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치바나 무네시게 立花宗茂 (입화종무) (1567년 ~ 1643년) |
타치바나 가문의 가몬 나카무스비기온마모리(中結祇園守)[1] |
[clearfix]
1. 개요
서국무쌍(西国無双)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 타치바나씨 야나가와번(柳川藩)[2]의 초대 번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적극 가담하고도 목숨을 건졌으며 가이에키로 몰수당한 영지를 출중한 실력과 인품을 인정받아 막부로부터 돌려받고 다이묘로 복귀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출생과 유년기
1567년 타카하시 쇼운의 장자로 태어났다. 아명은 센쿠마마루(千熊丸)에서 야시치로(彌七郎)가 되었으며 원복 후 다카하시 무네토라(高橋統虎)를 칭했다. 일찍이 어렸을 적에 타치바나 도세츠의 청으로, 도세츠의 딸 타치바나 긴치요와 결혼함으로써 도세츠의 양자로 들어간다. 도세츠에게는 아들이 없어서 딸인 긴치요가 가독을 승계하였으나[3] 무네시게와 결혼시키면서 비로소 후계를 잇게 된다. 쇼운은 이미 아들의 비범함을 파악하고, 양자로 주지 않으려 했으나 도세츠가 아들이 없었고, 끈질리게 매달리며 간청하는 바람에 결국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4] 하지만 두 사람은 금슬이 좋지 않아 매우 사이가 나빴으며 자식 또한 없어서 장인인 도세츠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별거하게 된다.2.2. 빛나는 청년무장
1581년에 아키즈키가와의 싸움에 첫 출전하였으며, 도세츠와 쇼운이 이리저리 정벌에 매진할 때 타치바나야마 성을 지키며, 적군 8천을 화계로 격퇴하는 등 전공을 올린다. 1586년 친아버지 쇼운이 시마즈 가와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이와야성 전투 때도 쇼운을 상대로 싸워 지친 시마즈가를 공격, 2개의 성을 되찾는 공을 세웠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에 들어 히데요시의 규슈 시마즈 가 정벌 때는 '충의는 친제이[5]에서 으뜸이요, 무용 또한 친제이 제일이로고'(その忠義、鎮西一。その剛勇、また鎮西一)라는 칭찬과 함께 오토모(大友) 가문에서 독립시켜 자신의 직할 다이묘로 두었다. 영지는 야나가와 성[6], 고쿠다카는 13만석.2.3. 임진왜란 참전
히데요시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은 인물답게 임진왜란 때도 여지없이 참전하였는데,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휘하로서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여기서도 군사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명 장수 임호의 4만 군대를 모리 히데카네(毛利秀包, 1567 ~ 1601)와 함께 4천의 군대로 물러나게 했으며, 명 장수 고책이 5만을 이끌고 부산을 급습하자 고작 800명의 군사로 이들을 격퇴한다.벽제관 전투나 제2차 진주성 전투 등에서 승전했고, 정유재란 때는 조선 각지에서 일본군이 깨지는 상황에서도 뒷수습이나 구출 등에 동분서주했다. 제2차 울산성 전투에서는 1천 군사로 가토 기요마사를 구출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하기 위해 출전한 노량해전에서는 이순신에게 시마즈 요시히로와 함께 패배하지만 원래 목적인 고니시 구출에는 성공하였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무네시게의 3,000 병력은 다른 가문의 1만 병력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2.4. 비참한 몰락
그뒤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고, 서군 편에 섰지만 진로에 있던 오츠 성의 다이묘 쿄고쿠 타카츠구(京極高次, 1560 ~ 1609)[8]가 동군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이곳에서 발목이 잡혔고, 겨우 쿄고쿠 타카츠구의 항복을 받아냈으나 세키가하라의 본 전투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세키가하라에서의 패배의 소식을 듣고서 모리 데루모토에게 '오사카성에서 결사 항전'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영지로 돌아온다. 무네시게는 자신의 영토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위시로 한 동군 세력에게 대항하여 결사 항전하였으나, 구로다 요시타카와 가토 기요마사가 설득에 나선 끝에 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한편 시마즈 가문에서 원군을 보냈지만 무네시게가 항복한 후에야 도착했다.항복한 무네시게는 목숨은 건졌으나 가이에키(개역)당하고 평민 백수 신세가 되었다. 당시 무네시게의 처지는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거지나 마찬가지였는데, 쌀이 모자라 가신들이 죽을 만들어 바치자 그 때까지 유복한 생활을 해 온 탓에 '밥을 할 쌀이 모자라 죽을 만든다'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서(...) "물에 만 밥이 먹고 싶을 땐 알아서 물에 밥을 말 테니까, 이런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고 화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고 이렇게까지 몰락했는데도, 가신들이 봉록도 못주는 걸인 신세의 주군을 떠나기는 커녕 오히려 잡기로 돈벌이를 하여 주군의 생계를 도왔다고 한다. 그 중 하나인 토토키 츠레사다는 허무승이 되어 동냥질을 했는데 우연히 폭력배 3명과 시비가 붙었고 그들이 휘두른 칼을 맨손으로 빼앗아 모두 죽여버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그 와중에 마에다 도시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등 여러 다이묘들에게 가신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다만 잠깐 동안 가토 기요마사에게 식객으로 대접을 받으며 지내기는 했다.
2.5. 화려한 재기와 말년
위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워낙 충성심과 능력이 뛰어난 인재인지라 1604년에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소환되어 막부의 고쇼인반토(御書院番頭)[9]라는 직책과 고쿠다카 5,000석의 영지를 받았으며, 이에야스의 후계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오토기슈[10]가 되어 무츠국(陸奥国) 다나구라번(棚倉藩)[11] 1만석을 가증 받아 다이묘로 복귀한다. 이후 영지의 가증이 더해져 고쿠다카는 3만 5,000석까지 올라가게 되었고, 이때부터 무네시게란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오사카성 전투 당시에는 무네시게가 또 도요토미 세력에 합류할까봐 걱정한 이에야스가 일찌감치 설득하여 이에야스 휘하로서 모리 카츠나가 군과 전투를 벌였다. 1620년, 자신의 옛 영지인 치쿠고 야나가와를 다스리던 타나카 가문이 단절되면서 야나가와에 고쿠다카 10만 9,200석의 다이묘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 후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할 때도 활약해 왕년의 용맹을 과시하는 등, 다른 서군 소속 영주들에 비해 나름 괜찮은 말년을 보내고 최후를 맞는다. 향년 76세.
타치바나 무네시게는 평생 아들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친동생인 타치바나 나오츠구의 아들이자 조카 타치바나 타다시게(立花忠茂, 1612 ~ 1675)를 양자로 들여 자신의 뒤를 잇게 했다. 그리고 무네시게의 자손들은 폐번치현때까지 야나가와번을 다스렸다.
3. 일화
아래의 일화들을 보면 알 수 있듯, 친아버지인 타카하시 쇼운의 아들답게 대의를 매우 중시하는 대장부의 풍모가 있었다.- 히데요시의 큐슈 정벌에 참전하여 시마즈 가문 휘하의 어느 성과 대치 중일 때 후방에 있던 히데요시가 무네시게를 소환했다. 이에 무네시게는 상대방 성 측에 "지금 내가 급히 관백 전하를 뵈러 가야 해서 진을 비우니 뒤를 치지 마시오. 허면 귀공과 휘하들의 신변을 보장하겠소."라는 제의를 했고 적의 대장도 이에 응했다. 그리고 히데요시에게 가서 용무를 마친 무네시게는 곧바로 적군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요청했는데 당연하게도 이미 포위당한 적을 살려준다는 발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히데요시도 무네시게가 죽을 각오를 하고 계속 청하자 결국 그 성의 적군들을 모두 살려줬다고 한다.
- 히고 잇키 진압에서 무네시게가 세운 공을 히데요시가 크게 칭찬하며 사위(四位, 각부 장관급)의 관직을 내렸지만 무네시게는 "주가였던 오토모(大友) 가문이 오위(五位/각부 차관급)인데 가신이었던 제가 그걸 넘어서는건 도리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사양했다. 하지만 무네시게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던 히데요시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사위(四位)의 관직에 임명되었다.[12]
- 벽제관 전투 후 당시 군감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는 '그대가 이런 공적을 세우더라도 태합 전하께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공적으로 전달될 것이지만 나에게 부탁한다면 그대의 공으로 보고해 주겠다'고 제의를 했지만, 이를 들은 무네시게는 '있는 그대로 보고하는 것이 군감의 임무일텐데 부탁하면 잘 말해주겠다는 것이 무슨 말씀입니까?'며 쌀쌀맞게 대답하였다. 당시 오봉행중 한 사람이었던 미츠나리의 권세를 생각하면 무네시게의 강직함이 드러나는 일화이다.
-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동군으로 회유를 해봤지만 무네시게는 단호히 거절한다. 가신들로부터도 서군이 승리할 가능성은 낮다고 동군 참가를 진언받았음에도 "이전에 시마즈의 대군에 맞서 타치바나 산성을 지켜냈는데 오토모의 가신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태합 전하께서는 그 일을 크게 칭찬하시고 야나가와성을 하사하셨다. 이번 전투야말로 그 은혜에 보답할 기회이고 우리 타치바나 가문은 충절을 으뜸으로 삼아 나아갈 각오가 되어있다!"고 하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세키가하라에서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고 총대장이었던 모리 테루모토도 싸울 의지가 없자 무네시게는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큐슈로 귀환하는데 이때 친아버지 쇼운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원수인 시마즈 요시히로와 동행하게 되었다.[13] 이때 가신들은 '원수를 갚을 기회'라며 요시히로를 치기를 진언하였으나 무네시게는 "대의를 위하여 같은 깃발 아래 모였는데 옛 원한을 들춰내서 공격하는 것은 무사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했고, 직접 요시히로의 본진으로 가서 "옛 은원 관계는 잊은지 오래입니다. 함께 힘을 다해서 큐슈로 갑시다"라고 하여 잔뜩 긴장해있던 요시히로가 감동했다고 한다.[14]
4. 창작물에서
4.1. 경계선상의 호라이즌
타치바나 무네시게(경계선상의 호라이즌) 항목 참조.4.2.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노부나가의 야망 신생 |
노부나가의 야망 출진 |
타치바나 도세츠, 타카하시 쇼운의 뒤를 잇는 오토모의 자랑이자 전국구급 규슈의 맹장. 1587년 이후에는 야나가와 성의 다이묘로 등장한다.
13편 천도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95 무력 94 지력 68 정치 60 의리 97로 전형적인 무장형. 문제는 특기가 돌격지극인데 소속은 공성 병기 가문인 오토모나 족경 가문인 다치바나가에 속해 특기를 써먹기 곤란하다.
14편 창조에서는 통 / 무 / 지 / 정이 각각 91 / 95 / 81 / 62로 지략이 꽤 버프되었고 소소한 수치 변화가 있는 정도. 그러나 창조는 능력치 최고치가 100이므로 실질적으론 엄청나게 상향된 것이다. 창조에서는 가문별 특수 병과가 없어 제약이 사라진데다 잘 키우면 서국 무쌍이라는 전용 고유 특성을 습득할 수 있는 강력한 무장. 본인 고유성장형을 갖고 있으며, 여록[15]을 갖고 있어 성장도 빠르고, 통무지정 +3에서 호랑이, 통무 +4에서 야전명인, 지력 +10에서 공성, 통무 +16에서 서국무쌍을 얻는다.
본인 전법은 큐슈제일(鎮西一)[16], 혼다 타다카츠의 전법과 비슷한 관계로 난전에서는 최강(다만 타다카츠가 난전200/방어250 이라는 수치이나 무네시게는 난전250/방어100이므로 완전히 동일하다고 할 수 없다). 아내인 긴치요가 뇌신[17]을 가지고 있는데 뇌신과 타치바나의 조합은 강력하다. 일웹에서는 이 조합이 최강 조합이라는 카더라도 있고 확실히 이 둘만 있으면 대합전은 쉬워진다. 안타깝게도 긴치요는 일찍 사망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다이묘로 등장하며 본성인 야나가와 성 하나를 갖고 시작. 서군 소속으로 초반부터 연합이 걸려있으므로 원교근공과 전마제를 시행하면 금 수입은 충분하다. 연합이 유지되는 3년간 모리, 고니시의 원군을 이용해 구마모토의 가토 기요마사와 무라나카의 나베시마를 집어삼키면 본성 세개에 에이스급 무장 셋을 갖추게 된다. 그 이후엔 모리와의 동맹을 유지하면서 다치바나, 나베시마, 가토의 3강을 활용해 아리마, 고니시를 접수하고 시마즈와 정면대결로 가자. 큐슈제일만 믿고 회전으로 싸움을 걸면 가토건 나베시마건 시마즈건 큐슈에선 적이 없다. 초반엔 긴치요도 있지만 위에 서술된 대로 늦어도 1604년 경 사망한다.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가장 무서운 점(?)은 수명이다. 세키가하라 합전 정도만 되어도 전국 시대가 끝물이라 무용의 면에서 그다지 남는 사람이 많지 않다. 서쪽에선 가장 큰 적인 모리가에서도 통무 80이면 에이스인 수준, 오다 노부나가 생전에 웬 듣보잡 가문에도 평균 80짜리가 있었던 시대가 거짓말 같다.[18]
그러나 타치바나는 1610년에 동쪽의 혼다 타다카츠가 죽고 나도 30년을 더 산다. 날뛰는 영웅들이 파리 죽어나 말 그대로 시간과의 싸움을 다투는 후기 시나리오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시나리오에서 큐슈 지역의 에이스급은 타치바나, 시마즈, 나베시마, 가토 정도가 있는데 시마즈와 나베시마는 1619년까지 장수하므로 영감님들을 모시고 동쪽으로 달려보자.
최신작인 15편 대지에서는 마침내 무용의 상향이 극에 달해 98을 찍어 전체 4위가 되었고, 이는 군신과 일본 제일의 무사, 자신과 대비되는 동국무쌍 다음가는 수치이다..
4.3. 태합입지전 시리즈
아버지보다 능력치가 오히려 좋다. 전투쪽에 치중한 아버지와는 달리 내정 쪽도 어느 정도는 기능 레벨이 되고, 군학 / 기마만 3레벨인 아버지와 달리 족경 / 기마 / 철포 / 군학이 모두 3레벨이라 직위가 높아서 병사를 많이 맡길수만 있다면 전장에서 대활약 할 수 있다.4.4. 인왕
코에이 테크모에서 제작한 3인칭 액션 어드벤쳐 RPG 게임 인왕에서 등장한다. 처음에는 누에 다음의 보스로 상대하게 되는데 이 때는 켈리가 변장한 가짜. 직전에 싸웠던 누에보다 약한 수준이다.이후 서브미션 서국무쌍의 도전장에서 다시 싸울 수 있는데 이번에는 수호령까지 쓰며 굉장히 강화된 상태로 등장한다. 클리어하면 부부 라이켄을 획득 가능.
코에이에서 제작한 게임이라 그런지 위 항목의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의 일러스트와 복장이나 외모가 많이 흡사하다. 사실 코에이 게임이라서 라기보다는 인왕 내의 실존 인물 복장이 최대한 고증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긴치요와의 관계는 불임으로 인한 불화를 제외하면 금실이 굉장히 좋다고 묘사된다. 실제 역사상에서는 무네시게가 세키가하라에서 퇴패한 후 친제이성에 입성하자 성에 돌아가지 않거나 마야나가에 거처를 마련해 부부인데도 떨어져 사는 등 부부관계는 굉장히 소원했다. 성격차이라고 알려져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강력한 발도술과 공격력으로 플레이어를 압박하며 패턴을 숙지하지 못하면 꽤나 고전할 것이다.가장 유효한 전술은 기력을 다 쓰게 유도한 후 그로기를 시키고 파고들기로 대미지를 주는 것. 전투가 시작되기전에 쓸 인술이나 음양술을 쓴 후 멀리서 활이나 총으로 머리를 쏘면 넘어지는데 이때 달려가서 뒤에서 내려찍기 후 R1 2번 정도를 때릴수있는데 이러면 수월하게 시작할수있다. 정 어렵다면 플레이어 기준 맵 왼쪽의 바위를 이용해 기력 소모 및 빈틈을 노려보자.
4.5. 전국무쌍 시리즈
타치바나 무네시게(전국무쌍) 항목 참조.4.6. 전국 바사라 시리즈
타치바나 무네시게(전국 바사라) 문서 참조.4.7. 노량: 죽음의 바다
배우는 최정태. 해전 당시 왜군 후군장으로 나오며, 시마즈와 같이 관음포에 갇힌다.4.8. 명군이 되어보세!
한국의 대체역사 소설인 명군이 되어보세! 2부에서 나름 비중있는 인물로 나온다. 혼노지의 변에서 노부나가를 구한 대가로 규슈의 대영주가 된 히데요시의 신하가 되어 경인왜란에 참전한다. 하남벌 전투에서 위기에 몰린 사노부를 추격하지 않고 놓아주었고 이 일로 조선의 왕이자 주인공인 재석은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죽이지 않고 생포해서 회유하기로 마음먹는다. 논산 전투 이후 전세가 역전된 일본군이 철수할때 후위를 맡아 분투한다. 그러다 탈출하지 못하고 조선군에게 포위되나 히데요시가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도망친 것을 듣고 마지막 회유를 받자 결국 투항하고 신의를 저버린 히데요시를 벌하기 위해 조선의 편에 선다. 그리고 조선의 복수전인 을미동정에 참전하여 동생 나오츠구를 전향시키고 본성을 지키던 긴치요와 재회한다. 이때 히데요시가 긴치요를 탐하려 했다는 것을 듣고 분노를 드러낸 것을 계기로 부부 간의 정이 회복된다.전후 치쿠고 전역을 영지로 받고 도쿠가와의 에도 막부 대신 조선이 세운 규슈 괴뢰정부인 진서대장군부의 신하가 된다. 2부와 3부 사이에 진서대장군부는 폐지되고 조선 직할령인 북규슈 3젠을 제외한 규슈 지방은 에도 막부의 손에 들어왔지만 타치바나가는 여전히 감봉 없이 존속중이며 과거의 은혜를 잊지 않고 계속 친조선 성향의 번으로 언급된다.
[1]
무네시게가 쓰기 시작했고, 그 전에는 오토모 가문의 행엽문을 썼다. 임진왜란때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 가몬을 쓰기도 했다.
[2]
지쿠고국(筑後国)의 번이며 현재의
후쿠오카현
야나가와시(柳川市)
[3]
매우 드문 예이다. 바꿔 말하면 긴치요에게 그만큼의 재능이 있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4]
도세츠는 무네시게를 타치바나 가의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매우 엄한 교육을 했다고 한다. 그 일화로, 어느날 무네시게와 도세츠가 겸상을 하다가 무네시게가
생선의 뼈를 혀로 발라내는 모습을 본 도세츠는 매우 화내며 "계집 아이처럼 밥을 먹지 마라! 생선 머리부터 입에 집어넣고 뼈는 씹어서 삼켜라! 타치바나가를 잇는다는 녀석이 생선 뼈 하나 삼키지 못하다니 앞길이 훤하구나!"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5]
규슈의 별명.
[6]
양부 도세츠가 임종 당시에 공성하고 있던 성이기도 하다. 구 류조지령 치쿠고의 주도에 해당한다.
[7]
모리 모토나리가 무려 71세(!!)에 얻은 막내 아들이다(..)
[8]
히데요시의 측실 중 한명인 마츠노마루(일명 교고쿠도노)의 오빠로, 이 때 오즈 6만석의 영주였다. 총 3천의 병력으로 무네시게와 고바야카와 히데카네(모리 모토나리의 9남)등이 이끄는 1만 5천군을 세키기하라 전투 전날까지 잡아두는 공적을 세워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와카사 8만 5천석과 오미 7천석, 합계 9만 2천석의 영주가 되었다.
[9]
쇼군의 친위대장 직책인데, 쇼군의 신변의 총책임자라는 의미인지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는 자리였다. 그런데도 한때는 적이었던 서군의 다이묘인 무네시게에게 이 자리를 내린 것은 그만큼이나 이에야스도 무네시게의 인품과 능력을 믿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이에야스에게 서국무쌍인 무네시게를 등용할 것을 종용한 사람은 다름아닌 동국무쌍인 혼다 타다카츠였다고 전해진다.
[10]
주군이 다실에서 차를 마실 때 옆에 앉아 통치자에게 필요한 시사와 교양 지식 등을 재담 형식으로 전하는 측근. 주로 명망있는 승려나 절친한 가신이 맡는다. 무네시게가 과거 센코쿠 시대의 경험이 많은 인물이라 히데타다의 흥미를 끌어서 채용 되었다는 설이 있다.
[11]
지금의
후쿠시마현 히가시시라카와군 다나구라정
[12]
이때 큐슈에서 오위 이상의 관직을 지닌 가문은 오토모(大友), 류조지(龍造寺), 시마즈(島津) 셋뿐이었다. 오토모의 가신이었다가 이제 막 독립한 무네시게에게 이들보다 더 위의 관직을 내린 걸로 보아 히데요시가 얼마나 총애했는지 알 수 있다.
[13]
세키가하라에서 도쿠가와의 본진을 뚫고
퇴각하는데에는 성공했지만, 이때 남은
시마즈의 병력은 수십명 뿐이었고 그나마도 멀쩡한 병사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14]
사츠마에 도착한 후
요시히로는 무네시게를 지원하기 위해 원군을 보냈지만 무네시게는 이미
카토 키요마사에게 항복한 뒤였고 오히려 무네시게가 나서서 카토와 시마즈를 중재했다.
[15]
내정만 해도 통솔, 무력이 오를 수 있단 의미다.
[16]
영문판으로는 Western Ace,
[17]
부대 주변 일정범위 내 적부대의 이동 -50%, 방어 -50%
[18]
실은 사나다 가문도 초기 시나리오를 보면 딱히 주변 가문에 비해 대단하진 않다. 다만 후기 관동에서 유키무라보다 더 쌘 애가 없어지는 것 뿐이다. 그나마 유키무라도 15년에 죽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