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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대한제국 장조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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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추존 국왕
장종 | 莊宗
대한제국 추존 황제
장조 의황제 | 莊祖 懿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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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사도세자 영정.jpg
서울 은평구 구파발 사신당 봉안 영정
출생 1735년 2월 13일
(음력 영조 11년 1월 21일)
한성부 창경궁 집복헌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책봉 1736년 4월 25일
(음력 영조 12년 3월 15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사망 1762년 7월 12일 (향년 27세)
(음력 영조 38년 윤5월 21일)
한성부 창경궁 휘령전[1]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능묘 현륭원(顯隆園) → 융릉(隆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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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묘(垂恩墓)
→ 영우원(永祐園)
→ 현륭원(顯隆園)
융릉(隆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736년 4월 25일 ~ 1762년 7월 4일
(음력 영조 12년 3월 15일 ~ 영조 38년 윤5월 13일)
조선 왕세자 | 조선 국왕 대리청정
1749년 3월 15일 ~ 1762년 7월 4일
(음력 영조 25년 1월 27일 ~ 영조 38년 윤5월 13일)
서명
파일:사도세자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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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훤(愃)[2]
부모 부왕 영조
모후 정성왕후, 생모 소유영빈
형제자매 2남 7녀 중 차남
배우자 혜경궁 홍씨(헌경왕후, 헌경의황후)
후궁 숙빈 임씨, 경빈 박씨, 수칙 이씨
자녀
5남 3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 ~ 1752)
차남 - 정조(正祖, 1752 ~ 1800)
3남 - 은언군(恩彦君, 1754 ~ 1801)
장녀 - 청연공주(淸衍公主, 1754 ~ 1821)
4남 - 은신군(恩信君, 1755 ~ 1771)
차녀 - 청선공주(淸璿公主, 1756 ~ 1802)
3녀 - 청근옹주(淸瑾翁主, 1758 ~ 1835)
5남 - 은전군(恩全君, 1759 ~ 1778)
종교 유교 ( 성리학)
윤관(允寬)
의재(毅齋)
전호 경모궁(景慕宮) → 경모전(景慕殿)
묘호 장종(莊宗) → 장조(莊祖)[3]
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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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륜융범기명
(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范基命)
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
(彰休贊元憲誠啓祥顯熙)
시호 조선: 사도세자(思悼世子)
→ 장헌세자(莊獻世子)
→ 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
(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
대한제국: 신문환무장헌광효의황제
(神文桓武莊獻廣孝懿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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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etter_of_Crown_Prince_Sado_of_Joseon_3.jpg
친필 글씨[4]
1. 개요2. 이름과 시호3. 생애4. 추숭5. 초상화(어진)6. 가계
6.1. 조상6.2. 배우자/자녀
7. 대중매체8. 기타

[clearfix]

1. 개요

조선 왕세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영조의 차남으로 모친은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이다. 정실부인은 혜경궁 홍씨이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정조를 낳았다. 부친 영조의 아동 학대와 함께 극심한 갈등을 겪었고 이 과정에서 결국 정신질환을 얻었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주변 사람들을 참혹하게 살해하는 등 수많은 비행을 저지르다 이를 보다 못한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8일 후에 사망했는데 이를 임오화변이라고 한다.

2. 이름과 시호

휘는 '훤(愃)'으로, '너그럽다'는 뜻이다.[5] '선'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愃'에 '선'이란 음도 있기 때문이다.[6] 그런데 ​ 고종 때 지은 《열성어휘(列聖御諱)》에는 독음이 '훤'으로 적혀 있고 대응하는 음의 한자로 '煊(마를 훤)'을 써 두었다. 자(字)가 너그럽다는 뜻인 '윤관(允寬)'인데 이름과 자는 뜻이 연관되게 짓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사도세자의 이름도 '잊는다'는 뜻인 '선'보단 '너그럽다'는 뜻인 '훤'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다.[7]

원래 영조가 내린 시호는 '사도(思悼)' 단 2글자였지만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장헌(莊獻)'을 존호로 올려 '사도장헌세자'가 되었고 정조 7년( 1783)에는 존호가 추가되어 '사도수덕돈경장헌세자'가 되었으며 정조 8년( 1784) '홍인경지(弘仁景祉)', 다시 정조 18년(1794) '장륜융범기명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를 올렸고 한참 뒤인 철종[8] 5년( 1854) '찬원헌성계상현희(贊元憲誠啓祥顯熙)'를 더함으로써 최종적인 정식 시호가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륜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로 길어졌다.

간혹 "장헌세자가 죽어서 '사도세자'라는 칭호를 얻었다"는 말이 돌곤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둘 다 죽은 뒤에 붙은 시호인 데다 '사도(思悼)'는 영조, '장헌(莊獻)'은 정조가 붙인 시호라 오히려 장헌이 나중에 붙었다. 어차피 장헌세자가 되고 나서도 사도도 여전히 시호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두 칭호를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세자로 있는 동안 공식 칭호는 '세자' 단 두 글자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세자는 동시에 여러 명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냥 세자라고만 불러도 헷갈릴 일이 없다.[9]

사도세자의 시호에 쓰인 한자의 뜻이 생각 사(思), 슬퍼할 도(悼)라 영조가 아들을 죽음을 생각하며 애도한다는 의미로 여기는 의견이 있는데, 사도세자의 시호에 쓰인 두글자를 시법상에 따르면 사(思)는 이전의 잘못을 후회했다는 뜻이고 도(悼)는 중년이 되기 전에 일찍 죽었다는 뜻으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여 일찍 죽은 세자'라는 뜻으로 사실상 고인드립이다. 이 때문에 정조는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싫어했으며, 일성록의 기록을 보면 조정관료들 역시 '사도라는 시호가 좋지 않다'는 것에 공감했다. # 정조의 의견을 존중했는지,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추가한 이후로 실록의 기록을 보면 사도세자의 시호를 두글자로 호칭할 때는 장헌세자로만 호칭하였다.

영어권에서는 Prince Sado라고 한다.

3.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사도세자/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추숭

정조의 갈망은 비명에 간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追尊)하는 것이었겠지만, 결국 죽을 때까지 뜻을 이루지는 못하고 다만 사당의 명칭인 경모궁으로 높여 불렀다.[10] 이후 순조, 헌종, 철종 대까지 사도세자를 추숭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논의가 있었지만, 사도세자 추숭을 반대하던 벽파가 숙청된 다음에도 사도세자 추숭은 이뤄지지 않았고, 이미 순조 말엽에는 사도세자 추숭을 요구하면 "철 지난 얘기를 왜 꺼내냐"고 면박을 듣는 수준이었다.

훗날 왕실 족보상 현손이었던 고종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 1899년 10월경[11] 장종(莊宗)으로 추존하였다가[12] 1899년 12월 태조 및 4대조 추존에 포함돼 장조 의황제(莊祖懿皇帝)로 재추존하면서 정조의 염원이 드디어 이루어진다. 이때의 기록에 의하면 정조는 자신의 측근들에게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고 싶다는 비원(費願)을 여러차례 말했고 그 측근 중 1명의 자손이었던 서상조(徐相祖)가 고종을 모시게 된 1899년 8월에 그 일화를 전하여 고종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

조선 후기 정조 이후의 국왕들은 모두 장조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고종과 순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장조의 핏줄이다. 고종은 인조에서 갈라져나온 줄기로 전 왕인 철종과는 무려 핏줄로 17촌(거의 남남)이다. 정리하자면 철종 - 전계대원군 - 은언군 - 장조 - 영조 - 숙종 - 현종 - 효종 - 인조(공통 조상) - 인평대군 - 복녕군 - 의원군 - 안흥군 - 진사 이진익 - 이병원 - 남연군[13] - 흥선대원군 - 고종이다.

철종은 장조의 서증손자이며 고종의 친할아버지인 남연군은 장조의 친아들이었던 은신군[14]의 양자다. 고종은 즉위하기 전에는 법적(족보상)으로 사도세자의 현손이 아니었지만 즉위할 때 익종( 효명세자)의 양자가 되면서 족보상으로 정조의 양증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양현손자가 되었는데 사도세자가 왕에 이어 황제로 추존된 것은 그가 고종의 법적 고조부였기 때문이다.[15][16] 때문에 고종과 그의 아들 순종은 촌수로 따지면 상당히 멀지만 법적으로는 장조의 후손이다.

굴곡진 삶을 살았던 세자여서인지 민간에서는 '뒤주대왕신'이라는 이름으로 신으로 모셔졌다. # 비슷하게 단종을 영험한 신으로 모신 사례도 있다.

5. 초상화(어진)

파일:/image/038/2007/06/15/jowi200706151029450.jpg 파일:gvWWObl.jpg 파일:사도세자상(思悼世子像)_19세기_작자미상.jpg
상상 어진[17] 우승우 화백의 상상 어진 사도세자상(思悼世子像) / 19세기 / 작자미상[18]

6. 가계

6.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장조
(莊祖)
<colbgcolor=#fff3e4,#331c00> 영조
(英祖)
<colbgcolor=#ffffe4,#323300> 숙종
(肅宗)
현종
(顯宗)
명성왕후
(明聖王后)
화경숙빈 최씨
(和敬淑嬪 崔氏)
증 영의정 최효원
(贈 領議政 崔孝元)
증 정경부인 남양 홍씨
(贈 貞敬夫人 南陽 洪氏)
소유영빈 이씨
(昭裕暎嬪 李氏)
증 좌찬성 이유번
(贈 左贊成 李楡蕃)
이영임
(李英任)
미상
증 정경부인 한양 김씨
(贈 貞敬夫人 漢陽 金氏)
김우종
(金佑宗)
전주 이씨
(全州 李氏)

6.2. 배우자/자녀


흥미롭게도 효종 이래 아들이 귀한 조선왕실에서 무려 아들을 5명이나 보았지만 일찍 죽은 의소세손을 제외하더라도 각종 역모사건 등에 얽혀서 실질적으로 후손을 남긴 자식은 정조 은언군뿐이며 그나마도 정조 계열은 순조- 효명세자- 헌종으로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다가 헌종 대에서 대가 끊기고 은언군 계열도 상계군 전계대원군만 제외하곤 아들 없이 죽었으며 전계대원군의 아들들도 하나같이 아들 없이 죽어서 경은군 빼고는 직계 자손이 완전히 끊겨 버렸다.

경은군의 손자들이 만약 후사를 잇지 못하였다면 현재 장조의 직계 자손은 완전히 끊긴 것이 된다.

7. 대중매체

영화와 드라마 매체 속 사도세자

아버지 영조에 의해 엽기적인 죽음을 맞은 충격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보니 사극에 자주 등장한다. 아버지 및 아들 정조와 연관되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과 비슷한 생애와 결말을 보여준 왕자들인 호동왕자 소현세자보다도 인지도가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작품들에서 노론 음모론 이덕일 사관의 영향으로 사도세자가 노론에 의해 모함당해 죽었다는 해석을 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나아가 "노론의 음모로 죽은 실패한 개혁군주"의 이미지를 그리기도 한다. 이후 음모론에 여러 반론이 제기되고 또다른 역사적 사실들이 더 알려지면서 이러한 작품들은 줄어들었다.

영·정조시대가 18세기 조선의 부흥기였다고 평가되고 있고 대중적으로도 호감을 사고 있다 보니 대중매체에서 영조-장조-정조 3대의 치부가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적다는 의견이 있다. 영조의 아동 학대에 가까운 잔인한 자식교육, 사도세자의 광증과 여러 사람을 죽인 살인행각, 정조가 승정원일기나 사초까지 지우면서 부친의 심각한 행위를 숨기고 미화하기 급급했던 사실 등이 묘사되면 이들의 이미지 하락을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묘사 자체가 대중들의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7.1. 소설

7.2. 노래

금이야 옥이야 태자로 봉한 몸이
뒤주 안에 죽는구나 불쌍한 사도세자
꽃피는 청춘 영화도 버리시고
흐느끼며 가실 때엔 밤새들도 울었소

궁성 풍악과 가무로 즐거운 밤
뒤주 안이 웬 말이요 야속한 사도세자
황금 왕관도 사랑도 버리시고
억울하게 가실 때엔 가야금도 울었소

7.3. 드라마

파일:사관은 논한다 등장인물 폐세자.png
2024년 KBS 드라마 스페셜 《사관은 논한다》
배우: 이순원

7.4. 영화

7.5. 만화

8. 기타

효묘(孝廟)께서 일찍이 무예를 좋아하여 한가한 날이면 북원(北苑)에 납시어 말을 달리며 무예를 시험하곤 하였는데, 그때에 쓰던 청룡도(靑龍刀)와 로 주조한 큰 몽둥이가 여직껏 저승전(儲承殿)에 있었다. 그것을 힘깨나 쓰는 무사들도 움직이지 못하였건만, 세자는 15~16세부터 벌써 모두 들어서 썼다.
- 정조실록 28권, 정조 13년 10월 7일 기미 4번째 기사 어제장헌대왕지문


[1] 사도세자가 사망할 때 문정전(文政殿)은 정성왕후의 혼전인 '휘령전(徽寧殿)'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임오화변 문서 참고. [2] 이 한자는 '상쾌할 선', '너그러울 훤'이라는 2가지 훈음이 있는데, 윤관(允寬)이라는 자와 연관지어볼 때 '훤'이라 불렸음이 더 타당하다. [3] 양자로 입적되어 종법과 혈통상 현손이 되는 고종 1899년 9월에 장종(莊宗)으로 추존하고 12월에 황제로 재추존함에 따라 장조로 재격상되었다. [4]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친서). [5] 작은아버지 연령군의 이름과 발음이 같지만 한자는 다르다. 연령군의 이름은 '밝을 훤(昍)'이다. [6] '선'으로 읽을 때는 글자 뜻도 '잊다'로 바뀐다. [7] 張裕昇, 2021, 〈조선 왕실의 작명 연구〉, 《東方漢文學》 86집, 동방한문학회. [8] 사도세자의 서출 증손자 [9] 양녕대군 역시 폐세자되어 대군이 된 뒤 동생들처럼 '녕'자를 돌림자처럼 쓰고 사양할 양(讓)을 붙인 것으로, 세자였던 때는 단순히 세자로만 불렸다. [10] 실록의 기록을 찾으면 사도세자나 장헌세자로 찾는 것보다 경모궁으로 높여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경모궁으로 일반적으로 칭했다는 걸 알 수 있는 사실이다. [11] 9월 1일에 묘호를 의논하여 정하고, 11월 12일(음력 10월 10일)에 추숭의 예식을 거행하였다. [12] 이미 제국을 선포한 후에 추숭했음에도 처음에는 왕으로 추존하였다. 이때는 4대조 및 태조를 황제로 추존하기 2개월 전이었으니, 황제 추존 전에 왕으로 추존함으로써 명분을 확실히 하는 차원이었다. [13] 군으로 봉작 후 이채중에서 개명 [14] 숙종의 6남 연령군 이훤에게 출계하여 대를 이었다. 다만 당시에는 연령군의 봉사손이라고만 했고 양자 입적이 명확하게 되지 않아서 당시에는 은신군도 사도세자의 아들로 인식되었다. [15] 고조부까지가 커트라인이기 때문에 영조는 황제로 추존되지 않았지만 한참 먼 조상인 이성계는 조선 왕조의 개창자여서 특별히 황제로 추존되었다. [16] 사실 정조는 요절한 큰아버지인 효장세자에게 입적되어 즉위했기에 고종에게 장조는 법적 고조부가 아닌 법적 증조부(정조)의 친부이다. 실제 법적 고조부인 효장세자 역시 진종 소황제로 추존되었다. [17] 이 모습이 실제와 비교적 유사할 것으로 추정된다.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엔 사도세자를 체격이 '석대하다'고 표현해 체격이 건장한 무골 스타일인 것처럼 묘사해 놨지만 그건 좋은 해석이고 승정원일기에서는 '체심비풍(몸이 아주 뚱지다)', 즉 그냥 뚱보(…)라고 표현해 놨기 때문이다. [18] 당대에 그려진 초상화가 아니다. 다만 사당에 모셔진 신격화시킨 초상화로 추정한다. 출처: 중국어 위키백과 [19] 헌경왕후와는 13촌 먼 숙질로 엮이는데 헌경왕후의 5대조, 즉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의 고조부인 홍주원 선조의 적녀 정명공주의 남편이다. 장조는 원종의 6세손이고 헌경왕후는 정명공주의 5세손이니 13촌 지간이다. [20] 첫화에서 뒤주에 갇혀 어린 이산과 대화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회상 장면에서만 등장한다. [21] 특별출연으로 회상장면에서만 등장한다. [22] 아들에게 본모습을 보여준다. [23] < 한중록>에서도 "덕성(德性)이 거룩하나 과묵하고 행동이 날래지 못하다"고 묘사되어 있다. [24] 삼종 혈맥은 정말 귀해서 효종(1남)-현종(1남)-숙종(3남) 식으로 이어졌고 숙종도 세 아들이 있었지만 자식을 본 아들은 하나뿐이라서 사도세자는 실질적으로 4대 독자나 다름없었다. 이러니 이인좌의 난 당시 이인좌와 그 무리는 무려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을 앉히려고 했을 정도였다. 허나 이렇게 왕가가 아슬하게 대가 이어지는 것은 결코 좋은 게 아니라서 왕가의 대가 이렇게 이어지면 어느 순간에 이르러 운이 나빠 대가 완전히 끊겨 버리기 쉽다. 실제로 헌종이 죽어서 정조에서 이어지던 한쪽 대가 끊겨서 은언군 가계에서 왕을 모셔와야 했고 그쪽도 끊겨서 이번엔 무려 인평대군 가계였다가 은신군 가계로 입양된 남연군 가계에서 왕을 모셔와야 했다. 족보상으로야 좀 가까운 사이였지 혈통상으로 보면 매우 먼 지간이었다. [25] 世子鼻息有聲, 意或以爲風也。 [26] 사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부터가 함경도에서 말타고 활쏘던 군인 집안 출신이라서 신장이나 골격이 거대한 편이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성계의 아들들인 정종이나 태종을 필두로 무예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세종과 문종도 풍채가 상당한 거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어린 나이에 죽은 단종도 또래에 비해 덩치가 컸을 것으로 추정되니 사도세자가 이런 체형인 것도 어느 정도 설명된다. [27] 고양이 그림을 대단히 잘 그려서 당대엔 '변 고양이', '변 닭'이란 별명까지 있었다. 고양이와 참새를 그린 <묘작도>란 그림이 유명하다. [28] 다만 사료를 확인하면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사실이 아닌 걸로 보인다. 시기가 맞지 않는다. [29] 사도에서는 고종실록의 주장을 채택하여 이천보가 집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30] 사도세자는 유학적 소양, 프리드리히 2세는 군재. [31] 영조는 재위 말엽에는 별다른 업적이 없지만 초중엽에는 많은 업적을 남겼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재위기간 내내 타국에서 비웃을 정도의 극단적인 검약으로 재정을 마련해 이 재정으로 프로이센군을 양성했다. 아들인 프리드리히 대왕이 오스트리아와 2차례의 전쟁을 하여 프로이센을 키운 것도 아버지 대에 만든 기반이 한 몫을 했다. [32] 사실 사도세자가 당한 것은 가벼워 보일 정도로 독하게 다뤘는데 어느 정도냐면 사도세자는 자기가 관심 분야가 아버지가 기대하는 분야가 아니라는 이유로 구박을 심하게 당한 것이라면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냥 별 이유 없이 얻어맞았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대왕이 아버지로부터 어떻게든 안 맞으려고 아버지가 요구하는 군사 분야의 재능을 보였지만 그래도 얻어맞았다. [33] 시종과 시녀들은 물론 그의 아내인 조피 도로테아도 걸핏하면 얻어맞았고 백성들도 조금만 빈둥대는 모습이 들키면 얻어맞았다. 이러다 보니 그가 죽자 가족들이 엄청나게 좋아했고 딸은 얼마 뒤 아버지가 죽은 것을 기념하는 연회를 열었으며 백성들과 신하들도 왕의 장례식에 참석하길 거부했을 정도였다. [34] 장남은 세례식에서 굳이 왕관을 씌우고 해야 한다고 아득바득 우겨서 억지로 왕관을 씌웠다가 그만 생채기가 나서 감염으로 사망, 차남은 강하게 키우려면 대포 소리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우겨서 갓난아기인 애 앞에서 대포를 쐈다가 애가 경기를 일으켜서 사망했다. [35] 조선은 유교 국가여서 질투가 심한 부인을 내치는게 당연시( 칠거지악 중 하나)됐지만 그렇다고 질투를 거의 혹은 아예 안 하면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불충한 부인'이라면서 나쁘게 보기도 했다. 중종의 서녀 효정옹주도 아버지에게 "부녀자로서의 투기가 없을 수가 없다"고 탄식에 가까운 질책을 듣기도 했다. [36] 공부 뿐 아니라 왕세자가 궁녀를 건든 것 자체가 문제다. 명목상이라 할 지라도 궁녀는 왕의 여인이다. 그러므로 왕세자는 궁녀에게 승은을 내리지 않는다.또한 보통 왕세자일 때는 후궁을 들이지 않는 게 관례였다. [37] 아버지의 핍박으로 오히려 후궁을 두었음을 들킬까 두려워했고 최대한 감추려고 했다. [38] 사실 연산군도 세자 시절부터 제위 후 10년 때까지는 의외로 멀쩡한 편이었다. 갑자사화 후 2년 동안 역대급으로 말아먹었다. 세자 때부터 살인과 폭행을 일삼는 미치광이가 된 사도세자와 비교하는 것은 어찌 보면 연산군에게 실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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