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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블로호 피랍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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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 사건 사고 요약표
발생일 1968년 1월 23일
유형 해상 납치
발생 위치 강원도 원산시 북위 39도 25분, 동경 127도 54분 해상
함경남도 원산시 북위 39도 25분, 동경 127도 54분 해상[1]
탑승 총원 83명
사망 1명
생포 82명
귀환 82명[2]

1. 개요2. 함선 정보3. 사건 분석4. 나포 이후5. 사건 종료 이후
5.1. 보통강변에서의 전시 5.2. 미 해군 승조원들5.3. 북한군 지휘부
6. 사건의 후폭풍7. 음모론?8. 기타

[clearfix]

1. 개요


미 해군의 정보수집함(AGER-2) USS 푸에블로 가 1968년 1월 23일 동해상 원산 앞바다에서 조선인민군 해군 근위 제2 해군전대의 공격을 받고 강제 나포당한 사건. 승조원 83명 중에서 나포 도중 총격으로 1명이 사망하였으며 나머지 82명이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1968년 12월 23일 귀환하였다.

제대로 표기하면 푸에블로가 해군 함정이므로 호가 아닌 함이 맞으나 시건 당시에는 이를 구분하지 않았고 사건명이 그대로 정착되어 사건명에서는 호라고 쓴다. 북한에서도 푸에블로 함이 아닌 푸에블로 호라고 표기하는데, 북한은 원래 군함을 포함한 모든 배 이름 뒤엔 전부 호를 붙이기 때문이다.

2. 함선 정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북한 평양시 보통강구역에 전시 중인 피랍된 해당 함선 자세한 내용은 푸에블로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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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블로는 배수량 900t 미만의 소형 함선으로 최대속력은 시속 13노트(24km/h)에 불과했으며 자체 무장은 50구경 기관총 2정 뿐이었다. 1944년 미 육군용 소형 화물선으로 건조되었고 1966년에 해군에 이관돼 정보수집함으로 개조되었다.

3. 사건 분석

파일:국방TV BI.svg 파일:국방TV 페이스북.png
<rowcolor=white> 150년만에 최초! 북한에 나포된 美 군함 '푸에블로호'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2024년 1월 27일 방송분)

사건 발생 장소가 원산 앞바다(북위 39도 25분, 동경 127도 54분)라고 하였지만 북한 측 영해를 침범했는지 공해상에서 나포당했는지는 북한과 미국이 각자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 원산 해안을 기준으로 하면 12해리(약 22km)가 넘지만 원산 앞바다의 작은 섬 여도를 기준으로 하면 12해리 이내의 해역이기 때문이다.

승조원 송환 이후 열린 미 해군 조사위원회 해군 장교들과 군사 전문가들이 푸에블로의 승조원들을 상대로 2달에 걸쳐 조사를 벌였다. 30년만에 공개된 조사위원회 보고서에는 좌표상으로 푸에블로 함이 북의 영해를 11번 침입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당시 항법장비인 로란의 측정오류로 실제로는 영해를 침범한 적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반면 북한은 푸에블로호가 고의적으로 총 17차례 영해를 침범했다고 주장했다.

지도를 보면 원산 앞바다는 동해안치고는 해안선이 복잡하고 작은 섬들이 많으므로 푸에블로가 영해 기선을 설정할 수 있는 섬들을 실수로 간과하였는지 의도적으로 무시하였는지의 여부가 중요한 열쇠였다. 언론인 리영희의 여러 서적이나 2001년 방영된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36회 <푸에블로 나포 사건> 편은 푸에블로호가 고의적으로 영해를 침범했다는 쪽에 무게를 뒀다. 대한민국 정부사건 당시에는 영해 침범이 없다는 미국의 주장을 지지했으며 국방부의 관련 문건에도 잘못 언급 없이 나포되었다는 사실만 적혀 있다.

해제된 미 국방부 기밀문서에는 "가능한 북의 해역에 가깝게 접근하여 북한의 반응을 알아보라"는 명령이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공공연한 정탐행위에 대한 북의 반응을 알아보는 것도 이 배의 임무 중 하나였다.

한편 푸에블로가 나포당한 것은 미국이 북한군의 경계태세를 지나치게 얕봤기 때문이란 주장이 있다. 1950년대에는 북한 해군력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미군이 북한 해안을 제 집 드나들듯이 했고 이게 자주 반복되니까 북한 근해를 가더라도 별다른 대비책을 준비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북한 측은 초계정 4척으로 푸에블로 함을 사방에서 포위할 정도로 치밀하게 준비했고 미국 전투기가 구출하러 올 것을 대비해 전투기까지 출동시켰다.

4. 나포 이후

이 사건으로부터 불과 이틀 전에 북한군 특수부대원 30여명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목표로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했다가 대부분이 사살당하고 김신조가 생포된 소위 1.21 사태가 일어났다. 서울 한복판에 중무장한 특수부대가 출현하고 불과 이틀만에 동해에선 미 해군 함정이 나포당하면서 한반도 주변 정세는 그야말로 전쟁 전야를 방불케 하였다.

미군은 대응책으로 해군 기동함대와 공군 전폭기를 한반도 주변에 전개하였지만 인질이 한두 명도 아닌 82명이나 잡혀 있었으니[3] 섣불리 건드리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이 때 한국군 F-5를 전개하여 미군에 도움을 주었고 이는 후일 SR-71 항목에 서술된 이야기로 이어진다.

특수부대를 동원해 구출하면 좋겠지만 마야게즈호 피랍사건[4] ##처럼 철저한 준비 없이는 오히려 망신만 살 수도 있었고 더군다나 당시는 베트남 전쟁이 진행 중이라서 구조작전이 자칫 전면전으로 확전될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었다. 사건 발생 1주일 뒤 베트남에서는 베트콩 테트 공세가 개시되었으니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이후 북한과 미국은 억류된 승조원의 석방을 놓고 오랜 시간 협상을 벌였다. 북한은 미국이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문서에 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미국은 영해 침범은 없었으며 문서에 서명을 한다면 승조원 인수에 관한 문서에만 서명을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오랜 시간 지지부진한 협상 끝에 양측이 기묘한 합의를 이뤄냈는데 북한의 주장대로 문서에 미국이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문구를 삽입하는 대신 미국은 서명전에 이 문서에 서명하는 이유는 오로지 '승조원 석방' 때문이어서 미국은 영해 침범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저지르지 않은 일에 사과를 할 수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낭독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대표인 길버트 우드워드 미 육군 소장이 미국의 반박 성명을 낭독한 후 문서 서명을 하면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다음은 우드워드 장군 미국을 대표해서 서명한 문서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앞

미합중국 정부는 1968년 1월2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해에서
조선인민군 해군 함정들의 자위적 조치에 의하여 나포된 미국 함선 푸에블로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해에 여러 차례 불법 침입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중요한 군사적 및 국가적 기밀을 탐지하는 정탐행위를 하였다는 승무원들의 자백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대표가 제시한 해당 증거 문건들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이 미국 함선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해에 침입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반대하는 엄중한 정탐행위를 한 데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이에 엄숙히 사과하며,

앞으로 다시는 어떠한 미국 함선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해에 침입하지 않도록 할 것을 확실히 담보하는 바입니다.

이와 아울러 미합중국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에 의해서 압수된
미국 함선 푸에블로호의 승무원들이 자기들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관용을 베풀어줄 것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청원한 사실을 고려하여
이들 승무원들을 관대히 처분해줄 것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간절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본 문건에 서명하는 동시에 하기인은 푸에블로호의 승무원 82명과 시체 한 구를 인수함을 인정합니다.

미 합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미 합중국 육군소장 길벝 H. 우드웓
1968년 12월 23일

다음은 우드워드 장군이 문서 서명 전 미국을 대표하여 낭독한 성명서다.
판문점 회담에서, 그리고 공개적으로 일관성 있게 밝힌 바와 같이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한 미국정부의 입장은 동 함정이 불법행동을 저지른 적이 없으며, 북한이 주장하는 영해를 단 한차례라도 침범하였다는 신빙성 있는 증거가 없으며, 우리가 범하지 않은 행동에 대하여 사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인이 서명하는 문서는 북한측이 사전에 준비한 것이며 상기한 미국정부의 입장과 차이점이 있으나, 본인의 서명으로 사실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며 달라질 수도 없다. 본인은 오로지 승무원을 석방시킨다는 단 한 가지 목적으로 이 문서에 서명하는 것이다.

서명한 문서 내용만 보고 미국이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사과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나 미국은 사건 당시에도 그렇고 현재까지도 푸에블로호는 영해 침범을 한 적이 없으며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라고 주장한다.

1969년 1월 23일 우드워드 장군은 고별식에서 한 기자가 해당 문서에 서명을 한 것에 대해서 그 문서는 외교문서도 아니고, 법적 효력이 없다 발언하기도 했다.[5]

파일:external/4.bp.blogspot.com/military+-+USS+Pueblo+captured+crew+giving+finger+2.jpg

사진의 인물은 스티브 엘리스 기관 상병, 브레드 크로우이 통신 병장, 존 실링 통신병장이다.

파일:external/media-cache-ec0.pinimg.com/78681448d3422b0bcf24eedddc8bbc15.jpg

당시 단체 사진을 찍을 때 북한 측이 손가락의 의미를 캐묻자 하와이식 인사법이라고 둘러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북한이라고 해서 서구 사회에서 가운데 손가락이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노발대발해서 고문의 강도를 높였다고 한다. 푸에블로호 승조원으로서 억류되었던 Stu Russell이라는 사람의 회고에 의하면 북한 관계자가 당시 북한 축구 대표팀이 런던에 방문한 내용의 선전영상을 보여줬다고 한다. 그런데 해당 영상에서 한 노신사가 북한 대표팀을 향해 중지를 날리는 장면이 편집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사건을 통해 승조원들은 북한 관계자들이 가운뎃손가락의 의미를 모른다고 추론했고 그 결과 위와 같은 사진들이 촬영될 수 있었다. 그러나 TIME지가 1968년 10월 8일자로 위 사진들을 보도하면서 중지의 의미를 친절히 설명하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

이런 굴욕 끝에 미국은 그나마 미국을 위해 싸운 군인은 반드시 고향에 돌려보내며 죽었으면 시신이라도 거둬들인다는 원칙은 지킬 수 있었다. 나포 11개월 뒤인 1968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에 비로소 승조원 82명과 전사자 시신 1구는 판문점을 통해 송환되었다.

버처 중령이 80년대 회고한 바에 의하면 억류 승조원들이 억류 기간 동안 식사로 단무지를 하도 먹어서 지금도 무만 보면 피한다고 한다. 이들은 억류 기간 중에 전기고문을 당했으며 남한 스파이의 말로라면서 고문당해 피투성이가 된 남녀를 보여줬다고 한다.[6]

5. 사건 종료 이후

5.1. 보통강변에서의 전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푸에블로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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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미 해군 승조원들

푸에블로 호의 함장 로이드 M. 부커 중령은 석방 후 영해침범 의혹과 범죄 자백서 서명 등의 여러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지만 피랍 당시 상황은 어쩔 수 없었고 정보수집함의 특성 상 절대로 국제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켰다는 점 등 기타 상황을 고려해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퍼플 하트 훈장과 포로 기장을 받았다. 미국 정부는 어떻게든 인질을 송환받으려고 했으니 버처 중령 탓만 할 수도 없었다. 이후 해군 경력을 이어나가다가 대령으로 예편하고 자서전을 집필한 후 2004년에 사망했다.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 해군이 이집트 함정으로 오인하여 미국 정보 수집함 USS 리버티 호를 공격한 이른바 리버티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USS 리버티 호의 함장 윌리엄 맥고나걸 중령은 서른 명 이상의 승조원들을 잃고 자신도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모항으로 자력항해하여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USS 리버티 호의 임무 자체가 기밀이었기 때문에 중령은 훈장 수여식을 해군본부에서 치러야 했고[7] 이후 몸이 성치 않다는 이유로 한직을 돌다가 대령으로 일찍 예편해야 했다.

80년대 관련 사건을 회고하면서 부커 대령이 한국 TV에 나온 적이 있었는데 당시는 예편을 해서 사복으로 출연했다. 사복 출연 때문에 한국에서는 그가 푸에블로 사건 때문에 처벌받아 짤렸다는 낭설이 있기도 했다.

70년대 부커 대령의 회고담을 바탕으로 푸에블로 스토리라는 미니시리즈가 제작된 적이 있다. 여기서 부커 중령 역을 맡은 배우는 나중에 웨스트 윙에 출연하는데, 웨스트 윙 에피소드 중에 북한 지역에 들어간 잠수함 실종 건을 다룬 에피소드에서 백악관 회의 중 푸에블로 사건을 언급하면서 ' 그때 거기 내가 있었다'라는 대사를 한다.

5.3. 북한군 지휘부

나포 작전에 깊숙하게 관여했던 민족보위상(현 국방상) 겸 내각 부수상 김창봉, 총참모장 최광 조선인민군 고위층 장령들도 작전 성공 후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받았지만 포로로 잡아둔 미군 장병들이 본국으로 송환된 뒤 그 후폭풍을 막기 위해 그리고 세습 체제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소위 '군사파 숙청'이라고도 불리는 대규모 숙청을 당했는데 이는 김일성 정권에서 마지막으로 진행된 대규모 숙청으로 알려져 있다. 스탈린 시절의 소련에서 보나파르트 주의자로 몰려서 숙청된 장교들이 있고 단순히 지도자 동지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주코프 원수가 찬밥 신세가 되는 등 군사적으로 공훈이 있는 군부 장성은 목이 붙어 있기 무척 어렵다.

해군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조선인민군 차수 계급에 올랐다 해임된 김일철이 현역 시절에 이 작전에 참가했다고 전해진다. 이로 보아, 장령들은 갈려나갔지만 당시에 별 권력이 없던 일선에서 직접 교전한 군관과 하전사들은 후한 대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6. 사건의 후폭풍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와중에 이 사건에서 보여 준 저자세에 자신감을 얻은 북한은 불과 열 달 뒤인 10월 남한 내 해방구 건설을 목표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일으켰으며 푸에블로호를 납치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EC-121 격추 사건을 저질렀다.

북한 정권은 베트남 전쟁 등 국제정세가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으며 일련의 무력도발을 통해서 자신감을 얻으면서 국방-경제 병진노선을 선언하고 4대 군사노선을 밀어붙이면서 국가 예산의 거의 절반을 국방비로 쓰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북한 경제 몰락의 서곡이 되었다. 소련에선 이 사건을 몹시 불편하게 여기고 북한에 협상에 나설 것을 압박하였으며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호출하기까지 했으나 김일성은 안 가겠다며 핑계를 대고 그 대신 민족보위상 김창봉을 소련에 보냈다. 1969년 1월 허봉학, 김창봉이 군벌 관료주의자, 좌경 맹동주의자로 몰려 숙청된 것이 이 사건의 후폭풍이라는 해석도 있다.

박정희 정권과 박정희 대통령 본인이 미국에 당한 배신의 충격은 이때 시작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 개전 초기부터 케네디와 린든 존슨에레 적극 파병을 제안했고 확전을 결의한 린든 존슨 정권의 동의하에 30만명에 가까운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해 그것으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었으며 린든 존슨과의 사이도 최고로 좋았다. 그러나 1968년 1.21 사태와 이틀 뒤 벌어진 이 사태 당시 사태의 확산을 막고자 했던 린든 존슨의 정치적 목적 때문에[8] 흔히 말하는 최초의 통미봉남을 당하면서 1.21 사태의 사과를 요구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뒤통수를 때렸고 이때의 충격때문에 미국에 대한 불신이 생겨났다. 거기다 이 사건이 변곡점이 되어 존슨이 결국 재선을 포기하고 박정희 대통령으로써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 정계에 하루아침에 주요 우방에서 흔한 제3세계 독재자로 위상이 폭락했고 샌프란시스코 회담의 굴욕은 물론 사전 통보 없이 주한미군 7사단의 철수라는 뒤통수까지 한 대 더 얻어맞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자주국방을 외치며 미국과 척을 지게 되었다.

이 사건이 끝난 지 8년 뒤인 1976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JSA) 미루나무(美柳, 서양버드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둘러싸고 벌어진 폭력사건(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으로 미군은 재차 한반도 주변에 기동부대를 전개했다. 이번엔 아예 폭격기가 휴전선 상공까지 위협하듯 날아갔고 명령이 떨어지면 한미연합군이 휴전선을 넘어 개성 및 연백(延白)[9] 평야까지 북진할 계획도 세워 놓았으며 북측이 완강하게 저항할 경우 전술핵 사용도 고려했다. 강력한 대응책에 이번에는 김일성이 쫄아서 유감의 메시지를 표했다.[10]

1975년 5월 12일, 미국 선적의 컨테이너 화물선 마야게즈호와 선원 39명이 ## 크메르 루주 초계정에 나포된 적이 있었다. 이 배는 순수 민간 상선은 아니고 미국대사관의 기밀물자등을 선적했다. 미국은 푸에블로호 사건 당시 저자세로 일관했던 기억 때문인지 강력 대응하여 미드웨이급 항공모함 3번함 CV-43 코럴 시, 호위구축함[11]까지 동원해 해병대를 주축으로 한 220명 규모의 구조대를 승조원들이 억류된 것으로 추정되는 코탕섬에 급파했지만 섬의 수비대와의 전투에서 41명이 전사하고 말았다. ## 기사에 따라서는 38명 전사, 3명 실종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코탕섬 점령 과정은 착오로 인해 무리하게 강행했다가 낭패를 보았다. 공중강습 경험이 전혀 없는 공군 소속 헬기조종사를 동원하였고 차출된 공군 헌병을 수속하던 헬기가 추락하여 헌병 18명, 승무원 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개판인 작전이었다. 피랍된 마야게즈호에도 특공대를 투입하였지만 아무도 없는 빈 배여서 무혈입성하였고 선원들도 전원 어선에 탑승한 채로 무사히 구출되었다. 마야게즈호 피랍사건 항목 참조. 밀리터리 실패열전(호비스트 출판사) 실패한 작전편에 수록되기까지 했다.

7. 음모론?

일부는 이 사건을 미국의 반역자인 존 앤서니 워커[12]의 활약(?)과 스킵잭급 공격원잠 USS 스콜피온 함이 침몰한 사건을 연관짓기도 한다. 스콜피온은 푸에블로 납치 사건이 터진 지 얼마 뒤인 1968년 5월 카리브해에서 훈련 중 실종되었다.

이들은 스콜피온이 침몰한 것은 워커를 통해 얻은 암호체계를 소련이 분석하여 스콜피온의 위치를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월간 플래툰지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푸에블로는 스콜피온의 예행연습 격으로, 미국 NSA의 암호체계를 워커를 통해 손에 넣은 소련이 그것이 정확한 것인지, 혹시 워커가 역정보를 흘린 것은 아닌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워커의 암호체계를 이용해서 푸에블로를 납치하고 푸에블로의 암호체계와 넘겨받은 시스템을 비교했다는 이야기다.

다만 1990년대에 수중 탐사를 통해 스콜피온의 침몰이 훈련 중 음향 어뢰가 이상 작동하여 발사한 자함으로 돌아와 터진 게 원인이라는 설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어 이후에는 스콜피온과는 관련성이 적다는 의견이 대세다.

8. 기타


[1] 함경남도 영흥군 호도면 용미리 동쪽 30km 해상 [2] 시신 1구 포함시 83명 [3] 승조원 83명 가운데 나포 과정에서 1명이 총격으로 전사했다. [4] 미국 선적의 Mayaguez호가 1975년 5월 12일, 캄보디아 공해상에서 크메르 루주의 해군 초계정에 나포된 사건. [5] https://www.google.co.kr/amp/s/mnews.joins.com/amparticle/1185944 [6] 실제로 1960년대는 대놓고 쌍방 공작원을 보내거나 제3세계에서 인적교류를 하는 척하면서 고정간첩 제안을 하던 시절이어서 남한에서 북파공작원을 보냈다가 붙잡혀 고문당한 뒤 처형된 사례가 적지 않았으며 북한 주민이 이렇게 보내진 북파공작원들에게 포섭되었다가 발각되어 사형당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7] 보통 백악관에 당사자를 초청하여 미국 대통령이 직접 수여하는 게 관례다. [8] 이유는 간단했다. 하필 그때 대통령 선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구정 공세까지 맞아 베트남 전쟁의 판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는데 엉뚱한 한반도에서 사건이 터지면서 자칫 푸에블로호의 미 해군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선거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다. 결국 이 문제의 조용한 해결에 실패하고 존슨은 재선 출마조차 포기했다. [9] 강화도 맞은편 황해남도 연안군과 배천군(한자로는 백천(白川)이라 쓰고 배천으로 읽는다). 38선 이남으로 6.25 이전에는 개성, 옹진과 함께 대한민국 관할 지역디었다. [10] 이 때는 워낙 북한이 미국을 만만히 보고 행동한 것도 있었는데 사건만 놓고 보면 북한이 특별한 이유 없이 미군을 때려죽이고도 뻔뻔하게 굴어서 동구권 국가들조차 북한을 비난했으며 특히 북한의 최대 뒷배인 소련과 중국까지도 전쟁나기 싫으면 알아서 숙이라고 지원 안 해 줄 정도였다. 이 때 워낙 호되게 당한 나머지 북한은 지금까지도 다른 나라는 몰라도 미국을 상대로 도발하지는 않는데 훗날 9.11 테러 때 정말 빡돌아서 눈 부라리며 벼르던 미국 눈치를 보며 성명을 내고 우리가 한게 아니라고 했을 정도다.그 때 말 잘못 했으면 알카에다랑 세트로 묶일 뻔 했다. [11] 호위구축함은 현대로 오면서 호위함이라는 새 함급의 탄생으로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에는 호위함 포지션을 가진 구축함보다 한 체급 작은 함선이였다. [12] 미 해군의 암호전문가였는데 자발적으로 KGB에 접근해 소련의 간첩이 되어 무려 20년 가까이 미 해군의 암호체계를 소련에 넘겨주다가 붙잡혔다. 미 해군의 평가에 따르면 만약 1970년대에 미국과 소련의 해전이 벌어졌다면 워커 덕분에 미 해군 함정들의 위치가 전부 추적되어 미국이 패했을 것이라고 한다. [13] 이는 소설 태양의 제국에서도 묘사된 적이 있다. [14] 출처 [15] 문화어로 '일정한 차례나 기준에 따라 몫으로 배당되다'는 뜻이다. [16] 당장 2020년에 벌어진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 이후 북한의 대남 도발 징후가 느껴지자 미군이 즉시 니미츠급 항공모함 두 척을 태평양(정확히는 제7함대 작전구역)에 배치했는데 참 공교롭게도 김정은은 이를 보자마자 '칼을 빼들면 장검을 휘두르고 총을 내대면 대포를 내대기는'커녕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까지 소집하며 대놓고 대남 도발을 보류한다고 언급하면서 꽁무니를 뺀 적이 있다. 당시 로동신문 기사에서 이를 '조성된 최근정세를 평가하고' 내린 결정이라고 언급했기 때문에( 원문) 김정은이 미군의 막강함을 인지하고 겁을 먹었다는 것이 명약관화하게 드러나고 있다. 덤으로 이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 미국에 찍혀서 진짜로 집단이 멸망할 뻔했던 것에 대한 트라우마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