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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39:55

발트 3국 점령

발트 3국 합병에서 넘어옴
1. 개요2. 소련의 발트 3국 점령
2.1. 배경2.2. 점령
3. 나치 독일의 발트 3국 점령

1. 개요

발트 3국 점령이란, 2가지 사건을 뜻한다.

2. 소련의 발트 3국 점령

2.1.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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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 불가침조약에서의 원래 분할안(왼쪽)과, 폴란드 침공 이후 실제로 갈린 분할안(오른쪽)

소련이 스탈린 치하에서 국력을 키워나갔고 나치 독일 소련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 발트 3국은 원래 독소 불가침조약에서는 리투아니아 나치 독일이,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는 소련의 영역으로 합의되었다.

1939년 9월 1일, 서쪽에서 독일이 폴란드 침공한지 17일이 지난 9월 17일, 소련은 폴란드 치하의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폴란드의 동부 국경을 침공하였다. 그리고 9월 28일, 소련과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일부 개정하여 독일이 소련 몫으로 합의되었던 폴란드 영토 일부를 더 가져가는 조건으로 원래 독일 몫이었던 리투아니아를 소련에게 넘겨주기로 합의하면서 발트 3국 모두 소련의 영역으로 결정되었다.

2.2. 점령

파일:소련 국장.svg 소련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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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이후 발트 3국은 극도의 불안감에 빠졌다. 소련은 1939년, 에스토니아를 시작으로 상호간의 군사기지 건설과 상호 원조 조약을 수용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낸다.[1] 에스토니아는 9월 28일, 라트비아는 10월 5일, 리투아니아는 10월 10일에 각각 조약을 체결했다. 결국 발트 3국에는 총합 75,000명의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1940년부터 소련은 본격적으로 발트 3국을 병합할 자세를 보였다. 외무위원장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발트 3국이 소련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비난했다. 이와 동시에 소련 정부는 발트 3국에 무제한으로 군대가 주둔할 수 있고, 정부를 교체할 수 있게 해달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발트 3국은 이를 수용했다. 리투아니아는 6월 15일에 수용했고, 불과 8시간뒤 6월 16일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가 수용했다. 소련은 3일만에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발트 3국을 점령했고 각국의 군대는 무장해제당했다. 이후 현지의 공산주의자들을 설득해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우고, 7월 14일과 15일 사이에는 합병에 관한 조작된 투표가 이루어지고 소련은 이를 통해 자발적으로 3국이 소련에 합병되는 것을 선택했다고 선전했다. 7월 21일에는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설립된다. 이들은 모두 사실상 소련의 괴뢰 국가였으며, 이후 반공, 반소적인 인사들은 추방되었다. 추방된 사람은 최소 12만 명 정도라고 한다. 소비에트 정부 수립 직후, 발트 3국은 소비에트 연방 가입 신청을 했다. 이는 받아들여졌고 리투아니아는 8월 3일, 라트비아는 8월 5일, 에스토니아는 8월 9일 소련에 병합되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의 발트 3국 점령을 비난했고, 서방 국가들은 대부분 소련의 발트 3국 합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직후 벌어진 독소전쟁으로 인해 소련의 입지가 급상승하는 바람에 그들의 외교적 입장이 발트 3국의 상황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래서 오늘날 이 3국 정부는 모두 1차 대전 직후 성립된 독립국 정부를 계승하고 있다는 입장이며 소련 구성국 체제는 말하자면 괴뢰 정권으로 보고 적법한 정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2]

독일이 물러가고 소련군이 다시 발트 3국에 들어오자 '숲의 형제들'이라고 불리는 파르티잔들이 1956년까지 저항을 하기도 했지만 모두 진압되었다. 소련에 병합된 이후 소련에서 가장 산업이 발달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경제 수준이 높았지만 인접국인 핀란드나 스웨덴에 비하면 소득 수준이 크게 낮았던 데다가 이주해온 러시아인들이 현지 문화를 적극적으로 익혔던 것도 아니었고 주요 공직을 독점하는 경우가 많아 박탈감이 심했다.

결국 국내외의 끈질긴 투쟁 끝에 1990년 전격 독립을 선포했고, 지속된 국력저하 속에 이들의 독립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었던 소련 정부는 8월 쿠데타라는 대자폭을 맞고서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 이후로는 발트 3국이 2004년 NATO에 가입하면서 러시아에 거대한 빅엿을 날렸다.

3. 나치 독일의 발트 3국 점령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을 발동한 독일은 소련을 침공했다. 그해 7월에는 발트 3국 전체를 점령했고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를 설립한다. 발트 3국 국민들은 대체로 독일군을 환영했다. 독일도 발트 3국에선 유대인이나 슬라브인을 제외한 인종에겐 별다른 학살을 저지르지 않아서 발트 3국 국민들도 독일에게 협조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는 당시 소련령 발트국가들이 특별 상태국으로 분류되었다.


[1] 폴란드 해군 잠수함이 에스토니아를 거쳐 영국으로 탈출한 것은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다. [2] 1980년대 후반에 이미 붉은 깃발과 낫과 망치를 공식적으로 금지하였고 원래 자신들이 쓰던 깃발을 부활시켰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사회주의 헌법도 폐기하였다. 심지어 나치 독일의 무장친위대를 자신들을 소련에서 해방시켜준 구원자로 여기고 그들을 옹호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 또한 매우 강하다. 심지어 독립한 이후 정부 차원에서 소련 시절을 아예 부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