2002년에는 양준혁(LG)를 재영입 2004년에는 박종호(현대)를, 2005년에는 가장 임팩트가 큰 박진만 심정수(현대)를 FA로 영입했다. 이외에 해태에서 방출된 이순철을 영입하거나 선수협 파동으로 소속 팀과 갈등을 빚은 마해영을 트레이드해 데려오는 등 우승만을 위해서 외부 자원들을 마구 영입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투자를 했으나 삼성은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모기업이 거덜난 현대 유니콘스 9차전 승부 끝에 패했고, 이에 삼성은 2004 시즌 종료 직후 99억원을 들여 현대의 주축선수였던 심정수, 박진만을 FA로 영입하면서 야구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처럼 돈성의 절정에 있던 당시 삼성 구단의 "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구단이 돈이 없잖아요" 발언은 야구팬들의 실소를 자아냈고, 이후 수년간 개그 소재로 사용되며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다만 사람들의 관심이 이 드립에 너무 쏠리면서 정작 중계권 뒷거래 의혹 자체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4.8. 2014년 정현석 FA 보상선수 재지명 논란

2014년 12월 15일, 한화 이글스로 FA 이적한 배영수의 보상선수로 정현석을 지명했다. 좌타일색이며 주전 3인방 빼고는 군대와 임탈 등의 문제로 백업이 빈약한 편인 삼성 외야진을 생각하면 꽤 괜찮은 픽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17일 뜬금없이 정현석 위암 투병 소식과 함께 보상선수 건강에 문제가 있으니 FA 보상선수 재지명을 알아보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처음에는 "한화가 위암 투병에 대해 아무 설명도 없었다"는 식으로 기사가 나와 한화 프런트가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후속 기사로 밝혀진 실상은, 지명 마감일 5시 10분에야 삼성에서 정현석 지명에 대해 한화측에 문의했고, 한화측은 정현석의 위암 수술 사실과 재활기간까지 모두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5시 45분에 삼성에서 인수인계 계약서가 날아와 모든 걸 감수하고 정현석을 영입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28]

결국 다 알고 데려갔으면서도 단순 변심으로 재지명 안 되냐고 기웃거린 셈이다. 아마 윗선에 깨졌겠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현석 본인의 프라이버시는 산산히 박살이 났다. 그러면서 삼성 프런트는 선수 보호가 최우선이라고 개드립쳤다.

결국 12월 17일 오후, 정현석은 현금 트레이드 형식으로 한화 이글스로 복귀하고, 삼성은 재지명 대신 배영수의 연봉 300%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건으로 안현호 단장을 위시한 삼성 프런트는 삼성 라이온즈 이미지에 먹칠을 을 하고 있다고 매우 까였다.

4.9. 2016년 삼성 팬 현수막 제지 및 시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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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2017년 최규순 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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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2017년 강민호 FA 이면계악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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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2018년 응원가 저작권 침해 집단 소송

윤일상, 김도훈 등 유명 작사 작곡가 21명이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저작 인격권 침해에 따른 4억 5000여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삼성 라이온즈가 원곡 저작자들의 동의 없이 응원가로 수년째 사용하고 있다”며 지난 달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공동 소장을 접수했다. #

응원가 저작권 침해와 관련해 작곡가들이 집단으로 소송을 제기한 것은 삼성 라이온즈가 첫 사례가 되었다. 응원곡 저작권 문제 때문에 여러 구단이 응원가를 자작곡으로 바꾸느라 홍역을 치르고 있는 가운데, 삼성 라이온즈 구단만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작권에 문제가 있는 응원곡을 계속 사용해오다가 이같은 집단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다.

서울중앙지법은 1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

4.13. 2022년 팬 스케치북 검열 사건


처참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응원하러 와준 팬들을 기만한 사건으로, 삼성 팬들에게 큰 상처를 입힌 사건이며 이 사건으로 공중파에 진출했다. 2022년 7월 9일 있었던 SSG와의 홈경기에서 입장하는 팬을 대상으로 한 짐 검사 과정에서 스케치북의 내용을 검열하였다는 내용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알려졌다. #1 #2

7세 어린이의 스케치북을 검열한 것인데, 왜 스케치북을 확인하는지 묻자 '욕이나 비방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한 것이다. 즉 팀에 비판적인 내용은 찢어 없애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삼성은 긴 연패 기간에 대량실점을 하며 팀 분위기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는데, 경기력 향상이나 분위기 쇄신은 커녕 분풀이를 팬에게 하는 모습을 보이며 삼성팬들에게 유례 없을 정도로 큰 비판을 받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 역사상 3번째 9연패에 11경기 111실점이라는 치욕스러운 경기력을 보여주는 와중에 팬들에게 저지른 만행으로 인하여 많은 팬들에게 삼성 역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취급되며,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 CCTV 사찰 사건의 팬 대상 버전+업그레이드 버전으로 평가받고 있다.[29]

당장 구장 내 난동으로 인해 소지품 검사를 하는 것까지는 이해되는데, 구단의 운영을 비판하는 글이 없어야 한다며 스케치북을 일일이 다 펼쳐보고 심지어 비방이 있으면 뺏는 만행을 저질렀다.

참고로 그 악명 높은 군사정권에서도 5월 18일 광주 홈경기를 99년도까지 금지한 적은 있지만 입장하는 관중들의 스케치북을 일일이 검열한 적은 없다.(...). 이날 삼성은 5공 라이온즈, 북괴 라이온즈라고 까이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상당수의 팬들이 완전히 삼성 구단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게다가 팀 프런트는 외부 경호업체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며, 우리는 모르는 일이지만 어쨌든 조심하겠다라는 말도 안되는 변명을 하며 불난 집에 불을 지르고 있다.

결국 이 사태 이후 11연패를 달성하며, 역대 최장 연패 기록을 세워 대부분의 팬들이 홍준학 단장과 허삼영 감독에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다.

이 사건은 일반적으로 리그 역사상 유례없는 팬 홀대 사건으로 꼽히지만, 이러한 스케치북 검열 사태를 삼성 본사의 반 단체행동 경영 원칙에 따라 이해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물론, 삼성 본사의 반 단체행동, 반 노조 성향은 자회사 직원들에게만 엄격하게 적용될 뿐 소비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데 삼성 라이온즈 구단은 소비자들에게 이런 만행을 저질렀으므로 리그 차원의 징계 대상인 것은 변함없다.

KBO 올스타전 이후인 2022년 7월 28일에 구단에서 사과문이 담긴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하지만 사과 발표로도 팬들의 폭발한 불만을 크게 잠재우진 못했고 이와 관련한 시위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사자의 부모 측에서 아이를 비릇한 선수단, 관계자, 다른 팬들이 또 다시 상처받는 걸 원치 않는다며 자녀를 시위에 이용하지 말아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했다. 이와 별개로 삼성 측으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았다고 한다. #

그러나 이 사건이 벌어진 뒤 1년 가까이 지난 2023년까지 홍준학 단장과 프런트는 진정성이라고는 1도 없는 4과문 단 한 장을 끝으로 자체적인 재계약 이후 1년동안 패악질을 부리며 팀을 이때 삼성 팬덤의 반발에 대한 보복으로 일부러 망치는 것인지 의심될 정도로 끝까지 침몰시키다가 결국 사퇴 압력이 거세지자 팀을 스스로 떠났다.

4.14. 2022년 라팍 운동회 진행 논란

영상

2022년 11월 27일,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 운동회에서 사회자인 김용일이 했던 발언이 논란이다. 먼저 중학교 2학년 여학생들한테 "너네 공부 못하지"와 "마스크 벗지 마라. 선수들 놀란다"와 같이 외모비하는 물론 " 강한울이 니 춤 보고 쫄았다"와 같은 발언을 해 논란이 되었다.

그 외에도 김지찬 선수 애장품 경매에서 경매에 참가한 한 팬 에게 왜 10만 원씩 올리냐며 꼽을 주더니, 500만 원을 부른 어린이 팬이 생기자 마자 경매를 자기 멋대로 끝내버렸다.[30] 앞에 김용일한테 꼽을 당한 팬이 돈을 더 내겠다고 했지만 무시했다.[31] 그 외에도 선수들과 스텝들에게 반말을 쓰거나, 되도 않는 이승기 힘들다는 드립을 몇 번 연속으로 치거나, 장기자랑을 준비한 한 여성팬에게 "술냄새 난다, 장기자랑 2개 준비했냐? 그만해라, 이제 술 좀 깨냐"라고 한다던가, 경품 추첨하는 치어리더들에게 "좀 예쁘게 뽑아라", 릴레이 게임에 참가한 남성팬한테 대놓고 "뚱뚱한데 날렵하다"라고 한다던가, 마지막으로 기본 진행 실력도 매우 떨어졌다. 재미있는 추억을 쌓으려고 행사에 간 팬들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트라우마를 만들어 주었다.

안 그래도 작년 발로차 러브데이 때도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었고, 김상헌 응원단장의 진행력이 훨씬 좋다라는 반응이 많았는데 이번에 제대로 논란이 생겨버린 셈이다.


[1] 2002년 한국시리즈 첫 우승 후 발간된 삼성 라이온즈의 사사(社史)인 '삼성 라이온즈 21'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2] 이 때문에 삼성이 짜고 감독 빼돌리기를 했다는 말도 있었지만 애초에 삼성에서는 김진영 감독과 계약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갑작스레 김영덕 감독이 OB를 나오면서 김영덕 감독 쪽으로 선회한 것. [3] 특히 배원영은 김영덕 감독이 제일 싫어했던 별명인 변태도 외쳤다. [4] 처음에는 지기 위해서 실력이 다소 떨어지는 신인급 선수를 기용했으나 이 선수들은 김영덕 감독의 의중도 모르고(…) 감독 눈에 띄려고 죽자살자 덤벼드는 탓에 큰 점수차로 압도해 갔고, 결국 감독의 뜻을 잘 아는(…) 베테랑을 투입해 일부러 실책을 연발했다. [5] 당시 장효조는 빙그레 이정훈과 타격왕 경쟁 중이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1984년에 자신의 타격왕을 지켜주었던 김영덕 감독이 이제는 빙그레 감독으로서 장효조의 타격왕 경쟁 기회를 빼았는 일이 발생했다. [6] 훗날 키움 히어로즈 감독이 되는 장정석은 이날 대타로 기용되어 역전 만루홈런으로 현대 승리의 주역이 되었지만, 양팀간 패싸움에 관심이 집중되어 주목을 받지 못했다. [7] 현대가 큰 점수차로 이기고 있었는데, 굳이 등판한 것은 처음부터 보복성 빈볼을 던질 의도로 나온 것임을 뜻했다. [8] 당시 정명원의 투구 릴리즈 포인트, 착지 각도는 이승엽이 타석에 섰던 왼쪽에 치우쳐 있었고, 이 점에서 명백한 고의 빈볼이었다. [9] 정수빈으로 추정된다. [10] 이미 2000년대부터 낡았다는 지적이 있었다. [11] 조광래 대표이사가 밀어붙였다지만, 이 경기 정전 원인이 시민운동장 시설 문제라는 걸 보면 명분이 안 될 이유가 없다. [12] 전광판 상단에 우천시에 사용하는 중계카메라 방수비닐 등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폭죽 불티가 이 비닐에 튀면서 발화한 듯 하다. [13] 그런데 실제로 갈베스는 같은 외국인선수임에도 바에르가와는 식사도 안 하고 그를 피해 다녔다고 한다. [14] 권오준과의 합동 은퇴식을 제안. [15] 해당 의혹을 사실과 다르게 과하게 부풀려 보도하고 그 기사로 선수를 불명예 은퇴 시켰음에도 본인의 그릇된 기자 인식에 대한 반성은 커녕 태세전환하여 섣불리 선수를 방출시킨 삼성 프런트를 깠다. 그야말로 내로남불의 전형. [16] 당시 이만수가 도로 던진 깡통은 한 초등학생 관객이 쓰고 있던 안경테를 부러뜨렸다. [17] 실제로는 10경기 출전 정지였다. 잘못은 했다지만 주전 포수인 이만수를 뺀다는 것도 큰 리스크이기도 했으니. [18] 호세 본인은 이후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라고 회상했다. [19] 전북 출신인 최형우 동남 방언을 사용하는 것이 만화의 흠이긴 하다. [20] FIFA 월드컵, UEFA 챔피언스 리그 등 축구를 보면 관중이 난입을 할 경우 중계 중에 즉시 카메라를 아예 돌려버려 외면하고 있다. [21] 심지어 부모에 대한 욕설까지 했다고 한다. [22] 이 사건을 계기로 NC 구단 측이 소지품 검사를 제대로 안 하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23] 1994년 12월 기준환율 791.86원 [24] 비슷한 경우로 국내에서 고교 및 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미국, 일본 프로 팀에 입단했다가 귀국한 뒤 군경팀에 입대한 선수들의 퓨처스리그 출전이 2016년부터 불허되었으나 정작 이 규정을 만들게 한 당사자였던 김선기는 이를 적용받지 않았다. [25] 1993년 이후 주 포지션인 포수로 거의 출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예 기회조차 못 받은 걸로 알려져 있으나 지명타자나 대타 등으로는 나름 기회를 얻었다. 의외로 백인천 감독도 리빌딩을 위해 의도적으로 노장들을 배척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만수에게는 기회를 꽤 줬다. [26] 이만수 본인에 의하면 비슷한 시기 KBO의 다른 팀에서도 국내 복귀 및 코치 제안이 들어왔는데 삼성의 코치 제안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고 밝혔다. [27] 일례로 1991년 김성근 감독 취임 당시 현금 트레이드로만 7명의 간판급 선수들(OB 윤석환, 조범현, 신경식, 태평양 이광길, LG 최일언, 최홍석, 롯데 허규옥)을 영입한 바 있다. 때문에 삼성은 7명을 영입하면서도 선수 유출은 전혀 없었다. [28] 참고로 보상선수 지명은 6시까지였고, 계약서를 보내기 전에 한화가 정현석에 대한 상태를 알렸기 때문에 삼성은 다른 선수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29] 적어도 롯데 사찰 사건은 계약을 맺어 팀에 구속된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이번 사건은 프로 스포츠의 존재 의의이자 구단 입장에서 사실상 고객이자 갑인 팬들에게 저지른 만행이기 때문에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라 볼 수 있다. 한화 프런트의 팬자이처럼 직접적으로 팬들을 비난한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팬자이 쪽이 완전히 비정상인 것이고 스케치북 검열도 절대로 좋은 모습이 아니다. [30] 참고로 경매 상한선은 없었다. [31] 앞의 팬은 경매 후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