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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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영수열후(永脩烈侯) 桓伊 | 환이 |
|
시호 | 열(烈) |
작위 | 선성현자(宣城縣子) → 영수현후(永脩縣侯) |
성 | 환(桓) |
휘 | 이(伊) |
자 | 숙하(叔夏) |
아명 | 자야(子野) |
생몰 | ? ~ 391년 |
출신 | 초국(譙國) 질현(銍縣) |
부친 | 환경(桓景) |
자녀 | 환숙지(桓肅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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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 장사후(長社侯) 단양윤 환경의 아들. 환선의 조카. 권신 환온과는 먼 친척 사이. 타고난 무예 솜씨와 군사적 재능으로 동진의 장수가 되어 여러 굵직한 전투에 참여해 전공을 올렸다.2. 생애
뛰어난 무예와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성품으로 이름을 날렸고, 왕몽과 유담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관직에 천거되었다. 환이는 여러 주(州)의 참군을 역임하다가, 누차 승진해 대사마참군이 되었다. 당시 전진의 선소제 부견이 전연을 정복해 급격히 세력을 키우고, 급기야 장강 이남의 동진까지 노리면서 천하통일의 야심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동진 조정에서는 이를 근심하여 장수가 될만한 인재를 선발했는데, 이때 환이도 그 중 하나로 꼽히면서 회남태수에 임명되었다. 이후 여러 번 전진의 공격을 막은 공으로 조정에서 그에게 도독예주지12군양주지강서5군제군사(都督豫州之十二郡揚州之江西五郡諸軍事), 건위장군, 역양태수를 더했다.태화 6년(371년) 정월, 환온이 친히 출정해 원근(袁瑾)[1]을 격파하고 수양성을 포위한지 여러 달이 지난 때였다. 궁지에 몰린 원근은 전진의 선소제 부견에게 항복하면서 구원을 청하니, 부견은 그를 양주자사(揚州刺使)로 삼고 무위장군 왕감(王鑒), 전장군 장자를 파견해 20,000여 보•기로 구원하게 했다. 환이는 남돈태수 환석건, 건무장군 사현과 더불어 환온의 명을 받고 출진해 석교(石橋)에서 전진군과 싸워 크게 이기고, 말 500필을 빼앗았다. 이 공으로 환이는 선성현자(宣城縣子)에 봉해지고, 도독예주제군사(都督豫州諸軍事), 서중랑장, 예주자사로 승진했다.
태원 원년(376년) 3월, 부견이 전량을 정벌하자, 거기장군 환충의 명령을 받들어 수양(壽陽)에 주둔해 전진의 후방을 어지럽히려 했다. 그러나 이는 큰 효과를 보지 못 했고, 결국 5개월만에 전량의 군주 장천석이 전진에 항복하면서 허사가 되니, 다시 군대를 돌려 귀환했다.
태원 8년(383년) 8월, 부견이 장안에서 융졸(戎卒) 60만과 기병 27만 명을 거느리고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이에 동진 조정에서는 사석을 정로장군, 정토대도독으로 삼고, 관군장군 사현, 보국장군 사염, 서중랑장 환이를 보내, 80,000 군사로 부견의 공세를 막게 했다. 환이는 사현, 사염 등과 함께 비수(肥水)에서 전진의 100만 대군을 대파했다. 비수대전에서 큰 공을 거둔 환이는 도성 건강(建康)으로 돌아와, 영수현후(永脩縣侯)에 봉해지고 우군장군으로 승진했다. 여기에 더해 조정에서 그에게 상으로 돈 100만 전과 도포 1,000단을 하사했다. 환이는 본래 겸손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 나라를 구한 막대한 공을 세웠음에도 이전과 같이 겸양하는 태도를 유지하며 뽐내지 않았다고 한다.
태원 9년(384년) 3월, 형강2주자사 환충이 사망하자, 조정에서 환이를 도독강주형주10군예주4군제군사(都督江州荊州十郡豫州四郡諸軍事), 강주자사, 가절로 삼고, 장군직은 전과 같이 하도록 했다. 환이가 강주로 부임했을 때, 변경은 전진의 분열로 인해 안정된 상태였기에, 관대한 정치를 베풀어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당시 강주는 여러 차례 흉년을 겪고 많은 백성들이 사망하면서, 가구가 56,000여 호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환이는 작은 현들을 병합시키고, 각 군에 명해 잠시 쌀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강주의 치소를 예장(豫章)으로 옮겼다. 조정에서는 강주 치소를 심양(尋陽)으로 다시 옮기라는 명령 외에는 환이가 올리는 모든 요청을 다 들어주었다. 환이의 이런 노력 덕에 강주 백성들의 생활은 그럭저럭 먹고 살 만큼 나아졌다.
환이가 강주를 다스린지 수년이 지났을 무렵, 호군장군에 임명되어 다시 도성 건강으로 귀환했다. 이때 우군부(右軍府)의 관리 1,000명도 환이 휘하의 호군부(護軍府)로 배속되었다.
태원 16년(391년), 재직 중 사망했다. 사후 우장군으로 추증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시호는 '열(烈)'. 아들 환숙지가 후사를 이었다.
3. 기타
- 환이는 뛰어난 장수인 동시에 타고난 음악가이기도 했다. 음악적 감각은 강좌(江左)에서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원숭, 양담과 더불어 "3절(三絶)"로 불렸다. 환이는 그 중에서도 피리 연주에 특히 뛰어났는데, 그의 연주를 듣고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업무를 마치고 남은 시간에 항상 음악만 연구했으며, 연주는 물론, 직접 작곡까지도 하였다. 대표곡은 <매화삼농(梅花三弄)>으로, 당나라, 북송, 명나라를 거쳐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
간신
왕국보는
사안에게 원한을 품고,
회계왕 사마도자로 하여금
효무제 앞에서 사안을 헐뜯게 했다. 이에 효무제는 동생인 사마도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점차 사안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효무제가 연회를 열었는데, 이때 사안과 환이도 초대를 받아 참석하였다. 효무제가 환이에게 그의 특기인 피리를 불라 명하자, 환이는 쟁가(箏歌)로 대신하기를 청했다. 효무제가 이를 허락하니, 환이는 종에게 피리를 불게 하고, 자신은 쟁을 치면서 〈원시(怨詩)〉를 노래했다.
為君既不易,
임금이 되기는 쉽지 않고,
為臣良獨難。
신하가 되기는 참으로 어렵네.
忠信事不顯,
충신한 일은 드러나지 않고,
乃有見疑患。
되려 의심의 걱정만 있구나.
周旦佐文武,
《金縢》功不刊。
《금등》에 공적이 기록되지 않았네.
推心輔王政,
마음 들어 왕정을 보좌해도,
二叔反流言。
사안은 그 강개한 음절에 눈물에 흘리며 옷을 적셨고, 효무제 또한 그 뜻을 알아듣고는 몹시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띄었다.
[1]
원진의 아들로, 아버지 사후 반란군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