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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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謝萬(320 ~ 361)
동진의 인물로 자는 만석(萬石). 동진의 유력 가문인 진군 사씨 집안 출신으로, 태상 사부(謝裒)의 넷째 아들이자 태부 사안의 동생이다.[1] 동생으로는 비수대전에서 총사령관을 맡았던 위장군 사석과 영가태수를 지낸 사철(謝鐵)이 있다.
2. 생애
비록 도량이 형 사안보다는 못했으나 재기가 준수했고 스스로 뽐내기를 잘하여 일찍이 명성이 있었다고 한다. 사만이 20살이 되었을 때 사도연(司徒掾)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우서속(右西屬)으로 옮기라는 조정의 요청을 받았으나 사양했다. 사만은 항상 머리에 백륜건(白綸巾)을 두르고 몸에는 학창의(鶴氅衣)를 걸쳤으며 신발로는 나막신을 신고 다녀 자못 명사의 풍모가 있었다. 회계왕 사마욱은 명사들을 좋아하였기에 사만을 명사로서 대우하고 그와 더불어 긴 담소를 나누며 친분을 쌓았다.영화 원년(345년) 정월, 섭정을 맡은 저태후가 회계왕 사마욱을 무군대장군, 녹상서육조사로 삼았다. 사마욱은 벽소해 사만을 종사중랑에 임명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오흥태수로 옮겼다.
승평 2년(358년) 8월, 사만의 형인 예주자사 사혁이 사망했다. 사만은 회계왕 사도 사마욱의 부름을 받고 예주자사, 영회남태수(領淮南太守), 감사예기병사주제군사(監司豫冀并四州軍事)에 임명되었다.
승평 3년(359년) 10월, 전연의 상용왕 모용평과 장낙태수 부안(傅顔)이 보•기 50,000명을 거느리고 남하해 동아(東阿)에서 동진의 태산태수 제갈유(諸葛攸)를 대패시켰다. 동진 조정은 즉시 반격을 개시하기 위해 예주자사 사만과 서연2주자사 북중랑장 치담에게 북정을 명했다. 동진의 군대는 두 갈래로 북진하여 사만의 군대는 수양성(수춘)을 지나 하채(下蔡)로 진격했고, 치담의 군대는 고평(高平)으로 향했다.
사만은 스스로 호걸임을 자랑하며 오만하게 굴었고, 군중에서 시를 읊으며 자기 자신을 찬양하고 사졸들을 돌보지 않았다. 이를 전해들은 사안은 동생이 전장에서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을 심히 걱정하여 직접 사만의 진영을 찾아가 부대의 장수들을 위로하고 동생을 부탁했다. 그리고는 사만을 만나 그의 태도를 질책했다.
"너는 원수(元帥)로서 마땅히 휘하 제장들을 접대하고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야 하거늘, 어찌 이와 같이 행동하느냐!"
이윽고 사안이 자리를 뜨자 사만은 휘하 장수들을 모두 소집시키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들고있던 등긁개로 장수들을 향해 삿대질하며 말했다."제장들은 모두 강한 병졸이다."
이에 장수들은 더욱 사만을 원망했다.마침내 하채에 도착한 사만은 먼저 정로장군 유건(劉建)을 보내 마두성(馬頭城)을 수리하게 하고, 자신은 무리를 이끌고 와영(渦潁)으로 들어가 낙양(洛陽)을 지원했다. 이때 치담이 병에 걸려 팽성(彭城)으로 귀환했는데, 사만은 치담이 퇴각했다는 소식만 듣고 전연의 군대에게 패배하여 퇴각한 것이라 착각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만이 섣불리 군대를 후퇴시키니, 갑작스런 퇴각 소식에 병사들은 크게 놀라 무너졌고, 전연군은 그 틈을 타 사만의 군대를 공격해 궤멸시켰다. 전연군은 승세를 타고 계속 진격하여 허창(許昌), 영천(穎川), 초(譙), 패(沛) 등 예주 산하 여러 성들을 차례로 함락해나갔다. 결국 사만은 땅을 전부 잃고 허겁지겁 남쪽으로 도망쳤다.
사만에게 앙심을 품고있던 장병들은 이 기회에 그를 도모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이를 눈치챈 사안이 그들을 간곡히 설득한 덕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사만을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북장랑장 치담도 건무장군으로 강등시켰다.
승평 5년(361년), 복권되어 산기상시를 제수받았으나 얼마 안가 사망했다. 향년 42세. 여담으로 아들 사소(謝韶)는 어려서부터 명성이 있어 관직이 거기장군에 이르렀으나 요절했고, 딸 사씨는 명문가인 왕순(王珣)의 처로 시집갔으나 나중에 이혼하면서 두 집안의 사이가 벌이지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