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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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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가타케의 칠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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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구마모토번주
가토 기요마사
加藤清正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Kat%C5%8D_Kiyomasa.jpg
출생 1562년 7월 25일
(에이로쿠[1] 5년 음력 6월 24일)
무로마치 막부 도카이도 오와리국 아이치군 나카무라
(現 아이치현 나고야시 나카무라구)
사망 1611년 8월 2일 (향년 49세)
(게이초[2] 16년 음력 6월 24일)
에도 막부 히고국 구마모토번 구마모토성
(現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구마모토성)
묘소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혼묘지
재임기간 초대 구마모토번주
1587년 ~ 1611년 8월 2일
신분 다이묘
최종관위 종4위하 (생전)
종3위 (1910년 추증)
계명 浄池院殿永運日乗大居士
씨족 가토씨
부모 아버지 가토 기요타다[3]
어머니 이토
배우자 정실 야마자키 가타케무스메
계실 세이조인(清浄院)[4], 혼카쿠인(本覚院), 조코인(浄光院), 쇼오인(正応院)
자녀 도라쿠마(虎熊), 혼조인(本浄院), 다다마사(忠正), 다다히로(삼남), 케에린인(瑤林院), 기다 마사카쓰(貴田正勝), 햐쿠(百助) 등
신체 5척 3촌(약 161cm)
종교 불교 ( 일련정종)
경력 종5위하 주계두
임진왜란 제2군 사령관
종5위상 시종
종4위하
참전 야마자키 전투
시즈가타케 전투[5]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별명 도라노스케(虎之助),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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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 눈알(蛇の目)[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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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임진왜란 이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2.2. 임진왜란 초기, 선봉을 맡다2.3. 임진왜란 후기, 축성의 달인이 되다2.4. 임진왜란 이후2.5. 오사카 전투 이후
3. 임진왜란 중 호랑이 사냥에 대해4. 여담5. 대중매체에서
5.1. 영화5.2. 드라마5.3. 게임5.4. 소설5.5.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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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센코쿠 시대의 무장이며 히고국(오늘날 규슈 구마모토현)의 다이묘이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랑 함께 일본군의 선봉으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일본의 장수이다. 대개 '가토 기요마사'라면 잘 모르는 중노년 한국 세대도 '가등청정'이라 하면 알아듣는다. 풍신수길, 이등박문처럼 예전에는 일본 인명을 한국 한자음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2. 생애

2.1. 임진왜란 이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파일:IMG_3515_R1-682x1024.jpg
가토 기요마사의 갑옷

1562년 대장장이였던 가토 기요타다와, 세이베에(清兵衛)[7]의 딸 이토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요마사의 아명은 원래 야샤와카(夜叉若)였는데, 야샤와카가 어릴 적 아버지 기요타다가 일찍 죽고 만다.

어머니 이토는 어린 야샤와카를 데리고 일족인 카지야 고로스케의 집에 몸을 의탁하였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인연이 닿게 된다. 히데요시와 기요마사의 혈연 관계는 2중으로 얽혀 있는데, 본래 야샤와카의 어머니인 이토는 히데요시의 어머니인 오만도코로의 사촌[8]이었고 이토와 야샤와카가 의탁한 가지야 고로스케의 부인은 가지야 세이베에의 양녀였기에 야샤와카에게는 이모가 되었고, 그녀와 히데요시의 정실부인 네네[9]는 자매 사이였다. 또래 중에서는 꽤나 명석한 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야샤와카가 밑바닥에서 시작했기에 가신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에 포착되었던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야샤와카는 1575년 즈음에 겐푸쿠(성인식)를 마치기 전에 나가시노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그 다음 해에 겐푸쿠를 마치고 그 유명한 가토 도라노스케 기요마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와 함께 170석의 영지를 하사받으며 평생의 첫 영지를 가지게 되었다.

시즈가타케의 전투에도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고 3천 석을 받는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하여 큰 공을 세웠던 시동 출신의 무장 7인을 '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라 부른다.[10] 평민 출신이라 후다이[11] 가신이 없는 히데요시는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키워 자신의 후다이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버프를 받아 쑥쑥 석고가 증가했고, 규슈 정벌 이후에는 히고국의 절반을 받아 17만 석의 다이묘가 된다. 이 때까지의 경력을 살펴보면, 도요토미 직할지인 하리마, 이즈미의 대관(관리인)직, 사누키의 임시 총독직, 그리고 히고 다이묘직이다. 또한 전투에 있어서도 실제 그가 맡은 보직들은 대부분 후방 지원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근년 연구의 결과이다. 즉 기요마사의 초반 경력은 무장의 그것이라기보다는 행정관의 그것이었으며, 히데요시가 그에게 기대한 것은 도요토미의 무장이 아닌, 내정관의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히데요시 세력의 최측근 호위가문이자 칠본창의 차석으로써 행동대장 역할을 많이하였으며 히데요시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보였다. 이 시기에 이시다 미츠나리와 충돌이 잦아서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2.2. 임진왜란 초기, 선봉을 맡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선봉이 되어 조선으로 쳐들어왔는데, 사실 한성에 가장 처음 입성한 것은 고니시 유키나가였다.[12]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는 문서를 교묘하게 꾸며서 누가 먼저 들어왔는가 하는 부분은 교묘히 빼놓고 자신의 사자를 잽싸게 보내서 공적을 위조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이시다 미츠나리가 가토 기요마사의 부정을 탄핵하자, 예전부터 우등생처럼 히데요시 옆에 붙어서 정무를 도맡아하는 미츠나리에 대한 경쟁심이 있었던 터라 이후 사이가 더욱 악화되어 원수지간이 되었다.

개성을 함락시킬 때까지 고니시 군과 함께 하였고 그 이후 함경도로 진군하여 국경인, 국세필 등의 순왜들과 내통하여 선조의 서자인 임해군 순화군도 사로잡았으며[13] 가토는 이 공로로 국경인과 국세필에게 벼슬을 내린다.[14]

더불어 조선인 약 2천 명과[15] 함께 두만강을 넘어 현 중국 용정시에 있었던 여진족 노토 부락(老土部落)[16]을 공격하여 성 하나를 점거한다. 이는 일본사에서 최초로 만주에 진출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여진족이 기병을 보내 포위를 시도하자 재빨리 두만강을 넘어 다시 조선으로 철수했다. 이후 히데요시에게 보낸 서찰을 보면 당시 명나라로 향하는 길을 조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함경도에서 거병한 의병장 정문부와 벌인 북관대첩에서 패전하고 함경도의 혹한으로 인한 동사, 아사까지 합쳐 근 9천 명에 이르는 심각한 타격을 입은 데다가 명군이 참전하면서 할 수 없이 철병하였다.

2.3. 임진왜란 후기, 축성의 달인이 되다

정유재란 때에는 화왕산성을 공격했으나,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의병장 곽재우와 벌인 전투에서 패전하여 현재의 울산광역시 학성에서 왜성을 쌓고 버텼다.

이때 선조의 명령을 받고 출진한 이순신이 가토를 노리고 있었는데 간발의 차이로 상륙을 완료하여 이순신이 발길을 돌렸고, 귀환 도중에 가덕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병사 5명이 납치되고 동행하던 아이 1명이 살해당하자 가덕도에 축성된 성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포로도 돌려받은 뒤 돌아가는 일이 있었다.[17]

울산성 전투에서는 조명 연합군에게 포위되어 자군의 시체를 뜯어먹고 말피를 마시는 처참한 농성을 벌였는데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나는 여기에서 할 테니 귀공은 그 곳에서 하시오."라는 서신을 보냈을 정도로 할복하기 직전까지 몰렸으나 결국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데 성공하여 간신히 귀환할 수 있었다. 이 때 가토 역시 도망 과정이 순탄치 않았는데 물자나 부상병들을 싸그리 다 버리고 걸을 수 있는 병력들만 데리고 몸만 도주했다. 이순신에게 잡히면 끝장이기 때문에 1초라도 빨리 도망가야만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때의 경험을 토대로 축성술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으며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에서 포로들을 엄청나게 끌고 갔는데 구마모토 성을 지은 조선인 포로들이 바로 이들이다. 일본 3대 성 중 하나로 꼽히는 견성 구마모토 성 임진왜란에서 귀환한 뒤인 1601년부터 개축하기 시작하여 1607년에 완공했는데 울산에서 농성하다가 겪은 굶주림이 얼마나 뼈에 사무쳤는지 출타시 도시락을 항상 싸가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고 성 내의 건물에 까는 다다미도 식용이 가능하도록 토란 줄기를 넣고 짜도록 했으며 성벽에는 조롱박을 심어 도배를 해버리고 성 안의 우물은 무려 120개나 팠다고 한다. #[18] 이런 특이한 건축 때문인지 에도 후기에는 병학자들에게 '기요마사류'라는 이름까지 부여받으며 독자적 양식으로 평가받았다.[19]

그러나 정작 가토 가문이 구마모토 성의 다이묘 노릇을 한 건 본인과 아들까지 해서 2대 44년뿐이고 그 이후에는 에도 막부의 유력 다이묘 숙청 중 하나로 개역당해서 구마모토 성은 호소카와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구마모토 성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는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에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이 일으킨 세이난 전쟁 중 벌어졌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반군이 성에 주둔한 정부군을 포위하고 대포 수십여 문을 끌고와 천수각, 망루, 식량창고를 포함한 내부 건물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함락에 실패하여 난공불락의 명성을 증명해주었다. 전투 이후 사이고는 "우리는 정부군에게 진 것이 아니라 세이쇼 공[20]에게 진 것이다."라고 탄식했다.

징비록에 재미있는 구절이 있다. 철군 과정에서 고니시를 가토가 지원했는데,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우리 장수를 버리고 가는 것은 나라의 수치"라는 이유에서 고니시를 지원했고, 이에 고니시가 "이후로는 공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고 했으나, 가토가 "공과 나는 가는 길이 달라 친해질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2.4. 임진왜란 이후

가토가 철군하여 일본에 돌아왔을 때 살아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죽은 후였다. 오대로가 사기를 고려해 비밀에 부치고 퇴각을 명령했던 것이다.

히데요시 사후, 기요마사가 싫어하고 정말 융통성이라고 1도 없던 오봉행 중 하나인 이시다 미츠나리가 정권을 잡게 된다. 기요마사가 미츠나리를 싫어하게 된 건 다름 아니라 임진왜란에서 가토 자신이 고니시보다 먼저 한성을 점령한 것처럼 사기를 치려했다가, 미츠나리에게 이를 간파당하고 미수에 그쳤기 때문이다.[21] 게다가 전쟁으로 영지 운영할 곳간마저 거의 비어있다보니 참전한 중소규모 다이묘들은 이를 채우기 위해 고쿠다카를 살짝 속였으나 미츠나리는 이는 엄연한 비리라며 다 찾아내며 때려잡으니 불만은 그야말로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나마 분란을 중재하던 마에다 토시이에까지 사망하자, 가토 기요마사는 이시다 미츠나리를 잡아 죽이려고 길길이 날뛰었고, 미츠나리의 자택에 쳐들어갔으나 미츠나리가 이에야스의 저택으로 도주하면서 실패했다.

이후 기요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편에 서게 된다.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의 적장이라서 그를 비하하기 위해 가토 기요마사를 '배신자'로 깎아내리고 비판하는 경우도 많지만, 일본측 시각은 이와 다르다.

기요마사를 옹호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기요마사가 동군에 서게 된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를 끔찍히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것. 평소 마음에 안 들어했던 데다가 히데요시가 남기고 간 어린 후계자 히데요리를 둘러싸고 앞으로 정치를 중앙집권화 및 오봉행이 주도하겠다는 선언으로 어린 후계자 히데요리를 이용해 권력을 전횡하는 '간신 미츠나리'를 제거하려고 이에야스 편을 든 것이지, 딱히 도요토미를 배신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22]

실제로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비대해진 도쿠가와 가문을 지켜보면서 기요마사는 자신이 도쿠가와의 야심을 얕봤다는 생각과 함께 도요토미 가의 존속을 위해 진력했다. 또한 배신이라고 할 수 없는 게, 애당초 세키가하라 전투의 실상은 도요토미 가신들 사이에서 벌어진 내분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만든 오대로의 한 명으로 도요토미 가문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야심을 드러내고 정이대장군(쇼군)이 되고 에도 막부를 연 것은 3년 후의 일이다. 이시다 미츠나리 역시 오봉행의 선두로 도요토미의 측근 부하였다. 다만 가토를 중심으로 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랜 부하들로 구성된 무장들의 파벌과, 히데요시가 오우미에서 새로 획득한 인재들로 행정능력이 뛰어나서 중용되었던 이시다 미츠나리 파벌과는 견원지간의 사이라서, 가토가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23]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51만 석의 대 다이묘가 된다. 기존의 17만석에 고니시의 24만 석 및 기타 영지를 가증받은 것이다. 서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규슈에서의 싸움이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이 승리하자, 이 소식은 규슈로 전해지고 서군 편을 들던 다이묘들이 동군 쪽으로 돌아서고 동군의 승리로 결착이 났다.

그는 새로운 영지 개발을 위해 하천공사에 주력했다. 현재의 구마모토 평야는 기요마사의 새 영지 개발 정책이 그 바탕이 되었다. 또 하천의 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기요마사는 열렬한 일련정종 불교 신자였기 때문에 영내에 일련종 사원의 건립과 크리스트교 신자, 심지어 일련정종이 아닌 다른 불교조차 탄압하는 정책을 취했다.[24]

고니시라는 라이벌의 소멸이 뭔가 가슴에 와 닿는게 있었는지, 고니시 가의 가신들을 많이 흡수했다. 또한 고니시의 우토 성에서 탑 하나를 옮겨다가 자신의 구마모토 성 한켠에 세우고 "우토 탑(우토야구라)"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기요마사를 미화하기 위해 지어낸 일화로,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토 탑은 구마모토 성 건립 당시부터 있었으며, 옛 고니시 가 가신들이 이 구역에 모여서 그렇게 불린 것이라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가에 충성을 지키고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자신의 영지였던 구마모토 성에 별실을 만들어서 만일의 경우가 생기면 히데요리를 이곳으로 모시려는 계획을 세웠고, 구마모토에서 히데요리가 있는 오사카 성까지 3일 만에 갈 수 있는 바닷길을 정비했다. 1611년 3월 28일 니조 성에서 이에야스와 히데요리가 회견할 때는 품에 단도를 숨기고 히데요리를 보호하고 무사히 회견을 마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이것으로 주군이었던 히데요시에 대한 은혜를 갚았다고 안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3개월 후인 1611년 6월 24일 병으로 사망했다.[25]

2.5. 오사카 전투 이후

오사카 전투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천하를 움켜진 후에는, 서서히 몰락했다. 도쿠가와 막부에게 가토 기요마사는 여전히 전 주군인 도요토미 가문의 충신이었고, 도쿠가와 가문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도쿠가와 가문이 가토 가문을 몰락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토 기요마사의 아들 가토 타다히로(1601~1653)는 1632년 막부 주도하의 2차 개역 작업에 휘말려 영지를 몰수당했다. 당장은 데와 마루오카 번 1만 석을 새로 부여받았으나 그것도 사실상 쇼나이 번의 간접지배를 받는 영지라 이름만 영주였으며, 21년 뒤 그가 사망하자 막부는 그 영지를 쇼나이 번에 정식 편입시켜 가토 가문의 개역을 완료하였다. 그래도 자손들은 더이상 숙청당하지 않은 채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후 메이지 유신 때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아 현재도 일본에 생존해 있다.[26]

3. 임진왜란 중 호랑이 사냥에 대해

파일:external/repository.tku.ac.jp/4028.gif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중 조선 호랑이를 사냥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1917년 말에 한반도에서 호랑이 원정 사냥을 행한 일본 제국의 사업가 야마모토 타다사부로가 사냥의 성과를 기념하는 연회에서 '진중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호랑이를 사냥한 무장'이라며 가토를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자신의 사냥을 기념하며 출간한 서적인 정호기(征虎記)의 표지로도 가토를 연상시키는 '편겸창(片鎌槍)을 든 무사' 그림을 사용하는가 하면,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 배가본드에서도 이 호랑이의 가죽을 한 일화로 다룬 등 현대 창작물에서도 가토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확고하다.

본문을 비롯해 나무위키의 여러 문서들에서도 가토 기요마사가 호랑이의 고환을 특효약이라고 여겨 불임을 앓던 도요토미에게 바치기 위해 호랑이를 사냥했다고 서술되기도 했으나 실제로 가토가 임진왜란 당시 호랑이를 사냥했음을 증명하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호랑이를 사냥한 가토 기요마사'라는 인식은 가토를 영웅화하는 후대의 창작물들로 공고해진 것으로 확인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중 자신에게 호랑이를 사냥해 바친 장수들에게 자신이 서명한 주인장(朱印狀)을 하사했다. 실제로 호랑이를 사냥해 주인장을 하사받은 것이 확인되는 장수들로 가메이 고레노리, 깃카와 히로이에,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타다츠네 부자,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이 존재하나 가토는 이 주인장을 받은 바 없어 가토가 호랑이를 사냥해 도요토미에게 바쳤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볼 수 있다.[27]

또한 검은 옻칠이 된 크고 작은 동물 두개골 두 점이 가토 기요마사가 사냥한 호랑이의 것으로 전해지며 도쿠가와미술관(徳川美術館)에 소장되어 있기도 하나 개중 큰 두개골은 코뼈 부분이 실제 호랑이의 두개골과 달리 앞으로 크게 돌출되어 있는 등 조작이 가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이는 정황이 있고, 작은 두개골은 전체적인 형태가 호랑이의 두개골보다 표범의 두개골에 가까운 형태이다. 도쿠가와미술관 측은 해당 두개골들이 가토 기요마사의 아들인 가토 다다히로(加藤忠広)가 데와국(出羽国)의 성으로 유배될 때까지도 휴대했던 것이었으나 다다히로의 딸이 하타모토(旗本)였던 아베(阿部)가로 시집갈 때 지참하여 다른 가문으로 반출되었던 것을 큰 두개골은 1934년 도쿠가와가가 구입, 작은 쪽은 치바현 모 가문에 보관되다 1971년 박물관에 기증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나[28] 해당 두개골들이 가토 기요마사가 호랑이를 사냥했음을 명확히 입증하지는 못한다.[29]

가토의 호랑이 사냥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140년이 지난 1739년에 집필된 일화집인 상산기담(常山紀談)으로, 자신의 시동(侍童)인 고즈키 시젠(上月左膳)이 호랑이에게 죽자 가토가 조총으로 호랑이를 쏘아 죽여 복수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고 1797~1802년 집필된 소설 회본태합기(絵本太閤記)에도 이에 영향을 받아 같은 내용이 실려 있으나 회본태합기의 내용에서는 조선에 존재하지 않던 동물인 원숭이가 등장하고 있어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데다 상산기담에서도 호랑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에서 살지 않았던 코끼리까지 조선에서 잡아 왔다는 신빙성 없는 일화가 실려 있어 상산기담에 함께 실린 가토 기요마사의 호랑이 사냥에 대한 신빙성 또한 떨어지게 하고 있다.[30]

이후 에도 시대에는 우키요에가,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는 가토 기요마사를 다룬 소설이 성행하는 등 예술 작품들을 통해 가토에 대한 '호랑이를 사냥한 무사'라는 인식이 보다 확고해졌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처음 상산기담과 회본태합기에 기록되었던 '총으로 호랑이를 쏘아 잡은' 일화는 '창과 칼로 호랑이를 잡은' 것으로 변형되어 우키요에와 소설 삽화에 표현되었는데, 이는 무사로서의 용맹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파악된다.[31]

이처럼 가토 기요마사는 실제로 임진왜란 중 호랑이를 사냥했음이 주인장 등의 사료를 통해 증명되는 다른 장수들을 재치고 임진왜란 발발 이후 140여 년 후에 집필된 문헌에 수록된 신빙성이 다소 떨어지는 일화와 이에 근거한 예술 작품들을 통해 호랑이를 사냥한 장수의 전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는 전술한 것과 같이 가토를 영웅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러한 가토에 대한 영웅화가 진행된 과정을 유추할 시, 가토가 에도 시대를 연 도쿠가와가에 대적해 도요토미가에 충성한 점과 더불어 가부키 등 예술 활동에 제약을 건 덴포 개혁으로 가토의 호랑이 사냥 설화는 검열을 피해 본명이 아닌 가명으로서 '호랑이를 사냥한 장수'로 계속 전해져 오다가 에도 시대 중기에 융성한 국학(国学)으로 대표되는 국수주의적 사상과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적 사상을 통해 조선을 침공한 장수라는 점이 기존에 쌓여 온 '호랑이를 사냥한 장수'로서의 인식과 결합. 최종적으로 '이국의 강한 맹수를 사냥하여 일본인의 기개를 떨친 인물'로서 인기를 끌게 되며 영웅화된 것으로 여겨진다.[32]

4. 여담

5. 대중매체에서

5.1. 영화

5.2. 드라마

파일:attachment/징비록(드라마)/고증/jingbikato.jpg
* 2004년 KBS 드라마 < 불멸의 이순신>과 2015년 KBS 드라마 < 징비록>에서는 배우 이정용이 연기했다. 그 중 징비록 쪽은 문서 참조.
파일:katokiyomasa.jpg
<rowcolor=#fff> 세력 배역명 / 배우
파일:고시치노키리.svg
도요토미
가토 기요마사
加藤清正

(후치카미 야스시 분)
히고 북반국의 다이묘이자 히데요시 수하의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와 히고를 양분하고 있다. 32화에서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함께 첫 등장한다.

5.3. 게임

파일:加藤虎之助.jpg 파일:加藤清正3.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파일:GJLUvPubUAAvNmj.jpg
노부나가의 야망 출진
< 태합입지전 시리즈>에서도 전투 쪽에 주로 특화된 와중에 건축 4레벨, 광산 2레벨로 내정 쪽으로도 쓸모가 있다는 게 후쿠시마 마사노리와의 차별점이다. 지모는 낮은 편이지만 마사노리처럼 바닥까지는 또 아니다. 대신 전투 쪽 기능은 족경만 4레벨로 동일하고 마사노리에게 확실히 뒤쳐진다.

5.4. 소설

*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소설)에서는 기골 장대한 용장이면서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세심하게 헤아리는 지장의 풍모도 갖춘 장수로 나온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단을 묘사할 때, 영민하지만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이시다 미츠나리와 대조되는 구도를 형성한다.

* 소설 < 불꽃의 미라쥬>에서는 주인공이 기요마사에게 "네가 이 구마모토에서는 신으로 추앙받지만 바다 건너에서는 그저 도적 떼 두목이다"라고 일갈하는 장면이 있다.

5.5. 만화



[1] 永禄, 제106대 천황 오기마치 덴노의 두번째 연호 [2] 慶長, 제107대 천황 고요제이 덴노의 마지막 연호. 참고로 해당 연호는 후임인 고미즈노오 덴노의 즉위 이후에도 개원하지 않고 4년동안 더 쓰였다. [3] 1564년 사망 [4] 도쿠가와 이에야스 양녀이다. [5] 가토에게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란 별명이 있게 한 전투다. [6] 가토 기요마사의 가몬은 가토씨의 정식으로 지정된 가몬은 아니며, 가토씨는 가토 미쓰야스 계의 검은색 바탕에 뱀 눈알 문양과 가토 요시아키 계의 늘어뜨린 등나무, 그리고 도라지 가몬을 사용한다. [7] 성은 없음. [8] 혹은 먼 친척 [9] 후의 기타노만도코로 [10] 이들은 모두 3천 석을 받았는데,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공을 더 인정받아 5천 석을 받았다. 흔히 칠본창이라는 명칭 때문에 시즈카타케에서의 히데요시 시동 출신 출격 무장을 7명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이 시기 큰 공을 인정받았던 시동 출신 데뷔 멤버들은 총 9명이다. 그 중 둘은 창이 아닌 무기를 들어서라는 말도 있고 일단 전투 중에서 전사했으므로 칠본창이라 불리는 듯하다. 뭐 일단 이 7명 중에서 그나마 메이저급 반열까지 오른 것은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뿐이니 아무래도 좋을 지도. [11] 대대로 해당 주군을 모셔온 집안 [12] 전쟁 직후 동래성 함락 및 신립 격파 등 큰 전투는 모두 고니시가 했는데도 고니시가 먼저 한성에 들어왔다. [13] 임해군과 순화군을 묶어서 가토에게 바친 조선인 반역자 국경인을 도리어 "자기 주군에게 어찌 이렇게 모욕을 줄 수 있는가!"하고 꾸짖고 포승을 푼 뒤 두 왕자와 그 일행을 잘 대접했다는 일화에서 볼 때 한국에서 으레 상상하는 '사악한 대마왕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과격한 돌격대장과는 거리가 있으며 '자신들이 잡은 조선의 왕자들을 전쟁에서 써먹을 데가 많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그렇게 했을 걸로 보인다. [14] 이는 임해군과 순화군이 현지에서 폭정을 저질러서 민심을 잃은 탓도 있다. 선조가 모병 활동을 하라고 보냈더니 그나마 선조 덕분에 더한 말썽은 일으키지 않았던 두 왕자가 선조의 통제에서 벗어나니 기다렸다는 듯이 폭정을 일삼았다. 오죽하면 일본군이 등장해서 두 왕자를 생포하니 현지 백성들이 일본군을 격하게 환영했을 정도다. [15] 여진족의 약탈에 분노한 함경도 조선인들도 참전했다. [16] 청나라 건국자 누르하치가 있었던 부근이다. [17] 당시 이순신이 단단히 화가 나 부산진에서도 자제했던 상륙전까지 벌였다. 물론 일본군의 본진이었던 부산진에 비하면 작은 성채에 불과했다. [18] 물론 성 내의 우물을 여럿 확보한 것은 다른 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벽과 바닥재까지 유사시 식량으로 대체할 수 있게 지시한 것은 드문 일이기는 하다. [19] 기요마사류 건축 양식이란 어떤 건물에서 식량을 최대한 쥐어 짜먹을 수 있는 구조의 건물을 의미한다. 21세기 식으로 따지자면 방문에 서랍을 잔뜩 달아놓고 그 안을 통조림으로 채우는 예시가 해당된다. [20] 기요마사(清正)의 한자 표기를 음독한 것이 세이쇼. 위인들을 일컬을 때 훈음이 아니라 독음으로 읽는 경우가 많다. 이를 ' 유식자 읽기'(有職読み)이라 한다. [21]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런 식으로 공을 부풀리려던 도요토미군 장수들의 행위를 조사해서 히데요시에게 알리는 역할이었고 굉장히 깐깐하게 굴었기 때문에 이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에게 굉장히 미움을 사게 된다. 사실 이뿐만 아니라 일본에 있을 때도 은폐된 석고를 잡아내는 일을 해서 인망이 굉장히 없었다. [22]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도요토미 가에 충성하던 몇몇 가문에만 해당되는 명분이지 실제로는 이미 이 시점에서 누가 천하인이 될 건지 감을 못 잡은 사람따윈 없었다. 다만 서군의 경우 이에야스와 원수지간이라 동군에 합류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든가 아니면 이에야스가 천하인이 되는 것이 아니꼽다고 생각했던 몇몇 거물급 다이묘라든가 혹은 이들과 친분이 있어서 그 때문에 참전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애시당초 이런 말이 이번에 처음 등장한 것도 아니고 바로 얼마 전 오다 가의 후계자를 결정하는 기요스 회의에서도 똑같은 말이 나왔던 적이 있다. 그리고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가 대신 천하를 차지할 때 내세웠던 명분도 이 때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다만 가토 기요마사가 그 몇 안 되는 도요토미 가문 충성파였던 건 확실한 사실이다. 가토 히데요리를 자신에 에 모시려 했다는 도 있다. [23] 또한 앙숙인 고니시 유키나가 역시 서군이었다. 이런상황에 가토가 서군에 참여를 했을 리가 없다. [24] 그는 조선에 진군할 당시 사기 고양 목적으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花經)라고 쓰인 니치렌 만다라를 깃발에 적어 병사들에게 들고 행군하게 했다. [25]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통신사의 기행문에는 대놓고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독살했다'고 쓰여있기도 하다. 이에야스의 일생을 보면 죽어줬으면 하는 상대가 딱 좋은 타이밍에 의문사하는 경우가 많아, 이에야스를 둘러싼 암살 음모설이 많다. [26] 대부분의 다이묘들은 영지를 몰수당한다고 해도 일족 자체가 끊긴 경우는 드물며, 평민으로 격하시키는 선에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는 무사 신분을 계속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타다히로가 마루오카번에서 낳은 서자들도 5천석 규모의 역직을 계승하는 등 무사 신분은 유지했다. [27] 에도시대 말 대중문화 속의 호랑이 사냥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일본연구 제48호 p. 58~59 [28] https://images.dnpartcom.jp/ia/workDetail?id=TAM001094 [29] 에도시대 말 대중문화 속의 호랑이 사냥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일본연구 제48호 p. 62~63 [30] 에도시대 말 대중문화 속의 호랑이 사냥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일본연구 제48호 p. 64~67 [31] 에도시대 말 대중문화 속의 호랑이 사냥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일본연구 제48호 p. 67~72 [32] 에도시대 말 대중문화 속의 호랑이 사냥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일본연구 제48호 p. 73~74 [33] 그래도 그 당시 일본인들에 비하면 평균보다는 큰 키이다. 약 155cm 정도가 당시 일본 남성의 평균 신장이다. [34] 정확히 정문부의 의병이라고 지칭하지는 않고 조선 의병이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여진족이라고도 한다. [35] 이에 관해서는 조선 의병들이기에는 지나치게 사납다고 생각한 가토가 여진족이라고 우겼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어차피 함경도에서는 그동안 여진족과 크고 작은 교전이 계속 있었고 피가 섞였을 가능성도 있어서 사실상 함경도의 조선 의병이나 여진족이나 무장이나 전투력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고 외국인인 가토는 구분을 못했을 가능성도 높다. 일단 조선왕조실록에도 함경도의 의병이 아닌 여진에게 당한 것으로 적혀있어, 여진족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긴 한다. [36] 현대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이 인물도 선조실록 등 조선시대 기록에는 '흉악하고 교활한 자', '주륙해야 한다'는 등의 적개심 가득한 표현으로 서술된다. [37] 당시 조총의 기술력상, 조총부대는 철저하게 뭉쳐다녀야 했기 때문에 조총부대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한몸처럼 움직여야 했고 이는 엄격한 신분사회로 돌아갔던 일본의 군사제도를 정면으로 거슬렀던 행위다. #. [38] 말년에 학문을 익히기 시작하고, 마침 임진왜란으로 조선에서 빼앗아 온 서적이나 납치해 온 학자 등을 통해 소양을 기르기 시작한 마에다 토시이에가 권유하여서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도요토미 정권의 중신이자 사적으로도 도요토미 가와 친했던, 친한 삼촌 같은 존재 즉, 맹장형의 무인에게 권유 및 설득이 가능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기에 설득력은 있는 편이지만 자료가 워낙 적어서 진위는 불명이다. [39] 다케다 신겐 야마나시현의 스타가 된 것이나, 다테 마사무네 미야기현의 스타가 된 것과 비슷한 예다. 일본에서는 각 지역을 다스렸던 무장을 다루어 스타로 내세운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게, 이순신 장군의 외가가 있던 아산시가 이순신 기념사업을 추진했고, 경주시 역시 신라시대의 유물을 랜드마크로 내세우며, 공주시 부여군 백제시대의 유물을 랜드마크로 내세운다. 중국 또한 만주족 인구가 많은 북동부 지역(특히 베이징시[56] 동북3성)은 청나라의 만주족 인물들을, 몽골족 인구가 많은 내몽골 자치구 몽골 제국의 몽골족 인물들을 지역 스타로 내세운다. [40]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종전 후 논어를 읽으면서 유학을 공부한 것 때문인 듯하다. 다만 임진왜란 당시 가토군은 조선의 여러 문화재들(특히 불국사)을 마구 파괴했으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반만 맞는 말이다. 만약 구마모토시가 울산광역시가 아니라 경주시와 자매결연을 맺으려 했다면 구마모토시는 가토군이 불국사를 파괴한 것에 따른 업보 탓에 일언지하에 퇴박맞았을 것이다. [41] 비슷한 경우로 전라북도 또한 정유재란 당시 지금의 전라북도 지역을 침공한 다이묘들 중 한 명인 시마즈 요시히로 가고시마현의 지역 위인으로 홍보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고시마현이 전라북도 남원시 출신 도공인 심당길을 선조로 하는 심수관 가문으로 유명한 것 때문에 가고시마현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42] 가토 기요마사는 영어로 Kato Kiyomasa이다. 가토급 잠수함은 Gato라고 표기한다. [43] 기요마사가 아버지 기요타다(清忠)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절이다. [44] 원래 주지가 될 예정이었던 선대 주지의 후계자가 급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작 20대의, 그것도 외국인 젊은이를 차기 주지로 지명했을 정도이니 그의 능력도 사뭇 뛰어났었을 것이다. [45] 드라마 히데요시와 군사 칸베에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을 맡았다. [46] 원작 만화의 3권까지의 이야기를 영상화한 것이 영화 1작째이므로 아마도 원작에서도 등장할 듯하다. [47]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역. [스포일러] 미츠나리는 이에야스와의 전쟁이 벌어져서 자신이 죽는다면 가토가 대신 도요토미가를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49] 도검류를 쓰는 무장들은 고를 수 있는 무기가 많아 무기를 돌려가며 쓸 수도 있을 정도로 범용성이 좋지만 철퇴는 오로지 공격력만 좀 올려주는 '참철철퇴' 딱 하나 뿐이다. 그나마 공격력 향상 폭도 도검류보다 낮다. 도끼를 쓰는 우키다 히데이에도 구매할 수 있는 도끼는 딱 하나 뿐이지만 거기에 '만월 도끼춤'이라는 스킬이 달려서 유용한 편. 아사코도 비슷한 처지지만 고유 스킬이 제법 유용해 굳이 딜링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50] 고니시가 가토를 구원하는 것으로 미션 초반부가 전개된다. [51] 홍일점 포지션의 가상인물로 몇몇 기습 작전이나 암살 작전을 지휘한다. [52] 겉으로만 쌍검일 뿐이지, 실제로는 도검으로 무장한다.( 천하제일상 거상에는 도검류와 쌍검류라는 2가지 다른 계통의 무기가 존재한다) [53] 제대로 활용하려면 추가스텟을 주는 백의종군을 300까지 찍고 레벨 200이상에서 태황셋을 다 갖춘 후 오행기의 생사결까지 있어야 그나마 할 만하다. [54] 하지만 구마모토 출신인 기요마사와 달리 구시켄 요코는 오키나와 출신이다. [55] 가토가 사로잡은 조선의 왕자는 욘사마의 얼굴로 나와서 장동건 CF의 유명한 대사를 하는 등 한류 패러디 캐릭터로 표현된다. 한류에 약한 일본인 아줌마 시녀를 꼬셔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가토에게 원투 펀치를 얻어맞는다.


[56] 청나라 뿐만 아니라 원나라 명나라 때도 중국의 수도였던 곳이지만, 아무래도 오늘날 베이징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근대 중국 왕조가 청나라이다 보니 베이징에서 열리는 전통문화 관련 행사는 원나라나 명나라보다는 청나라와 관련된 게 훨씬 많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자금성에서 대여해주는 전통의상도 전부 청나라 의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