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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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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릉(王陵, Royal Mausoleum)은 천자(天子) 및 그 정실 배우자가 죽으면 묻히는 무덤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이라고 한다.[1] 능에 붙는 이름능호(陵號)라고 하는데, 선대 제왕을 지칭할 때 보통 묘호 시호를 쓰지만 사후 묻힌 곳의 능호로 지칭하기도 한다.[2]

중국에서는 진나라 때는 천자의 무덤을 ()이라 했고[3] 한나라 때는 능(陵)이라 했기 때문에 합쳐서 산릉(山陵)이라고도 부른다.[4] 왕의 칭호를 썼으면 왕릉(王陵), 황제의 칭호를 썼으면 황릉(皇陵) 등으로 구분해서 부른다. 그 무덤을 만들던 당시에는 황제, 왕 및 제후의 무덤에는 능(陵)을 구분해서 사용하였다. 그러나 지금 현재에는 각 무덤들의 주인이 누구의 무덤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고 명칭도 전해지지 않아 능(陵), 총(), 분(), 묘() 등의 개념이 약간씩 다르지만 관용적으로는 다 고루 사용되고 있다.

묘(는 임금 이외의 모든 사람들의 무덤을 이야기하며, 고대인부터 현대인의 무덤까지 모두 쓰는 글자다. 총()은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신분이 높은 사람, 혹은 특징적인 유물이 출토된 경우에 붙여졌다. 천마도가 발견된 천마총이 대표적이다.

대한민국의 경우도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왕, 황제의 무덤들이 남아 있다. 거대한 황릉을 건설함으로써 왕권을 나타내고자 했던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여러 가야들의 무덤이 각 국가의 수도 인근에 남아 있다. 남북국시대에는 거대한 왕릉의 축조가 중단되고 불교적, 도교적 영향으로 규모가 작아지며, 또 길지(吉地)에 입지하는 등 삼국시대의 왕릉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고려 왕들의 왕릉은 대부분 개성시 인근에 있고 고려 임금 중 단 4명만이 현재의 남한 땅에 묻혔다. 그중 소실된 강종의 후릉을 제외한 3기만이 현재 전한다. 희종의 석릉, 고종 홍릉, 그리고 공양왕릉이 그 3곳.[5] 이 외의 나머지 고려 왕릉은 북한 개성 주변에 남아 있는데, 현재 보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북한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종의 능은 밭 한복판에 덩그러니 위치해 있을 정도. 그나마 고려 왕릉 중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 왕릉은 태조 왕건의 현릉과 공민왕 부부의 현정릉 정도. 개경의 고려 왕릉은 # 이곳에서 몇 기를 볼 수 있다.

조선 왕들의 왕릉은 태조가 즉위하기 전에 죽어 사후 추존된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과 정종 부부의 능인 후릉( 개성)[6]을 제외하고 전부 남한 지역[7]에 남아있다. 이는 전통 예법에서 무덤은 도성에서 100리 안에 위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8] 개성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원비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과 정종의 후릉,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장릉이 예외사항.[9]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목록 中
대한민국 역대 국가들의 왕릉과 황제릉
고구려 중국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북한 평양·남포 고구려 고분군
백제 한국 백제역사유적지구
신라 한국 경주역사유적지구
가야 고령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김해 대성동 가야 고분군
함안 말이산 가야 고분군
고려 북한 개성역사유적지구
조선 한국 조선왕릉

대한민국 또는 한국의 역사에 해당하는 고대 국가들의 무덤들은 대부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고구려[10], 신라[11], 백제[12], 고려[13], 가야 고분군[14] 다수, 조선 역대 임금들의 능 대다수[15]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관리가 안 돼서 엉망진창이란 게 문제.

신라의 왕릉들은 고구려, 백제와 달리 입구를 따로 만들지 않았고 구조가 견고하여 도굴이 어려운 특징이 있어서[16] 봉황대처럼 훗날 왕릉이란 정체가 아예 잊혀지고도 인공 언덕으로 여겨져서 도굴을 거의 당하지 않았다.[17] 게다가 삼국통일에 성공해 왕조가 오래 지속되었다는 점, 미리 고려에 항복을 했기에 폭력적으로 멸망해 많은 유산이 소실된 고구려, 백제에 비해 평화롭게 멸망하면서 왕건의 예우를 받았다는 점, 그로 인해 신라계가 고려 정계에 대거 진출해 정치력을 행사했고 고려 조정 차원에서도 신라의 옛 수도를 고려의 부수도 동경으로 칭해 우대해 줌으로써 신라왕릉들도 좀 더 관리를 받아올 수 있었다. 이런 덕분에 같은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의 왕릉이 거의 확인되지 않거나 현존하지 않은 반면, 신라는 역대 임금 56명 중 37명의 능묘를 확인했거나 추정하고, 19 임금만 어디에 묻혔는지 짐작하지 못할 뿐이다. 현재 경주에 남아있는 왕릉들도 적어도 시가지 주변에 분포한 대형 돌무지덧널무덤 양식 무덤은 대부분 도굴된 적이 없었고 부장품도 그대로 남아있다고 여긴다. 규모가 작은 고분이나 경주 외곽 산지에 위치한 고분은 일부 도굴 사례가 있으나, 대체로 다른 왕조의 고분에 비하면 매우 상태가 양호한 편이며, 고고학계에서는 희망과 동시에 큰 과제로 남아있다.

2. 한국

2.1. 선사시대

선사시대의 왕릉은 당연 고인돌이다. 청동기 시대부터 계급이 생겨났으므로 부족장이나 군장이 그 집단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고인돌의 크기가 클수록 그 묘주(墓主)의 권위와 업적을 나름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난 노동력과 재정이 소모되었으므로, 차츰 철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고인돌은 거의 없어지고 토광묘 옹관묘 같은 비교적 쉬운 묘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다만 일반인과는 무덤이 당연히 달라야 했기 때문에 무덤 크기를 크게 하거나, 부장품(副葬品)[18]들을 묻어 지도자의 무덤을 만들었다. 하지만 왕의 무덤이라는 표시가 나기 때문에 도굴이 될 수밖에 없었고, 3세기 이전의 왕릉 중에서 멀쩡한 것은 하나도 없다. 도굴당하지 않고 그대로인 왕릉도 있겠지만 발견이 되지 않았거나 방어 장치가 너무 강해 접근할 수 없는 경우다. 그래도 도굴꾼들은 다 싹 쓸어 간다.

2.2. 고조선


현재 고조선에 대한 고고학적 실체가 불분명한 것이 현실이며 따라서 왕릉도 분명치 않다. 한편 교과과정에서는 고조선을 대표하는 것으로 북방식 고인돌과 미송리식토기, 비파형동검을 이야기하지만 이들이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현재 고고학계에서 고조선의 문화일 것으로 추정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 십이대영자 문화'로 십이대영자유적, 윤가촌 유적, 정가와자 유적 등으로 대표된다. 이들 유적의 무덤은 고인돌이 아니며 적석목관묘[20]이다. 십이대영자문화를 고조선의 문화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 중 하나가 국가단계의 초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무덤의 규모와 부장품(껴묻거리) 등에서 주변의 다른 무덤에 비해 우월한 무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권력자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초보적인 단계이기 때문에 규모 및 부장품이 월등히 높은 것은 아니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고조선의 권력자 무덤은 대략 유추가 가능하다. 그리고 애초에 고대국가에서의 왕과 왕릉을 기준으로 고조선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이는 현대의 눈으로 중세 또는 고대를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2.3.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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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초기에는 돌무지무덤(積石塚)[21]이었다. 쉽게 말해 흙으로 봉분을 쌓은 오늘날 무덤에서 흙 대신 돌을 쌓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예로부터 중국 동북지역에는 돌로 무덤을 만드는 문화가 존재했는데[22] 고구려 역시 이를 계승하였다.

고구려 적석총의 등장에 대해 고인돌과의 결합을 이야기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는 적석총에 대한 연구 초창기에 나온 오래된 설이다. 이 외에도 커다란 돌을 뚜겅돌로 사용한 대석개묘라는 요동반도의 적석문화에서 기인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시기적, 공간적인 차이가 현격하며 오히려 형태 면에서는 장백 간구자라든지 물론 이것도 졸본(환인), 국내(집안)과는 거리가 멀다. 환인 망강루, 통화 운봉수고 고분군과 같은 사례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진다. 최근에는 무기단식 적석총과 대석개묘가 결합한 대석개적석묘에 대한 조사를 통해 무기단식 적석총과 대석개적석묘가 서로 결합되어 고구려 적석총이 등장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후 4세기부터 자연석을 그대로 쌓아 올리는 형태가 아닌 돌을 다듬어서 만드는 무덤 양식이 등장하였다. 그게 잘 알려져 있는 장군총같은 무덤들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등장한게 아니라, 하단부부터 연마석을 쌓는 단계를 거쳐 4세기~5세기 초에는 전부 연마석을 사용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하지만 돌을 연마하는 단계부터 옮기는 과정, 쌓는 과정 등 엄청난 노동력이 요구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교류로 인해 굴식 돌방무덤 형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대표적인 게 안악 3호분.[23]

2.4.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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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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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eoakdong.jpg
크고 아름다운 경주 서악동 고분군

파일:external/ph.kyongbuk.co.kr/936416_224548_4045.jpg
봉분 크기가 크다보니 한국기록원으로부터 '단일장소 최다인원 벌초' 타이틀도 땄다고 한다. 1212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

신라 왕릉들은 역사상 지금까지 존재했던 한국사 국가 중 무덤의 크기가 가장 큰 것으로 유명하다. 백제 왕릉을 대표하는 무령왕릉이 남북 길이 4.2 m, 동서 너비 2.72 m, 높이 2.93 m이고, 고구려 최전성기 왕릉 중 가장 큰 태왕릉이 남북 지름 66 m, 높이 14 m인데 비하여 신라 황남대총은 면적 42만 2908 ㎡, 남북 지름 120 m, 남분 높이 22 m, 북분 높이 23 m로 고구려 태왕릉의 2배 가까이 된다.

거기다 황남대총보다 더 큰 봉황대 등, 아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초대형 왕릉들이 더 있는데다, 경주 전역에 황남대총과 비슷한 규모의 왕릉들도 꽤나 있는 편이다. 경주 시내의 신라 왕릉 중에서는 평균보다 조금 더 큰 정도로 평가받는 금관총(12 m)이나 천마총(12.7 m)이 태왕릉과 규모가 거의 비슷하다.

신라 왕릉은 도굴이 어려운 구조, 최후의 승자라는 점 덕분에 다른 한국사 고대 왕조에 비해 지금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었지만, 피장자가 누군지 정확히 밝혀진 왕릉은 태종 무열왕, 흥덕왕 등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망국의 왕 경순왕릉을 제외한 모든 왕릉이 경상북도 경주시 행정구역 내에 다 있어서 아래의 고려 왕릉이나 조선 왕릉이 그래도 이곳저곳 퍼져 있는 것에 비해 훨씬 밀도가 높다. 경순왕릉이 경주가 아닌 경기도에 있는 이유 또한 신라가 망하고 고려 왕조가 들어선 후였기 때문에, 고려 수도인 개경에 가까운 곳에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는 고려 조정의 술책이란 설도 있는데,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2.6.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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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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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왕릉에 대해서는 그다지 밝혀진 것이 없다. 발굴자료가 왕묘급에서는 많지 않고 있더라도 발해 주요 왕릉이 소재한 중국 측 정부가 자료공개에 미온적 태도로 일관하며 일부만 공개하는 상태도 원인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중국 길림성 돈화시의 육정산 고분군과 화룡시 용두산 고분군이 있다.

2.8. 후백제

충남 논산시에 위치한 견훤왕릉이 있다. 망국의 군주여서인지 일국을 30여 년을 통치한 왕의 능 치고는 초라한 편이다.

2.9.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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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kjclub.com/129619673162.jpg
31대 공민왕의 현릉(玄陵)과 왕비 노국대장공주 정릉(正陵)의 모습

2.10.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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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국

중국의 왕릉은 진나라 이전부터 시작하여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별도의 페이지가 필요할 만큼 많다. 거기다 제후국의 왕릉, 듣보잡 나라이지만 거대한 왕릉이 축조된 사례까지 합치면..

3.1. 시기

상나라 시기 왕릉으로는 상나라의 왕릉인 안양(확인 요망) 은허유적의 근처에 후가장 고분군이 유명하다. 지하식의 무덤으로써 많은 시대를 대표하는 청동기들이 매납돼있던 것이 확인되었고, 특히 순장의 일환으로 무수한 두개골들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평면형태는 초대형묘는 亞자형, 중대형묘는 中자형, 중소형묘는 甲자형이다. 당연히 亞자형 묘곽을 쓴 초대형묘는 왕릉과 왕후릉, 中자형묘는 다음가는 왕족이나 유력귀족, 甲자형묘는 군소귀족묘로 추정한다.[물론] 이러한 형태는 물론 묘의 형태, 규모가 묘주의 신분과 대응되는 체제는 주나라는 물론, 춘추전국시대, 진한시대까지 이어진다.

주나라도 초기 유적인 섬서성 바오지시 인근에서 확인되는 묘곽은 기본적으로 형태가 中자형이다. 이는 상나라보다 주나라의 세력이 명목적으로 약했으며, 주나라는 명목적으로 상나라에 예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나라를 정벌한 뒤 지금의 시안과 낙양 인근에서 발견되는 주나라 왕묘들은 亞자형 묘곽에 대규모 순장은 물론, 부장갱과 마갱과 병장기갱을 따로 갖추고 있다. 한편, 이 시기 감숙성 천수현에서 발견되는 초기 진나라 왕릉들을 보면 묘곽 규모가 작고, 평면형태는 中자형이며 별도의 배장갱이나 마갱, 병마갱이 보이지 않는다.

3.2. 춘추전국시대

춘추전국시대에는 여러 제후묘들이 확인되었다.

3.2.1. 진(秦)나라

지금의 감숙성 천수현 일대의 산악지대에 있던 진나라는 동쪽으로 천도하여 지금의 섬서성 바오지시 일대의 옹성에 천도하게 된다. 옹성은 진나라 역사상 거의 대부분의 기간을 수도로 기능하는데, 심지어 시안 인근의 여러번 천도를 하더라도 종묘와 사직은 옹성에 두었다. 이 옹성 남쪽에는 엄청난 규모의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묘역은 남북 약3 km, 동서 6 km 약 18 k㎡에 걸쳐서 펼쳐졌다.[26] 모두 진나라 왕과 왕족, 귀족들의 무덤으로 생각된다.

외표에 봉분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탐침법으로 대략적인 묘들의 분포는 밝혔다. 대형묘를 기점으로 중소형묘들이 군집을 이루며 분포하는게 마치 경주 대릉원의 무덤들 같다. 그 중에 초대형 무덤인 진공1호묘가 조사되었는데, 묘곽은 中자형 묘곽이며, 길이는 60 m 너비 40 m, 깊이는 25 m에 달한다. 여기에 길이 80 m 너비 40 m 남짓한 병마용갱이 따로 또 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출토된 청동기의 명문으로 보아 경공(景公 기원전 577~ 기원전 537)의 무덤으로 비정한다.

진나라는 이후 여러 차례 천도했는데, 지금의 시안 서북쪽의 함양에 수도를 옮기고 나서는 그 주변으로 왕릉들이 형성된다. 무덤은 지금의 함양 북방에 2기, 시안 시가지 남방에 1기, 시안 동쪽 시가지에 1기, 진시황릉 인근에 최소 5기 정도가 발견된다. 이 시기의 진나라 무덤은 전기는 묘곽 형태가 中자형, 후기에는 亞자형 대묘가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물론, 왕자나 귀족 무덤으로 추정하는 것들은 中자형, 甲자형 무덤이 눈에 띈다. 천자의 예를 적용한 것으로 더 이상 주나라 때 제후 질서가 무명무실해졌음을 의미한다.

묘곽의 규모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대묘를 기준으로 할 때 진공대묘보다 한층 더 커졌다. 그리고 봉분이 유실된 것도 있지만, 높은 봉분이 관찰된다. 그래서 함양시 북방에 있는 것들은 한나라 황릉들 사이에 끼여있어서, 배장릉으로 추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탐측조사와 시굴조사 결과 전국시대 기와 및 도기편들이 출토되면서 진나라 왕릉으로 확정.

주목될 것은 진시황릉이 건설되기 직전의 왕릉들이다. 이 최후기 왕릉은 지금의 시안시 동쪽 근교에 1기, 그리고 진시황릉이 위치한 여산의 남록 일대에 5기 분포하고 있다. 전자는 진시황의 아버지인 장양왕의 무덤이라 하여, 장양왕릉, 후자는 동쪽에 있는 진나라 왕릉이라고 하여, 진동릉이라고 부른다.

장양왕릉 같은 경우는 탐측조사를 통해 주묘곽의 형태와 규모가 확인되긴 했지만, 그 주변은 빠른 도시화로 인해 원 지형을 완전히 상실하여 본래의 능원 형태가 복원되기 기대하기 힘든 실정이다. 대체로 진시황의 아버지 장양왕릉, 혹은 그 할아버지인 효문왕릉으로 추정한다.

진동릉은 수십년전부터 남은 봉분과, 탐측조사, 간간히 지표에 노출되는 유물로 인해서 대략적인 무덤 위치, 개수와 규모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다 2011년 폭약을 동원한 도굴 사건으로 인해 이 일대를 전면적으로 조사중이다. 현재까지 제한적인 언론보도 외에는 학자들끼리도 정보 공유를 잘 하지 않을 정도로 관련 정보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에 민감해한다. 발해 유적을 숨기는 것처럼 정치적인 의도에서는 아니고, 한 번 도굴됐기 때문에 민감히 반응하는 듯하다.

상술했다시피 이 일대의 무덤은 진시황 직계 조상 일족의 무덤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진사황릉 형태에 가까운 배장갱들의 배치, 배장묘, 병마갱, 능원, 능장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3.2.2. 중산국

지금의 하북성, 산서성 일대에 존재했던 중소국가인 중산국의 왕릉은 특유의 묘상 건축물이 축조되었고 출토된 동기에서 그 계획도까지 출토된 바 있다.

3.2.3. 월나라


* 월왕 구천묘

3.3. 진나라, 서한

진나라 통일 이후에는 동아시아 최초의 거대봉토분으로 축조된 황제릉이자 능원을 갖춘 무덤인 진시황릉이 대표적이며 이후의 황제릉의 효시가 되었다. 그 외에도 진나라의 왕릉으로는 진공대묘가 있다.

이후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서면서 황제릉의 축조는 본격화된다. 섬서성 서안의 외곽에는 전한 후한의 황릉이 열상으로 분포하고 있고 그 뒤로 더 넓은 범위에는 당나라의 황제릉이 거의 100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전한 후한대의 황제릉을 축조하면서 각 황릉 마다마다 수묘인의 마을을 형성하는데 지금까지도 그때 형성된 마을이 남았는데 마을 이름은 대부분 그 황제릉에 따라서 지어졌다. 광개토대왕비에 남아있는 기록처럼 수묘인들이 근처에 살면서 지킨다는 것과 같다. 이후 삼국시대 위진남북조 오호십육국의 시대를 거치면서 황제릉의 양상과 규모는 시기별로 국가별로 다소 변하거나 작아진다.

3.4. 동한

3.5. 서진

3.6. 남북조시대

3.6.1. 남조

지금의 남경에는 남조의 황제릉이 분포하는데 거대한 봉토분을 만들지 않고 능원만을 화려하게 꾸몄고 지하식으로 만들었다.

이는 과거 후한 말에서 서진 초의 혼란기에 숱한 황릉들이 제후와 군벌들에 의해 도굴되어 전비로 쓰인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조위 무제가 72개의 봉분을 쌓아 도굴할 수 없게 했다고 하는데 이는 조조릉이 박장으로 껴묻거리가 크게 줄고 규모도 축소되어 쉽게 찾을 수 없고 주변 봉분들과 비슷한 크기로 지어져 나온 이야기이다

그 이후로 조위-서진-동진으로 이어지는 남조의 계보에서는 박장을 하고 아예 무덤의 봉분 자체를 드러내지 않는 방향으로 능원제도가 변화하였다.
극단적으로는 묘실 수킬로미터 밖에 무덤을 드러내는 화표석만 두개 세워놓기만 할 정도이다.

3.6.2. 북조

반면 북위의 선비족 왕조는 한족 중심인 남조와는 달리 이민족 집단이므로 중원을 다스리는 정통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화 이전부터 이미 한나라의 예법을 따라 다시 거대한 봉토와 능원을 가진 황제릉을 조성했다. 그와 동시에 친족집단의 묘를 한곳에 모아서 조성하는 전통적 제도를 황릉에 도입하였는데 이것이 대동의 영고릉이다. 이 영고릉은 풍태후의 지휘 아래 건설되었는데 고위층 여성의 힘이 강했던 북위 초기였기에 풍태후의 묘 또한 황릉급으로 지어졌다.

또한 불교를 깊게 믿은 선비족들은 황릉 주변에 사찰을 지어 우리가 흔히 아는 '원찰'의 개념을 탄생시켰다. 이것이 한반도 삼국에 전파되어 능원 주변에 관리사찰을 두는 원찰제도의 기원이 되었다.

한편 북위 고구려와의 밀접한 상호관계 속에서 능원제도에 대해 이야기가 많다. 북위의 영향을 받는 무렵에 고구려 적석총의 능원제도가 성립한다거나 반대로 고구려의 영향으로 북위에 능원이 형성된다거나 하는 견해가 있다.

3.7.

진대 한대의 대규모 황제릉은 위진남북조 시대를 즈음해서 다소 작아진다. 아무래도 통일된 중원국가의 역량과도 관련이 있어보이는데 다시 에 의해서 중원이 통일되면서 부터는 상술한 것과 같이 아주 거대한 능원의 대규모 황제릉을 축조하기 시작한다. 산릉이라고 하는 즉, 산 하나를 무덤으로 삼아 그 주변을 능원으로 삼는 방법을 택한다. 중국 서안시가 자리한 분지의 북쪽에 당나라의 황제릉이 열상으로 배치되어있으며 그 범위는 서안시를 뛰어넘어 옆 도시까지 이어진다. 한국으로 치면 경주시부터 시작해서 경산시까지 황제릉이 줄지어 있는 셈.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의 황제릉은 북조 양식대로 봉분을 쓴 다음 남조의 양식대로 앞쪽에 화표석과 각종 석물을 깔아두었다.

이후 당태종의 소릉 이후 인산위릉 이라 하여 산을 능의 봉분으로 삼았다. 이 제도는 본래 한나라 시절 제후왕의 것으로 유비의 조상인 중산정왕의 묘라고 알려진 만성한묘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전성기의 황제릉은 산을 능체로 한 뒤 수키로미터에 걸친 장방형의 성곽을 두르고 각 모서리에는 각궐을 세웠다. 그리고 사방으로 사신의 이름을 딴 문을 내고 각각 석물로 장식해 두었다. 남쪽으로는 역시 수킬로미터의 신도를 내고 각종 석물과 화표석으로 아주 멀리서부터 황릉임을 알 수 있도록 장식해두었다. 그리고 남쪽으로 두개의 봉우리에 각각 유대(乳臺)를 두었다.

이후 쇠퇴기에는 다시 초기처럼 방형의 성곽과 원형의 봉분을 갖춘 봉분형 황릉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런 당의 능원제도는 신라의 능원제도의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표현을 달리하자면 당의 능원제도를 도입하여 왕릉을 축조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신라의 7~8세기대 왕릉인 흥덕왕릉 괘릉이다. 특히 흥덕왕릉은 당나라의 황제릉의 능원을 제외한 모든 구성요소를 미니어쳐판으로 적용한 사례이다. 물론 신라식의 해석이 덧붙혀져 완성되었다.

3.8. , 서하

3.9.

3.10.

3.11. 청 멸망 이후

3.12. 영향

중국의 황릉들은 황제릉 그 자체의 의미도 있지만 황궁과 도시의 경관까지 어우러진 도성제(都城制)의 맥락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남북국시대의 통일된 신라는 이후 중국 당나라의 영향으로 계획적인 방리제도를 모방하여 특유의 도시경관을 만들어나갔으며 일본 역시 이 영향 속에서 황제릉과 도시, 궁궐이 만들어졌다.

4. 일본

황실전범에서는 천황, 황후, 태황태후, 황태후가 묻히는 곳을 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능이라고 규정된 곳은 더 많으며,[27] 아래 목록은 나무위키에 등재된 장소이다.

5. 이라크

6. 이집트

7. 로마 제국

8. 인도

9. 영국

10. 프랑스

11. 독일

12. 오스트리아

13. 스페인

14. 러시아

15. 관련 문서



[1] 단 한국의 역대 왕조들은 제후(諸侯)를 칭한 시기에도 능이라고 했다. [2] 예를 들어 조선 세종대왕은 영릉(英陵)에 묻혔으므로 문헌에서 세종대왕을 영릉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특이하게 고구려의 경우 왕호가 시호보다는 능호에 가까운 형태를 띄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고국원왕은 묻힌 곳이 고국원이라 고국원왕이다. 자세한 설명은 고국원왕 문서 참고.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릉비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왕호로 불리는데 이 중에 국강상이 그가 묻힌 곳의 이름이다. [3] 진시황제의 무덤이 여산(驪山)의 앞에 있었다. 사실상 여산이 황제릉의 표상이기도 했다. [4] 조선 시대에 국상이 났을 때 왕과 왕비의 무덤을 수축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기구인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산릉이 바로 이것이다. [5] 희종과 고종의 능은 모두 강화도에 있다. 희종은 유배지 강화도에서 승하, 고종은 대몽항쟁 중 임시수도인 강화도(강도)에서 승하했기 때문. 그리고 공양왕은 조선 건국 후 폐위되어 삼척에서 유배 중 죽임을 당했기 때문인데, 독특한 점은 후에 고양시로 이장되어 현재 고양의 공양왕릉삼척의 공양왕릉(이건 사사된 후 처음으로 묻혔던 자리) 2개가 존재하고 있다는 거다. 또한 강종의 후릉도 원래 강화도에 위치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소실되었다. [6] 단, 1945~1953년까지는 개성도 남한 관할이었다. [7] 수도권 서울특별시 고양시, 구리시, 남양주시 등에 몰려있다. 서울엔 선릉, 의릉, 등이 있으며, 고양엔 서오릉, 서삼릉, 구리엔 동구릉, 남양주엔 홍유릉, 광릉이 있다. [8] 유교 예법의 관례로 행해지다가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국조오례의를 통해 공식적인 규정으로 정해졌다. [9] 독특한 점은 여주에 있는 세종과 효종의 영녕릉 또한 도성으로부터 100리 밖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원래 세종의 영릉은 현재 헌인릉 옆에 위치했었는데, 세조가 풍수지리상 이유와 "뱃길로는 100리 이내"라는 논리를 들어 여주로 이장했기 때문. 덕분에 여흥은 주(州)로 승격하면서 현재의 여주란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10] 평양·남포 고구려 고분군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다만 전자는 북한의, 후자는 현재 위치가 위치다보니 중국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11] 경주역사유적지구 오릉, 내물왕릉 등이 포함되어있다. [12] 백제역사유적지구 무령왕릉이 속한 송산리 고분군 능산리 고분군이 포함되어 있다. [13] 북한의 개성역사유적지구 왕건릉, 명릉, 공민왕릉 등이 포함되어 있다. [14] 세계유산에 2023년 등재 [15] 500여 년간 이어진 왕조의 능이 꾸준히 보존되어 현대까지 전해지고 대규모 왕릉군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2009년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16] 엄청난 양의 돌이 쌓여있기 때문에 현대 이전에는 사실상 불가능이었으며, 현대의 기술로는 폭탄이나 중장비를 동원하면 무덤을 열 수 있겠지만 도굴은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밤중에 은밀하게 하는 것이므로, 결국 사실상 불가능하다. [17] 조선시대 사람의 상식으로는 한 명의 무덤이라기엔 너무 거대해서 무덤이라고 생각조차 못했다. 김수흥의 남정록, 박종의 동경유록 같은 조선시대 문인들의 경주 여행기를 보면 이런 신라왕릉들을 인공으로 만든 산이라고 생각하고 왕릉이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18] 금은보화, 무기 같은 사치품들 등등 다양한 것을 묻었다. [19] 단군릉을 북한이 지어낸 무덤이라고 아는 사람도 많은데, 어쨌든 일단 거짓 유적은 아니다. 항목 참조 [20] 땅을 파서 시신이 들어있는 관을 넣은 후 그 위에 돌을 쌓아 만드는 무덤이다. [21]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과는 비슷한 게 전혀 없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돌을 사용하지만 목관을 사용하고 겉을 흙으로 덮는 거라 모양 자체가 다르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과 수능에 가끔씩 나오므로 헷갈리지 말자. [22] 청동기시대부터 돌로 무덤을 만드는 문화가 존재했으며, 요동반도 끝에 위치한 대련(다롄)시의 강상무덤, 누상무덤 등이 대표적이다. [23] 다만 안악 3호분의 묘주가 4세기~5세기 초 사람으로 추정하여 오류가 있지만, 고구려 고유의 형식과 중국 형식의 무덤이 병행되었으리라 본다. [24] 조선시대까지 절(사찰)은 왕궁, 왕릉 등을 수호하는 역할을 위해 인근에 함께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물론] 甲자형 무덤의 묘광깊이나 규모, 부장품의 질과 양은 상당히 많다. 군소귀족이라 해도 당대의 엄청난 실권자였을 것이다. [26] 상나라 은허 유적의 약 200배 규모이다 [27] 다만 신라왕릉이 그렇듯, 역대 모든 덴노의 왕릉이 비정된 것은 아니며 상당수는 확정된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비정 상태다. [28] 가장 대표적으로 기자의 대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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