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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랜베리스 The Cranberri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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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돌로레스 오리어던†, 마이크 호건, 노엘 호건, 퍼걸 롤러 | ||||
국적 |
[[아일랜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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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 | ||||
1989년 | ||||
아일랜드 리머릭 | ||||
데뷔 | 1992년 9월 28일 ( Dreams)[1] | |||
데뷔 앨범 | ||||
해체 | 2003년 | |||
재결성 | 2009년 ~ 2019년[2] | |||
멤버 | ||||
돌로레스 오리오던† ( 보컬, 리드 기타, 리듬 기타, 키보드) | ||||
마이크 호건 ( 베이스 기타) | ||||
노엘 호건 ( 리드 기타, 리듬 기타) | ||||
퍼걸 롤러 ( 드럼) | ||||
전 맴버 | 나일 퀸 ( 보컬, 리듬 기타) | |||
장르 | 얼터너티브 록, 팝 록, 드림 팝, 쟁글 팝 | |||
레이블 | Jetlag | |||
링크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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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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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세
1989년 아일랜드의 리머릭(Limerick)에서 결성되었다. 밴드의 구성 인원은 보컬리스트 돌로레스 오리어던(Dolores O'Riordan)[3], 기타리스트 노엘 호건(Noel Hogan)과 베이시스트 마이크 호건(Mike Hogan) 형제 그리고 드러머 퍼걸 롤러(Fergal Lawler)로 이루어져 있다.1993년 데뷔 앨범 Everybody Else Is Doing It, So Why Can't We? 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은 것을 바탕으로 2집과 3집에서 연달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돌로레스 오리어던의 출산을 계기로 5집 활동이 끝난 2003년 9월부터 휴식기에 접어들었다가, 2009년 1월 재결성 후 2012년 2월에 새 앨범 Roses를 내면서 조금씩 활동을 재개하였다. 주로는 돌로레스 오리어던의 솔로 활동이 더 돋보인다.
2018년 1월 15일(현지시간), 리드싱어 돌로레스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4] 현지 언론에 따르면 침대에서 위조 펜타닐이 발견되었다고 한다.[5] 그녀는 평소 심한 대인기피증과 우울증 증세를 보였고 실제로는 2013년에는 자살시도를 한 적도 있었다.[6] 2014년에 남편인 돈 버튼과 이혼한 후에는 공항에서 경찰에게 행패를 부리다 잡힌 적도 있었다.[7][8]
외신에 따르면 2018년 4월 3일 돌로레스의 사망 원인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다시 무기한 연기됐다. 런던 경찰청은 연기사유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 NPR의 Tiny Desk Concerts 공연을 했고, 재활동에 대한 의지를 보였기에 팬들은 아쉬워 하는 중. 하지만 결국 발표된 사인은 만취에 의한 사고사였고 팬들은 허탈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2018년 9월 6일에 부검결과가 나왔는데, 사인은 과다 음주에 의한 익사였다. 술에 만취한 상태로 목욕을 하다가 욕조 안에서 익사한 것이다.
3. 역사
크랜베리스는 1989년 아일랜드에서 결성되었다. 초기에는 호건 형제들, 드러머 퍼갈 라울러와 함께 나이얼 퀸이라는 보컬리스트를 끌어들여 "크랜베리가 보고 있다(the Cranberry Saw Us)"라는 이름의 밴드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밴드의 주작곡자였던 퀸이 생계문제로 밴드를 떠나게 되고 밴드명을 The Cranberries로 고치고 음악 잡지에 새 멤버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내게된다. 이를 보고 유년시절부터 가수의 꿈을 키우던 독특한 음색을 가진 보컬리스트 돌로레스 오리오던이 밴드에 연락, 밴드가 보내온 아르페지오 데모에 특유의 센스를 발휘하여 주멜로디와 가사를 붙여서 Linger라는 곡을 완성하여 다시 보냈고 이를 들은 밴드 멤버들이 돌로레스를 새 보컬리스트로 가입시킨다. 실제로 노래 실력을 한번 보고 싶다는 호건 형제의 제안에 돌로레스는 제 키보다 큰 전자 피아노를 들고 와서 시네이드 오코너의 커버곡을 연주해 불렀는데, 이 또한 반응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1992년 그들이 낸 싱글 <Linger>와 < Dreams>는 많은 관심을 모았고 영국의 여러 대형 음반사들이 밴드에 접촉했으나, 정작 크랜베리스는 아일랜드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다. 곧 밴드는 영국 락 그룹 더 스미스의 후기 앨범 프로듀싱을 맡았던 제작자 스티븐 스트릿과 함께 1993년 데뷔앨범 Everybody Else is Doing it, So Why Can't We?을 발표한다. 앨범의 제목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크랜베리스의 멤버들은 1집 앨범을 제작하기 전 발매한 싱글 Uncertain[9]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데다가 당시 프로듀싱 매니저 ''피어스 길모어"와의 불화까지 겹쳐서 밴드를 해체하려 하였다.[10] 프로 가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밴드에 가입한 돌로레스는 이 말을 듣고 매우 상심했고 기분 전환 삼아서 다른 밴드의 공연을 보러갔다.[11] 이때 밴드가 공연장에서 막 발매된 그들의 데뷔 앨범을 열정적으로 홍보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고는 다음 날 멤버들을 찾아가서 "다른 애들도 다 하고 있잖아, 근데 우리는 왜 못 해?"("Everybody Else is Doing it, So Why Can't We?")라고 말하며 밴드의 활동재개를 주장했다. 돌로레스의 설득으로 그들은 다시 절치부심하여 곡작업과 리허설을 하였고 마침내 아일랜드 레코드 사와 계약에 성공하고 1집을 녹음하게 된다.
1993년 3월 1일에 발매한 데뷔 앨범은 비록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많은 인기를 끌지 못했으나 " Dreams"가 미국에서 뒤늦게 싱글로 발표되어 인기를 끌었고 이를 발판삼아 Suede와 합동으로 미국 투어를 진행, 대박을 터뜨렸다.[12] 이후 크랜베리스는 아예 미국에서 녹음까지 한 2집 No need to Argue가 성공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특히, "Zombie", "Ode to my Family"등이 차트에서 크게 활약했다.
이들의 음악적 색채는 후속작들을 발표할수록 점차 무거워져 갔는데, 두 번째 앨범인 "No Need to Argue"에서는 Zombie 등의 곡에서 반전의 메시지를 강하게 집어넣었으며, 세 번째 앨범 to the Faithful Departed는 애초에 제목부터가 추모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싱글인 " Dreams"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비교해보면, 3번째 앨범의 타이틀인 "Salvation"은 더욱 거칠고 직접적으로 슬픈 느낌을 가져다준다.
1999년 발매된 네번째 앨범 "Bury the Hatchet"은 이전보다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을 주게 되었으나, 크랜베리스의 이전 앨범들에서 받은 무겁고 강렬한 이미지를 좋아하던 기존의 팬덤은 이에 실망하였고 이는 팬덤이 둘로 나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양상은 5번째 앨범 "Wake up and Smell the Coffee"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결국 2003년, 크랜베리스는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단하였다.[13]
활동 중단 이후에도 돌로레스 오리어던은 솔로 활동을 이어갔고, 밴드의 다른 멤버들도 각자의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후 2009년 돌로레스 오리어던이 아일랜드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명예 학위를 받을 때 다시 모인 이들은 그녀의 두 번째 싱글 앨범인 No Baggage를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활동을 재개하였고, 2012년 재결성 기념 앨범인 Roses를 발매했다.
2017년 3월 22일 새 싱글 "Why"를 공개했다. 이와 동시에 2017년 4월 28일 신보 Something Else가 발매된다는 오피셜이 떴다.
2018년 보컬 돌로레스 오리어던이 머물던 호텔에서 타계했다. 사망원인은 만취로 인한 익사이며 돌로레스는 사망 당시 녹음 세션을 위해 런던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보컬은 이미 녹음을 끝마쳤고 후반 작업을 마친 뒤 마지막 앨범으로 발매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편 1집도 당초 연초에 재발매할 계획이 있었으나 연말로 미뤄졌다. 돌로레스 오리어던이 사망한 경위는 술이 만취된 상태로 목욕하다가 욕조 안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렸고 머리가 욕조 속에 잠겨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혈중 알코올 농도가 무려 0.33으로 나왔다.[14]
2019년 4월 마지막 앨범 In the End가 발매되었고 크랜베리스는 해체했다.
4. 특징
4.1. 반전과 슬픔의 정서
같은 아일랜드 출신 얼터너티브 록 밴드로서 더 큰 팬덤과 영향력을 가진 U2에 비교해 보면, 크랜베리스가 가진 특색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U2가 보다 보편적인 정서에 영향을 두고,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다면, 크랜베리스는 " 아일랜드"라는 배경의 특수성이 명확하다.널리 알려진 대로, 아일랜드는 19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결코 완전히 평화롭다고 말할 수 없는 곳이었다. 특히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으로 대표되는 강경파와 영국의 직접 통치하에 있는 북아일랜드와의 분쟁은 많은 테러와 반목을 낳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초기 크랜베리스 음악은 그러한 싸움이 낳는 여러 비극에 대한 "슬픔"의 정서를 노래하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첫 앨범에서 가장 유명한 " Dreams"가 비교적 이러한 슬픔이 가장 덜 묻어나는 곡이라서 잘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Linger", "Not Sorry" 같은 곡의 가사는 분명히 그러한 정서를 담고 있다.
영어 발음에 아일랜드 특유의 억양이 묻어나서 듣기 어려운 감은 있지만 만약 크랜베리스의 곡을 듣는다면, 가사를 반드시 읽으면서 들어보자. 담고 있는 메시지를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크랜베리스의 슬픔을 대표하는 2집 수록곡 'Zombie' 가사 영상
또다른 조용한 슬픔의 대표곡 Twenty One. 역시 2집 수록곡이다.
추모곡의 성격이 강한 3집 수록곡 Cordell
4.2. 앨범들 소개
The Cranberries - Dreams (Official Music Video) |
크랜베리스를 소개할 때 첫 싱글 Dreams를 빼놓을 수 없다. 몽환적인 분위기와 아름다운 가사를 지닌 이 곡은 보컬리스트 돌로레스 오리어던의 이름을 널리 알린 곡이기도 하다. 왕페이가 번안해서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에서 테마곡으로 삽입되기도 하였으며, 이후에도 많은 보컬리스트들이 돌로레스의 특이한 창법에 반하여 이 곡을 리메이크해 왔다. 한국에서도 왕페이의 커버로 OST로 들어간 곡이 중경삼림 영화의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려 강한 인상을 받아 좋아하게 된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음악적 색깔에서 볼 때, "Dreams"는 크랜베리스의 색을 대변한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개중에는 아주 밝은 쪽에 들어간다고나 할까?
두 번째 앨범이자 앨범 전체에서 빠지는 곡이 하나도 없다는 평가를 받는 "No Need to Argue"는 아예 제목부터가 "다툴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크랜베리스의 모든 곡 중 가장 성공작인 "Zombie"는 가사와 뮤직비디오에서 대놓고 전쟁과 테러를 비판한다. 가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전쟁하고 테러하는 놈들은 전부 뇌 없는 좀비같은 것들이라고 까는 내용. 이 곡 외에도 이 앨범의 모든 곡들이 슬픔의 정서를 강하게 표현한다. "Twenty One"같이 곡 자체가 슬픈 것도 있고, "Ode to my Family"처럼 곡은 그냥 아름다운데 가사가 시궁창으로 눈물을 뽑아내는 것도 있다. "Ode to my family"는 개그콘서트 코너에서 사용된 적이 있다. 가사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선택이다.
세 번째 앨범 "to the Faithful Departed" 역시 제목부터가 "죽은 이들을 추모한다"는 뜻이다. 이 앨범은 오히려 이전 앨범보다 더 무겁고 어둡다. "No Need to Argue"가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선을 지키고 있다면 이 앨범은 이것을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제목부터가 " Bosnia"인 곡이 있는가 하면 "I just shot John Lennon" I'm still remembering[15]처럼 개인 대상의 테러리즘에 대한 노래도 있다. 특히 죽은 자, 다시는 못볼 사람에 대한 추모곡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꼭 "Cordell"을 들어보도록 하자.
네 번째 앨범 "Bury the Hatchet" 역시 "싸움을 그만두다"는 오래된 숙어이다. 이전 두 앨범에 비해서는 아주 밝아졌다고 볼 수 있는데, 그래도 여전히 슬픔의 정서가 남아 있다. 멜로디에 비해서 가사를 찬찬히 읽어보면 더욱 그러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Animal Instinct", "Promises" 같은 타이틀곡에서도 그러한 느낌이 강하지만 "Desperate Andy" 같은 곡의 가사를 읽어보면 아직까지 크랜베리스가 슬픔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네 번째 앨범은 팬덤에서 상반된 반응을 끌어냈는데, 이들의 음악색이 밝아진 것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먼저, 아일랜드에 드리워진 테러와 반목의 그림자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1990년 중반부터 IRA는 공식적으로 해체 수순에 접어들었으며, 이로 인해 누군가가 슬픔을 대변해 줄 필요성이 많이 줄어들었다. 아일랜드는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고, 슬픔은 너무 무거운 것이 되었다.
돌로레스 개인이 행복을 찾은 것 역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녀는 1994년 밴드의 매니저인 돈 버튼과 결혼하였고, 연달아 여러 아이들을 낳아 어머니가 되었다. 개인적인 행복과 "슬픔을 대변하는 것"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은 찾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잠정적 활동 중단 전 발매한 마지막 앨범인 "Wake up and Smell the Coffee"에 덧붙여진 인사말을 통해, 그녀는 "더이상 누군가가 슬픔을 대변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우리 음악은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남긴 바 있다.
"Wake up and Smell the Coffee" [16]는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이어진 월드 그랜드 투어 이후 발매된 앨범으로, 각각의 곡들은 나름대로 세련된 얼터너티브 록이지만 이전 앨범들이 담고 있는 특유의 정서는 상당히 희석되어 있었다. 당연히 열광적인 팬들의 지지도 약해졌고, 새로운 팬들이 생각만큼 강한 성원을 보내지 않은 것도 있어서 인기는 지금까지 중 가장 낮은 쪽에 속한다.
6년간의 공백기 동안, 밴드 멤버 각각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활동을 펼쳐왔는데,[17] 특히 돌로레스 오리어던의 솔로 싱글들은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재결성을 기념해 발매된 앨범 "Roses"는 생각만큼의 반향을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순항했다.
크랜베리스 4집의 타이틀곡인 Promises
5. 여담
5.1. 보컬의 특색
보컬리스트 돌로레스의 음색이 아주 특이하여 몇번만 들으면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다. 비음과 경음을 같이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이 창법은 "꺾는" 것과는 또 다르다. " Dreams"와 " Zombie"에서 이러한 목소리가 가진 매력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돌로레스는 한국에서 몇몇 여성 보컬리스트들이 데뷔할 때 흔히 비교되곤 가수 중 하나이기도 하다. [18] 분명 많은 매력이 있는 보컬리스트이긴 하지만, 라이브 공연에서는 그 특색이 너무 강해서인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녀 자신이 그리 완벽하게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편이 아니다. 파리 공연 등은 유튜브 실황이 남아 있는데, 이를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좋은데?
5.2. 한국에서의 크랜베리스
밴드 자체는 한국에서 그다지 지명도가 있는 편이 아니지만, 몇몇 곡의 경우 굉장히 유명하다. 특히 젊은이의 양지와 개그콘서트의 두근두근 코너,다만 특유의 "슬픔의 정서"에 공감하는 측은 한국에서도 작지만 꽤 단단한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zombie"의 경우 코리안 좀비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한국의 페더급 격투기 선수 정찬성의 등장 테마음악으로 쓰이면서 인지도가 많이 높아졌다.
한국의 인디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룹이다. 특유의 우울한 분위기와 독특한 보컬은 여러 홍대밴드, 특히 여성보컬 밴드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자우림의 경우는 레퍼런스의 흔적이 대놓고 진하게 느껴질 정도로 벤치마킹을 많이 한 걸로 유명하다. 박정현이 나는 가수다 무대에서 선보였던 '소나기'도 크랜배리스의 레퍼런스를 강하게 넣은 곡이다. 실제로 박정현은 아이리쉬 록에 굉장히 많은 관심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2집 수록곡인 Ode to my Family. Does anyone care? 라는 가사가 특히 강렬하다.
크랜베리스는 2001년 그랜드 투어의 일환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20]
MBC의 개그 프로그램 오늘은 좋은 날의 허리케인 블루에서 크랜베리스의 노래 'Dreams'를 립싱크 코미디로 진행한 적도 있다. #
6. 디스코그래피
연도 | 앨범명 | 대표곡 |
1993 | Everybody Else Is Doing It, So Why Can't We? | Dreams, Linger, Pretty |
1994 | No Need to Argue | Zombie, Ode to My Family, I Can't be With You, Empty |
1996 | to the Faithful Departed | Salvation, Hollywood, Cordell |
1999 | Bury the Hatchet | Promises, Animal Instinct, Just My imagination |
2001 | Wake up and Smell the Coffee | Analyse, Time is ticking out, This is the Day |
2002 | Stars | 1989~2002년 베스트 앨범 |
2012 | Roses | Tomorrow |
2017 | Something Else | Why |
2019 | IN THE END | ALL OVER NOW |
[1]
싱글 발매 날짜
[2]
돌로레스 오리어던의 사망.
[3]
1971년 9월 6일생
[4]
향년 만 46세. 이 밴드의 멤버 중 첫번째 고인이 됐다.
[5]
펜타닐은
프린스의 사망 원인이기도 했다.
[6]
리머릭 출신인 돌로레스 오리어던이 록밴드 가수로 전향하기까지, 목장에서 일을 하는 그녀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하반신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어머니는 학교 급식소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가난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아직 8살이었을 때는 아버지의 지인에게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했었고 부친의 장례식날에 그를 또 만나야 했었다고 토로한다. 이러한 돌로레스의 불우한 성장배경과 더불어 이혼 파경까지 겪으면서 알콜에 의존하게 되고 우울증마저 더 심해졌을거라 보며 그녀가 직접 쓴 노래에도 이러한 심경들이 잘 드러나 있다.
[7]
만취상태로 기내에서 "나는
리머릭의 여왕이란 말이다. 이 새끼들아"라고 소동을 부리다 제지하는 경찰관의 이마를 박치기로 들이받아 위중상태로 만들었다. 이후 재판에서 약식기소 벌금형을 선고받고 4500 유로(한화 약 600만원)를 지불했다고 한다.
[8]
"
크리스마스는 모두가 행복하지만 나 자신에겐 끔찍한 최악의 날"이라고 인터뷰 전문에 나와있는데 아이들의 양육권과 보호는 법적으로 남편이 쥐고 있어 기념일에도 사랑하는 아이들을 끝내 만나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그녀의 양팔과 어깨에 새겨진 타투의 의미는 다름 아닌 아이들의 이름이라고 한다.
[9]
아일랜드 스튜디오 Xeric Records의 라벨명을 붙여서 91년 가을부터 4개의 수록곡을 넣은 5천장의 레코드를 발매, 데모 싱글인 관계로 레코드 차트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10]
인더스트리얼 포크록을 지향하려는 밴드와 느닷없이 노래에 댄스 비트를 넣으려는 길모어 사이의 음악적인 마찰이 있었고, 결국 해체 수순까지 간듯 하다. 여기에 노엘은 길모어가
믹싱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크랜베리스의 노래를 망쳐놓고 있다며 크게 비판을 했다.
[11]
이 당시의 크랜베리스는 상당히 빈곤했던 시절이라며 돌로레스 오리오던이 회상하는데 먹을 것이 없어 과자 부스러기를 구걸하러 다닐 정도로 항상 배가 고팠다고 한다.
[12]
정작 스웨이드는 악재가 겹쳐 투어가 성공적이지 못했고, 이는 멤버 간 불화를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여담으로 크랜베리스도
브렛 앤더슨과
버나드 버틀러의 불화를 목격한 증인이기도 한데, 버나드가 자기 밴드랑 같이 있기 싫어해서 크렌베리스의 버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13]
밴드의 인기가 식어가는 중에 무거운 기타를 메고 장시간 공연을 소화해 내던 돌로레스 오리어던이 심한 어깨 근육통과 허리 요통을 호소하였고 결국 돌로레스의 치료를 위해 밴드 활동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14]
0.33이면 영국 기준 운전면허 취소 기준의 4배 정도이다(...)
[15]
커트 코베인을 추모하는곡이다.
[16]
참고로 이 제목 역시 "냉수 먹고 정신 차려라"를 뜻하는 숙어라고 한다.
[17]
공백기 동안 돌로레스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큰 목장을 구입해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18]
실제로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가 데뷔 무대에서(이소라의 프로포즈 1997년 10월 12일자) 크랜베리스의 Dreams를 불렀다.
[19]
실제로 이 광고 연애 감정이 포함되어 있어 초딩시절 공개고백할 때 심심찮게 들어볼 수 있다.몇 년 전 이야기지만
[20]
이 그랜드 투어가 크랜베리스의 처음이자 마지막 내한으로 크랜베리스는 공연 성사 직후 팬들에게 내년에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두 번 다시 한국에 오지 않았는데 당시 음향셋팅 준비와 관객관리에 문제가 많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실 영문 위키를 투어 관련 정보 보면 세계 투어는 1999-2003년 이때 하고는 하지 않았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재결성 후 투어는 영미권, 유럽, 남미가 전부였다. 내한 다음 해인 2002년엔 유럽 투어 스케줄을 진행한 뒤, 2003년 연초 레이블과 결별했으며 결국 활동 정지를 하면서 자연스레 무산된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