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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1:38:35

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

인듀어런스호에서 넘어옴
1. 개요2. 탐험대원 모집3. 탐험 과정
3.1. 출항, 남극으로3.2. 인듀어런스 호의 난파3.3. 남극해 항해, 용의 바다를 건너라3.4. 사우스조지아 섬 횡단3.5. 엘리펀트 섬에 잔류한 대원들3.6. 귀환3.7. 후일담
4. 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과의 비교5. 여담6. 외부 링크
6.1. 관련 서적6.2. 관련 영상

1. 개요

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Imperial Trans-Antarctic Expedition)는 영국 어니스트 섀클턴 남극 횡단을 목표로 만든 탐험대로, 1914년에 출발하여 인명 손실 없이 1917년에 귀환하였다.

이 탐험대가 후술할 시련들을 겪고 살아 돌아온 여정은 후일 "위대한 실패"라 불리고 있다.

2. 탐험대원 모집

로알 아문센이 남극점을 정복한 후인 1914년 3월, 섀클턴은 '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를 이끌고 남극 횡단에 도전했다. 이들이 탄 배는 인내라는 뜻의 '인듀어런스(Endurance) 호'였는데, 이 이름이 예언이라도 된 듯 이후 탐험대는 극한상황 속에서도 인내로 버틴 끝에 생존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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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클턴이 당시 탐험대원을 모집하기 위해 신문에 낸 광고로 알려진 사진.[2] 1990년대 <삶과 꿈>이라는 월간지에서 한 광고 전문가는 너무나도 솔직하고 그 어떤 과장도 없음에도 지원자들이 넘치게 왔다고 하면서 가장 역사적인 광고로서 이 광고를 거론한 바 있다.
구인
MEN WANTED


위험한 여정, 적은 임금, 혹한, 몇 달간 완전한 어둠, 끊임없는 위험, 무사귀환 불확실, 성공 시 명예와 영광.
for hazardous journey, small wages, bitter cold, long months of complete darkness, constant danger, Safe return doubtful, Honour and recognition in case of success.

- 어니스트 섀클턴 벌링턴 가 4번지.
Ernest Shackleton 4 Burlington st.
고생길이 열리고, 고생한 만큼 보상해주지 못할 수도 있으며 죽을 수도 있다는 지나치게 솔직한 내용이었고, 실제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여정이었지만, 놀랍게도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원하여 무려 197:1이란 엄청난 경쟁률을 기록하였고, 사실 당대에 이미 널리 알려진 유명한 탐사계획이라 광고를 낼 이유도 없이 사람들이 밀려왔다고 한다. 섀클턴은 그중에서 27명의 우수한 대원들을 뽑을 수 있었다. 당대 사람들에게도 그랬지만, 낭만과 감성을 자극하는 너무나도 강렬한 문구인 까닭에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창작물에서 꾸준히 인용 및 변형 차용되기도 했다. 이때 면접에서 노래를 시켜보기도 했는데 이는 첫째로 원정대장의 지시를 얼마나 잘 따르는지, 둘째로 극한의 상황에서 긍정적으로 임할 수 있는지 본 것이라고 하며 그리고 멘탈을 경험만큼이나 중요시한 이 면접은 실제로 효과를 보게 된다.
이름 생몰년도 직책
어니스트 섀클턴 (Ernest Shackleton) 1874-1922 대장
프랭크 와일드 (Frank Wild) 1873-1939 부대장[3]
프랭크 워슬리 (Frank Worsley) 1872-1943 선장[4]
프랭크 헐리 (Frank Hurley) 1885-1962 사진가
휴버트 허드슨 (Hubert Hudson) 1886-1942 항해사[5]
라이오넬 그린스트리트 (Lionel Greenstreet) 1889-1979 1등 항해사[6]
톰 크린 (Tom Crean) 1877-1938 2등 항해사[7]
알프레드 치탐 (Alfred Cheetham) 1867-1918 3등 항해사[8]
루이스 리킨슨 (Lewis Rickinson) 1883-1945 기관장
알렉산더 케르 (Alexander Kerr) 1892-1964 2등 기관사
제임스 매클로이 (James Mcllroy) 1879-1968 외과의[9]
알렉산더 매클린 (Alexander Macklin) 1889-1967 외과의[10]
로버트 클락 (Robert Clark) 1882-1950 생물학자
레너드 허시 (Leonard Hussey) 1891-1964 기상학자[11]
제임스 워디 (James Wordie) 1889-1962 과학자 대표 겸 지질학자
레지널드 제임스 (Reginald James) 1891-1964 물리학자
조지 마르스턴 (George Marston) 1882-1940 미술가[12]
토마스 오르데-리스 (Thomas Orde-Lees) 1877-1958 창고 담당겸 모터 전문가[13]
해리 "치피" 맥니쉬 (Harry Chippy McNish) 1874-1930 목수[14]
찰스 그린 (Charles Green) 1888-1974 요리사[15]
윌리엄 스테펜슨 (William Stephenson) 1889-1953 보일러 엔진 담당
어니스트 홀네스 (Ernest Holness) 1892-1924 보일러 엔진 담당
존 빈센트 (John Vincent) 1879-1941 선원[16]
티모시 매카시 (Timothy McCarthy) 1888-1917 선원
월터 하우 (Walter How) 1885-1972 선원
윌리엄 베이크웰 (William Bakewell) 1888-1969 선원[17]
토마스 매클리오드 (Thomas McLeod) 1869-1960 선원[18]
다니엘 구치 (Daniel Gooch) 1869-1926 개 조련사
퍼스 블랙보로 (Perce Blackborow) 1894-1949 선원 보조 겸 밀항자

총인원은 27+1명이었다. +1은 퍼스 블랙보로(Perce Blackborow)라는 이름의 밀항자로 당시 18세의 소년이었다. 탐험대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물 당시 주방 보조로 잠시 와 있었는데 퍼스의 친구인 선원 윌리엄 베이크웰이 다른 선원들과 짜고 퍼스를 몰래 태운 것이다. 출항하고 나서야 모르는 얼굴이 타고 있는 것을 본 섀클턴은 노발대발했는데 어찌나 크게 화를 내던지 퍼스를 몰래 승선시킨 선원들이 자백을 했을 정도였다. 작정하고 도로 내려놓으려면 아직은 돌아갈 수 있었고, 실제로 로버트 스콧 일행도 예정에 없던 한 사람이 더 가는 바람에 모두 죽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내려놓고 가야 한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섀클턴은 "식량이 떨어지면 제일 먼저 널 잡아먹을 테다!"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퍼스를 데리고 갔다. 이 대목은 책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 초반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섀클턴이 퍼스에게 '이런 항해에서 우리는 배고파질 때가 많고, 그럴 때면 제일 먼저 밀항자를 잡아먹는다는 걸 알고 있나?'라고 질문하자 퍼스는 '저보다야 댁이 더 먹을 게 많을 것 같습니다.'라고 받아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섀클턴은 미소를 감추고는 그를 일행에 넣고 주방 보조 일을 주었다.(Huntford, R. "Shackleton", p. 384. Carroll & Graf, 1998).[19]

그런데 하필이면 준비 도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전시에는 선박, 인력, 물자가 동원되기 마련이라 섀클턴의 탐험대는 출발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해군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출발을 명령함으로써 탐험은 시작될 수 있었다. 대전 초기만 하더라도 영국 입장에서 총력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20]

3. 탐험 과정

3.1. 출항, 남극으로

1914년 8월 8일, 영국의 플리머스항을 출항한 인듀어런스호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했다. 미리 여행 겸 현지준비를 위해 가있었던 섀클턴은 여기에서 합류했으며, 탐험대장이 합류한 탐험대는 10월 26일, 남대서양으로 향하여 11월 5일, 남극 대륙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사우스조지아 섬에 도달하게 된다.

인듀어런스호는 사우스조지아 섬의 포경기지에 정박하면서 한달 간 탐험 준비와 물자 준비를 마치고 12월 5일 남극으로 출항했다.

3.2. 인듀어런스 호의 난파

남극 대륙의 초입이라 할 수 있는 웨들 해에 진입해서 상륙을 시도하던 섀클턴 탐험대는 얼음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음을 알게 된다. 1월달이었지만 남반구였기 때문에 여름이었다. 그래서 인듀어런스 호는 1915년 1월 20일부터 10월 27일까지 해빙에 갇힌 채 남극해를 표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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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때까지는 비교적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주위에 널린 바다표범 펭귄을 잡아먹을 수 있었기에 비교적 식량이 풍부했다. 하지만 봄이 되고 얼음이 녹기 시작하자 지옥이 시작되었다. 겨울 동안 배 주위에 빽빽하게 얼어붙은 두꺼운 해빙이 인듀어런스 호의 선체를 통째로 쥐어짜 박살낸 것이다. 겨울 동안 배를 붙들어맸던 얼음이 녹자 이젠 배가 가라앉게 생긴 것. 운명의 10월 27일, 섀클턴은 명령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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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클턴 탐험대는 개인소지품 대부분을 버리고 쓸모 있는 물건들만 건져낸 후, 부서진 배 근처에 임시캠프를 설치했다. 섀클턴 개인소지품은 2 파운드까지만 가지고 가라는 명령을 내린 뒤 자신이 대원들에게 시범을 보였다. 그는 금화와 시계, 은 브러시와 여행가방을 얼음 위에 버리고 탐험 시작 전에 알렉산드라 황태후가 선물한 성경에서 몇 페이지를 뜯어내고 버렸다.[21]

위의 사진 중 하나에도 나와있지만 이 당시 사진기는 휴대용이 아닌 거치대에 놓고 작업해야하는 제법 큰 크기의 물건이다. 생필품을 하나라도 더 챙겨야 하는 급박한 상황임에도 이런 사진들이 왜 남아 있는가 하면, 스콧과 달리 재정적으론 궁핍했던 섀클턴은 투자자에게 융자받는 대신에 모험 도중 찍은 사진들에 대한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팀원 중 하나였던 레너드 허쉬가 사진을 찍어야만 했고 배를 포기하는 과정에서 사진기 필름이 물에 빠지자 물에 뛰어들어 필름을 건져내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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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클턴 탐험대는 얼음 바다에서 빠져나와 육지로 가기 위해 행군을 시작하지만 집채만한 얼음덩이가 언덕을 이룬 바다 위에서 보트를 끌고 전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결과 출발한 날에 그들이 전진한 거리는 불과 1.6km로 약 8천보 밖에 가지 못했다.(평지에서 걷는 인간의 시속이 4~6km 정도). 이렇게 되자 탐험대는 비교적 안전한 부빙 위에 '오션 캠프'라는 이름의 새로운 캠프를 설치하고 2.4km 떨어진 곳에 있던 인듀어런스 호의 잔해에서 쓸 만한 물건을 모조리 꺼내오기 시작했다.

11월 21일, 결국 인듀어런스 호의 잔해는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이후 섀클턴은 과거에 다른 탐험대가 물자를 비축했던 적이 있는 폴렛 섬으로 진로를 잡고 이를 위해 12월 22일, 그들이 가져갈 수 없는 모든 물건을 크리스마스 만찬에 소비한다.

그러나 섀클턴 탐험대는 또 다시 난관에 부딪히고 만다. 부빙이 점점 얇아지면서 갈라지기 시작했고 바다 위를 떠다니는 얼음들은 그들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결국 섀클턴 탐험대는 다시 전진을 멈추고 페이션스[22] 캠프를 설치한 후 오션 캠프에 남아 있던 짐과 조각배 한 척을 끌고 온다.

문제는 섀클턴 탐험대의 목표는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는 것. 그들이 올라탄 유빙은 폴렛 섬에서 동쪽으로 100km 이상 떨어져 있었고, 그 거리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섀클턴은 결단을 내린다.
"다른 섬으로 가자!"
이를 위해 섀클턴 탐험대는 남극 탐험을 위해 데려왔던 54마리의 개를 전부 죽이고 식량으로 삼았다. 참고로 처음 데려올 때는 총 69마리였으나 인듀어런스에서 지내면서 일부가 병으로 죽었고, 중간에 새로 태어난 개가 몇 마리 있었으나 이 개들도 마지막엔 식량으로 삼았다. 개들까지 보트에 태울 여력은 이미 없었던 것이다. 섀클턴 탐험대 입장에선 최후의 선택에 가까웠지만, 이 행동 때문에 여러 동물 애호 단체로부터 오랜 시간 비난을 받았다. 펭귄이나 바다표범의 과도한 남획 또한 잘못이기 때문에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겠지만 이도저도 아닌 짓만 하던[23] 스콧이 어떻게 되었는지 감안하면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게다가 이미 스콧이 탐험을 떠날 때도 조언을 했고, 자신의 조언을 듣지 않은 스콧의 최후를 인지하고 있던 섀클턴에게는 선택의 고민조차 사치였다.

1916년 4월 8일, 페이션스 캠프가 있던 부빙이 갈라졌고, 거기에 있던 섀클턴 탐험대는 세 척의 조각배를 바다에 띄웠다. 대원들은 "이제 자유다!"를 외쳤는데, 그동안 자신들을 가두었던 얼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맑은 날은 오지 않았다. 날씨는 닥치고 흐렸고, 물의 흐름은 실로 거셌으며, 얼음 덩어리가 사방에 돌아다니고, 좀 큰 얼음 덩어리 위에서 휴식을 취하려고 올라갔더니 갑자기 부빙이 갈라지면서 대원 하나가 침낭에 든 채로 바다에 빠지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 대원은 얼음이 다시 붙어 버리기 전에 구조되었지만, 이래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4월 15일, 섀클턴 탐험대는 난관을 이겨내고 엘리펀트 섬 발렌타인 곶에 상륙한다. 497일 만에 처음 보는 육지였다. 탐험대가 상륙한 엘리펀트 섬은 사우스 셰틀랜드 제도에 속하는 섬으로, 세종 과학기지가 위치한 킹 조지 섬으로부터 북동쪽으로 100 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섬이다. 남위 61도의, 본격적인 남극이라기보단 사실상 남극권에 가까운 지역이라 남극치고는 날씨가 좋은 편이어서 여름에는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고 겨울에도 대관령 정도까지만 기온이 내려가는 따뜻한(?) 날씨를 보인다. 상륙 이틀 후에 그들은 섬 안에서 좀 더 안전한 와일드 곶으로 캠프를 옮긴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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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엘리펀트 섬은 무인도여서 외부에 구조를 요청할 수는 없었고, 먹을 거라고는 섬에 있던 바다표범과 펭귄 조금,[25] 그리고 홍차밖에 없었다.[26] 더욱 고약하게도 그들이 자리잡은 와일드 곶은 구아노라고 불리는 새똥[27]으로 뒤덮여 있었고, 잠을 청할 자리는 그 똥무더기밖에 없었다. 게다가 연료는 부족했고,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으며, 구조선이 올 가망은 전혀 없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섀클턴은 1916년 4월 20일 중대발표를 한다. " 사우스조지아 섬에 다시 돌아가서 구조선을 불러오겠다."는 것.

3.3. 남극해 항해, 용의 바다를 건너라

"우리는 이제껏 최고의 모험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모험은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위대하겠죠. 우리는 이기면 살 것이고 패배하면 죽을 것입니다. 마치 동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어니스트 섀클턴
섀클턴 스스로가 인정한 것처럼 그의 계획은 무모했다. 몇 가지만 들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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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커드 호. 이 조각배 한 척 가지고 남극해를 건너겠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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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커드 호가 이동한 자취는 파란색이다. 저 파란 선의 길이는 무려 1300 km를 넘어 서울- 부산(412 km) 육로의 3배 이상이다. 서울에서 오키나와까지 남극 환류와 추위를 뚫고 저 작은 조각배를 타고 항해한 셈이다.

하지만 어차피 열악한 엘리펀트 섬에서 기약 없이 구조대를 기다리는 것도 딱히 좋을 게 없었기에 대원들은 위험한 임무라도 앞다투어 지원했는데, 사실 섀클턴은 처음부터 누가 임무에 도움이 될지 와일드와 신중하게 고민해서 결정했고 자원 여부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이에 따라 6명이 남극해 항해를 하게 되었다.

4월 22일, 6명은 엘리펀트 섬을 떠나 바다로 향한다. 섬에 남는 대원들에게 섀클턴이 마지막으로 전한 명령은 "한 달 후에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날 기다리지 말고 디셉션 섬으로 탈출해라"였지만, 사실 그들이 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34]

16일 동안 제임스 커드 호가 겪은 날씨는 고작 하루의 반나절 정도만 맑고 온통 폭풍 뿐이었다. 그러다 맑은 날이 하루 더 오는 듯했고 섀클턴 일행은 드디어 하늘을 보게 되었다고 기뻐하다가 맑은 하늘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평생 처음 보는 어마어마하게 큰 파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35]
구름 사이 사이로 틈이 보이자 날씨가 맑아진 줄 알고 선원들에게 큰 소리 쳤다. 하지만 알고 보니 저건 구름이 아니라 집채만 한 파도의 하얀 물마루였다. 지난 26년 동안 바다에서 별 일을 다 겪었지만 이렇게 거대한 파도는 본 적이 없었다. 남극해의 어마어마한 변덕은 지난 며칠 동안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힌 바다에서 보던 파도들과 차원이 달랐다. 그 파도를 보자마자 "제길, 꽉 잡아! 여기로 온다!"고 외쳤다.
『섀클턴의 일지』 中 (출처: 『살아 남은 자들의 용기』, 베어 그릴스 저)
그 즉시 모두는 배를 꽉 붙들었고, 그 뒤는 처참했다. 파도가 칠 때마다 배는 푹 젖었으며, 안 젖은 것은 구석에 있던 성냥밖에 없었다. 침낭 역시 확실하게 젖었다. 이 침낭은 밤이 되자 얼어붙었고, 결국 섀클턴 일행은 침낭 6개 중 2개를 버리고 교대로 수면을 취해야 했다. 얼어붙은 침낭의 무게는 얼음까지 더해 무려 30kg에 달했기 때문에 그냥 두면 배를 가라앉힐 판이었다. 노 4개 중 2개도 같은 이유로 버려졌다.[36] 또한 세찬 파도에 배가 한 번 흔들릴 때마다 균형을 잡기 위해 돌을 끌고 앞뒤로 기어다녀야 했고, 어두컴컴한 배 안에서 무거운 돌을 끌고 다녀야 했기에 움직일 때마다 큰 소리로 방향을 말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대원들이 상처투성이가 된 건 말할 나위도 없다. 게다가 물통이 찌그러지면서 뚜껑과 물통 사이로 바닷물이 들어가는 바람에 식수가 부족해졌으며, 마지막 날인 5월 9일에는 어마어마한 폭풍을 만나게 된다. 이 폭풍으로 사우스조지아 섬 인근에 있던 500톤짜리 기선이 침몰했다. 그러나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그들은 해냈다.

3.4. 사우스조지아 섬 횡단

5월 10일, 엘리펀트 섬을 출발한 지 16일 만에 그들은 살아서 사우스조지아 섬에 상륙했다. 하지만 이들이 도착한 하콘 만은 목적지인 기지가 있는 스트롬니스와 정반대편에 있었고, 배를 타고 목적지까지 돌아서 가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만일 해류를 잘못 타면 순식간에 망망대해로 나가 영원히 돌아올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Shackleton_South_Georgia_Crossing_map-fr.svg.png
섀클턴 일행의 횡단 루트
결국 이들은 최대한 보트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간 후[37] 스트롬니스까지 섬을 횡단하여 걸어가기로 결정한다.

5월 12일, 섀클턴 일행은 3일분의 식량을 갖고 목적지인 스트롬니스로 출발한다. 그러나 성공 가능성은 여전히 0에 가까웠다.
그러나 섀클턴 일행은 포기할 수 없었고 이를 악물고 산을 올랐다. 수직의 절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거나 간신히 우회해 산을 넘었더니 또 다른 산이 앞에 서있는 경험을 수 차례나 반복하다 이름 모를 바위 옆에서 잠시 휴식하기 위해 멈춰섰고 완전히 기진맥진한 대원들은 곧바로 잠에 빠지지만,
30분 지났다. 일어나.
섀클턴은 겨우 5분을 잔 대원들을 발로 걷어차며 깨웠고, 덕분에 대원들은 얼어죽지 않았다. 이것은 현명한 행동이었는데, 극한의 추위에 노출된 상태에서 잠에 빠졌다간 저체온증으로 동사하는 건 시간 문제이기 때문이다.[42] 섀클턴도 잠에 들려던 찰나, 저 생각이 들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원들을 깨웠다. 겨우 5분인데도 대원들의 몸이 이미 굳어서 걷지 못해 한동안 무릎으로 기어가야 했다.

그렇게 그들은 산길을 걸어갔고, 마침내 산마루에 도달했는데, 경사가 너무나 급해서 바닥에 걸터앉으면 두 다리가 허공에 매달릴 정도였다. 안개는 자욱하고, 남극의 긴 밤은 어둡고, 후퇴는 생각할 수도 없고, 얼음으로 뒤덮인 산비탈에 피켈로 한 발씩 발 디딜 자리를 파며 내려가자니 어느 세월에 내려갈 수 있을지 알 수 있기는 커녕 탈진으로 모두 쓰러질테고,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조만간 얼어죽을 판이었다. 이 상황에서 섀클턴이 내린 결론은 '여기서 미끄럼을 타고 내려가자!' 였다.

경악한 워슬리와 크린은 그에게 제정신이냐고 물었지만 섀클턴은 "여기서 더 버틸 수 있겠나?''라고 물었고, 결국 대원들은 각자 자기 몫의 로프를 깔아 깔개를 만들었다. 섀클턴이 맨 앞에 앉고, 대원들은 서로의 목을 뒤에서 껴안고 찰싹 붙어 한 덩어리로 단단하게 엮였다. 이제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수밖에 없는 상황, 섀클턴이 땅을 박차자 모두들 미친 듯이 산마루를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43]
마치 허공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머리털이 모두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고 내가 웃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미끄럼타기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경사가 급한 산허리를 분당 1.6km[44] 정도의 속도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나는 흥분해서 고함을 질렀다.
- 프랭크 워슬리
고도가 완만해지면서 점차 그들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마침내 섀클턴 일행의 미끄럼은 어느 눈언덕 밑에서 멎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엄숙한 기분으로 서로 돌아가며 악수를 나누었다.

5월 20일, 그들은 드디어 스트롬니스 만의 후스빅 항에 도착했다. 포경기지 선원들은 산을 내려온 그들을 괴물 취급했다. 이제껏 내륙 쪽에서 나타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섀클턴입니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 전쟁은 끝났겠죠?"
"천만에요. 전 유럽이 전화에 뒤덮혔습니다. 수백만 명이 죽었어요. 유럽은 광기에 휩싸였습니다."[45]
노르웨이 출신 기지 대장 트랄프 쇠를레와 나눈 대화
포경기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섀클턴 일행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다. 평생 동안 거친 바다와 싸우며 살아온 그들이 보기에도 위대한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40년간 남극해에서 배를 탔다는 사람도 있었다. 식사를 마친 섀클턴 일행은 곧바로 배 한 척을 빌렸고, 워슬리는 그 배에 타고 킹 하콘 만에 남은 세 사람을 데리러 가서 구해오는데 성공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 국왕은 곧바로 섀클턴에게 축하 전보를 쳤고, 신문은 섀클턴의 이야기를 대서특필했다.

로알 아문센조차도 이 기사를 접하자 섀클턴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고 한다. 자신이라면 거의 포기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을텐데도 섀클턴은 포기하지 않고 대원들을 모두 살린 것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물론, 당시 스콧과 아문센 때문에 영국과 노르웨이의 국가감정은 좋지 않았지만 섀클턴은 영국인들 가운데 아문센이 남극점을 정복한 것에 찬사를 보낸 인물일 정도로 개인적으로 둘의 사이는 무척 좋았다고 한다.

글로만 써 놓으면 읽기에는 간단해 보일지 몰라도 이들 셋이 겪은 여정은 험난했다. 워슬리는 나중에 회고하길
그땐 정말이지 다 귀찮고 그냥 드러누워 영원히 자고 싶었다. 하지만 섀클턴 대장은 발길질을 하고 우리 따귀를 때리며 "포기하여 잠잘 바에는 마지막까지 기어서라도 움직여!"라고 외쳤다.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차디찬 얼음물을 마시고 펭귄고기를 날로 억지로 씹어 삼켜가면서 뭔가 비참함에 눈물이 나오고 이런 절망감과 같이 추위와 피로로 주저앉고 싶었던 우리에게 그나마 조금씩 마시던 홍차는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아니, 지금까지 태어나서 그때 마신 홍차만큼 인생에서 가장 맛 좋은 홍차를 마신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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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클턴 횡단 기념 우표
그들의 등산 경로를 두 번째로 횡단한 사람은 30년 뒤에야 나왔는데, 당연히 충분한 장비를 갖추고 완벽한 준비를 마치고서 체력 만땅 상태로 산을 넘은 등정가는 섀클턴 일행의 여정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적'이라고 평한 바 있다.

3.5. 엘리펀트 섬에 잔류한 대원들

섀클턴이 소수 대원과 함께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떠난 후, 섬에 남은 대원들은 바다표범과 펭귄고기로 연명했으며 사냥한 동물의 지방을 빼내서 연료로 사용했다. 그들은 식량이 고갈될 경우에 대비해 남는 고기를 저장하려고 했지만, 모두 상하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46] 그나마 해변에 있는 조개와 해초를 채집하는 방법을 생각해낸 덕에 조금은 배를 채울 수 있었지만,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고 모자라는 양은 먹다 남은 뼈를 파내 끓여 먹는 방법으로 채워야 했다. 이런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8월 30일에 남은 식량의 양은 펭귄고기 4일치 정도였다고 한다.

섬에 남은 대원들은 2척의 보트를 뒤집어서 캠프를 만들었으며, 거주환경을 조금씩 개선시켰다. 보트 지붕에 작은 창을 만들어서 햇빛이 들어오게 했고, 깡통을 이어 만든 굴뚝을 달았다. 이 굴뚝은 연기를 밖으로 뽑아냄으로서, 밀폐된 캠프 안에서 불을 피워 요리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이들은 동상에 시달리던 대원 한 명[47]의 발가락을 잘라내는 수술을 시행하기도 했다.[48] 이 수술은 다리 전체가 썩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으며, 구출된 후 그것을 본 의사는 대단히 성공적인 수술이었다고 평가했다.

엘리펀트 섬에 남게 된 대원들을 통솔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은 부대장 프랭크 와일드인데 그는 섀클턴이 반드시 8월쯤에 구출하러 온다는 낙관론을 갖고 있었고 날씨가 좋아질 때마다 "오늘 대장님이 오실지 모르니 짐을 싸놔라"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 덕에 섀클턴이 정말로 구조선을 이끌고 왔을 때, 탐험대는 한 시간 안에 구조선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 짐 중에는 위에서 서술한 대로 사진들도 있었고 그 덕에 섀클턴 탐험대의 이야기를 다룬 책에는 그들의 생생한 사진이 수록될 수 있었다. 인간이 가장 살기 힘든 환경에 준비도 되지 않은 채 내던져졌음에도 대원들을 통솔해서 모두를 생존시킨 이 사람 역시 매우 대단한 능력자라고 할 수 있다.

3.6. 귀환

섀클턴은 사우스조지아 섬에 상륙하고 곧바로 구조선을 수배했지만, 세 차례나 이어진 시도에도 불구하고 엘리펀트 섬에 상륙하지는 못한다. 남반구는 이 시기가 한겨울이었고, 남빙양의 얼음과 풍랑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첫 번째 구조선은 얼음에 막혀 되돌아왔고, 두 번째 구조선은 심하게 망가졌으며, 세 번째 구조선은 침몰 직전까지 가고 말았다. 영국 역시 전쟁 중이라 배를 구하기가 힘들었고, 이 과정에서 무려 4개월의 시간이 흘러가고 말았고, 극한의 상황에서도 침착했던 섀클턴이 이때만큼은 초조해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당연히 열악한 환경에서 구조만을 기다리고있을 대원들을 생각하면 자신만 편하게 있을 수 없으니 신경질적이 될 만 하다. 오히려 이 기간 동안 스트레스 때문에 건강도 나빠져서 눈에 띄게 초췌해졌다고.

마침내 섀클턴은 칠레 정부로부터 증기예인선 '엘코 호'를 빌리는 데 성공한다. 얼음이 없는 바다에서만 항해하라는 조건이 붙었지만, 어쨌든 배를 손에 넣은 섀클턴은 엘리펀트 섬으로 향했다. 그런데 섬에 다가가보니 탐험대의 오두막집에 조기가 게양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섀클턴은 죽은 사람이 생긴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지만 남은 사람이라도 구해야 하니 배를 섬에 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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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0일.

그날도 여전히 조개잡이를 하러 나갔던 엘리펀트 섬의 대원들은 배 한 척을 발견한다. 드디어 그들을 구할 배가 왔던 것이다. 배가 왔다는 말에 모든 대원들은 캠프 밖으로 뛰쳐나갔고, 문이 좁아서 못 나간 대원들은 벽을 부수고 나갔다. 섀클턴이 뱃머리에 서서 모두 무사하냐고 묻자...
정말 놀랍게도, 이들 중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구조선을 발견한 대원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려고 온갖 방법으로 신호를 보내려던 중 깃발신호를 보낸답시고 옷을 벗어서 걸었는데, 손이 높은 데까진 안 닿고 높게 올리려 기어오를 힘도 없어서 대충 매달아놨던 게 조기처럼 보인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 남극 반대편으로 파견된 SY 오로라 호에서는 총원 28명 중 3명의 사망자[49]가 나왔지만, 섀클턴이 직접 지휘한 인듀어런스 호에서는 총원 28명 중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다.[50] 그렇게 28명의 섀클턴 탐험대는 전원 무사히 귀환했고, 탐험대원들은 8월 30일을 '기적의 날'이라 이름을 붙이고 평생 이날을 기념하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3.7. 후일담

비록 이들은 남극 횡단이라는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으나, 극적인 이야기는 호사가들에게서 화제가 되었고 영국 정부 역시 이들의 귀환을 기리며 극지 메달(Polar Medal)을 수여함으로써 이들은 구인 광고에서 약속된 것처럼 어마어마한 명예와 영광을 얻었다.

다만 좀 깨는 이야기지만 전원 생존하였다는 훈훈한 미담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생환 후 탐험대원들의 메달 수여와 관련하여 잡음이 있었으며 그 결과 탐험대원 중 4인(해리 맥니쉬, 존 빈센트, 어니스트 홀네스, 윌리엄 스테펜슨)에게는 메달이 수여되지 않았다. 이는 섀클턴이 귀국 후 극지 메달 추천서에 해당인물들을 비추천하며 보이콧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도중에 꼽사리낀 밀항자인 퍼스 블랙보로조차도 섀클턴이 그를 탐험대의 일원으로 인정하여 추천서를 써서 훈장을 수여받았는데 정작 정식 탐험대원이었던 4인은 탐험대에서 제명당해서 메달을 수여받지 못한 것. 공교롭게도 훈장 미수여자 중 2인이 제임스 커드 호를 타고 사우스조지아 섬을 횡단하여 탐험대 전원을 구출하는 중대한 공을 세운 6인중 2인(해리 맥니쉬, 존 빈센트)이다. 확실한 것은 밀항자인 퍼스도 메달을 추천한 섀클턴이 해당 인물들에게는 훈장을 수여해선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는 점을 보면, 해당인들이 탐험대의 생존을 위협할만큼 중대한 사고를 일으켰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단 해리 맥니쉬의 경우 그나마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기는 하다. 해리 맥니쉬가 섀클턴의 명령을 불복종하고 심지어 반란을 주도하기까지 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정작 당사자들이 상황에 대해 정확한 사정을 말하지 않아서 그 진상은 오리무중이다. 일단 해리 맥뉘시가 섀클턴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것은 사실 같은데, 어떤 식으로든 해리 맥니쉬가 섀클턴의 명령에 불만을 품은 것은 기록마다 언급이 되고, 자세한 것은 후술하겠지만 맥니쉬는 섀클턴이 고양이 "치피 여사"를 죽여버린 것에 대해 평생 섭섭함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맥니쉬가 제임스 커드 호를 탄 인원 6인으로 선정된 이유도 공식적으로는 맥니쉬가 목수여서 배 수리 능력이 있어서라지만,[51] 비공식적으로는 후술할 존 빈센트처럼 섀클턴이 해리 맥니쉬를 가까이 두고 감시하려고 했다는 설도 있다. 의아한 것은, 정작 해리 맥니쉬 본인은 메달도 못받았지만 섀클턴을 "정말 대장으로서 모든 걸 갖춘 인물"이라고 칭송했으며, 인듀어런스 호 탐험에 대해 고생이야 많았지만 알차고 보람 있었다고 밝게 이야기했다.

존 빈센트의 경우, 원래 갑판장 용도로 모집되었던 만큼 항해 시작시 직급이 간부이던 사람인데, 간부 신분을 이용해서 구타와 가혹행위를 많이 저지르고 이것 때문에 뒷말이 엄청 많아서 갑판장에서 일반 선원으로 강등[52]당한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몸 쓰는 일인데다 위험한 해상 환경에서는 생존의 위협까지 있어 선원 직종은 현대에서도 군기 잡는 행위가 어느정도는 용납되는 편인데, 심지어 전반적으로 구타와 가혹행위에 대해 훨씬 무감각하던 20세기 기준으로도 말이 나왔을 정도면 그의 행동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유추가 가능하다.

심지어 존 빈센트를 제임스 커드 호에 탑승시킨 이유부터가 구조 목적이 아닌 다른 선원들과 분리 목적이었다. 인간성이 지나치게 안 좋다 보니 섀클턴이 존 빈센트를 일컬어 저놈 때문에 탐험에 방해가 되었다라는 식으로 언질한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존 빈센트는 기껏 사우스조지아 섬까지 따라와 놓고는 정작 스트롬니스로 횡단하는 3인 중 끼지 못하도 페고티 캠프에 남았다[53] 그래서 스트롬니스로 간 3명인 섀클턴, 워슬리, 크린은 전원 극지 메달을 수여받았지만, 페고티 캠프에 남은 인원 중에서는 티모시 매카시 혼자만 유일하게 극지 메달을 수여받았다.

다만 상술한 2명은 그렇다 쳐도 어니스트 홀네스, 윌리엄 스테펜슨은 왜 메달을 비추천했는지 불명이다. 일단 둘은 화부라는 공통점이 있기는 한데, 그 외에는 자세한 기록이 별로 없다. 일단 남은 기록을 보면 이 둘은 인듀어런스 호가 침몰한 이후로는 석탄을 땔 일이 없어졌으므로 잉여가 되어 보통 선원으로 재배정된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는 잉여가 되서 별로 한게 없다는 이유로 메달 비추천 목록에 포함되었다는 소리도 있는데, 당시에는 화부 말고도 개 조련사, 생물학자, 미술가 등 잉여가 된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잉여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메달 비추천 목록에 들어간 것은 아닌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54]

탐험대 인원들의 그 후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4. 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과의 비교

섀클턴과 자주 비교되는 인물로 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Vilhjálmur Stefánsson)[55]이라는 탐험가가 있다. 그는 1913년에 캐나다 탐험대를 이끌고 북극 탐험에 나섰는데, 그가 탄 카를루크 호가 얼음 바다에 갇혀서 고립되었다.

여기까지는 섀클턴과 유사하지만, 그는 순록 사냥으로 식량을 조달하겠다는 거짓말을 쓴 편지를 남기고 식량과 탄약을 휴대한 채 4명과 함께 떠나갔고 그 이후 본인들은 북극 탐험을 끝까지 마치고 살아서 돌아왔지만, 남아 있던 대원들 중 11명은 상대방을 헐뜯고 속이고 싸우다가 고통과 절망 속에서 죽었고 나머지는 간신히 구조되었다. 당연히 스테파운손은 욕만 작살나게 먹었다.

영문 위키피디아의 카를루크 호 문서를 비롯한 많은 곳에서 그의 저주받을 리더십을 비판하고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실패자이긴 해도 스테파운손은 83살 장수를 누리며 살다가 갔고 섀클턴은 48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스테파운손은 당시만 해도 캐나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탐험이었으므로 캐나다 정부의 비호 아래 그다지 어렵지 않게 살아갔고, 이후에도 탐험가 클럽에 초청되어 회장직도 받고 다시 모험도 떠나곤 했다. 현재의 저평가는 처음엔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진 것. 1920년대까지만 해도 인권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하다( 영국 해군에서도 프래깅이 자행되던 시절). 스테파운손은 브랑겔 섬을 캐나다 땅으로 만들고자 노력하다가 소련 정부에게 내쫓겼고[56] 1940년대까지 주된 탐험지였던 소련을 옹호하다가 전후 냉전이 심화되면서 사람들에게 빨갱이로 몰려 배척받으면서 늘그막은 쓸쓸하게 죽었다.

5. 여담

6. 외부 링크

6.1. 관련 서적

6.2. 관련 영상



[1]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우주선의 이름도 이 배에서 따왔다. [2] 위 사진은 디자이너 John Hyatt가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만든 이미지이며, 해당 광고의 원본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광고가 없었을 거라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조사가 있다. 섀클턴이 죽고 거의 30년 가까이가 지난 1944년에 저 광고가 처음 공개적으로 언급이 되었고, 1949년에 위대한 광고물로 선정이 되었다. 혹시라도 아직도 원본을 가지고 있으며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100$의 상금이 걸려 있는 상태다. 참고로 철자를 보면 한국에서 주로 접하는 "Honor"가 아닌 "Honour"가 써져 있는데, 이는 영국식 영어 및 그 파생형을 쓰는 영연방 국가에서 쓰인다. 영국식에서는 철자법이 실제 발음과 괴리되는 대신에 어원 및 옛 어형에 가까운 형태를 취하는 반면, 미국식에서는 Simple English 쉬운 영어(Plain English) 운동 등의 영향으로 정서법이 발음에 더 가까운 직관적 형태로 정리되어 있다. 이러한 사례로는 'Color/Colour', 'Center/Centre', 'Saber/Sabre', 'Aluminium/Aluminum' 등이 있다. [3] 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외에도 여러차례 남극 탐험을 한 경험이 있다. [4] 런던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있던 워슬리는 어느 날 자신이 벌링턴 가를 떠다니는 빙산을 피해가며 배를 조종하던 꿈을 꾸었고, 이걸 계시라고 여긴 뒤 다음 날 벌링턴 가에 가봤다. 거기서 섀클턴의 광고를 보곤 건물 안에 들어갔고, 섀클턴과 몇분의 대화 뒤 선장직 제의를 받았으며, 워슬리는 그걸 받아들였다. [5] 영국 해군 출신이며, 엘리펀트 섬으로 갈 때 배 한척을 지휘했다. 펭귄을 매우 잘 잡아서 엘리펀트 섬에서 대원들이 굶지 않게 해주었다. [6] 1914년에 워슬리에게 같이 일을 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고, 마침 이때 배의 1등 항해사가 1차 대전에 복무하기 위해 사표를 낸 참이었다. 그린스트리트는 인터뷰를 하기 위해 불려져 왔고, 워슬리는 그린스트리트를 잠깐 만나본 뒤 바로 1등 항해사 직책을 주며 24시간 내에 떠날 채비를 하라고 통보했다. 대원 중 가장 장수했다. [7] 로버트 스콧의 남극 탐험에도 참가했었으며, 그걸 포함한 남극 탐험을 총 3번이나 참가했다. 원래는 다른 남극 탐험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그 탐험이 연기되자 섀클턴은 바로 크린을 영입했다. [8] 섀클턴과 스콧의 탐험에 갑판장으로 참가하는 등 이미 남극 탐험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후에 스콧이 남극 탐험을 하다 귀환하지 않았을 때 수색팀에 자원했으나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탈락하였다. 제국 남극 횡단 탐험에 참가했을 때 쯤에는 남극에서 약 6년을 보낸 경험이 있었으며, 대원 중 남극 경험이 가장 많은 사람이었다. 존 빈센트가 인성 문제로 갑판장에서 짤리자 갑판장 일도 겸했다. [9] 선의 생활을 하며 이집트, 일본, 동인도 제도 등 여러 지역에 가본 적이 있었다. [10] 의사일 뿐만 아니라 항해 경험도 꽤나 있었다. 외과의 일 말고도 썰매용 개를 돌보고 썰매를 모는 일도 맡았다. [11] 기상학자이며 고고학자이기도 했다. 수단에서 고고학 발굴을 하다 섀클턴의 광고가 실린 기사를 보고 흥미를 느껴 섀클턴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고, 섀클턴은 런던으로 돌아오면 자신에게 연락하라는 답장을 했다. 허시가 회고하길, "난 운이 좋았던 게 섀클턴은 5,000명의 지원자 중 한명이 아프리카 한가운데에서 왔다는걸 재밌게 느꼈다. 섀클턴이 나중에 말하길, 날 훑어보고는 내가 재미있게 생겨서 나를 뽑았다고 알려줬다." [12] 섀클턴의 누이 2명과 친구였으며, 그들이 마르스턴에게 섀클턴의 탐험에 참가해 보라고 추천했다. 제국 남극 횡단 탐험 전에 섀클턴의 실패한 남극 탐험에도 참여했다. 제국 남극 횡단 탐험에 제일 먼저 지원한 인물 중 하나였다. [13] 영국 해군 대위였으며, 의화단 운동 전쟁에도 참가했다. 스콧의 남극 탐험에 지원했으나 탈락하였다. 다만 이후 스콧 탐험대가 당한 일을 생각하면 이 '탈락'은 완벽한 천운이었다. 그 덕분에 1913년에 뜨는 새해 일출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섀클턴이 탐험을 계획할 때 정치와 군사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 해군쪽 인물이 필요하다 판단하곤 알맞은 인물을 찾다 스키도 잘 타고 모터 전문가이기도 한 오르데-리스를 찾고는 섀클턴은 당시 해군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에게 허락을 구했다. 처칠이 허가를 내줬고, 오르데-리스는 해군을 벗어나 탐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14] 성의 스펠링이 여러가지 있는데, 그의 묘비에는 McNish라고 적힌 반면 섀클턴과 워슬리의 일기에는 McNeish라는 스펠링으로 나왔으며, 메클린의 일기와 자신의 서명에는 MacNish라고 나와있다. 치피라는 별명은 조선공들에게 붙혀지는 전통적인 별명이었다. [15] 섀클턴의 탐험대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정박했을 때 마침 그곳 선박에 있던 그린은 섀클턴이 원래 있던 요리사를 해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탐험에 지원했다. [16] 13살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어선에서 근무하는 등 항해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으며, 아마추어 복서에 레슬러이기도 했다. 원래는 갑판장이었으나, 다른 대원들을 괴롭힌다는 보고와 오르데-리스와의 말싸움을 한 뒤, 섀클턴이 선원으로 강등시켰다. 강등된 뒤부터는 남을 괴롭힌다는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지만, 섀클턴은 계속해서 빈센트를 예의주시했다. 심지어 섀클턴은 필요도 없는데 다른 대원들과 싸울까봐 이 놈을 사우스조지아까지 달고 가야 하는 수고마저 감수했다. [17] 탐험 인원 중 유일한 미국인이었다. [18] 로버트 스콧의 남극 탐험에도 참여했다. [19] 이 이야기는 ≪ 노빈손의 남극 어드벤처≫에서 노빈손을 밀항자로 설정한 걸로 바꿔서 나오기도 했다. [20] 실제로 이때까지만 해도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전 유럽이 휘말리는 대전쟁으로 번질 줄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그 전쟁은 탐험대원들이 귀환하는 그 날까지 끝나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은 인도와 같은 식민지인들을 적극적으로 징집해 인력이 널널한 편이었다. [21] 하지만 이 성경은 지금도 남아 있다. 성경을 버리면 액운이 닥칠 거라고 믿었던 팀원 매클리오드가 섀클턴 몰래 성경을 챙겼기 때문이다. [22] 이것도 '인내'라는 뜻이지만 인듀어런스가 지속적이고 만성적인 피로를 장시간에 걸쳐 견디는 참을성이나 내구성의 의미가 강하다면 페이션스는 단시간에 강력하게 몰아치는 고통을 이 악물고 적극적으로 견뎌내는 것에 가깝다. [23] 개썰매가 잔인하다며 말을 끌고 갔다가 정작 그 말들은 다 죽고 말고기를 먹었으며 썰매는 사람이 직접 끌어야 했다. 그렇다고 사냥을 한 것도 아니고 개를 안 데려간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데려간 개들이 살아남은 것도 아니다. [24] 와일드 곶이 적당히 완만한 데에 있어서 낙석이 떨어질 위험도 적었고 파도도 덜했다. [25] 그나마 있던 바다표범과 펭귄도 가을과 겨울에는 숫자가 줄어드는데, 하필이면 섀클턴과 대원들이 엘리펀트 섬에 상륙했을 때가 가을이었다. [26] 섀클턴 탐험대는 언급했듯이 이미 모든 개를 잡아먹었다. 개고기는 못 먹겠다고 버티던 스콧과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하긴 배가 고프면 찬밥 더운밥 가리게 되지 않겠지만. 결국 훗날 스콧은 개고기를 거부하다가 결국 굶주림도 한몫하여 죽는다. 그나마 배를 타고 있었기에, 연료가 없어 홍차 이파리를 먹으며 비참하게 죽어간 스콧 일행과 달리 이들은 배 안에 있는 식탁이나 의자를 부숴서 땔감으로 써 따뜻한 홍차를 끓여 마시며 겨우 버틸 수 있었다. [27] 이 똥은 농작물 비료나 흑색화약의 재료로 딱이라서 비싸게 팔리곤 했지만( 이것이 흥망성쇠를 좌우한 나라가 있다) 이 상황에선 더러운 똥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이게 말라 있었더라면 훌륭한 땔감이 되었을 테지만, 비바람과 습기로 인해 바닷가에 있는 새똥은 늘 젖어있어서 땔감으로도 쓸 수 없었다. 더군다나 말릴 곳도 없었고, 말린다고 해도 냄새가 진동할 것이며, 냄새도 냄새이지만 연료로 이용하기 위해서 말리더라도 그러려면 연료를 써야 되는데, 연료를 만들기 위해 연료를 쓰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으니 소용이 없었다. [28] 두 점 사이의 각도를 정밀하게 재는 광학 기계. 태양, 달, 별 등의 수평선 상의 각도를 재어 관측 지점의 위도· 경도를 간단하게 구하는 데에 쓴다. [29] Chronometer. 천문 관측·경위도선 관측·항해 따위에 쓰던 휴대용 태엽 시계다. 정밀도가 높아 온도, 기압, 습도 따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30] 칠레 티에라델푸에고 섬은 아르헨티나 티에라델푸에고 섬보다 더 멀고 더 힘들다. [31] 극지의 빙산은 육지의 빙하가 바다에 떨어져나온 것이므로 녹으면 민물이다. 실제로 극지 주민들은 빙산의 작은 조각들을 녹여서 식수로 쓴다. 바닷물이 언 유빙과는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구분이 가능하다. 그리고 유빙도 바닷물이 얼어붙는 과정에서 염분이 바깥으로 빠져나오기 때문에 사실상 민물이다. [32] 영국 해군 복무시절 로버트 스콧의 첫번째 남극 도전에 차출되어 대원으로 참가했다. 위에서 나오듯 당시 섀클턴 또한 대원이었다. 또한 스콧의 마지막 탐험에도 대원으로 참가해 남극점을 150마일 앞둔 지점까지 지원한 후 3인의 대원들과 복귀하면서 탈진과 괴혈병으로 쓰러진 대원들을 쉬게 하고 먼저 베이스 캠프로 돌아가 구조 요청을 함으로써 구한 경력이 있었다. 이때 최후로 남극점을 도전한 스콧과 대원들은 남극점 도달 후 복귀 중 사망하였다. [33] 다만 섀클턴이 빈센트를 데려간 이유는 단순히 빈센트를 떼어놓기 위해서 만은 아니었다. 섀클턴은 이 여정이 매우 험난할걸 알았기에 가장 힘이 세고 몸 상태가 좋은 사람이 필요했고, 빈센트는 대원들 중 가장 힘이 센 사람중 하나였다. 정작 빈센트는 여정 도중 보트에서 떨어져 물에 빠질뻔 하는등 여러 위기를 겪다 몸 상태가 매우 나빠져 큰 활약을 못 했으며, 맥니쉬와 더불어 죽음 문턱까지 갔다. [34] 디셉션 섬은 엘리펀트 섬의 남서쪽 200 km 정도에 있는 유인 포경기지가 있던 섬이었다. 문제는 남은 두 배는 제임스 커드 호 보다도 작았고, 그 배에 남은 22명 전부가 탈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남극에서 겨울에 남쪽으로 항해하라는 것도 말도 안됐다. 결국 엘리펀트 섬에 남은 대원들은 자력 탈출을 포기하고 배를 육지로 끌어올려 집으로 개조했다. [35] 이 에피소드는 영화 인터스텔라 밀러 행성 에피소드에서 그대로 오마주된다. [36] 마찬가지의 이유 때문에 눈보라 속에서 로버트 스콧의 시체가 발견된 후에도 수색대는 스콧의 시신을 운구할 수 없었다. 몇 달에 걸쳐 시신들이 얼어붙는 바람에 무게가 늘어나 백 수십kg에 달했기 때문이다. [37] "최대한 간 곳"이자 최종적으로 상륙한 지점에는 보트를 뒤집어 만든 페고티 캠프가 세워진다. [38] 그나마 페고티 캠프에서는 알바트로스 고기 조금과 알 조금을 얻어 굶어 죽을 지경까지는 아니었다고 한다. [39] 참고로 사우스 조지아 섬의 기후는 툰드라 기후(ET)이며, 그린란드 기후와 비슷하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추운 기후인 것도 힘든데, 그 와중에 섀클턴이 등산을 시도한 날짜인 5월 12일은 남반구 기준 겨울이 시작할 타이밍이다. [40] U자곡이 대표적인 케이스. 일반적인 유수에 의한 침식은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깎아나가는 형태라서 V자곡과 같은 완만한 계곡이 나타나지만 빙하침식은 한번에 빙하가 움직이면서 암반을 침식시키므로 칼로 자른듯한 수직 사면 계곡이 나타난다. 사우스조지아섬의 수많은 피오르드들은 이러한 빙하침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41] 심지어 이 나사못 신발 세 켤레는 전문 등산화도 아니었다. 그냥 따뜻한 극지방용 신발에다가 선박에서 떼온 나사못을 박는 개조를 한 것이다(...) [42] 심지어 현대의 사람 많은 도시에서도 노숙인이나 취객 등이 겨울에 길거리에서 잠들었다가 저체온증으로 위험해지거나 정말 동사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 판이니, 남극 같은 혹한의 오지에서는 더더욱 위험했다. [43] 내려가는 중간에 뭐가있을지도 모르고, 뭔가 있다하더라고 시속 96km의 속도로 내리꽂히는 와중에 로프로 만든 깔개로 방향조절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목숨을 하늘에 맡긴 도박이었다 [44] 96km/h [45] 당시 유럽 사람들은 1차 대전이 얼마 안 가 끝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참호에서 서로 죽어나가기만 하는 참극을 4년간 지속했다. [46] 해동과 냉동이 반복되면 고기가 상하고 만다. 식재료 보관 온도에 있어서는 최저 보관온도의 절대적 수치보다 항온 유지가 더 중요하다. -40℃와 0℃를 반복하는 저장고에 넣어두는 것보다 -10℃의 일정한 온도에 보관하는 것이 훨씬 보존력이 좋다. 게다가 -50℃ 이하의 초저온 냉동고가 아닌 이상 냉동보관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재료는 반드시 상하게 된다. [47] 위에 언급한 밀항자 퍼스 블랙보로. 퍼스는 모든 왼발가락의 1/4만 남기고 절제하는 대수술을 55분이나 겪었다(Huntford, R. "Shackleton", p. 533. Carroll & Graf, 1998). [48] 외과의 매크로이가 수술을 집도했고, 매클린은 적은 양의 클로로포름을 조심스럽게 이용해 퍼스를 마취했다. [49] 탐험대장 아이에나스 매킨토시(1879~1916), 탐험대 목사 아놀드 스펜서스미스(1883~1916), 선원 빅터 조지 헤이웨드(1887~1916). [50] 이후 섀클턴은 엘리펀트 섬의 대원들을 구조한 후 오로라 호의 사망자들을 찾으러 남극에 돌아갔지만, 시신이 남극해에 가라앉아 아쉽게도 포기해야 했다. [51] 맥니쉬의 능력이 좋았던 것은 맞는게, 위에서 제임스 커드 호에 돛대를 하나 더 다는 개조를 하거나 여러 캠프를 설치하는 것은 해리 맥니쉬가 활약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게다가 위에서 사우스조지아 섬 횡단 시 등반 도구가 나사못을 박아둔 신발 세 켤레밖에 없다고 했었는데, 일반적인 신발에 나사못을 박아두도록 개조한 것도 해리 맥니쉬였고, 맥니쉬가 없었으면 섀클턴은 이 나사못 신발도 없이 등산했어야 했다. 애초에 해리 맥니쉬가 탐험대에 뽑힌 이유가 이런 수리 및 목수 일에 능해서이고, 맥니쉬의 이런 활약을 옆에서 직접 본 동료들은 맥니쉬는 꼭 메달을 받아야 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52] 말이 갑판장에서 일반 선원이지 군대로 따지면 중위를 병장으로 강등시킨 꼴이다. [53] 그래도 이건 존 빈센트의 컨디션이 매우 안좋았다는 명분이 있기는 하다. 극한 등산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컨디션 안좋은 사람을 강제로 등산에 끌고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상술한 해리 맥니쉬도 컨디션이 안좋았다는 이유로 페고티 캠프에 남았다. [54] 참고로 어니스트 홀네스는 섀클턴과 사이도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섀클턴이 갈라진 빙하 사이에 빠진 홀네스를 직접 구해주고 "괜찮냐?"고 물어보자 홀네스가 "전 괜찮은데 담배가 빠져 버렸네요."라고 농담한 일화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55]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이슬란드 캐나다인이다. 과거에 아이슬란드계 이민자들이 캐나다로 많이 건너갔는데 주로 매니토바 주에 많이 정착했다. 영어식으로 표기한 "빌헬머 스테판슨"이라는 이름으로 표기한 책도 종종 있다. [56] 노력의 일환으로 스테파운손은 1921년 브랑겔 섬을 향해 탐험대를 파견하였지만 5명 중 4명이 사망하고 이누이트족 여인 에이다 블랙잭만 살아서 1923년 8월에 구조되었다. [57] 그러나 기상 예측은 번번히 빗나갔다고 한다. [58] 언급했듯이 섀클턴은 남극점을 정복 가능한 상황에서도 모두의 생존을 위해 정복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이후 스콧은 정반대의 선택을 내리며 두 사람의 명암이 극과 극으로 갈리게 된다. [59] 사실 훈련된 썰매개들보다도 통제가 어렵고 추위에 약할 고양이를 배 밖으로 데려간다고 해도, 혹한의 남극 환경 속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60] 섀클턴이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구조 요청을 하러 갔을 때 선발한 5명의 선원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의 별명이 '치피'였기에 수컷 고양이에게 치피 여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었다. [61] 배에 탄 고양이들(Ship's cat) 중에선 오스카와 함께 나름 잘 알려진 고양이어서 상품도 출시되었다. [62] 일차적으로 예정에 없던 인원이라 물자를 충분히 확보해 두지 못하여 팀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었고, 탐험에 최적화된 인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섀클턴의 걱정대로 탐험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탓에 발가락 절단으로 이어졌다. [63] 다만 그는 동상 때문에 상해가는 발가락을 절단할 수밖에 없어서, 결국 남극행 배(인듀어런스)에 밀항해서 남극까지 갔다가 발가락을, 하나도 아니고 왼발 발가락 전체를 밑둥만 남기고 영영 잃은 채로 돌아와야 하는 꼴이 되었다. 물론 위에서도 나왔듯이 이 발가락 절단 조치는 동상 이후 진행될 괴사 상태가 발 전체로 퍼져 버려서 발 전체를 절단해야 하는 상황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 험한 남극 조난 생활 중 먹을 것도 다른 물자도 모두 부족하고, 혹한지여서 추가로 동상에 또 걸릴지도 모를 상황에서 퍼스가 동상을 입었다가 발가락 몇 개만 잃고 끝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밀항에 의해 발가락은 잃었으되 세계를 전화에 빠뜨린 대전쟁 와중에도 징집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었다. [64] Dulwich College. 대학이 아니라 기숙사 고등학교이다. 필립 말로 시리즈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가 영국 체류 시절에 다녔던 고등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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