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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07:47:45

주세페 가리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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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파일:사르데냐 왕국 국장(1848).svg
이탈리아 통일 삼걸
카밀로 카보우르 주세페 가리발디 주세페 마치니
<colbgcolor=#000><colcolor=#fff> 주세페 가리발디
Giuseppe Garibaldi
파일:Giuseppe_Garibaldi_(1866).jpg
본명 주세페 마리아 가리발디
Giuseppe Maria Garibaldi
출생 1807년 7월 4일
프랑스 제1제국 니스
(現 프랑스 공화국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니스)
사망 1882년 6월 2일 (향년 74세)
이탈리아 왕국 카프레라
(現 이탈리아 공화국 카프레라[1])
묘소 이탈리아 카프레라 섬
국적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직업 혁명가, 군인, 정치인
정당 청년 이탈리아당 (1831~1848)
이탈리아 국민협회 (1848~1853)
행동당 (1853~1867)
역사적 좌파 (1867~1877)
역사적 극좌파 (1877~1882)
배우자 아니타 가리발디 (1842년 결혼)
주세피나 라이몬디 (1860년 결혼)
프란체스카 아르모시노 (1880년 결혼)
자녀 메노티 가리발디, 리치오테 가리발디 외 6명
종교 개신교[2]
서명 파일:주세페 가리발디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 통일 영웅이자 혁명가, 군인, 정치인.

주세페 마치니, 카밀로 카보우르와 더불어 이탈리아 통일 3걸로 꼽힌다. 흔히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 이탈리아 통일의 계획과 실행은 카밀로 카보우르가 주도했고, 가리발디의 업적은 통일의 최대 난적 중 하나였던 양시칠리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조건 없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양도한 것이다. 카보우르가 주류 엘리트 중도우파 정치인에 왕당파였다면, 마치니와 가리발디는 공화주의적이고 내셔널리스트적인 좌파에 가까웠다.

2. 생애

사르데냐 왕국의 항구 도시 니차에서 한 선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사르데냐 왕국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박살이 나 사르데냐 섬으로 밀려난 상황이었고 니차를 비롯한 리구리아[3], 피에몬테, 발레다오스타, 사보이아 등 본토는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당한 상태였기에 출생 당시의 이름은 프랑스어인 조제프마리 가리발디(Joseph-Marie Garibaldi)였다. 사르데냐 왕국의 해군에 들어간 것이 그의 군인으로서 경력 첫 줄을 장식한다. 아직 국가로서의 이탈리아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제노바에서 이탈리아 통일을 추진하던 주세페 마치니에게 감화되어 청년 이탈리아당에 들어간 것이 혁명가로서의 경력 첫 줄이다. 이 때가 1834년, 그러나 당시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 사보이아 왕조의 조상들처럼 일개 봉건 영주에 지나지 않은 가치관을 견지하고 있었고, 마치니를 끔찍이도 혐오했던 카를로 알베르토의 탄압으로 인해 주세페 마치니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했다. 나폴레옹이 끌어내려지고 복고왕정이 세워진 어수선했던 프랑스에서도 그들은 청년 유럽당을 세워 활동했지만 실패해 스위스에서도 쫓겨나고 영국 런던으로 향했다.

이 와중에 가리발디는 1836년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와 리오그란데 우루과이의 혁명전쟁에 참전했다.[4] 군인과 혁명가로서의 이름을 올리고 있던 가운데 그는 1848년 조국의 이탈리아 통일(Risorgimento)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귀국했다. 피에몬테-프랑스 연합군이 롬바르디아를 장악하는데 큰 힘을 보탰으나 1860년 3월 24일, 토리노 조약이 체결되어 과거 외국인 지배자들이 통치하던 토스카나 대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파르마 공국, 교황령 볼로냐 일대 등이 합쳐진 중앙이탈리아 연합주를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합병하는 조건으로 그의 고향이었던 니차가 사보이아 왕조의 본관인 사보이아와 더불어 프랑스 제2제국에 할양되자 이에 반발하여 비정규군을 소집해 프랑스령이 된 고향 니스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런 위험한 행동을 방관할 수 없었던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수상 카밀로 카보우르는 가리발디의 측근들을 적극 이용해 남이탈리아행을 유도했다.[5]

그러자 그는 이른바 천인대(Spedizione dei Mille)를 조직하여 냅다 나폴리 시칠리아 지방을 점령했다. 그가 조직한 붉은 셔츠단(Camicie rosse or Giubbe rosse)의 위명이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양시칠리아 왕국에서 무혈입성을 했을 정도였다. 붉은 셔츠단은 민병대였으나 강철 같은 군기를 자랑했고, 행군 도중 길가의 오렌지 나무에 열린 오렌지 한 알조차 따먹지 않았을 만큼 대민피해 방지에 철저했다. 당시 남부 이탈리아에서 가리발디의 인기는 절대적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마음만 먹으면 남부 이탈리아의 독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카보우르 역시 가리발디가 직접 국왕이 되려 하거나 최소한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가리발디를 경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리발디는 두 말 없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통일 이탈리아의 왕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점령지 전체를 헌납했다. 양시칠리아 왕국 영토에서는 국민 투표가 실시되어 최종적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으로 합병되었다.

이후 사르데냐의 카프레라 섬으로 물러났으나, 로마 병합이 지지부진하자[6] 1862년과 1867년에 팔레르모에서 군대를 만들어 로마 함락을 시도하였지만 1862년에는 프랑스와의 충돌을 두려워한 이탈리아 왕국군이 나서서 저지하였고 1867년에는 멘타나 전투에서 교황령-프랑스 연합군에게 패전하여 실패, 카프레라 섬에 다시 연금되었다. 이후 석방되었으나 말년의 대부분을 카프레라에서 보냈고, 묘지도 카프레라에 있다.

사실 정치인으로서 그 역량은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시대의 영웅이자 애국자로 기억되고 있다. 가리발디는 정치 역량을 그다지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군인으로서는 상당한 역량을 발휘해서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도 여러번 이탈리아 왕국군을 지휘해서 승리하고 이탈리아 통일에 공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군사적 승리는 그가 순수하게 군인으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기 보다는, 병사들이 그를 너무나 존경해서 그가 지휘를 맡으면 평소보다 월등히 잘 싸웠다는 이유가 크다.[7]

가리발디를 향한 대중의 이런 존경은 단순히 이탈리아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었다. 가리발디가 자신의 점령지를 사르데냐 왕국에 헌납하고 이탈리아 왕국을 세운 뒤로는 전 유럽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이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받은 경애의 감정은 21세기 현재 전 세계의 진보주의자들이 체 게바라에게 가진 감정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유럽의 골수 왕당파나 극단적인 보수주의 세력을 제외하고 거의 전 유럽인과 아메리카 대륙인들이 그를 자유주의 민족주의[8]의 상징이요 전설로써 그를 존경했는데, 실제로 에이브러햄 링컨 남북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리발디에게 북군의 총사령관 자리를 제안한 일도 있었다.[9] 이후 1864년 영국 런던을 방문했을 때는 그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한 명의 외국인이 영국에서 이 정도로 국민적인 환영을 받은 일은 역사적으로 거의 유례 없는 일이었다. 가리발디의 업적이 매우 큰 나머지, 이탈리아인들 가운데 아직도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날로 먹은 사람이고, 진짜 왕 대우받을 사람은 가리발디다."[10]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정치 업적은 이탈리아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인데도 말이다.[11]

3. 여담


[1] 사르데냐의 부속 섬이다. [2] 가리발디는 생전 반가톨릭 성향의 개신교도였다. (Joseph O'Brien, " Giuseppe Garibaldi speaks against the Pope", 「San Diego Reader」, 2018.3.22. · " Giuseppe Garibaldi", nndb.com) [3] 리구리아 지역의 중심지는 제노바이나 니스도 지리적으로는 리구리아에 속한다. [4] 이 무렵 가리발디는 첫 아내인 아니타를 만나 첫눈에 반했고, 그녀와 함께 전쟁터를 누볐다. [5]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자신의 고향인 니차를 프랑스에 팔아버렸다는 이유로 카보우르를 매우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카보우르는 프랑스의 도움을 얻기 위해 정치적으로 니차보다 훨씬 중요한 지역이었던 왕실의 본관 사보이아까지 할양을 감수할 정도로 이탈리아 통일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했다. [6] 가리발디가 천인대를 조직하여 양시칠리아 왕국 원정을 떠난 동안 피에몬테군은 중부로 진격하여 교황령 움브리아 마르케를 국민 투표로 합병했다. 교황령을 대부분을 잃고 로마만 남은 비오 9세의 저항과 교황 보호라는 명목으로 프랑스군을 파병한 나폴레옹 3세 때문에 로마만 점령되지 않았었다. [7] 사실 장군에게 중요한 덕목이 바로 이런 통솔력이다. 지략은 참모에게 의지할 수 있고, 직접적인 전투는 하급 장교나 부사관에게 맡길 수 있지만, 군대 같이 조직을 통솔하는 것은 오롯이 장군의 몫이고, 군대를 통솔하기 위해서 군인의 인망을 얻는 것이 장군의 조건 중 하나다. 병사의 인망을 얻지 못해서 패가망신한 군대가 역사에 수없이 많은 것을 보면, 이런 측면에서 가리발디는 군사적 역량이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8] 당시의 민족주의는 지금처럼 자민족 중심주의라기 보다는 이상적 민족 자결주의에 가깝다. [9] 이 때 가리발디는 미국에서 노예제를 완벽하게 폐지해준다면 북군에서 복무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는데 당시 사정상 완벽한 폐지는 불가능했다. 결국 이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령관직을 거절하게 되었다. 사실 가리발디도 사정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을 테니 완곡한 거절에 가까울 것이다. [10] 심지어 이탈리아인들과 역사 이야기를 하다보면 "가리발디가 통일까지 다 해놓을 동안, 에마누엘레는 뭐 한 게 없어. 그냥 놀았어."하고 말하는 평범한 이탈리아인들도 의외로 상당히 많다. [11] 이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친손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파시즘 베니토 무솔리니를 용인해 나라를 재앙에 빠뜨려서 사보이아 왕조에 대한 이미지도 같이 나빠진 게 크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