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이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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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축구선수, 이운재 선수의 국가대표 경력을 모아둔 문서다. 참고로, 이운재의 국가대표 132경기 출전은 전 세계 현역 골키퍼 A매치 출전 순위 4위를 기록하고 있다.[1]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02년부터 2009년까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부동의 No.1 골키퍼였으며, 역대로 따져도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일컬어진다. 최대 라이벌이었던 김병지와의 주전 경쟁에서 이긴 후 최고의 국가대표 커리어를 쌓았고, 그가 은퇴한 이후에도 정성룡, 김영광, 김진현, 김승규, 조현우 등 많은 선수들이 국가대표 수문장을 맡았지만 이운재급의 평가를 받는 선수는 없었다.2.1. 김호호
2.1.1. 1994 FIFA 월드컵 미국
경희대학교 3학년 때 1994 FIFA 월드컵 미국 국가대표팀에 선발됐고,[2] 댈러스에서 열린 94월드컵 24강 C조 본선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독일전에서 최인영과 교체되어 후반전을 소화한 게 A매치 겸 월드컵 데뷔 첫 경기였다. 당시 21세의 나이에 비해 침착하고 기량 또한 뛰어나서, 차기 국가대표 골키퍼감이라는 평가답게 무실점으로 잘 막았다.[3] 그렇게 국가대표팀이 한 골 차이로 따라붙을 수 있게 뒤에서 잘 버텨줬지만, 결국 2대 3 석패를 맛봐야했다. 한편 경기 전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최인영이 급기야 전반에 세 골을 먹었기 때문에 이와 대비되어 이운재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던 것은 사실이다.2.2. 비쇼베츠호
새로운 감독인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은 과체중을 이유로 그를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 제외시켰고,[4] 체중 감량을 숙제로 내주었다. 따라서 이운재는 네 달 동안 강도 높은 다이어트로 10kg 가량을 감량했다.이후에는 1996 애틀란타 올림픽을 대비하기 위해 성인 대표팀이 아닌 U-23 대표팀에서 활약했지만 서동명에 밀린 세컨 골리였다.
2.3. 선수 생명 위기
그렇게 꾸준히 올림픽 대표로 뛰던 중 대회를 네 달 앞두고 그에게 날벼락이 떨어진다. 1년 전의 강도 높은 다이어트가 원인이었는지 갑작스런 간염 판정을 받았다. 이 때문에 기량이 급격하게 떨어진 건 물론이고, 본인의 회고에서 선수 생활을 포기해야 하는지 기로에 설 만큼 예후가 심각했다고 한다. 결국 올림픽 대표팀에서 낙마한 데 이어 첫 직장인 수원 삼성에서도 박철우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면서 잊혀진 유망주가 되었다. 병마가 2년 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박종환, 차범근 감독 시절에도 활약할 수가 없어서 1996 AFC 아시안컵과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을 TV로만 봐야 했다.2.4. 허정무호 1기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간염이 호전되면서 1998년부터 수원의 주전 골키퍼가 되었고, 풀타임 첫 시즌에 0점대 실점률과 승부차기 무패를 기록하며 수원의 첫 K리그 우승을 이끈다. 전남 감독 시절 이운재의 맹활약에 골치 아파했던 허정무 감독은 이운재를 대표팀에 복귀시켰다. 그리고 1998년 11월 13일 중국과의 친선경기를 통해 국가대표 복귀전을 치른다.[5]이후 후보 골키퍼에 머무르다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6]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본래 주전이었던 김병지가 리그에서 주춤하자 대회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최근 중용되던 유망주인 김용대는 1차전[7] 중국전에 출전했는데 활약이 아쉬웠는지 허정무는 2차전부터 이운재를 출전시켰다. 그렇게 대회 5경기를 모두 출전하며 우리나라가 3위로 마무리하는데 기여했고 주전 자리에 오르기 시작했다.
여담으로 K리그에서 탑클래스 기량을 보여줬음에도 유명해진 건 2002년부터였다. 국대 축구 이외에는 무관심한 대부분의 대한민국 축구팬들의 성향상 듣보잡 취급을 당했었다. 각 인터넷 게시판에서 "쟤는 누군데 왜 기용하는지 모르겠다"는 게시글이 공공연히 올라올 정도였다.
2.5. 히딩크호
거스 히딩크 감독 아래에서 본격적인 주전 경쟁을 시작하나 싶더니 히딩크호 첫 대회인 칼스버그컵에서 라이벌인 김병지가 파라과이를 상대로 페널티 라인 밖을 뛰쳐나가다 실점할 뻔했고 이 기행으로 히딩크에게 크게 신임을 잃었다. 그 사이 이운재가 1년 간 무난하게 주전을 차지하면서 히딩크의 신임을 쌓았다. 하지만 김병지의 기량도 매력적이었는지 2002년에는 김병지가 같이 기용되었고 서로 번갈아가며 출전하면서 월드컵 직전까지 치열한 경쟁을 보여주었다. 히딩크는 월드컵 본선에서 김병지가 아닌 이운재를 주전으로 기용한 이유에 대해, 이운재의 컨디션이 조금 더 좋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단순히 김병지의 실수 하나가 판가름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2.5.1.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2002년 월드컵에서 안정된 수비진에서 최고의 활약을 선보였고, 특히 스페인전에서 엘게라한테 고의적으로 허벅지를 가격 당하는 반칙에도 끝까지 선방하였다.[8]
[9]
우리나라에서는 야신상 후보에도 오르는 것 아닌가 기대했다. 그러나 야신상은 골든볼 수상자이기도 한 독일의 올리버 칸에게 갔으며 월드컵 올스타 팀의 골키퍼 부문 2명에는 올리버 칸과 터키를 3위로 이끈 뤼슈튀 레츠베르가 선정되었다.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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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히딩크 박항서 스태프
핌 베어벡 ·
정해성 ·
김현태 ·
압신 고트비
|
2.6. 코엘류호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시절 대표팀의 부동의 주전 골키퍼가 되었다.김용대가 본격적으로 대표팀 넘버2로 올라왔지만 이운재를 넘기엔 부족했고 간헐적으로 로테이션 차원에서 기회를 주는 것을 제외하면 이운재는 부동의 주전이었다.
비록 오만 쇼크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2003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초대 우승에 기여했다.
하지만 몰디브 참사를 막지 못하며 코엘류 감독은 그대로 경질되고 말았다.
2.7. 본프레레호
본프레레호 출범 직후 아시안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존 주장이던 유상철이 아테네 올림픽 참가로 아시안컵 명단에서 제외됐고, 기존 부주장인 김태영이 신예 김진규에게 주전 경쟁에서 밀리자, 주장 서열 3순위인 최진철 대신 이운재가 아시안컵 주장에 선임됐다.조별리그 3경기에 모두 출전해 모두 클린시트를 기록하며 순조롭게 출발했으나, 8강 이란전 무려 4실점이나 허용하며 탈락을 막지 못했다.
아시안컵 이후 유상철이 대표팀에 복귀했지만 계속해서 주장을 달며 공식 주장에 선임됐다.
2005년 8월에는 2005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해 대표팀은 4위로 꼴찌에 그쳤지만 이운재는 엄청난 활약으로 최우수 골키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본프레레호부터 유상철이 대표팀과 멀어지자 부주장에서 주장으로 승격돼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2005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2006 독일 월드컵 등 굵직한 대회에서 모두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었다.
2.8. 아드보카트호
2005년 10월 아드보카트호 출범 이후에도 대표팀 주장에 연임됐고, 2005년과 2006년 겨울 전지훈련에서도 여전한 활약을 보여줬다.그러나 2006년 K-리그 개막 후 수원의 부진과 맞물려서 본인 또한 상당한 부진을 보이며 돼운재라는 질타도 받았다.
특히 2006 FIFA 월드컵 독일 본선 직전에는 부진이 극에 달해서 소속팀에서 부진의 원흉으로 몰리기도 했다.[10] 이에 대다수의 축구팬들 사이에서 당시 좋은 활약상을 보이고 있던 김병지를 국가대표 주전으로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아드보카트 감독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고 이운재가 지속적으로 중용되었다.
2.8.1. 2006 FIFA 월드컵 독일
1
이운재 C · 2
김영철 · 3
김동진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김진규 · 7
박지성 · 8
김두현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설기현 · 12 이영표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백지훈 · 16 정경호 17 이호 · 18 김상식 · 19 조재진 · 20 김용대 · 21 김영광 · 22 송종국 · 23 조원희 |
딕 아드보카트 핌 베어벡 스태프
압신 고트비 ·
홍명보 ·
정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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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주장으로 참가한 2006 FIFA 월드컵 독일 32강 본선에서는 미칠 듯한 선방을 보여줬다. 특히 대회 준우승을 차지한 프랑스와의 32강 본선 조별리그 2차전은 이운재의 국가대표 인생경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11] 골라인에 걸린 슈팅을 그야말로 동물적 감각으로 아슬하게 쳐냈고[12], 박지성의 동점골로 경기가 무승부로 마무리되던 후반 막판 최고의 패스마스터 지네딘 지단의 패스를 받은 당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티에리 앙리와의 1:1 상황에서 페인팅에 속지 않고 앙리의 슈팅을 쳐냈다. 비록 16강은 무산되었으나, 프랑스에게도 승점 1점을 얻어서 원정 최고 승점 4점 기록과 1승 1무 1패 대회 17위[13]를 기록하며, 월드컵 32강 본선에서의 선방쇼로 자신에 대한 비난을 어느 정도 불식시키는 듯 했으나 소속팀에서의 부진은 계속되어 결국 2006년 후반기 리그에서 후보 골키퍼인 박호진에게 주전 자리를 내준 채 후보 골키퍼로 전락했다.[14] 2007년 시즌을 앞두고 그랑블루 사이에서는 이운재 대신 박호진을 주전으로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으나, 당시 팀의 감독이었던 차범근은 결국 이운재를 선택했고 이운재는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경기력을 조금씩 회복했다.
이운재가 월드컵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던 것과 별개로 안정환과 이영표에 따르면 선수들에게 존재감이 없는 주장이었다고 한다.
2.9. 베어벡호
월드컵 종료 후 감독으로 승격한 베어백 감독 아래선 다시 부주장으로 내려가고 주장직을 김남일에게 넘겨줬다.2.9.1. 2007 AFC 아시안컵 아세안
1
이운재 C · 2
송종국 · 3
김진규 · 4
김동진 · 6
이호 · 10 이천수 · 11 이근호 · 12 이동국 · 13 김치곤 · 14 김상식 · 15 김치우 · 16 오범석 · 17 김정우 18 우성용 · 19 염기훈 · 20 손대호 · 21 김용대 · 22 강민수 · 23 정성룡 · 27 오장은 |
핌 베어벡 코치
압신 고트비 ·
홍명보 ·
코사
|
그러나 2007 AFC 아시안컵을 앞두고 주장 김남일이 부상으로 낙마하며 다시 주장에 선임됐다.
대회에서 눈부신 선방으로 대한민국이 엄청나게 답답한 경기력과 골가뭄에도 불구하고[15] 3위를 차지하는데 공헌했다. 1승4무1패의 성적으로[16] 대회 3위[17] 특히 강호였던 이란, 이라크, 일본과 상대한 8강전부터 3,4위전은 무실점으로 끝까지 틀어막은 뒤, 상대를 승부차기까지 납치해버린 것은 그야말로 백미. 그리고 이 3번의 승부차기에서 2승1패를 기록했다. 그러나 4강 이라크전에선 염기훈, 김정우가 2연속 실축을 했고 이운재가 한 골도 막지 못하며 패배했다.[18] 어찌됐든 애무축구를 구사하며 답답한 공격으로 무득점을 내버린 대표팀에서, 대회 4경기 연속 무실점 및 승부차기 승리를 기록하여 총체적 난국이었던 대표팀을 그야말로 하드캐리했다.[19]
하지만 대회 기간 중 접대부가 있는 유흥업소을 방문하였고, 한 차례 더 이동국, 우성용, 김상식 선수와 함께 술을 마시러 간 사실이 발각되어, 술타스틱 4라는 오명과 함께 1년간 A매치 출장 정지를 당했다. 이운재의 말로는 "단합차원으로 마셨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유흥 접대부가 있는 주점을 가는 건 불미스러운 일이였다. 하지만 같이 간 선수들이 크게 부진했으나 이운재는 한국 팀을 캐리하며 어떻게든 3위라는 성과를 냈기에, 국민들로부터 면죄부를 받아 비난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었다. 축구 커뮤니티에서는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운재가 술을 먹으러 가자 했겠냐"는 동정과 옹호론도 나왔을 정도였다. 또한 이운재가 똑같이 유흥업소로 간 다른 선수들보다 더 잘 한 수준을 뛰어넘어 거의 붙잡고 질질 끌어 겨우 3위에 오른건데, 나머지 선수들은 매우 부진하여 팬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다.
2.10. 허정무호 2기
더불어, 나이는 속일 수는 없는지 2009년 이후로는 떨어진 운동량과 순발력 부족으로 불필요한 실점 허용이 늘었다. 그나마 검증 좋아하는 허정무 감독의 성향 탓에 국대 골리는 독점했지만, 경험을 제외한 부분에선 김용대, 김영광, 정성룡 등 젊은 후배 골키퍼들과 비교해서 나을 게 없다는 게 중론. 오히려 이운재의 과한 독점으로 그의 은퇴 이후 차기 골리 선정에서 크게 애를 먹을 것이 예상되었다. 8~10년 주기로 골키퍼 세대교체를 단행하며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준 독일과 특정 선수에게 너무 의존하다 데이비드 시먼 이후 대체자를 찾지 못해 고생 중인 잉글랜드의 예를 생각해 보자.[20][21]이운재를 비난하는 입장에서는 이운재가 2006년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 골키퍼로 김병지가 거론되던 시기에 김병지에게 ' 이제는 후배들에게 양보해야 하는 거 아님?' 식의 발언을 했던 것과 함께 실점할 때마다 수비들에게 성질내는 모습 등을 근거로 인간성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게다가 월드컵 이후로도 부진이 계속되면서 과거에 언론에서 후배 골키퍼들에게 했던 '실력으로 나를 넘어봐라'는 발언을 놓고도 계속 까였다.
또한 독일 월드컵 당시 골키퍼 코치였던 정기동이 이운재를 편애[22]해 경기력과 관계 없이 계속 주전으로 내세운다는 비난을 받았던지라 이 부분에서도 비판을 받게 되었다.[23] 비교하자면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당시 김봉수 골키퍼 코치가 정성룡을 편애한다는 비판을 받은 것과 같다.
2.10.1.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1
이운재 · 2
오범석 · 3
김형일 · 4
조용형 · 5
김남일 · 6
김보경 · 7
박지성 C · 8
김정우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이승렬 · 12 이영표 · 13 김재성 · 14 이정수 · 15 김동진 · 16 기성용 17 이청용 · 18 정성룡 · 19 염기훈 · 20 이동국 · 21 김영광 · 22 차두리 · 23 강민수 |
허정무 정해성 스태프
박태하 ·
김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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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32강 B조 본선 조별리그 그리스와의 첫 경기를 시발점으로 해서 정성룡에게 밀려 후보 신세가 되었고 이번 월드컵이 끝나고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월드컵 본선에는 출장하지 못했고, 월드컵이 끝나고 치러진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 때 은퇴식을 가졌다. 그 업적을 기려 국가대표를 은퇴하는 이운재에게 국가대표 은퇴식을 치러주었다. 축구협회에서는 A매치 70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들에게 은퇴식을 열어준다. #
여담으로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서 허정무 감독은 교체 카드 한 장을 끝까지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떻게든 한 골 넣고 승부차기까지 간다는 생각으로 승부차기에 일가견이 있는 이운재를 교체출전시키려 했던 것이다.[24] 결국 한국이 골을 넣지 못하고 패배하면서 결국 그 교체 카드는 사용하지 못했지만, 당시 이운재는 노쇠할 대로 노쇠해서 기량이 엄청나게 떨어져 있었음에도 동물적 선방 감각만큼은 살아있었음을 보여주는 일화. 실제로 허정무는 주전 골키퍼가 아닌데도 이운재에게 주전 골키퍼를 의미하는 등번호 1번을 주었다.
3. 총평
전성기와 암흑기가 모두 있었기 때문에 '거미손'이라는 긍정적인 별명과 ' 돼운재' 또는 ' 배둘레햄'이라는 부정적인 별명(주로 2002년 이후)이 공존하던 선수였다. 이운재를 까면서 나온 희대의 유행어가 바로 반반무많이. 물론 본인 말로는 물만 먹어도 몸이 부는 체질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국가대표가 자기관리도 못한다는 이유에서 꽤 비난받았던 부분이기도 하다. 실제로 거스 히딩크도 이운재를 처음 훈련에 합류했을 때, 근육보다 군살이 많다고 깠다. 하지만 이후 파워 프로그램을 잘 소화해서 김병지와 더불어 훌륭한 골키퍼가 되었다고 칭찬했다.[25] 당시 이운재는 간염 투병 경험도 있었던데다가 주전 골키퍼로 올라서기 위해선 그 김병지를 넘어야했기 때문에 정말 모든 것을 걸다시피 절박하게 노력했고 그 노력이 빛을 발한 셈이다.그러나 그가 현역인 시절에 비판이 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퇴한 뒤 전체적인 평가가 최고인 이유는 메이저 대회마다 좋은 활약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2002 한일 월드컵은 논할 필요도 없고, 이후 비판을 많이 받던 시기에도 2006 독일 월드컵, 2007 아시안컵에서는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활약을 보여줬다. 사실 업적을 놓고 봤을 때 이운재는 국내로 한정하지 않고 아시아 전체로 봐도 역대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이다.[26] 실제로 AFC와 옵타가 선정한 아시아의 역대 월드컵 베스트 11에 공식으로 선정되었으니 특히, 월드컵에서 가장 훌륭했던 아시아인 골키퍼였다.[27]
또한, 이운재는 적어도 국대에서는 항상 경쟁자와 치열한 경쟁을 하던 선수였다. 1994 미국 월드컵 독일전 후반전에 깜짝 출장을 해서 최인영의 뒤를 잇나 했지만 서동명이라는 198cm의 장신 키퍼의 출현으로 올림픽 대표 시절 마지막까지 주전경쟁을 했으며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에는 김병지와,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에도 김용대, 김영광, 정성룡 등 젊은 골키퍼들과 끊임없는 경쟁을 했다. 그 경쟁에서 승리자가 되기도 벤치를 지키기도 했던 것이다. 경쟁자들의 임팩트나 명성 등이 치솟을 때에도 결국은 경기력으로 증명해냈으며, 많은 비판 여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결국은 실력으로 증명했다. 다소 2002년 4강 신화 프리미엄 속에 주전 경쟁에 우위에 있었지만 2번의 월드컵에서 만큼은 안정적인 활약을 했다.
A매치 100경기를 훌쩍 넘긴 베테랑이 되면서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도 맡았다. 한일전에서 양팀 선수들이 격해져 몸싸움으로 번지려 하자 둘이 합쳐 A매치 200경기를 훌쩍 넘는 이운재와 일본의 가와구치 골키퍼가 양쪽 골대에서 달려오자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었던 흠좀무한 장면을 연출했다. 자기 욕심만 강하다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2010년 월드컵 때 우루과이전에서 패배했을 때 의기소침한 정성룡[28]에게 가서 이제는 네가 최고다.라며 격려해주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1]
1위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전설적인 골리 모하메드 알 데아예아의 178경기. 2위는
잔루이지 부폰의 176경기, 3위는
이케르 카시야스의 167경기이다.
[2]
당시
이운재는 선수단에서 막내였다. 나이는 21세.
[3]
실점하지 않았지만 45분만 뛰었기 때문에
클린시트는 아니었다. 클린시트의 기준은 보통 풀타임으로 잡는데 프리미어리그는
60분으로 잡는 등 대회마다 기준이 다를 수 있다.
[4]
그렇게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은
차상광과
신범철이 출전했다.
[5]
하지만 이 경기는 어찌된 일인지 A매치로 인정받지 못했다.
[6]
마지막 12개국 본선 진출 대회
[7]
12강 조별리그
[8]
후반전 38분 14초에 엘게라가 공을 막으려는 이운재의 허벅지를 다리로 가격하는 반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또 경고,퇴장,파울 선언도 안했다.
히딩크호/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스페인전참조
[9]
2018 러시아월드컵까지는 키커가 차는 시점에 골라인을 나와서 막는 것까지는 용인되던 시절이었으며, 대표적으로 94미국월드컵 브라질VS이탈리아 승부차기/ 2004-05 챔스 AC밀란VS리버풀 승부차기/ 2006독일월드컵 독일VS아르헨티나 승부차기/ 2018러시아월드컵 덴마크VS크로아티아 PK, 승부차기 사례가 있었으며, 2019년도 부터 골키퍼는 무조건 최소 한쪽발이 골라인에 걸쳐있어야 하는 것으로 강화되었다. 때문에 현재는 골키퍼가 해당 규칙을 이행하지 않으면 다시 차게 된다.
히딩크호/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스페인전 참조
[10]
참고로 당시 수원은 전반기 리그 꼴찌를 달리고 있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결국 이 시즌 이운재는 주전 경쟁에서 밀려버렸다.
[11]
2020년 하반기에도 이운재 본인은 죽기살기로 뛰었던 2002년 대회보다는 마음의 부담없이 자신의 기량을 펼칠 수 있었던 2006년 대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한 바있다.
[12]
골라인을 넘었느냐 안 넘었느냐의 논란이 있었던
파트리크 비에라의 헤딩 슛 상황이다. 이미 헤더의 계기가 된 코너킥 자체가 오심이긴 했지만 애초에 골로 인정이 되지 않을 여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운재의 역량은 높게 평가될만했고,
주심이 오심으로 코너킥을 선언했고, 원래는 골킥을 받았어야 했다.
[13]
아시아 1위
[14]
게다가 수원은 후반기에 들어서 전반기의 부진을 털어버리고 놀라운 경기력을 선보인 끝에 리그 준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에 이운재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졌다.
[15]
이 당시
박지성을 비롯한 해외파가 합류하지 않아 동원할 수 있는 전력부터가 온전치 못했다.
[16]
이 1패가 바로
바레인 쇼크이다.
[17]
오죽하면 이러다 결승전까지 승부차기로 가서 4무 우승을 해버리는 것 아니냐는 농담까지 나왔었다.
[18]
다만, 이라크전 당시에도 이운재가 방향은 전부 읽었지만 운이 좋지 않았다.
[19]
특히 마지막 3,4위전은
한일전이었던 탓에, 이운재의 선방에 따른 3위 획득은 매우 각별했다. 3위까지 다음 아시안컵 본선 자동 진출권이 부여되는데, 대한민국이 3위로 올라가면서
2011 아시안컵 지역예선이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20]
잉글랜드는
FIFA 월드컵과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에서 골키퍼의 잦은 실책으로 매번 경기를 날려먹고 있다. 그러다가 2012년에 들어서야
조 하트가 등장하며 골키퍼 계보가 마침내 안정되었고, 2018년에는
조던 픽포드까지 활약하며 전통 강호로서의 체면을 되찾았다.
[21]
사실 이것은 20대 후반의
정성룡과
김영광으로 세대교체에 성공한 국가대표팀보다는
박호진이 반짝한 2006년을 제외하곤 10년 이상 이운재 천하였던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게 더 큰 문제였다. 근데 역시 수원답게 정성룡을 걍 넙죽 사갔다.
[22]
공교롭게도 둘은 청주상업고등학교(現
청주대성고등학교) 선후배 지간이고, 이운재가 존경하는 선배 골키퍼 중 한 사람도 바로 정기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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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김병지가 독일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가 "김병지와 이운재가 함께 있으면 국가대표팀에서의 이운재의 영향력과 위상과 입지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이운재를 위해서 정기동 코치가 김병지를 내쳤다."는 설도 지배적이어서 더 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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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는 아직 연장전 돌입 시 교체 카드를 1장 추가로 주는 규정이 도입되기 전이었다. 이 규정은 2016년부터 도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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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이 웨이(히딩크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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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선수로는
이란의 나세르 헤자지,
사우디의
모하메드 알 데아예아,
오만의
알리 알 합시,
호주 선수까지 포함하면
마크 슈워처 등이 주로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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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많은 국내 축구팬들이 잘못 알고 있는
올리버 칸과 이운재가
야신상 경쟁을 했다는 소문은 위의 경력 내용에서 언급했듯 우리나라 기자가 기대하는 식으로 꺼낸 이야기일 뿐,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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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의 선제골은 그의 미스가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