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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38:59

환단고기/사상적 비판

환단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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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와 그 신봉자들을 비판하는 만화
1. 개요2. 분석3. 비뚤어진 애국심
3.1. 민족정신 고취?3.2. 반민족적 탄압?
4. 행적
4.1. 삼일신고를 대종교로부터 베낌4.2. 천부경을 단군교로부터 베낌4.3. 낭가사상을 신채호로부터 베낌4.4. 삼신일체 사상을 베낌
5. 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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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환단고기의 사상적 측면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는 문서.

2. 분석

추종자들 일각에서는 결국 환단고기가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적극적 민족주의 운동의 산물이므로, 그 진위여부가 어찌되었든 간에 일정하게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환단고기에는 한민족이 지향하고 되찾아야 할 진취적 기상, 애국정신을 심어주는 한민족 고유의 우수성, 한민족이 단순한 약소민족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담겨 있으며, 이러한 민족정신을 내재화시킴으로써 종래까지의 축소지향적이고 자기비하적인 소한사관(小韓史觀)을 타파하고 희망적이고 자존적이고 주체적인 대한사관(大韓史觀)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최근에는 한민족을 중심으로 하나된 온 인류를 꿈꾼다.

다른 한편으로는 동북공정이나 일본 극우사관을 상대로 벌어지는 동북아 역사전쟁에서 환단고기로 상징되는 자주적 역사관을 내세워 승리를 쟁취하자고, 환단고기를 통해서만이 승리할 수 있다고 외친다. 다만 고구려사, 독도, 위안부 문제는 그렇다 쳐도 한민족의 조상인 치우를 중국에 빼앗겼다던지, 일본은 한민족이 건너가서 개척한 땅이라던지 등 좋지 못한 발언을 한다.

다음은 증산도 역주본 해제에 실린 '환단고기를 읽어야 하는 11가지 이유'이다.
  1. 환단고기는 인류 창세문명과 한민족 시원 역사의 진실을 밝혀 주는 유일한 사서이다.
  2. 환단고기는 단절된 한민족사의 국통(國統) 맥을 가장 명확하고 바르게 잡아 준다.
  3. 환단고기는 환(桓)·단(檀)·한(韓)의 광명 사상이 실현된 상고시대 인류와 동북아 역사의 전체 과정을 전하고 있다.
  4. 환단고기에는 한민족의 고유 신앙이자 인류의 시원 종교이며 원형문화인 '신교'의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다.
  5. 환단고기는 천지인을 삼신의 현현(顯現)으로 인식한 한민족의 우주사상을 체계적으로 전한다.
  6. 환단고기는 한민족의 역사 개척 정신인 낭가(郎家)사상의 원형과 계승 맥을 전하고 있다.
  7. 환단고기는 한민족이 '천자(天子) 문화의 주인공'이요 수(數)를 발명한 민족임을 밝히고 있다.
  8. 환단고기는 한민족이 천문학의 종주임을 밝히고 있다.
  9. 환단고기는 삼성조 시대의 국가 경영 제도를 전하여 만고불변의 '나라 다스림의 지침'을 담고 있다.
  10. 환단고기는 배달과 고조선이 창제한 문자를 기록하여 고대 한국이 문자 문명의 발원처임을 밝혀 준다.
  11. 환단고기는 중국, 일본, 몽골, 흉노의 시원과 고대 수메르 문명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를 담고 있다.

요약: 환단고기는 한·중·일의 시원 역사에서부터 북방민족의 역사, 서양 문명의 근원 역사까지 총체적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나침반이다. 고로 대한의 아들딸은 물론 70억 전 인류가 반드시 읽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인류 모체 문화의 역사 교과서인 것이다.

3. 비뚤어진 애국심

3.1. 민족정신 고취?

김교헌 사학은 1930년대 이후 최남선 등의 대동아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대동아공영권론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민족의 외연을 자의적으로 확대하는 태도는 김교헌 당대의 강렬한 민족주의적 의지와는 달리 후일 단군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이 일제의 황국사관(皇國史觀)과 결합하면서, 대동아공영권 이론체계에에 흡수될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하였다. 1930~40년대에 출간된 것으로 판단되는 『규원사화』, 『환단고기』, 『단기고사』 등은 모두 김교한사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도 단군족 범위를 한층 확대하여 일본민족까지를 단군족의 일부로 설정하고 있다. 특히 1930년대에 유포된 『규원사화』는 동이의 여러 종족이 연합하여 중국을 정벌할 것을 제창하고 있어 일제의 중국침략을 방조하는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김교헌 사학이 19세기 말~20세기 초 우리나라 사상계를 지배했던 사회진화론적 민족팽창주의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던 점과 관련이 있다. 결국 대종교 민족주의는 서구 부르주아 의식의 영향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이를 한국사에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강렬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한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제국주의의 식민지 이론에 흡수될 소지를 스스로 만들어낸 약점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전우용 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하)』, 제4장 「김교헌·이상룡」, 115~116쪽.
사실 환단고기는 그 발간 시점(1911)이 이제 막 경술국치를 당한 일제강점기라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 당시 막 첫걸음을 내딛은 한국 민족주의의 화두는 '한민족은 왜 독립해야만 하는가'였고, 이는 곧 다른 민족들(특히 일본)과 대별되는 한민족의 배타적인 민족 구성을 발견하는 작업이 민족주의적 역사 연구의 목적이었음을 뜻한다. 실제로 신채호는 아직 민족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구한 말부터 한국(한민족)에 역사적으로 전래하는 고유하고도 우수한 정신인 '국수(國粹)'의 보전을 통해 국가정신(민족정신)을 고취할 것을 역설하였고, 대종교는 바로 이러한 '국수'의 상징으로 단군을 내세운 종교집단으로 창시된 것이었다.

하지만 환단고기의 내용은 동시기 신채호의 국수보전론보다 당시 나치 독일 일본 제국이 자신들의 고대사를 위대하게 보이도록 왜곡하던 확장적 민족주의에 더욱 가깝다. 무엇보다 나라가 상관없이 세계 인류의 대합공존을 주장한 계연수가 대표적인 예로 보인다. 환단고기는 한민족으로부터 일본·중국·몽골·흉노가 나왔다고 함으로써 한민족의 역사적 독창성을 흐려 놓고 있으며, 특히 일본을 한민족의 갈래라고 서술한 일은 여기에서 양자간의 관계만 역전시키면 곧장 일본 식민사관의 일선동조론, 나아가 대동아공영권론과 부합된다.[1]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가 바로 일본의 '가지마 노보루'.

실제 동아시아의 밝음산, 불함산 숭배 사상이 존재하는 지역을 불함문화권으로 묶은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이 환단고기의 주장과 흡사한 전철을 밟았다. 당초 최남선은 한국인에게 문화적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식민사관의 주장을 타파하기 위한 의도로 불함문화권을 주장했지만, 불함문화권은 한반도와 만주만이 아니라 중국 대륙,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와 일본까지 지나치게 넓은 범위를 포괄하여 결국 일본의 일선동조론과 대동아공영권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최남선이 결국 광적인 친일로 변절한 것은 이렇듯 확장적 민족주의 경향 자체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확장적 민족주의 역사관은 언제나 주종관계가 사람 취향에 따라 뒤바뀔 위험을 안고 있으며, 이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 예가 바로 이 불함문화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2]
나는 반역자가 미친 소리로 요란하게 짖어대는 흉서(凶書)를 읽고 싶지 않다. 기미년 독립선언서가 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이런 사람이 도리어 일본에 붙어 역적이 되었으니 비록 만 번 죽여도 죄가 남는다.
김창숙, 최남선의 글 「일선융화론」을 집어던지며
이 때문에 소위 환빠들은 환단고기 등 자기들이 신봉하는 책에 나오는 내용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식으로 매도하지만, 실상 환단고기를 쓴 이유립부터 친일 행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의 유림에서는 황도유교(皇道儒敎)라고 해서 충(忠)의 대상을 일본 제국의 덴노로 왜곡한 적이 있었는데, 이유립은 바로 이러한 친일유림단체 조선유교회의 일원이었던 것이다.[3] 조선총독부 월간지 <조선>에 시를 투고하며 20대를 보낸 이유립은 1933년 조선유교회의 1기 강습생이 되었고, 졸업한 뒤에는 조선유교회 기관지 <일월시보>의 주필로 활동하다 또 고향인 삭주에서 유교청년회 지교부장을 지냈다. 아래 그의 글에서는 적어도 몇 가지 정보가 도출된다.
오직 자반이축(自反而縮) 심광체반(心廣體胖)의 의리적 진용을 가지고 43세기의 문화전선의 선봉대장이 되라.[4]
그것은 조선문명의 원천이 유교에 있고 민족의 생명도 유교에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만물의 영장, 적어도 성교화육(聖敎化育) 중에 자라난 청년 용사, 더욱이 의의(意義)를 가진 우리는 조선유교의 동지가 아니냐.
신유교의 건설!
각 종교의 통일계획!
대동주의 하에서 신경제축성!
아! 조선유교회! 만세!
이유립, 「청년제현에 檄함」, 1927
우선 위의 발췌된 글 가운데 1행과 2행에서는 당시의 이유립이 민족주의적 단군신앙에 일정하게 경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3행의 성교화육(聖敎化育)이라고 말한 데에서 그가 당시 일본 제국의 통치를 성교(聖敎)라 긍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이유립이 적극적 친일 찬양은 하지 않았더라도 당시 일본 제국이 설정하고 조선유교회가 구상하던 '신유교( 아시아주의적 황도유교)' 질서를 내재화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즉 그는 민족주의에 기반하되 그 주적을 일본이 아니라 중국으로 설정함으로써 현실에 순응한 유교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단군신앙의 친일화 경향 대종교로부터 국내교단을 이끌고 갈라져 나온 정훈모(鄭薰模)가 친일파와 결탁하고 친일유림단체인 조선유교회가 세워준 건물에 얹혀 살았던 점에서 잘 드러나는데, 심지어 단군이 일본 신화의 스사노오와 동일인물이거나 그 후손이라 주장하는 경향도 있어서 남산 조선신궁 메이지 덴노, 아마테라스와 함께 스사노오=단군을 모시려는 움직임도 존재하였고[5] 중간의 불안정한 국혼신(國魂神) 개념[6]을 거쳐 마침내 1930년대에는 최남선에 의해 단군신앙(불함신앙)이 일본 신도의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접목되기도 했다. 물론 조선총독부는 단군신앙을 가차없이 배제했고, 국혼신 역시 조선신궁에 봉안하기를 거부했다.
결론적으로 환단고기의 내용은 본래 친일화된 황도유교(안순환의 조선유교회) 출신 인사가 친일화된 단군신앙(정훈모의 단군교)을 받아들인 것을 기반으로, 그 위에 다시 일본 제국의 확장적 민족주의(최남선의 불함문화론)와 대종교의 신앙적 특수사관( 김교헌의 신단민사)을 결합시킨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비록 세부적인 것은 신채호와 정인보의 것을 받아들여 손보았다 하더라도 그 기본적인 경향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3.2. 반민족적 탄압?

일각에서는 환단고기를 반민족적 사대주의, 식민주의, 공산주의, 독재정권 세력에 탄압을 받으면서도 근근이 그 맥을 이어온 민족사서로 호도한다. 근데 사실 여기에다가 독재정권을 끼워넣기에는 어폐가 있는 게, 안호상이니 임승국이니 하는 원조 환빠들은 공산주의와 대결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천적인 울트라-민족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주의주장이 정권에 채납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일민주의는 우리 3천만의 최고영도자이신 이승만 박사의 밝은 이성의 판단과 맑은 양심의 반성과, 그리고 또 굳센 의지의 결정으로서 단군 한배검의 홍익인간의 정신과 신라의 화랑도의 사상을 이어받아, 현대의 모든 이론체계를 없애 가진 가장 깊고 큰 주의다. …… 3천만 겨레는 재래의 모든 주의들과 주장들을 모조리 다 버리고, 오직 이 일민주의의 깃발 밑으로 모여야 된다. 우리는 일민주의를 위하여 일하며 싸우며 또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한겨레인 일민은 반드시 한 핏줄이다. 이 한 핏줄이라는 것이 일민에는 절대적 요소다. …… 핏줄이 같고 운명도 같은 이 일민은 생각도 같고 행동도 같아야만 한다. …… 일민에는 동일성과 통일성이 생명인 까닭에 동일성과 통일성은 일민주의의 주장이며 목적이다.
안호상, 『一民主義의 본바탕』, 1950.
근세 이후 국수주의다운 국수주의 한번도 못해본 한국사의 치욕은 차라리 국수주의가 숙원 섭리일지도 모른다. 항차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통해서 국가안보를 추구하려면 공산주의의 사상적 철학적 천적인 강력한 민족주의(그것을 국수주의라 혹평해도 좋다)와 그 토대 위에 뿌리박은 강력한 체제철학의 필요성은 차라리 숙명적이오, 필수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철학 있는 독재는 설득력을 갖는다'는 정치철학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오늘날 한국정치엔 철학을 필요로 한다.
임승국, <자유> 1980년 11월호, 1980.
시간을 거슬러 일제강점기로 올라가서, 문정창을 비롯한 환빠들은 이 시기에 조선총독부가 이름도 알 수 없는 한국의 재야사서 20만 권을 몰수해 불태웠다면서 이것들이 단군 관련 기록으로 환단고기와 비슷한 내용을 담은 민족사서들이었다[7]고 주장했다.[8]

하지만 조선총독부 관보를 통해 살펴보면 실상은 전혀 다르다. 일제가 1910년에 금서로 지정하고 불태운 20여만 권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colcolor=#000> 분류 서명 서지 특기사항
역사 초등대한역사 정인호 편, 1908 단군부터 조선까지의 역사를 간략하게 기술한 개설서. 배일, 애국사상 고취.
보통교과 동국역사 현채, 1899 대한제국 학부에서 편찬한 중학교 교과서. 전 8권 3책. 단군조선 기술.
신정동국역사 유근·원영의, 1906
대동역사략 국민교육회, 1906 대한제국의 교과서. 단군조선, 기자조선, 마한, 신라 등의 역사를 소략하게 기술.
을지문덕(한문) 신채호, 1908 을지문덕 위인전기. 민족자주성 고취.
을지문덕(국문) 신채호, 1908
이태리 건국 삼걸전 양계초, 신채호 역, 1902 이탈리아 건국의 세 주역인 가리발디, 마치니, 카보우르의 전기.
갈소사(噶蘇士) 전 양계초, 이보상 역 헝가리 애국자 코슈트 러요시(Kossuth Lajos)의 전기.
화성돈(華盛頓) 전 이해조 역, 1908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전기.
폴란드 말년 전쟁사 1905 폴란드 왕국 말년의 독립전쟁을 기술.
미국독립사 현은, 1899
이집트 근세사 장지연 역, 1905 서문을 박은식이 썼다.
지리 대한신지지 장지연, 1906 한국의 자연지리와 풍속, 물산 등 인문지리를 다룸.
대한지지 현채, 1899 총론과 13도편으로 구성되어 대한전도와 각 도의 지도를 붙이고 각 지역을 설명.
최신 고등대한지지 정인호, 1909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
문답 대한신지지 노익형
최신 대한초등지지 정인호
사상 음빙실문집 양계초
음빙실자유서 양계초
민족경쟁론 양계초
국가사상학 정인호
국가학강령 요하네스 블룬칠리, 안종화 역, 1907
국민자유진보론 유호식 역
국민수지 김우식, 1906 국민계몽서.
세계 3괴물 골드윈 스미스, 변영만 역, 1908 금권정치, 군국주의, 제국주의 비판 서적. 서문을 신채호가 썼다.
20세기 대참극 제국주의 변영만, 1908 제국주의 비판 서적.
강자의 권리경쟁 가토 히로유키, 유문상 역 진화론을 통해 천부인권설, 이상주의 관념적 종교적 세계관 등을 소개.
대가론집 유문상 역
청년입지편 새뮤얼 스마일즈, 유문상 역
남녀평권론 최학조, 1908 남녀평등 사상을 다룬 책.
애국정신 이채병, 1908 서우학회(西友學會) 기관지에 연재되었던 글
애국정신담 이채병, 1908
몽견제갈량 유원표, 1908 사회비판과 계몽주의 논의.
종교 준비시대 천도교 중앙총부, 1905 천도교 해설서.
교재 최신 초등소학 정인호
고등 소학독본 장지연
국문과본 원영의
초등소학 국민교육회, 1906
국민 소학독본 대한제국 학부, 1895 자연현상과 이치, 세계 주요 도시 문명화 파악, 중상주의 등 기술.
소학 한문독본 원영의
여자독본 장지연, 1908 여성용 교과서.
부녀독습 강화석, 1908
고등 소학수신서 휘문의숙 편집부, 1907
초등 윤리학교과서 안종화, 1907
중등 수신교과서 휘문의숙 편집부, 1908
초등 소학수신서 유근
독습 일어정칙 정운하, 1907
정선 일어대해 박중화, 1909
실지 응용작문법 최재학, 1909
소아교육 임경재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제가 단군을 인정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조선총독부는 단군이라면 발작을 해대었으니, 단군을 조선신궁에 모시려다 끝끝내 무산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또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조선사는 연월일 순서로 중요 사건에 관련된 사료를 정리해서 편찬한 편년체 사서로, 사실 어떠한 결론으로 유도하는 개설서라기보다도 차라리 '조선사료집성'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일종의 사료집이었다. 이는 당시 일본학계의 연구 수준으로는 광범위한 한국사 사료를 섭렵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원사료의 제시에만 충실함으로써 식민사관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단군은 "그 관련 연대를 믿을 수가 없으므로 편년체 사서인 조선사에는 실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앞서 보았듯이 단군을 매개로 삼아 조선인의 일본 제국 내 권리 확보를 노렸던 최남선이 단군 관련 사료를 조선사에 기재하도록 주장하자, 조선사편수회에서는 편년체의 체제에서는 역사적 시간상이 불명확한 단군의 이야기를 실을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보다 더 올라가서 이제는 "조선이 교조적인 사대주의로 말미암아 자주성을 표현하는 사서들은 눈에 불을 키고 말살해버렸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는 극단적인 안티 유교, 안티 사대주의 정서를 있던 신채호가 '이조 태종의 분서(조선상고사)'를 운운한 데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실체는 '태종이 유교로써 건국의 정신을 삼고자 해동비록을 태워버렸다(조선상고문화사)'는 것이다.

문제는 해동비록이 1106년에 왕명으로 엮인 음양도참과 풍수지리를 집대성한 책인 것. 그러니까 단군시대의 기록을 담았다거나 한 역사서가 아니라는 것. 태종의 구체적인 참서 탄압은 태종실록 17년 6월 1일, 6월 6일, 11월 5일, 12월 15일의 기사에 보인다. 분명히 역사서 종류가 아닌 음양가(陰陽家)의 장서, 서운관의 참서(讖書)라고 되어 있다. 신채호가 이를 탄식하였던 것은 그것에 한민족 고유의 선교(仙敎) 사상이 일말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에서였지 역사의 소실을 안타까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1936년에 정인보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오천년간 조선의 얼'로 말미암아 이 루머의 주체는 태종에서 세조로 교묘하게 바뀌었는데, 곧 세조가 상고시대의 일을 기록한 사서들을 모아다가 불태워버렸다는 것이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서 그와 관련된 기록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팔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表訓), 삼성밀기(三聖密記), 안함·노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도증기(道證記), 지리성모 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왕거인·설업 등 삼인기록(文泰山王居仁薛業等三人記錄)의 수찬기소(修撰企所) 1백여 권, 동천록(動天錄), 마슬록(磨蝨錄), 통천록(通天錄),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수장해서는 안 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권하고 원한다면 서책을 회사받을 것이다. 이를 공사(公私)와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고 하였다.
세조 3년(1457) 5월 26일
예조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志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 지리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옥거인·설업 삼인기(文泰玉居仁薛業三人記) 1백여 권,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명경수(明鏡數)와 무릇 천문·지리·음양의 뭇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서울 안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승정원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읍에 바치도록 하라. 바친 자는 두 품계를 높여주고, 상을 받고자 원하는 자 및 공사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 50필을 상으로 주라.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를 다른 사람이 고발하면 고발한 자는 위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 이를 중외에 속히 유시하라."고 하였다.
예종 1년(1469) 9월 18일
뭇 도의 관찰사에게 하서하기를 "전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志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 지리성모하소량훈(智異聖母河少良訓), 문태·왕거인·설업 삼인기(文泰王居仁薛業三人記) 1백여 권,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명경수(明鏡數)와 무릇 천문·지리·음양의 뭇 서적들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올려보내는 일을 이미 하유(下諭)하였다. 위에서 명경수(明鏡數) 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 도선참기(道銑讖記)는 전의 하유에 의거하여 올려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하지 말도록 하며, 그 이미 수납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성종 즉위(1469) 12월 9일
하지만 이 기록을 자세히 보면 초장에 '원한다면 서책을 회사받을 것'이라던가, 마지막에 '그 이미 수납한 것은 돌려주라'고 한 데에서 도저히 이것이 분서와 같은 극단적인 기록 말살의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정작 환단고기에 실린 삼성기라든가 상고사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되는 문헌(밑줄)들은 성종 대에 올려보내도록 한 12책에서 제외되어 있어서 성종 대에는 대부분 돌려받았음을 알 수 있다. 애당초 실록에서 분서라는 말도 거의 안 나오는데, 나오는 것도 족족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가리키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였다.

또한 여기에 나열된 서적들의 면모를 보면 실상 '명경수'나 '태일금경식'과 같은 천문서, '지화록'과 같은 지리서, '표훈천사'나 '도선참기'와 같은 도참서이고 국왕 자신도 이것들을 천문·지리·음양의 뭇 서적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즉 여기에 나열된 서적들은 원래부터 그 내용이 역사를 전달하려는 것과는 무관한 이적(異跡)이나 비결(祕決)이었던 것이다. 물론 조선은 혹세무민을 배격하였고 이런 비결이나 술서들은 정감록처럼 현 조선의 체제 붕괴를 바라는 의도가 담긴 경우가 많았다. 조선왕조 입장에서 이런 비결류 서적들은 단순한 미신 타파 이전에 체제 유지를 위해 반드시 타도해야 하는 것이었으므로 '책 갖고 있다 걸리면 사형'이라는 극단적인 조치에도 충분히 이유가 있다.

4. 행적

4.1. 삼일신고를 대종교로부터 베낌

대종교의 삼일신고 봉장기에 의하면, 단군이 백두산에 내려와서 교화한 가르침을 석판에 새겼는데 부여가 보관하다 전란으로 잃었고, 이를 고구려에서 번역한 판본이 발해 태조를 거쳐 문왕에게로 전해졌다고 한다. 이에 문왕은 삼일신고 진본을 백두산 석실에 봉장하였고, 이를 19세기 말 백봉(白峯)이 10여 년의 기도 끝에 얻어서는 제자 백전(伯佺)을 시켜 1906년 나철에게 전하여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삼일신고가 어떻게 조선 중기에 편찬되었다는 태백일사에 실렸나?[9] 이는 명백히 한 쪽이 다른 쪽을 베낀 것이다.

이 가운데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대종교와 태백일사의 삼일신고를 서로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먼저 대종교의 삼일신고는 1918년부터 敕을 勅으로, 1949년부터 著를 着으로 한자를 바꾸어 쓰고 있는데 태백일사에는 1949년 이후의 대종교 판본처럼 勅과 着이 쓰이고 있다. 이는 태백일사가 적어도 1949년 6월 이후[10] 시점에 대종교의 삼일신고를 보고 베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양자가 장의 구분에 차이가 있는데, 내용상 천(天)을 논의하고 있음에도 천훈(天訓)이 아닌 허공장(虛空章)으로 이름한 것이나, 삼일신고 본문에서 시종 신(神)을 (⿰示⿱旬且)[11]로 쓰는데도 일신장(一神章)이란 이름에서는 이를 사용하지 않았음은 이유립이 작위적으로 개작한 것을 시사한다.

또한 대종교의 삼일신고에서는 '有善惡(心)', '有淸濁(氣)', '有厚薄(身)'인 삼망의 단계를 거쳐서 '無善惡(性)', '無淸濁(命)', '無厚薄(精)'인 삼진의 단계로 나아간다고 하였는데, 이와 달리 태백일사의 삼일신고에서는 삼진을 '善無惡(性)', '淸無濁(命)', '厚無薄(精)'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유무를 대비하는 대구법으로 보면 전자가 더욱 원본에 가깝고,[12] 삼일신고의 삼진은 性·命·精보다는 善·淸·厚라고 지칭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내용상으로도 전자가 더욱 자연스럽다.[13] 더불어 대종교의 삼일신고가 태백일사의 삼일신고보다 그 서술 구성에 있어서 훨씬 간명하고 원시적이기에 대종교의 삼일신고가 더욱 이른 시기 글이라고 할 수 있다.
<colcolor=#000>대종교 삼일신고 만물에 본디 삼진(三眞)이 있으니 성(性)·명(命)·정(精)이고,
사람이 미혹되어 삼망(三妄)이 뿌리내리니 심(心)·기(氣)·신(身)이고,
삼망으로부터 삼도(三途)가 만들어지니 감(感)·식(息)·촉(觸)이다.
태백일사 삼일신고 삼진(三眞)이 미혹되어 삼망(三妄)이 뿌리내리고 삼망으로부터 삼도(三途)가 만들어지니
성(性)·명(命)·정(精), 심(心)·기(氣)·신(身), 감(感)·식(息)·촉(觸)이다.

4.2. 천부경을 단군교로부터 베낌

위에서 말한 바 있듯이, 한일합방 직후 대종교로부터 갈라져 나온 단군교에서는 1917년에 계연수로부터 천부경을 전해 받았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단군교는 1921년에 잡지 <단탁(檀鐸)>을 발행하면서 계연수가 묘향산에서 단군교당에 보낸 편지와 천부경의 전문 81자를 소개했는데, 이는 1916년에 계연수가 묘향산 석벽에서 천부경을 탁본하고 1917년에 단군교단으로 천부경을 우송한 지 4년 뒤의 일이다.[14] 이 <단탁>에는 계연수의 편지를 빌어 계연수가 천부경을 얻은 정황과 시일을 꽤나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단군신인께서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쥐고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덕화를 크게 행하시니 지금까지 4천여 년, 태곳적의 일이라 삼인(三印)이 도대체 무슨 물건이며 어떠한 보물인지 알지 못하였나니 …… 제가 이를 마음속에 새겨두고 이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는데, …… 지난 가을에 태백산에 들어가 외진 골짜기를 한가로이 거닐다가 인적이 닿지 않은 곳에 걸음이 미치니, 시내 위 돌벽에 고각(古刻) 같은 게 있는지라 손으로 이끼를 쓸고 보니 자획이 분명하여 과연 천부신경(天符神境)이었습니다. ……

고운선생(孤雲先生)의 기이한 족적에 기뻐하여 …… 돌아와 종이와 먹을 가지고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니, 전날에 지났던 곳이 아닌지라 동으로 찾고 서로 뒤지다가 마침내 가만히 산령(山靈)에게 빌며 사흘 밤을 지내고 비로소 얻었으니, 이때가 9월 9일이었습니다. …… 스스로 돌아보건대 학식이 짧고 총명이 노멸(老滅)하여 거듭 연구할 도리가 없이 단지 입으로 외울 뿐이었는데, 마침 경성에서 온 사람이 있어 말하길 경성에 단군교가 있다 하는지라 …… 길에서 경성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만나 이 탁본을 헌상합니다. ……

성심으로 수도하시길 빌면서 정사년(1917) 정월 초 10일
묘향산 유객(香山遊客) 계연수(桂延壽) 재배.
그런데 이런 천부경이 어떻게 조선 중기에 편찬되었다는 태백일사에 실려 있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이에 따르면 계연수는 스스로를 학식이 짧고 총명이 쇠퇴한 촌로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해학 이기의 뒤를 이어서 단학회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1911년에는 환단고기를 엮어냈다는 태백교 측 계연수 묘사와 완전히 배치되고 있다. 국내 묘향산에서 등산하고, 대종교로부터 떨어져나온 단군교가 존재하는지 어떤지도 몰라서 서울에서 온 사람에게 그런 게 있다고 전해 듣고 비로소 "아 그런 게 있구나." 하면서 탁본을 보내 주는 등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15]

그런데 정작 단군교의 교주 정훈모는 1913년에 쓴 단군교종령(檀君敎宗令)에서 천부경을 운운하고 있다. 즉 사실 정훈모는 계연수가 천부경을 발견하기도 전부터 이미 천부경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역시 최치원이 신지의 전자를 해석한 것이라 하고 있으니 정훈모는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 계연수에게 천부경을 받고 돌아왔다는 말이 된다. 천부경은 1913년 이전에 정훈모가 최치원이 신지전(神志篆)을 풀어쓴 것이라고 가탁하여 지어낸 것이며, 그 전수 과정이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들어오자 이후 다시 1921년에 최치원이 신지전을 풀어 묘향산 석벽에 새긴 것을 1917년 계연수라는 사람이 탁본을 떠서 전해주었다고 덧붙였던 것이다.

또한 단군교의 천부경은 <단탁>(1921)만이 아니라 정신철학통편(1920)에도 전하는데, 정신철학통편의 저자 전병훈(全秉薰)은 1918년 11월 무렵 단군교 간부 윤효정(尹孝定)으로부터 계연수의 천부경을 전해받았다고 한다. 이는 태백일사의 천부경과 몇 글자가 다른데, 즉 이를 종합해보면 단군교의 천부경은 1921년부터 万을 萬으로, 迬을 往으로 한자를 바꾸어 썼다. 이는 태백일사가 1921년 이후 시점에 단군교의 천부경을 보고 베꼈을 가능성을 보여한다.

4.3. 낭가사상을 신채호로부터 베낌

무력집단으로서의 조의선인이라는 존재는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처음으로 설정하였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는 '선배(先人·仙人)'란 것으로써 이른바 조선 전래의 '수두교(蘇塗敎)'와 표리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수두교'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수두교란 원시 조선족이 우주의 광명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불함산(백두산)을 광명신이 사는 곳으로 이해하였는데, 때문에 사는 곳마다 태백산(백두산)의 숲을 본떠 만들고 수두(蘇塗)라 하였다고 한다. 매년 5월과 10월이 되면 정기적으로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제주로 뽑힌 사람은 수두의 중앙에 앉아서 하느님 천신이 되어 제사를 받으니 이가 바로 단군(檀君)이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보면 신채호의 수두교관은 단순히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를 인류학적 시각으로 읽은 데 지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여기에서 나아가 신채호는 삼국사기에서 단군왕검을 선인왕검(仙人王儉)이라 한 바에 착안하여 선인을 순우리말로 '선배'라 읽고 이것이 수두교 신자의 보통 명칭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선배'는 고구려에 들어서 무사단으로서의 성격을 띄었는데, 그 스승들은 검은 천으로 옷을 지어 입었기에 조의(皂衣)라 불리었고, 다시 신라에서 이를 본떠 화랑을 조직함으로써 이들을 한민족의 고유한 정신사상과 상무정신의 담지자라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신채호는 고구려의 조의·선인이 화랑과 같은 무사단이라고 보았던 근거로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에서 고려도경을 제시한다.
재가화상(在家和尙)이 …… 조백(皂帛)으로 허리를 동이고 …… 전쟁이 있으면 스스로 단결하여 한 단체를 만들어서 전장에 나아갔다.
- 고려도경
따라서 그 요점은 최영전에 나오는 고구려의 승군을 승(僧)을 매개로 고려도경의 재가화상과 연결시키고, 다시 이를 조백(皂帛)을 매개로 고구려의 조의와 연결지은 데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오늘날 신채호의 이러한 논리는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고구려의 사자·조의·선인이 각 대가들마다 거느리는 가신과도 같은 존재라고 나오고, 실제로 천남산묘지명에서 남산이 영지를 받아 오졸·사자·예속·선인을 다스렸다(理)고 전하여 삼국지의 기록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이는 조의·선인이 실제로 고구려의 독립적인 무사단이었고 볼 수 없게 한다. 즉 신채호의 무사단으로서의 조의선인설은 실제와 동떨어져 있으며 오직 신채호라야만 생각해낼 수 있는 독창적인 학설인 셈이다.

하지만 태백일사에는 신채호가 주장한 바와 같은 무사단으로서의 조의가 마치 실제인 것처럼 쓰여 있으며, 그 특성도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가 서술한 바에서 종교성이 강화되었을 뿐 대체로 동일하다. 다만 신채호가 태조왕 80년조에 조의(皂衣) 양신(陽神)이 있으므로 조의는 태조왕 때 설치되었던 듯하다고 보았던 것과 달리, 태백일사에서는 고국천왕 때 을파소가 조의·선인을 설치했다고 해서 조의 양신의 존재가 떠버린다. 반대로 신채호는 수양제의 4차 침공에서 '어떤 장사'가 수양제의 가슴을 쏘아맞혔다고 서술했는데, 태백일사에서는 그 장사의 이름을 조의 일인(一仁)이라 추가로 전하여 가필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4.4. 삼신일체 사상을 베낌

이렇다 보니 환단고기의 사상적 대종을 이루고 있는 삼신일체 사상도 환단고기가 원조가 아니다.

단군신앙에 있어서 초기적 삼신일체 사상은 1910년,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되었던 신채호의 <동국고대선교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16] 신채호는 여기에서 최초로 한민족 고유의 고대 사상을 선교(仙敎)라 지칭하면서 그러한 선교의 내적 교리가 어떠하였는지를 어림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신채호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인·환웅·단군을 삼신(三神)이라 일컫고, 단군은 실재적인 추장사회의 대지도자이지만 환인과 환웅은 실재하였던 인간이 아니고 추상의 신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이것이 대략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같은 것이라고 부연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신채호의 고대선교관이 작년에 막 창시되었던 초기 대종교의 이론적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대종교에서는 신채호가 동국고대선교고를 발표한 지 6개월 뒤 초보적인 삼신관을 담은 대종교신리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는 환인⋅환웅⋅환검 삼신(三神)은 각개가 아니라 일체(一體)인 상제에 포함된 삼위(三位)이자 일체의 쓰임으로서 용(用)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이듬해 1월의 신리대전에서 환인은 주재주(主宰主), 환웅은 조생주(造生主), 환검은 교화주(敎化主)라는 교리로서 확립되는데, 이것을 더욱 구체화한 것이 바로 대종교에서 삼일신고와 나란히 가장 중요한 전이 1918년에 최초 간행된 신사기(神事記)이다.

신사기를 통해 초기 대종교의 삼신일체관을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신사기의 제1장은 주재기로 우주의 창조를 이야기하는데, 여기에는 세계를 이루는 각종 속성으로부터 구성요소가 탄생하는 과정, 상제(환인)이 여러 신장과 신관들을 임명하여 세계의 운동을 주관시키는 과정이 나온다. 제2장은 조생기로 생명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최초의 인간인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으로부터 인간의 오색족(五色族)이 분화되어 나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둘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그 나반과 아만이다. 제3장인 교화기에서는 환검(단군)이 건국하고 제도 정비 및 통치 내용을 이야기하는데, 풍백과 우사와 운사와 신지와 고시와 팽오와 숙신과 비서갑신녀가 각기 명령, 치병, 선악, 기록, 곡식, 토지, 형벌, 길쌈을 나누어 관장한다.

그런데 이상과 같던 초기 대종교의 교리는 나철의 뒤를 이어 김교헌이 2대 교주가 되고, 1920년대 초에 만주에서 불안정하던 입지가 굳어지면서 일부 변경이 가해졌다. 환인은 조화주(造化主) 천부(天父), 환웅은 교화주(敎化主) 천사(天師), 환검은 치화주(治化主) 천군(天君)으로 그 위격이 바뀌었을 뿐 아니라, 이에 따라 단군의 가르침으로 되어 있던 삼일신고가 환웅의 가르침으로 변경되면서 환웅은 단순한 추상신이 아닌 모종의 역사적 실재성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대신 환검이 3선관(풍백·우사·운사)와 4신령(신지·고시·팽오·숙신)에게 직분을 나눠주고 인간의 366가지 일을 맡아 다스린다는 내용은 그대로 남았다.

한편 신채호는 김교헌이 이끄는 대종교 신비주의화 경향에 실망하고는 인류학적 관점을 받아들여, 1931년에 연재한 조선사(조선상고사)에서 '수두교'라는 이름으로 기존 대종교에서의 신비주의 관점을 탈피하고자 했다. 즉 삼신에 대해서 사기 봉선서의 천일(天一)·지일(地一)·태일(太一)을 끌어옴으로써 대종교의 환인·환웅·환검에 보이는 인격신적인 면모를 부정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르면 천일은 '말한'이니 상제를 의미하는 것이고, 천일이 지일을 낳으니 지일은 '불한'으로 천사를 의미하는 것이고, 지일이 태일을 낳으니 태일은 '신한'으로 독존무이의 절대자를 의미한다. 또한 다시 이로부터 삼조선설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환단고기에서는 태백일사의 삼일신고가 단군시대가 아닌 신시개천 시대의 가르침이라 기술되어 있고, 삼신이 각기 주조화(主造化)·주교화(主敎化)·주치화(主治化)를 맡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태백일사가 적어도 1920년대 이후 대종교로부터 교리를 베낀 것임을 시사한다. 또한 삼신을 천일(天一)이 주조화, 지일(地一)이 주교화, 태일(太一)이 주치화한다고 하는데 이는 1931년 이후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로부터 베껴온 내용임을 보여한다.

5. 연대표

<colcolor=#000>  1907 1910 1912 1918 1922~1923 1931 1949 1979
(환단고기)
삼일신고
天訓 天訓 天訓 天訓 虛空
(示+旬+且)訓 (示+旬+且)訓 (示+旬+且)訓 (示+旬+且)訓 一神
無善惡
無淸濁
無厚薄
無善惡
無淸濁
無厚薄
無善惡
無淸濁
無厚薄
無善惡
無淸濁
無厚薄
善無惡
淸無濁
厚無薄
단군의 교시 단군의 교시 환웅의 교시 환웅의 교시 환웅의 교시
삼신일체 환인
환웅
단군
환인
환웅
단군
환인
환웅
환검
환인
환웅
환검
환인
환웅
환검
천일(말한)
지일(불한)
태일(신한)
환인(한배임)
환웅(한배웅)
환검(한배검)
천일(상계주신)
지일(하계주신)
태일(중계주신)
천신
귀신
인신
추상신
추상신
실재인
주재주
조생주
교화주
조화주
교화주
치화주
상제
천사
절대자
조화주
교화주
치화주
주조화
주교화
주치화
천부경
낭가사상 태조왕대 시작 고국천왕대 시작
어떤 장사 조의 일인


[1] 그마저도 이 둘이 대두되는 시기는 1930년대. [2] 아타튀르크의 태양어론만 봐도 이해할 수 있다. [3] 안순환(安淳煥, 1871~1942)은 1924년 경기도 시흥에 유학자 안향을 모시는 녹동서원(鹿洞書院)을 만들고, 그곳에 명교학원을 연 뒤 조선유교회를 설립하였다. 일명 조선유학회라고도 하는 이 단체는 정만조, 정봉시, 정병조 등 친일 유교단체에서 활동했던 거물급 인사들이 요직을 맡았고, 일제협력단체사전 국내 중앙편에 수록되었다. [4] 참고로 서기 1927년은 단기 4260년이다. [5] 김대호, 「1910~20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선신궁 건립과 운영」, 2004, 318~321쪽; 329~333쪽. [6] 일본 신토에서 어떤 지역의 기존 신격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7] 日帝 '韓民族魂 말살' 새 事実 밝혀져, <조선일보>, 1985년 10월 4일자 기사. [8] 정작 문정창은 1923년 동래군 서기를 거쳐 경상남도 도청, 조선총독부에 근무한 뒤 1940년 충청북도 사회과주사, 1942년 황해도 은율군수, 1944년 황해도 사회과장까지 지낸 인물이다. 이에 힘입어 친일인명사전에도 오른 때도 있다. 문정창은 광복 후 "중국의 남북조가 모두 백제의 속국이었고, 이 가운데 남조 양나라의 건국자인 양무제는 본래 백제인이며, 무령왕릉의 벽돌무덤 양식은 양나라로부터 수입된 것이 아닌 백제의 문화이다"라는 정신나간 주장을 했다. 물론 정설로 받아들여진 적은 없다. [9] 심지어 이유립은 그의 저작인 대배달민족사에서 태백일사에 실린 삼일신고를 원본 삼일신고라고 하면서 계연수가 처음으로 세상에 유포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10] 이에 따라 오형기가 1949년 5월에 환단고기를 필사했다는 것도 자연히 거짓부렁이 된다. [11] 왼쪽에 示변, 오른쪽 위는 旬, 오른쪽 아래는 且. 네모 점선은 '한자 생김꼴 지시 부호'(Ideographic Description Sequences)로, 유니코드 표준이나 특정 글꼴에 존재하지 않는 한자를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한자를 조합하여 쓸 때 그 위치 관계를 나타내는 부호이다. [12] 게다가 이러한 사고를 반야심경에서 가져온 것으로 본다면 대종교의 것이 반야심경의 문법에 더욱 가깝다. [13] 이근철, 「대종교 경전으로 본 《환단고기(桓檀古記)》 진위 문제」, 106~110쪽. [14] 이후 천부경은 단군교가 해체되는 1930년대까지 대종교와는 대별되는 단군교의 핵심 교리로 기능하면서 기복적이고 주술적인 측면을 담당했고, 단군교가 해체된 이후에는 대종교 내에서 일종의 외경처럼 취급되다가 1975년에 비로소 대종교의 정식 경전 가운데 하나로 채택되었다. '환단휘기'라는 책도 이 시점에서 등장하였다. [15] 이유립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정훈모의 단군교가 해방 이후 대종교로부터 떨어져나온 일파라면, 이기의 단학회도 삼신일체에 대한 이론 차이로 대종교로부터 갈라선 일파라고 한다. [16] 이보다 앞선 1907년 '대동역사'에서도 흡사한 인식이 보이는데, 세속오계를 선교의 종지였다고 본 점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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