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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즈다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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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공 및 지시불이행 혐의로 총살당했으나 전후 1957년 7월 31일 무죄로 판결나면서 복권
2. 1944년 4월 20일 대장에서 상장으로 강등, 전후 1953년 8월 3일 대장 계급 복권
3. 1942년 3월 17일 원수→소장으로 4계급 강등 및 1945년 7월 19일 중장→소장으로 강등
4. 1942년 7월 12일 독일군에게 생포당한 이후 나치 독일에 전향, 종전 후 체포되어 나치 부역 혐의로 사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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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SFSR 제5대 최고회의 주석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 즈다노프
Андр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Жданов
Andrei Alexandrovich Zhdanov
파일:Андрей_Александрович_Жданов_1.jpg
출생 1896년 2월 26일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노슬라프현 마리우폴구 마리우폴
(現 러시아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마리우폴)
사망 1948년 8월 31일 (향년 52세)
소련 러시아SFSR 모스크바
묘소 크렘린 벽 묘지
학력 해당사항 없음
직업 혁명가, 정치가
종교 무종교( 무신론)
정당 소련 공산당

1. 개요2. 생애3. 주요 수훈4. 즈다놉시나(즈다노프 독트린)5. 그 외

[clearfix]

1. 개요

소련의 정치인이자, 한때 스탈린의 후계자로 거론할 만큼 거물급 인사로서 유명했지만, 이른 죽음으로 권력의 승계에 실패했다.

2. 생애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우크라이나의 동부지역에 있는 마리우폴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드문데, 아버지가 초등학교 장학사였지만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어 제대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이곳저곳 떠돌다가 1915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볼셰비키 진영에 가담했던 것 정도만 간략하게 파악되고 있다. 이듬해 러시아 제국군에 징집되었으나 레닌 10월 혁명을 일으키자 재빨리 가담해 선동가로서의 재능을 행동으로 증명하면서 혁명의 성공에 일조한 덕택에 본격적으로 소련 정계에 발을 들였다.

1920년대까지는 정치 일선에서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1934년에 열린 제17차 소련 공산당대회에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위원장 겸 정치국의 후보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중앙당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친스탈린 급진 파벌에 속해 소련 공산당의 당조직을 개혁하는 사업을 진행하면서[1] 소비에트 연방의 문화계에 대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 이념의 주입을 주도했다. 같은 해 12월 스탈린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최고위급 정치인이던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당하자 소련 공산당의 레닌그라드 지구당의 서기장에 임명되었고, 1938년에는 러시아 소비에트의 최고회의 주석으로 영전했다. 이 직책은 1947년까지 유지했다.

이듬해인 1939년에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선전선동부장과 정치국 위원으로 임명되어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라자르 카가노비치를 포함한 소련 공산당의 최고위급 정치인들과 함께 스탈린의 대숙청에 적극 가담했다.[2] 대숙청 시기 동안 즈다노프가 서명한 처형 지시 문건은 176건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니콜라이 예조프의 숙청 방식은 그 역시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당원 교육으로 해결될 일을 무조건 숙청으로만 해결하려 든다." 며 비판했다고도 한다.

1940년에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함께 소련군이 점령한 에스토니아에 파견되어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립과 소비에트 연방에 병합하는 작업을 지휘했다. 독소전쟁 중에는 레닌그라드 공방전 기간 동안 레닌그라드에 남아 시의 방어와 질서 유지를 맡았고, 계속전쟁에서 소련이 핀란드를 상대로 승리하고 휴전 협정을 체결한 뒤 설치된 핀란드 점령국 위원회를 1947년까지 감독했다.

종전 후에는 스탈린의 지시로 문화 부문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노선을 대대적으로 밀어붙였는데, 이러한 문화계에 대한 숙청, 정풍(整風) 작업은 훗날 즈다놉시나(ждановщина)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다.(아래 문단 참조) 1947년에는 코민테른을 대체하기 위한 해외(주로 동유럽) 공산당 조직들의 연락망 겸 통제 기구인 코민포름을 결성했다. 즈다노프는 코민포름 회의에서 냉전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우리가 전쟁의 종결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전후 국제 정치에서 두 가지 기본 지향이 더욱더 분명히 두드러지는데, 이는 두 개의 기본 진영으로의 분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제국주의 · 반민주주의 진영이 하나이고 반제국주의·민주주의 진영이 다론 하나입니다. 제국주의 진영을 이끄는 주요 세력은 미국입니다. 제국주의 진영의 근본적인 목표는 제국주의를 강화하고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을 준비하고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에 맞서 싸우고 반동적·반민주주의적·친파시즘 체제와 운동을 전면적으로 지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제국주의 진영은 모든 나라에서 반동적·반민주주의적 분자들에 의지하고, 자신의 전시 동맹국들에 반대하여 이전의 전쟁 적국들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반제국주의·반파시즘 세력은 다른진영을 구성하는데, 이 세력의 중추는 소련과 신민주주의 국가들입니다. 이 진영의 목표는새로운전쟁과제국주의 팽창의 위협에 맞서 싸우고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며 파시즘 잔재를 뿌리 뽑는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거칠 것 없던 즈다노프의 권력은 1948년 6월을 기점으로 크게 꺾였다. 스탈린은 게오르기 말렌코프와 즈다노프를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개최된 코민포름 국제회의에 소련 대표단으로 파견했는데, 스탈린의 의중은 종전 후 소련에 강한 반항심을 드러내고 있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 유고슬라비아를 대놓고 쪽줘서 코민포름에서 제명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의도는 예상대로 실행되었지만, 말렌코프가 회의 석상에서 유고슬라비아와 티토를 극딜한 반면에 즈다노프는 다소 유화적인 태도로 협상할 의향을 드러냈기 때문에 스탈린의 분노를 샀다. 코민포름 국제회의가 끝나고 즈다노프와 말렌코프가 귀국하자, 스탈린은 즈다노프를 모든 공직에서 해임하고 모스크바의 어느 요양원으로 보낸 뒤 언론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공직을 사임했다는 짤막한 보도만 나가게 했다. 즈다노프는 이후 두 번 다시 복직하지 못하고 몇 개월이 지난 8월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주요 수훈

4. 즈다놉시나(즈다노프 독트린)

대숙청 당시에도 즈다노프는 맹활약하였으나, 그의 악명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전후 본인이 전두지휘한 문화계 숙청 "즈다놉시나"(Ждановщина)이었다.[3] 스탈린은 제2차 세계 대전 승리 후 서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과 냉전이 시작되자 체제 유지를 위해 극좌적인 스탠스를 취하게 되었고, 전쟁 중에는 승전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다소 풀어주었던 서방 연합국과의 교류를 틀어막으면서 민족주의 노선을 문인들과 예술인들에게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스탈린의 의도에 맞춰 즈다노프는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소련/동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이라는 이분법을 설정하고 '건전한 사회주의 예술은 어떠한 종류의 비관주의든 반혁명주의든 모두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의 예술 이념으로 만든 것이 '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였다. 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소련 이후 형성된 거의 모든 사회주의 국가의 예술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정치 이념에 따른 즈다노프의 첫 숙청 작업은 문예계에서 시작되었다. 즈다노프는 1946년에 소련 작가 동맹 회의 연설을 통해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와 풍자 작가 미하일 조셴코를 개인주의적·부르주아적·반정치적 문인으로 공개 비판하면서 이들을 작가 동맹에서 제명시켰다.[4] 아흐마토바와 조셴코는 모두 당시 소련의 거장 문학가로 손꼽히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이 비판과 제명은 소련 문학계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어 수많은 작가들이 즈다노프의 의도대로 상호 비난과 자아비판 등을 통해 창작 권리를 잃고 야인이 되어 빈곤 속에서 죽거나 절필하게 되었다. 동시에 연극계와 영화계에 대한 공격도 시작되어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과 브세볼로드 푸돕킨 등이 비슷한 방법으로 공개 비판을 받고 연극 동맹과 영화 동맹으로부터 제명되었다.

1948년에는 소련 음악계에도 대대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해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아람 하차투리안, 니콜라이 먀스콥스키 등의 작곡가들을 '사회주의 리얼리즘 이념을 경시하고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형식주의를 추종했다'고 맹비난하며 이들을 작곡가 동맹에서 제명시키고 자아비판을 강요했으며, 작품 연주도 금지시켰다. 이 음악계 숙청 작업은 공식적으로는 바노 무라델리가 1948년 2월에 발표한 오페라 '위대한 친선'에 대한 공식 비판으로 촉발되기는 했지만, 주요 대상은 그 동안 서방에도 명성을 얻고 있던 작곡가나 연주가, 성악가, 지휘자 등이었다. 즈다노프가 주도한 이 비판으로 소련 문화계 전반이 크게 경직되어 창작자의 개성과 창의력이 억눌리고 당의 노선과 체제를 찬양하는 데만 중점을 두는 함량 미달의 선전용 작품들이 난립하는 커다란 부작용을 낳았다. 특히 당시 소련에서 인기를 얻으며 급속히 확산되던 재즈 장르 또한 서구의 불순한 이념에 기반한 음악으로 보아 인정사정없이 탄압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훗날까지도 회자되는 문제의 발언 От саксофона до ножа — один шаг!(색소폰에서 칼날 사이에는 오직 한 발짝 뿐!)이 나왔다.[5]

즈다놉시나는 실행자 즈다노프가 죽은 뒤에도 계속 후임자들에 의해 진행되었으나,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스탈린의 죽음과 함께 무력화되기 시작했고 이후 집단 지도 체제를 거쳐 권력 투쟁 끝에 흐루쇼프가 친스탈린 파벌들을 제치고 서기장 자리에 오르면서 1958년까지 대부분의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다. 즈다놉시나는 중국 문화대혁명 등과 함께 전체주의 독재 체제에서 문화와 예술이 어떻게 자유를 유린당하고 정권에 간섭받을 수 있는 지에 대한 반면교사가 되었다.

5. 그 외

예술가들에게는 원수같은 즈다노프이지만, 스탈린 정권 말기 등용된 수슬로프, 브레즈네프처럼 즈다노프는 스탈린이 집권시킨 인물 답지 않게 스탈린의 이너서클 내에서 온건파에 속했다. 유고슬라비아와의 결렬, 동유럽에서의 전시재판 등은 전부 즈다노프의 사후 발생했으며, 애초에 유대인 의사들을 숙청한 의사들의 음모 사건조차 즈다노프의 죽음을 빌미로 일어났다. 철저한 통제와 검열을 주장하는 즈다노프였고 그걸 위해 대숙청의 기반까지 닦았지만, 정작 '정적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행위'에서는 한 발짝 물러서 있었던 셈이다.[6]

즈다노프의 죽음에 대해서는 스탈린 집권 시기 사망한 수많은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음모론이 나왔다. 흐루쇼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즈다노프는 말년에 폭음을 자주 해서 숙취로 골골거리며 당무를 제대로 보지 못할 지경이었고, 역시 주당으로 유명했던[7] 스탈린조차도 이 꼴을 보다 못해 '앞으로는 주스만 마시시오!'라고 핀잔을 줄 정도였다고 한다. 대숙청 항목의 수정주의적 접근에 따르면 숙청 사유 중에도 과음이 있었다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그 숙청에 주도적으로 참가한 즈다노프 역시 과음으로 정치 경력과 인생을 모두 말아먹었다는 아이러니한 결과인 셈이다.

아무튼 스탈린은 자신의 자리를 넘본다고 생각한 많은 이들에게 했던 것처럼, 즈다노프가 사망한 직후 정치 공작질을 벌여 즈다노프 파벌을 일소했다. 언론을 통해 소련 공산당의 레닌그라드 지구당에서 반혁명 음모가 있었다고 발표하고, 수괴들로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8],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장관회의 주석 미하일 로디오노프, 서기국원 알렉세이 쿠즈네초프, 레닌그라드 지구당 제1서기 표트르 폽코프, 도시위원회 위원장 야콥 카푸스틴과 집행위원회 위원장 표트르 라주틴을 지목했다. 이들은 전원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0년에 총살형에 처해졌다. 6명 모두 즈다노프의 심복들이었고, 이들 외에도 즈다노프 파벌로 지목된 2000여 명의 관료들 역시 기소되어 징역을 선고받고 굴라크에 수감되거나 당적을 박탈당하고 파면되었다. 이렇게 날조된 정치 음모 사건에는 '레닌그라드 사건'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스탈린 집권기 후반에 행해진 정치적 숙청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의 희생자들 역시 흐루쇼프에 의해 대부분 복권되었다. 이들은 스탈린이 죽인 인사들 중에서도 정말로 억울한 사례 중 하나인데,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의 활약이 너무나 영웅적이어서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때 즈다노프 파벌이었지만 기적적으로 생존한 사람이 후일 소련 수상이 되는 알렉세이 코시긴이다.

즈다노프의 출생지인 마리우폴은 사망 직후인 1948년에 즈다노프로 개칭되었지만, 1989년에 원래 이름으로 환원되었다.

슬하에 아들 유리 즈다노프를 뒀는데, 유리는 스탈린의 딸이었던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와 1949년에 결혼했지만 겨우 1년 만인 1950년에 이혼했다. 이후 화학자로 일하면서 로스토프 대학에서 화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소련 과학원의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환갑도 못넘기고 죽은 아버지와 달리 소련 붕괴까지 지켜보고 80대까지 장수하다가 2006년에 사망했다.


[1] 이 개혁안에 따르면 놀랍게도 대숙청이 없었다면 최고 소비에트에 다자후보 선거가 도입될 예정이었다. [2] 그는 대숙청에 가담하면서 말하기를 당내에서 항시 중요한 것은 비판과 자아비판이며, 자유로운 비판의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야말로 당내 관료조직의 일이 효율적으로 처리될 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3] 해석하면 즈다노프(Жданов)의 범죄(щина)를 의미한다. 접미사 -щина는 특정 조건이나 대상을 총칭하는 단어를 만드는 접미사로 사용되나 특정인이나 대상의 이름 뒤에 붙어 해당 인물이 저지른 범죄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Сталинщина Дедовщина 등이 그 예시. [4] 공교롭게도 셋 다 우크라이나 SSR에 고향이 있었다. [5] 여담으로 이 문장은 훗날 소련의 유명 락밴드인 마시나 브레메니의 노래 "Мой друг лучше всех играет блюз"(나의 친구는 그 누구보다도 멋지게 블루스를 연주해)에서 인용된 바 있다. [6] 따지고보면 '통제와 검열이 불가능할 때' 일어나는 것이 무차별적인 살상이고, 소련의 많은 인사들은 적백내전 때 그걸 겪었기 때문에 새삼 공산당이 아닌 다른 세력을 인정하느니 뭐니 하는 발언을 하지는 않더라도 '같은 공산당원들까지' 마구잡이로 죽여대는 학살에 찬성하는 인사는 스탈린의 핵심 동지들 중에서도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니콜라이 예조프 정도. 대숙청에 대한 수정주의적인 시각도 참고하면 좋다. [7] 사실 스탈린뿐만 아니라 당시 공산당 집행위원들 중 많은 이가 술꾼이었다. [8] 소련의 주요 공업지대를 독일의 침공에 맞서 우랄산맥으로 옮기는 것을 진두지휘한 전쟁영웅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