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스타크래프트1 프로게이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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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석 Lee Gi Seo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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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쌈장 |
출생 | 1980년 9월 12일 ([age(1980-09-12)]세)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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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 | 병역면제[1] |
종족 | 프로토스 위주 랜덤 → 테란 |
부종족 | 프로토스 |
ID | SSamJang |
소속 |
청오 SG 1999-07-01~2001-10-01 사이버리아PC방 2002-01-01~2003-01-01 KTF 매직엔스 2003-02-01~2003-06-30 헥사트론 드림팀 2003-07-01~2004-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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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현역 당시 사용했던 닉네임은 SSamjang으로, 보통 쌈장이라 불렸다.[2] 주종은 오리지널 시절과 확장팩인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 초창기까지는 테란, 이후에는 프로토스를 주 종족으로 쓰다가 잠시 랜덤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말년엔 테란으로 돌아왔다.스타크래프트가 한국에서 갓 인기를 끌기 시작한 90년대 후반에 나타나 신주영과 함께 스타크래프트 1세대 프로게이머로 활동했다. 임요환이 프로게이머로 데뷔해 이름을 날리기 전까진 이기석이 당대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의 대표 주자였으며, 특히 코넷 CF에 모델로 출연해 지상파 방송을 타면서 엄청나게 유명해졌다. 이 광고의 임팩트가 당시 어마어마해서 일반인에게도 인지도가 상당히 있는 편이었다. 당시 99년 뉴 밀레니엄을 앞두고 인터넷 산업이 새로운 화두로 엄청나게 각광받던 와중에 프로게이머라는 아날로그 세대들이 보기엔 컬쳐 쇼크급의 뉴웨이브 문화와 더불어 그런 프로게이머들중 세계 1위라는 당시 그전에는 전혀 없었던 신문물의 탄생과 더불어 이른바 국위선양이라는 90년대 한국의 숙원에 가까운 갈증까지 해소해준 그는 일약 스타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3]
또한 스타판의 시대가 지날수록 2000~10년대 이후 전설 혹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화려한 족적을 남긴 프로게이머들만을 아는 신세대들이 많아졌고, 대사건으로 인한 몰락과 침체, 이제는 비록 이기석의 이름이나 활약상을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인 세상이 되었지만, 스타크래프트가 한국에서 갓 인기를 끌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극초기 당시의 스타크래프트를 즐겨봤던 팬들에게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비록 초창기 개척자로서의 이미지는 한국 이스포츠의 아버지로 불리는 임요환에 묻혀 버렸지만, 그 임요환조차 자서전에서 "'쌈장 이기석이 게이머가 직업으로 인정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라고 회고할 정도니 한국 이스포츠의 역사에 미친 족적은 분명 거대했던 인물이었다.
2. 수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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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리그 역대 4강 진출자 |
- 1998년 LG배 다크레인 대회 준우승
- 1998년 12월 블리자드 시즌3 16강 래더 토너먼트 8강(1:2 신주영)
- 1999년 블리자드 래더토너먼트 시즌2 우승
- 1999년 KPGL 1,2차 대회 우승
- 1999년 싱크마스터즈 1차대회 우승
- 1999년 i2e2 2v2토너먼트 우승
- 1999년 블리자드 월드 챔피언쉽 16강
- 1999년 99 프로게이머 코리아 오픈 3위(3위 상금: 300만원)
- 2000년 2000 하나로통신배 투니버스 스타리그 8강[4][5]
- 2000년 Game-q 스타리그 올스타전 준우승
- 2000년 iTV 레드얼럿2 초청전 우승
- 2001년 iTV 임진록:조선의반격 대회 우승
3. 선수 생활
당시 국내 최고의 대회였던 KPGL을 2회 연속 우승하고, 세계 최고의 대회였던 블리자드 레더 토너먼트를 우승하면서 유명해졌다. 당시 먼저 래더 토너먼트를 우승했던 신주영과 비교되기도 하였다.KPGL은 국내 최초의 스타크래프트 프로 리그로서, 이 당시엔 국내 최고의 권위가 있었다. KPGL 이름부터가 Korea ProGame League의 약칭이었다. 이전의 PC방 대회들을 다 통합해서 최초의 프로화를 선언한 대회였다. 여기서 2회 연속 우승을 하면서 확실한 국내 최강자로 이름을 알렸고 곧이어 래더 토너먼트까지 우승하면서 세계 최강의 프로게이머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다만 래더 토너먼트의 경우 래더 순위에 들기 위한 어뷰징 논란이 있다. 래더 토너먼트는 일단 래더 순위에 들어야 하고 래더 상위 순위에 든 선수들끼리 말 그대로 오프라인 토너먼트 대회를 한 것인데 이기석의 경우 래더를 자신의 매니저인 임영수의 아이디로 통과하였다. 토너먼트 자체는 오프라인 대회였으므로 어뷰징 없이 본인 실력으로 우승한 게 맞다.
99 프로게이머 코리아 오픈에서는 광고 촬영으로 참가하지 않았지만 신길재가 학업 문제[6]라는 개인 사정으로 기권하게 되면서 시드를 획득해 참가, 프로토스 중심의 랜덤 종족으로 플레이했다. 사전 투표에서도 우승 확률이 압도적으로 가장 높게 집계되었던 선수답게[7] 4강까지 전승 행진을 하고 무적 포스를 내뿜으며 우승을 노렸지만, 국기봉과 최진우와의 플레이오프에서 각각 1:2, 2:3으로 아쉽게 패배하여 결승 진출이 좌절되고 3위를 차지하였다.
한창 전성기 시절, 아마추어 신분으로 서울 어느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임요환과 붙었다고 이윤열이 밝혔고[8] 거기서는 임요환이 0:2로 패했다고 한다. 당시 이기석의 포스는 정말 장난 아니었다고 한다.
임요환 역시 1999년 당시 이기석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됐으면 좋겠다"라고 마음속으로 동경하면서 게임을 시작했다고 한다.[9] 김정민 또한 이기석을 보고 프로게이머의 꿈을 꾸었다고 아프리카TV 개인방송에서 언급하였다.
당대 최고의 TV 토크쇼였던 김혜수의 플러스 유에도 출연하였다. 이때 이미 이기석은 청소년들의 우상 중 하나였고, 프로게이머가 청소년들의 유망 직종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1세대 프로게이머들이 대개 그러했듯 그 역시 곧 빠른 속도로 몰락하게 되는데,[10] 가장 큰 원인은 역시 그의 이름값이었다. 이기석의 이름값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넘쳐났고, 1999년부터 2000년까지 2년 동안은 대회보다는 경기 외적인 활동에 불려다닌 결과 2000년 하반기부터는 2세대 프로게이머들에게 밀리면서 퇴물로 전락하고 만다. 이기석 이후의 실력 있는 프로게이머였던 장진남, 강도경 등과 마찬가지로 지나친 경기 외적 활동으로 몰락한 케이스다. 전성기 때 거의 독보적인 인기를 누렸던 이기석에 비하면 이들의 인기는 상대적으로 낮았던 편이니, 이기석이 얼마나 잦은 방송 및 상업 활동에 불려다녔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 농담 같지만 진짜 이기석 비디오도 나올 정도였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시절이라 스타성을 이용한 돈벌이에 관심이 많았던 어른들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프로게이머로 전성기를 달릴 때부터 iTV 열전 게임챔프에서 매일 매일 해설을 하면서 해설과 게이머를 겸직하였고 광고 촬영 및 사인회 같은 부대 행사를 많이 다녔다. 당시 사이버리아라는 PC방 프랜차이즈의 모델을 하였는데 전국에 사이버리아 매장이 새로 생길 때마다 사인회를 하고 거기서 일반인들과 게임을 해주곤 했다. 또 당대 최고의 토크쇼였던 김혜수의 플러스 유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이전까지 부스스한 머리에 뿔테 안경을 쓰고 다니던 이기석이 저 방송에 나오면서 머리 염색을 하고 안경을 벗고 확 달라진 외모로 활동하게 되었고 이후 프로게이머는 사실상 부업이 되었다. 99 PKO조차 이기석은 원래 참가할 계획이 없었는데 급작스럽게 시드를 받고 나가게 된 것이었다.
이 당시 프로게이머들이 다른 게임을 겸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건 대부분 스타판이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거나, 혹은 게임을 발매한 후 광고 개념으로 유명 프로게이머들을 자사 게임 대회에 나오도록 스폰서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기석은 정말 다른 게임도 재밌고 좋아서 대회에 나간 케이스. 당시 레드얼럿2 최강의 클랜으로 유명했던 RA 클랜이 있었는데 이기석은 레드얼럿1 때부터 RA클랜 소속이었으며 레드얼럿2가 나오자 다시 레드얼럿2로 활동을 했다. 당연히 스타에만 집중하던 다른 선수들과는 차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 그 당시에 지금처럼 개인방송이라도 있었으면 굳이 게임 선수가 아니더라도 종합 게임 방송인으로 게임계에 큰 공헌을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당시 선수들은 기욤 패트리가 말했던 것처럼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의 전망을 밝게 보는 게이머들이 거의 없었다. 프로게이머가 직업이라는 인식은 있었으나 스타판이 언제까지 갈지 몰랐기 때문에, 그리고 당시 일반적인 게임의 수명은 1년 내외였기 때문에[11] 다른 게임이나 외부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스타의 전작이라고 할만한 워크래프트조차 1이 나오고 1년 만에 2가 나왔다[12]
다음 세대의 선수이자 프로게이머의 전망을 높게 생각하였던 임요환[13]조차 각종 행사에 불려다녔던 건 마찬가지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로게이머의 전망을 높게 생각하지 않았다기보다 스타크래프트의 전망을 높게 보지 않았다. 스타크래프트의 인기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외국에서는 이미 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졌으니[14] 프로게이머를 계속할 거라면 다른 종목을 병행해야 했다. 그리고 외국에서는 생명이 끝난 스타크래프트를 한국에서만 붙잡고 있다면 한국 프로게임 리그만 세계화 추세에서 밀려나서 갈라파고스화 될 것이란 우려도 있었다. 그래서 정일훈 해설이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그만두고 워크래프트3로 넘어간 것이다.
앞으로 고작해야 1~2년이면 스타는 끝이라고 봤던 대부분의 선수들,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가 평생 직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임요환의 차이가 있었는데 결국은 둘 다 틀린 것이 되어버렸다. 그 당시 기준으로 앞으로 1~2년보다는 훨씬 오래 갔지만 평생 직업으로 삼을 만큼 오래가지는 못했으니까...[15] 더구나 임요환도 나중엔 스타1에서 스타2로 넘어갔다.
결정적으로 2000년 말 IT버블이 터지면서 그때까지 각종 게임 리그나 게임단을 후원하던 수많은 IT 관련 벤처기업들이 나가떨어졌고 이에 따라 수많은 게임단과 리그, 선수들이 사라지는 상황이 왔고[16] 지속되던 대회들도 대회 텀이 길어지고 상금이 줄어들고 스폰서가 듣보화되었다. 온게임넷 스타리그조차 스폰서가 없어서 프리챌배 이후 대회가 없어진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며 결국 뒤늦게 스타크래프트 유통사인 한빛소프트가 스폰서로 나서야 했다. 이때만 해도 프로게이머란 직업은 전문가들이 예측하던 대로 곧 사라질 것처럼 보였고, 만약 이후 임요환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즉, 당시만 해도 이기석을 비롯한 수많은 프로게이머들의, 게임만이 아닌 외적 활동을 통한 이익 추구는 매우 합리적인 행동이었다.[17] 사실 이기석 입장에서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다른 선수들은 이기석처럼 유명하지 않았고 스타성이 없어서 그런 광고제의나 스폰서 제안이 및 해설자 제안이 없었던 것 뿐이었다. 제안을 받고도 거절한 케이스는 없었다.
이기석 역시 2000년이 되자마자 선수로서의 활동은 줄이고 상업 활동에 주력했다. 2001년에는 iTV에서 개최된 임진록 2의 게이머로서 참가해 우승을 거두는 등 사실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가 아닌 종합 게임 프로게이머나 해설자로써 3년을 보냈다.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김동수 역시 해설로 방송 활동을 해오긴 했지만 2001년 SKY배 온게임넷 스타리그에 잠시 복귀해 우승하고 돌아가는 등 선수로서의 실적도 낸 것과 비교되는 부분. 김동수는 ITV 해설제안 외엔 별다른 외부 활동 제안이 없었기에 비교하기에 무리가 있다. 잠깐이지만 임요환도 해설을 했는데 평가가 좋지 않았다.
2002년 다시 프로팀에 입단해[18] KTF 매직엔스(현 kt 롤스터)와 헥사트론(현 eSTRO)을 거쳤지만 별다른 활약은 없었고 2003년 올드 게이머 초청전에서 강도경과 맞붙었으나 0:2로 패했다.[19][20] 한편 그의 경기력이 같은 1세대 게이머인 임요환에 비해 수준이 넘사벽으로 낮아져서 심한 혹평을 받기도 했다.[21] 그래도 게임에 대한 열정이 죽지 않았는지 무려 2004년까지 선수 생활을 지속했지만[22] 과거의 실력을 되찾을 수는 없었고[23], 결국 2004년에 완전히 은퇴하였다.
사실 이기석의 각종 광고나 스폰서 활동을 비판적으로만 볼 순 없다. 애초에 이기석이 그만큼 유명해지고 스타가 된 것은 대회 성적보다 코넷CF를 통해서였다. 광고를 안 찍었으면 이기석은 그냥 스타 잘하는 프로게이머로 끝이지 시대의 아이콘[24]이나 다른 선수들의 우상이 될 수 없었고 일반인에게 그리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대중들은 이기석이 래더 토너먼트를 우승했는지[25] KPGL을 우승했는지 알지 못하거나 관심도 없었다. 다른 프로게이머들이 이기석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기석처럼 우승하고 싶다가 아니라 이기석 같은 스타가 되고 싶다는 말이었다.[26]
3.1. 신주영과의 비교
신주영이 래더 토너먼트를 우승하고 세계 챔피언이 되고, 또 이기석이 KPGL을 우승하고 국내 최강자가 되자 둘을 비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때만 해도 세계 챔피언 신주영과 한국 챔피언 이기석의 구도였다. 이후 이기석도 래더 토너먼트 우승자가 되면서 저런 인식은 사라졌지만, 둘 다 세계 챔피언이 되고도 누가 더 잘하냐는 논쟁은 있었고 배틀넷 방제로도 많이 쓰였다.이기석의 인터뷰에 따르면 최소한 그 인터뷰의 시점엔 이기석이 3전 1승 2패로 뒤쳐졌었다. 그 인터뷰에서 이기석의 말에 따르면 2패 후 1승을 하였는데, 그 1승에 대단히 기뻐했다는 말과 인터뷰의 흐름으로 봤을 때 당시엔 자신보다 형인 신주영의 실력을 더 위로 인정했던 듯하다. 하지만 신주영은 스타크래프트가 대중들에게까지 퍼지기 전인 99년 초에 입대를 하면서 경력이 끊겼고, 그 사이 이기석이 높은 인지도를 확보하면서 프로게이머의 아이콘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신주영과 이기석의 경기 영상은 1999년 Starcarft Championship이 남아 있다.[27] 당시 방송 경기 화면 구성과 중계 방식은 바둑과 같은 전통적인 보드게임 중계에 가까운데, 방송 포맷 또한 백지나 다름없는 초창기인 1999년이었던 만큼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보드게임 중계를 주로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2001년경부터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지금의 시끌벅적한 스타일로 변하게 된다.
이후 둘다 프로게이머로서 재기를 위해 KTF 매직엔스에 입단하는 등 노력을 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고 은퇴하게 된다.
4. 특징
한때 잘나갔으나 지나친 외도로 인해 몰락한, 과거의 유산 중 한 명이라고 생각될 수 있겠으나 1999년 전성기 당시 그의 네임밸류는 분명 전성기의 임요환 이상이었다. 선수 생활의 명성은 거의 스타크래프트라는 울타리 안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간간이 외부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는 정도였던 임요환과 달리, 이기석은 이를 훨씬 뛰어넘어 인터넷 문화 자체를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후술할 코넷 CF나 KBS 방송인 '밀레니엄 슈퍼내각'에서 사이버 국방부장관(...)에 뽑힌 사례[28] 등을 봐도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 2000년 초에는 이기석을 주연으로 한 프로게이머 소재의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가제가 '브이 게이트'였던 이 영화는 다행히 기획 단계에서 엎어졌다.임요환이 전성기를 맞이한 2001~2002년 당시 이기석의 실력은 많이 떨어진 상태였지만 사회에서의 명성은 여전히 임요환에게 그다지 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애초에 퇴물이 되고도 거의 3년 가량을 방송 활동으로 먹고살 수 있었던 것도 그 명성이 받쳐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기석의 전성기는 1999년은 정부 차원에서 인터넷 보급 사업을 대대적으로 밀어주면서 사회적으로도 이런 인터넷 문화가 크게 이슈화되었던 시절이었다. 이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세계 무대에서도 높은 성적을 이끌어내던 한국 프로게이머들의 활동은 이슈화되기 딱 좋은 시절이었을 시기이다. 이런 면에서 이기석은 사실 후대의 게이머들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임요환의 전성기인 2001년에 들어오자마자 그런 사회적 움직임은 차츰 식어 들어가고, 스타크래프트 및 e-스포츠 또한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가는 해였으니 이기석에 비하면 확실히 불리한 면이 있기는 했다.
로스트 템플에서 BBS테란을 즐겨 사용했다.[29] 게다가 쇼다운[30]에서 보여준 배럭 날리기[31], 토스의 대저그전 포지 더블넥서스 전략을 방송 경기[32]에서 최초로 사용한 선수로 유명하다.[33] 다만 배럭날리기의 경우 이미 배틀넷에서 사용되던 전략이라며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완전히 새로운 전략이 몇이나 될까? 아무리 새로운 전략이라 하더라도 배틀넷의 누군가가 이미 사용했던 전략일 수 있으므로 이런 깎아내리기는 의미가 없다. 누가 처음으로 개발했든 공식 경기에서 처음으로 사용해야 기록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해당 경기 이후 신주영 인터뷰에서도 배럭날리기는 이미 알고 있는 전술임에도 불구하고 당했고 당황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 번 그 기술에 당하고 나면 빠져나오기 어렵다고, 신주영도 적어도 자신의 허를 찌른 엄연한 기술로 인정하고 있다. #[34] 아니면 방송이 아니더라도 실명 혹은 최소 게임명이 명확한 누군가가 어떤 전략을 만들고 실제로 효과를 보았다고 누구나 인정할 만한 결론이 나올 수준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당시 프로토스의 대저그 전략 패러다임을 깨고 강자 최지명 선수와의 경기에서 공방 2업 저글링, 히드라를 드라군 없이 질럿, 아칸, 다크, 템플러, 리버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5. 흑역사
그에게 배틀넷 승률 조작, 소위 어뷰징 시비가 붙으면서 그의 네임밸류는 매우 훼손되었다. 1999년 당시의 신문 기사에도 실렸다. 기사화된 e스포츠 조작의 원조... 이 의혹은 신주영, 김도형 등 당시 배틀넷 최상위권에 랭크한 한국인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의혹이라기보단 기정사실인데, 당시 배틀넷에 승률조작이 판치는 바람에, 어뷰징(밀어주기)이 없으면 절대 래더 순위권에 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대 세계 최강의 유저였던 기욤 패트리가 배틀넷 순위권에서 밀려나 블리자드 토너먼트에 출전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 블리자드 토너먼트는 배틀넷 순위권에 들어야 출전 자격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러니 당시 상위권 랭커들은 일단 대회출전권을 얻기 위해 어뷰징을 했다는 게 정설이다. 앞서 말했듯 어뷰징 의혹은 다른 1세대 게이머들에게도 있었으나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의 인지도가 신주영이나 김태형보다 더 높았던 것도 있어서 이기석이 상당히 큰 타격을 입었다.
6. 코넷 CF
[35]
KORNET CF에 등장, 프로게이머의 존재감이 희박하던 시절에 프로게이머라는 직업과 그의 아이디를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이때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1999년 12월 31일 KBS에서 방영된 밀레니엄 특집 프로그램 '밀레니엄 슈퍼내각'에서 안철수를 제치고 '밀레니엄 슈퍼내각'의 사이버 부대 총사령관으로 지명되기도 했다. 참고로 그때 슈퍼내각 대통령은 세종대왕, 총리는 을파소, 국회의장은 율곡 이이, 법무장관은 백범 김구, 환경부 장관으로는 황희, 문화부 장관으로는 설총, 군악대 대장으로는 왕산악, 육참총장으로는 을지문덕, 해참총장으로는 이순신, 검찰총장으로는 조광조, 외무장관으로는 서희가 각각 지명되었다.
7. 은퇴 후
- 현재는 결혼하여 유부남. 국내에서는 유학을 떠났다는 뉴스 기사를 마지막으로 잊힌 사람이 되었는데, 일본 도쿄 한인타운인 신오쿠보 등지에서 PC방에서 일하는 이기석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2005년 무렵부터 있었다.
- 2013년까지 도쿄전기대학에 다니고 있었다는 정보가 있다. 싸이월드를 보면 도쿄 현지의 한인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2014년 스타 파이널포에 출연, 한국에 돌아왔으며 교회를 다니다 성당으로 옮겼다고. 웬 개종인가 싶겠지만, 사실 신앙과는 별개로 외국 생활을 하는 한국인들은 현지에서 인간관계를 위해 교회 등에 다니는 경우가 많다. 교회를 다닌 것도 원래 개신교 신자가 아니었는데 유학 중 다니게 된 것이다.
- 운전기사를 하다, 2016년 7월 학습지 업체에 입사, 2017년 현재 학습지 방문 교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언론을 통해 밝혀졌다. 90년대 스타크래프트의 '쌈장'... 이젠 '석쌤' 됐죠 - 중앙일보
- 2019년에는 학습지 교사를 그만두고 회사원이 되었으며, 2023년부터 프로그램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
- 그를 사칭하는 유저들이 간혹 강민, 김정민(게임 해설가) 등의 유튜버에게 유튜브각을 제공하기도 했다. vs 김정민, vs 강민
-
2023년
8월 22일
근황올림픽이 그를 만나 인터뷰한 영상이 공개되었다.
# 이 인터뷰를 통해
임요환,
홍진호,
김성현 등 후배 선수들의 개인 방송도 본다고 밝혔다.
졸지에 프로게이머 후배로 거론된 사람이 있지만 넘어가자
- 2023년 8월 23일 OGN의 온동회 라이브 방송에 출연하였다. 방송 중에 나무위키에 잘못된 내용이 있어 자신이 직접 조금 수정했다고 밝혔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로 대결한 적이 없는데 기록된 점 등을 수정했다고. #
- 2024년 12월 23일 근황올림픽에 재출연했다. 여기서는 인터뷰가 아닌, 근황올림픽 관계자와 스타크래프트 대결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종족은 테란이었으며, 컴퓨터가 낀 2대1은 가볍게 이기고, 3대1 대결도 얼마든지 이길수 있는 실력을 보여줬다. 영상
8. 여담
- 그의 말에 따르면 최초로 출전한 게임대회는 다크레인 대회였는데, 당시 우승자 상품으로 나온 PCS가 갖고 싶어서 참가해서 우승한 것이라 한다. 대회가 열린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로 스타크래프트가 막 발매된 1998년 봄이어서, 이기석이 프로게이머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Westwood Chat에서 세계 랭킹 11위까지 해본 적이 있다.
- 그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시에는 이벤트성으로 일본 스타크래프트 대회 우승자와 킹덤 언더 파이어로 대결을 하기도 하였다. 결과는 이기석의 압승.
- 온게임넷 초창기에는 임진록 2+ 조선의 반격 리그에도 참가했었다.
- 국기봉과 함께 바나나TV에 출현하여 성인 방송에 출현했다는 루머성 기사가 떠돌았었는데 이는 허위사실이며, 이기석이 카페와 네이버 지식인 답변에 스스로 해명하였다. 해당 지식인
- 책으로 '프로게이머를 꿈꾸며'라는 스타크래프트 공식 가이드북을 내기도 했다.
- 병역은 병역면제를 받았다. 사유는 야맹증. 이기석은 야맹증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밤만 되면 길가의 모든 불빛들이 전부 퍼져 보이고 좀만 더 어두워지면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다고 한다.
- 아이디인 SSamJang은 고추장과 된장을 섞은 조미료를 말하는 것이지만, 이 쌈장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도 간혹 있고, 있더라도 설마 게임 세계 챔피언이 그런 촌스러운 아이디를 쓸 것이라 생각 못해 싸움 짱 같은 의미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1]
후술할
야맹증으로 인해 병역면제 판정을 받았다.
[2]
SSamzang은 스타크래프트 ID가 아니라 코넷 아이디였다. 아마 코넷에 다른 누군가가 SSamjang ID를 먼저 쓰고 있었던 모양. 이기석이 나와서 유명해진 그 광고가 코넷 광고였기 때문에 광고상에 코넷 아이디가 나왔고 그래서 그것을 게임 아이디로 잘못아는 경우가 많았다.
[3]
인지도의 총량을 따져 보았을 땐 임요환이 압도적이지만, 임요환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부터 지명도를 쌓아왔고 프로게이머 최초로 지상파 방송 CF를 찍고 SBS 간판 토크쇼에 출연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즉, 당시 임요환이 게임을 즐기는 젊은 세대 한정의 슈퍼 스타라면 이기석은 기성 세대에게까지 '프로게이머'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각인시킨 기념비적 존재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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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승 2패 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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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유일한 1승이 우승자 기욤을 상대로 거둔 것이었고 그래서 만족한다는 인터뷰도 했다. 이 당시 선수들은 다 마찬가지였지만 이기석도 기욤에게 매우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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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신길재는 당시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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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50%가 넘었었다. 워낙 그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네임밸류와 인기 차이가 있었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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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열도 이 대회에 참가했으나 광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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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둘은 동갑내기 친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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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석 외에도 같은 시기에 데뷔한 1세대 프로게이머들은 2000년 봄을 기점으로 대다수가 은퇴하면서 같은 해에 데뷔한 2세대들에게 자리를 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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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AAA급 게임이 다수 출현하면서 게임의 수명도 길어지고, 개발 기간도 매우 길어져 한번 인기있던 게임은 몇 년씩 인기를 끄는 경우도 많지만, 당시만 해도 어지간한 게임의 수명은 1년 내외였다. 시리즈로 나오는 게임의 경우 1~2년 안에 후속작이 나오는 경우도 허다했고, 후속작이 나오면 대부분 그쪽으로 갈아탔다. 여담이지만 스타크래프트도 99년 당시 이미 브루드 워 이후 스타2가 나온다는 루머가 파다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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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래프트1은 94년 11월 출시, 워크래프트2는 95년 12월 출시, 더군다나 디아블로1 96년 12월 출시, 스타1 98년 3월 출시를 생각하면 이 당시까지 블리자드의 신작 출시 간격은 1년 밖에 되지 않았다. 이 당시 블리자드는 직원수가 수십 명에 불과한 작은 회사였음에도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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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리그 결승전 전날에도 행사를 뛰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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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패트리가 한국에 온 이유가 다른 나라에서는 더 이상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열리지 않게 되었고 한국에서만 리그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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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1 판이 끝난지 10주년이 되어가는 2022년에도 전 스타1 프로들 상당수는 아직도
개인방송으로 스타1을 하며 생업을 유지하고 있으며 오히려 현역 시절보다 더욱 이름을 알리거나 금전적으로 성업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프로게이머로서의 직업이 아닌 인터넷 개인방송 비제이를 생업으로 한다는 것을 호도해서는 안된다. 결국 본문처럼 평생 직업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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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존재하던 게임단은 60여 개에 달했다. 스타판 최전성기에도 게임단의 수는 10개 남짓이었음을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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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기석의 실력 하락은 많이 빠른 편이었다. 이미 2000년에 들어서서 실력 하락이 가속화됐고 게임큐 올스타전 준우승 정도를 빼면 별다른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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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시절에도 청오정보통신이라는 프로게임단 소속이었다. 이기석은 게임단 없이 혹은 스폰서 없이 활동한 적이 아주 극초만 일부 외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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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당연한 일이다. 당시 강도경도 퇴물이라는 말을 들었어도 여전히 바로 전 해에 스타리그 준우승을 한 상위급 저그 게이머였다. 2000년에 이미 몰락한 선수인 이기석과는 비교가 될 수 없다. 쉽게 말해 2007년 복귀해서 출전했던 김동수와 윤용태의 경기를 떠올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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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석과 강도경의 세대가 비슷하다고 적혀있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기석이 확실히 더 선배였다. 강도경의 등장시기는 이기석 세대에 이은 2세대 게이머 및 나중엔 1.5세대로 명명되었고 임요환이 성장하자 임요환 이전은 전부 1세대로 통칭하게 되면서 졸지에 같은 세대화 되어버렸지만 실제로 같은 세대로 분류하기 힘든 세대 차이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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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임요환을 1세대의 기준으로 삼게 된 후대에 와서 세대를 다시 정하다 보니 생긴 일이고 당시엔 임요환과 이기석은 세대차이가 많이 나는 선후배로 봤다. 실제로
이윤열이 아마시절 서울에서 첫 참가한 대회를 회고했는데, 자신은 32강에서 떨어지고, 임요환은 그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승자에게 주어진 혜택이 바로 이기석과 한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결과는 이기석이 이겼다. 당시 이기석이 더 앞선 세대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장 이기석도 자기 전성기 때는 신주영보다 뒷세대 게이머로 분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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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구,
박지호와 예선전에서 맞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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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따지면 은퇴 당시가 절대적으로는 더 잘하긴 했다. 문제는 다른 선수들 실력 향상은 그 이상이었기에 상대적으로는 훨씬 뒤쳐졌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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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기석은 N세대를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하나였다. 스타판이 아니라 시대의 문화 아이콘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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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넷 광고 하단에 아주 작은 자막으로 나오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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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드문 프로의식을 가졌다는
임요환도 처우는 별 다르지 않았다. 한빛소프트배 우승 후 슈퍼스타가 된 임요환을 소속팀은 이리저리 행사로 돌리기 바빴다. 당시 프로게이머는 그런 존재였다. 실제로 코크배 직전 임요환의 기량 저하는 심각해서 타 대회에서 라이벌 김정민에게 패하기도 했고, 코크배에서도 이전 대회와 같은 포스를 보여주지 못했으며 우승을 차지했으나 부커 논란까지 나왔다. 그럴만도 한게 확실히 대회가 재경기 시 게임 내 점수로 순위를 나누는 등 (당연하지만 종족전이나 빌드에 따라 점수가 나뉘는 경우가 많기에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역대급 무리수가 있었으며, 임요환이 이 대회에서 각 맵에서 전적이 2개에서는 전승, 2개에서는 전패를 하는 등 극과 극이었는데 전승을 한 맵 2개에서 비교적 경기를 많이 했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임요환이 2006년까지 상위권 테란으로써의 기량을 유지한 점은 분명히 경외받아야 한다.
[27]
이 영상은 녹화되어 VHS로 유통되기도 하였다. 당시 비디오 대여점에서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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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당시 이기석과 함께 장관 후보로 거론되었던 사람 중 하나는
안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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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스타우트배 AGAIN 2000 올드게이머 초청전에서 이승원, 김동준 해설 위원이
BBS테란의 원조는 이기석이라고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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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자드에서 제공하는 기본 맵이다.
[31]
본진 미네랄 뒤편의 언덕으로 배럭을 날려 생산한 마린으로 자원 채취를 방해하는 전략. 너무나 강력하기에 현재 멀티 지역의 언덕은 없애거나, 최소한 건물을 짓지 못하게 두거나 아니면 테란을 막아내는 쪽이 좋게 설계한다. 언덕 위에 건물을 앉혀서 뽑든지 특히 지형을 넘길 수 있고 사기적인 사거리를 갖고 있는 시즈 탱크 때문에 너무 유리해지고, 그렇게 빼앗은 멀티는 반대로 언덕 위에 다시 탱크를 깔고 곁에 다수 터렛을 짓는 등 다른 종족에 비해 지키는 데는 상대적으로 더 쉬워서 테란에게 매우 유리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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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엔 방송 경기라는 것에 큰 의미는 없었으나 이후 온게임넷과 MBC게임이 스타판 메인으로 자리잡으면서 의미가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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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이 더블넥의 시초로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지만 이기석이 이전부터 주로 사용하던 빌드였다. 다만 최진우와 국기봉에게 더블넥서스를 하는 족족 패배하면서 정석화에는 실패했고 이 당시 프로토스가 무한 확장식 저그에 힘을 못 쓰는 경향이 강했다. 99PKO 4위 했던 프로토스 김태목은 "더블넥서스는 좋은 전략이지만, 나는 사용하지 않는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 당시 프로토스는 하드코어 질럿 러시 아니면 더블넥이었다. 어쨌든 이기석은 본인이 자기 프로필에 자기 특기가 더블넥서스라고 적어놓은 적이 있었다. 이기석 현역 시절 방송국에서 내보냈던 공략 영상 중에 이기석의 더블넥서스 빌드가 포함돼 있었다. 당장 99PKO에서
최진우와의 대결에서도 선게이트 이후 포지를 짓는 변형더블넥을 사용했다. 다만 이기석 시대에는 전략의 하나였고, 강민은 심시티를 최적화하고 정석의 레벨로 보급했기 때문에 더블넥서스로 많이 알려진 것이다(물론 강민의 더블넥이 정석으로 보급된 배경에는 맵으로 밸런스를 맞추려는 당대의 도움도 컸다). 이기석 이후 저프전 주류는 한동안 2게이트 하드코어 질럿 러시였기에 '정석'까지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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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분 16초쯤 신주영 인터뷰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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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BGM은 브루드 워 트레일러에도 나온 '브루드 워 아리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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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분 44초부터