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남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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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0번 | ||||||||||||||||||||||||||||||||||||||||||||||||||||
결번 | → |
이충남 (1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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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경 (1986~1988) |
1982년 10월, 한국시리즈 6차전 시구자로 초청받은 이충남. | |
이충남 李忠男 | Lee Chung-N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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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명 | [ruby(山本, ruby=やまもと)] [ruby(忠男, ruby=ただお)] (야마모토 타다오) |
출생 | 1944년 6월 28일 ([age(1944-06-28)]세) |
일본 교토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류코쿠대학부속 헤이안고교 - 류코쿠대학 |
포지션 | 내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66년 드래프트 2라운드 ( 난카이) |
소속팀 | 난카이 호크스 (1967~1972) |
지도자 |
난카이 호크스 코치 (1973~1977) 한큐 브레이브스 2군 코치 (1978~1979) 한큐 브레이브스 1군 수비·주루코치 (1980~1982) 삼성 라이온즈 1군 조감독 (1983)[1]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8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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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재일교포 출신 야구인.2. 선수 경력
대학 졸업 후, 난카이 호크스에 제2차 지명 2순위로 프로지명을 받고 입단, 6년간 내야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한 채 1972년 선수생활을 은퇴한 뒤 난카이 호크스와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특히 선수보다는 오히려 코치로 명성을 날린 경우인데, 수비코치와 작전코치로 일하면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 각 팀의 전력분석을 토대로 적중도 높은 작전을 수립하여 "컴퓨터"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내놓는 작전마다 족족 들어맞고, 상대의 작전을 귀신같이 간파하는데 능했기 때문.3. 지도자 경력
원래 OB 베어스 창단 감독으로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으나 한국에서의 연고도 없고, 재일교포에 대한 일종의 편견도 작용해서 결국 없던 일이 되었다. 한국에서 재일교포로 감독에 오른 김영덕, 김성근, 신용균 등과는 다른 점이 그는 한국에서의 선수 경력이 전혀 없었고 결정적으로 한국말을 전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서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국내 프로구단이 지속적으로 눈독을 들였고, 그 결과 프로 원년(1982년) 우승에 실패한 후 롯데, 해태[4]와의 경쟁 끝에 삼성에서 그를 영입한다. 직책은 조감독으로,문제는 그렇게 되면서 지휘권에 혼선이 발생하였고, 게다가 서영무 감독의 애제자인 임신근 투수코치를 해임했기 때문에 팀 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충남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갈등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었고, 선수들도 프런트의 의중이 실린 이충남 조감독에게 가까워진다. 결국 시즌 도중이던 1983년 5월, 서영무 감독이 자진 사퇴
당시 장효조, 김시진이 합류했기 때문에 전력 보강도 괜찮았고 감독의 작전 능력도 좋아서 특히 볼카운트 분석이나 투구 패턴 분석을 도입했다는 점은 훌륭하다고 꼽을 수 있다. 여기에 포수 수비능력 향상에도 제법 일가견이 있었다고. 그런데... 삼성은 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공동 2위에 그친다. 당시엔 1위 아니면 의미가 전혀 없던 시절이라 가을 야구 탈락.[6] 이 1983시즌은 삼성 라이온즈 역사상 최악의 시즌 중 하나[7]로, 1994년~1996년 556, 2009년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가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사례로 남게 되었다.
이유는 감독인 이충남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아직 선수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의사소통까지 되지 않으니 자연히 팀이 제대로 굴러갈 수 없었다. 서영무와의 갈등으로 어수선해진 팀내 분위기를 다잡는것도 당연히 불가능했다. 김영덕이나 김성근처럼 한국에서 상당 기간 선수, 지도자로 활동해서 실태를 이해하고, 무엇보다 한국어가 가능했다면 사정은 좀 더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건 가정일 뿐이다. 여하튼 삼성 구단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한 듯 시즌 종료 후 이충남과의 재계약을 거부했고, 이충남 역시 미련없이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럼에도 그가 도입한 훈련, 경기 운영 방식은 삼성이 1980년대 강호로 군림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된다. 팀 역사상 최악의 시즌 중 하나인 1983시즌을 만들었다는 문제가 있으나, 삼성에 워낙 종신감독이 많기도 했고, 이후의 업적으로 인해 팀 역대 최악의 감독 반열에는 안 들어간다.
삼성에서 퇴단한 이후 일본으로 돌아온 이충남은 광고회사를 경영했고, 학생야구 지도자 자격을 회복하여 모교인 교토 류코쿠 대학의 야구부 코치로 재임 중이라고 한다.
4. 관련 문서
[1]
~5월 26일
[2]
5월 27일~
[3]
삼성 라이온즈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이충남을 감독대행이 아닌, 정식 2대 감독으로 표기하고 있다.
[4]
다만,
해태는 이충남 대신
코끼리 감독을 영입하면서 80년대~90년대의 기간동안 총 9번 우승을 하게 된다.
전화위복
[5]
다만,
삼성 구단이 오늘날에도 그를 2대 감독으로 정식 인정하기 때문에, 그를 감독으로 본다. 다시 말해 감독 재임 시절에는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지도, 정식으로 감독이란 호칭도 못썼지만 실질적으로 감독 역할을 했기에 2대 감독으로 인정한다는 소리다.
[6]
당시 제도는 전기리그 1위/후기리그 1위가 한국시리즈 직행이었고 한 팀이 두번다 1위를 하면 아예 한국시리즈를 생략하고 그 팀이 통합 우승을 한 것으로 간주했다. 1985년 삼성이 전후기 통합우승을 한 것이 유일한 사례.
[7]
사실 1983시즌은 압도적 전력을 가지고 승률 4할 7푼대를 찍었다는 임팩트로 인해 99688378 전까지는 진짜로 프랜차이즈 역대 최악의 시즌 중 하나로 로 평가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올드 삼성 팬덤에게 99688378급의 최악의 시즌으로 남아있다. 지금으로 치자면 2023년 KIA 타이거즈 수준의 시즌을 보낸 것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