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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23:20:22

징비록(드라마)/역사적 사실과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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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진왜란 발발 전
1.1. 제1회1.2. 제2회1.3. 제3회1.4. 제4회1.5. 제5회1.6. 제6회1.7. 제7회1.8. 제8회1.9. 제9회1.10. 제10회1.11. 제11회1.12. 제12회
2. 임진왜란 발발 후
2.1. 제13회2.2. 제14회2.3. 제15회2.4. 제16회2.5. 제17회2.6. 제18회2.7. 제19회2.8. 제20회2.9. 제21회2.10. 제22회2.11. 제23회2.12. 제24회2.13. 제25회2.14. 제26회2.15. 제27회2.16. 제28회2.17. 제29회2.18. 제30회2.19. 제31회2.20. 제32회2.21. 제33회2.22. 제34회2.23. 제35회2.24. 제36회2.25. 제37회2.26. 제38회2.27. 제39회2.28. 제40회2.29. 제41회2.30. 제42회2.31. 제43회2.32. 제44회2.33. 제45회2.34. 제46회2.35. 제47회2.36. 제48회2.37. 제49회2.38. 제50회

1. 임진왜란 발발 전

1.1. 제1회

1.2. 제2회

1.3. 제3회

1.4. 제4회

1.5. 제5회

1.6. 제6회

1.7. 제7회

1.8. 제8회

1.9. 제9회

1.10. 제10회

1.11. 제11회

1.12. 제12회

2. 임진왜란 발발 후

2.1. 제13회

2.2. 제14회

2.3. 제15회

신립이 패전한 보고가 이르자, 날은 벌써 어두워졌는데 사약(司鑰)이 나와 빈청으로 달려와서 상께서 대신들을 만나고자 하신다고 말하기에 나는 수상과 함께 따라 들어갔다. 몇 겹의 문을 지나서 어느 빈 행랑에 이르렀는데, 상께서는 호롱불을 켜놓고 바닥에 앉아 계셨으며 종친인 하원군(河源君) 하릉군(河陵君)이 곁에 있었다.
대신이 아뢰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렀으니 어가가 잠시 평양으로 가시어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회복을 도모하소서."
장령 권협(權悏)이 임금의 무릎 가까이까지 나아가서 임금의 옷깃을 당기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도성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나는 사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는 아뢰었다.
"여러 왕자들을 각 도로 나누어 보내어 사방에서 군사를 불러모아 나라의 회복을 도모하고, 상께서는 동궁과 잠시 서도(西道)로 가셔서 적군의 예봉을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권협은 잇달아 외쳤다.
"좌의정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경성을 버려도 된다는 것입니까?"
나는 아뢰었다.
"권협의 말은 매우 충성스럽지만, 사세가 이와 같으니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 징비록, 임진호종기
성 안의 백성들과 공사노비나 서리, 내의원 · 전의감 ·혜민서 관리들을 뽑아 성가퀴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지켜야 할 성가퀴는 3만여 개인데 성을 지킬 사람은 겨우 7천 명이었을 뿐만 아니라,[26] 모두 오합지졸이어서 성벽을 넘어 달아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상번해 있던 병사들도 비록 병조에 소속은 되어 있었지만, 아전들이 결탁하여 농간하며 뇌물을 받아 사사로이 달아나게 한 자들이 매우 많았다. 관원들은 그들이 갔는지 남았는지를 따지지 안았으므로 급한 상황을 맞아 전혀 쓸모가 없었으니, 군정의 해이함이 이에 이르렀다. ─ 징비록

2.4. 제16회

2.5. 제17회

{경상우수영 구원 문제에 대한 논박}
*전라좌수사 수군 장수들이 세력이 약하니 전라도 방비에 주력해야 한다는 측과 경상도를 구원해야 한다는 측으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다 이순신이 우리가 지켜야 할건 조선의 바다다 하고 경상 해역으로 출동하는데 이순신을 급하게 등장시키면서 전쟁 발발 이후의 행적을 압축시키느라 만들어진 장면으로 사실이 아니다. 이순신을 포함한 모든 조선 장수는 공무원이고 관할 구역 밖으로 넘어가려면 조정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임진장초에 의하면 이순신은 4월 27일 선전관 조명을 통해 원균을 구원하라는 좌부승지의 서장을 받았다.(이 서장은 4월 23일 작성되었다.) 그래서 예하 장수들에게 29일까지 집결하도록 지시하고 30일날 출항하려 했으나 29일 자시(子時)에 우수영이 함락되었다는 원균의 공문이 도착한다. 이 시점에서 전라좌수영 장수들이 고심한 부분은 전라좌수영 단독으로 출동하느냐, 세력이 2배 가량 큰, 그러나 30일 출발한다는 공문만 보낸채 도착하지 않고 있는 이억기의 전라우수군을 기다려 함께 출동하느냐 였지 경상도로 출병하는 건 이미 결정된 사안이었다. 이때 상황이 급하니 단독으로 출병해야 한다 가장 강하게 주장한 장수가 녹도만호 정운이다. 이순신은 이억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다 판단해 이억기에게 빨리 뒤따라오란 공문을 보내고 5월 3일 출항한다. 드라마에서는 분명히 김민진이 분한 수군 장수가 5월 시점에서 경상도 출병 자체를 반대한다. 위에 설명한 선조의 개성 도착 시점(5월 1일)과 정철의 복직시점(5월 2일)을 보자. 국조보감의 1차 출병 부분은 상기한 행적들을 요약, 정리해서 간략하게 기록한 것이므로, 상세 행적은 날짜별로 정리된 임진장초와 난중일기가 우선되어야 하는 게 맞다. 작중에 이름은 표시되지 않으나 난중일기에서 소극적이었다고 언급된 낙안군수 신호를 모티브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론1}
*전라좌수사 수군 장수들이 세력이 약하니 전라도 방비에 주력해야 한다는 측과 경상도를 구원해야 한다는 측으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다 이순신이 우리가 지켜야 할건 조선의 바다다 하고 경상해역 출동을 선언하는데 이는 국조보감에 그대로 나와있는 내용이다. 송희립과 정운의 대사도 국조보감에 서술된 그대로 이다. 김민진 배우가 맡은 배역은 국조보감에 이름은 안 나온다. 하지만 김민진 배우의 대사도 출정반대인물로 국조보감에 그대로 나온다. 국조보감도 엄연히 검증받은 공신력 있는 사료인 만큼 작가가 국조보감 내용을 그대로 극으로 옮긴다고 왜곡이라고 할 수는 없다. 국조보감은 그 자체로 사실성을 갖춘 사료지, 임진장초와 난중일기를 요약한 책이 아니다. 국조보감이 요약본이라는 근거는 없다.
{반론2}
*사실 임진장초와 난중일기에는 제장들과 논박을 벌인 부분은 기술되어 있지 않다. 경상우수영 구원문제관련 논박내용은 역사칼럼니스트 신호영과, 이순신 연구가 조성도가 이미 과거에 했던 분석내용이다.
*우선 해당내용을 난중일기 부터 살펴보면
*임진년 (1592년) 해당 일기
*4월 15일 ~4월 22일: 이순신이 임진왜란 발발 처음 보고받음~전투정황 및 경과 기록임.
*4월 23일 ~4월 30일: 일기가 없음
*5월 1일 : 수군이 모두 앞바다에 모였다. 모두 분격해 제 한 몸을 잊는 모습이 실로 의사들이라 할 만하다.
*5월 2일 : "3도 순변사의 공문과 우수사의 공문이 도착했다.하나같이 왜적에 대한 소문만 듣고 달아나 버렸고,
군기(병장기)도 버려 남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자고 약속했는데,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내비쳤다. 그런데 낙안군수만 피하려는 것
같아 안타깝다.
*5월 3일 : 경상우수사(원균)의 화답이 왔다.이억기도 전투에 오기로 약속했다. 첩입군이 오는 것을 보고
우수사(이억기)가 온다고 기뻐 했으나 방답의 배였다. 녹도만호(정운)가 "우수사(이억기)는
오지 않고 왜적은 다가오니 분기를 이길 길이 없고, 기회를 놓치면 후회를 해도 소용 없습니다."
이에 곧 이순신(입부, 무의공)을 불러 내일 떠날 것을 명하고 장계를 썼다.
*5월 4일 : 새벽에 출항해 미조항에 이르렀다.
*제장들이나 상관들과 의논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음 이순신과 제장들의 의지만 보여주고 있음
{반론3}
옥포해전 출정전 임진장초 내용-너무 장문의 장계라서 해당사항만 발췌. 실제 임진장초를 보면 옥포해전 출정전 장계는 내용이 다 전황보고이다.
1592.4.27
주장으로서 홀로 처리할 수 없어 이광, 곽영, 최원에게 내용을 설명하고 화답했다.
1592.4.30
소속 중위장들에게 지시사항을 분명히 했다.
1592.5.4
출전전 준비사항 상세보고 내용
이순신의 장계와 조정의 출전명령 유서는 임진장초와 선조실록에 자세히 나와있으니 참고
제장들간 논박이나 설전한 내용은 기술되어 있지 않다. 이순신이 제장들에게 한 지시사항이나 상관에게 전황보고한 것을 선조에게 장계로 올리고 있다.
* 이산해가 류성룡을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고 평하는데, 정작 극중에서 파천할 때 민본적이상의 명분을 내세우며 가장 반대하는 인물은 류성룡이다. 사실 이 부분 뿐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들이 류성룡을 평하는 장면들을 보면 류성룡의 극 중 행적과 극 중 평가가 일치하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는 평도 있다. 하지만 당대 왕의 파천에 대해 마냥 후일을 도모한다는 긍정하는 여론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방화범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지만 경복궁과 창덕궁이 전화를 입은 것도 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 전주와 마찬가지로 류성룡이 자꾸 싸우자고 하고 왕이 백성들을 믿지 않고 도망가려고만 한다고 까는데 실제로는 파천 호종에 충실했던 이가 류성룡이었다. 오히려 윤두수가 더 현실주의자로 보일 정도. 게다가 류성룡의 발언들은 세자가 있으니 선조는 죽어도 된다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본인은 물론 세자의 안위까지 장담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수위의 발언이다.
* 본래 5월 2일 개성에서 정철의 복직이 결정되었으나 드라마상에선 그보다 늦게 이뤄졌다.
* 한양에 입성한 고니시 소속 왜군들이 버려진 주막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국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쓰는데, 일본은 숟가락보다 젓가락을 주로 쓴다. 또 그 이전에 국밥은 조선 요리지 일본 요리가 아니다.
* 김충선은 김수가 아닌 경상좌병사 박진에게 귀순했다. 그리고 군사 3천을 거느리고 투항한 것으로 나오는데, 기록상으로는 그렇지만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3천 정도를 총지휘하려면 최소한 10만 석 이상의 영지를 가진 다이묘 급이어야 하고 이 정도 인물이 투항했다면 일본 측 기록에도 어떤 식으로든 남아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것이 전혀 없기 때문.

2.6. 제18회

*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관할 구역인 전라도만 지키기 위해 합류하지 않은걸로 그렸다. 이억기는 기상악화와 이에 따른 연락두절로 옥포해전에 참전하지 못한 것이다. 이억기는 1592년 6월 4일 당포에서 이순신과 합류했다. 다음날인 1592년 6월5일 1차당항포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이억기가 옥포해전에서 안 나온 것은 맞다. '''이억기는 제 1차 당항포 해전 때 이순신과 합류하고 해전에 첫 참여했다.
* 이순신의 전술을 800보(1km 이상)안에 들어오면 화포로 공격한다로 정의했는데 조선 수군주력 화포는 지자와 현자, 그 중에서도 현자총통이며 해상에서는 롤링, 요잉, 피칭같은 온갖 흔들림이 일어나 육지보다 유효사거리가 짧아진다. 절강병법이나 이를 조선실정에 맞춰 받아들여 조선 후기 병서의 기본이 되는 병학지남에선 해상에서의 화포 사격거리를 200보로 잡았다. 그나마 이것도 왜란시기부터 시도한 새로운 화약 제조법을 중국에서 들여오는데 성공하고 동차가 개발된 조선후기 병서다. 즉, 동차도 없이 육전에선 흙을 쌓아 포를 거치하고 수전에선 아예 거치수단을 알 수 없으며 화약 제조법이 시간과 노력이 많이들었던 임진왜란기 화포 사격거리는 이 200보다 더 짧았으면 짧았지 길었을 가능성은 없다. 즉, 드라마는 사거리를 최소 4배가량 뻥튀기했다. 게다가 사통장치가 없이 인력에 의지해야 하는 총통류가 쏜 다고 맞을 수도 없고 조선군은 화약 보유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포격전 위주 해전은 불가능했다. 화약이 부족하니 실사격 훈련도 적을 수밖에 없고 이는 다시 포수의 숙련도의 한계로 이어져 최대 유효사거리를 살리는 것도 쉬운게 아니었다. 일본쪽 기록인 고려해전기의 안골포 해전 부분을 보면 조선수군은 왜선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대장군전을 쏴갈겼다. 철저하게 원거리에서 공격하다 끝난 부산포 해전조차 정운이 조총사거리 안에 들어가 있었다.

2.7. 제19회

나는 "지금의 상황은 앞서 한양에 있을 때와는 다릅니다. 한양에서는 군대와 백성들이 무너져 버려서 도성을 지키려 하여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은 강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고 민심은 매우 굳건합니다. 또한 중국과 가까우니, 만약 며칠만 굳게 지키면 명나라 군대가 반드시 와서 구원하여 줄 것이니 그 힘을 빌려서 적군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의주에 이르기까지 의지할 땅이 없으니 결국 나라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좌의정 윤두수가 내 의견에 동의하였다.

(余曰: "今日時勢, 與前在京城時有異. 京城則軍民崩潰, 雖欲守之, 末由也. 此城, 前阻江水, 而民心頗固, 且近中原地方, 若堅守數日, 天兵必來救, 猶可藉以卻賊. 不然, 從此至義州, 更無可據之地, 勢必至於亡國." 左相尹斗壽同余議.) ─ 징비록

2.8. 제20회

2.9. 제21회

2.10. 제22회

2.11. 제23회

*1559년 6월 16일자 명종실록 기사에선 화포운용에 대해 적선가까이 다가가서 쏘라고 명시하고 있다. 고려해전기같은 일본 기록에서도 10m안쪽으로 접근해서 쏘았다. 애초 소구경(6~7cm) 현자총통이 주력 화포라 그걸로 적선을 격침시키려면 화약이 너무 많이 들었다. 1598년 흥양현감 최희량이 이순신에게 올린 보고서에는 통제영에제조해 보낸 무기목록이 있는데 대형탄환보다 인명살상용 소형탄환이 절대적으로 많다. 마지막으로 조선군은 화약이 부족했다. 임진년부터 이순신이 열심히 제조해 원균에게 인계할 때 겨우 4천근 이었다. 그리고 조선수군은 조선인 포로 한명 구출을 적의 수급획득가 동일하게 여겨 왜선에 도선 후 수색, 전투를 벌였다. 임진장초를 보면 옥포해전부터 꾸준하게 도선 기록이 나오며 특히 한산도 해전은 사도첨사 김완이 직접 왜장과 일기토를 벌여 승리한 도선 백병전이 가장 잘 나타난 전투다. 정리하면 조선수군은 화약이 부족으로 대량사용이 불가능했다. 판옥선의 높은 선체를 성처럼 활용해 궁시류를 주력무기로 썼고 화포는 보조무기로 적선이 아닌 인명살상이 주된 용도였다. 궁시와 화포로 갑판위의 전투원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도선해서 수색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잔존한 왜군과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는 세계해전사를 살펴봐도 자연스럽다. 대포가 해전의 주력이 되어 포격으로 적선을 두들기는 건 전열함 시대에나 가능한 일이었고 임진왜란 약 20년전에 벌어진 레판토 해전처럼 근접해 화살이나 화승총을 쏘면서 필요할 때 포격을 섞어주는 게 16세기의 해전이었다. 헌데 3분간 화포만 쏘다 끝내버려 원거리에서 화포로 다 해결했다는 조선 수군에 대해 사실과 다르게 나온다.
*군사들은 창, 칼, 활, 화살 등을 가지고 저마다 죽을 힘을 다해서 추격하여 머리 43급을 베고 왜선 전부를 불살라 버린 뒤에, 짐짓 배 한 척, 남겨둔 채 왜적들의 돌아갈 길을 개방해 두었으나, (중략) 왜선에 포로된 우리 나라 사람을 찾아내어 생환하게 하는 것은 왜적의 목을 베는 것과 다름이 없으므로 왜선을 불사를 때에는 각별히 찾아서 구해내고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지시하고 약속하였습니다. - 임진장초, 당항포해전
*여러 장수나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을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마구 발사하니, 그 형세가 바람과 우레같아 적의 배를 불사르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거의 다 해버렸습니다. 순천 부사 권준이 제몸을 잊고 돌진하여 먼저 왜의 층각대선 1척을 깨뜨려서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고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10급을 베고, 우리나라 남자 1명을 산채로 빼앗았습니다. 광양 현감 어영담도 먼저 돌진하여 왜의 층각대선 1척을 깨뜨려 바다 가운데에서 온전히 사로잡고 왜장을 쏘아 맞혀서 신의 배로 묶어왔는데, 문죄하기 전에 화살을 맞은 것이 중상이고 말이 통하지 않았으므로 즉시 목을 베었으며, 다른 왜적을 비롯하여 머리12급을 베고, 우리나라 1명을 산채로 빼앗아 왔답니다. 사도 첨사 김완은 왜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에서 온전히 사로잡아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16급을 베었고, 흥양 현감 배흥립이 왜 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에서 온전히 사로잡아 머리 8급을 베고, 또 많이 익사시켰습니다.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은 왜대선 1척을 바다가운데에서 온전히 사로잡아 머리 4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2척을 쫓아가서 깨뜨리고 일시에 불살랐습니다. [29]- 임진장초 한산해전
*여러 장수들은 한층 더 분개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어 돌진하면서 천ㆍ지자 총통에다 장군전ㆍ피령전ㆍ장편전ㆍ철환 등을 일제히 발사하며하루 종일 교전함에 적의 기세는 크게 꺾였습니다. -임진장초, 부산포 해전
*화살 사거리 안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한 안골포 해전이나 위의 부산포 해전 전투내용을 살펴보면 조선수군은 화포 운용시 궁시류와 사거리 차이를 크게 두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사통레이더도, 계산기도 없었다. 흔들리는 바다위에서 사격제원을 정밀하게 계산해서 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협차사격이라고 일단 쏴보면서 정확한 제원을 찾아야 했는데 초석이 나지 않고 염초 제조도 손이 많이갔던 16세기 조선의 수군은 화약이 풍부하지 않았고 주력 화포인 현자는 적선을 격침시키려면 명중탄이 굉장히 많이 필요했다. 그런 상태에서 최대한 효율을 뽑아내려면? 적선이 아니라 적 전투원 무력화를 최선의 목표로 삼고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서 쏜다.

{한산도 대첩 백병전에 대한 반론}
*한산도대첩에서 조선수군은 조선인 포로 한명 구출을 적의 수급획득가와 동일하게 여겨 대첩이 끝난 후 왜선을 나포해 도선했다. 임진장초를 보면 임진년 해전에서 도선 기록이 나오지만 이는 대첩이 끝나고 배를 나포하는 과정이었지 일본군과 백병전을 벌인것이 아니다.조선군이 백병전을 벌이지 않았음은 임진왜란 관련 논문 및 연구서에서 널리 인정받은 통설이다. 이에 대해서는 임란왜란해전사 권위자인 이민웅교수가 연구저서에서 자세히 밝혀 놓았다. 한산도 해전은 사도첨사 김완이 직접 왜장과 일기토가 잘 나타난 전투이기도 하다.[30] 거기다 조선수군의 함포거리는 200보로 정해져 있지 않다. 원거리포격인가, 200보내 포격인가는 아직 논란이 끝나지 않았고 이견도 많다. 총통과 화포는 그 기능에 따라 사정거리에 따라, 전투를 수행할 때 각 기능에 따라 함포를 사용해 효율적인 전투를 하였다.

2.12. 제24회

2.13. 제25회

2.14. 제26회

2.15. 제27회

2.16. 제28회

2.17. 제29회

2.18. 제30회

2.19. 제31회

2.20. 제32회

2.21. 제33회

2.22. 제34회

2.23. 제35회

2.24. 제36회

2.25. 제37회

1593년 조선은 물론 요동에도 기근이 들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지경이라 제대로 된 보급소요를 기대 할 수 없었고 결국 강남 등 본토지역이 그 부담을 고스란히 지게 되었다. 5만을 파병하면서 누적된 전비는 명의 국가 총예산을 가볍게 넘기고 있었다. 때문에 1593~94년간 조명관계 최대 화두는 어떻게든 발 빼고 싶은 명과 무슨수를 써서든 명을 잡아두려는 조선의 외교전이었지 단순히 조선왕을 갈아치우려는 암약 따위가 아니었다. 명의 어려운 사정 역시 후에 만력제와 석성의 대화에서 살짝 드러나긴 한다(41화)

2.26. 제38회

2.27. 제39회

2.28. 제40회

2.29. 제41회

2.30. 제42회

2.31. 제43회

2.32. 제44회

유성룡(柳成龍)이 아뢰기를,
“김덕령은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으니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마는 여러 역적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린 다음에 의논하여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적부터 역적을 다스리는 일은 반드시 문서를 기다려 본 다음에야 다스렸던 것은 아니었다. 여러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는데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상황이 이러하니 반드시 살게 될 수는 없겠습니다마는, 그래도 차차 따져 물어 실정을 얻어내야 합니다.” - 선조실록 1596년 8월 4일
며칠 후 김덕령 휘하에 있던 최담령을 친국할 때도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전략) 유성룡(柳成龍)이 아뢰기를,
“역적들의 공초에 많이 나온 자가 김덕령이어서 마땅히 추문(推問)해야 하겠지만, 여러 죄인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처결하는 것이 가하겠습니다.” (중략)
“김덕령은 송유진(宋儒眞) 때에 자주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었으나 그때는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또 한현(韓絢)의 초사 속에 나왔으니, 이는 의심할 만한 일입니다.” (중략)
유성룡이 아뢰기를, “만일 엄하게 형신(刑訊)을 가한다면 먼저 죽어버릴 염려가 있습니다. 머물러 두고 기다렸다가 추문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우선은 형벌을 정지하고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 선조실록 1596년 8월 8일
김덕령 관련해서 류성룡에게 가장 우호적으로 적힌 기록이 선조실록인데 여기서도 류성룡은 김덕령을 살려주려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명백히 의심하고 있었고 단지 관련자들이 모두 압송된 다음 본격적인 심문을 시작하자 주장했을 뿐 이다. 또한 1604년 8월 10일 기사에는 사관평에는 류성룡이 김덕령의 죽음과 관련해 구설수에 올랐다는 사관평이 실려있다.
인품이 일을 만나면 과연 나라를 위하여 근심하는 정성은 있으나 또한 치우치게 자기 소견만을 고집하는 일이 있고 또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다는 비평이
있었으며, 김덕령(金德齡)의 죽음에 대하여도 사람들의 말이 없지 않다. - 선조실록 1604년 8월 10일
선조수정실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성룡 등이 아뢰기를, “이 사람이 살 도리는 없습니다. 다만 아직 그대로 가두어 두고 그의 일당들을 국문한 뒤에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고, 판의금 최황(崔滉) 등은 즉시 형신(刑訊)할 것을 청하였다. 상은 재삼 난색을 지었으나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그는 살인을 많이 했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며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하기도 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1596년 8월 1일
선묘중흥지, 국조인물고, 송자대전등에선 아예 김덕령을 죽이는데 앞장선다. 선조가 "재주가 아까우니 살려줄까?"라고 하자 "어차피 살인도 저지른 작자인데 살려줄 이유가 있음? 게다가 이런 애 풀어주고 뒷감당할 수는 있긴 한가요?"라고 주장했다고 적혀 있다. 김덕령의 무죄를 믿었던 사람은 뒷날 신구차를 올려 이순신을 구명하는 정탁이다. 정탁은 김덕령 옥사이후 소를 올려 김덕령은 단지 명성이 높아 이용당했을 뿐 이라는 주장을 피력했다.(약포집)

2.33. 제45회

2.34. 제46회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느 곳 수령으로 있을 때 신이 수사로 천거했습니다. 임진년에 신이 차령(車嶺)에 있을 때 이순신이 정헌(正憲)이 되고, 원균이 가선(嘉善)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작상(爵賞)이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무장은 지기가 교만해지면 쓸 수가 없게 됩니다.

거제에 들어가 지켰다면 영등·김해의 적이 반드시 두려워하였을 것인데 오랫동안 한산에 머물면서 별로 하는 일이 없었고 이번 바닷길도 역시 요격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체대(遞代)하는 사이에 사세가 어려울 것 같기 때문에 전일에 그렇게 계달하였던 것입니다. 비변사로서 어찌 이순신 하나를 비호하겠습니까.
-《선조실록》 1597년(선조 30년) 1월 27일
정리하자면 처음에 가 천거할 때는 괜찮았는데 관직이 계속 올라가니깐 가 점점 너무하네염. 이번 일은 분명히 잘못했으니 비변사에서도 이순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한 것이다. 이후 구명을 위해 움직이지도 않았다. 징비록 외에 류성룡 종가에서 따라 보존해온 난후잡록(亂後雜錄)에는 이순신이 하옥된 후 조카 이분이 옥리에게 뇌물을 주면 몸을 보존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물으러오자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고 되묻고 돌려보낸 기록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류성룡은 이순신과 사적으로 교분이 깊기에 섣불리 옹호했다간 선조의 진노만 가중시키기에 선택의 폭이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을 끝까지 비호한 건 이순신과 관련이 없었기에 오히려 운신이 자유로웠던 정탁 이원익이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란 명을 받고 풀려난 후 류성룡을 찾아갔다는 난중일기 기록을 보면 이순신도 류성룡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준 것으로 보인다.
기존에 퍼져있던 통념을 그대로 수용한 것에 그 원인이 있다. 그렇기에 시청자들에게 사료를 바탕으로 한 재해석을 알릴 수 있는 기회에서 아쉬울 뿐이다.

2.35. 제47회

2.36. 제48회

2.37. 제49회

2.38. 제50회


[1] 예: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 ~ 1727)가 7차 조선통신사가 왔을 때 언급했었다. [2] 예: 야사에서는 조슈번 5대번주 모리 요시모토(毛利吉元, 1677 ~ 1731)가 가신들에게 징비록 구입을 명령한적이 있다고 한다. [3] 가마쿠라 시대의 호조 씨가 아니라 센고쿠 시대의 고호조 씨. [4] 호조 가의 5대 당주 호조 우지나오의 아버지로 아들 우지나오에게 당주를 넘겨주었으나 여전히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5] 다만 이것은 신앙 문제 뿐만 아니라 사위였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자신의 이권에도 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6] 가톨릭에서 자살은 금기사항이다. 이 때문에 가톨릭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도 이토 히로부미 암살 후에 바로 자살하지 않고 재판을 통해 사형 당한 것. [7] 다만, 드라마 내에서는 "오랜 상인가문이었던 고니시 가문이 가진 조선에 대한 정보력" 때문에(즉, 아직까지는 쓸만하다고 판단되기에) 내치지 못 하는 것으로 고니시를 의심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용하려는 히데요시의 속마음이 묘사된다. [8] 이 때, 이항복이 22세, 이덕형이 17세였다. [9] 그 외에도 현재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는 복지 재정 문제를 풍자하고자 하는 의도도 보인다. 더불어 요새 걸핏하면 거론되는 군대 문제도 함께. 전작인 정도전 경우도 역사에 현실을 대입하여 풍자한 경우가 있었기에 이를 따라한 듯하다. [10] 경상좌수사 박홍은 개전 첫날 병력집결을 마치고 동래성으로 이동했다. 부산진첨사 정발, 다대포첨사 윤흥신, 서평포권관 박진남은 모두 농성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수전을 시도한 지휘관은 한명도 없다. [11] 통합되기 전에도 가까워서 다대포 동쪽으로 아주 약간 떨어져있었다. [12] 가덕도는 대마도 지역의 선박이동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요지로 봉수와 연대가 2곳이상 설치되어 운용되었다. [13] 임진년 4월 18일 난중일기에 기록된 경상우수사 원균의 공문내용이다. 이 내용을 비춰보면 이각과 박홍이 겁먹고 달아났다는 기존의 통설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이미 적의 군세가 대단함을 아는 박홍이 겁먹고 달아나려 했다면 굳이 동래성에 접근할 이유도 없고 밀양부사 박진이 올때까지 소산역에 남아있을 이유도 없다. [14] 역시 김해로 가야 할 의령군수 오응창의 병력은 배로 이동하다 사고가 생겨 합류하지 못했다. 의령과 초계는 경상우병영 소속이다. 김해성이 17일 혹은 18일 일본군 3, 4군 상대로 종일 싸우다 4번째 공격으로 함락되었음을 고려하면 경상우도도 개전 직후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15] 적의 상륙지점에 가장 가까운 동래(경상좌도)와 김해(경상우도) 1선, 황산-작원잔도와 울산의 경상좌병영, 창원의 경상우병영이 2선, 경상도 중심부인 대구가 3선, 신립이 끌고 내려온 군사가 4선 이었다. 이외 조령, 죽령 등 고갯길 방어임무를 맡은 경장들이 별도로 파견되었다. 2선까진 해당지역 지방관이나 병,수사가 담당하게 되어있었다. 결코 중앙에서 장수내려올때까지 손가락만 빨고 있거나 한번 뚫리면 그걸로 끝나는 체제가 아니었다. [16] 일례로 하양현 군사 500명은 경상좌병사 이각에게 갔으나 이각은 그들이 경장(조방장 성응길)에게 속해야 한다는 이유로 돌려보냈다. 이들은 돌아가다 용궁현감 우복룡에게 전멸당한다. [17] 왜군은 군을 나눠 한쪽이 박진의 시선을 끌며 교전을 벌이는 사이 다른쪽이 고개를 우회해 박진군의 배후를 공격했다. 박진은 개인의 무용으로 겨우 빠져나와 밀양성 창고에 불을 지른후 퇴각한다. [18] 절반이 전투 불능 상태라면 그 나머지 절반은 전투 중 도주하는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때문이다. 컴퓨터 게임에서라면 전투 유닛이 주변의 아군들이 쓰러져나가든 말든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는 장면을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주변의 전우들이 픽픽 쓰러지는데도 제자리를 지킬 사람은 없다. [19] 더군다나 이후 20화에서는 대동강을 건너려다가 병사 2백이 죽었다는 언급이 나오기까지 하는데, 소규모 접전도 아니고 대규모 회전 두 번에서 전사자가 1천 8백이라는 건 말이 안 된다. [20] 고쿠다카는 고니시가 24만석, 마츠우라가 6만 3천석이다. [21] 그러니까 왕이 피난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파천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는 소리다. 그만큼 파천이란 말 자체가 엄청난 파급력을 지니고 있단 소리이기도 하다. [22] 심지어 극중 선조는 왜군의 진격이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이란 사실까지 유추해냈다. 15화에서의 류성룡의 행적은 오히려 후일 평양성에서 의주로 몽진하려는 선조를 말리며, 파천 시 민심이반이 있을 것이라며 자신이 평양성을 지켜내겠다고 주장한 윤두수의 행적과 더 닯았다. 더군다나 전략적으로도 아군이 약하고 적군의 전력과 기세가 강할 때는 이리저리 피해서 보급과 충원을 더디게 함으로서 공세종말점에 다다르게 하는 게 상식이다. 이건 전근대의 전투 뿐만 아니라, 심지어 현대전에서도 꽤 잘 먹히는 대전략이다. [23] 불멸의 이순신 같은 경우 이산해가 가장 먼저 파천 이야기를 꺼내고 윤두수가 그에 동의했으며 정탁이 종묘와 왕릉이 모두 한양에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유성룡이 다시 파천에 찬성하여 여론이 결정되는데, 이 쪽이 사실에 조금 더 가깝다. [24] 한성의 성첩 등에 최소 인원만 배치해도 거의 만오천명 정도의 병력이 필요하다. 애초에 한성은 방어 목적이 아닌, 조선의 도읍임을 과시하기 위한 용도에 가깝다. [25] 그렇기에 더 문제다. 조선의 최고 책임자인 좌의정에 체찰사를 겸임하고 있는 류성룡이 이를 모른다는 것은 류성룡을 무능한 인물로 폄하하는 꼴이므로. [26] 실록에선 뽑은 이가 4천 5백 명에 궁가(弓家)가 7천 2백이라고 되어 있다. [27] 여담으로 지도 남쪽에 남극 대륙으로 보이는 대륙이 있지만 이는 사실 남극 대륙을 묘사한 게 아니다. 과거 서양인들은 남쪽에 커다란 대륙이 존재할 것이라고 여겼고 이를 묘사한 것이다. 자세한 건 미지의 남방대륙 항목 참조. [28] 전쟁 발발 1년 전이기는 하지만, 유성룡이 이일을 경상 병사로 삼자고 건의했다가 거부된 적도 있었다. [29] 온전히 사로잡았다는 설명이 뭘 의미할 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적선에 뛰어들지 않으면 무슨수로 적장을 사로잡는단 말인가? [30] 이 점은 불멸의 이순신 때에도 묘사되지 않아 지적되었다. [31] 26회 뿐만 아니라 분조를 이끄는 내내 광해군의 언행은 위험 수위를 수시로 넘었다. 16세기 조선은 전근대적인 군주 국가였으므로 군주의 말은 곧 법이었는데, 아무리 국가 비상시라고 하더라도 화를 벌컥 내며 '이 왕명은 마음에 안 든다', '이 왕명은 따를 수 없다' 운운하는 것은 조선의 법 따위 따르지 않겠다. 즉 조선인임을 포기하겠다는 소리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32] 태종 시기 왕이 세자에게 선위하겠다 했을 때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선위 반대에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을 빌미삼아 귀양, 사사된 적이 있다. 이후에 태종이 정말로 충녕 대군에게 선위를 하게 되었을 때도 신하들은 죽자살자 말릴 정도로 선위란 신하들 입장에선 무조건 반대해야 하는 행위였고 선위의 전 단계인 대리청정도 경종이 대리청정을 빌미로 노론들을 털어먹을 정도라 신하들은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때 빼고는 선위고 대리청정이고 일단 반대부터 하고 봤다. [33] 임진왜란 초기 : 왜놈들 싹 쓸어버리겠어! → 임진왜란 중후반기 : 어... 이놈들 생각보다 강하네... 협상을 하는 게 서로 좋지 않을까... → 정유재란 : 재침? (지쳐서 거친 숨을 내쉬며) 말을 해도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하니 그냥 깔끔하게 정리해버리자...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물론, 협상의 결렬에는 양쪽의 조건 차가 너무 컸던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대 희대의 낚시꾼 심유경의 역할이 지대했던 것도 있다. [34] 이와 비슷한 예로는 원균맹장설이나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이 철쇄로 이겼다는 것 등이 있다. [35] 여기서도 배를 끌고 온 사람이 이빈인지 정걸인지, 화살을 보급하는 군선이었는지 전라도 조운선이었는지의 논쟁이 있다. [36] 우키타 히데이에는 이 전투에서 비명횡사할 뻔했으나 드라마 상의 묘사는 그렇지 않았다. 이 외에도 이시다 미츠나리, 킷카와 히로이에, 안코쿠지 에케이 등이 조선군의 승자총통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 [37] 왜군점령지인 영남과 인접해 있으면서 전쟁 초기엔 왜군의 공격을 받지 않았으며 군사들이 징집을 거부해 반란까지 일으켰던 호남 지역에서 많이 발생했다. 의병장 유팽로의 임실 길암역 전투(5월 11일)와 의병장 양대박의 운암전투(6월 25일)는 임진년 5월, 6월에 전라도 한복판에 대규모 왜군부대를 의병대가 격퇴했다는 전투인데 시기상 이때 왜군이 전라도 중심부에 나타나는 건 불가능하다. 도적질을 일삼는 가왜를 격퇴하고 왜군으로 기록했을 확률이 높다. [38] 2차 진주성 전투 직후 전라도 복병장으로 두치진(하동현 서쪽 5리 나루터)을 수비하던 장흥부사 유희선이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양, 순천 지역으로 도망쳐 왜군이 쳐들어온다고 떠들고 다니자 전쟁공포에 휘말린 백성들과 병사들이 도적떼가 되어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다. 이 소요사태는 전라도 남부 전체로 확대되어 조선군 보급 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서애집, 난중일기) [39] 이 때도 여수의 전라좌수영 본영은 유지되어 이순신도 공무 처리를 위해 한산도에서 여수로 나오곤 했다. <난중잡록>을 보면 정유년 초 가토의 도해 정보가 올라올 때가 이순신이 여수에 나와 있을 때였다. 당시 수군 주력은 한산도에 주둔 중이었고, 여수의 본영은 전라도에서의 병력 징집이나 보급물자 조달 등 행정업무 위주였던 듯 [40] 4월 20일설(선조실록 권 32, 25년 11월 25일), 4월 22일설(난중잡록), 4월 24일설(선조실록 권 27, 25년 6월 28일), 4월 27일설(이긍익, 연려실기술 권 16, 선조조 고사본말 임진의병 곽재우)로 나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22일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곽재우가 경상감사 김수와의 갈등을 조정에 해명하기 위해 올린 자명소(自明疏)에서 자신의 거병 일자를 22일로 밝혔기 때문이다. [41] 제2차 진주성 전투는 강화 회담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일본군의 제한적 공세였기에, 그 이상의 진군을 위한 목적은 없었다. 게다가 정 희생을 최소화하고 싶으면 백성들은 전부 소개하고 군인들만 남아 시간을 끄는 방법도 있었다. 수만 명의 민간인은 먹여살릴 방법이 없으면 오히려 부담이 된다. 당시 진주성내의 사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의병장들이 민간인 철수에 적극적이지 않은 가운데 민간인들은 진주대첩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에도 수성이 가능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에 의거 대부분 성에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42] 이때문에 은광개발은 명군이 조선에 하는 훈수의 단골메뉴가 된다. 사실 조선이 은광개발을 안 한 이유는 조선에서 은이 난다는 사실이 명에 알려질 경우, 명의 공물, 사신들에게 주는 뇌물에 은이 추가 될 가능성이 한없이 높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에서 은이 난다는 사실을 안 명 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조선 입장에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은을 뇌물로 꼭 요구했기 때문에 조정이고 백성이고 사신단이 오기만 하면 죽을 맛이었고, 은에 눈 돌아간 명 대신들은 명말 만주가 누르하치 손에 떨어져 조선과의 육상 교통로가 막혔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요소가 많은 바다를 통해서라도 조선에 가 은을 털고 왔다. [43] 최경영은 정철 사후의 이야기이다 [44] 철수는 38회에서 이루어진다. [45] 이순신이 무조건적으로 명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건 아니지만 최대한 맞춰주려고 노력했다. 금토패문 건을 제외하면 조선 수군과 명군 지휘부 사이에 큰 마찰은 없었으며, 명군 지휘부는 이순신을 상당히 높이 평가했다. 심지어 명군 지휘부는 삼도수군통제사 복직 이후에도 이순신에게 원래의 정2품 품계를 돌려주지 않는 선조를 압박해 원래의 품계를 돌려주게 한 적도 있다. [46] 왜란 이전 명이 조선을 바라본 기준은 고구려였다. [47] 인조대의 삼도대동법은 기존 선혜법 방식을 적용했는데 기존 방식이 왜 실패했는가를 연구하고 개선점을 찾아내었기에 이후 대동법의 기초가 될 수 있었다. 이시방과 같이 대동법을 추진할 숙련된 관료층이 양성되고 조정 내에 지지층이 증가한 때도 인조 시기이다. 이에 기반하여 효종 2년에는 호서대동법이 나온다. 한편 이러한 대동법 추진과정에서 조선 후기 제도사에서의 인조 위상 및 정치인으로서의 단점이 도출되는데, 첫술을 뜸으로써 일정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까진 잘 해냈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이 대목에 있어서는 인조가 후대에 의외로 많은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주목을 잘 못 받는다. 애초에 다른 부분에서 워낙 암군이기도 하다 [48] 그런데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궁술 외에 판옥선에 대한 지식, 수영 시험 등을 본 반면 본작에서는 검술과 창술 시험을 보는 것이 나오므로 이렇게 이해하기도 힘들다. [49] 쉽게말해 수령주관으로 각 고을이 1년에 바치는 전체 공물가를 한꺼번에 마련하는 것 [50] 다만 어디까지나 일견 비슷하다는 말이다. 대동법의 개념이 확실히 잡히는 건 인조 말기부터다. [51]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이름으로 등장한다. [52] 이때 선조는 대간의 처벌요구를 뿌리치고 전마까지 챙겨주었다. [53] 역시 이 해전에서 나온 사망자인 평산포만호 김축은 안면에 총을 맡고 얼마간 중태에 빠졌다 사망한 탓인지 언급되지 않는다. [54] 드라마에선 마냥 이순신을 지원하는 이덕형만 해도 이순신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원균 말만 듣고 잘못된 언급을 하기도 했다. [55] 가서한과 양업은 모두 명장으로 주어진 관문을 잘 사수하고 있었으나 윗선의 독촉으로 억지로 나가싸웠다가 패전한 장수들이다. 원균의 케이스에 가져다 붙이기엔 과분한 인물들이다. [56] 평양성 전투 장면을 짜집기한 탓에 도산성이 왜성이 아니라 전형적인 조선식 성이다. [57] 5군영중에 선조대 창설된 훈련도감, 숙종대 창설된 금위영을 제외한 어영청(1624년), 총융청(1624년), 수어청(1626년)이 인조대 작품이며 금위영의 모태가 되는 정초청도 인조대(1636년) 신설된다.(정초청에 현종대(1669년) 신설된 훈련별대를 1682년 통합하여 만들어진게 금위영이다.) 그리고 이괄의 난의 교훈을 받아들여 광해군대에 내버리다시피 했던(목장관리는 고사하고 감목관직조차 광해군대 없어졌다 인조대에 복구된다.) 기병전력과 근접전 능력의 배양이 이뤄졌다. 쌍령전투에서 추태를 보인 지방군과 달리 중앙군은 팔기군에 밀리지 않는 역량을 보여줬다. 숫자가 적어서 문제였지. [58] 이괄의 난으로 북방지휘관 상당수가 날아가고 장만과 정충신도 병사해 호란 당시 인조정권에는 믿고맞길 국방전문가가 없었다. 인조라고 남한산성의 물자 비축 상황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죽은 뒤 왕자들이 강화도에서 항쟁을 이어갈 것으로 기대했다. 이렇게 보면 물자가 거의 고갈되기 직전까지도 항복을 거부하며 10만 대군을 막아서던 인조가 왜 강화도가 함락되자마자 바로 항복을 했는지도 답이 나온다. 호란이 발발한 그 시점에 인조의 선택지는 사실상 강화도가 함락되지 않기를 비는 것 말고는 없었다. [59] 세폐에 형제관계까지 조선은 명과 단교하고 (산해관도 못뚫던)청과 군신관계를 맺으라는 무리한 요구를 제외하면 어떻게든 들어주려 했다. [60] 병자호란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경제적인 관점에서도 당시 청나라는 약탈 경제 체제로서 경제 상황 자체가 완전히 파탄이 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침공의 구실을 찾았어야만 했다. [61] 인조대의 국방시책(동국사학, 1985, 최효석), 인조조~병자호란시기 조선의 전술전개(한국사학보, 2011, 노영구), 인조시대 대후금 대청 방어책의 추진과 한계 - 수성전술을 중심으로(조선시대사학보, 2012, 허태구) 등등. 인조대의 국방강화 노력이 적지 않았음은 학계에선 80년대에 이미 나온 말이고, 2010년 이후에는 디테일한 부분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광해군대의 민력고갈과 각종 실정에 대해서도 2010년대 들어서 연구성과가 풀리고 있는데 하나같이 대중매체에는 피드백이 안되고 있다. [62] 임진왜란 이후 조선조정은 여민휴식을 국정운영 모토로 하여 국가재정규모 감축, 긴축재정, 세금부담 완화 등의 조치를 시행한다. 그리고 광해군대에 완전히 180도 돌아서 일탈했다가 병자호란 이후 여민휴식을 모토로 국정을 운영한다. 그리고 중국의 왕조교체라는 격변과 소빙하기로 인한 이상저온의 충격을 가장 강하게 받은 1640년대를 넘긴후 제도사적으로 의미있는 논의들이 이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