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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0-24 03:32:33

홍계남


이름 홍계남(洪季男)
서훈 판돈녕부사 추증
생몰 1564년 ~ 1597년
본관 경기도 남양군
출생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1. 개요2. 생애

1. 개요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출생지는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이다. 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 홍언수(洪彦秀)이다.

2. 생애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홍계남은 양성현(陽城縣) 사람으로, 홍언수의 서자였으며, 담력과 용맹이 있고 활쏘는 데에 능하여 금군(禁軍)에 소속되었다고 한다. 이후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들어갔는데, 일본인들은 그가 말타고 활쏘는 것을 구경하며 그의 이름을 기억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수원에서 충의위를 맡고 있던 홍언수가 의병을 일으켰고, 홍계남 역시 아버지의 군대에 가담했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홍계남은 아버지의 군사를 따라 적을 쳐서 여러 번 싸워 승리를 거두었고 적의 귀를 베어 온 것이 거의 백여 개에 달해 인근에 진을 친 일본군이 위축되어 감히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홍언수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해 적의 목을 많이 벤 공로로 수원 판관에 임명되었으며 홍계남은 경기 조방장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홍계남이 일이 있어서 다른 군진에 간 사이, 일본군이 기습을 감행해 홍언수가 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홍계남은 급히 돌아왔으나 이미 군대가 패하고 아버지가 죽어 시신 마저 적에게 빼앗기자 단기로 적진에 쫓아가서 크게 외쳤다고 한다.
너희들이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나도 너희들에게 죽겠다.

연러실기술에 따르면, 일본군은 홍언수의 시신을 던져 돌려준 후 곧 군사를 내어 사면으로 포위했다고 한다. 이에 홍계남은 왼손으로 아버지의 시신을 안고 오른손으로 칼을 휘둘러 대적하니 적이 감히 대적하지 못했다. 이후 돌아와 아버지의 시체를 진중에 놓아두고 쫓아가 두어 명의 머리를 베자 적이 더욱 두려워했다. 이 뒤로는 거리와 마을에서 일본군이 노략질할 때 사람들이 홍계남의 이름을 부르면 그들이 반드시 도망쳐 달아났다고 한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홍계남은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고자 격문을 돌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하늘이 돌보지 않아 난이 이와 같이 심하여 승여가 서쪽으로 파천하니, 만백성이 의탁할 데가 없도다. 눈을 들어 강산을 보매 그 누가 간장이 찢어지지 아니하랴. 이 땅에서 먹고 살고 혈기를 가진 자들은 모두 마땅히 창을 베개 삼고 모든 간고(艱苦)를 참으며 임금과 아버지를 위하여 복수해야 할 것인데, 내가 불행이 이 참혹한 처지를 당하여 흉한 칼날 아래 아버지와 형이 모두 목숨을 잃었으니, 어찌 구차스럽게 살기를 원하여 이 적들과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있겠는가.
인하여 생각건대, 원근의 선비와 백성들이 나와 같이 참혹하고 비통한 일을 당한 이가 반드시 백이나 천으로 헤아리는 정도에만 그치지 아니할 것이므로 이에 여러 장사들을 모집하여 한 군대를 만들어 복수하는 군사라고 이름하여 부형의 깊은 원수를 갚으려 하는데, 제군은 어떻다 하겠는지 모르겠다. 그대의 아버지, 형, 아내, 자식이 참살당하여 해골이 들판에 드러나서 원혼이 의탁할 데 없이 황천이 아득한데, 우리가 홀로 편안히 물러나서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황천에 혼령이 있건대 감히 내가 아들이 있고 아우가 있다 하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털끝이 쭈뻣하다. 제군이 만약 이 말을 옳다고 한다면, 부형과 처자의 원수가 있는 이들은 마땅히 각기 징발하고 모집하여 무기를 준비하여 날짜를 약속하고 발정하여 종천의 원통함을 조금 풀어서 <춘추>의 의를 저버리지 아니함이 어떠하겠는가. 이상을 8도에 통문함.

이후 홍계남은 안성에서 아버지가 이끌던 의병들을 수습해 100여 명을 모아 산 꼭대기에 보루를 쌓고 양천(陽川)·안산(安山) 두어 고을의 지역을 굽어보며 군사를 주둔시키고 적의 헛점을 틈타 동서로 습격하여 많이 참살했다. 이에 일본군이 감히 그 지역에 들어가지 못해 경기 지역과 호서의 여러 고을이 그를 의지했다.

또한 홍계남은 충청 병사 신응협(申應恊), 전라도 조방장 이유의(李由義)와 함께 죽산에 주둔한 적을 협공하여 횃불을 드는 것으로 신호를 삼고 밤을 틈타 진군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유의의 전라도 군이 몰래 죽성 밖 5리 지점에 도착하여 홍계남과 신응협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일본군이 먼저 알고 기병을 파견해 앞뒤로 덮쳤다. 그 바람에 이유의의 전라도 군은 크게 패해 무너졌고 죽은 자가 길에 겹겹이 쌓였다. 이에 홍계남과 신응협은 철수했다.

선조 25년(1592년) 9월 13일, 비변사는 수원의 물자가 풍부하고 군민이 많으니 적을 만날 때마다 사살하여 명성을 크게 떨친 홍게남을 수원 판관에 제수하자고 건의했고, 선조는 이를 따랐다. 이후 홍계남은 통정 대부로 진급했고 한양을 탈환할 태세를 갖췄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1월 11일자 기사에 따르면, 당시 안성군에 주둔한 홍계남의 군사는 300명이었다고 한다.

선조 26년(1593년) 정월, 일본군은 용인현, 양지현, 죽산부를 한성과 부산 간의 유일한 교통로로 확보하여 대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때 소모사 변이중(邊以中)은 천안군과 양성현 일대에 군대를 머무르게 하고 적을 격퇴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옛날의 계책을 따라 전차와 마소를 준비한 뒤 죽산에 이르러 우거(牛車)를 편성한 후 대형을 학익진으로 짜고 죽산성을 향해 돌격했다. 이에 일본군이 출격해 반격하면서 불을 질러 수레를 태우니, 수레에 있던 군사가 모두 타 죽고 변이중은 모두 몸만 빠져 나왔다. 이때 홍계남이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와 구원해 일본군의 수급 몇 급을 베어 변이중의 군대를 가까스로 수습하고 적의 추격을 뿌리쳤다.

선조 26년(1593년) 6월 19일, 일본군 10만 명이 진주성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 홍계남은 전라 병사 선거이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에 왔지만 능히 방비할 수 없음을 알고 말했다.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나 안 쪽을 지킴만 못하다.

그러나 김천일이 소리를 높여 반대하자, 홍계남은 선거이와 함께 운봉에 진을 쳤다. 이후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 공격했을 때, 홍계남은 높은 곳에 올라 바라봤지만 적의 기세가 매우 강하자 감히 진주성을 구원하지 못했고, 결국 진주성은 6월 29일에 함락되었다.이후 홍계남은 이빈 등과 함께 남원으로 철수해 원천원에 진을 쳤고, 선거이는 호산원 산성에 진을 쳤다.

이때 일본군이 진주성에서 출격해 구례현에 들이닥치자, 백성들이 태반이나 상해를 입었고 마을이 불태워지고 성곽이 무너졌다. 남원의 군민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 흩어져 하룻밤 사이에 성을 비우고 빠져나갔다. 일본군은 또 곡성에 들어가 주민들을 거의 다 살육했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이 때 홍계남은 단기로 정탐하다가 화정에서 적을 만나 적병 3명을 벤 후 적이 대대적으로 이르자 원천으로 물러났다고 한다.

8월 7일, 일본군 수천 명이 산동촌을 분탕질하고 숙성령으로 향했다. 이때 홍계남과 이빈의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가 장관(將官)들이 먼저 달아난 자를 좆아 잡으니 무너졌던 군사가 도로 진정되었다. 이후 송대빈이 기병 300여 명을 두골봉 안과 방축림 숲에 매복시키고 스스로 천여 명을 거느리고 숙성령 위에서 적의 진로를 막았다.

이에 일본군이 물러나 둔산령을 넘어 수지 등 촌락을 약탈했다. 이에 낙상지가 정예군을 보내 길을 나누어 추격하고, 사대수가 기마로 돌격해 따라가 죽이니, 일본군이 순자강을 건너 곡성의 촌락을 약탈하고 살육한 후 구레를 거쳐 진주로 철군했다. 홍계남은 송대빈, 이빈, 선거이와 더불어 남원성으로 들어와 적의 재침에 대비했다.

선조 26년(1593년) 11월 2일, 일본군이 울산에서 출격했다. 그들은 3일에 안강부(安康府)를 약탈해 수많은 백성들을 살육하고 곡식 수천석을 거두어갔다. 이때 고연백, 홍계남, 권응수, 이수일 등은 경주에서 적의 공세에 대비했지만 감히 적과 맞서지 못했다. 그러다가 명나라 장수 오유충(吳惟忠), 낙상지(駱尙志), 마우경(馬禹卿)이 일본군을 공격하여 적병 수십 명을 죽였지만 얼마 후 일본군이 반격을 가해오자 능히 당해내지 못하고 크게 패해 2백 명이 죽고 많은 병사들이 포로로 전락했다.

이에 홍계남이 출격해 적병 수 명을 죽이고 잡혀가던 명군 70여 명을 구출했다. 이후 홍계남은 그동안 남쪽 변방에서 고생한 공로로 선거이, 정희현, 권응수, 백사림, 한명련과 함께 청람(靑藍) 삼승포(三升布) 2필을 하사받았다. 또한 안성에 거주하는 친모와 적모(嫡母), 처자에게도 식량이 지급되었으며 각종 부역도 면제받았다.

선조 29년(1596년) 7월, 이몽학의 난이 발발했다. 이때 이몽학은 김덕령 곽재우, 홍계남 등이 모두 군대를 연합하여 자신을 도울 것이며, 병조 판서 이덕형이 내응한다는 소문을 퍼트리자 민심이 요동쳤다. 그러나 이몽학은 도중에 부하들에게 살해되었고, 선조는 곽재우, 홍계남 등에 대해서는 모두 불문에 붙일 것을 명하고 김덕령만 잡아들일 것을 명했다. 그 덕분에 홍계남은 뒤이은 옥사로 김덕령이 주살될 때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후 영천 군수에 제수된 홍계남은 선조 30년(1597년) 1월에 권응수(權應銖), 김태허(金太虛)와 함께 부산 산성에 진을 치고 경주를 방비했다. 고대일록에 따르면 홍계남은 그해 5월 초에 사망했다고 한다. 후에 홍계남을 기려 건립된 '홍계남장군 고루비'에 따르면, 홍계남이 죽을 때 연세가 34세였다고 한다. 이후 홍계남의 친모는 죽을 때까지 요미를 매달 지급받았고 선조 34년(1601년)에 홍계남을 기리는 사우(祠宇)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