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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드(순양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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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HMS_Hood_March_17_1924.jpg
1924년의 후드

1. 개요2. 제원3. 함체4. 무장
4.1. 주포4.2. 보조화기
5. 사격통제장치6. 방어
6.1. 측면방어6.2. 갑판방어
7. 속도8. 시설9. 이루어지지 못한 대개장10. 장점11. 단점12. 실전13. 최후14. 생존자15. 기타16. 미디어에서의 등장17. 모형화

1. 개요

HMS Hood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초기까지 영국 해군이 운용했던 어드미럴급 순양전함의 초도함이자 유일하게 건조된 함선이다. 1차 대전 이후 군축 시대인 해군의 휴일 기간 동안 무적의 후드(The Mighty Hood)라고 불리며 영국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군함이었다. 조약의 한계를 넘는 괴물이 분명함에도 특별히 예외로 인정된 군함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마켄젠급 순양전함[1]에 대항하기 위하여 계획 및 건조된 신예 순양전함이다. 함명은 1859년 진수된 전열함 HMS Hood와 1891년 진수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로열 소버린급 전함 HMS Hood와 마찬가지로 18세기에 활약한 해군 제독 새뮤얼 후드(Samuel Hood, 1724~1816)의 이름을 따서 '후드'로 명명되었다. 이 함명의 휘장은 닻을 쥐고 있는 까마귀.

1916년 4월 7일에 계약이 체결되어 그해 9월 1일부터 건조되었다. 1918년 8월 22일에 진수, 1920년 5월 15일에 취역했다. 후드를 진수시킨 사람은 함명의 새뮤얼 후드 제독의 현손 호러스 후드(Horace Lambert Alexander Hood, 1870~1916) 제독의 부인이었다. 호러스 후드 제독은 유틀란트 해전에서 기함 인빈시블(HMS Invincible)의 탄약고 유폭으로 전사했는데 순양전함 후드의 운명을 생각하면 참 기묘한 운명이다.

후드는 건조중 유틀란트 해전의 전훈을 받아들여서 설계되었다. 이 때문에 장갑이 빈약한 영국 해군의 기존 순양전함들과 달리 전투함교나 측면장갑에 약 300mm 두께의 장갑판을 둘렀다. 사실상 순양전함이라기보다는 고속전함에 가까운 함이지만 아무래도 건조중에 설계를 변경한 탓에 여전히 실제 방어구조는 순양전함의 방어구조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특히 갑판은 19mm ~ 76mm 인데다가 단일장갑도 아니고 3층의 다층구조라서 스펙대로의 성능도 안나왔다.

원래 후드는 어드미럴급 순양전함으로서 4척이 건조될 예정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유틀란트 해전의 전훈을 받아들인 신예 순양전함 자매의 일원으로 리나운이나 커레이저스급 형제[2]들을 대체했어야... 했는데 그놈의 유보트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었고 마켄젠급 순양전함이 전쟁개시로 인해 사실상 취소되면서 경쟁자가 사라진 덕분에 후속함 계획이 줄줄이 취소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 기본적으로는 조약에서 지정한 기준배수량 3만5천롱톤을 엄청난 수준으로 넘어가는 후드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 영국이 추가로 양보를 한 덕분에 희생이 만만치 않았다. 일본이 전함 무츠를 살리기 위해 영국과 미국에게 각각 16인치 주포 탑재 전함 2척씩 총 4척의 전함을 추가로 보유할 권리를 줘야 했던 것처럼 영국도 후드를 살리기 위해 기념함으로 남길 수 있었던 드레드노트까지 포함해서 구식 전함을 10척이나 넘게 갈아야 했다. 여기에 더해서 순양전함까지 6척이나 갈려나가면서, 남은 리나운급 순양전함 리나운과 리펄스까지 달랑 셋 중에서 영국의 최신예, 최강, 최후의 순양전함이 되었다.

그러나 후드는 독일의 비스마르크급 전함과 일본의 야마토급 전함이 건조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군함으로 당시 16인치 주포를 탑재한 전함에 비해 화력은 열세라도 그 외 전반적인 성능에서 이들을 능가하는 함으로 평가되며 영국 해군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미국의 콜로라도급 전함은 22노트도 안 되는 저속함이고, 넬슨급 전함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제약을 받아 성능에 문제가 많았으며, 일본의 나가토급 전함도 26노트여서 후드보다 5노트가 느리다. 그 어떤 군함보다도 빠르고 충분히 강력한 15인치 주포가 탑재되고, 방어력도 여타 전함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라면 그 가치는 충분한 셈이다라고 여겨졌다.

취역 직후부터 영국 해군 대서양 함대의 기함을 맡아 여러번 출동했으나, 영국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이 군축 기조로 전함의 수를 늘릴 수가 없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세계 최후의 순양전함으로 남게 되었다.

2. 제원

3. 함체

후드는 폭에 비해 함체가 대단히 길다. 야마토급 전함과 비교해도 길이는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당장 야마토와 길이로는 0.7m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는 두말할 것없이 속도를 위한 것으로, 고출력 증기기관과 보일러를 일렬로 배열하고 수중 저항을 줄이기 위해 가늘게 설계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장갑강화와 무장의 교체 및 증설등으로 인해 배수량은 늘어나는데 부력이 충분하지 않아서 흘수선이 자꾸만 높아지고 견현이 줄어드는 문제가 생겼다. 1929년에서 1931년까지 실시한 소규모 개장에서 만재배수량이 1,320톤이 증가했고 해당 배수량의 증가는 연료탱크의 증가로 인한 연료량 증가 및 보일러용 물의 증가로 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필수적인 개장의 필요가 더해졌고 1941년의 최종적인 상황에서 대공화기등이 증설된 결과 기준배수량이 42,100톤에 이르렀으며 만재배수량은 48,360톤이 되고 말았고 흘수선이 약 700mm 올라가고 함수보다 함미가 수면에서 150mm 올라가는 상태가 만들어져서 함선의 앞쪽이 무거워지고 파도가 선내로 더 많이 들어오며 항해가 힘들어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는 모두 건조 도중의 설계 변경으로 인한 문제점이었고 영국도 이걸 인식해서 이후의 대개장에서 해결하기로 했으나 그 전에 비스마르크 추격전이 터지고 만다.

4. 무장

파일:external/wiki.gcdn.co/Hood-11.jpg
후드의 무장 배치 및 상면도

기본적으로 설치된 무장의 수준도 당대 한정으로 훌륭했고 대규모 개장을 받지 못했지만 보조화기는 그럭저럭 좋은 것으로 바꾸어주고 부포곽을 폐지하는 등의 노력이 있었다.

4.1. 주포

주포 BL Mk.I 15인치 (381mm) 42구경장 함포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의 주포와 동일한 무장으로 360도 선회가 가능한 2연장 주포탑 4기를 장착하여 8문을 확보하였다. 주포탑 배치는 함수에 계단식으로 2기, 함미에 계단식으로 2기를 장착하였고 영국식으로 함수부터 함미방향으로 A, B, X, Y 주포탑으로 명명되었다.

주포탑은 주포의 앙각을 +20도에서 +30도로 증가시킨 Mark II 주포탑을 채택하여 중량 871kg의 포탄을 최대 앙각 30도에서 포구초속 752m/s로 26,520m까지 도달시킬 수 있으며 포신부앙각도는 -5도에서 +30도이다. 철갑탄용으로 6crh 슈퍼차지 장약방식으로 222kg의 부스트 장약을 추가로 사용하면 중량 871kg의 포탄을 최대 앙각 30도에서 포구초속 804m/s로 34,600m까지 도달시킬 수 있다. 주포탑 선회각도는 기본적으로는 360도 회전포탑이지만 장착위치를 고려해서 함수 방향으로 선체중심선 방향을 0도로 잡았을 때 좌우 150도의 선회각도를 가진다. 주포의 포신부앙속도는 초당 5도이며 주포탑 회전속도는 초당 2도이다. 연사속도는 분당 2발이며 장전각도는 -5도에서 +20도이며 동력은 수압으로 작동하고 인력으로 보조한다. 포신수명은 335발이다. 1문당 120발의 포탄이 준비되었으며 주포탄 총 적재량은 건조 당시에 1,073발이고 1931년 근대화개장 이후에는 944발로 줄었다.주포탑 중량은 1기당 894톤이다.

포탄이 원거리에서 낙하하는 각도인 대낙각도의 경우에는 포신각도 +20도에서 일반적인 4crh 장약으로 871kg 중량의 철갑탄을 포구초속 732m/s로 발사했을 때 21,702m 거리에서 29.0도를 나타내며 후드의 경우에는 포신각도 +30.1도에서 일반적인 4crh 장약으로 871kg 중량의 철갑탄을 포구초속 732m/s로 발사했을 때 26,520m 거리에서 42.0도를 나타내며 포신각도 +30.5도에서 일반적인 6crh 장약으로 871kg 중량의 철갑탄을 포구초속 732m/s로 발사했을 때 29,720m 거리에서 40.7도를 나타낸다. 그리고 포신각도 +30.3도에서 6crh 슈퍼차지 장약으로 871kg 중량의 철갑탄을 포구초속 785m/s로 발사했을 때 33,380m 거리에서 40.9도를 나타내며 포탄의 대낙각도가 좋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1930년대에 같은 주포를 쓰는 영국의 전함들이 대개장을 받기 전까지는 후드와 모니터함을 빼고는 포신의 각도를 +20도 이상으로 올리는 것이 불가능해서 후드가 동일한 주포를 사용해도 좀 더 멀리 사격이 가능하였다.

철갑탄의 관통력은 거리 9,144m 에서 측면장갑 422mm와 갑판장갑 32mm를 관통하며 거리 18,288m 에서 측면장갑 297mm와 갑판장갑 72mm를 관통하고 거리 27,432m 에서 측면장갑 229mm와 갑판장갑 145mm를 관통한다. 1차대전의 기준으로는 매우 만족스러운 수준이고 2차대전의 수준에서는 그럭저럭 평균적이며 1선급 전함용 포탄으로 사용이 가능하긴 하다.

4.2. 보조화기

부포 BL Mk.I 5.5인치 (140mm) 50구경장 함포를 단장 부포곽 방식으로 12문을 장착하였다. 원래 그리스 왕국에 판매하려던 버켄헤드급 경순양함을 위해 개발된 Mark I 1915년형 속사포로 기존의 영국 전함들의 부포인 152mm 포탄보다 140mm 포탄 쪽이 20% 가볍고 재장전 속도도 양호했지만 1발당 위력이 떨어지므로 후드만 채용하였다. 성능은 중량 37.2kg의 포탄을 최대 앙각 30도로 포구초속 850m/s으로 16,250m까지 도달시킬 수 있다. 포신부앙각도는 -5도에서 +30도이다. 부포곽 선회각도는 함체 양 측면방향을 0도로 잡았을 때 좌우 150도의 선회각도를 가진다. 부포의 포신부앙속도와 부포곽의 회전속도는 인력으로 움직이는 특성상 일정하지 않다. 연사속도는 분당 12발이며 장전각도는 포신부앙각도 내에서 자유롭게 장전이 가능하며 동력은 인력으로 움직인다. 포신수명은 불명확하며 포탄은 1문당 200발의 포탄이 준비되었다. 부포탄 총 적재량은 1,728발의 리다이트(Lyddite)탄과 582발의 일반탄, 96개의 유산탄과 464개의 연습탄이었고 1931년 근대화 개장 후에는 고폭탄 1,368발과 Shellite탄 624발, HENT탄 360발과 조명탄 50발과 연습탄 449발로 변경된다.

부포곽은 CPII 방식으로 포방패를 포함해서 18.89톤이었으며 선체의 양 측면에 케이스메이트 방식의 단장 부포곽으로 12문 탑재되었다. 1939년 6월에 2문이 철거되었으며 1940년 5월에 완전철거되었고 철거된 부포는 해안포로 전환되었다.

대공포 4인치 (102mm) 45구경장 QF Mark V를 사용한다. 성능은 중량 14.06kg의 포탄을 +45도 각도로 포구초속 728m/s으로 15,020m까지 도달시킬 수 있고 대공사격시에는 +80도 각도로 포구초속 728m/s으로 9,450m까지 도달시킬 수 있다. 포신부앙각도는 -5도에서 +80도이며 포좌선회각도는 360도 자유회전이 가능하다. 동력원 없이 인력을 사용한 수동으로 모든게 돌아가기 때문에 포신부앙속도과 포좌선회속도는 일정하지가 않다. 분당 10 ~ 15발로 연사가 가능하며 포신수명은 600발에서 850발이다. 1문당 150발의 포탄이 준비되었으며 대공포탄 총 적재량은 600발의 고폭탄과 200발의 조명탄이다.

대공포좌는 단장 대공포좌로 포방패를 제외하고 7.1톤이었으며 총 4문이 탑재되었으며 1937년에는 2문이 증설되었고 1년 후에는 2문이 추가로 증설되었다. 이들 대공포는 모두 1939년 6월에서 8월 사이에 완전철거되었고 양용포로 교체된다.

양용포 4인치 (102mm) 45구경장 QF Mark XIX를 사용한다. 성능은 중량 15.88kg의 포탄을 +45도 각도로 포구초속 811m/s으로 18,150m까지 도달시킬 수 있고 대공사격시에는 +80도 각도로 포구초속 811m/s으로 11,890m까지 도달시킬 수 있다. 포신부앙각도는 -5도에서 +80도이며 포탑선회각도는 360도 자유회전이 가능하지만 장착위치상 340도까지 회전이 가능하다. 동력원 없이 인력을 사용한 수동으로 모든게 돌아가기 때문에 포신부앙속도과 포좌선회속도는 일정하지가 않다. 분당 15 ~ 20발로 연사가 가능하며 포신수명은 600발이다. 1문당 250발의 포탄이 준비되었으며 양용포탄 총 적재량은 2,000발의 대공사격 겸용 고폭탄과 250발의 조명탄이며 1940년에는 대공사격 겸용 고폭탄이 4,600발로 크게 증가했다. 그 외에 17.35kg 중량을 가지는 SAP(반철갑탄)을 보유하여 대수상전도 사용이 가능하나 일반적으로는 대공사격 위주로 사용했다.

양용포탑은 Mark XIX형으로 16.81톤이며 2연장 포탑이다. 1939년 6월에 양용포탑 4기가 장착되어 8문을 확보했고 1940년 5월에는 양용포탑 3기를 추가 장착해서 14문까지 수량이 늘었다.

대공기관포는 처음에는 장비하지 않았지만 1931년에 근대화개수를 하면서 2파운더 (40mm) 39구경장 8연장 QF Mark V를 장착하였다. 해당 대공기관포는 폼폼 포로 불리는 것이다. 성능은 중량 0.91kg의 포탄을 +45도 각도로 포구초속 585m/s으로 3,475m까지 도달시킬 수 있고 대공사격시에는 +80도 각도로 포구초속 585m/s으로 1,100m까지 도달시킬 수 있다. 포신부앙각도는 -10도에서 +80도이며 포좌선회각도는 360도 자유회전이 가능하다. 동력원 없이 인력을 사용한 수동으로 모든게 돌아가지만 기관포좌가 중포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가볍기 때문에 포신부앙속도와 포좌선회속도가 모두 초당 15도이다. 수랭식으로 냉각하며 분당 95 ~ 98발로 연사가 가능하며 포신수명은 5,000발이다. 1문당 720발의 포탄이 준비되었으며 포탄은 대공포탄용 고폭탄과 대공포탄용 예광탄이었다.

대공기관포좌는 8연장 기관포좌로 중량은 15톤이며 Mk V형 2기를 시작으로 1937년에는 Mk VI형 1기가 증설되었으므로 총 24문을 보유하였다. 그러나 전부 구식의 LV(Low Velocity)탄만 사용가능한 형식이라서 1938년에나 개발이 완료되고 1941년에야 사용가능해진 포구초속 732m/s를 자랑하는 신형의 HV(High Velocity)탄을 사용할 수 없으며 HV탄을 쓰려면 기존의 폼폼 포를 완전하게 HV탄을 사용가능한 모델로 교체해야 하는데 후드는 이런 혜택을 보기도 전에 침몰하고 만다.

대공기관총은 12.7mm 62구경장 Mark III을 장착하였다. 해당 대공기관총의 성능은 중량 0.08kg의 총탄을 +45도 각도로 포구초속 768m/s으로 4,570m까지 도달시킬 수 있고 대공사격시에는 +80도 각도로 포구초속 768m/s으로 730m까지 도달시킬 수 있다. 대공사격시에는 기관총탄이란 빈약한 탄약으로 항공기라는 강력한 상대에게 타격을 줘야 하는 특성상 유효사정거리가 대단히 짧아진다. 총신부앙각도는 -10도에서 +70도이며 총좌선회각도는 360도 자유회전이 가능하다. 동력원 없이 인력을 사용한 수동으로 모든게 돌아가므로 총신부앙속도과 총좌선회속도는 일정하지가 않다. 수랭식으로 냉각하며 분당 600 ~ 700발로 연사가 가능하지만 탄창 교환 및 냉각 때문에 실제로는 분당 150발 ~ 200발이다. 총신수명은 5,000발이다. 1문당 2,500발의 총탄이 준비되었으며 탄약통 내부에 담긴 200발짜리 탄창벨트로 장전한다. 탄창 무게는 27.2kg이고 숙련된 인원이 운영할 경우 4연장 기관총좌에 달린 4개의 탄약통을 30초 이내에 교체가능했다.

대공기관총좌는 4연장 기관총좌로 Mark I형 2기를 1931년에 장착하는 것을 시작으로 1933년에는 Mk I형 2기를 추가로 설치하였고 1937년에는 모든 기관총좌를 Mark III형으로 교체하여 총 16문을 확보하였다. 대공기관총좌의 중량도 Mark I은 728kg 이지만 Mark III은 1,170 kg이다.

대공용 로켓포로 UP AA Rocket Mark I를 사용했다. 대공화력 강화를 위해 1940년에 장착한 무기로 7인치(178mm) 핀 안정화 로켓발사기 20기가 1개 포좌로 구성된 물건으로 로켓을 발사하면 일정 고도까지 비행한 후에 폭발하면서 소형 폭발물이 얇은 와이어로 연결된 낙하산에 매달려서 사방에 흩뿌려지는 무기였다. 주로 저공비행하면서 함선을 노리는 적 항공기의 날개에 와이어가 걸리면서 낙하산과 폭발물이 항공기와 충돌해서 폭발 후 격추시키는 공격을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탄약의 경우에는 로켓의 길이는 32인치(813mm)이고 무게는 35파운드(15.9kg). 유효사거리는 910m였으며 낙하산 하강 속도는 초당 5 ~ 7m/s다. 로켓발사기 20기가 1조로 묶인 포좌의 무게는 4톤이며 후드에는 보트 갑판 양 측면에 각각 2기씩 장착하고 B번 주포탑 지붕 위에 1기를 장착해서 총 5기를 장착하여 100문을 장착했다.

예포 3파운더 (47mm) 40구경장 QF Marks I을 사용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함선으로 다가오는 어뢰를 격파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1.5kg의 포탄이 그런 목적으로 쓰기에는 빈약해서 1차대전 이후에는 예포 겸 연습용 대포로 전환되었다. 건조 당시에 단장 포좌로 4문을 사용하였으며 1939년에 완전제거한다.

어뢰로는 533mm 어뢰발사관을 6기를 장착했다. 4기는 전방함교 근처의 갑판 위에 설치한 수상어뢰발사관이고 2기는 선수 근방의 흘수선 아래 수중에 설치한 수중어뢰발사관이다. 원래 설계상에는 총 10문의 어뢰발사관을 보유하려고 했으나 중간의 설계변경으로 6기로 줄었다. 수상어뢰발사관은 장약의 폭발압력으로 발사하고 수중어뢰발사관은 압축공기의 압력으로 발사했다. 어뢰는 Mk IV 어뢰로 12발을 보유했으며 어뢰 탄두는 14개의 일반탄두와 2개의 연습용탄두로 총 16개를 어뢰용 탄약고에 보관했다. 수중어뢰발사관은 1937년에 제거하였으나 수상어뢰발사관은 후드가 침몰할 때까지 유지한다.

5. 사격통제장치

사격통제장치는 Mark V형 파이어 컨트롤 테이블(FCT: Fire Control Table)이 탑재되었다. 전방함교에 설치된 9.15m 측거의와 후방함교에 설치된 4.58m 측거의에서 나온 자료를 종합해서 사격을 통제한다. 각각의 주포탑에도 9.15m 측거의가 설치되었으므로 사격통제장치의 이상시에도 주포탑 스스로도 자체 조준에 의해 주포를 발사할 수 있으며 사격통제장치의 도움 없이 함수방향 주포탑과 함미방향 주포탑을 서로 나누어서 다른 목표에 사격해야 할 경우에는 선수방향은 2번 주포탑에서 지휘하고 선미방향은 3번 주포탑에서 지휘한다.

부포와 대공포는 2.74m 측거의를 탑재하였지만 실제 운용은 FCT를 사용하지 않고 구식의 수동 계산법을 사용하였다. 해당 측거의는 1924년에 9.15m 측거의로 교체되었으며 1931년의 개조에 의해 대공포에 데이터를 보내는 HACS(High Angle Control System) Mk I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1939년 9월에는 HACS Mark III으로 교체되었다. 폼폼 포용 사격통제소도 도입되었으며 1940년의 시점에서는 상당수의 영국 군함의 사격통제시스템이 레이더와 아날로그식 컴퓨터 위주로 돌아가며 광학식 측거의는 고장시의 백업용으로 전환되었다.

1941년 1월부터 3월에 걸친 개수로 대공수색레이더 279와 사격통제레이더 284가 전방함교에 설치되어 1941년 4월부터 운용 시험을 개시했다. 그러나 대공수색레이더는 송신용 안테나만 설치하고 수신용 안테나는 설치하지 않아서 사실상 무용지물이었으며 그 상태에서 비스마르크 추격전에 참가하고 만다.

6. 방어

파일:iXGMLSf.jpg
후드의 장갑구조

원래 후드의 방어력은 타이거급 순양전함과 비슷한 현측장갑 8인치(203mm)와 갑판장갑 3인치(76mm)이지만 현측장갑을 각도 12도로 경사를 줘서 경사장갑의 효과를 부여해서 현측장갑에 착탄하는 포탄의 경우에는 기존의 순양전함보다 방어를 더 잘하도록 기본설계를 잡았다.

그러나 함선의 건조가 시작된 후에 유틀란트 해전에서의 교훈을 받아들여서 설계를 변경한 후 재시공에 들어갔다. 하지만 해당 해전의 교훈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이미 함선 건조 공정이 너무 많이 진행된 상태라 현실을 반영해서 기존 설계안보다 장갑을 대략 5천톤이나 증강하는 방식으로 설계를 변경한다. 이를 통해 배수량에 대비해서 방어용으로 쓰인 배수량의 비율이 32.7% 까지 도달한다.

6.1. 측면방어

집중방호구역을 만드는 집중방어방식이 아니라 구식의 전체방어방식을 채용하였다. 그 이유는 본래 설계가 순양전함이라 방어할 면적이 넓었고 1~2발 정도의 소량의 피탄으로 속도가 크게 줄어드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방어구조는 1차대전까지의 주력함에서 채용된 2중방어형 터틀벡 방식으로, 측면으로 날아오는 포탄이 제1장갑에 명중해서 피모철갑탄의 피모를 벗겨내면 경사장갑으로 장착된 내부의 제2장갑이 포탄과 파편의 침입을 막아내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후드의 경우에는 제1장갑도 경사장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장갑이 12인치(305mm), 중갑판 측면이 7인치(178mm), 상갑판 측면이 5인치(127mm)의 두께를 가지고 있으며 내부의 제2장갑은 2인치(50.8mm) 두께를 가진다. 집중방어구역이 아닌 지역은 함수방향의 일부 구역에 5인치(127mm) ~ 6인치(152mm)의 장갑이 있으며 함미방향의 일부 구역에도 6인치(152mm)의 장갑판을 설치했다.

흘수선 아래의 장갑은 주장갑 하부부터 3인치(76mm)까지 크게 얇아지고 그 이후에는 함저의 바닥까지 38mm의 장갑을 가진다. 벌지는 흘수선 아래부터 설치되어 있으며 액층, 공기층, 38mm 장갑판, 연료탱크의 3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부 수밀격벽은 18mm의 장갑을 가진다. 함체 바닥은 2중구조로 내부에는 물이나 연료를 주입해서 어뢰나 기뢰 폭발의 충격을 막으려고 했다.

주포탑은 Mark II형으로 기존보다 장갑이 강화되어서 전면장갑은 14.7인치(373mm), 측면 전반부 장갑은 11.76인치(299mmm), 측면 후반부 장갑은 10.78인치(274mm), 후면장갑은 10.78인치(274mm), 천장장갑은 4.9인치(124mm), 바닥장갑은 바벳 상단부로 보호되지 않는 지역에 한해서 2.94인치(75mm)였다. 주포탑 바벳의 장갑은 현측 주장갑으로 보호되지 않는 지역에서 10인치(254mm) ~ 12인치(305mm)이고 현측 주장갑으로 보호되는 구역은 5인치(127mm) ~ 6인치(152mm)였다. 탄약고는 최대 15인치(381mm) 장갑으로 구성된 상자 형태로 만들어졌다. 장갑함교는 전면 11인치(279mm), 측면 9인치(228mm), 천정 5인치(127mm)로 방어된다.

현측장갑에 신경을 많이 쓴 덕분에 15km ~ 20km 거리에서 대응방어를 달성했다. 그리고 집중방호구획 이외의 구역에 피탄시에도 어느 정도 속력의 유지를 할 수 있는 방어력을 갖추었다. 당장 후드의 집중방호구역을 둘러싼 300mm 주장갑은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이 쏘는 주포탄을 상대로 해도 18km를 넘어가면 막을 수 있다.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의 280mm 주포가 주포구경은 작으나 관통력은 근거리에서 15인치 주포 이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수준이다. 게다가 함의 규모가 커 설령 피탄되더라도 탄약고나 보일러실이 정통으로 피격되지 않는 한 피해 통제 수준에 따라 침몰까지 소요되는 시간도 길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 순양전함이고 배수량도 그 당시 역대 최고수준이라 방어할 면적이 너무 많았다. 당장 주장갑만 따져도 1번 주포탑부터 4번 주포탑까지 거리가 172m라서 전장의 66% 정도에 이르렀으며 해당 거리를 모두 장갑으로 덮은 나머지 주장갑의 상하폭이 4.79m로 좁고 그나마 일부는 수면 아래에 잠겨 있어서 주장갑으로 보호되는 높이가 너무 낮다. 덤으로 주장갑 위에 장착된 장갑도 두께가 178mm인데도 불구하고 상하폭이 2.79m에 불과했고 그 위로는 127mm 장갑이라서 측면으로 날아온 전함급 주포탄이 약간 높게 날아오면 주장갑 높이를 뛰어넘어서 얇은 장갑을 뚫고 함체 내부로 진입하여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부포곽 지역의 장갑이 없다시피 해서 피탄시 유폭이 발생할 위험성이 높았다. 그래서 부포는 모두 철거되고 양용포탑으로 대체한다.

6.2. 갑판방어

갑판의 방어는 빈약했다. 일반적인 지역은 0.75인치(19mm)에서 2인치(51mm) 수준이었고 주갑판이 대략 1인치 (25mm) 수준이었으며 탄약고 같은 필수방어지역만 총계 3인치(76mm)로 강화된다. 그 외에 연통의 뿌리 부분에는 13mm 장갑이 붙고 전방함교의 뿌리 부분에도 38mm 장갑이 붙었다.

기본적으로 3단의 다층구조지만 장갑의 두께가 얇고 합산한 장갑의 두께도 크지 않아서 대낙각탄에 매우 취약하다. 소구경탄이나 중구경탄에는 다층구조로 철갑탄의 피모를 벗겨낼 수 있지만 전함이 쏘는 대구경탄 같은 경우에는 피모도 제대로 못벗기고 주갑판까지 모조리 뚫릴 위험성이 높았다.

건조 당시에는 중요방어구획에 한해서 대응방어를 20km ~ 25km 수준으로 빠듯하게 달성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도 해봤지만 후드 외에 취소된 어드미럴급 순양전함들은 후드보다 갑판방어를 강화하고 벌지와 현측장갑을 수정할 계획이 이미 잡혀있던 상황이라서 그냥 자기위안적인 생각에 불과했다.

실제로 1918년과 1919년에 시행한 실험으로 이러한 문제점이 입증까지 되었으나 더 이상 장갑을 붙이면 흘수선이 엄청나게 내려가서 수면과 최상갑판 사이의 건현이 크게 줄어들게 되므로 악천후에 대규모 침수를 당하거나 큰 파도 맞고 엄청난 양의 물이 함선 내부로 들어가서 침몰할 위험성이 있어서 더 이상 장갑을 증설하지 못한 것이다.

7. 속도

보일러의 경우 중량감소와 공간절약에 효과가 있는 야로우(Yarrow)식 보일러를 24기를 탑재했다. 해당 보일러는 세밀한 관을 사용해서 가열 면적 677.26m²및 작동 압력 235psi 를 달성하였으며 보일러에 사용되는 물은 4개의 주펌프와 2개의 보조펌프로 보일러 내부에 공급하였으며 연기는 2개의 연통으로 배출하였다. 터빈은 브라운-커티스(Brown-Curtis) 증기터빈으로 4기 4축추진으로 설치하였다.

동력기관의 배치는 함수 방향에 보일러실이고 그 뒤로 터빈을 배치하는 기계실을 설치하였다. 보일러실은 횡격벽으로 구분된 4실 구성으로 1실당 보일러 6기를 탑재했다. 기계실은 횡격벽으로 구분된 3실 구성으로 제1기계실에는 외축용의 터빈 2기, 제2기계실은 좌현측 내축 1기, 제3기계실에는 우현측 내축 1기를 배치하였으며 기관부의 용량은 선체 중앙부쪽 선체 길이중 90m를 차지했다. 4축 모두 스크류 프로펠러는 4엽 날개를 장착했고 직경이 4.572m 이고 중량이 20.3톤이었다.

이렇게 동력기관에 투자를 많이 한 덕분에 계획 출력 144,000마력으로 31노트를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공시시에 최대 출력 151,280마력으로 32.07노트를 발휘해 계획치를 능가했다. 이 결과로부터 기본적으로는 31노트로 운용할 수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연료 탱크는 중유 4,064톤을 적재 가능하며 항속거리는 10노트에서 4,000해리로 계산되었다. 취역 후 1931년 소규모 근대화개장시 연료탱크 증설을 실시해서 중유 탑재량은 4,615톤으로 늘었고 항속거리는 14노트로 8,900해리를 항행가능하게 되었다. 그 대신 만재배수량은 48,000톤에 이르렀다.

8. 시설

발전기는 200kW 발전기 8기가 장착되었다. 이 중 4개는 이중 팽창 왕복 증기 엔진으로, 2개는 터빈으로, 2개는 디젤 엔진으로 구동되었다. 발전기를 가동시키는 동력장치 중 일부가 고장난 경우 발전기에 전력을 공급하는 방법을 분할하여 시스템이 어느 정도 일부라도 제대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전기는 주요설비용으로 220V의 전압으로 직류를 생산하거나 함선용 펌프를 작동하는데 사용하도록 135V의 전압으로 교류를 생산하였다.

함선용 펌프는 각 보일러실에 설치된 시간당 1,000톤 용량의 터빈 펌프와 동력실의 순환 펌프로 구성되며 기본 임무 이외에 침수시 물을 함선 외부로 배출하거나 선체 하부등에 쌓이는 찌거기 배출에도 이용할 수 있다. 그 외에는 어뢰 발사관 구획을 비롯한 함내의 각 지역에 별도의 펌프 시설이 존재하는데 펌프의 동력은 증기나 전기로 충당한다.

화재시 대응하는 소방용 시스템은 시간당 50톤 용량의 전기 펌프와 시간당 75톤 용량의 증기 펌프를 통해 소화수를 공급하는 구조이며 함내에 고루 펼쳐져 있다.

수상기 캐터펄트는 1기를 설치했다. 1931년에 3번 주포탑 위에 설치하였으나 1932년의 개조시에 후갑판에 있는 함재기 정비용 크레인과 함께 철거된다. 사유는 후드는 원래 수상기용 격납고가 없기 때문에 수상기와 관련 시설이 악천후에 자주 노출되므로 쉽게 고장나고 노후화되며 사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취역 당시 후드의 승조원은 1,123명의 장교와 부사관 및 수병으로 구성된다. 인원은 계속 증가해서 2차대전이 터질 무렵이 되면 1,400여명에 도달한다. 이들의 식량 공급을 위해 식량창고에 4개월용의 식량과 1개월용의 고기를 보관하는 식량창고가 있으며 빵의 경우에는 하루에 900kg 분량의 빵을 굽는게 가능한 선내 제빵소가 설치된 상태다. 식수의 경우에는 6개의 해수 증발기 방식의 해수 담수화를 사용할 수 있는데 1기당 각각 하루에 80톤의 담수를 공급할 수 있다. 해수 증발기는 식수 공급 외에도 보일러용 물의 손실을 보충하는 등의 다른 목적에도 사용되었다.

9. 이루어지지 못한 대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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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격침당하지 않았을 경우 1942년 완공 예정되었던 개장공사[3]가 시행된 것을 가상한 사진

대규모 개장을 받지는 못했지만 소규모 개장은 받았다. 1931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개장으로 폼폼 포 설치, 부포의 철거, 대공포의 교체, 양용포의 설치, 수중어뢰발사관의 폐지, 대공화기의 증설, 사격통제장치의 개량 및 증설, 레이더의 설치등 항목이 꽤 많다.

하지만 다른 영국의 구형 전함과는 달리 단 1척만 존재하며, 영국의 어떤 군함도 후드가 부재한 때에 해당 역할을 대체할 수 없어서 일본이나 이탈리아의 전함처럼 동력부를 교환하는 등 대개장을 실시할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타이거급 순양전함을 남겨서 후드가 간단한 정비나 수리등을 할 때 대역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서 타이거가 퇴출대상으로 직접 언급되는 통에 1931년에 퇴역 후 해체되면서 더 이상 대역으로 쓸만한 군함이 없게 된다.

덕분에 시간이 흐르며 기관부가 노후되어 후드의 최고속력이 31노트에서 28노트로 떨어졌다. 이마저도 간신히 복구한 것에 그친 것으로 심각할 경우에는 25 ~ 26노트까지 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때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증기의 누출이 하도 심해서 보일러용 물을 추가로 계속 공급하기 위해 해수 담수화 장치를 계속 가동하기 위해 출력의 상당부분을 투입해야 했으며 추운 날씨에는 증기 누출이 더 심해지므로 승조원의 목욕, 사워, 세탁에 온수를 투입할 수 없었고 심지어 취사쪽에 증기 가열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해서 취사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덕분에 출력이 많이 하락하고 그나마 나온 출력을 다른 곳에 써야 하니 고속을 낼 수 없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개전 직전의 급박함과 자금 및 시간, 인력의 부족으로 인해 결국 대개장을 실시하지 못해 함체 방어구조를 변경할 수 없었고, 취약한 방어구조가 그대로 유지되며 안타까운 최후의 원인이 되었다.

후드가 대개장을 받아야 할 필요성 자체는 영국도 이미 건조시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건조중에 재설계를 통해서 후드를 만들었고 어드미럴급 순양전함의 나머지 함선들은 아예 처음부터 설계를 제대로 다시 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1919년 7월에 제안되었으나 실행되지 않은 추가 강화안에서도 갑판장갑을 강화하고 구조를 변경해서 5인치(127mm) ~ 6인치(152mm)로 만드는 건이 나왔던 적이 있다.

그래서 1939년에 실시하여 1942년에 완료할 예정으로 만들어진 대개장안에서는 양용포를 킹 조지 5세급 전함 5.25인치 (134mm) 50구경장 QF Mark I으로 교체하고 동력기관을 모두 신형으로 교체해서 보일러와 터빈을 경량화하고 출력을 높이며 전방함교를 킹 조지 5세급 전함에 나온 것과 같은 캐슬형 함교로 바꾸고 방어구조를 전면적으로 바꾸어서 갑판장갑을 크게 강화하고 벌지도 강화하며 신형 연돌을 설치할 예정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리나운급 순양전함 1번함인 리나운이 후드를 땜빵칠 수 있을 만큼은 강력해지기 위해 1936년에서 1939년까지 대개장을 받는다. 그 다음 차례였던 후드와 리펄스는 2차대전으로 인해 개장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리펄스의 경우에는 리나운이 있으니 그나마 나은 경우인데 후드의 경우에는 1939년에 대개장을 시작해서 1942년에 방어구조 변경을 포함한 대규모 개장이 완성될 예정된 상태라서 더 아쉬운 상황이었다. 리나운이 리펄스보다 먼저 받은 이유는, 리나운이 왕실 순방에 동원되던 전함이라서 KGV나 후드만큼이나 격이 높은 주력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후드가 워낙 취약부위에 럭키샷을 제대로 맞아서 1942년의 대개장이 실현되었더라도 동일한 전투상황과 피탄이 발생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든다. 당장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의 11.1인치(280mm) 주포가 3만 야드(대략 27km)에서 현측 관통력이 200mm가 넘게 나오는데, 비스마르크 추격전 당시의 거리는 훨씬 가까웠고, 샤른호르스트급보다는 더 강한 주포탄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10. 장점

건조 당시의 후드는 무적의 후드(The Mighty Hood)란 소리를 들을 만큼 훌륭한 군함이었다.

15인치 주포 8문의 화력과 측면장갑이 12인치(305mm) 경사장갑이고 속도도 31노트인데다가 고속으로 장거리 순항도 가능하니 큰 문제점이 없다시피 한 것이다.

그리고 방어력이 약한 다른 순양전함과는 달리 적어도 측면장갑은 매우 튼튼하여 당대의 전함과 맞먹거나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므로 1차대전식 측면장갑 관통하기 식으로 해전이 진행될 경우에는 전함의 역할을 당당히 수행하면서 전투가 가능하다.

그래서 순양전항을 최대한 고속전함과 비슷하도록 만든 함선이라고 언급될 정도다. 다만 이런저런 문제점 때문에 순양전함으로 남고 만다.

11. 단점

본격적으로 실전에 투입되는 2차대전 시기의 후드는 여러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결합된 결과 낡아빠진 노령함이 되고 말았다.

건조 당시부터 건조중에 설계변경을 통해서 완성된 만큼 근본적으로 설계를 시작부터 바꾸지 못하고 장갑의 두께를 늘려서 대응한 결과 비효율적인 면과 흘수선 상승 및 건현 감소라는 부작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서 자매함들인 어드미럴급 순양전함들이 모조리 취소되는 바람에 동형함이 1척도 없는 상태에서 영국 해군의 가장 강력한 군함이 된 덕분에 수리나 정비등으로 1선에서 물러날 경우 대체할 군함을 찾기 어렵고 그나마 대체할 군함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사라진데다가 마지막으로 남은 순양전함 타이거조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 퇴출대상으로 직접 언급되면서 퇴역하는 통에 대개장을 받지 못했다.

그 결과 2차대전이 터질 무렵의 후드는 빈약한 갑판장갑, 비효율적인 장갑구조, 심각하게 노후화된 동력기관, 대규모 정비보수가 필요한 각종 시설, 숫자와 능력이 모두 모자란 대공장비등의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게 되었고 허우대만 멀쩡해보이고 속은 골병이 든 군함이 되고 만다.

영국도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라서 없는 돈을 끌어모아서 대개장 계획을 세웠으나 갑자기 처음부터 아무런 계획과 경험 없이 대개장을 할 수 있는게 아니므로 일단 주포가 후드와 동일하고 동형함이 많은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부터 대개장을 시작하고 순양전함도 리나운을 대상으로 대개장을 한 후 1939년부터 후드를 본격적으로 뜯어고칠 계획을 가지고 작업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1939년이 될 시점에는 이미 전쟁 터지기 일보 직전 상태가 되었으므로 예상 개조시간이 3년 가깝게 소요되며 막대한 비용과 자재가 들어가는 후드의 대개장을 도저히 할 처지가 아니었고 전간기동안 대공황등으로 인해 사실상 무장해제 상태에 가깝게 전락한 영국 육군이나 공군 및 해군의 다른 분야에도 자금과 시간과 인력이 요구되었으므로 후드는 결국 대개장을 못받고 실전에 투입되었으며 처참한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12. 실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 후드는 영국의 본토함대 산하 순양전함 전대에 소속되어 실전에 투입되었다. 1939년 9월 25일에 손상된 잠수함인 스피어피쉬(HMS Spearfish)의 귀환을 엄호하기 위해 본토함대가 출격했을 때 후드도 투입되었으며 곧 독일군에게 발각당해서 독일 공군(나치 독일)의 KG26과 KG30 폭격기부대의 Ju 88이 투하한 250kg 폭탄 1발에 명중당한다. 이 때의 손상으로 좌현측의 벌지와 증기 응축기가 손상된다.

1940년 4월 4일부터 6월 12일 까지 손상을 대강 수리한 후 캐터펄트 작전 등의 실전에 투입되었으나 됭케르크급 전함 1번함 됭케르크에게 15인치 주포탄 4발을 명중시키고 좌초하게 만드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2번함 스트라스부르가 도망치는 것을 후드와 경순양함 몇 척이 추격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해군의 프리깃이 난사하는 어뢰를 피하기 위해 2시간만에 추격을 중단하였고 이 과정에서 어뢰를 피할 목적으로 기관에 과부하를 줘서 28노트로 움직이는 과정에서 후드의 증기터빈이 손상되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덤으로 포격전에서 프랑스군의 포탄 파편으로 인해 후드의 승조원 2명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렇게 후드에게 손상이 계속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영국이 여유가 없어서 Force H의 기함으로 임명되거나 프랑스의 비스케이만을 봉쇄하는 임무에 투입되거나 호송선단을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등 신나게 사방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마구 사용되다가 간신히 수리를 받기 시작했다.

1941년 1월부터 3월까지 후드는 긴급수리를 받고 부포를 제거하고 양용포를 증설하고 대공화기를 늘리는 등 최후의 수리 및 개조를 받았다. 이런 조치 후에도 후드의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독일의 주력함이 슬슬 나타나는 시점에서 더 이상 시간이 없었고 킹 조지 5세급 전함이 취역한 숫자도 아직 모자라서 후드가 다시 전면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13.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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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Sinking_of_HMS_Hood.jpg
후드의 침몰
Hood vs. Bismarck(자막 없음)

대서양에 진입한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를 저지하기 위해 영국의 신예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함께 출격했다. 5월 24일 오전 5시 37분에 영국 함대가 독일 함대를 발견하고 전투가 시작되자 후드는 독일 함대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을 시작했는데 작고 약한 전함이 최신예 전함과 전투할 때 근접거리까지 접근해서 치명타를 먹일 의도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오전 5시 52분에 후드가 프린츠 오이겐에게 포격을 실시했고 독일 함대는 오전 5시 55분에 후드에게 포격을 개시하였으며 포격 시작 당시 양 함대간 거리는 20km 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스마르크와 같이 행동하는 독일의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이 2번째와 3번째 일제사격에서 발사한 8인치 포탄에 후드가 명중한다. 해당 포탄은 후드의 보트 갑판에 튕긴 후에 대공포용 탄약과 UP 대공로켓 포대 사이에서 작렬해서 큰 화재가 발생하면서 비스마르크에게 절호의 사격목표가 되었다.

후드가 후방 주포탑도 사용하기 위해 함선을 좌현으로 20도 선회하는 동안 비스마르크의 5번째 일제사격이 오전 6시 정각에 15km ~ 18km 이라는 근거리에서 후드를 덮쳤으며 적어도 2발 이상의 명중탄이 발생한다. 그 상황에서 비스마르크의 15인치급 주포탄이 후드의 선회 기동시 드러난 흘수선 밑의 취약지점를 관통하게 된다. 상식적으로 흘수선 밑부분으로의 명중탄은 보통 설계의 큰 고려대상이 아니어서 비스마르크의 럭키샷(?)은 후드 내부의 7인치 장갑판이 보호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교묘히 관통했다.

취약지점에 명중한 비스마르크의 주포탄은 별로 방해를 안받고 양용포 탄약고에 명중하며 유폭이 발생한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후방 마스트와 후방연돌 사이의 부분에서 거대한 유폭이 일어났다. 엄청난 폭발로 함미부분이 날아가면서 후방 주포탑들이 바벳과 함께 박살나서 큰 파편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일 정도였고 함선이 두 동강이 났다.

후드의 탄약고 위치를 감안할 때 15인치 주포탄이 아닌 4인치 양용포탄이 거대한 유폭에 제일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으로 보인다. 4인치는 구경상으로 102mm에 가까운 탄이다. 현용 구축함들의 주포인 5인치(127mm) 함포보다 딱 1인치 작은 함포인것이다. 그리고 대공과 대수상 목표를 향해 연사를 빠르게 하는것이 주 임무인 양용포의 특성상 대량의 양용포탄들이 탄약고에 적재되어있다. 거기에 해당 양용포 탄약고의 위치는 함체의 중앙이면서 동시에 후미의 3번 주포탑의 탄약고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해당 양용포 탄약고가 유폭하게 되면 함체 중앙에 유폭이 일어나는 셈이고, 거기에 유폭으로 인해 바로 옆의 주포 탄약고도 같이 대폭발에 휘말려 대규모 유폭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060529_Hood_explosion_sketch.jpg
교전 후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함장 존 카터럴 리치 대령이 보고서에 첨부한 후드 격침 당시의 목격상황을 직접 그린 스케치

그 결과 불과 3분만에 후드는 순식간에 폭침당한다. 후드는 두 동강이 나서 수직으로 침몰했는데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1번과 2번 주포탑이 침몰 직전에 비스마르크를 향해 마지막 발포를 하였다. 승조원인 테드 브릭스의 증언에 따르면 폭침을 당하고 두 동강이 나서 침몰할 때까지 홀랜드 제독과 랄프 커 함장은 브릿지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목격자들은 그 큰 군함이 나뭇잎처럼 팔랑거리더니 두 동강이 나서 가라앉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순양전함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드러난 것이다. 더불어 동행한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4연장 주포탑인 A, Y 주포탑이 말썽을 일으켜 제대로 된 사격을 할 수 없었던 상태에서 함교 부근에 명중탄을 맞아 함장은 무사했지만 지휘부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 사망 13명와 부상 9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여 대영제국 굴욕의 산 증인이 됐다.

대영제국의 자존심이었던 후드가 비스마르크에게 폭침당하고, 신예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다는 비보를 접한 영국 해군은 한동안 멘붕 상태에 빠져 있다가...

이내 충격은 모두 분노로 바뀌었고, 매우 분노한 영국 해군은 대서양의 가용 가능한 모든 군함들을 비스마르크 하나를 잡기 위해 집결시키게 된다.

일단 후드의 침몰에 대한 자세한 과정은 현대까지도 완전히 확립되지는 않은 상태다. 위의 이야기도 2019년에 발표된 Hood Jurens, William Garzke, Robert O. Dulin Jr. 에서 나온 이론에 따른 것으로 가장 사실과 가깝다고 생각되는 폭침 과정이다.

그 전에는 주포 탄약고를 비스마르크의 주포탄이 직접 관통해서 대폭발, 후드가 보유한 어뢰가 비스마르크의 공격으로 폭발, 프린스 오이겐의 공격으로 일어난 화재가 탄약고로 들어가서 폭발, 후드의 주포 바벳 외부에 양용포 탄약고의 용량을 초과해서 추가로 대량 적재된 4인치(102mm) 양용포탄이 비스마르크의 공격을 받고 유폭, 후드의 15인치 주포가 고속 연사를 하다가 여러가지 원인으로 유폭등의 여러가지 이론이 나온 바가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후드의 허망한 최후는 영국 해군의 소극적 공격도 한 몫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비스마르크 추격전 전초전 때 영국 해군은 독일 해군을 먼저 발견하고 선제 공격을 할 수 있었음에도 전력 공격을 하지 않는 소극적 공격을 하다보니 탈출을 우선시하는 것을 거부한 비스마르크 승무원들이 반격할 틈을 만들어줘서 침몰을 자초했다는 내용이다.

14. 생존자

후드의 생존자는 3명에 불과하였다. 원래는 생존자가 더 살아있었으나 시간이 지나자 저체온증으로 대부분 사망했다. 살아남은 3명의 생존자들도 각자 물에 뜨는 부유물에 하나씩 올라가서 서로 잡고 버티다가 침몰한지 2시간뒤에 현장에 도착한 구축함 일렉트라에 의해 구조되었다.

전투가 끝난 직후에 생존자 구조가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비스마르크에게 공격당하느라 생존자를 구조할 여유가 없었고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도 공격하느라 생존자를 구조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투가 끝난 후에는 독일 함대는 예정된 코스로 고속항진을 했고 잔존한 영국함대는 거리를 두고 추격전에 돌입하였으므로 구조에 투입할만한 함선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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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1번 테드 브릭스(Ted Briggs)(1923~2008)

구조 당시에는 신호수병이었다. 2차대전이 끝난 뒤에도 해군에 복무하였고, 6.25 전쟁 제2차 중동전쟁에도 참전하였다. 이후 CPO로 진급했다가 1955년에 늦깍이로 장교로 임관했고, 1973년에 대위로 전역했다. 이후에 HMS 후드 협회 1대, 3대 회장을 역임하다가, 2008년에 사망했다. 여담으로 테드 브릭스가 해군에 입대한 계기가 어릴적 자신이 살던 곳 항구에 정박한 후드의 모습에 반해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훈련을 받고 첫 배치를 받은곳이 후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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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2번 로버트 틸번(Robert Tilburn)(1921~1995)

구조 당시에는 장포수병이었다. 2차대전이 끝난 뒤에도 1952년까지 해군에 복무했다. 한동안은 배를 못타고 육상에서 근무했다. 이후에 HMS 후드 협회 2대 회장을 역임하였고, 1995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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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3번 윌리엄 던대스(William Dundas)(1923~1965)

구조 당시에는 소위로 승선시 사관후보생이었다가 소위로 임관한 상태였다. 2차대전이 끝난 뒤에도 해군에 복무하였으며, 6.25 전쟁에도 참전했다. 1958년에 소령으로 전역했으며, 전역 후에는 밍크 농장을 운영하다가, 1965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HMS 후드 협회에 따르면 생전에 후드 침몰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한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HMS 후드 협회 홈페이지에도 던대스에 관한 정보는 많이 없었다가, 던대스의 딸이 전기 정보를 제공해줘서 정보가 이전보다 많이 추가되었다.

15. 기타

킹 조지 5세급 전함과는 달리 무척 허망하다면 허망한 최후를 맞았음에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라고 불렸을 정도로 미려한 외형 때문에 팬들이 꽤 있다. 조약을 뛰어넘는 함선인데도 이 때문에 보유를 인정받은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

사실 외형은 취향을 타기 때문에 당대에는 호평이었지만 지금은 구닥다리 티 난다고 별로라고 보는 사람들도 꽤 많고 대표적으로 월드 오브 워쉽 컨트리뷰터인 Yuro는 자신의 유튜브 영상에서 배 중간의 비어있는 공간에 대해, 미국은 대공포를, 독일은 캐터펄트를, 일본은 주포탑을 올렸을 건데 영국은 비워놨다며 깠다. 특히나 1942년에 대개장을 완료한 후드의 예상용 청사진의 모습은 영국의 캐슬형 함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혐오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인기는 여전하여 영국에는 'HMS 후드 협회'라 하여 후드를 연구하는 동호회까지 활동하고 있을 정도다. 아무래도 비스마르크에게 일격에 폭침당한 극적인 최후의 영향도 꽤 있는 듯하다.

생존 승조원 테드 브릭스의 유언에 따라 2015년 후드의 종이 바닷속의 잔해 인근에서 회수되었다.

만약 살아 남았다면은 그 명성 때문에 기념함으로 남을수도 있을까 하지만 아마 당장 수훈함이던 HMS 워스파이트마저 스크랩 처리를 당하고 타운급 경순양함 HMS벨파스트도 겨우 기념함이 된 마당에 후드가 무사하기란 힘들지도 모른다.

16. 미디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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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모형화

길게 쭉 뻗은 선체 등 멋진 외형과 마이티 후드의 상징성 등으로 인기가 많은 함선이라 라이벌(?)인 비스마르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상당히 많은 수의 모형이 다양한 스케일로 출시되었다. 후드를 제외한 나머지 어드미럴급 순양전함들의 존재감이 워낙 미미하다 보니 어드미럴급의 모형들은 전부 후드의 모형이리고 보면 된다. 위에 서술된 HMS 후드 협회에서 아래의 모형들에 대한 리뷰를 볼 수 있다.


[1] 마켄젠급은 독일의 패전으로 완공되지 못한 채 폐기되었다. [2] 글로리어스, 퓨리어스와 함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항공모함으로 개장되었다. 그리고 남은 함포는 뱅가드에 달린다. [3] 잘 보면 킹 조지 5세급 전함과 함교 및 부포가 유사하다. [4] 역사 속 해전이나 게임 속 해전이나 공통적인 것은 상대의 위치 파악이 우선이다. [5] (The Empire cruise) [6] 비스마르크와 후드는 전부 30노트 정도로 항해할 수 있어서 고속 항모전단에 편성이 가능했다. 비스마르크의 연비와 수중 저항이 거지 같은 게 단점이었고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파공이 난 비스마르크가 크게 느려진 게 이를 반증한다. [7] 그래도 가라앉기 전에 나가토를 먼저 수장시켰다. [8] 선체가 통짜로 사출되었는데 길이가 1,300 mm 이상이다. 박스 크기는 1,400 mm가 넘어 배송대행지에서나 택배를 접수할 때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