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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5 20:44:43

풍선폭탄

풍선 폭탄에서 넘어옴
1. 개요2. 역사3. 일본군의 사용
3.1. 개발3.2. 특징3.3. 실전3.4. 종료
4. 비슷한 사건
4.1. 팔레스타인의 사용4.2. 아웃워드 작전의 사례4.3. 중국 정찰풍선 사건4.4. 2024년 북한 대남 오물 풍선 살포 사건
5.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Fire Balloon, Balloon-borne Bombs, Incendiary Balloons / [ruby(風船爆弾, ruby=ふうせんばくだん)](Fūsen Bakudan)

파일:http-%2F%2Fimages.nationalgeographic.com%2Fwpf%2Fmedia-live%2Fphotos%2F000%2F677%2Fcache%2Fphoto-balloon-bomb_67791_200x150.jpg

말 그대로 풍선에 폭탄을 매달아서 적진으로 날려보내는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에 이어 21세기에 들어와서는 팔레스타인에서 사용하고 있다.

2. 역사

현대적인 무기 같지만 이미 19세기에도 사용된 기록이 있을 정도로 긴 역사를 자랑한다. 제1차 이탈리아 독립전쟁 당시인 1849년 7월 요제프 라데츠키 원수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제국군이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공격할 때 사용했다는 것이 기록상 세계 최초의 풍선폭탄이다.

개발자는 당시 진압부대를 이끌던 프란츠 폰 우하티우스(Franz von Uchatius)[1] 장군이다. 베네치아는 도시 전체가 수로로 거미줄처럼 얽힌 데다 지중해로 연결된 항구가 있어 포위공격이나 포격이 매우 어려웠다. 이에 우하티우스 장군은 베네치아 수비대의 사기를 꺾기 위해 군함에 풍선폭탄을 가득 싣고 해상으로 나간 뒤 도심지로 풍선에 매단 폭탄을 날려 떨어뜨리는 세계 최초의 공습 작전을 감행했는데 이는 세계 최초로 사용된 드론 무기이기도 하다. 당시 풍선에 매달 수 있는 폭탄은 11~14kg 정도였고 시한폭탄이라 약 30분 뒤에 폭발하도록 설계되었다. 지상에서 수많은 시험을 거쳐 해안 인근에서 띄운 풍선이 베니스 시내까지 도달하는데 20~30분 정도 소요되는 것을 감안해 고안한 것으로, 이런 풍선폭탄을 무려 200개나 날려보냈다. 하지만 이 우하티우스 장군의 풍선 드론은 전황을 크게 뒤집진 못했고 작전 도중 바람 방향이 바뀌면서 도시 내로 들어간 폭탄은 1개 뿐이었고 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3. 일본군의 사용

ふ号 (兵器) /Code Fu (Weap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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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개발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까지 일본 제국 해군 미국 본토에 타격을 주기 위해 시도한 공격 방법.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 해군 미국 본토 공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처럼 전략폭격기를 다수 운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미국 서부해안까지 함대를 끌고가서 공격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에 따라 잠수함을 미국 서부해안까지 이동시킨 후 불시에 부상하여 갑판에 달린 함포로 포격을 하거나 잠수함에 소형 수상기를 싣고가서 소이탄 몇 개 던지고 돌아가는 식이었다.[2] 이런 공격방식은 미국이 조금 성가시게 생각하긴 했어도 실효성은 거의 없는 공격방법이었다.

무엇보다 1943년에 접어들면서 미국이 쇼미더머니 포스를 보여주면서 군함과 항공기를 마구 찍어내자 일본군은 그 물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짜부라지고 서서히 일본 본토가 위협받는 시점에 이르렀다. 그 때문에 과거와 같은 형태의 공격마저도 불가능하였고 일본 본토에서 미국 본토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후고(ふ号) 병기 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풍선폭탄이다. 이름은 풍선폭탄이지만 사실 무인기구를 이용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3.2. 특징

당시 일본은 기상학자 오오이시 와사부로[3]가 1926년 자국 기상학회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일본 상공에 미국 방향으로 부는 강한 제트기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풍선을 상공 약 9킬로미터까지 올려서 고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3일 안에 북아메리카까지 날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따라서 풍선에 수소를 가득 채워서 하늘 높이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안정적인 고도 유지가 어려워서 고도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시스템을 고안하였다. 원리는 아주 간단한데 모래주머니를 매달아 너무 높이 올라가지 않도록 하고 필요 이상으로 고도가 높아지면 수소가스를 일부 배출하고 9킬로미터 아래로 내려가면 모래주머니를 하나씩 잘라버리는 형태로 고도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이런 식으로 고도를 유지하다보면 미국 상공에 도착한 시점에는 수소가스를 모두 소진하였기 때문에 매달고 온 폭탄을 떨구기만 하면 되는 형태였다. 당시 풍선을 만들 재질로는 고무를 써야 했지만 전쟁필수물자라 쓸 수 없었기에, 화지를 이용해 풍선을 만들고 거기에 폭탄을 실었다.

풍선폭탄에는 15kg의 대인폭탄과 2개의 소이탄을 장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폭탄으로 인한 미국인들의 공포심을 자극하고 미국 서부에 많은 건조한 숲지대에 떨어뜨려 거대한 산불을 일으켜 미국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3.3. 실전


이에 1944년 11월부터 1945년 3월까지 9,000개 이상의 풍선폭탄을 미국으로 날려보냈다. 실제로 이 풍선폭탄들은 미국 본토와 캐나다, 멕시코 등지에서도 관측되었으며 미국에서는 동부해안가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주에서 이 풍선폭탄을 관측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기대와는 달리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일단 날려보낸 9,000개의 풍선폭탄 중에서 미국에서 실제 관측된 것은 300개 남짓. 좋게 봐줘도 1,000개 정도만이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도착한 모든 풍선폭탄들이 임무를 완수하였다면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나 실제 불발이 많았다.

다만 미군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이게 너무 높고 빠르게 날아다녔기 때문에 격추시키기 어려웠고 만약 일본이 생물학병기나 화학병기를 사용한다면 1발만 명중해도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쓸데없이 일본의 사기를 올리고 싶지는 않았고 일본이 미국 언론매체의 보도를 통해 자신들의 폭탄이 대강 어디에 명중했는지 알게 되면 더 정확한 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미국 정부는 언론통제를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언론에서는 관측된 풍선에 대해서 단 한 마디 언급도 없었고 설령 주민들이 발견하더라도 군에서 관측용 기구를 사용한 것 정도로 둘러대면서 덮어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폭탄이 일으키는 산불을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이 폭탄들은 일본조차도 어디다 폭탄을 떨굴지 모르는 물건이라 정말 산간 오지에 불을 질러 큰 화재를 일으킬 위험성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오지에 소방관이 가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 민간인들이 눈치채기 전에 오지에 빠르게 화재 진압을 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자 미합중국 육군 제555공수보병대대[4]를 투입해 풍선폭탄 테러에 대응했기 때문에 미국 민간인들은 풍선폭탄에 대해 잘 모르고 넘어갈 수 있었다.

딱 하나가 사람을 살상하기는 했다. 1945년 5월 5일 일요일, 아치 애머슨 미첼(1918~1962?) 목사와 아내 엘시 미첼(1919~1945)이 교회 신도들인 아이들 5명을 데리고 동네 뒷산에 소풍을 갔는데, 미첼 목사가 잠시 승용차로 간 사이 나무에 걸린 폭탄을 일행이 건드려 폭발, 6명이 사망했다. 폭음을 듣고 미첼 목사가 놀라서 달려와 보니, 아이 4명은 이미 즉사했고 엘시와 어린이 조안 파츠케(13살)는 몇 분 동안 살아 있었지만 각자 하반신이나 몸 곳곳이 터져나가 고통 속에 죽어가야 했기 때문에 그저 손을 잡고 울면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50년에 사건현장에 추모비가 세워졌으며 미첼 목사는 이후 선교에 집중했다가 1962년에 베트남에서 선교하던 중에 무장세력에게 강제로 끌려가 지금까지도 행방불명 상태다.

여담으로 1980년대 말 일본 교계에서 사죄의 뜻으로 사과 편지를 넣은 풍선을 미국에 날렸다고 한다. 1980년대 MBC TV 프로그램 믿거나 말거나에서는 그냥 소풍 나온 한 평범한 미국인 가정으로 나왔다.

731 부대가 이 폭탄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영화에서도 나름 언급되었지만 신빙성은 없다.

3.4. 종료

어쨌든 몇 기의 풍선폭탄이 온전한 상태로 노획되었고 미군은 이것을 열심히 연구하였다. 몇 개 남아 있던 모래 주머니 속의 모래를 분석하여 이것이 일단 일본 해안에서 채취된 모래라는 것을 확인하였지만 미군은 과거 일본이 잠수함을 이용하여 공격했던 사례를 거론하면서 일본이 잠수함을 이용하여 미국 서부해안에서 발사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정확한 진상을 알게 된 것은 종전 후였다.

일본에서는 프로파간다로 써먹으면서 국민들의 사기를 올리고는 있었지만 미국이 조용하자 풍선이 엉뚱한 곳에 날아갔기 때문에 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여 1945년 4월 풍선폭탄을 이용한 공격을 중지하였다. 사실 이걸 준비한다고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당장 수소를 분리하는 비용이나 고공에 올라가도 쉽게 터지지 않는 풍선을 제조하는 비용이 일본군 기준에서는 만만치 않았다. 그 때문에 "그럴 돈이 있으면 비행기나 더 찍지 쓸데없이 뭐 한 거냐?"면서 비아냥거리는 경우도 있었다.

4. 비슷한 사건

4.1. 팔레스타인의 사용

파일:000_99J6DQ-640x400.jpg

2020년부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balloon-borne bombs', 'fire balloons'라는 표현이 사용되는데 상단의 일본군이 열기구와 비슷한 것을 제작한 것과 다르게 실제 고무풍선도 사용된다. # # 실제로 인명피해를 노리기보다는 건조한 기후 환경을 이용해 이스라엘 지역에 산불을 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심지어 콘돔을 이용한 폭탄도 사용되고 있다. #

4.2. 아웃워드 작전의 사례

영국군 아웃워드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짓을 시도한 적이 있다. 영국군이 사용하던 방공기구의 줄이 풀려 탈주해 다른 나라의 영토까지 날아가 민폐를 끼치던 사례에서 착안한 것이다. 독일이 사용하는 고압전선에 걸려 합선을 유발시키거나 소이탄을 투하해 방화를 유발하는 용도였다고 한다.

다만 아웃워드 작전은 태평양보다 훨씬 짧은 거리에 싸구려 풍선을 날려보냈기 때문에 일본의 풍선폭탄보다 훨씬 가성비가 좋았다. 그래서 전후 분석 결과 작전에 든 비용보다 적에게 입힌 손해가 더 컸다고 입증되었다.

4.3. 중국 정찰풍선 사건

폭탄을 장착한 살상병기는 아니지만 풍선을 사용한 정찰기구를 과거 일본 제국처럼 현재 미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아시아 국가인 중국이 제트기류를 이용해 태평양을 건너 미국 영공으로 침투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흡사하다.

4.4. 2024년 북한 대남 오물 풍선 살포 사건

5. 매체에서의 등장

원판과 다르게 폭탄뿐만 아니라 여러 나쁜 말들이 일본어로 적혀 있다. 여러 말이 적혀 있지만 대강 "죽어라!" 라는 뜻이다. 의외로 기술력이 필요한 물건인지 그냥 쓰는 것은 불가능하고 플레이어가 전투를 통해 어느 정도 성과를 얻어 기술 포인트를 얻어야만 쓸 수 있다. 다른 진영의 비슷한 지원 기술에 비하면 공격력은 강력한 편이지만 떨어지는 속도가 너무 느려 유닛을 상대로는 절대 맞출 수 없고 건물을 목표로 쓰지만 그마저도 팔면 그만이다. 게다가 욱일은 굳이 단계 스킬을 찍기보단 그냥 1씩 찍어서 유닛을 강화하는 업그레이드가 효율이 끝내주는지라 실제로는 아무도 안 쓴다.


[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한 인물이다. 본인의 이름을 딴 제강 공정을 새로 개발하고 자긴가공법을 이용한 포신 생산 공정을 미국에서 훔쳐 오기도 했다. 최종 계급은 대장. [2] 일본은 이러한 전술을 좀 더 효과적으로 써먹기 위해 이러한 수상기를 더 많이 탑재한 잠수 항모 I-400을 건조하기도 했다. [3] 大石和三郎(1874~1950). 영어 위키백과 문서 [4] 흑인만으로 구성된 공수부대로 그 시절 흑인부대가 다 그랬듯 '흑인들도 적 죽일 수 있긴 한가 한번 보자.'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나름 열심히 훈련받고 흑인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며 힘든 훈련을 버텨냈지만 '전력 부족'이라는 석연치 않은 이유 때문에 실전투입은 되지 않았고 서부로 보내지자 태평양 전쟁에 투입되는 줄 알고 기대했으나 그들에게 돌아온 건 풍선폭탄이 지른 불이나 끄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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