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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1 02:34:53

자유 폴란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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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폴란드군 견장 배지
1. 개요2. 역사
2.1. 창설2.2. 활동2.3. 그 외
3. 전후4. 냉전 종결 이후5. 군복6. 미디어7. 관련 문서

1. 개요

Za naszą i waszą wolność
우리와 당신의 자유를 위해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폴란드 망명 정부가 조직한 군대. 폴란드의 해방을 위해 연합군의 전투에 참가한 것 뿐 아니라 나치 점령하 폴란드와 나치 독일 내에서 자체적으로 저항 및 첩보 활동을 펼쳤다. 폴란드 서부군(Polskie Siły Zbrojne na Zachodzie/Polish Armed Forces in the West)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린다.[1] 총병력 25만 정도[2]를 자랑했고, 영국 본토 항공전 몬테카시노 전투 등의 격전에서 분투하면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활약한다.

2. 역사

2.1. 창설

1939년 나치 독일 침공 이후 불과 한 달 만에 폴란드 제2공화국은 붕괴한다. 이후 파리로 망명에 성공한 폴란드 제2공화국 정부 수반들은 같은 해 9월 30일에 폴란드 망명 정부를 수립한다. 망명 정부 산하에는 함께 프랑스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8만 5천여 명의 병력이 있었고, 이들이 자유 폴란드군의 첫 일원이 된다.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가운데 4개 사단이 조직되었고, 이들은 재편성과 거의 동시에 프랑스군 산하에 편재되어 다시 나치 독일과의 항쟁에 돌입한다.

2.2. 활동

파일:Cromwell_tank_in_the_Bovington_Tank_Museum_02.jpg
자유 폴란드군 제 1 기갑사단 소속의 크롬웰 전차[3]
1940년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당시 1개 여단이 파견되어 나르비크 항에서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곧바로 이어진 프랑스 침공 당시에도 폴란드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곳곳에서 독일군과 격전을 치른다. 하지만 프랑스 침공 당시 자유 폴란드군은 독립된 군으로 무엇을 해 볼만한 인력을 갖추지 못한 채 프랑스군의 일부로 소속됐다는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모리스 가믈랭을 비롯한 프랑스군 수뇌부의 연이은 삽질로 인해 결국 패주해야만 했다. 프랑스에서의 참패는 자유 폴란드군에게 큰 타격으로 다가와서 폴란드군은 전체 병력의 절반 이상을[4] 상실하고 영국으로 재차 이동해야만 했다. 잔존 병력들은 영국에서 폴란드 제1군단으로 재편성을 마쳤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오를 잡으려고 군단이라는 명칭을 붙인 거지, 실제 병력 수로는 사단 하나 꾸리기도 버거웠다.

이런 와중에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소련과 독일의 관계가 동맹국에서 적성국으로 돌변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자유 폴란드군의 숨통을 틔워준다. 폴란드 망명 정부는 소련과 협정을 맺어 소련에 포로로 잡혀있던 약 8만여 명의 병력이 타슈켄트에서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을 따라 여정을 출발해 이란, 팔레스타인을 거쳐 카이로에서 자유 폴란드군에 합류해 폴란드 제2군단으로 편성되었다.[5] 또한 소련 역시 소련 내에 잔류한 폴란드군 포로들과 좌익 계열 인사, 폴란드계 러시아인 장교들을 소집하여 폴란드 인민군으로 재편성한다. 이 시기 스탈린은 병력자원으로 쓸 수 없는 연령의 노인과 여자, 어린이들도 대량으로 이란으로 내보냈는데 이들은 전쟁이 거의 끝날 때까지 이란에 머물렀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 글을 참조할 것.

어쨌든 1943년 무렵이 되면 제2군단을 비롯해 각종 병력들을 긁어모은 결과 자유 폴란드군은 20만을 넘기는 병력을 자랑하게 되고 이들은 북아프리카 전선, 이탈리아 전선, 서부전선 곳곳에서 활약한다. 특히나 이탈리아 전선에서 독일 측의 공수부대와 치열하게 맞서 싸운 몬테카시노 전투는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 중간중간에 마켓 가든 작전과 같은 시련이 있기는 했지만 종전 시점까지도 자유 폴란드군은 꾸준히 활약을 펼치면서 독일을 격파하는 데 있어서 한 축을 맡는다.

2.3. 그 외

한편 자유 폴란드군 내에는 140여명의 전투기 조종사들도 있었고, 폴란드 육군이 재건에 애를 먹고 있던 시기에 이 조종사들이 조국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폴란드 침공 당시부터 독일 공군과 맞서본 경험이 풍부했던 이들은 영국 공군 소속으로 영국 본토 항공전에도 참여한다. 영어가 서툴러서 이런저런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았다. 급박한 전투 와중에 서툰 영어 대신 모국어가 튀어나와서 영국인 동료 조종사들이나 관제탑이 어리둥절하는 일이라던가 격추되어서 기지로 복귀하려는데 서툰 영어 때문에 이들을 독일군으로 착각한 영국의 홈가드 노인네 분들에게 몰매를 맞는다던가 등등. 전투 의지가 너무 높은 나머지 지휘부의 명령도 무시한 채 독일 공군에 달려들어 보이는 루프트바페 전투기를 사정없이 격추해대거나 탈출하는 파일럿마저 거리낌없이 잔혹하게 사살해대는 호전성으로 인해 지휘부가 뒷목잡게 만든 사례도 제법 많았다. 영화 공군 대전략에서 이를 묘사했다. 수는 영국 공군 파일럿 중의 5% 정도에 불과했지만[6] 전체 격추수의 12%에 기여하면서 눈부신 전과를 기록한다.

또한 자유 폴란드군 내부에는 해군도 있었는데, 2차대전 이전부터 이미 폴란드 해군은 시망에 가까운 상태[7]였던만큼 별로 큰 기여는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큰' 기여를 못한 것 뿐이지 비스마르크 추격전에도 참여했었고 상선들을 U보트로부터 보호하는 임무에도 투입되면서 밥값은 충분히 했다.

즉 폴란드군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엄청난 지분을 차지하며 육해공군, 인간, 짐승 불문하고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3. 전후

연합국은 종전과 동시에 이들을 버렸다. 전후 폴란드는 어떤 권리도 보장받지 못했다. 이렇게 폴란드를 토사구팽할 거였으면 대체 왜 독일에 전쟁을 선언했냐는 비아냥도 현재 폴란드인들 사이에서조차 많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이걸 두고 제2차 안슐루스, 제2차 뮌헨 협정이라고 할 정도로 과격한 표현도 쓴다.[8]

자유 폴란드군이 충성을 바친 폴란드 망명 정부는 국경 문제를 놓고 소련과 갈등이 고조되다가 1943년 4월 카틴 학살로 인하여 끝끝내 단교한다. 이 단교는 소련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을 원치 않았던 연합국 주요 수뇌부들을 격노케 한다. 단교 이후 스탈린은 거리낌없이 폴란드 공산당을 밀어주면서 폴란드를 위성국으로 삼으려 했고, 1944년 8월 폴란드 국내에서 벌어진 바르샤바 봉기는 독일군과 악명 높은 디를레방어 여단의 무자비한 공격 끝에 처절히 진압당한다. 이듬해 2월의 얄타 회담을 통하여 서방과 소련은 폴란드 내 자유선거를 치르는 방안을 합의했지만 이는 기만에 불과했고 폴란드에서는 부정선거 끝에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그리고 서방은 폴란드 인민공화국을 승인하고 폴란드 망명 정부의 승인을 취소했다. 승인이 취소됐지만 폴란드 망명 정부는 해체를 거부하고 런던에 잔존한다.[9]
자유 폴란드군 장병들을 더욱 격분하게 만든 것은 영국의 배신이었다. 1946년 여름, 런던에서 열린 승전 기념 행진에 자유 폴란드군은 초청을 받지 못하면서 이런 분노는 극에 달했다. 당시 영국은 클레멘트 애틀리 수상의 노동당 정권이 집권하며 소련의 위성국인 폴란드 공산 정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한 상태였고, 따라서 자국에 남아 있는 자유 폴란드군은 골칫거리에 불과했다. 일부 예외도 있어서 본토 항공전에 영국 공군 소속으로 참전한 폴란드 공군 조종사들은 초청을 받았지만, 그들은 전우들과의 의리를 고려하여 영국 정부의 초청을 거절했다.[10] 전후 야당지도자로 활동한 윈스턴 처칠은 승전 기념 행진이 있기 사흘 전에 하원 연단에 올라 이 같은 현실을 비판하며 유감을 표명했다.[11]

한편 자유 폴란드군 역시 공식적으로는 1947년에 해체되었지만 대다수의 병사들은 고난길이 뻔히 보이는 조국으로의 귀환을 거부하고 망명정부와의 동행을 택한다. 그래도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 지휘 하의 폴란드 제2군 소속의 15000명의 장병들이 종전 이후 폴란드로 귀국했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간 이들은 이후 폴란드 바르샤바를 확보한 폴란드 인민군들에 의해 붙잡혀선 '반동'으로 몰리며 감시와 처벌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12] 소련이 만든 폴란드 인민군들의 장교진 대다수는 이미 카틴 학살로 인해 식자층이 대다수 살해당하면서 폴란드인이 아니라 폴란드계 러시아인들이 대다수였다.

서구의 배신은 단순히 정부 차원에 머무른 것이 아니었다. 종전 직후인 1946년 무렵이 되면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종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떠나지 않은 자유 폴란드군 장병들에 대한 반폴란드 여론이 팽배했다. 이유는 영국 내 체류하는 폴란드 망명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어간다는 분노 때문이었다. 아예 타임지에서 이들 폴란드인들을 잉여 영웅(Surplus Heroes)라고까지 언급했을 정도였고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볼락이라는 자유 폴란드군 장교는 영국에서 다음과 같은 수모를 겪었다고 밝혔다.
전쟁이 끝나고 볼락은 군복을 입은 채, 그의 영국인 여자친구와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차 한 대가 내 앞에 정차하더니, 거기에 타고 있던 신사가 내리며 볼락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보시오, 소위. 내가 질문 하나 해도 되겠소? 당신네 폴란드인들은 도대체 얼마동안, 우리 영국 빵을 축낼 작정이요? 당신은 전쟁이 끝난 것도 모르는 거요?"

이런 수모를 겪은 볼락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로 귀국했다. 그는 군복을 입은 채 귀국했고, 폴란드 비밀경찰은 24시간 동안 그를 감금했다. 심문관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무도 당신이 폴란드에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아. 우리는 당신같은 사람이 필요없어."

볼락은 곧 석방되었지만, 이후 오랫동안 변변치 않은 일자리들만을 전전해야만 했다. 그는 폴란드 공산정권 치하에서 단 한 번도 안전하고, 자유롭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4. 냉전 종결 이후

1990년에 폴란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었지만, 많은 자유 폴란드군은 민주화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폴란드 공산정권은 붕괴했지만, 공산당 때 잘나가던 사람들은 여전히 잘 나갔고, 그들은 자유 폴란드군 출신 인사들을 불편해했다. 폴란드 정부는 지금까지 이들에 대한 보상이나 기념은커녕, 언급마저도 꺼리고 있다. 자유 폴란드군은 폴란드 사회를 구성하는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산국가 시절 폴란드로 돌아갔던 사람들은 대부분 보잘것없는 자리를 전전하면서 가난 속에 여생을 보내야 했고, 일부는 심지어 처형당하기도 했다. 한편 영국에 남은 이들과 그들의 자손들은 지금까지도 배신감으로 아예 폴란드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 중 한 명이 영화 웨이백의 모델로 지목되었던[13] 스와보미르 라비츠이며, 폴란드에서 공산 정권이 무너진 지 15년이나 지났어도 2004년 죽을 때까지 끝내 폴란드 땅을 밟지 않았다.

2005년에야 처음으로 영국에서 이들 중 살아 남은 몇 명이 승리 퍼레이드에 참가하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당연히 개인 자격이었고 폴란드 정부에서는 한 사람도 이 행사에 대표를 보내지 않았다. 현재 폴란드 공화국과 이들의 자손들은 아무 관계도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고, 폴란드에서는 이들의 존재 자체를 일체 가르치지 않아 몇몇 미디어물이나 외국에 나와서야[14]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된 폴란드인이 적지 않다.

5. 군복

파일:Kazimierz_Sosnkowski.jpg
폴란드군 총감 카지미에시 소슨코프스키
군복은 영국군의 것을 바탕으로 제작했으며 상단의 폴란드 견장을 왼쪽 팔에 달았다. 영국 공수부대는 붉은 베레모를 착용한 반면 폴란드 망명군 공수여단은 하늘색 베레모를 착용하는 등 어느 정도 수정이 들어갔다.

6. 미디어

7. 관련 문서



[1] 폴란드 동부군도 있었다. 폴란드 인민군으로도 불리는 이 쪽은 공산주의 세력으로, 소련의 지휘하에 싸웠다. 규모는 동부군이 44만 정도로 압도적이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폴란드 동부군은 폴란드 전역을 훑으면서 폴란드 젊은이들을 징병했기 때문에 당연히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다만 장병들과 달리 명백한 반공의식과 반러시아 감정을 가진 장교들은 쓸 수가 없다고 판단해선 대다수를 총살해버린다. 이때 발생한 것이 그 유명한 카틴 학살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교들의 부재는 폴란드계 러시아인들이 장교로써 들어오며 해소된다. 이외에도 폴란드 지하국 휘하 군대인 폴란드 국내군도 존재하였다. [2] 물론 전쟁 후반으로 가면서 비시 프랑스군을 흡수하고 수복한 식민지 및 본토에서 징집하는 등 새로이 규모를 불렸고 종전 직전에는 90만 명에 달했다. [3] 차체 전면장갑에 폴란드 특유의 기병, 윙드 후사르의 투구를 모티브로 만든 사단 마크가 달려있다. 또한, 영국군 휘하로 배속된 자유 폴란드군 전차들은 백색 중대 표시를 사용였기에 이것으로도 구분 가능하다. 참고로 영국군은 청적황 삼색. [4] 공식적인 전사자만 6천여 명에(참고로 프랑스 침공 당시 연합군의 총 병력 수는 335만 명이었고 이 중 전사자는 10만 내외였다)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병사들과 이를 피해 (중립국) 스위스로 망명한 병사들의 수를 합쳐 3만여 명 가까이에 달했다. 사령관 시코르스키의 회고에 따르면 영국에서 재편성을 끝냈을 당시 수하에 집계된 병력이 3만 5천여 명 가량. [5] 영어 위키백과의 안데르스군(Anders' Army) 문서에 따르면, 대부분 폴란드계였지만 메나헴 베긴 등 유대계 병사들도 소수 가담했다고 한다. [6] 그래도 당시 영국 공군 내에서 전체 2위의 비율이었다. 1위야 당연히 85% 가까이를 차지한 영국인. [7] 구축함 3대가 사실상 해군 주력의 전부였다. 폴란드군 수뇌부들도 자신들의 해군이 개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 발발과 동시에 이 구축함 세 대를 페킹 작전으로 영국에 피신시켰다. 이후에도 추가로 폴란드 잠수함들이 독일의 눈을 피해 영국으로 튀었다. [8] 나치 독일의 잔혹함과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얄타 회담으로 영국과 미국이 동유럽을 소련에 넘겨준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치 독일을 더욱 악마로 부각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학자들도 많다. [9] 동유럽의 민주화 레흐 바웬사를 수반으로 하는 폴란드 제3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50년 가까이 런던에 머무른다. [10] 몬테카시노 전투에 참전한 한 폴란드 병사는 당시를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영국의 이런 면모가 싫다. 나는 이것을 기억하겠다. 그리고 당신들도 이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영국의 비인간적 처사였다." 그리고 정작 애틀리가 초대한 폴란드 공산 정부는 소련의 눈치를 보느라 참석을 거부했다. [11] "나는 이런 배신적인 행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함께 싸웠고, 공동의 대의를 위해 피를 흘렸던 폴란드 군인들이 이번 행사에 초대를 받지 못한 것은 큰 유감이다." 물론 본인도 재집권 후에 딱히 이러한 정책을 바꾸진 않았지만. 애초에 노동당이라서 소련에 온정적이었던 것도 아니고. 결국 서방은 소련과 분쟁을 만들기 싫어서 소련에게 폴란드를 먹여준 것일 뿐이므로, 보수당이 집권하건 노동당이 집권하건 자유 폴란드는 끝이었다. [12] 포츠담 회담을 거쳐 이들의 안전을 보장해줄 것을 약속했지만 현실은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강제력이 없었고, 소련이 이들한테 잘 대해줄 필요도 없었으니까. 심지어 자유 폴란드군을 '반동'으로 탄압한 사람들 중에는 문자 그대로 나치에 부역한 전적이 있었는데도 소련군이 오자 재빨리 친소파로 신분을 세탁한 질 나쁜 자들도 있었다. [13] 단 이 사람의 이야기는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14] 폴란드인들은 유럽 여러나라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