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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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桓雲(? ~ 360)
동진의 인물로 자는 운자(雲子). 예주 초국(譙國) 용항(龍亢) 출신. 환이의 차남이자 권신으로 유명한 환온의 동생이다.
2. 생애
표기장군 하충의 참군으로 임관하여 상서랑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환온이 성한 정벌에 큰 공을 세워 군공 작위로 승격되자, 환운은 아버지의 만녕남(萬寧男) 작위를 대신 이었고, 건무장군, 의성태수를 역임했다.승평 2년(358년) 8월, 예주자사 사혁이 사망하자, 사도 회계왕 사마욱은 환운으로 하여금 사혁을 대신케 하려 했다. 하지만 나날이 강해져 가는 환씨 집안의 권세를 경계하던 왕표지가 반대하니, 사마욱 또한 이를 옳게 생각해 사만을 예주자사로 삼았다.
모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아머니의 장례식이 한창 진행 중인 와중에 조정은 환운을 강주자사에 임명했으나, 환운은 병을 이유로 사양하며 어머니의 묘를 지켰다. 이에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당장 관직을 받을 것을 종용했지만, 환운은 장례를 모두 마칠 때까지 굳게 거절했다. 모친상을 무사히 마친 후, 환운은 다시 관직에 나아가 도독사예이주군사(都督司豫二州軍事), 영진만호군(領鎮蠻護軍), 서양태수, 가절에 임명받았다.
환운은 무리를 널리 모으고 휘하에 많은 병력을 둘 뜻을 품었으나, 지역을 다스리면서 형벌을 남용해 억울하게 처벌받은 이가 무척 많았다. 그는 뭇 사람들의 원망을 한몸에 받았지만, 당시 그의 형 환온이 집권하던 시기라 누구도 감히 탄핵할 생각을 품지 못했다.
승평 4년(360년), 사망하고 평남장군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貞). 아들 환서(桓序)가 후사를 이었으며, 관직은 환성내사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