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 흉노의 세력이 쇠퇴하면서 일부 흉노인들이 신라로 내려가 김씨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는 주장.
2. 신라 기록에 언급된 김일제, 그리고 무덤의 연관성?
유득공의 《고운당필기》에서 언급된 김일제 |
太上天子有國泰宗陽號少昊氏金天卽吾宗受氏世祖厥後派疏枝分有昌有徽蔓衍四天下亦已多已衆遠祖諱日磾 自龍庭歸命西漢仕武帝愼名節陟拜侍中常侍封秺亭侯自秺亭已降七葉軒紱燉煌繇是望係京兆郡史籍敍載 莫之與京必世後仁徵驗斯在及漢不見德亂離瘼矣握粟去國避時屆遠故吾宗違異於遼東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는데, 이분이 곧 우리가 받은 성씨의 세조(世祖)이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 온 천하에 만연하니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김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귀순하여 무제 아래에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겼으므로 그를 발탁해 시중[1]과 상시[2] 에 임명하고 투정후(투후)에 봉하였다. 이후 7대에 걸쳐 벼슬을 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3]에 기대어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런 일은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런 까닭에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살게 되었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
흉노족 신라왕족설이 생겨나게 된 근원엔 신라인이 직접 남긴 기록인
문무왕릉비와 대당고부인묘지명의 2개 비문에 신라 김씨 왕족의 시조 중 하나로 투후 김일제가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투후'라는 직책은 오직
김일제만이 받았으므로 투후를 말하면 바로 김일제를 지칭하는 것이 된다. 정리하자면, 투후 김일제는 흉노에 있다가 한무제 때 한나라에 귀순하여 재상직을 얻은 유명인이고, 그의 후손들은 당시 한나라 수도
장안(長安)에 살다가
전한이 멸망하는 시기에
요동으로 피난왔다는 것.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는데, 이분이 곧 우리가 받은 성씨의 세조(世祖)이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 온 천하에 만연하니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김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귀순하여 무제 아래에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겼으므로 그를 발탁해 시중[1]과 상시[2] 에 임명하고 투정후(투후)에 봉하였다. 이후 7대에 걸쳐 벼슬을 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3]에 기대어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런 일은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런 까닭에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살게 되었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
적어도 신라에 사는 김씨들은 자신의 조상을 김일제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로 인해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 신라로 넘어와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주장이 생기게 되었다. 참고로 김일제는 조선시대 경주 김씨였던 추사 김정희가 쓴 책에서도 언급된다.
말에 싣고 다니는 청동솥 |
한편, 신라 초기에 발견된 페르시아식 황금보검과 마구를 비롯한 말과 관련된 유적들은, 흉노족들이 서방과 오가면서 교류했다는 증거라고 한다. 신라 마립간 세력의 대표적인 묘제로 손꼽히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역시 스키타이 및 쿠르간 등 북방 민족의 묘제와 비슷한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시기적으로 최초의 김씨 등장은 1세기경, 흉노의 흔적이라고 주장하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의 등장은 4세기경으로 맞지 않다는 말이 있지만, 신라의 첫 김씨 왕 미추왕의 재위기간은 3세기 말(262~284)이다. 당연히 김씨의 왕릉은 4세기경에 등장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것은 반박 근거로는 불충분하다.
2.1. 반론
돌무지덧널무덤 |
일단 학계에서 신라 흉노왕족설은 정설은 아니다. 증명할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하지만 신라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그야말로 북방 기마민족들의 유물이긴 한 것이다. 일단 진한 변한에서 수장을 " 간" " 거서간"이라고 불렀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유물들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확실히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것이 증명이 되는가에는 의문점이 있다. 흉노족이 김일제만 있는 것은 아니니 김일제의 직계 후손은 아니지만 사로국 초기 무덤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이 워낙에도 흉노의 유물과 일치하여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쿠르간과 신라의 무덤은 등장은 시기적으로 차이가 크며[4] 또한 돌무지덧널무덤에 부장된 유물은 스키타이뿐만 아니라 백제, 가야계와 비슷한 유물이 다수 발견되며, 오히려 백제나 가야계의 유물이 스키타이의 유물과 비슷한 면모도 보이는 등 이렇게 따지면 삼한 자체가 스키타이와 관련성이 보인다는 식의 주장도 가능하다.
그나마 증명 가능한 학설로는 북방민족계통설인데, 이것 역시 흉노에 한정짓는 주장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김씨는 석씨와 함께 건국세력(6부, 박씨)이 아닌 초창기에 이주해온 세력이라고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는 것인데, 이에 비춰보면 일단 신라 건국자는 박혁거세[5]이지 석탈해 또는 김알지가 아니다. 즉, 어디에선가 이주해 왔다고 볼 수도 있는데 김씨는 북방 기마민족계통으로 추정된다. 석씨는 고고학적으론 각배등의 북방 기마민족계통 유물로 보아 기마민족 세력이지만 문헌의 전설로는 해상세력으로도 추정된다.
도깨비가 이 북방기마계 이주민들을 보던 당시 신라 토착민들의 시선을 보여준다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원래 한반도 도깨비는 뿔이 달린 형태는 아니고(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요괴(오니)상이 덧칠된 것), 방망이 들고 다니는 털복숭이 사람처럼 묘사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토착민들 눈엔 철기를 다룰 줄 알던 이주민들이 그야말로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는 도깨비처럼 보였을 것이라는 주장. 그리고 철기를 다룰 줄 알던 이주민들이 자신들의 성을 쇠(金)씨라고 칭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당시 신라 김씨가 김일제를 시조로 받들었기 때문에 흉노족 어쩌고 하지만, 당시 김일제는 이민족으로 중국에서 출세한 입지전적인 위인으로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미 유명한 대상이었다. 즉, 원래 숭조사업을 벌일 땐 자신의 성씨와 행색과 비슷한 출신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섬기는 게 일반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사서에 남은 기록으로는 김일제의 직계 후손이 김알지라고 단정짓지도 못한다. 김일제를 시조로 들고 있는 비문에 대해서도 역사적으로 숭조사업은 매우 흔하게 일어났기때문에 김일제를 시조로 든 것은 승조사업이라고 주장한다.
신라만 그런 것은 아니고 한국사 안에서 사례를 찾아보면 고려의 왕건 가문, 궁예, 견훤은 조상이 당태종 등 중국 황제나 백제 의자왕, 신라 진흥왕이라고 무리수를 둔 전승이 여럿 확인된다. 백제나 가야도 여러 계통 버전의 시조전승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으며, 왕실이 아닌 기타 수많은 집안들의 족보에서도 시조 숭조는 수없이 확인할 수 있다.
김일제는 당시 백제 의자왕을 배신한 예식진(禰寔進)의 묘에서도 언급되듯이 중국 사서에서는 남흉노족으로서 유명한 인물이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한족과 이민족을 같은 조상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이 많았던 것도 있다. 우연히 성씨도 김씨인 덕분에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소호금천씨를 시조로 하는 관념과 일치한다는 주장도 있다. 중국에서는 김일제는 소호 금천(金天)의 후손으로 기록한다.
소호 금천씨를 흉노 사람인 김일제의 조상으로 사서에 쓰는 이유도 흉노, 선비족, 강족, 저족, 갈족 등 시이민족들이 중국 한족들을 지배했을 때 한족들과 이민족은 각기 민족고취와 중국지배와 융화를 위하여 이민족도 모두 중국인의 조상이 있는 것으로 썼기 때문이다. 또한 김씨 부인이 중국에 거주했을 때 중국인들이 같은 중국인이라는 점으로 우대하여 신라 김씨와 흉노 김씨의 비슷한 점을 인정하고 묘비에 강조하여 그리 적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고조선은 흉노와 가장 강력한 동맹이었고 중국인이 쓴 사서에는 고조선 멸망을 "흉노의 왼팔(지리적으로 왼쪽에 위치)을 잘라냈다"라고 썼을 정도이니 말이다.
즉, 신라 왕실에서 당나라와 친분 관계도 염두에 두면서 적절한 숭조 대상을 물색하다가 김씨를 연상시키는 김일제의 조상이라고 꾸며낸 것이 학계에서 꽤 주장되는 설이다. 이런 식의 숭조사업과 윤색은 그다지 신기할 일도 아니다. 수준이 신화 수준이라서 당연히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일 뿐 주몽, 박혁거세, 단군왕검, 수로왕, 탈해이사금 등의 출생을 보면 다들 이것보다 한 술 더 뜬 모습을 보인다. 한참 뒤로 오면 이지란의 청해 이씨는 자기들 조상이 악비(...)라고 주장하고 이의민의 정선 이씨는 한반도나 중국에서 더 이상 끌어올 조상도 없으니 하다하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대월국 리 왕조 인종의 아들을 가문의 시조라고 적어놨다.
여기서의 키포인트는 흉노가 아니라 중국이다. 당대에 모화사상으로 인해 이민족계 중국 출신에서 중국인을 주체로 하여 숭조사상으로 떠받들은 것이, 민족주의가 발양된 현대에 흉노 같은 북방민족 계열로 관심이 옮겨져 북방민족과 연결고리를 강조하게 된 묘한 상황 비스무리한 것.
2.2. 고고학적 반론
- 고대사의 특수성과 고고학자료
고대사 영역, 특히 1~3세기 및 삼국 성립 이전의 정황과 관련된 기록자체가 풍성한 편이 아니기에 다른 역사영역에 비해서 물질자료를 인용, 참조하는 연구가 상대적으로 많다. 이에 물질자료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고고학에 기초를 두고 참조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흉노족 신라왕족설과 같이 학계에서 주류적 이슈로 인정되지 않는 연구는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참조하는 것이 아니라 특징적 유물 하나만을 콕 집어 근거로 사용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6]. 실상 고고학에서 중요한 것은 유물과 관련된 맥락(Context)[7]임에도 이를 생략하고 근거로 들기 때문에 합리적 주장으로 인정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위의 근거로 든 유물들이 바로 그러한 대표적 사례이다.
그렇기에 고고학적으로 흉노족 신라왕족설이라는 견해는 조금도 인정받고 있지 않다. 애초에 있지도 않다. 하술된 '기마민족 남하설'이 그나마 유사한 느낌의 연구라고 할 수 있지만 이는 초창기의 견해일 뿐이며 당시에도 상당한 비판을 받았고 현재는 학계에서는 사장된지 오래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북방계 유물에 대한 맥락은 한반도와 북방과의 관계가 밀접했고 어떤식으로의 교류가 많았다는 것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북방계 유물이 '특정집단'에게만 유독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지역 전반에 널리 나타나기 때문에 이 교류자체[8]가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졌는가를 중점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과제이지 '왕족'과 같은 특정집단을 설명하는 데에 목적이 있진 않다. [9]
- 대성동 고분군 출토 유물의 고고학적 맥락
▲ 동복(銅鍑)이 출토된 대성동 29호. 출토 유물은 더 있으나 특징적인 위세품은 우측 세로 1줄의 것들이 전부다. 보다시피 무수한 가야계 토기와 토착적인 일반 위세품을 제외하면 북방과 관련이 있는 것은 동복 하나밖에 없다[10].
위에서 언급된 대성동 29호 출토 동복 또한 같은 맥락으로, 북방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설명해주지만 이 무덤의 피장자가 애스닉 그룹상 흉노족이라는 직접근거로는 매우 빈약하다. 다만 대성동 고분군이 처음 발굴되던 시점에 위에서도 나와있는 동복이 대성동 29호분에서 출토되고 북방계의 마류들이 출토되면서 기마민족 남하설이 대두되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발굴 자료가 많이 누적되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고 동복이나 북방계 마구류는 가야나 신라 말고도 백제, 마한 등지에서도 널리 확인되면서 자연스럽게 진변한 권역을 중심으로한 "기마민족 남하설"은 사그러 들었다. 그렇다고 북방계 유물의 존재가 무의미한 것이 아니기에 북방과 한반도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고 이해하는 정도로 남아 있다. 즉 위 흉노족 신라왕족설에서 흉노의 유물이라고 열거한 유물에 내포된 객관적인 사실은 "북방계통의 영향을 받았다"까지라는 것이다. 이 유물이 "우리는 흉노족이야. 그러니 흉노 유물을 묻어다오"라는 '해석'을 하기위해서는 맥락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성동 29호에서는 당연히 가야계 유물[11]이 훨씬 더 많고 일부만 외래유물이 출토된 것이다. 다만 토기는 일상용기이고 외래유물들의 일부는 금속류로 위세품(威勢品, Prestige goods)기 때문에 약간 맥락이 다르지만 '계통'이 되는 대상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설명된 동복 외에도 토기, 청동기를 비롯한 각종 왜계유물, 동경(銅鏡, 청동거울)을 비롯한 중원계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런 맥락 중의 하나로 북방계 유물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다소 고고학적 이야기지만 무슨무슨'계' 유물의 존재가 그 고분의 성격 전체를 설명하지 않는다.[12] 가령 동복보다 많이 나온 중원계 동경(銅鏡)은 생각보다 각지의 많은 목관 · 목곽묘에서 출토되었는데 그렇다면 이 무덤들은 중국인의 무덤인가?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누구도 '네'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무덤이란 망자와 생자 간의 이별의 산물로써 각양각색의 각 집단, 민족, 정치체, 국가 마다마다의 제사나 의례 방식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묻히는 피장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이이템 또한 당연히 의례 과정 중에서 부장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유의미한 외래 위세품 하나에 해당하는 것이고 무덤에 부장되는 유물 전체(이하 유물 갖춤새라고 표현한다.)들은 의례행위와 관련이 있으며, 그러한 갖춤새들이 특정한 양식에 수렴할 때 비로소 "ㅇㅇ국가스러운 방식의 의례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흉노의 대표적 유물
다행히(?) 흉노에는 이러한 유물이 표상하는 정체성도 정도차이가 있다. 흉노를 비롯한 북방계 민족들은 중세까지도 부족사회의 흔적이 남아있었듯이 해당 민족, 정치체, 집단 등을 표상하는 아이템들을 굉장히 많이 부장하였다. 바로 "동물문"이 표현된 여러 금속 장식품 이다[13] 흔히 흉노의 활동 범위라고 알고 있는 그 지역의 흉노 유적들을 살펴보면 그러한 동물문 장식이 시문된 금공유물들이 굉장히 많다. 특히나 아무 동물문이 아니라 사슴, 표범이 가장 대표적인 상징으로써 그러한 문양들을 일정한 도안 속에서 오래도록 사용하였다. 흉노부터 시작하여 선비도 말할 것이 없으며, 나중에는 요나라와 금나라, 원나라에서도 아이덴티티를 표징하는 도안, 이미지로써 사용된다. 흉노 문서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특유의 입체적인 디자인으로 정형화된 도안의 금공유물이 많다. 특히 사슴을 물어뜯는 두마리의 표범이라든지. 이러한 것들이 다른 흉노유물과 함께 유물갖춤새를 구성하기 때문에 동물문 허리띠장식에서 보이는 아이덴티티는 흉노계통임을 적시한다고 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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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의 매장의례 자체에서도 북방지역에서는 동물의 뼈를 피장자의 머리맡에 묻거나 피장자의 바로 인근에 동물의 뼈를 묻는(원래는 살이 붙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행위가 주로 관찰된다. 한국도 동물 순장 행위는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흉노계 무덤에서처럼 빈번하게 관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라, 가야의 왕묘에서 흉노의 상징적 유물이나 흉노식 의례 행위의 흔적이 확인된 사례가 없다.[14] 신라, 가야 왕묘에서 나오는 다른 북방계 유물은 신라, 가야 말고도 많이 나오며, 진짜 정체성을 표현하는 유물들은 따로 있음에도 일부 "북방계 유물"의 존재만으로 흉노족과 "민족", "왕족" 등을 표제어로 삼는 가설에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의 여하한 이유 때문에 동복은 당시 형성된 교류 네트워크 망에서 수장층의 전유물로써 상징적 요소로써 매납된 것이라고 볼 뿐이다.
- 한반도와 관련된 북방계 물질자료의 근거상 한계
모린 톨고이 투브 아이막 고분[15] | 황남대총의 입단면도.[16] |
그렇다면 내몽골이나 몽골 일대의 유적이 현실적으로 가까우니 비교가 될 수 있겠지만 무덤의 형태는 또 전혀 다르다. 기원전후한 시점, BC 1세기부터 AD 1세기의 흉노 무덤은 사실상 돌 몇개 깔아놓는 정도의 봉분을 갖는 것이 전부이다. 심지어 기원 전후한 시점부터는 약간의 흉노 자체적 전통만을 남겨놓고 한식(漢式) 무덤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봉토를 크게 쌓는 적석목곽묘 형태와는 전혀 다르다. 매장 주체부를 보더라도 적석목곽묘는 경주에 있는 초대형 왕묘들은 웬만하면 지상식이다. 단면도 상에서 봤을 때 지표면 위에 자리하고 있어서 지상식이라고 일반적으로 칭한다. 반면에 내몽골, 몽골 등지의 흉노 무덤들은 지하식, 그것도 사다리 없으면 빠졌다간 못올라오는 정도의 깊이를 갖는 형태로 완전 판이하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그나마 지근거리의 내몽고, 몽고 일대의 흉노는 적석목곽묘와 관련이 없다.
즉 시종일관 적석목곽묘와 관련된 유적으로 이식 쿠르간 무덤만 이야기하는 것은 인근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 이식 쿠르간이 적석목곽묘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카자흐스탄부터 한반도까지 친히 왔다면 무덤 축조 기술자부터 데려와야 하는 집단적 이동인데 집단적 이동에는 분명 이동의 준거가 남기 마련이다. 고대사에서 민족 이동의 사례로 대표적인 것이 동호나 선비족 계통인데, 동호는 다소 애매한 감이 있지만 선비족의 경우 모체가되는 흉노족이 발원한 바이칼 호수 서남쪽에 관련 유적이 존재하며, 점차 서남쪽 방향으로 남하하는 유적 및 물질문화들의 시공간적 변화가 확인이 되고 있다. 그렇기에 그 이동이 거리가 상당함에도 허황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바 적석목곽묘의 기원론을 따짐에 있어서도 북방기원론은 그냥 이러한 썰이 있는데 너무 닮아서 신기하고 관련성이 있으니 차차 찾아보자 정도, 또는 북방과 몇가지 요소요소에서 관련이 있으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도지 이것이 "우리는 흉노!"는 결코 아니다.
그리고 계림로 14호 감옥보검보고 카자흐스탄과 관련성을 바탕으로 흉노족 신라왕족설의 근거가되는 마냥 서술된 부분이 있는데 이 또한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냥 실크로드의 연장선에 한반도가 있을 따름이지 그것이 어떻게 신라만 실크로드 교역품이 왔으니 그들이 직접온 것이다라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심지어 계림로 감옥보검은 왕릉에서 출토된 것도 아니고 일개 왕족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흉노족 신라왕족설의 근거로는 매우 빈약하다. 차라리 그 썰을 풀기 위한 근거로 삼을 것이라면 황남대총을 비롯한 대릉원의 왕릉에서 출토된 로만글라스와 사산글라스 등의 유리 유물들을 사례로 삼는 것이 더 좋다. 그러한 로만글라스, 사산글라스들의 주요 생산지, 대량 출토지를 따지면 바로 중동 일대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괘릉이나 흥덕왕릉의 석인상을 보면 호인상이라고 부르는, 즉 소그드인(이란계 교역민족) 정도로 추정되는 서역의 인물들도 있다. 카자흐스탄 일대와 결부지을 것이라면 이들 또한 사례로 들지 아니할 수 없다. 물론 당연히 근거로 삼는다고 한들 400년 넘게 차이나는 시간적 간극을 극복하지는 못하는 근본적 한계를 갖는다.
- 소결
방송에서 다룰 수 있는 흥미로운 주제임은 분명하지만, 만약 이것이 정말 진지한 학계의 논의라고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이런 논지전개가 (학술적으로도) 타당한다고 하면 삼국시대 삼국 각국이 중국과 맺은 조공관계(문헌자료), 삼국 각국에서 출토되는 무수한 중국계 위세품(물질자료)을 근거로 삼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주장을 해도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19]
출토된 유물이 흉노계, 북방계라는 사실 자체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관련된 자료 전반을 두고 교류관계 자체를 설명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 신석기~고대, 유라시아 전체에 해당하는 시기의 스키타이 문화, 흉노계 문화 등의 관계와 함께 검토되는 주제이며, 공간분포를 고려하면 국제적 연구분야[20]이기도 하다. 점차 인식적으로 이전의 연구경향과는 달라지고 있지만 삼국시대 한반도의 북방계 유물을 요연하게 직접 설명해줄 정도도 아니다. 그렇기에 흉노족 신라왕족설은 급발진인셈.
3. 결론
'김일제'와 관련된 문자자료가 특수한 것은 사실이나 학계에서는 이 기록 자체를 숭조사업의 일환으로 본다. 간단히 말해 반론은 무수한데 이 설을 지지해줄 문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고고자료 상으로도 마찬가지다.김일제는 문무왕릉비에 기록된 문제의 인물이다. 김알지가 신라 김씨의 시조로 기록된 통상적인 역사상식과 전혀 달리, 김씨 흉노설은 1961년에 문무왕릉비의 비석 하단이 발견되고 잇따라 2009년에는 비석 상단마저 발견되면서부터 의혹의 중심이 되어왔다. 여러가지 설이 많긴 하지만 견해는 대체로 둘로 나누어진다. 한쪽은 김일제가 한무제 시기 포로로 잡혀온 흉노의 휴저왕의 아들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신라의 김씨들이 흉노족의 후예들이라고 보는 견해다. 다른 한쪽에서는 비문의 내용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김씨왕족들이 자신들의 선조의 권위를 과장하기 위해 내세운 허구적 조상이라고 본다. 두 견해 사이에 사실 접점이 없어 한국사학계 내에서도 서로 토론이 잘 진행되지 않고 있다.(논문: 金日磾 관련 논의의 현 단계와 새로운 이해의 방향/ 정훈식 (경성대학교) / 동양한문학연구 52 권 호 pp.183~206( 23 pages))
고고학적으로도 한반도의 유물들을 살펴보면 중원문화의 영향만큼이나 북방계 문화 요소가 상당히 많이 관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 금관의 디자인적 요소도 북방과 관련이 있는 것이고, 특히 보요부 장식들 즉 딸랑거려서 빛을 반짝반짝 반사하는 효과를 연출할 수 있는 장식부 또한 계통을 따져보면 북방에 있다. 말고도 한반도 전체가 중원, 북방과 마주하면서 기마문화가 형성되는데 이 영향으로 처음에는 중원계보다도 북방계 마구류들의 비중이 훨씬 더 많다. 6세기까지도 선비족과 비교검토가 가능할 정도의 디자인적 동일성을 보인다. '누금공법'마저도 북방과 관련이 있는 요소다.
그 밖에도 제 가야는 두 말할 것 없고 고구려나 부여[21], 심지어 낙랑의 토착재지인(비 한족)으로 추정되는 무덤들에서도 흉노계 유물 및 북방요소들이 많이 나타난다. 더 나아가면 중국에서도 북방에 인접한 동네의 유적들에서는 북방계 유물의 출토량이 굉장히 많다.
하지만 이런 북방 유목민 문화의 영향이 ' 흉노'를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북방 유목민의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흉노'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북방의 민족들이 부여 → 고구려 → 백제 순으로 남하하면서 한반도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들 북방 문화의 전래는 흉노와는 '직접적'으로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단순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흉노 민족이 실제로 대규모 직접 이주를 한 것인 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고고학적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더군다나 김일제에 이르러서는 흉노를 떠나 한나라에 귀순한지 7대가 넘었는데 한족(漢族)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7대가 넘게 흉노의 문화를 지켜서 그것을 결국 신라에 전수했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나라에 귀순한 상태에서 대대손손 자신들만의 금관을 쓰고 자신들만의 무덤양식을 보존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신라의 무덤양식의 원조가 될 만한 유적을 하나라도 찾아볼 수 있어야 되는데, 아직까지 그런 유적이 발견된 적은 단연코 없다.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점을 들어 흉노 신라왕족설은 다만 그 이름(유명세)을 빌려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지·저고리차림' 한복 원류는 스키타이 문화
학계에 따르면 한복의 원류는 중국이 아니다. 그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기원전 7∼3세기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활동한 유목 민족 스키타이(사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대 한반도는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한복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바지저고리, 치마저고리와 같은 이부식(二部式·투피스) 차림새가 이때부터 형성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 복식 전문가인 최은수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5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우리 옷은 스키타이계 문화권에 속한다"며 "스키타이는 말을 타는 유목 민족으로 오늘날 승마복처럼 발목 쪽으로 좁아지는 간편한 차림새가 특징"이라고 말했다. '한국복식문화사'를 저술한 김문자 수원대 의류학과 교수도 '고대 한복의 원류 및 세계화 속의 한복의 위치'라는 논문에서 "우리 한복의 바지, 저고리차림의 복장은 당시 스키타이족의 대표적인 복식"이라고 소개했다. 김 교수는 "우리 복식의 원류를 이루는 스키타이계 복장들은 몸에 꼭 끼는 형태로 기마 등 활동에 편리한 상의와 하의가 기본"이라며 "이는 당시 서양의 대표적인 복식인 그리스복과도 다르고 중국의 대표적인 복식과도 매우 다른 양식"이라고 설명했다. 피혁으로 바지통이 좁게 만든 '세고(細袴·가는 바지)' 양식이 대표적인 예인데, 고구려 고분벽화 인물도 등에서 발견된다. 반면, 당시 중국 한족(漢族)은 겉에서는 바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긴 길이의 겉옷을 착용했으며, 옷을 여미는 부분도 매우 길어 등 뒤로 돌아갈 정도였다. 춘추전국시대 공자나 노자를 그린 그림을 떠올리면 된다.
팩트체크, 한국이 중국에서 유래했다?
학계에 따르면 한복의 원류는 중국이 아니다. 그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기원전 7∼3세기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활동한 유목 민족 스키타이(사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대 한반도는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한복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바지저고리, 치마저고리와 같은 이부식(二部式·투피스) 차림새가 이때부터 형성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 복식 전문가인 최은수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5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우리 옷은 스키타이계 문화권에 속한다"며 "스키타이는 말을 타는 유목 민족으로 오늘날 승마복처럼 발목 쪽으로 좁아지는 간편한 차림새가 특징"이라고 말했다. '한국복식문화사'를 저술한 김문자 수원대 의류학과 교수도 '고대 한복의 원류 및 세계화 속의 한복의 위치'라는 논문에서 "우리 한복의 바지, 저고리차림의 복장은 당시 스키타이족의 대표적인 복식"이라고 소개했다. 김 교수는 "우리 복식의 원류를 이루는 스키타이계 복장들은 몸에 꼭 끼는 형태로 기마 등 활동에 편리한 상의와 하의가 기본"이라며 "이는 당시 서양의 대표적인 복식인 그리스복과도 다르고 중국의 대표적인 복식과도 매우 다른 양식"이라고 설명했다. 피혁으로 바지통이 좁게 만든 '세고(細袴·가는 바지)' 양식이 대표적인 예인데, 고구려 고분벽화 인물도 등에서 발견된다. 반면, 당시 중국 한족(漢族)은 겉에서는 바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긴 길이의 겉옷을 착용했으며, 옷을 여미는 부분도 매우 길어 등 뒤로 돌아갈 정도였다. 춘추전국시대 공자나 노자를 그린 그림을 떠올리면 된다.
팩트체크, 한국이 중국에서 유래했다?
중앙대학교 생명공학과에서 검사해서 나온 DNA 분석 |
2009년 제작된 KBS의 역사스페셜 <"신라 왕족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 편에서 제작진이 아시아 지역 고인골 샘플 2천여 개를 보유 중인 중앙대학교 생명공학과에 신라인과 흉노의 유전적 근원성 DNA 분석을 의뢰했는데 스키타이인과 신라인의 유전자가 거의 같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 |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신라인과 흉노의 DNA 일치성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뜻밖에도 모계 DNA와 부계 DNA 둘 다 흉노보다는 스키타이와 거의 일치하게 나온 것이다. 해당 영상에서 중앙대 이광호 교수는 자신도 뜻밖의 결과라 여러 번 반복 검증했지만 신라인과 스키타이인의 유전자가 같게 나온다는 인터뷰를 한다. (36분 16초)
한민족의 언어, 문화, 정치적 계보는 고조선과 부여 등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연원을 두고 있다. 건국 신화나 국호도 부여와 연관 지은 고구려와 부여는 말할 것도 없고, 신라 역시 고조선 유민들이 사로 6촌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고학적으로도 신라는 건국 당시부터 고조선계 문화였음이 확인된다. 이런 만주의 초기 한민족 문화는 북방 유목민 문화의 동쪽 끝자락에 닿아있었고 최소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거나 아예 그러한 유목민 문화의 일파로 여겨진다. 이 때 그 '초기 북방 유목민 문화'가 바로 문헌상 나타나는 제일 오래된 유목민 문화인 스키타이로 비정된다.
신라의 무덤 양식이라든가 신라의 금관, 황금 보검 등은 실제로 굉장히 유사하다. 특히 신라 금관에서 나타나는 장식들은 스키타이를 비롯한 유목민 문화에서 나타나는 사슴, 나무, 새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들이다. 그 외에도 고구려를 위시한 고대 한복의 모태가 스키타이였다는 것이 국내 복식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진다. #
흉노족 신라왕족설 등 신라를 흉노족과 연관 짓는 설이 있으나 유목문화와의 연관성은 신라 이전 고조선은 물론 부여와 부여에서 파생된 국가(고구려, 백제)에서도 발견된다. 신라 문화가 흉노와의 유사성이 보이는 것은 신라가 흉노에서 파생되었기보다는 흉노와 신라가 같은 스키타이 문화에서 파생된 흔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4. 여담
- 일본에서는 도쿄대학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가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을 주장한 바 있다.[22] 반론 문단에 예시로써 서술된 한국의 기마민족남하설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사로국과 가야 초기의 고고학적 유물들이 북방 기마민족계통의 유물로 나오며 스에키가 일본 북규슈에서부터 발견되기 때문이다. 다만 흉노와의 관련성은 아니고 김해의 대성동고분군에서 발견되는 북방 기마민족계통의 유물들은 흉노보다는 선비족 유물과 유사성이 많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그러니 흉노족 개드립에 낚이지 말자. 게다가 이 설 역시 일본 고고학계에서도 설의 표제어마냥 진짜 기마민족의 정복왕조로써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고 현재는 마찬가지로 상호관련성을 주목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 악플로 악명 높은 네이버 뉴스 댓글창와 디시인사이드 역사 갤러리 같은 곳에서는 이를 정설이라 주장하며 지역드립을 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들의 주장들은 대부분이 그저 황당무계한 헛소리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갤러들도 디씨스런 논리로 상대하는 인간들이 대부분인지라 이에 대해 제대로 토론해 볼 장소는 못된다. 사실 [타지역 사람들 본관을 확인해보면 신라계도 많아서 자학드립이나 마찬가지다.[23]
- 루리웹, 다음 뉴스, 다음 아고라 같이 경상도 혐오가 심각한 사이트에선 위의 주장을 사실로 믿으며, 경상도에 지역드립을 들먹이거나 경상도 출신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 흉노 타령을 해대는 경우가 많다.
5. 같이 보기
[1]
侍中: 최고관직인 재상직을 말함.
[2]
常侍: 임금에게 충고하는 벼슬로써 정치에 대해 논박하고 왕명과 문서의 출납 등을 담당하였다.
십상시로 유명한 직책이다.
[3]
京兆郡: 현
시안시 무공현(武功縣).
[4]
쿠르간은 BC 1세기부터 이미 사라지기 시작한다.
[5]
삼국유사 기이편에 나오는 알지거서간(閼智居西干).
[6]
소위
재야사학에서 주로 보이는 현상이기도 하다.
[7]
어떤 무덤에서 출토되었는가, 공반된 유물이 어떤 것이 있는가, 양적 비율이 어떠한가, 다른 무덤·다른 지역·다른 국가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등
[8]
모방생산, 교류의 산물, 인적집단의 이동을 포함한 의미의 '교류'
[9]
첨언으로 지금의 연구는 굳이 요약하면 '북방계'라는 것의 개념을 구체화하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하술된 하플로그룹의 연구 성과라던지, 신석기-청동기시대의 중앙아시아-몽고 일대의 여러 고고문화들의 거시적 관계, 계보 관계 등에 대한 것을 설명하는 것이 있다. 적어도 고고학적으로는 이러한 거시적 관계를 구체화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보다 적극적인 집단간의 역사상의 관계를 해석할 수 있다. 문자로 기록이 이뤄지기 전의 상황이기 때문에 물질자료를 문자읽듯 할 수 없으므로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공간적으로도 매우 넓고 국제연구이기에 성과누적이 즉각적이기도 어렵다.
[10]
또한 동일시기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동복이 확인된 곳은 길림성 유수시 노하심 고분군에서 출토된 동복이다.
부여와 관련된 것으로 시기차, 공간차가 그나마 가장 적다. 또 보다 빠른 AD 8년의 평양 석암리 9호 낙랑고분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하술되어 있지만 동북아시아 전반에 나타나는 현상이지 신라나 가야권에만 콕 집어서 흉노족이 와서 왕족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11]
엄밀히 말하면 영남지역 공통양식에서 점차 가야계로 변한다.
[12]
계통 자체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연구주제이기도 하다. 또 그 계통이 '정체성'이라는 것과 연결되는 가라는 것도 별도의 연구 주제이다. 이를테면 '흉노유물'과 흉노'계', 북방'계' 유물 등의 표현이 다른 것처럼
[13]
물론 뼈로만든(골제)도 많다.
[14]
북방민족처럼 훼기의례는 고대 한반도 고분에서도 나타나지만 훼기현상 자체가 북방의 전유물이라고까지 할 정도가 아니므로 훼기현상이 있다는 자체만으로 흉노와 직결될 수 없다.
[15]
동경은 기원전 2세기 초~1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것이며 아래의 동물뼈는 개의 두개골이다.
[16]
5세기 중엽의 대표적인 적석목곽묘다.
[17]
그 목곽묘라는 것도 몽골은 중국식 영향이 두드러지고 반면에 한반도 일대는 비교적 자체적 변화를 갖는 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18]
부여-고구려의 물질적 관계 연구(기원전~3세기), 이후 고구려-신라(4세기 후반~5세기), 5세기대 일반적인 북방계 및 외래유물 연구 등 더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을 모두 건너뛰었다.
[19]
흉노족 신라왕족설이라는 주제가 학계에 없듯 이런 주제도 없다.
[20]
단순히 연구만이 아니라 발굴 자체의 문제가 있기도하다. 한국이야 문화재법이 엄격하여 발굴 빈도가 면적대비 활발한 반면, 한국 서쪽으로 존재하는 여러 나라들은 한국이나 일본만큼 촘촘하게 발굴하지 않는다. 동북지역만 하더라도 그렇고, 그러한만큼 고구려, 부여는 물론 관련된 여러 청동문화, 고조선 등에 대한 자료도 면적대비 많지 않다.
[21]
부여는 거의 선비족이랑 동일한 물질문화를 영유하는 것으로까지 추정된다. 다만 선비족의 중심지라고 할만한 유적이 대규모 발굴된 적이 없으므로 다소 재론의 여지는 있다. 뿐만아니라 유물의 형태적 요소만으로 민족을 쉽게 정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현실적으로 부여 유적이 한국에 없는 것 또한 심화연구의 제한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22]
다만 21세기에 와서는 이미 기마민족 정복 왕조설도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 설을 뒷받침해줄 만한 사료나 고고학적 근거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23]
현대인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조상으로 소급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고립된 지형이 아니라면 전근대의 수없이 많은 전쟁이나 재해로 인한 이주 및 다양한 교류를 통해 지역간 인구가 뒤섞여온 것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역사이며 당장
6.25 전쟁 때도 많은 북한의 피난민들이 남쪽 끝인
부산광역시 일대에 정착한 바가 있다. 무엇보다 족보의 경우 모화사상으로 윤색되고 조선 후기에는 군역과 납세를 피하기 위한 조작이 대규모로 이루어졌기에 엄밀한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