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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3 03:27:10

제31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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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보병사단
第31步兵師團
The 31st Infantry Di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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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빛누리 지키는 힘! 제31보병사단!
<colbgcolor=#60B840><colcolor=#E85000> 창설일 <colbgcolor=#fff,#1f2023> 1955년 2월 1일
상징명칭 충장(忠壯)[1]부대
소속 대한민국 육군
상급부대 제2작전사령부
경례구호 충성
규모 사단
역할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지역 방위
사단장 소장 이일용 (육사 51기)
작전부사단장 대령 서용 (3사 28기)
행정부사단장 대령 김현일 (육사 48기)
참모장 대령 OOO (0사 00기)
위치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

1. 개요2. 역사3. 예하부대4. 과거부대5. 출신 인물
5.1. 사단장5.2. 장교/부사관5.3. 병
6. 특징
6.1. 근무환경6.2. 사단가6.3. 충장회관
7. 사건 사고
7.1. 5.18 민주화운동7.2. 음어표 유출 사건7.3. 장흥 해안초소 총기 사망사고7.4. 여수 임포초소 생활관 신축 문제 갈등7.5. 목포 육군 일병 실족사 사고7.6. 31사단 육군 일병 사망사고7.7. 31사단 병사, 민간인 음주운전 사망사고7.8. 사단장 공관 잡일 강요
8. 사단본부 이전 논의9. 여담

[clearfix]

1. 개요

사단령
제1조(설치) ① 육군에 사단을 둔다. ② 사단은 관할구역의 작전·훈련 및 군 행정에 관한 사항을 관장한다.
대한민국 육군 보병 사단이다. 사단 사령부는 광주광역시에 있으며, 광주와 전라남도 지역을 방어하는 지역방위사단이다.

지리적으로 가장 후방에 위치해 있는 부대. 그 다음은 53사단이 있다.

2. 역사

파일:제31보병사단 부대마크(1955~2013).svg
舊 사단 마크(~2013년)
1955년 강원도 화천에서 창설되었고, 창설 직후 현재 주둔지로 재배치되어 후방 지역방위사단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과거 제1군관구사령부 예하부대였으나 1관구가 해체되며 제2야전군으로 예속되었다.

1998년 12월 17일 여수시 돌산읍( 돌산도) 임포리에서 해안으로 접근하던 북한 반잠수정 제95보병여단 1대대 소속 초병이 발견한 후, 격파한 여수 반잠수정 격침사건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좋은 소리를 많이 들은 건지 Again '98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 2010년도에는 31사단 관련 기관에 전화를 해 보면 맨 처음 들을 수 있는 게 'Again '98 영광을 재현합시다' 였다. 반잠수정을 발견한 것에 대해 당시 TOD 보던 이등병이 컵라면 먹다가 발견했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는 평범하게 근무 중에 발견했다.시기가 시기인만큼 근무 중에, 그것도 이등병이 컵라면 먹을 수 있는 분위기의 병영은 아니다 해당 발견자는 지금도 국가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실제로 TOD병 후반기교육 때 이 사례를 들어주면서 근무 잘 서면 인생이 바뀐다고 가르친다.

2008년도에는 통합방위유공으로, 2009년도에는 국방임무수행유공으로 2년 연속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아 지역방위사단 치고는 화려한 실적을 자랑하고 있다.

2008년도에 전복 도둑을 간첩으로 오인해서 검거한 사례가 있다.[2] 고속으로 온 배[3]에서 잠수부가 잠수하는 게 감시기지 영상에 딱걸린것. 얼핏 보면 딱 간첩처럼 보인다.

2008년 3월부터 보충역 교육도 담당했다. 2012년부터 받지 않는다는 루머가 있었지만 2021년부터는 보충역의 기초군사훈련을 실시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2021년 이후로 소집된 보충역은 모두 육군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게 된다.

2013년 10월 1일, 무등산과 숫자 31을 형상화한 새 사단 마크로 교체되면서[4] 횃불모양 때문에 불꽃슛부대라는 말이 생겼다.

국방개혁으로 인해 2020년 12월 1일부로 예하 연대들이 여단으로 승격되었다.

3. 예하부대

제31보병사단의 예하부대
제93보병여단 제95보병여단 제96보병여단
제503보병여단 신병교육대
※ 군 공통의 직할부대( 본부근무대, 의무근무대 등)는 소속 부대 문단 참고
※ 과거 소속 부대( 제31보병사단 동원지원단 등)는 과거 소속 부대 문단 참고

3.1. 사단직할대

3.2. 제93보병여단 횃불

관할: 전라남도 강진군, 해남군, 영암군, 장흥군, 완도군, 진도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93보병여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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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3. 제95보병여단 이순신

관할: 전라남도 순천시, 광양시, 여수시, 고흥군, 보성군, 구례군, 곡성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95보병여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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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제96보병여단 사자

관할: 전라남도 목포시, 나주시, 무안군, 함평군, 영광군, 신안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96보병여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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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제503보병여단 비호

관할: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담양군, 장성군, 화순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503보병여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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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과거부대

5. 출신 인물

5.1. 사단장

볼드체 대장 진급이 된 사단장.
역대 제31보병사단장
역대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초대 서종철 예) 대장 육사 1기 제3군단장, 前 육군참모총장, 前 국방부장관 한국야구위원회 총재
4대 송호림 예) 중장 육사 3기 육군본부 보병감, 제2보병사단 사단장 관선 전라남도지사
00대 김재명 예) 중장 육사 2기 제1군단장 교통부장관, 병무청장
00대 허순오 예) 준장 육사 7기 前 제 1군 심리전 참모, 前 육군본부 원호관리국장, 前 제70보병연대 前 토지개량조합 연합회 회장, 前 한국전력(주) 전무이사, 前 한국전기안전공사 초대 회장
00대 정웅 예) 소장 보병교 1기 육군본부 작전참모국 차장, 전북대학교 ROTC 단장 제13대 국회의원, 평화민주당 행정위원, 자유민주연합 특임행정촉탁위원
00대 배일성 예) 중장 육사 18기 육군군수사령관
00대 나중배 예) 대장 육사 15기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제9군단장
00대 김정신 예) 중장 갑종 156기 제8군단장
00대 조영길 예) 대장 갑종 172기 국방부장관, 前 합동참모의장
29대 백군기 예) 대장 육사 29기 육군특수전사령관, 前 제3야전군사령관 용인시장, 前 제19대 국회의원
31대 이봉원 예)중장 육사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군수사령관, 前 육군사관학교
32대 서길원 예)중장 육사 前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前 제6군단장, 前 제1야전군 부사령관
33대 모종화 예) 중장 육사 36기 제1군단장 병무청장
34대 고성균 예) 소장 육사 38기 육군사관학교장
35대 박병기 예) 소장 육사 40기 사단장
36대 권혁신 예) 소장 학군 23기 육군학생군사학교장
37대 권삼 예) 소장 육사 43기 육군동원전력사령관
38대 소영민 예) 중장 학사 11기 육군특수전사령관
39대 최순건 소장 육사 48기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39대 오병석 소장 육사 49기 대한민국 전략사령부 창설추진단 부단장
40대 이일용 소장 육사 51기 사단장

5.2. 장교/부사관

5.3.

6. 특징

예하에는 4개의 보병여단이 있어 각 지역을 방위하고 예비군 관리, 훈련도 담당하고 있다. 503여단은 광주 및 주변 지역(담양, 장성, 화순), 93여단는 전남 서남부(진도, 해남, 강진, 영암, 장흥, 완도), 95여단는 전남 동부권(순천, 여수, 광양, 고흥, 보성, 구례, 곡성), 96여단는 전남 서부, 북서부(목포, 나주, 무안, 함평, 영광)을 담당하고 있다.

부대별칭은 충장부대로 임진왜란 당시 지역의 의병장이었던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시호에서 따왔다.[10] 그래서인지 김덕령 장군을 명예 사단장으로 모시고 있다. 경례구호는 충성.[11][12]

6.1. 근무환경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부대기 때문에 기후는 꽤 좋다. 최전방에 있는 철원에 비하면 겨울에는 거의 지상낙원 수준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남해안의 몇몇 지역은 겨울에도 비가 오는 곳이 많아서 눈이 왜 깨끗한 쓰레기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겨울에도 쓸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봐도 된다. 물론 같은 전남권이어도 서해안 대설지역[13]같은 폭설 지대에 배치되면 헬게이트가 열린다.

지역 특성상 격오지가 많이 존재하고 있다. 눈이 오면 외부와의 교류에 제한이 없도록 도로에 쌓인 눈을 치워야 하는데, 레이더와 같은 병과는 높은 산 위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산 하나에 기지만 존재하고 다른 건물이 없는 경우도 많아서 적은 인원으로 꼭대기부터 가장 아랫 쪽까지 눈을 치워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작전근무, 경계근무병, 취사병, TOD병은 자연스럽게 빠지면서 약 20명 채 되지 않는 인원으로 산의 눈을 전부 쓸어내고 있다.

서해 남부와 남해의 서부를 담당하고 있는데, 지도만 봐도 한반도에서 가장 해안선이 복잡한 지역이다.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도 여기에 있다. 때문에 각종 격오지가 많은 부대다. 각 해안 대대당 2~6개 정도의 격오지(해안 소초와 TOD, 레이더 기지)가 존재한다. 혹시 여기로 떨어진다면 격오지로 안 떨어지기를 빌자. 사람이 너무 없고 잘 채워주지도 않아서 누구 하나 휴가나 전역이라도 하면 하루 12시간 근무인 2교대는 기본, 취사병도 근무를 새운다.[14] 인력난의 헬게이트를 볼수 있다. 특히 보급계는 무조건 겸직이다. 그렇다고 꼭 나쁜 것은 아닌 게 어지간한 훈련에서는 빠질 수 있다. 물론 밥먹듯이 하는 해안침투 FTX는 얄짤없이 참가고 지휘관 재량으로 유격을 주둔지 인원과 교대로 갔다오는 전례도 있어서 그냥 운에 달려있다.

그나마 일부 지역은 매우 좋은 편이지만 간첩이 침투했던 여수 쪽으로 배치되면... 몇몇 격오지는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아서 지하수를 쓰는데, 해안에 위치하다보니 가끔 소금물이 나오기도 한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창고에 생수가 있긴 하지만 먹는 물만 해결될 뿐 씻지도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다만 사단 직할대와 503여단 일부 대대가 위치한 광주광역시로 자대배치를 받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전남대학교가 버스로 10분 거리인 등 부대 주변의 환경이 매우 좋은 편이다. 어느 수준이냐면 창원 주둔 시절 제39보병사단 못지않은 수준. 그래서 사단 신병교육대대에서 조교 모집을 할 때 밀고 있는 캐치프레이즈가 외출/외박때 즐기는 광역시 라이프(...)이다.

당연하겠지만 사단 본부나 연대본부가 아닌 예하 대대로 빠지게 되면 침대가 있는 신형막사는 꿈도 꾸지 않는 것이 좋고 7조를 허공에 날린 병영생활관 현대화 사업의 혜택을 거의 못보다시피한 곳이 대부분이다. 그냥 배치받는 곳이 사단 본부도 아니고 여단, 연대 본부도 아니라면 생활관에 에어컨이 있는 곳으로 배치받기를 빌어야 한다. 생활관에 에어컨이 없는 부대도 많아서 여름이면 에어컨이 있는 식당에 매트 깔고 자는 부대도 여럿있고 인터넷 통신망도 같이 노후화됐는지 뻑하면 인터넷이 나가서 짧으면 몇분 길면 한달이 넘도록 못쓰는 상황도 자주 일어나고 운동이나 체력단련 이외의 여가활동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없는 부대도 많으니 배치돌릴 때 기도할 일이 많은 부대이다.

현재는 근해 경계, 감시는 육군이 완전히 빠지고 해군들이 담당하면서 3함대 참수리급 고속정들이 해상에서 해안 경계를 서고 있는 관계로 근무를 설 때 큰 부담은 안 느껴도 된다.

내세울 게 몇 없는 후방 지역방위사단인지라 여수 간첩침투를 격퇴한 임포작전을 완전작전이라고 다소 과하게 포장해서 홍보한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반면교사로 삼을 게 많은 작전으로 평가받는다. 근해로 들어오는 적 반잠수정을 최초 포착했을 당시 소초장과 대대 당직사령이 긴가민가 하면서 밍기적거리다가 미확인 물체가 다시 원해로 나가는 것을 보고 확신을 얻고 그제서야 다시 제대로 보고가 되긴했지만 그때는 이미 육군이 손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지라 공군과 해군의 합동작전으로 결국 해군 함정 광명함이 함포 발사로 격침시켰다.[15]

현재 섬의 경우 제9해병여단이 새로 창설되어 도서 정찰이나 매복은 해병대가 하기에 부담은 일부 줄었다. 해안에 설치되었던 철책도 지침에 따라 대부분 철거했고 현재는 철책없이 매복진지만 남아있다. 다만, 섬이 아닌 해안은 당연히 지켜야 하며, 해안선 침투 상황에는 제9해병여단 신속대응부대와 육군 대대에서 운용하는 5분대기조, 소초에서 운용하는 해안기동타격대 인원들이 함께 초기 대응하게 된다.[16] 다만 배치된 해병대의 인원이 한정돼있다보니 훈련을 받을 때 가까운 섬의 경우는 종종 육군과 경찰이 같이 들어가서 군경합동훈련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때 경찰 쪽에서는 군인들을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지만 부사관, 장교들은 경찰들과 은근히 기싸움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안을 제외한 나머지 도서지역의 경계에 대한 실질적인 부담은 많이 줄었지만 서울과 계룡, 대구에 앉아있는 높으신 분들과 부대 지휘관들은 격오지 인원들의 부담을 덜어 줄 마음이 단 1도 없는 게 문제다. 그리고 이것들이 해결되지 않는 한 작전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정도면 다른 후방에 비해 불편한 점이 있는 것이지 전방 사단들의 GOP 근무에 비하면 거의 땡보수준이고 보상은 꽤나 많이 따라오는 편이다. 다른 사단들도 비슷하겠지만 14년도 군번부터는 해안소초나 레이더 기지 등 격오지에 투입되면 최전방수호병들과 같은 수준인 1개월에 3일씩 보상휴가가 쌓이면서 사고만 치지 않으면 휴가 70일정도는 숨만 쉬고 있어도 나갈 수 있고 대부분의 해안대대에는 토요일에 정오까지 일과시간으로 되어있어 이에 따른 보상휴가가 기본적으로 12일이 더 주어지는 등 어지간한 전방 GOP부대들이 부럽지 않은 수준으로 휴가를 자주, 길게 나올 수 있고 돈도 어찌 됐건 소초나 레이더 기지에 투입된다면 격오지이기 때문에 격오지 수당이 따로 지급된다. 2만 원 남짓이지만 어찌 됐건 보통 병사들에 비해 돈도 조금 많이 받고 휴가도 많이 받는 나름대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숨겨진 꿀이 많은 부대다.

6.2. 사단가

(1절)
호남의 넓은 평야 바라보면서
새벽이슬 헤쳐가며 발걸음도 가볍게
조국을 지키려고 무술닦는 곳
무적의 용사들아 힘차게 나가자
약진하는 충장부대 무쇠같이 뭉쳤다
아~ 호남의 방패 31사단

(2절)
노령의 정기받고 무등에 안겨
저녁노을 즐기시며 돌아오는 간성들
조국을 지키려고 무술닦는 곳
무적의 용사들아 힘차게 나가자
약진하는 충장부대 무쇠같이 뭉쳤다
아~ 호남의 방패 31사단

파일:제31보병사단 부대마크.svg

6.3. 충장회관

충장회관
忠壯會館
Chungjang Hall
위치 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 79-3

충장회관 식당 - 면회객들과 군인이 밥먹을수 있는곳. 주로 피자나 치킨같은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패스트푸드와 고기류의 메뉴도 많지만 가격이 좀 센 편이다. 그래도 자판기의 음료수 가격은 싸다.

7. 사건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7.1. 5.18 민주화운동

(상략)

(다) 피고인 이희성은 윤흥정 전투병과교육사령관에게 계엄군을 투입하여 조속히 시위를 진압하라고 독려하고, 위 윤흥정은 다시 정웅 31사단장에게 7공수여단 33, 35대대를 광주 시내로 투입, 시위를 진압하도록 지시하여,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위 부대원들이 금남로 일대로 출동, 같은 해 5. 18. 16:00경부터 시위대를 해산시키면서 인근 점포나 골목, 건물 안까지 시위대를 추적하여 체포하고, 그 과정에서 시위대와 시민들을 구분 없이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심지어 머리를 가격하거나 체포된 시위대의 상의 등을 벗기고 기합을 주기도 하는 등의 과잉 진압을 실시하여 광주 시민 405명을 연행함과 동시에 8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중략)

(마) 해남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2대대는 부근 우슬재와 복평리에 매복 중 5. 23. 05:30경과 같은 날 10:00경 두 차례에 걸쳐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여 그 과정에서 별지 (2) 피해자 및 피해 상황 일람표 순번 제5항 기재와 같이 박영철 등을 각 사망하게 하였다.

(중략)

공소 외 소준열은 피고인 정호용에게 각 공수여단의 훈련 상황에 대하여 질문을 하여 3공수여단이 가장 훈련이 잘 되어있다는 대답을 듣고 도청 진입 임무를 3공수여단의 특공조에게 부여하는 등 광주 재진입 작전의 공수여단별 임무를 결정한 다음 5. 26. 10:30 전교사령관실에서 20, 31사단장, 3, 7, 11공수여단장, 전교사 예하 보병학교 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압 작전 지휘관 회의를 개최하여, 각 공수여단별로 특공조를 편성하여 전남도청 등 목표 지점을 점령하여 20사단에 인계하기로 결정하면서 작전 시각은 보안상 추후 통보하기로 한 후, 같은 날 16:00경 광주비행장을 방문하여 3, 7, 11공수여단장에게 5. 27. 00:01부로 작전을 개시할 것을 지시하였다.
서울고등법원 1996. 12. 16. 선고 96노1892 판결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류위반(뇌물)
(상략)

(나) 계엄 확대와 계엄군의 배치

2군사령부는 1980. 5. 17. 10:40 광주 소재 8개 전문대학에 31사단 병력을 투입하도록 지시하였고, 국무회의에서 19:35 계엄 확대 선포안이 의결된 직후인 19:40경 전투교육사령부에 대하여 5. 18. 00:01 이전까지 시위자를 체포하고, 04:00 이전까지 대학을 점령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5. 17. 20:00경 7공수여단에 대하여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를 5. 18. 02:00까지 점령하고 04:01까지 소요 주모자를 체포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계엄군은 전라남도 내 16개 대학 및 중요 시설을 점령하고, 대학을 수색하여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서만 100여 명의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이와 동시에 2군사령부는 1980. 5. 18. 광주 시내 직장 예비군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와 탄약을 회수하는 한편, 31사단의 무기고 접근자 발포 승인 건의에 대하여 군인복무규율에 따라 지휘관이 재량 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

(중략)

피의자 이○성 계엄사령관은 09:00경 공수여단의 증파를 지시하여, 11공수여단이 광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14:00경 청구 외 윤○정 전투교육사령관에게 군 병력을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할 것을 명령하였고, 청구외 정○ 31사단장은 14:05경 전남도청, 금남로 지역에 군 병력을 투입할 것을 지시하였다.

(중략)

(바) 5월 21일 상황

육군본부의 증원 결정에 따라 20사단 병력 3,000여 명이 광주에 증파되었으며, 04:30 육군본부는 계엄사 대책 회의에서 폭도 소탕 작전을 5. 23.부터 명령에 따라 실시하되 자위권을 발동하기로 결정하였다.

피의자 소○열이 16:30경 신임 전교사령관으로 부임한 다음 광주사태의 정치적 수습 방안을 건의한 청구외 정○ 31사단장으로부터 3개 공수여단에 대한 작전 통제권을 이양받아 공수부대를 직접 지휘하기 시작하였다.(하략)
헌법재판소 1995. 12. 15. 선고 95헌마221·233·297(병합) 전원재판부〔취하〕 [불기소처분취소]
흑역사로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된 적이 있다. 단, 당시 사단장이던 정웅 소장( 1980년 예편)은 강경 진압에 부정적이었다. 전남북계엄분소장 및 전투교육사령부(현 육군교육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윤흥정 중장[17]의 출동 명령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이후 정웅 소장은 예편당한 후에 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광주 북구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당시 전투교육사령부 소속 부대와의 오인 교전으로 3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당연하겠지만 5.18 유족 단체에게는 이 부대에 대한 인식이 썩 곱지는 않다. 광주에서 계엄군으로 진압에 투입되었던 제20기계화보병사단도 마찬가지. 전두환 대통령이 사단장을 역임했던 제1보병사단과 마찬가지로 영 좋은 소리 못 듣는 부대. 그나마 특전사보다는 상대적으로 덜한 편인데 앞에 언급한 정웅 소장과의 인터뷰 기사[18]에 따르면 지역방위사단에게는 심지어 빵이나 음료수를 가져다주었다고 할 정도. 31사단 병력은 공수부대보다는 온건한 대응을 폈다는 증언도 있고, 지역방위사단이란 특성상 지역민들의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게 이유인 듯 하다. 이것과는 별개로 정웅 소장은 광주에서 영웅으로 불리고 있는데 신군부에서 내린 강경 진압을 무시하여 예편당했었고 이후 김대중에게 광주의 진상을 폭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13대 총선에서 당선되었을 때는 90%가 넘는 지지율을 받았다. 이는 지휘관의 자질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아무리 상급자의 명령이라도 그것이 부당하면 그것을 무마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양심과 강단이 있느냐, 없느냐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살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민간인 희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항쟁 3일째인 5월 20일, 이날은 시민들이 시내버스와 택시로 차량시위대를 조직하여 계엄군의 만행에 정면으로 맞선 날이었다. 이 과정에서 광주역과 광주시청 사이에서 작전 수행한 3공수여단을 31사단이 지원했고 그 결과 이들에게 4명이 사망했다.






뿐만 아니라 23일 해남에서 총격 사망자 2명 포함해서, 31사단의 유혈 진압으로 총 6명이 사망했다고 5월단체는 밝혔다.( "광주 향토사단이 5.18 진압 중 시민 사살") 이 해남에서의 사망자 수 2명도 축소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실제 해남 사망자는 4~7명으로 추정된다. ( "해남 군부대서 시신 봤다"...청문회 증언 막아, 5.18 당시 해남 우슬재와 상등리에서 일어난 집단 총격) 당시 23일부터 계엄군이 해남읍 해리와 옥천면 영춘리 경계에 있는 고개인 우슬재를 점령하고 군중과 차량들에게 발포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5.18 민주화운동/전개 참고.

게다가 2019년 공개된 군 문서들에 따르면, 5.18 당시 31사단에는 화염방사기 지원대가 존재했고, 실제로 화염방사기를 30대 사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화염방사기 30대 사용’ 등 5.18 문서 2300여 건 공개) 22일에는 31사단장 정웅 소장이 무장헬기 조종사들에게 "로켓포를 쏴서라도 때려라"고 강경 진압 지시를 내린 사실이 드러났다.( '로켓포 쏴서라도 때려라' 전두환 재판에 등장한 군 헬기 기록)

이런 것들이 밝혀지면서 31사단이 시위대를 향한 특전사에 비해 학살 진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손놓고 보고만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31사단에 의한 사망자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19] 사단의 공식 전사자 명부에는 5.18 당시에 사망한 군인 2인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7.2. 음어표 유출 사건

2005년 8월 22일 오전 모 커뮤니티 사이트에 3급 군사기밀인 음어표가 유출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연대급 부대에서 쓴 것으로 드러났다. 네티즌들이 이를 발견하고 신고했으며 국군기무사령부가 수사에 나섰다. 이에 따라 군은 유출된 음어표를 다른 음어표로 교체했으며 2005년 9월 2일 음어표를 유출한 혐의자를 검거했는데 해당부대 출신 예비역 병장으로 드러났다. 동기는 상관인 중대장 중위에게 듣기 거북한 별명을 부르는 등 모욕에 대한 보복으로 몰래 들여온 디지탈카메라로 촬영해 버스터미널에 있는 유료 컴퓨터로 인터넷에 올린 것으로 드러났다. # #

7.3. 장흥 해안초소 총기 사망사고

2013년 7월 25일 오후 5시 55분께 육군 해안초소에서 31사단 소속 김 모 일병이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 그리고 김 모 일병 관물대에서는 '군 생활이 힘들다'는 내용이 담긴 메모가 발견됐다. 이후 조사 과정에서 소속 군부대에서 선임들의 욕설과 폭언이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김 모 일병은 통신 특기로, 업무에 관련한 암기가 요구되었는데 선임병들의 폭언과 과도한 암기 강요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7.4. 여수 임포초소 생활관 신축 문제 갈등

여수 시민위 "국방부, 향일암 충돌 사과하라"
간첩선 잡은 여수 임포소초, 생활관 신축 갈등 1년만에 봉합
여수 임포소초 생활관 신축 ‘상처 남기고 마무리’

2014년 12월 기존 노후된 시설을 대체하기 위해 여수시 돌산읍 향일암 지구 근처에 초소의 생활관을 신축 공사를 개시했다. 그런데 지역 주민들이 자연환경 훼손 문제 등을 제기하며 군과 충돌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마찰이 장기화되고 공사가 지연되자 국민권익위원회와 지자체가 중재를 나섰고, 논의 결과 도출된 기존 부지에 증축 및 개축, 완공 후 거북머리 원상 복구, 거북머리 인근 부지 공원 조성 후 관광객 공개 등의 중재안을 양측에서 겨우 수용하면서 1년만에 마무리되었다.

7.5. 목포 육군 일병 실족사 사고

2015년 1월 16일 31사단 소속 모 일병이 해안경계 근무를 하던 도중 실족하여 사고 발생 7일만인 23일에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당초에는 무장탈영에 초점을 두고 국지 도발급으로 격상되면서 피아식별띠 평시 착용에 근처 지역에는 검문소도 치면서 탐색을 하였으나 실탄이 아닌 공포탄을 챙기고 군장을 한 상태였던 점과 주변지역 CCTV들을 아무리 뒤져도 그림자 하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실족사로 인한 실종에 무게가 실려 수색을 하였고 그에 따라 발견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탈영에 초점을 두면서 실종 가능성을 초반에 염두에 두지 않은 군 당국의 미숙한 대처에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사고 당시 같이 근무를 서고 있었던 선임의 거짓진술에 휘둘렸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더더욱 까이고 있다.

후속 기사에서 계속 "일병"으로 나오는 걸로 보아 순직 처리 및 1계급 추서는 되지 않은 모양이다. 기사

7.6. 31사단 육군 일병 사망사고

전남 한 군부대에서 병사가 숨진 채 발견돼 군이 조사를 벌이고 있다.

2018년 9월 16일 육군 제31보병사단에 따르면 전날 오전 전남 한 육군 부대 내 생활관 인근에서 A(20) 일병이 숨진 채 발견됐다.

불침번을 서던 A 일병이 근무교대 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자 부대원들이 수색에 나서 A 일병을 발견했다.

군은 가혹 행위 여부 등 정확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기사

7.7. 31사단 병사, 민간인 음주운전 사망사고

2022년 11월 11일 23시 경 혈중 알코올 0.122의 40대 남성이 카니발로 원전 주변 해안 경계초소를 순찰하기 위해 정차중이던 작전수행 차량과 추돌해 병장 1명이 사망하고 병사 2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31사단 관계자는 사망 장병에 대해 장례와 유가족 지원이 있을 예정이고 부상 장병에 대해서도 치료가 이뤄지도록 군 차원의 지원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사고경위를 조사하고 40대 남성을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을 적용해 입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기사

7.8. 사단장 공관 잡일 강요

2023년 1월, '육군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육대전)에 부사관들이 사단장 공관에 불려가 이삿짐 센터 직원들처럼 일하고 냉장고 청소까지 해야했다는 제보가 나왔다.

이에 대해 31사단 측은 사단장 개인 이삿짐을 옮긴 것이 아니라 부대 물품을 옮긴 것으로 해당 업무를 담당하는 본부대가 다른 일을 하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타부대 부사관을 차출한 것이라며 양해를 구했다.

기사

8. 사단본부 이전 논의

일부 지역방위사단 사령부가 시가지의 확장으로 인해 이전했거나 이전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은데, 31사단은 이전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언급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다른 군부대에 비해 이전 요구에 대한 목소리가 거의 없다시피 한다. 일단 31사단 사령부 주변에 주택가가 있지만 사단 자체가 산기슭에 있어 개발요구에 대한 마찰이 없었기 때문.

하지만 광주 인근 지역에서 훈련중의 폭음이 문제가 되어 민원이 꾸준히 늘어온 관계로 2014년 제6회 지방선거에서 다수 후보들이 31사단의 위치 이전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다만 선거 공약과 달리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근시간 내 이전 가능성은 없어보인다. 실제로 민선5기 광주시에서 기존 부지를 개발해 이전 예산을 마련하는 '기부 대 양여' 방식으로 31사단을 시 외곽으로 옮기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민선6기 이후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전례가 있다. 이전을 추진하는 단체에게 군부대 토지의 소유권을 이전하기 위해서는 현재 군부대가 위치한 부동산(토지+건물) 가치보다 더 높은 가치의 군부대 시설(토지+건물+시설)를 받아야 국방부에서도 부대 이전 허가가 떨어지는데 그 근처에는 옮길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20]

민선8기 강기정 광주시정에서 시 내부의 군부대 이전 논의가 진행중인 가운데, 우선순위로 둔 제1전투비행단과 무등산 방공포대 이전 이슈에 우선순위가 밀려있어 31사단 이전 논의는 중단된 상태이다.

그러나 함평군의 군공항 유치 및 광주시 편입 추진을 시작으로 같이 지방소멸위기에 처해있는 광주권 지역에서 인구 유입을 위해 군부대 유치에 나설 가능성이 커지면서 논의가 다시 이뤄질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지방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의 경우 인구가 줄어든 만큼 공가가 늘어나고 있어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닌 상황이기 때문이다.

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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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실려 있지 않은 단어고, 단국대 한국한자어사전에서는 많은 인물들의 시호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2] 당시 신문 기사 사실 완도쪽이 아니라 해남쪽에 더 가까웠다. 덕분에 상황은 양쪽에 다 떨어졌지만. [3] 보통 그런 배들은 마개조를 통해서 쌍발 엔진을 쓰기때문에 정말 빠르다. [4] 1)31 숫자를 횃불로 형상화 + 광주의 상징색, 2)호남의 방패를 의미하는 방패모양과 무등산의 세 봉우리를 의미하는 상단 + 전남의 상징색, 3)백의민족이라는 의미의 흰 테두리, 광활한 해안을 상징하는 파란색이라고 한다. [5] 군악대는 본부근무대 소속이다. [6] 해당문서 참조. [7] 717관리대대 편입됨. [8] 공식 명칭이 제31보병사단 동원지원단이었으나 2018년 4월 6일 육군동원전력사령부가 창설된 이후 동원전력사령부 예하 부대로 독립되자 "제31동원지원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9] 2022년 12월부로 해체. [10] 광주광역시 동구의 번화가인 충장로의 이름 또한 여기서 유래했다. [11] 이전에는 오랫동안 "단결" 이었다. [12] 1989년 이전에는 부대별칭이 "삼일부대"였다. [13] 목포, 무안, 영광, 함평 등 [14] 흔히 몇개월 방식의 사이클로 돌아가는 전방과는 다르게, 여기는 한번 격오지에 빠지면 전역날까지 있어야 한다. [15] 그래도 최초 목격자 즉 포착은 여수 임포소초에서 TOD 감시근무를 서고있던 김태완 당시 이병이었고 해군의 레이더기지는 보고가 된 후에 비상이 걸린 후 여수에서 원해로 나가는 배를 찾은 거라 포상과 국가유공자 등의 혜택은 전부 최초 목격자인 당시 김태완 이병과 사수였던 모 병장이 받았다. [16] 다만 서술했다시피 지역 자체가 넓고 해안선도 길고 해병대 신속대응부대는 제한적으로 배치돼있다보니 해병대 근처로 침투하는 것이 아니라면 적들이 해안선 침투에 성공했을 때 가장 먼저 보게 될 부대는 아마 31사단 예하의 소초에서 운용하는 해안기동타격대나 해안 매복지에 매복하고 있는 분대 등 어찌됐건 31사단 예하 장병일 것이다. [17] 다만 이 사람도 군의 강경 진압을 반대하다 작전 중에 소준열 소장으로 교체당한다. [18] 해당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략) 이와 관련하여 광주사태를 목격했다는 박 모 씨(38)는 『광주사태 때 광주 시민들이 정 장군의 향토(현 지역방위)사단 병력에는 빵, 음료수 등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그때 공수부대는 얼룩무늬 군복을, 향토 사단은 초록빛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향토사단 병력은 시민들을 과잉 진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때 향토 사단마저 발포를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라고 말했다. (후략) [19] 사단장 정웅 소장의 항목을 참고. 다만 당시 정웅 소장은 초기 온건한 대응과, 사건 이후 보안사에서 강도 높은 조사 후 강제 전역 조치되었으며 전역 사유가 "계엄 시 근무지 이탈"이므로, 정웅 소장이 부재한 상태에서 차상급 지휘관들이 작전을 이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20] 군 부대를 지을 땅이 없는 게 아니라 오치동에 위치한 사단 본부의 토지 가격과 건물 가격을 맞춰주면서 인근 장성이나 화순, 담양 혹은 광주 외곽 인근으로 옮기기에는 그 가치의 차이가 매우 크다보니 군 부대의 규모가 매우매우 커져야 하는데 이게 이전 대상이 되는 지자체에는 달갑지 않은 일일 수밖에 없고 애당초 광주 외곽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광주시청이 아닌 전남도청과 타 지자체 시청의 관할이다보니 연계가 잘 되려야 잘될 수가 없는 데다가 광주 외곽을 준다고 해도 언제 이전한 군부대 근처에 주택단지가 들어설지 모르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실현이 되지 않고 있다. [21] 걸어서 5분 거리에 때마침 신호등이 파란불이라면 3분도 안 걸린다 주변 PC방, 대중 교통 몇 분 타면 전남대.... 휴가나 외박, 외출 나올 때는 주위에 피시방도 있고 택시타고 곧바로 버스터미널 갈 수 있어서 좋은데 평상시에 일과 뛰면서 밖의 광경을 보면 정신건강에 많이 안 좋다는(...) 단점이 있다. [22] 옆 도로에서 레펠 강하 훈련용 탑이 다 보일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