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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05 13:11:34

미하일 페트로프


파일:붉은 군대 낫과 망치.svg
소비에트 지상군 전선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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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최전방에서 단독으로 부대를 배치 · 지휘한 장군을 전선 사령관(Командующие войсками)으로 임명했다. }}}}}}}}}

<colbgcolor=#cd0000>
소비에트 연방 초대 제50군 사령관
미하일 페트로비치 페트로프
Михаи́л Петро́вич Петро́в
Mikhail Petrovich Petrov
파일:미하일 페트로프.jpg
<colcolor=#ffe400,#ffe300> 출생 1898년 1월[1]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현 잘루스테졔 마을
(現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레닌그라드주 잘루스테졔 마을)
사망 1941년 10월 14일[2]
소련 러시아 SFSR 오룔현 카라쳅스키구 골린카 마을 근처 숲
묘소 브랸스크 소비에트 연방 중앙묘지
재임기간 초대 제50군 사령관
1941년 8월 ~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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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복무 노농적군
1918년 ~ 1941년
최종 계급 소장 (노농적군)
주요 참전 러시아 내전
스페인 내전
폴란드 침공
독소전쟁
주요 서훈 레닌훈장
소비에트 연방 영웅
적성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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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 군인.

2. 생애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4년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푸틸로프 공장에서 기계공으로 일하다 페트로그라드에서 운전기사로 근무했다.

2.1. 10월 혁명

러시아 혁명 직후 페트로그라드 적위대 제2분견대장으로 임명돼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군대를 상대했다. 1918년 7월 야로슬라블 봉기를 진압한 뒤 동부전선에서 알렉산드르 콜차크의 군대를 공격한 뒤 악튜빈스크까지 진격했다.

2.2. 스페인 내전

1936년 9월부터 1937년 6월까지 드미트리 파블로프를 도와 제2전차대대장을 역임해 전투를 치렀다. 1937년 6월 21일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법령에 따라 레닌훈장과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2.3. 독소전쟁

제17기계화군단장으로서 제27전차사단, 제36전차사단, 제209기계화사단을 이끌었다. 서부전선에서 독일 육군 제2기갑집단군 제47차량화군단의 공격에 의해 민스크 근처에서 포위돼 큰 피해를 입었다. 1941년 8월 초, 제20소총군단장으로 임명돼 고멜을 사수하란 명령을 받았다. 1941년 10월 초, 독일 국방군 모스크바를 향한 총공세를 시작했다. 오룔-브랸스크 작전 당시 브랸스크 전선군의 부대 다수가 독일 육군에 포위되자 페트로프가 도주로를 뚫어낸 뒤 부대를 재편성했다. 1941년 10월 7일 안드레이 예료멘코 대장의 명령에 따라 제3군과 제50군을 동쪽, 제13군을 남동쪽에 배치시킨 뒤 반격을 담당했다. 페트로프는 충분한 지원도 못 받고 열악한 환경에서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후퇴와 재정비 도중 두 번 정도 독일 육군의 공격이 있었지만 모두 다 무사히 막아냈다. 그러나 최고사령부가 10월 15일 브랸스크-카라쳅스키 고속도로를 돌파하라고 명령했으나 독일 육군의 방어선을 뚫어내지 못해 제50군은 3만~3만 5천 명 정도의 병사가 포로로 잡혔다.

3. 사망

독일 육군 제53군단 제56보병사단 분견대가 젤토보디에 숲 동쪽 근처에서 페트로프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도망치다 사망했다고 밝혔다. 브랸스크현 골린카 마을에 매장된 후 1956년 10월 20일, 페트로프는 브랸스크 소비에트 연방 중앙묘지에 재매장됐다.
[1] 출처에 따라 3일 15일로 표기됐다. [2] 브랸스크의 역사학자 알렉산드르 가브렌코프의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