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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00:56:47

이마가와 요시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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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가와 요시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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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가와 가문의 가몬[1]

이마가와씨(이마가와 가문)와 이마가와 가문이 사용했던 가몬에 대해 자세히 알고싶다면 아래를 참조하자.

이마가와씨(今川氏) 일본어 위키피디아

今川義元(いまがわ よしもと)

(1519년 ~ 1560년 06월 12일)

1. 개요2. 생애3. 저평가와 실체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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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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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가와 요시모토 개인이 사용했던 문양 우산모양의 빗

도카이 제일의 무사(海道一の弓取り).[2]

일본 센고쿠 시대 당시 스루가 이마가와 가문의 제9대 당주.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5남으로, 어머니는 쥬케이니. 다케다 신겐의 매형이자 호조 우지야스의 처남. 아들은 이마가와 우지자네다.

2. 생애

1519년 아버지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5남(정실의 셋째 아들)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호기쿠마루(芳菊丸).

가문 내의 계승권 순위에서 밀리는 탓에 호기쿠마루는 5살에 절에 맡겨진다. 아버지인 '우지치카'나 아들인 '우지자네'의 이름에서도 보이듯이, 이마가와 가문의 후계자에게 주어지는 통자(通字)는 '우지(氏)'이다. 요시모토의 계승 서열이 밀렸다는 것이 이름에서도 드러나는 것.

호기쿠마루는 '바이가쿠쇼호(栴岳承芳)'라는 법명을 받고 이마가와 가의 중신인 승려 타이겐 셋사이(大原雪斎)를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다. 스승과 함께 자주 교토에 들려, 유력자들과도 친분을 맺고, 이마가와 집안의 외교관 역할도 했다.

그런데, 바이가쿠쇼호의 나이 18살 때, 아버지를 이어 가문의 당주가 된 큰형 이마가와 우지테루와 둘째 형 히코고로가 같은 날에 급사[3]하고, 정실의 아들로 적통을 가진 바이가쿠쇼호가 후계자 후보에 서게 된다.

이때 벌어진 후계자 다툼인 '하나쿠라(花倉)의 난'에서 마찬가지로 중이 되어 있던 서형 겐코 에탄(玄広恵探) 측을 격파하여 승리했다.

이후 환속해 쇼군으로부터 받은 '요시(義)'자를 이용하여 '요시모토'를 칭하여 당주 자리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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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주가 된 후에는 선정을 베풀고 주변국들과의 외교 관계나 세력 확장에 힘을 쓴 결과 도토미, 스루가, 미카와 3국을 가진 대영주가 되어 이마가와 가문의 최전성기를 이끌어냈다.[4]

요시모토는 본래 오와리의 영주로 무력이 뛰어났던 오다 노부히데와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버지 마츠다이라 히로타다가 가신 이와마츠 하치야에게 살해당한 틈을 타 전격적으로 미카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여 우위에 선다.

적대 관계였던 다케다 가문과도 동맹을 맺고 다케다 신겐의 누나인 죠케이인을 아내로 맞이하는데, 이것이 함께 다케다 가문과 맞서던 호조 가문과의 동맹을 깬 것으로 간주되어 호조 우지츠나와 전쟁 상태로 돌입, 후지산 근방의 영지를 두고 '제1차 카토(河東)의 난'이 벌어진다. 여기서 이마가와 측이 참패하면서 영지의 4분의 1을 잃게 된다.

하지만 우지츠나가 죽고 호조 우지야스가 가독을 승계한 뒤에는 관동을 지켜내는 데 여념이 없던 호조 씨의 사정상 자연히 이마가와 씨와의 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고, 호조는 다케다와 동맹을 맺었다. 다케다 - 호조, 다케다 - 이마가와 동맹이 맺어진 상태에서 호조 - 이마가와 사이에 다시 카토의 난이 재발하자, 두 가문과 친분이 있던 다케다 신겐의 중개로 호조 - 다케다 - 이마가와 세 가문은 전격적인 삼국동맹을 맺게 된다.

이마가와는 미카와, 오와리의 서쪽 방향으로 진출하고 싶어했으며, 다케다는 시나노와 에치고의 우에스기 가문 상대로 전력을 투입할 필요가 있었고, 호조 가문은 당장 관동의 오기가야츠 우에스기 씨와 코가쿠보(古河公方) 아시카가씨에 몰려 엄청난 열세였다. 즉 서로 싸워서 이득일 게 없었기 때문에 동맹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

이때가 이마가와 가문의 최전성기로, 이마가와 가문이 아무것도 신경쓸 것이 없이 오직 서진해서 오와리와 미노, 나아가서는 교토까지 차지해 천하를 노릴 수 있는 구도가 성립되었다.훗날 오다 노부나가가 상락할 때 오와리와 미노에 기반하여 롯카쿠와 미요시를 뚫고 올라간 걸 생각하면, 요시모토는 오다 노부나가 세력만 격파하면 오다의 상락 루트를 그대로 따라갈 수 있었던 것.[5] 물론 노부나가의 상락 시점과 비교해서 1560년 당시에는 기나이를 양분한 미요시, 롯카쿠 모두 상당히 강성하였다는 점은 감안하여야겠지만.

요시모토는 1560년 대대적으로 수만의 군사를 일으켜 오와리를 침공하는데,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패하여 괴멸적 타격을 입고 오다 노부나가의 수하[6]에게 살해당하였다.[7][8]

강성하던 가문은 대부분의 장수를 잃었으며 후계자인 이마가와 우지자네의 무능함과 다케다 신겐의 귀신 같은 통수(...)[9]에 힘입어, 센고쿠 다이묘로서의 이마가와 가문은 요시모토 사후 불과 수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다만 이마가와 가문 자체는 하타모토로 막부 말기까지 존속할 수 있었으나, 메이지 유신 시기에 남계 후손 단절로 끝내 가문이 없어지게 된다.

타이겐 셋사이에게 사사하여 5산[10]에서 수행한 만큼 학식과 지략이 뛰어났고, 완력도 세서 세 명이 힘을 합쳐야 겨우 드는 칼을 혼자 들 수 있었다고 하며, 신장공기의 묘사에 의하면 최후의 순간에도 자신을 급습한 오다의 무사 핫토리 고헤이타의 허벅지를 칼로 베어 중상[11]을 입혀 쓰러뜨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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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저평가와 실체

후세에는 오와리 침공 시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대군을 이끌고도 오다 노부나가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는 것으로 인해 정말 여러 매체에서 두루두루 갈굼받는다. '비만에 다리까지 짧아서 말에 오르지 못해 가마를 타고 다녔다', '쿄토의 귀족 문화를 동경한 나머지, 얼굴에 새하얀 화장을 하고 이도 검게 물들였다'는 등 외모부터 성격에 능력까지 전반적으로 비하가 심하다.

이러한 설의 근원은 메이지 정부라고 하는데, 에도 막부를 쓰러뜨리고 황실 중심의 국가 체제를 굳히기 위해 무가(武家)에 대한 비하거리를 찾던 중 눈에 띄인 것이 요시모토라는 설이다. 이마가와 가는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足利) 가의 친족이었고 아시카가 가문에서 후계자가 나지 않을 경우 키라 가문[12], 키라 가문에서 후계자가 나지 않을 경우 이마가와 가문이 이어받아 합법적으로 쇼군을 배출할 수도 있는 명가였으며[13] 그 아시카가 가는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인 미나모토 가문의 혈통이었다. 이렇듯이 당대의 대영주가 지방의 애송이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좋은 얘기거리가 되었고, 하는 참에 아예 외모를 포함한 능력 전반에 대한 과장된 비하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14]

애당초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무능했다면 자신보다 유리했던 여러 경쟁자를 제치고 가문의 당주가 되지 못했을 것이며, 미카와를 정복하고 스루가, 도토미, 미카와 3국을 아우르는 대영주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무로마치 막부가 천황을 배신하고 심지어는 ' 일본국왕' 책봉까지 받았다는걸 이유로 무로마치 막부 자체가 메이지 시대에 일종의 대역죄인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더더욱 카와치 겐지 계열의 아시카가 가문 일족들을 까내릴 필요가 있었다.

귀족 문화 동경을 포함한 높은 교양을 갖고자 하는 열망은 당시 거의 모든 다이묘들의 공통된 성향으로, 이는 영지 지배를 위한 필수 요소였다고 한다. 특히 일본의 중앙인 긴키 지역[15]에서 멀리 떨어진 후진 지역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강했는데, 지적 수준이 터무니 없이 낮은 지역의 특성상 합리주의적인 행동보다는 권위나 교양을 과시해서 가신들과 영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 통치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시모토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의 경우가 특히 과장되게 알려져 있는데 이 역시 역사의 패자에 대한 억울한 비판이 아닐까.[16]

게다가 실제 요시모토의 교양 수준을 분석한 연구가들에 의하면 당대의 유명 시인에게 와카를 직접 전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시를 짓는 실력은 처참했다고 한다. 이 점을 감안하면, 요시모토의 진짜 모습은 센고쿠 다이묘의 역할에 충실한 명군이며, 정치적 필요에 의해 교양이나 귀족문화를 배우려고 노력한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 귀족 취미에 빠져서 몸을 망쳤다는 평가는 완전한 창작이거나 축국 등 취미에만 몰두한 암군인 아들 이마가와 우지자네의 일화에서 옮아온 이야기.

이마가와 삽질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오케하자마의 기습조차 실제로는 우연히 본진 기습에 성공한 오다의 운빨[17]이었을 뿐,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잘못한 점은 딱히 없다고 여겨지고 있다.[18]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과소평가 받은 센고쿠 다이묘를 들 때 미요시 나가요시와 함께 항상 선두주자로 꼽히는 인물.

하지만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들을 보면 미요시 나가요시는 통솔, 지략, 정치가 90이 넘어 어느 진영에 가더라도 에이스 급이 될수 있고 일러스트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효웅 이미지로 제법 멋지게 바뀌었다. 반면 요시모토는 혁신에서도 별로더니 천도에선 더 이상하게 바뀌는 굴욕을 겪다가, 천도 파워업 키트에서야 비로소 얼굴이 훈훈하게 꽤나 훈훈한 이미지로 교체되었다. 다행히 창조에서는 아예 꽃미남으로 탈바꿈했고, 대지에서도 준수한 지장의 용모로 환골탈태했다. 후술한 NHK 드라마의 영향이다.

이렇듯, 구체제의 심볼이나 거만하고 우둔한 귀족 쯤으로 격하되기 일쑤인 요시모토는 사실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아 국력을 강화시킨 전형적 센고쿠 다이묘다. 가문 자체는 명가였다지만 이름에서부터 이마가와 가문의 적장자에게 주어지는 '우지'라는 글자를 받지 못하고 승려가 되어 권력 구도에서 내쳐졌을 만큼 가문 내의 지위가 낮은 편이었고, 갑작스럽게 적장자와 당주가 원인 불명으로 급사한 상황에서 재빠르게 환속하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움직여서, 이마가와 가문의 당주 자리를 놓고 벌어진 권력 다툼인 '하나구라의 난'에서 승리해 가문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만만찮은 능력을 선보였다.[19] 이후에도 자체적인 가법을 제정하거나 고소슨 3국 동맹을 맺고 미카와의 무력화된 마츠다이라 가문을 세력 내로 포섭, 신흥 강호 오다 가문과 치열하게 싸우는 등 상당한 국력 성장을 이뤘는 데다 개인적인 무예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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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에, 오케하자마 전투 450주년을 기념하여 동상이 세워졌다.옆에는 당연히도 오다 노부나가가 서 있다. 요시모토 입장에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최후일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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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사용하던 명검인 소우자 사몬지(宗三左文字)가 현존하며, 일본의 중요 문화재이다. 요시모토 사몬지(義元左文字)로도 불린다. 키나이의 무장 미요시 소조(미요시 마사나가)가 타케다 신겐의 아버지인 다케다 노부토라에게 선물한 것을 노부토라가 요시모토와 결혼한 딸의 혼수로 함께 보냈고, 요시모토가 이것을 몹시 애용했다고 한다. 요시모토가 끔살당한 이후 오다 노부나가에게 넘어갔고, 혼노지의 변 이후에는 혼노지 폐허에서 검을 발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그리고 오사카 공성전 이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어가 쇼군 가문에 대대로 내려와 지금에 이르는 복잡한 이력을 지녔다. 이마가와 요시모토 이후로는 쭉 일본을 호령하는 패자의 손에 있었던, 그야말로 게임이나 소설처럼 극적인 이력을 지닌 명검으로 유명.

이외에 오케하자마 전투 직후 이마가와의 가신이 오다 가문과 교섭을 해서 요시모토의 수급을 되찾아왔는데, 이때 쓰고 있던 투구도 되찾았다. 이 투구는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4. 대중매체

이마가와 요시모토/기타 창작물


[1] 아시카가 가문의 가몬과 유사한 이유는 이마가와 가문이 아시카가 가문의 친족이며 아시카가 가문 멸망시 쇼군직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을 정도로 명문가라 아시카가에게서 이 가몬의 사용을 허가 받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마가와 가문의 지파인 도토미 이마가와 가문의 시조 이마가와 사다요(법명인 료슌으로도 유명)는 과거 규슈에서 고려에서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정몽주를 면담하기도 했었다. 규슈 단다이와 규슈 9개국 중 8개국의 슈고를 겸임하던 사다요가 규슈를 떠나서 도토미로 전임된 것은 정쟁에 밀려서 일종의 좌천성 전봉이었다. [2] 弓取り의 뜻 자체는 직역하면 ' 명궁'이지만 실제로는 '무사'로 번역하는 게 맞다. 센고쿠 시대에 와서는 좀 시들했지만, 헤이안 시대의 무사들의 주 무기이자 상징이 이었기 때문에 '궁수'가 '무사'라는 일반 명사 취급을 받은 듯 하다. 오오스모 바쇼(프로스모 정식 대회)의 하루 경기가 다 끝난 뒤에 큰 활을 들고 도효에 올라서 활을 빙빙 돌리는 의식을 치르는 스모선수 또한 弓取り라고 부른다. [3] 상세한 기록이 없어서 독살설, 내분설, 암살설 등 온갖 설이 난무하는데 진실은 알 수 없다. [4] 이 3국은 나중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차지하여 간토로 전봉되기 전까지 도쿠가와의 본거지가 된다. 또, 전봉 이후에도 도쿠가와는 이 3국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아서 엄청난 힘을 갖게 된다. [5] 1560년에 오와리를 침공한 군사의 수가 상락에 도전할 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일으킨 군사로 일단 오와리를 점령하면 상락에 도전할 준비는 갖춰지는 것이다. 그리고 후술했듯이 노부나가의 전력은 이마가와보다 훨씬 처졌다. [6] 노부나가의 옛 신하인 오타 규이치(太田牛一)가 쓴 노부가나의 일대기 ' 신장공기([ruby(信長公記),ruby=しんちょうこうき)]'에 따르면 모리 신스케 요시카츠(毛利新介良勝)와 핫토리 코헤이타 카즈타다(服部小平太一忠). [7] 이 당시 1만의 병력을 모으는 것도 힘든 시대였다. 1만의 군사는 그야말로 농민까지 탈탈 털어서 나올 정도였다. 특히나 오와리는 농업과 상업은 발달했지만 군사력 자체가 강한 영지는 아니었다. 다만 정말로 숫자가 부족했다기보다는 워낙 오와리 자체가 방어할 곳이 많았기 때문에(지도를 보면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형태다.) 함부로 병사를 뺄 수 없었던 탓도 있다. [8] 이때 얼마나 양쪽 가문의 세력차가 컸냐면, 노부나가 측은 당주인 요시모토와 수뇌진을 몰살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긴다는 보장이 없어서 이마가와 측에 정중하게 요시모토의 수급을 반환했을 정도. [9] 당시 기준으로도 이게 문제가 된 것은, 요시모토의 부인이 되어 있던 신겐의 누나가 죽자 신겐은 동맹을 갱신하기 위해 요시모토의 딸을 자기 아들이자 후계자인 요시노부의 처로 새로 들이기까지 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돈독한 동맹을 정통으로 배신한 것이라 이 사건은 신겐의 신용을 무지하게 깎아먹었음은 물론 가문 내에 반란 사건이 일어나 후계자인 다케다 요시노부가 죽는 원인이 된다. [10] 교토의 5대 사찰. 당시의 사찰은 고급 학문의 중심지였다. [11] 허벅지는 현대에도 다치면 치료하기 어려운 급소 부위다. [12] 에도 시대에도 하타모토 가문으로 남는다. 일본에서 유명한 ' 추신구라'의 악역 가문이 바로 이곳. [13] 물론 아시카가 일문 안에 쇼군 되고 싶어 줄 선 사람이 쌨으니만큼 키라 가문이 증발하지 않는 이상 이마가와 가문에까지 그럴 기회가 찾아오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에초에 시부카와, 이시도 등 쇼군직 계승권을 가진 어일가(御一家) 집안들이 있었기에 키라 가문의 대가 끊긴다고 바로 이마가와가 쇼군직 계승권 1위가 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14] 거기다 이미가와 요시모토의 이미지가 추락하면 그를 쓰러트린게 커리어의 첫 시작인 노부나가와 요시모토에게 종속되었던 이에야스 역시 저평가받을 여지가 생긴다는 것도 있다. [15] 이 지역은 수도권인데다 전국 시대에서도 특히나 혼란스러웠던 지방이었던 탓에 워낙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 있어서, 그리고 수도인 교토와 가까운 만큼 존왕(尊王) 사상이 강한 동네라서 천황이나 쇼군을 진심으로 받들지도 않으면서 그들의 이름을 팔아서 권력을 잡으려 드는 야심가가 써먹을 권위나 교양 따위는 진작에 무시당하고 있었다. [16] 그러나 귀족적 교양에의 과도한 집착이 자신과 가문의 몰락을 초래한 것은 사실이라는 지적도 있다. 일본의 역사가인 아이다 유지가 <<패자의 조건>>이라는 저서에서 다케다, 호죠, 우에스기 모두 그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중앙 진출을 이루지 못한 이유로 후진 지역에서 출발하는 바람에 당주는 합리주의적으로 사고하고 있어도 가신단은 권위와 교양에 너무 얽매어 있어서 가신단을 자신의 의사대로 통솔하려면 전쟁과 행정에서는 별 필요도 없는 귀족적 교양을 숙련하는데 상당한 정력을 소모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17] 여기서 노부나가가 정보를 가져온 자를 최고로 포상했다며 정보에 주목한 노부나가를 논하곤 하는데, 막상 노부나가는 요시모토 본대를 기습하기 전 군을 격려하는 연설에서도 그 부대가 요시모토 본대가 아니라 군량 수송대로 착각하고 있었다, 하여튼 오케하자마 전투에 대해서는 어쩌다 이겼다는 쪽이 정론으로 굳혀져 가고 있다. [18] 이 기습에 대해 흔히 알려지기론 '낮은 분지에서 밥먹던 이마가와 군을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오다 군이 덮쳤습니다'인데, 실제론 높은 산에 올라가서 오다 군이 다가오는 것을 다 보고 있었는데도 발렸다는 기록들이 나오고 있다. 현재의 대세인 정면 공격설에 따르면, 오다 군과 이마가와 군이 붙었을 때 우연히 미칠 듯한 비바람이 불어서 전장이 혼란에 빠지고, 그 틈에 순식간에 이마가와 군의 본진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즉, 운빨 덕분에 정면 공격이 어쩌다 기습으로 변했다는 것 [19] 기존 막부의 체제에서는 명가였지만 여러 사정으로 실추된 그 권위를 재회복한 것은 동맹이자 경쟁자이던 다케다 신겐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