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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미국 대통령 선거 1884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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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f0f0><colcolor=#0d164a> 선거 일시 | 1884년 11월 4일 | |||||
선거인단 | 401명 | |||||
투표율 | 77.5% (▼ 0.5%p) | |||||
선거 결과 | ||||||
후보 |
[[공화당(미국)| 공화당 ]] |
[[민주당(미국)| 민주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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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스테이트 | 메인 | 뉴욕 | ||||
승리 주 | 18 | 20 | ||||
선거인단 | ||||||
182명 | 219명 | |||||
전국 득표 | ||||||
48.3% 4,856,905표 |
48.8% 4,914,482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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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84년 11월 4일 치러진 미국의 대통령 선거.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부통령 후보 토머스 A. 헨드릭스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제임스 G. 블레인과 부통령 후보 존 A. 로건을 꺾고 각각 미국의 제22대 대통령과 제21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미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대선 중 하나였으며[1], 언론과 유언비어에 기반한 상대 후보에 대한 현대적인 네거티브 선전이 처음으로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민주당 소속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당선되면서 민주당은 1856년 대선 이후 28년만에 대선에서 승리했으며, 앤드루 존슨의 퇴임 이후 16년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2. 배경
18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제임스 A. 가필드는 불과 0.11%p, 2,000여표 차이로 민주당의 윈필드 스콧 행콕을 누르고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공화당의 양대 계파 지도자였던 로스코 콩클링(강건파 / 엽관제 개혁 반대파)과 제임스 G. 블레인(혼혈+블레인파 / 엽관제 개혁 찬성파)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선출된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A. 가필드의 권력 기반은 취약했다. 가필드는 대통령 취임 이후 엽관제와 공무원 부정부패를 청산하기 위해 일부 개혁 정책을 추진했으나, 뉴욕세관 개혁과 관련해 뉴욕주 상원의원 로스코 콩클링과 충돌했다. 로스코 콩클링은 가필드에 맞서 뉴욕 주의회에서 자신이 가진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보란듯이 뉴욕 상원의원을 사퇴했고, 보궐선거가 열렸는데 이 보궐선거는 너무 치열해서 52일 동안 당선자 결정이 나지 않았다.[2] 게다가 이 과정에서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이 정신병자이자 콩클링 지지자인 찰스 J. 기토의 총에 맞아 암살 당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기토는 공무원 개혁 찬성파인 가필드의 사망과 로스코 콩클링의 정치적 동지[3]인 체스터 A. 아서의 대통령직 승계로 공무원 임용 제도 개혁이 중단될 것을 기도했다. 한술 더떠 아서가 자신을 주프랑스 미국 대사로 임명할 것이라고 생각했다.[4] 허나 기토의 바램과 달리, 아서 대통령 암살 사건으로 엽관제 개혁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고, 조지 H. 펜들턴(George H. Pendleton) 민주당 하원의원은 엽관제를 개혁하기 위한 "펜들턴 공무원 개혁법"(Pendleton Civil Service Reform Act)을 발의했다. 아서 대통령도 이를 지지했지만 공화당 주도 의회는 이 법에 반대표결했다. 이는 엄청난 역풍을 일으켰다. 1882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하원에서 196석을 차지해 전체 의석의 60%를 휩쓸고 117석을 얻는데 그친 공화당을 소수당으로 밀어냈다. 또한 1881년 아서 대통령 암살의 여파로 로스코 콩클링도 정계를 은퇴하게 된다. 공화당은 1883년 1월, 기존 의회 임기 만료 전 펜들턴법의 일부 내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수정해 통과시켰다.[5]
그러나 체스터 아서는 엽관제를 개혁하려고 한 가필드 대통령의 뜻을 이어받아야한다는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고, 강건파의 적으로 간주되던 인사들까지 공무원 개혁 위원회에 임명하는 통큰 행보를 보였다. 이는 아서 대통령의 지지 세력이었던 강건파의 실망을 불러일으켰으며, 로스코 콩클링과 같은 강건파 인사는 물론 존 셔먼(John Sherman)[6]과 같은 혼혈파의 주요 인사들과 갈등을 빚는 계기가 되었다. 혼혈파 지도자 제임스 G. 블레인도 아서의 개혁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7] 아서는 레임덕을 맞이했다. 이 외에도 아서 대통령은 1883년 잡종관세법(Mongrel Tariff Act of 1883)[8]과 같은 논란이 되는 법을 통과시키면서 좋지 못한 평가를 들었다.
레임덕을 맞이한 아서 대통령을 대체하기 위해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발빠르게 움직였다. 공화당에서는 제임스 G. 블레인을 필두로 한 개혁파 세력이 인기 없는 아서 대통령을 대체해 권력을 유지시키고자 하면서 지지자들을 다시 결집시켰다. 한편 민주당에서는 1882년 중간선거의 역사적 대승을 발판으로 28년만의 대선 승리를 위해 그로버 클리블랜드 등의 프론트러너들이 떠올랐다. 다른 한편으로 1877년 타협의 영향으로 남부 민주당원들은 흑인들의 투표를 더욱 어렵게 만들면서 흑인의 지지를 받는 공화당의 남부 기반을 약화시켜나갔다.
3. 정당 별 상황
3.1. 공화당
공화당은 1865년 남북전쟁 승리와 링컨 암살 이후 지속된 장기간의 계파 정치와 부정부패로 국민 대부분의 불신을 받고 있었으며, 공화당 내부에서도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현직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은 공무원 임용 개혁 등의 업적을 내세우며 재선을 노렸지만, 당 내에서도 아서를 재지명하지 말아야한다는 여론이 컸다. 공화당 양대 계파 중 혼혈파는 제임스 G. 블레인을 확고히 지지하고 있었으며, 강건파의 경우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강건파 지도자들과 정계를 은퇴했지만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던 로스코 콩클링이 아서를 재지명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아서는 큰 타격을 입었다. 아서의 반대파는 크게 두 종류였는데, 한쪽은 아서가 공무원 개혁을 너무 강경하게 집행한다고 주장하던 당 내 보수파였으며, 다른 한쪽은 아서가 공무원 개혁을 너무 온건하게 집행한다고 주장하던 당내 소장파였다.뉴욕과 기타 대도시의 비즈니스 리더들은 권력의 안정을 원했으므로 아서를 지지했고, 강건파의 일부도 블레인에 반대하기 위해 아서를 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서는 정치적으로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 신장병에 걸려 1883년 옐로스톤 공원에서 오래 요양을 할 정도로 몸이 아팠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서는 자신이 공화당 후보로 재지명될 수 없음을 안 이후 재선 도전을 위한 진지한 노력을 그만 두었다. 그러나 그가 후보직에서 물러난다고 선언하면 공화당은 물론 미국 정치, 경제 자체가 요동칠 수 있다고 생각해 형식적으로는 전당대회일까지 블레인에 반대하는 척을 했다.
제임스 블레인의 경우, 엽관제 개혁파인 혼혈파에게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블레인의 서류상 경력은 거의 완벽했다. 1862년 중간선거에서 하원의원으로 입성한 블레인은 해박한 의회 통제 기술로 불과 3선 의원 신분으로 스카일러 콜팩스의 뒤를 이어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 및 하원의장 자리에 올랐으며, 상원 의원으로 체급을 높인 후에는 1876년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기도 했다. 비록 계파 갈등으로 1876년 대선과 1880년 대선 모두에서 공화당 후보로 지명을 받지는 못했지만 1881년 제임스 A. 가필드 행정부에서 내각 2인자인 국무장관 자리를 역임했다. 가필드는 외교 관련 지식이 별로 없어서 블레인은 미국 외교 그 자체를 대표했다. 영국의 남미 영향력을 차단하고,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한 조약을 추진하고, 하와이에 대한 영국 영향력 차단, 마다가스카르와의 무역 조약 추진, 조선과의 무역 조약 추진[9] 등 그의 업적은 눈부셨다. 한마디로 블레인은 대통령 빼고 모든걸 해본 공화당의 가장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러나 블레인은 당내 소장파의 완벽한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블레인은 1860년대부터 공화당의 주요 정치가였고 그만큼 "기득권" 정치가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블레인은 1870년대 이후 점차 보수화되어 대다수 혼혈파들보다 공무원 개혁에 더 미지근한 성향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1876년 대선 당시, 블레인이 철도 회사의 채권을 사놓고 그 회사의 이권을 봐준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결정적인 편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블레인은 편지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시장 가격으로 철도 회사의 채권을 구매했을 뿐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고, 오히려 손해를 보았으며, 제퍼슨 데이비스와 반역도당 민주당의 후예들이 자신의 흑인 민권 정책에 반발해 일으킨 악의적 루머라고 대응했다. 심지어 자기가 쓴 편지를 상원 본회의장에서 읽으며 결백을 호소하는(...) 기행까지 벌였다.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블레인이 구속되거나 기소되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부정부패 청산을 지지하는 개혁파의 리더가 이런 부패에 연루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블레인의 명성을 크게 훼손시켰다. 이를 "멀리건[10] 편지(The Mulligan Letters)" 사건이라 한다.
이 때문에 헨리 캐벗 로지 시니어[11], 시어도어 루스벨트[12], 칼 슈어츠(Carl Schurz)[13] 등 공화당의 소장파 의원들은 블레인이 엽관제 개혁파 소속이었음에도 그의 지지를 거부했으며 대신 조지 F. 에드먼즈 상원의원을 지지했다.
블레인은 제이 굴드(Jay Gould)를 비롯한 철도 재벌의 수석 변호인이다. 내가 철도 회사의 부패를 단죄하기 위한 법을 추진할때마다 블레인은 제이 굴드의 흉상을 뒤에 두고서 내 얼굴에 머스킷 총을 들이밀며 협박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조지 F. 에드먼즈 상원의원, 블레인의 지명을 반대하면서
조지 F. 에드먼즈 상원의원, 블레인의 지명을 반대하면서
에드먼즈는 당선될만큼 많은 지지를 얻지는 못했지만 블레인의 캠페인에 고춧가루를 뿌릴만큼의 지지 세력은 있었고, 블레인이 대선 후보로 지명되자 그의 지지를 거부하면서 본선에서 블레인의 낙선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대망의 전당대회일, 1차 투표에서 블레인은 333.5표(40.79%)를 얻었고 아서 대통령은 278표(33.90%), 조지 에드먼즈는 93표(11.4%)를 얻었다. 에드먼즈는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에는 모자란 표를 얻었지만 이는 블레인의 지명을 막기에 충분한 표였다. 3차 투표에서도 블레인은 여전히 지명에 필요한 표에 모자라는 375표(45.73%)를 얻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지 못했다. 결국 블레인은 윌리엄 테쿰세 셔먼을 타협 후보로 내세우자는 배수진까지 쳤지만, 전당대회가 교착화되자 아서와 여타 후보자들의 선거인단이 블레인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결국 4차 투표에서 블레인은 541표(65.97%)를 획득히 207표(25.24%)의 아서와 41표(5.00%)의 에드먼즈를 제치고 우여곡절 끝에 공화당 대선 후보로 결정된다.
3.2. 민주당
1884년 대선을 2년 앞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역사적 대승을 거두면서 민주당은 1876년 대선 이후 다시 정권교체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민주당 내에서 주목을 받은 후보군은 새뮤얼 J. 틸던 전 뉴욕주지사, 그로버 클리블랜드 뉴욕주지사, 토머스 F. 베이어드(Thomas F. Bayard) 델라웨어 상원의원 등이 있었다. 틸던은 1876년 대선의 석패 이후에도 몇차례나 유력 대권주자로 언급되었다. 하지만 틸던은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벌이지 않았고 얼마 안가 대통령 선거 출마를 포기한다.[14]틸던의 지지자들은 토머스 베이어드 쪽으로 집결했다. 선거 구도는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선두주자인 가운데, 토머스 베이어드가 뒤를 쫓는 구도였으며, 토머스 A. 헨드릭스 등은 클리블랜드와 베이어드의 싸움이 교착화된다면 타협 후보로 출마하려고 하였다.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이리 카운티 보안관을 거쳐 버팔로 시장으로서 부정부패를 척결하였으며, 뉴욕주지사로 급을 올린 뒤에도 쉴세 없이 뉴욕주의 부정부패를 청산하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서라면 뉴욕 주 민주당과도 갈등을 할 정도로 클리블랜드는 강직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말, 뉴욕은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의 정치 조직이었던 태머니 홀(Tammany Hall)의 계파 정치와 부패에 주 정계가 좌우되던 상황이었는데, 클리블랜드는 태머니 홀의 정치적, 경제적 지원을 거부하고 이들의 부패에 맞서 싸우면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뉴욕의 언론 <뉴욕 월드>의 발행인 조지프 퓰리처는 1884년 대선을 앞두고 자신의 신문에 이런 칼럼을 싣기도 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1884년 대선에서 당선되어야하는 이유는 4가지이다. 첫 번째, 그는 정직한 사람이다. 두 번째, 그는 정직한 사람이다. 세 번째, 그는 정직한 사람이다. 네 번째, 그는 정직한 사람이다.
제임스 A. 가필드의 암살과 펜들턴법 제정으로 미국인들은 대통령으로 정직한 사람을 바라고 있었고, 클리블랜드의 정직한 성격과 반부패 경력은 미국인들의 정서와 매우 잘 맞아 떨어졌다.
토머스 베이어드는 남부 주인 델라웨어 주의 상원의원이었으며, 아버지도 상원의원을 지낸 유력 정치가 출신이었다. 베이어드의 홈스테이트인 델라웨어는 클리블랜드의 뉴욕에 비하면 매우 작은 주였지만, 민주당 내에서는 클리블랜드가 태머니 홀과 척을 지는 바람에 뉴욕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이 때문에 승리를 위해서라면 베이어드를 밀어야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태머니 홀 역시 베이어드를 지원했다. 클리블랜드에 반대하던 일부 새뮤얼 틸던 지지자들도 베이어드를 지지했다. 하지만 그는 클리블랜드에 비해 청렴성이나 도덕성 면에서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무엇보다 남부 주 델라웨어[15] 출신이었기 때문에 툭하면 남북 전쟁을 들먹이며 민주당을 반역도당이라고 공격하던 공화당의 악선전에 취약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차이가 있었지만 두명 모두 금본위제를 지지하고 재정보수주의와 고전적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보수우파 성향인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일부 공화당 당원의 지지를 받기 수월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전당대회 1차 투표에서 클리블랜드는 392표(47.81%)를 받아 선두 자리를 지켰으며 베이어드는 170표(20.73%)로 뒤쳐졌다. 2차 투표에서 클리블랜드는 57.9%에 달하는 475표를 획득해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해 필요한 2/3 대의원 지지에 근접했다. 헨드릭스가 2차 투표부터 표결을 교착화시키려고 노력했지만, 클리블랜드가 크게 격차를 벌린 상황에서 이 노력은 무의미하게 여겨졌고 2차 투표 직후 대의원 교대를 통해 클리블랜드는 683표(83.29%)를 획득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클리블랜드는 헨드릭스를 부통령으로, 베이어드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민주당 전체의 지지를 통해 대선 후보로 확정된다. 따라서 클리블랜드는 블레인과 달리 계파 갈등을 잘 봉합하는 이점을 취할 수 있었다.
4. 최종 후보
4.1. 공화당: 제임스 G. 블레인
1884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 ||||||
대통령 후보 지명자 | 부통령 후보 지명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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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길래스피 블레인
메인 주 연방 상원의원 |
존 알렉산더 로건
일리노이 주 연방 상원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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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은 현직 대통령 체스터 A. 아서의 재지명을 거부하고 메인 주의 상원의원 제임스 G. 블레인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제임스 블레인은 혼혈파 소속으로, 강건파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존 A. 로건[16]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을 임명했다.
공화당은 전당대회 직후부터 엄청난 분열에 시달렸다. 로스코 콩클링은 선거운동을 도와달라는 블레인의 요구를 거부하고 "블레인의 지명은 범죄 행위이며, 나는 그것에 동참할 수 없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이는 존 로건 부통령 후보 지명으로 확보하려 한 강건파의 지지세를 크게 약화시켰다. 공화당 내 개혁파는 존 로건의 부통령 후보 지명에 극렬히 반발했으며 존 셔먼 등 일부 혼혈파 정치인마저 이를 두고 블레인을 비판했다. 한편, 에드워즈를 대선 후보로 지지한 일부 소장파 역시 블레인의 지지를 거부했다.
4.2. 민주당: 그로버 클리블랜드
188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 ||||||
대통령 후보 지명자 | 부통령 후보 지명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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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
제28대 뉴욕 주지사 |
토머스 앤드루스 헨드릭스
제16대 인디애나 주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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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기타 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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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백당:
벤저민 F. 버틀러(Benjamin F. Butler)
그린백당은 민주당 내 진보파와 공화당 급진파의 일부가 떨어져나와 창당한 제3지대 좌파 정당이다. 이 정당은 187~90년대 미국을 달구었던 본위제 논쟁과 관련이 있다. 그린백당은 금융 자본가들이 선호했던 금본위제 대신 소액화폐인 은화 주조를 지지하였으며, 주로 농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대통령 후보 벤저민 버틀러는 민주당원이었으나 노예제에 반발해 공화당 급진파에 참여했다가 공화당의 보수화로 다시 민주당 쪽으로 돌아선 인물이었다. 버틀러는 민주당의 우경화를 막기 위해 그린백당 소속이었음에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려 했으나 큰 지지를 얻지 못했고, 전당대회 폐회 후 독자출마를 선언했다. 버틀러는 농민과 노동자들, 클리블랜드의 지명에 실망한 민주당 진보파를 주 지지층으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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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당: 존 세인트 존(John St. John)
금주당은 미국 전역에서 주류 판매 금지를 입법화하기 위해 창당된 단일쟁점정당이었다. 공화당 역시 금주법을 일부 지지했으나, 이들은 공화당이 너무 온건하다고 생각했고 전면적 금주법 입법을 지지했다. 지지세가 크진 않았지만 주요 경합 주에서 공화당의 표를 분열시킬만한 세는 있었다. 여담으로, 이 당은 아직까지 남아있으며, 미국에서 3번째로 오래된 정당이다.[17]
5. 선거 과정
5.1. 양 후보의 성향과 의제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버번 민주당에 속하는 민주당 내 보수파였고 제임스 G. 블레인도 공화당 개혁파인 혼혈파의 지지를 받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강건파의 보수주의에 동조하는 성향이 있었다. 따라서 두 후보의 성향은 거의 비슷했으며, 관세, 정부 청렴성 등 제한된 의제를 제외한 사실상의 모든 사안에 있어 비슷한 의견을 냈다. 이 때문에 1884년 대선은 정책이나 공약이 아닌 후보자 개인의 성품과 스캔들 등이 화두가 되는 전형적인 네거티브 선거전의 양상을 띄었으며, 이는 1870년대 이후 급성장한 미국의 언론 환경과 맞물려 진흙탕 선거로 발전했다.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와 함께 1884년 대선은 미국 역사상 가장 공직자의 청렴성과 정직함이 요구된 선거였다. 공무원 개혁은 이 선거의 가장 큰 화두였으며,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자신의 정직함을 강조하며 펜들턴법의 추가 적용을 공약했다. 클리블랜드는 펜들턴법에 의해 엽관제로부터 보호받는 공무원의 비율이 12% 정도에 불과하며 이를 크게 늘리겠다고 주장하며 블레인에 비해 정부 청렴성 문제에 있어 앞서나갔다.
또다른 중대한 사안은 1860년대부터 높은 관세율로 누적된 재정 흑자에 대한 처리였다. 제임스 블레인은 고관세를 유지해 재정건전성을 유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높은 관세를 통해 남북 전쟁 참전용사의 연금을 추가 지급해야하며, 그 외의 정부 흑자는 혹시 모를 경제적 위기를 위해 비축해야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클리블랜드는 농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관세 인하를 지지했고, 정부 흑자를 부채 해결에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남북전쟁 참전용사 연금의 경우, 클리블랜드는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기 때문에 블레인에 비해 문제에 소극적이었고 연금 개혁을 통해 불필요한 연금을 삭감해야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 외에 공화당은 금주에 관해 민주당에 비해 더욱 적극적인 성격을 띄었으며, 흑인 민권의 확대를 지지했다. 하지만 상술했듯 양당 모두 중국인 입국 제한 등 당대 화두가 되고 있던 대부분의 의제에 관해 비슷한 입장을 띄었다. 실질적으로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친 것은 후술할 몇가지 양 후보의 스캔들과 이에 대한 언론의 대응이라고 보면 된다.
5.2. 블레인의 부패와 "머그웜프"
공화당은 1884년에 접어들면서 심각한 계파 갈등과 분열이라는 문제에 노출되어있었다. 남북 전쟁 이전까지 공화당은 민주당에 조직력과 자금력, 단합 등 어느 한 부분에서도 대적할 수 없는 반노예제 빅텐트 정당에 가까웠으며, 이는 멀리까지 가보자면 반 잭슨 빅텐트 정당으로 얼렁뚱땅 만들어진 휘그당도 공유하던 문제였다. 1861년 남북전쟁 발발 이후로도 이 문제는 이어졌는데, 1885년까지 공화당이 너무 오래 집권하며 공화당 내 계파 갈등은 더욱 커졌다. 1860년, 1864년에는 온건파 에이브러햄 링컨을, 1868년과 1872년에는 모두가 존경하는 전쟁영웅인 율리시스 S. 그랜트를[18], 1876년과 1880년에는 듣보잡 다크호스 후보를 내보내 계파 갈등을 어찌 어찌 봉합했지만, 블레인은 달랐다. 블레인은 한쪽 계파에게는 열렬한 지지를, 다른 한쪽 계파에게는 열렬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분열의 후보였고, 이 때문에 블레인 자신도 출마 포기를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였다. 이미 제임스 G. 블레인보다 더 "보수적"인 로스코 콩클링과 더 "개혁적"인 조지 F. 에드먼즈 모두 전당대회에서 블레인 지지를 거부하면서 블레인은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다.그와중에 1876년 블레인의 위신에 큰 손상을 입힌 "멀리건 편지"가 또다시 나타나며 계파 갈등의 골이 크게 터졌다. 블레인은 멀리건 편지의 내용을 직접 상원에서 읊는 퍼포먼스와, 예배 도중의 실신을 통한 동정여론 조장으로 1876년 위기를 잘 해쳐나갔다. 블레인의 해명은 제법 그럴싸했고 민주당이 반박하지 못하며 멀리건 편지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1884년 대선을 앞두고 새로운 편지들이 여럿 발견되었고 이는 블레인의 "해명"을 논파하는 몇가지 내용이 담겨있었다. 블레인은 하원의장으로 재직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리틀록&포트 스미스 레일로즈(Little Rock & Fort Smith Railroad)에 토지 보조금이 지급되도록 했다. 멀리건 편지의 내용에 따르면 이 대가로 블레인은 철도회사 사장 워런 피셔(Warren Fisher)로부터 증권을 헐값에 사들였고 추가로 엄청난 양의 채권을 챙겨갔다. 블레인의 채권 매매 직후 철도 회사 채권 가치가 떡락했고, 여기까지는 기존 편지에 있었던 내용 및 블레인이 항변한 반론[19]과 일치했다. 그런데 새로 발견된 편지에서는 블레인이 또다른 철도 회사인 텍사스&퍼시픽 레일로즈(Texas & Pacific Railroad)에 SOS를 쳐서 사장 톰 스콧(Tom Scott)이 채권을 높은 가격에 사가는 대신 그의 철도 회사에 도움이 되는 법안을 다수 지지해 경제적 손실을 모면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제임스 G. 블레인은 새로 발견된 편지가 자신의 해명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허나 새로 발견된 편지의 말미에는 "이 편지를 불태워라!"라는 증거인멸성의 추신이 붙어 있었고, 사실 관계에 상관 없이 블레인은 위신에 또다시 타격을 입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지지자들은 블레인의 논란이 불거지자 이런 선거 슬로건을 내세웠다.
Blaine, Blaine, James G. Blaine, the continental liar from the state of Maine, "Burn this letter!"
블레인, 블레인, 제임스 G. 블레인, 메인주에서 온 대륙 최고의 거짓말쟁이, "이 편지를 불태워라!"
블레인, 블레인, 제임스 G. 블레인, 메인주에서 온 대륙 최고의 거짓말쟁이, "이 편지를 불태워라!"
이 슬로건은 현재까지도 가장 인상깊은 네거티브 선거 구호로 손꼽힌다. 게다가 클리블랜드 지지자였던 조지프 퓰리처는 한술 더떠 이렇게 말했다.
제임스 G. 블레인은 철도업계와 부패한 공무원들의 발치에 엎드린 추악한 거지이자, 하원의장의 자리에 앉은 창녀요, 공화국을 헐뜯는 적들의 대표이자 대변인이다.
퓰리처와 클리블랜드파 언론은 블레인이 돈을 받고 이권을 봐준 철도회사 이름과 그 회사 사장 이름이 적힌 만화를 수천부나 찍어냈고 이를 클리블랜드의 유세장에서 대대적으로 배포했다.
클리블랜드 진영의 공격은 너무 효과적이어서 블레인의 지지가 급락했으며, 심지어 일부 공화당원들은 블레인 지지를 거부하고 클리블랜드 지지를 선언하기까지 했다. 이들을 "머그웜프"(Mugwumps)라고 부른다. 칼 슈어츠 전 내무장관을 비롯한 조지 F. 에드먼즈 지지자들이 주축이 된 머그웜프들은 공무원 임용 개혁, 부정부패 청산을 지지했으며, 민주당의 대중주의와 다른 엘리트주의적 개혁을 선호하였다. 헨리 캐벗 로지 시니어와 같이 마지못해 블레인을 지지한 에드먼즈 지지자들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많은 공화당 소장파 정치가와 에드먼즈 지지자들이 "머그웜프"가 되면서 블레인은 큰 타격을 입었다. 심지어 골수 공화당원이었던 마크 트웨인도 블레인의 부정부패를 호되게 비난하며 머그웜프의 대열에 참여했다.
1880년대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지지층이 확고했고 교차 투표가 잘 일어나지 않아 "당파성 정치"(Partisan politics)의 시대라고 불렸다. 그런 시기에 공화당의 일부 지지층이 클리블랜드를 지지한 것은 당대로서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오늘날에는 RINO라는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되지만, 여전히 머그웜프라는 단어는 공화당 당원이면서 소신의 목소리를 내는 개혁파 공화당원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는데 그 용어의 기원이 1884년 대선이었다.
5.3. 네거티브 선거전
1884년 대선의 특이점은 이 선거에서 거의 처음으로 양 후보의 성 스캔들과 가족을 건드리는 사생활 네거티브 선거전이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블레인과 클리블랜드 모두 치명적인 성스캔들에 휘말렸다.우선 제임스 블레인의 경우 혼전임신을 시켰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클리블랜드파 언론의 요지는 제임스 블레인이 속도위반을 해 연애를 하던 여성을 혼전임신시켰고, 이를 숨기기 위해 그 여자와 억지로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요절한 첫째 아들의 출생연도를 속이기 위해 묘비까지 손을 댔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혼전임신이 비교적 흔하긴 하지만 이때는 1880년대였고 기독교 영향력이 강했던 시기라 혼전임신은 죄악 그 자체였다. 블레인은 아내는 물론 죽은 첫째 아들까지 건드리는 네거티브에 격분해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는 끔찍한 결정이었고 스트라이샌드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조지프 퓰리처의 <뉴욕 월드>는 이를 놓치지 않고 보도했는데, "블레인의 명예를 고려해 재판의 내용을 널리 알리지 않기로 했다"라는 고상한 문구를 써놓고는 정작 그 뒤에 재판의 자초지종과 뇌피셜을 써놓아 매우 흥미진진하게 블레인 명예훼손 재판을 보도했다. 이 재판의 결과 자체는 블레인 측의 승소였긴 했지만...
물론 블레인파 언론사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클리블랜드는 자신의 정직함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었고 이것이 무너진다면 블레인에게 결정적 승리가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그와중에 마리아 핼핀(Maria Halpin)이라는 여성과 관련된 클리블랜드의 섹스 스캔들이 터졌다. 블레인파 언론의 주장에 의하면,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젊은 시절 주정뱅이, 도박중독자에 난봉꾼이었으며, 남편을 잃고 슬픔에 빠진 마리아 핼핀와 외도에 빠졌을 뿐 아니라 그녀를 데이트 강간해 아이까지 강제로 낳게 하고선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고 핼핀은 정신병동에 가두어 입막음을 시켰다는 것이었다. 민주당은 이 주장에 경악했고 블레인처럼 강경대응하라고 부추겼지만 정직한 성격의 클리블랜드는 그럴 수 없었고 마리아 핼핀과 섹스를 했다는 주장까지는 동의했다. 블레인파 언론은 신이 나서 클리블랜드를 마구 물어 뜯었고 클리블랜드는 위기에 처했다.
만약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선거에서 승리하면 그 천박한 뉴욕의 난봉꾼은 자신과 관계를 맺은 창녀들을 워싱턴으로 불러모아 백악관 바로 옆에 숙소를 구해줄 지도 모를 일이다.
제임스 블레인 지지 언론 <더 뉴욕 선>
제임스 블레인 지지 언론 <더 뉴욕 선>
하지만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블레인과 달리 훌륭하게 스캔들에 대응했는데 조지프 퓰리처가 큰 역할을 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면 클리블랜드도 다소 억울한 점이 있었는데, 클리블랜드가 관계를 맺은 것은 맞지만, 마리아 핼핀과 관계를 맺은 사람 중 유일하게 독신남이라 책임을 떠안은 것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사실은 여기까지였고 퓰리처는 이를 한편의 감동적인 소설처럼 만들었다. 퓰리처의 주장에 의하면 사건의 전개는 이와 같았다. 마리아 핼핀은 거의 창녀나 다름이 없는 문란한 여자이자 주체할 수 없는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클리블랜드를 포함한 남성 4명을 꼬드겨 문란한 성생활을 가졌다. 그런데 덜컥 임신을 하자 4명 중 한명이 책임을 져야했다. 나머지 3명은 아내와 자식을 둔 성실한 가장이었지만 순간의 유혹으로 관계를 맺은 것에 불과했고 심지어 그중 한명은 아빠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귀여운 외동딸까지 두고 있었다. 클리블랜드는 이들의 가정을 수호(?)하기 위해 혼자 죄를 뒤집어 썼고, 핼핀이 정신병동에 갇힌 것은 단지 그녀가 정신을 못차리고 방탕한 알코올 중독자 생활을 계속 했기 때문이었다.[21] 블레인파 언론은 퓰리처의 선동과 스토리텔링 능력에 감탄했으나, 사실관계에 어느정도 맞는 부분으로 스토리가 구성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반박할 수 없었다.
여기에 더해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마리아 핼핀이라는 여인의 아이가 내 아이인지는 불명확하나 책임감을 느끼며, 그 아이의 교육비를 전액 지원하겠다"라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유권자들은 소송전까지 불사한 블레인과 달리 클리블랜드가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책임까지 지는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으며, 오히려 이 스캔들 때문에 클리블랜드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거듭난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면서 블레인파 언론은 본전도 못건졌다. 클리블랜드는 조지프 퓰리처의 뛰어난 문장력과 스토리텔링이 없었다면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22]
이 외에도 병역 문제가 논란이 된 최초의 선거이기도 했다. 블레인은 민주당을 제퍼슨 데이비스의 후예, 노예 소유자, 반역자의 정당 등 남부맹방과 끊임 없이 엮는 네거티브 선거전을 벌였다.[23] 이는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는데,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에이브러햄 링컨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북부 영토인 뉴욕 주민이었는데도 남북전쟁에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클리블랜드는 군 입대를 하기에는 체형이 너무 뚱뚱했고, 무엇보다 집안이 가난해서 생계를 위해 병역을 기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300달러의 거금을 내서 대체 군인을 보내고 자신은 군대를 뺐다. 블레인은 이를 끊임 없이 공격하며 링컨을 증오하고 남북전쟁 병역을 회피한 후보가 당선되면 미국이 그 즉시 노예의 나라로 되돌아갈것이라고 주장했다.
블레인이 고려하지 않은 것은 자신도 남북전쟁 참전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1861년 남북전쟁 발발 당시 블레인은 31세, 클리블랜드는 24세로 나이 차이가 큰 것이 아니었고 두명 모두 20세에서 35세 사이의 미국 국적자였기 때문에 1863년 군대등록법(Enrollment Act of 1863)의 징병 대상이었다. 그러나 블레인은 신문편집자이자 정치인으로서 병역을 회피할 수 있었고, 1863년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군대를 뺐다. 두명의 군대 징병 회피가 부당한 사유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클리블랜드의 병역회피 문제를 꺼내든건 블레인이었기에 네거티브는 전반적으로 클리블랜드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후보자 개인의 건강 문제도 논란이 되었다. 클리블랜드파 언론은 익명을 요구한 의사의 말을 인용해 "블레인은 심각한 중병을 앓고 있으며, 대통령이 되어도 얼마 안가 죽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주장을 펼쳤다.
5.4. 선거를 판가름한 아일랜드계 이민자
1850년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미국 내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의 수가 급증했다. 당시 아일랜드계와 독일계는 주로 민주당을, 영국계 이민자들은 주로 공화당을 지지했다. 제임스 G. 블레인은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의 표를 잡는 것이 승리의 열쇠이며, 자신이 다른 공화당원들에 비해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에서 많은 표를 끌어올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근거 없는 믿음이 아니었다.- 블레인의 어머니는 아일랜드계 이민자 가톨릭 교도로, 블레인 본인은 개신교도였지만 아일랜드계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뉴욕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의 정치 기구인 태머니 홀과 척을 졌다.
- 국무장관으로서 블레인은 영국의 제국주의적 침탈을 견제하기 위한 여러 조약을 추진했으며 예나 지금이나 아일랜드계는 영국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한다.
그러나 공화당이 추진하고자 한 금주 정책은 아일랜드계 이민자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없었다. 아일랜드계가 지금도 위스키 제조로 유명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고, 더 나아가 금주법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아일랜드계와 독일계를 견제하기 위한 공화당의 정책이었다는 비주류 견해도 있다.[24] 설상가상으로 공화당은 성향이 비슷한 금주당의 입후보를 철회시키기 위해 공작을 펼쳤는데, 이것이 금주당 지도부에 의해 걸리고 말았다. 금주당은 격분해 모든 선거 자금을 이용해 경합주에서 공화당의 표를 가르기 위한 역공작을 펼쳤고 공화당과 금주당 사이의 은밀한 공작이 폭로되자 금주법에 반대했던 아일랜드계는 블레인을 더욱 혐오하게 되었다. 또 블레인이 아무리 반영적 외교를 펼쳤다한들 공화당은 WASP의 정당이었고, 이런 몇가지 이유로 공화당은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의 표를 확보하는데 한계를 보였다.
결정적으로 선거 며칠전, 뉴욕의 목사 J. B. 버처드(J. B. Burchard)의 실언 논란이 터졌다. 버처드는 클리블랜드를 공격하며 민주당을 " 럼, 로마 가톨릭주의, 반란의 정당"(Rum, Romanism and Rebellion)이라고 운을 떼며 비난했다. 이러한 비난은 관중들에게는 환호를 받았지만, 관중 속에는 민주당 당원도 있었고(...) 민주당 지지 신문에 큼직하게 인쇄되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선거 며칠 전에 터진 공화당 지지 성향 목사의 로마 가톨릭교회 비난은 미국 전역의 아일랜드계를 격분케했다. 아일랜드계의 표를 잡으려던 블레인의 계획이 물거품이 된건 말할것도 없고 선거 직전 북부 경합 주 전역에서 아일랜드계가 단결하며 블레인의 승리 가능성이 크게 낮아졌다. 특히, 아일랜드계가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던 뉴욕주에서 클리블랜드의 지지율이 급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블레인은 버처드의 실언을 알지 못했으며, 민주당 지지 신문의 호외를 보고서야 뒤늦은 대응에 나섰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6. 선거 결과
투표 결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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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자 | 제임스 G. 블레인 | 그로버 클리블랜드 | |||
선거인단 수 | 182명 / 401명 | 219명 / 401명 | |||
전국 득표 수 | 4,856,905표 (48.3%) | 4,914,482표 (48.8%) | |||
대통령 당선인 | 부통령 당선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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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버 클리블랜드 | 토머스 A. 헨드릭스 |
6.1. 지역별 결과
7. 평가
8. 여담
[1]
이에 비견될정도로 치열했던 선거로
1844년,
1876년,
1880년,
1916년,
1960년,
1968년,
2000년,
2004년 등을 들 수 있다. 1870~90년대의 선거는 대부분 투표율도 높고, 5%p 격차 내에서 당선자가 결정될 정도로 엄청나게 경합이었는데 그중에서도 1884년 대선은 유독 치열했던 편이었다.
[2]
이 당시 상원의원은 주의회에서 선출했다.
[3]
뉴욕세관 공무원을 맡으며
러더퍼드 B. 헤이스의 개혁에 맞서 명망을 얻은 것이 다름 아닌 아서였다.
[4]
정작 기토는 프랑스어를 단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이 당시 엽관제의 폐혜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5]
공화당은 펜들턴법을 통과시키되 기존에 임명된 공화당 고위 공무원들이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했고, 이 때문에 40여명에 달하는 민주당원들이 이에 반발해 개정된 펜들턴법에 반대 표결을 한 반면 공화당에서는 단 6명만이 반대 표결을 했다.
[6]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동생이다.
[7]
사실 블레인은 엽관제 개혁에 소극적으로 반대했으며 로스코 콩클링과 사적으로 사이가 나빠서 혼혈파에 가입한 것에 가까웠다.
[8]
관세를 인하한 개혁법으로, 아서 대통령이 설치한 개혁 위원회는 평균 15~20% 정도의 관세 인하를 요구했으나, 존 셔먼 등 공화당 내 보호주의자들과 딜을 치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평균 1.47% 밖에 관세가 내려가지 않으면서 관세 인하를 기대한 남부 주의 분노를 일으켰다.
[9]
다만 조약 체결은 그의 퇴임 이후에 이루어졌다.
[10]
블레인의 부패 혐의를 처음 입수해 터트린 사람의 이름이다.
[11]
후일 UN대사를 지내는
헨리 캐벗 로지의 할아버지이다. 당시 34세로 매사추세츠 주 공화당 의장이었다.
[12]
당시 26세로 뉴욕 주의원이었다.
[13]
헤이스 행정부의 내무장관으로 본래 독일인이었으나 1848년 독일 혁명 실패로 미국으로 망명해 남북전쟁에서
존 C. 프리몬트 휘하 군인으로 활약하는 등 그야말로 전설적인 이력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말년에는 민주당을 지지하기까지 했다.
[14]
틸던은 뉴욕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2년 후 사망한다.
[15]
델라웨어는 남북전쟁 때 연방 쪽에 잔류했고 노예 비율도 적었지만 일단은 국경주에 속하는건 확실했다.
[16]
1866년까지 민주당 소속이었지만 공화당에 입당하고 나서는
공화당 급진파로 활동했었다.
[17]
물론 금주법 자체가 힘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도 대통령 후보를 내보내고는 있지만 전미에서 1,000여표 득표나 넘기면 선전했다고 봐도 될 정도로 군소 정당 중의 군소 정당으로 몰락한지 오래이다.
[18]
사실 1872년에도 계파 갈등이 터져서 그랜트 행정부의 부패에 반대하는 호레이스 그릴리, 찰스 섬너 등이 "자유공화당"을 창당해 독자출마했다.
[19]
시장 가격에 따라 철도회사의 채권을 사들였고 오히려 이 때문에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았다는 주장
[20]
클리블랜드 지지자들은 "백악관에 가셨단다, 하! 하! 하!"로 맞받아쳤다.
[21]
사실 이건 진실이 아니다. 후대 역사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마리아 핼핀의 행방은 알 수 없으며, 정신병동에 갇힌 것은 아주 확실하게 공화당 측이 뿌린 악선전이라고 한다. 즉 공화당이 뿌린 헛소문을 퓰리처가 마음대로 조작해(...) 클리블랜드에 유리하게 바꿔놓은 것이다.
[22]
훗날 이 아이는 산부인과 의사가 됐다고 한다.
[23]
이와 같이 남북전쟁을 들먹이는 186~80년대 공화당의 레퍼토리를 "피에 젖은 셔츠를 흔든다"라고 표현한다.
[24]
물론 이 견해는 물적 증거가 없어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