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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데루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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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토시이에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우에스기 카게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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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데루모토
毛利輝元(もうり てるもと)
파일:Mori_Terumoto.jpg
<colbgcolor=#683c34><colcolor=#fff> 출생 1553년 2월 4일
사망 1625년 6월 2일
1. 개요2. 생애
2.1. 가독 상속2.2. 오다 가문과의 싸움2.3. 도요토미 정권2.4. 세키가하라 전투2.5. 에도 시대
3. 여담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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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전기의 다이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 총대장으로 옹립되었다. 에도 시대 조슈번 초대 번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가독 상속

텐분 22년 (1553년) 음력 1월 22일 모리 모토나리의 적장자 모리 타카모토의 장남으로 아키의 요시다 고리야마 산성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고쓰루마루.

에이로쿠 6년 (1563년) 아버지 다카모토가 급사했기 때문에 11세에 가독을 승계하였다. 그러나 어렸기 때문에 조부 모토나리가 여전히 배후에서 실권을 쥐고 있었다.

에이로쿠 8년 (1565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로부터 글자 한자를 받아 데루모토로 개명하였다.[1] 같은 해 2차 갓산토다 성 전투에서 처음 전투를 치른다.

겐나 2년 (1571년) 조부 모토나리가 죽자 모리 료센[2]체제를 중심으로 중신의 보좌를 받아 친정을 개시하였다.

덴쇼 2년 (1574년) 우마노카미에 임관되었다.

2.2. 오다 가문과의 싸움

그 후, 데루모토는 주고쿠 지방의 패자에 올라 각지에 세력을 신장하였다. 조부 모토나리 때부터 적대세력이였던 아마고 가문과 오토모 가문과 전쟁을 벌였고 이들을 제압하여 규슈와 주고쿠 지방에 세력을 확대해 갔다.

하지만 덴쇼 4년 (1576년) 음력 2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축출된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비호하였고 더욱이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의 승려가 거병하자 혼간지 편에서 병량과 탄약을 원조함으로써 오다 가문과 대립하게 된다. 당시 오다 가문은 에치고의 강적 우에스기 겐신과도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리 가문은 오다 가문보다 병력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그래서 그간에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하였고 음력 7월 제1차 기즈키가와구치 전투에서 오다 수군을 상대로 대승리를 거두었다.

덴쇼 6년 (1578년) 음력 7월에는 고즈키 성 전투에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와 아마고 가문의 연합군과의 결전을 맞이 했지만 하시바 히데요시는 미키 성의 벳쇼 나가하루의 반란에 따라 미키 성으로 군대를 돌렸고, 고즈키 성에 홀로 남은 아마고 가문은 분전하지만 패배하였다. 이로써 아마고 가문의 잔당을 뿌리뽑았으며 오다 가문에 대해서도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음력 3월 우에스기 겐신이 죽었고 더욱이 음력 11월에 일어난 제2차 기즈키가와구치 전투에서 철갑선[3]을 전장에 투입한 오다 군에게 패배하였고 모리 수군은 섬멸되었다. 이후 전황은 모리 가문에 불리하게 되어갔다.

덴쇼 7년 (1579년)에는 모리 가문에 종속되어 있던 비젠의 우키타 나오이에가 모리 가문을 배반하고 오다 노부나가와 내통하였다.

덴쇼 8년 (1580년) 음력 1월에는 오다 군의 주고쿠 공략군 지휘관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끄는 군대가 미키 성을 함락하였고 벳쇼 나가하루는 자결하였다. (미키 전투)

덴쇼 9년 (1581년) 이나바 돗토리 성도 포위 공격에 따른 병량고갈로 항복하게 되었고 모리 가문의 장수 깃카와 쓰네이에는 자결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데루모토는 숙부들과 함께 출진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내통하고 있던 분고의 오토모 소린이 서쪽으로 공격해 왔으며 산인에서도 난조 모토츠구가 공격해오는 등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덴쇼 10년 (1582년) 음력 4월 하시바 히데요시는 모리 가문의 충신 시미즈 무네하루가 농성하는 빗추 다카마쓰 성을 공격한다. 공방전중 음력 6월 2일 교토 혼노지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일으킨 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오다 노부나가는 그곳에서 자결하였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죽음을 비밀에 붙이고, 모리 가문과 화친을 모색한다. 이로써 전황의 불리함을 느끼고 있던 데루모토와 화친하게 되었다. 결과 빗추 다카마쓰 성은 개성되었고, 화친의 조건으로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는 할복하였다.

2.3. 도요토미 정권

오다 노부나가 사후, 중앙에서 하시바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가 패권을 놓고 다투기 시작하자, 양측으로부터 아군이 될것을 요구받았지만, 최종적으로 중립을 유지했다.

덴쇼 11년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를 앞두고 히데요시 쪽에 승전을 비는 선물을 보냈다.[4]

시즈가타케 전투후, 패권이 히데요시에게 넘어가자, 자신의 숙부인 모리 히데카네와 사촌인 킷카와 히로이에를 인질로 보냈고, 신하의 예를 표했다. 그 후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덴쇼 13년 (1585년) 시코쿠 정벌, 덴쇼 14년 (1586년) 규슈 정벌에도 선봉으로 출진하였고, 무공을 세워 히데요시의 천하통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결과 히데요시로부터 주고쿠 6국 고쿠다카 120만 5천 석의 소령을 안도받았다.

덴쇼 17년 (1589년) 당시 교통의 요충지였던 오타 강 삼각주에 히데요시의 주라쿠 다이를 본떠 히로시마 성을 축성한다.

덴쇼 19년 (1591년) 오랜기간 모리 가문의 거성이였던 요시다 고리야마 산성을 버리고, 아직도 공사중인 히로시마 성으로 거처를 옮긴다.

분로쿠 원년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 때에는 자신의 주력부대를 파견했다. 이런 공적으로 게이초 2년 (1597년) 히데요시로부터 숙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와 함께 오대로에 임명되었다. 주로 후방 지역인 경상도에서 머물렀으며 요충지였던 성주목의 성주성을 점령하고 개령에 본진을 두어 성주성 전투에서 자신의 휘하 장수인 가쓰라 모토쓰나를 지원하여 3차례의 조선군의 탈환 시도를 막아냈지만 보급이 갈수록 줄어들면서 전세가 불리해져 성주성에서 철수하였다. 지금의 부산광역시 지역에 부산포왜성, 자성대 등을 쌓았고 지금까지 남아 있다.

본국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굶주린 조선 백성들이 일본군한테 가서 식량을 달라고 구걸을 했으나 일본군 병사들이 모조리 베어 죽이는 바람에 테루모토 자신도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고 한다. # 또한 조선 정벌도 이렇게나 힘든데, 지금 딸린 소수의 병력으로 히데요시가 주장하는 명나라 정벌은 불가능한 과업이라고도 편지를 쓰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정복이 성사되면 행정구역을 5개국(国)으로 재편하여 이중 경상도를 백국白国으로 하여 모리 데루모토에게 통치를 맡기려고 했다.

게이초 3년 (1598년) 음력 8월 히데요시가 임종을 맞이할 즈음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의 보좌를 부탁받았다.

2.4. 세키가하라 전투

게이초 5년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는 대립하였고, 드디어 무력충돌로 발전하게 되었다.

음력 6월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 토벌을 명목으로 군사를 일으켜 아이즈 지방으로 출진하자, 다음달 7월 이시다 미츠나리도 군사를 일으켜 이에야스와 맞섰다. 이때 미츠나리는 친구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의 진언에 따라 자신이 총대장에 오르지 않고, 이에야스와 필적할만한 실력을 가진 모리 데루모토를 서군 총대장으로 옹립하려 하였다. 모리 가문의 외교 승려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에게 설득된 모리 데루모토는 서군의 총대장 자리를 받아들였다.

데루모토는 음력 7월 17일 오사카 성 니시노마루에 입성하는 한편, 시코쿠에도 출병해 하치스카 이에마사의 영지를 공략한 뒤 가토 요시아키의 영지도 공격하나 가토군의 츠쿠다 카즈나리에게 패하여 무라카미 모토요시 등의 가신을 잃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음력 9월 15일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데루모토가 군을 이끌고 출진하기는 커녕 오사카성에서 움직이지 않았다.[5], 대신 친지인 모리 히데모토(데루모토의 삼촌 호이다 모토키요의 아들, 데루모토가 아들이 없어 잠시 양자로 들였었던 인물)와 킷카와 히로이에(데루모토의 삼촌 킷카와 모토하루의 아들)를 보내는 선에서 끝냈다.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의 패배를 예상한 킷카와 히로이에는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를 통해 본령의 안도와, 가문의 존속을 교섭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킷카와 가문의 군대가 모리 가문의 군대를 저지하는 결과가 되었고, 모리 가문의 군대는 싸워보지도 못하는 결과가 되었다.

전후 서군은 패배하였고, 음력 9월 24일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와 모리 히데모토의 주전론을 거부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전쟁을 할 뜻이 없음을 전했다. 그리고 오사카 성에서 퇴거하였다.

데루모토는 사형을 면하는 한편 영지 보전을 약속받고 주고쿠로 돌아갔지만 애시당초 이에야스는 그를 그냥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후, 그 약속을 파기하고 데루모토를 처형한 후 스오, 나가토, 빈고, 아키, 이와미, 이즈모 120만석을 완전히 몰수하고 영지 중 일부인 스오, 나가토 29만 8천 석을 자신과 내통한 킷카와 히로이에에게 주려고 했으나 이에 놀란 킷카와 히로이에는 이에야스와 담판을 지어 모리 가문의 존속과 히로이에 자신에게 돌아갈 영지를 모리 가문에 주는 선에 끝냈다.[6] 이로써 킷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 즉 종가를 배신했다는 오명을 쓰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을 대적한 죄로 누군가 하나는 본보기를 보여야 했는데, 킷카와 히로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안코쿠지 에케이를 지목하면서 "저 자가 우리 당주님을 부추겨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라며 고발하였다. 사실 킷카와는 도쿠가와 편을 들긴 했지만 심정적으로는 전에 가신으로 일했던 모리 데루모토 편이라 어떻게든 감싸주려고 했고 거기에 안코쿠지 에케이가 데루모토를 부추긴 건 사실이었기에 그를 희생양으로 내세웠던 것.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리 데루모토를 살려주는 대신, 안코쿠지 에케이를 자신을 대적한 죄로 처형하기로 한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자신을 대적한 주범 3인방인 안코쿠지 에케이와 더불어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를 로쿠조가와라에서 조리돌림한 후 목을 베어 버렸다. 모리 데루모토는 이렇게 죽는 안코쿠지 에케이를 보면서 모골이 송연했다. 물론 데루모토는 에케이를 희생시킨 덕분에 살아났지만. 그렇다고 모리가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서 서군 총대장으로서의 책임을 물어 영지의 4분의 3을 몰수당했다.

이후 모리 테루모토가 다스리던 영지는 4분의 1로 축소되어 재정은 파탄이 났다. 그러나 가신들을 추방한 일반적인 사례와는 달리 봉록을 삭감하는 대신 해고하지 않았다. 물론 영지가 줄었기 때문에 당장 가신들의 봉록을 5분의 1로 깎았고, 농업과 상업을 장려하며 긴축재정을 오랜 기간 유지한 끝에 10년 후에는 재정이 개선된다. 이런 점을 보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데루모토 역시 내정적으로는 나름 재능이 있었다. 게다가 데루모토 생전부터 적극적인 증산정책으로 석고가 크게 증가하였고, 데루모토가 말년에는 2배인 60만석까지 증가하였다. 다만 데루모토 생전의 석고 증가는 증산정책보다는 너무 과하게 영지민을 쥐어 짠 점이 컸기에, 너무 급격한 석고 상승이라는 점과 겹처 막부에서 조슈번의 공식적인 석고는 36만석만 인정해주었다.[7]

데루모토 본인은 이 일에 대해 매우 분하게 생각해서 이후 잠잘 때 발을 에도쪽으로 향하게 했다고 한다. 단 개인적 처신만 그렇고[8] 막부에 대해서는 충성하는 입장을 유지했다고 한다.[9] 비슷하게 대군을 이끌고 참전한 뒤 일가족이 유배당한 우키타 히데이에는 말할 것도 없고 동군에 참전한 가토 기요마사나 후쿠시마 마사노리조차도 개역을 당한 판에, 명목상이지만 서군 총지휘관까지 됐던 자의 가문이 지위를 유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10]

이러한 일련의 사건 때문에 모리 가문의 조슈 번은 도쿠가와 에도 막부에 대한 반감이 뿌리깊었고, 결국 2백여년 뒤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조슈 번의 역할이 매우 컸다.

2.5. 에도 시대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후 음력 10월, 모리 데루모토는 출가해 게안 소즈이라 불렀으며 가독은 적자인 모리 히데나리에게 양도하였다. 하지만 가문의 실권은 데루모토에게 있었다.

게이초 8년 (1603년) 데루모토는 에도로 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사죄하고, 다음해인 게이초 9년 (1604년) 나가토 국에 하기 성을 축성하여 거성으로 삼았다.

게이초 19년 (1614년) 오사카 전투에서 은밀히 중신 나이토 모토모리를 오사카 성에 보내 도요토미 가문을 지원하는 한편, 이에야스의 동군에도 참전하였다. 하지만, 모리 가문은 이 전투에서 소극적인 움직임만 보였다. 이후,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은 화의를 맺었고, 군을 철수 시켰다. 하지만, 도쿠가와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오사카 성을 재건하는 것을 구실삼아 다시금 군사를 일으켜 도요토미 가문의 오사카 성을 공격하였다. 이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모리 히데모토의 부대가 본대보다 선봉에서 도요토미 군을 상대했었다. 이를 계기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리 가문을 상찬(賞贊)했다.

오사카 전투의 군역과 에도성 건축에 참여, 에도에 번저를 짓는 등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빚어진 가문의 분열을 막고자 애를 썼다.

켄나 9년 (1623년) 모리 히데나리에게 정식으로 가독을 양도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간에이 2년 (1625년) 음력 4월 27일 하기의 시혼마쓰 저택에서 임종을 맞이하였다. 향년 73세였다. 이때 가신 나가이 모토후사가 순사하였다.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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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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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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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래 편휘를 받을 때는 통자(通字)가 아닌 아랫글자를 받는데, 모리 가문은 어마어마하게 헌금을 해서 쇼군가의 통자인 요시(義)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데루모토 본인이 편휘를 받은 요시(義)와 가문의 통자인 모토(元)을 합치면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죽은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같은 이름이 되는 것이 싫어서 테루를 썼다고 한다. [2] 모리 모토나리는 그의 아들을 깃카와 가문과 고바야카와 가문에 입적시켜 아키 호족들을 규합하였다. 료센은 은 한자로 양천(兩川)로 깃카와(吉川), 고바야카와(小早川) 두 성(姓)에 내 천(川)자가 들어가 이렇게 불려졌다. [3] 오다 노부나가의 명으로 구키 요시타카가 기존의 아타케부네에 방화용(防火用) 철판으로 배 전체를 둘렀다. [4] 사료가 남아 있지 않을 뿐, 카츠이에 쪽에도 승전을 비는 선물을 보냈을 가능성도 있다. [5] 이에 대해서는 요도기미가 오사카성의 안전을 위해서 출전을 막았다는 일화도 전한다고 하는데, 모리가문쪽 프로파간다 같기도 하다. [6] 도쿠가와는 킷카와 히로이에의 탄원(담판)은 물론 데루모토의 아들과 첩을 인질로 받고 나서야 그 선에서 마무리했다고 한다. 결국 사촌형을 구해주는 일이 오히려 오명을 얻었다. 그리고 사실 테루모토가 이에야스쪽에 붙었어도 감봉은 불가피할 수 밖에 없었다. 설사 동군쪽에 붙어 승리하여 영지가 늘어난다 하더라도 영지가 100만석 이상의 다이묘이라면 도쿠가와 막부도 경계할 정도이다. 아무래도 꼬투리를 잡아 감봉하거나 영지를 늘려주는 핑계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불모지로 전봉시키거나 개역시켰을 가능성이 크고, 오히려 30만석으로 확 줄어드는 바람에 제대로 건수 잡지 않는 한 더 줄일 명분이 없어서 그 뒤로 그냥 놔두게 됐다. [7] 사실 가신들의 봉급을 오래 깎을 수도 없어서 영지민을 쥐어짜서라도 봉록을 어느 정도 복구시켜준 감도 있다. [8] 사실 일본의 기록이 다 그렇듯이 이 역시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고 한다. [9] 그의 조카 히데모토가 도쿠가와 막부에서 쇼군의 말상대 역을 맡는 등, 다테 마사무네처럼 막부에서 원로 노릇을 할 정도였다. [10] 사실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개역을 당하거나 영지를 깎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석고가 곧 전투력으로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에도 막부 하에서는 군사를 키울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것. [11] 적과 내통한다는게 아니라 입이 너무 가볍다는 의미였다. [12] 구마가이 모토나오, 아마노 모토노부는 하기 성 축성 도중 발생한 절도 사건으로 마스다 모토나가와 갈등을 빚어 축성이 지연되자 이로 인해 둘 다 처형당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모리 영지 내의 가톨릭 신앙을 뿌리뽑기 위해 가톨릭 신자였던 모토나오와 그의 사위인 모토노부를 사건 하나를 빌미로 죽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구마가이 모토나오(세례명 멜키오르)는 2008년 11월 24일에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13] 모반을 꾀한다는 이유로 토벌하였다. [14] 오사카 전투가 있을 무렵 모리 데루모토는 나이토 모토모리를 오사카 성으로 보내 군자금과 병량을 지원하였다. 나이토 모토모리는 오사카 성에 입성할 때 사노 미치요시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전후 나이토 모토모리가 체포되어 모리 가문은 의심을 사게 되었고, 나이토 모토모리의 장남인 나이토 모토요시와 차남인 아와야 모토토요가 사건에 연좌되어 자결하였다. [15] 오죽하면 조슈 번의 새해 첫 회의에서는 가신들이 영주에게 '막부 타도(토막)의 건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어보고, 영주가 '시기상조이다'라고 말하는 관습이 있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현 당주에 의하면 후세의 각색에 의한 창작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