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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 권5 월명사도솔가조(月明師兜率歌條) 중 제망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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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한국어(古代韓國語, Old Korean)는 고대에 쓰이던 한국어의 고어(古語)이다. 한국 국내에서는 고대 국어(古代國語)라고도 불린다.주로 삼국시대에서 남북국시대까지의 언어를 가리켰으나, 오늘날에는 고려 시대인 13세기까지를 고대 한국어 시대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ISO 639-3에서는 3~9세기 한국어를 '고대 한국어'로 규정하여 'OKO'라는 코드를 할당하였다. #
고대 한국어를 사용하던 시대에는 한반도의 원주민에게 고유어를 나타낼 수 있는 문자가 따로 없었으므로, 오늘날에는 한자로 적힌 이두, 구결, 향찰, 서기체, 기타 특수한 표기양식 같은 극도로 제한된 방법으로만 그 형태에 접근할 수 있다. 당대 사용하던 언어를 자세히 연구하려면 당대에 만든 텍스트가 필수적이나, 목간이나 금석문 등 몇 가지 고고학적 유물을 제외하면 고려 시대 이전의 언어 사용자가 작성한 사료가 거의 전해지지 않아[1] 연구에 큰 어려움이 있다. 특히 문법적인 면까지 접근하기란 꿈 같은 이야기였으나, 다행히 1990년대에 상당한 양의 구결 자료가 발견되면서 비로소 문법적인 면도 조금씩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아직까지 고대 한국어의 정확한 음운은 제시되지 못하였다. 자음에서는 유무성음의 구분 존재 유무, 유무기음의 구분 존재 유무, 반치음과 순경음의 존재 유무 등을 둘러싸고 학자들 간에 일치된 견해가 없다. 모음에서도 모음추이의 존재 유무 등과 같은 현안을 두고 가지각색의 견해가 제시되었다. 한자음 재구를 연구한 학자들은 이 시대의 한국어가 일본어와 유사한 개음절어였다는 가설까지 제시했다. 그래서 일단 교과서에서는 된소리가 없었다는 정도만 소개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대국어 항목
2. 계통
'삼국이 상호 간에 통역 없이 말이 통했는가?', '가능했다면 얼마나 유사했는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어떻게 달랐는가?'와 같은 의문점에 대해서는 수많은 가설이 있다. 정사에 기록된 부분으로 미루어 보면 크게 다음과 같다.東夷相傳以爲夫餘別種, 故言語法則多同, 而跪拜曳一脚, 行步皆走.
동이가 서로 전하기로는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別種)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칙이 대부분 같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때 한 쪽 다리를 끌고, 걸을 때는 모두 뛰어다닌다.
《 후한서》 〈동이열전〉 中 고구려조
동이가 서로 전하기로는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別種)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칙이 대부분 같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때 한 쪽 다리를 끌고, 걸을 때는 모두 뛰어다닌다.
《 후한서》 〈동이열전〉 中 고구려조
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行不張拱, 拜不申足則異
( 백제는) 지금의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거의 같은데, 걸을 때 두 팔을 벌리지 않고 절할 때 한 쪽 다리를 펴지 않는 점은 다르다.
《 양서》 〈동이열전〉 中 백제조
( 백제는) 지금의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거의 같은데, 걸을 때 두 팔을 벌리지 않고 절할 때 한 쪽 다리를 펴지 않는 점은 다르다.
《 양서》 〈동이열전〉 中 백제조
위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와 부여, 옥저, 동예, 백제 사이에는 말이 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고구려어와 백제어가 근연 관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그렇다면 신라어의 경우는 어떨까? 신라전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백제의 통역을 통해 소통한다는, 백제와 신라의 말이 통했다는 뉘앙스의 기록이다. 종합해 보면 고대 한국어는 고구려어와 백제어가 근연 관계였고 백제어와 신라어가 근연 관계에 있는, 적어도 통하거나 방언연속체의 가까운 언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2]
애초에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이며[3],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통은 삼국유사에서 주몽의 부친이 단군으로 묘사되며[4], 곰[5]을 숭배하는 사상이 남아 있는 듯 친연 관계가 관찰된다는 점에서 아예 다른 어군일 리가 없다.
이를 조금 다르게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말이 서로 통하기는 했지만 '한 가지 언어는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예컨대 고구려 유민들이 사용하던 '부여 어군'과 삼한의 한(韓)인들이 사용하던 '한 어군'이 있었는데, 백제 지배층에 고구려 출신이 많아 이들은 고구려인과 소통이 가능했고, 일반 백제 백성들은 따로 신라인과 말이 통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제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말이 서로 다른 이중언어 국가가 된다. 하지만 백제어가 실제로 이중 언어 체계였는지는 비판점이 있다.( 신라어의 '부여 계통 언어와의 관계' 단락 및 백제어 참조)
이전에는 고구려어와 백제어, 신라어 자료가 각각의 국가에 전수되고 있었으나 고대 한국어 중에서는 신라어 관련 자료만이 그나마 가장 많이 남게 되었다. 무엇보다 금석문, 향가 관련 자료가 많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향가는 중부 방언으로 이루어져 신라계 방언으로 된 향가는 실전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자세한 건 서동요 항목 참조.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삼국(신라, 고구려, 백제)의 언어 전통을 계승, 보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대에는 전하지 않는다. 실제 고려시대 중반 김부식을 포함 삼국사기 편찬자들도 고구려어나 가야어의 지식을 상당히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대 동아시아 언어를 연구하는 일부 서구권 비교언어학자들은 고구려어(부여어계)를 현대 한국어의 어원이 된 언어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알렉산더 보빈은 고대 한국어를 단일 언어가 아니라 가방어족으로 본다.[6] 고대에서 중세 한국어 시기에 과거 한반도에 존재했던 여러 계통의 종족들의 언어가 합쳐져 부여계어족을 중심으로 단일언어화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 #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고구려의 중심지인 황해도일대가 신라의 중심지인 경주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신라의 지방지배력이 비교적 약했을 것으로 가정하고, 이에 따라 실질적으로 현대 한국어의 어원이 만들어진 시기는 후삼국 시대 이후인 고려시대의 황해도 지역의 고구려계 호족들이 쓰던 고구려계 언어( 고구려어)로 보고 있다. 이에 따르면 현대 한국어의 표준어가 된 서울어는 14세기 조선시대의 한양 천도로 인해 개성어가 그대로 이식된 결과이며, 고려 왕조의 개성어는 애초에 고구려 계승 의지를 공공연하게 피력하였던 패서, 즉 오늘날 황해도 및 평안남도 남부 고구려계 호족들이 쓰던 언어를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점을 보았을 때, 현대 한국어는 고구려어의 후손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고 주장한다.[7]
7~9세기 신라의 중앙집권은 조선보다는 약했지만, 적어도 초기 고려보다는 강력하게 관철되어 있었다. 고려 초기에는 각지에 지방관도 미처 파견하지 못하고 흡사 일본의 에도 막부마냥 호족들의 자녀들을 인질로 잡아두거나, 전국 각지에 태조 왕건과 개인적 연고가 있는 호족들을 강하게 키워 심는 방법으로 통제했던 반면, 대부분의 지역에서 직접 지배를 관철했던 신라는 분명코 말해 후삼국시대의 아수라장을 수습한 지 얼마 안 된 초기 고려보다는 지방 통제가 훨씬 나은 편이었다.[8] 김헌창의 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해서 지방을 직접 다스리는 체계가 정착돼 있었고, 민정문서에는 호구 파악이 매우 꼼꼼하게 되어 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경주 반대편 호남과 황해도, 금강산까지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양식으로 대표되는 통일된 문화양식을 전파했음이 유물로 남아 있다. 당장 신라의 몰락 원인 중 하나로 흔히 '중앙 귀족의 지나친 지방 수탈'을 꼽는데, 정말로 지방 통제가 약하면 중앙이 지방 수탈도 제대로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고려 건국 세력이 자리했던 황해도와 그 이북 일대는 신라가 당나라와의 관계 탓에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거의 반세기 가량 통제하지 못했고, 그 이후에도 넓은 영토와 인구에 비하면 관료 수나 지방관이 비교적 적어 지배밀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졌던 건 사실이다.[9]
그러므로 이들이 신라 중앙과 이질적인 옛 고구려어를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수백년간 제대로 보존하고 있던 집단이었을 개연성은 분명히 낮지 않다. 개성 일대는 고구려의 중심지인 평양 일대와 그렇게 거리가 멀지 않은 지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는 신라적 정체성을 굳이 말살하려 들지는 않았기에[10] 현대 한국어가 공동 후손도 아닌 오직 부여어족(고구려어)만의 직계 후손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다. 특히 고려의 중심지이자 발흥지인 개성시일대는 이미 통일신라 성립 직후(694년) 신라에 행정적으로 편입된 지역으로 성덕왕 이후에서야 직접적으로 군현화되기 시작한 여타 황해도 지역과는 사정이 많이 다른 편이다. 물론 신라의 중앙어인 경주 쪽의 언어가 다른 지방들의 언어를 완전히 대체하였다는 직접적 증거는 없어 판단은 어렵기는 하지만, 적어도 경기도 일대는 여러 고고학적 정황을 토대로 보아도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인의 직접적인 이주가 상정되어 고구려, 백제 유민과 혼합된 문화를 이룬 흔적이 명백하기 때문에 [11] 개성과 바로 인접해 있는 경기 지역 주민들의 언어 생활에는 신라어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있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선덕왕 시절 왕이 직접 한산주를 순행하여 한산주의 주민을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는 기사가 전해오는데, 이는 소위 패강진 지역 역시 적지 않은 인구 이동의 세례를 받았으며, 당시 신라의 지배계급의 언어였던 신라어의 영향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설령 신라의 패강진 지역에 대한 행정지배 밀도가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고 할지라도 신라는 해당지역을 군관구로서 통치하거나 혹은 정식으로 군현을 설치하여 통치한 것이지, 무슨 봉건제와 같은 완전한 자치지역으로 둔 것이 아니어서 지배층과 완전히 괴리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12]은 자신의 학설인 반도 일본어설에서 고대 한국 남부를 '고일본어권(Old Japanese)'이라는 개념으로 보고 한반도 중남부와 일본 열도의 야요이인이 같은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였으나 Peninsular Japonic 한반도 중남부의 고일본어족은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북쭉에서부터 남하한 어족(현대의 한국어로 계승된 어족 부여어족으로 추정)에게 흡수 및 소멸, 추방되어 한반도 내에서 거의 사라졌으며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어족은 일본열도에만 남게되어 오늘날의 일본어를 구성하였고 현대 한국어는 북쪽에서 남하한 부여계어족의 직계 후예라는 주장을 구체적으로 논증하였다. ' 고구려에서 탐라까지(From Koguryǒ to T’amna)' 주된 근거는 삼국사기 권34, 권37이나 양서 백제전 등에서 기재된 한반도 중남부 지명이나 고유명사가 한국어보다는 고일본어와 상통하는 면이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 44권에는 加羅語謂門為梁云라고 하여 가야에서는 들보 량(梁)을 문(門)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梁의 발음은 돌(twol)이었고 한국어에서 문을 '돌'로 발음하는 경우는 없다. 문(門)의 고유어라는 '오래' 역시 '돌'과는 아무런 유사성이 없다. 따라서 해당 단어는 한국어족과는 전혀 관련 없는 발음이며, 그보다는 고일본어에서 문을 뜻하는 토(と, to)와 유사하기 때문에[13] 가야 토착어와 일본어간 관계는 가야 토착어와 한국어간 관계보다 훨씬 가까움이다.[14] 현대 한국어에서 문을 돌로 발음하는 경우로, 울돌목, 돌쩌귀 등의 사례가 있으니 틀린 가정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지만, 이런 사례는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일본어족 계통 언어의 흔적이라는 반박이 가능하다[15]. 게다가 보빈 교수는 한국어 또한 그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수준급으로 구사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해당 예시에 대해, 梁이 현대 한국어 틀의 어원이 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梁은 해협 형태의 지역의 지명으로 사용되었으며 경기도와 서해안 그리고 특히 섬이 많은 남부지역에서 자주 나타난다. 제주방언 '도'로도 남아 있으며 이는 중세 한국어의 영향으로 梁이 중세한국어 시기 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만약 차용어일지라도 지명의 梁은 옛 일본어족의 잔재로 보이지 않는다.
한반도 중남부와 일본열도에 동일한 어족이 존재하였다는 학설은 임나일본부설을 연상시키기에 한국인 입장에서 수용이 껄끄러울 수도 있겠으나, 해당 학설의 대표자인 알렉산더 보빈은 임나일본부설에 전혀 동의하지 않으며 논문을 읽어보면 오히려 임나일본부설과 배치되는 주장을 많이 하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학설이다.[16] 읽기 귀찮다면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열도>반도로 방향을 잡고 있는데 반도일본어설은 반도>일본 열도로 화살표를 잡고 있고, 그 이후 반도에서는 기층 언어로만 남고 북방언어에 흡수 소멸, 일본에서만 생존했다는 입장이다. 이름이 반도 일본어족 가설인 건 그때 쓰인 언어가 현대적 정의로 봤을 때 "일본어족"이라고 이름이 붙은 그 어족의 특징을 가진다는 주장을 나타냈을 뿐이다. 이 가설이 맞다는 전제하에 그 때 그 언어는 그냥 반도 중남부랑 일본열도에 걸쳐서 쓰인 언어 a였고 즉슨 일본만의 언어가 아니었다. a는 현대 시점에서 일본에서밖에 안 쓰이는 어족이라 일본어족이라 이름붙은 그 언어군에 속한다고 봐서 반도 일본어족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뿐이다. 후대에 '일본어족'으로 정의된 것의 이름이 붙어서 그런지 화살표 방향을 착각하는 일이 많은 데 실상은 그게 아니다.
사실 특별할 것도 없는 현상인게 켈트어군도 유럽 대륙에서 발생하고 브리튼제도를 걸쳐 아일랜드로 넘어갔고 대륙 켈트어군은 소멸되었고 도서지역들에서만 살아남아 그 명맥을 이어갔다. 자세한건 켈트어파 참조. 일본어족도 켈트어랑 비슷한 루트를 탔지만 대신 일본어는 도서지역에서는 주류언어로서 제대로 자리잡아 섬에서도 밀려나고 있는 켈트어와 현재 입지가 다르다는 것 빼고는 딱히 다를 것이 없다. 프랑스도 옛날에 대륙 켈트어파에 속한 갈리아어를 썼었고 이제는 흡수소멸된 언어의 흔적이, 규명된 바로는 반도 일본어족이 현대 한국어에 미친 영향보다도 현대 프랑스어에 더 짙게 남아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아일랜드가 프랑스를 정복했다거나 프랑스가 아일랜드에 우월하다거나 하는 주장을 펼치지 않는 걸 떠올려보자.
요약하면 한반도 중남부에는 원래 고일본어 화자들이 주로 거주했었지만[17], 이후 한반도의 고일본어 화자 그룹은, (대략) 기원전 7-6세기부터 만주에서 남하한 고대 한국어 사용자들( 부여어족을 사용하는 화자들로 추정)이 한반도 남부에 정착했고 이들은 고조선과의 교류를 통해 정치적인 힘과 경제력에 있어 우위에 있었기에 이들이 쓰던 고대 한국어가 한반도 전역에서 링구아 프랑카로 널리 쓰이게 됨에 따라 고일본어는 점차적으로 양층언어의 하층언어로 전락하고 사용범위가 점차적으로 축소되다가 기원전후에 이르러서는 일본에서 건너온 이들을 빼면 상용자가 소멸하였다. 일부는 일본 열도로 건너가기도 했으며, 현대의 한국어는 이 남하한 부여어족의 직계 후예라고 보빈 교수는 주장한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삼국시대의 한반도 남부가 오직 일본어족 언어만이 사용되고 한국어족 화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일부 고일본어와 상통하는 지명도 있고 보빈 교수는 이 예시를 들었으나 반대로 지리지에는 한국어 계통과 상통하는 근거도 많이 섞여 있다. 가령 후대 한국어와 명백하게 상통하는 지명인 복홀( 보성군),[18] 달구벌/달구화( 대구광역시)[19] 등이 있다. 즉 원래 한반도 남부에 고일본어 화자가 주거하고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원삼국시대 이전의 일이지 이 문서에서 주로 다루는 삼국시대에 이르면 이미 북방에서 남하한 고대 한국어 화자가 주류를 차지했거나 상당부분 차지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라어는 고조선 유민이 주축이 되어 건국한 신라의 초기 성립 기사나 신라어가 고대 한국어 계통 언어임이 논증되는 사료들을 통해 반도일본어 계통과 구분되고 있다. 즉 애초에 신라어도 '북쪽에서 남하해 기존의 토착세력을 지배한 고대 한국어족'에 속하기 때문에 중세 한국어의 직접적인 전신이 고구려어와 백제어, 신라어 중 어느 쪽이냐는 이 문서 전반부의 논쟁과 보빈 교수의 고대 한국어족 남하 이론은 엄밀히 말하면 별개의 문제이다.
한편 한국학자 중에서 보빈과 유사한 개념을 제창한 학자로는 서울대 김방한 명예교수가 있다. 김방한 교수는, 한반도에 퉁구스(알타이)적 영향을 받은 북방계 어족이 존재하는 것과 별도로, 이들과 이질적인 언어인 '원시한반도어'를 사용하는 기층적 집단이 따로 있어서 서로 공존하였으나 이들 원시한반도어를 쓰는 어족은 북방계 어족에게 흡수되거나 북방계 어족을 흡수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한국어가 형성되었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일본어와 유사하다고 평가받는 삼국사기의 수사자료(3, 5, 7, 10)은 부여계 어족인 고구려어가 아니라 원시한반도어라는 것이다. 관련 주장은 알렉산더 보빈의 반도 일본어설과 세부적인 면에서 그 주장을 달리하지만 한반도내에 이질적인 2개의 언어집단이 공존했다는 입장에서는 보빈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 별개로 고대 한국어와 일본어 간의 연관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 일본서기》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고대 일본어와 고대 한국어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5~6세기 백제어는 고대 일본어와 언어 계통이 달랐으며[20] 6~7세기 신라어 역시 고대 일본어와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보빈의 학설에 따르면 고대 일본어는 한반도 남부에서 먼저 탄생하였지만 이후 북방에서 내려온 부여계어족들에게 밀려서 일본 열도로 쫓겨났고 이후 한반도의 언어는 부여계어족이 주류가 되었기 때문에 서로 이질적인 언어들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고대 한국어의 수사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편찬된 일본의 사전인 '이중력(二中歷)'에서도 '고려어' 숫자로써 헨타이가나로 음차되어 있으며, 백제어 목간과도 교차검증이 된다. 다만 일부 수사는 기록자의 오류로 인해 음가에 차이가 있긴 하다. 게다가 하필이면 기록자가 일부 숫자를 하나씩 밀려서 적는 바람에 늦게 재조명된 감도 있다. 이 문헌에서는 고려어 수사 외에도 귀하국(貴賀國, 기카쿠니)이라는 곳의 언어도 기록하고 있는데,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곳이 어디를 지칭하는지에 대해서는 제주도, 일본 규슈의 어딘가, 류큐 등 의견이 분분하다.
3. 문법
자세한 내용은 신라어/문법 문서 참고하십시오.구체적인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의 문법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고대 한국어의 문법을 자세하게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학자들마다 저 세 언어 역시 십인십색의 견해가 나오는 만큼, 이렇다 할 분명한 문법을 정리하기는 어렵다.
그나마 어순 등의 일부 요소에서 현대 한국어로 이어지는 몇 가지 특성들을 밝혀낸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향찰을 남긴 신라어의 문법 자료가 그나마 많이 남은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어/문법 문서 참조.
- 어순이 현대 한국어와 같은 SOV였다.
- 현대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피수식어는 수식어보다 뒤에 나왔다.
- 현대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격 표지가 있었다. 신라어에서는 목적격 표지로 '乙/肹(을/흘)'이, 주제격 표지로 '隱(은)'이 쓰였다.[21]
고대 이전 한국어가 능격-절대격 언어였다는 가설이 있다.[22] 이 설에 따르면 주격 '이'는 본디 그 기원이 능격 조사 -*i였으며, 절대격 표지는 없었다. 그리고 능격 조사 -*i는 다시 기원적으로 지시어 '이(this)'와 뿌리가 같다.
능격-절대격 가설에 따른 고대 이전 한국어의 문장 구조는 아래와 같다.
- 자동사문: (주어) - (서술어)
- 타동사문: (주어)'i' - (목적어) - (서술어)
이때 자동사문의 주어와 타동사문의 목적어는 모두 절대격으로, 절대격 조사는 없었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면, "돌 움직였다(돌이 움직였다)"가 자동사문이라면 "철수이 돌 움직였다(철수가 돌을 움직였다)"는 타동사문인 셈이고, 이때 자동사문의 주어 '돌'과 타동사문의 목적어 '돌'은 같은 형태로서 같은 격 표지(무표지)를 갖지만 타동사문의 주어인 '철수'에는 능격 조사 '이'가 붙어 있다. 이 같은 문법이 기본 문형이었다는 것이다. 이 가설에서는 이후 절대격이 붕괴하면서 원시 대격인 '-*γir'이 등장했고, 이것이 오늘날의 '을/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4. 삼국언어의 유사성
삼국 언어의 유사성은 어휘 단위로만 조금씩 검증이 시도되는 정도이며, 통사 단위의 접근은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고구려 측에서 고유의 표기를 써서 직접 남긴 문헌자료가 매우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한반도 중~북부의 지명들도 고구려어로 되어 있는지, 아니면 신라어/백제어나 기타 삼한의 언어가 흔적으로 남은 것인지 알기 어렵다. 현재까지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백제어는 신라어와 큰 틀에서 유사했으며 서로 비슷한 향찰 표기 체계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백제어 쪽이 음운 변화가 조금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고구려어로 추정되는 지명들에서는 어두 자음군의 약화/탈락이나 구개음화 등이 확인되어, 이미 당시부터 음운 변화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해준다.5. 어휘
자세한 내용은 고대 한국어/어휘 문서 참고하십시오.
[1]
단적으로, 오늘날 널리 알려진 한국 고대사의 내용들은 거의 전부가 고려 시대에 쓰인 《
삼국사기》, 《
삼국유사》, 외국 사서(중국, 일본), 고고학적 유물 등 네 가지에 연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다만 이 구절도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중국-백제-신라의 과정을 거친 중역으로도 해석할수 있다.
[3]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으로, 이들이 바로 진한(辰韓)의 6부 이다.
[4]
《삼국유사》 〈왕력〉 동명왕 부분에서는 주몽이
단군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있다.
[5]
후술하듯 백제가 고구려를 지칭할 때 사용하던 멸칭은 박적(狛賊)이며, 일본어에서도 고구려를 지칭하는 단어는 공교롭게도
고마, 즉 곰이다.
[6]
초기 백제어나 초기 신라어는 고대 한국어와 고대 일본어(반도 일본어)가 모두 사용된 양층 언어 국가였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7]
다만 애당초 개성은 성덕왕-경덕왕 시기 패강진 개척보다 행정군현의 설치가 대략 5-70년 가량 빠르며, 애초에 패강진 개척과 직접적인 연관도 없다. 그러므로 신라의 패강진 행정지배가 느슨했다는 사실을 신라어와 전혀 다른 개성어가 존재해서, 그것이 고려시대 언어의 기원이 되었다는 가설의 입론의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8]
물론 그러면서도 호족들의 정치 참여나 신분 상승의 길은 철저하게 막아 놓았기에 끝내 망한 나라들의 부흥운동으로 나라가 산산조각나지만, 시스템이 멀쩡할 때는 나름대로 잘 돌아간 건 부인할 수 없다.
[9]
패서 지역을 포괄한 한산주가 지나치게 담당 영역이 넓었고, 패서 지역만은 유독 신라 관헌의 수가 적었고 직급수도 낮은 편이었으며 상당 부분 다른 지역보다 자치가 허용되었음은 '전덕재, 신라 하대 패강진의 설치와 그 성격. 2013년 발간' 논문에서 규명된 사항이며, 그리고 신라의 관헌 설치나 개입 정도도 당나라와의 관계 탓에 시기가 상당히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신형식 저서 신라통사 참조. 2004년 발간. 신라가 패서에 26개 군현을 설치 완료한 시기는 헌덕왕 시기(강봉용,신라 하대 패강진의 설치와 운영)라는 연구가 있었으나 이는 상당히 과거의 연구로서, 현재는 신라가 헌덕왕 때까지도 재령강 이동 지역에 14개 군현을 설치한 것에 그쳤고, 재령강 이서 12개 군현까지 편재를 완료해서 직접 지배를 관철한 건 태봉이었음이 규명되어 있다.(전덕재, 신라의 북진과 서북 경계의 변화, 2016년)(전덕재, 태봉의 지방제도에 대한 고찰, 2022년 발간 경주문화원 발간 경주문화 제27호)
[10]
다만 정체성 측면으로 넘어가면 고려는 삼한을 하나로 합치는 데 성공했다는 측면에서 백제와 신라도 정통으로 인정해준 것이었지 결국 시조를
동명성왕으로 보고 본류는 고구려에서 유래했다는 시각을 거둔 적은 없다. 자세한 내용은
고려/평가 항목 참조.
[11]
황보경, 서울․경기지역 신라 주거지와 건물지 고찰 / 황보경, 고고학적으로 본 용인지역 신라문화의 변천과정 / 박수미, 경기지역 신라말~통일신라시대 수혈주거지 연구 등
[12]
2022년 사망.
[13]
신사의 입구에 세워놓는 문인 토리이와의 연관성도 의심된다.
[14]
참고로 변한 일대도 여타 한국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결국 한국어족 사용자들이 주도권을 차지한 걸로 보인다. 금관국 같은 경우 2세기 중후반 즈음 낙랑에서 온 조선계 유민들이 지배층을 차지한 정황이 유력한데, 이들이 무슨 말을 썼을지는 뻔한 상황. 다만 중앙집권체제가 제대로 이룩되지 않고 정복이 어려운 복잡한 지형 사이사이에 소국들이 난립했던 특성상, 게다가 일본어족 사용자들이 가장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걸로 추정되는 한반도 최남단이라는 위치상 토착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5]
실제로,
일본어와 동일하게 '돌'이나 그와 비슷한 어휘를 문의 의미로 쓰는 사례는 '돌쩌귀'를 제외하면 전부 지명이다. 지명은 보수성이 매우 심한 어휘인데, 가령
아제르바이잔이라는 국명은
마케도니아 제국의 분열 시에 이 지역의 사트라프로 있던 아트로파네스가 독립을 선언한 뒤에 그의 영지라는 의미에서
고전 그리스어로 '아트로파네이'라고 부른 게
페르시아어 식으로 변형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고,
영국의 수도인
런던은
로마 지배시기에 붙여진 '론디니움'이
영어식으로 변형된 것이다. 게다가 론디니움의 경우 아예 새롭게 지어진 라틴어 명칭이 붙었던 게 아니라 로마 정복 이전의
켈트어파 시절까지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튀르키예의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도
오스만 제국 시기까지는
동로마 제국 시절의 이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오스만어로 발음한 '코스탄티니예'라고 불렸을 정도다. 그러니
반도 일본어가 완전히 사멸한지 1000년이 다 된
조선시대까지도 그 흔적은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16]
일본의 역대
천황들 중의 몇몇 사람들이 고대
한국어를 쓰던
한국계 군주라는 주장도 한 적 있는 사람이다. 심지어
혐한
극우들이 벌이는
역사왜곡의 단골 주제인
진구 황후의 정체도 고대
일본을 다스리던 한국인 여왕이라고 하는 사람이니, 일본의
극우들이
알렉산더 보빈의 논문을 읽어봤다면 뒷목잡고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다.
[17]
이 언어가 오늘날의
일본어로까지 이어지기에 '고일본어'로 칭하는 것뿐이다. 원래의
일본어족은 한반도 중남부에서 먼저 생성되었으며, 이후 기원전 7세기-기원전 3세기에 걸쳐
한반도의 고일본어 화자들은 오늘날의 일본 열도로 건너가 오늘날
간토 지방의 서쪽 지역을 모두 일본어 사용지대로 바꾸었다고 추정한다.
[18]
이는 고구려어에서 흔히 쓰인 '홀'이 쓰여 고구려어와 동계통 지명으로 볼 수 있다.
[19]
불 화(火) 자의 훈으로 벌판을 표기한 것이다.
[20]
사비성(소부리) 일대에서 사용된 백제어를 '카라 사히즈리(カラサヒヅリ[韓語\])'라고 주석을 달았다. '사히즈리(サヒヅリ[佐比豆利\], 당대 발음 'sapiduri')' 는 아스카~나라시대 고대 일본어로 외국어, 변방어를 의미하고 고대 일본인이 알아들을 수가 없는 언어가 본래 의미이다. 이 단어는 '새가 지저귐'을 뜻하는 사에즈리(囀り)와 동계어일 가능성이 높다.
[21]
예를 들어
서동요에서는 현대 한국어와 같은 어순과 조사(~은, ~을)를 볼 수 있다.
[22]
휘트만,
보빈 등의 주장으로, 의외로 다방면으로 제기된 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