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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00:25:53

세르게이 키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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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초대 제1서기
세르게이 키로프
Серге́й Ки́ров | Sergei Kirov
파일:external/lexicon.dobrohot.org/00132965.jpg
이름 세르게이 미로노비치 키로프
Серге́й Миро́нович Ки́ров
Sergei Mironovich Kirov
본명 세르게이 미로노비치 코스트리코프
Сергей Миронович Костриков
Sergey Mironovich Kostrikov
출생 1886년 3월 27일
러시아 제국 밧카현 우르줌군 우르줌
(現 러시아 볼가 연방관구 키로프주 우르줌군 우르줌)
사망 1934년 12월 1일 (향년 48세)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레닌그라드
(現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상트페테르부르크)
묘소 크렘린 벽 묘지
재임기간 초대 제1서기
1921년 7월 ~ 1926년 1월
서명 파일:세르게이 키로프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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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아버지 미론 이바노비치 코스트리코프
어머니 예카테리나 쿠지미니치나 코스트리코바[1]
배우자 마리야 리보브나 키로바[2]
신체 168cm
소속 정당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1904년 ~ 1918년

[[소련 공산당|]]
1918년 ~ 1934년
주요 서훈 레닌훈장
적기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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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사후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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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게이 키로프는 소련의 정치인이다.

2. 생애

오늘날의 마리 엘 공화국과 인접한 소도시 우르줌에서 출생하였다. 본래 성씨는 코스트리코프였다. 그의 아버지 미론 코스트리코프는 국가 삼림청에서 사무원으로 일한, 당시 기준으론 꽤 고등교육을 받은 인물이었으나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며 가족들을 폭행하더니 1890년에 가족들을 버리고 사라졌다. 1893년 어머니 예카테리나 코스트리코바까지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할머니 멜라니야의 손에서 자랐다. 하지만 지인들의 도움으로 소련의 공식 전기에서 주장하는 것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후 지역 정교회 학교에 진학,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으며 우르즈움 시립 학교에 진학하여 진중하고, 깨어있으며, 책임감 있고, 특출난 학생이라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01년 시립학교를 졸업하고 카잔 산업학교로 진학하여 기술을 배웠으나, 열악한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을 보고 차르 체제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결국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북카프카스의 블라디캅카스 지역에서 활동하였고 몇 차례 체포 ·감금되었다. 1917년 11월혁명(구력 10월)으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1921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에 임명, 1921년 10월, 10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1922년 4월의 11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재선되었으며 세르고 오르조니키제와 함께 스탈린의 지시를 받고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자캅카지예 자치화를 추진하였다. 물론 말이 자치화지 지역 민족주의자들을 때려잡기 위한 포석이었다. 1923년 4월, 1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24년 6월, 1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스탈린의 충실한 부하로 활동하면서 스탈린과 각별한 우정을 쌓았고, 몰로토프는 스탈린이 즈다노프보다도 키로프를 더 총애했다고 회고했다.

1926년,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의 연합에 맞선 스탈린과 부하린의 연합에 가담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1926년 1월, 1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으며 지노비예프를 찍어내고 후임 레닌그라드당 제1서기에 임명되었다. 1926년 7월 23일, 안드레이 안드레예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아나스타스 미코얀, 세르고 오르조니키제와 함께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27년 12월, 15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재선되었으며, 1927년 곡물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대규모 징발에 나섰다. 1930년 7월, 1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34년 2월, 1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및 서기국 서기, 조직국(Orgburo) 위원으로도 선출되었다. 당시 키로프는 엄청난 인기 덕분에 단 한표의 반대표도 받지 않았으며, 서기국 선거에서 스탈린 대신에 서기장에 선출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좋은 평판과 인기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불과 10개월 후인 12월 1일에 레닌그라드 스몰니 학교에서 레오니트 니콜라예프란 전직 당원에게 암살당했다. 당시 니콜라예프는 이미 제명당한 후였지만 반납하지 않은 당원증을 보여주고 아무런 제지없이 키로프를 암살할 수 있었다. 당시 키로프는 레닌그라드 제1서기를 재임하면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소련은 발칵 뒤집혔다.

소련 외무장관을 역임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키로프가 암살당하자 충격을 받고 전화기에 대고 쌍욕을 퍼부었다. 그다음 보로실로프와 몰로토프를 거느리고 즉각 레닌그라드도 달려가서 범인 니콜라예프를 직접 심문하였다. 몰로토프는 니콜라예프가 키로프를 죽인 이유를 지노비예프 지지자라서 그랬을 것으로 추정했다. 스탈린은 키로프의 암살을 구실로 소련 지도자들에 대한 암살을 계획하고 있던 반당 집단을 적발했다고 주장하면서 대숙청을 일으켰다. 서비스는 스탈린이 키로프의 죽음으로 가장 큰 수혜자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키로프 암살은 워낙 당시로써 갑작스럽기도 했고, 무엇보다 대숙청의 기폭제로써 작용했기 때문에, 향간에는 키로프가 스탈린을 능가하는 인기를 구가하여 이를 시기한 스탈린이 암살했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실제로 흐루쇼프 재임기와 1990년에는 소련 검찰에서 스탈린과 NKVD가 키로프 암살에 개입했는지 재조사를 벌이기도 했지만, 결론적으로 유력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도 키로프의 암살이 스탈린의 사주였으며, 대숙청의 조작된 계기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암살과는 별개로 정치인으로써 키로프는 스탈린보다 많은 인기를 끌 정도로 대중적인 정치인이었지만 스탈린에게 충성했고, 특히 키로프의 정치적 고향인 레닌그라드에서는 독보적인 평판을 받았다.[3]

3. 사후

스탈린은 키로프를 일종의 순교자처럼 취급하여 키로프의 이름을 소련 전역에 명명했다. 오늘날 키로프 주와 키로프 시 모두 키로프에게서 따온 이름이며 해군 순양함이나 핵추진 순양함의 함명으로도 붙게 되었다.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레로 유명한 마린스키 극장 마린스키 발레단 역시 한 때는 키로프 극장, 키로프 발레단이라 불렸다. 한편 스탈린 집권 말기인 1952년에는 동독 라이프치히에 있었던 중공업 회사가 키로프 중공업(VEB Schwermaschinenbau S. M. Kirow Leipzig)으로 개명되었다. 동독 붕괴 후 민영화 및 여러 차례의 개명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키로프라는 이름은 아직 Techne Kirow로 남아 있다. 아르메니아 북부의 도시 가라킬리사도 1935년 키로프를 기리기 위해 키로바칸으로 변경되었으나 아르메니아의 독립 이후 바나조르로 다시 변경되었다.

4. 참고문헌



[1] 혼전성은 카잔체바 [2] 혼전성은 마르쿠스 [3] 여담으로 스탈린 시절 레닌그라드 지역 정치인이었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세르게이 키로프, 안드레이 즈다노프 모두 이른 나이에 일찍 죽었기 때문에, 레닌그라드 주민들 사이에서는 모스크바 중앙정부가 일부러 레닌그라드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레닌그라드에 연고를 둔 정치인들을 암살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